
오늘날 개신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개신교 내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존경은 고사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개신교의 꼴찌를 예상하는 일은 이제 내기거리도 안 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책임 또한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고서도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가 되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그 책임을 통감하여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크기'에 대한 집착, 남들보다 높아지고 커지는 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왔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겠다.
소위 '큰 목사님'과 '큰 스님'을 모시는 기준은 사뭇 다르다.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향과 실천으로부터 평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 곧 교회와 회중의 '크기'로 평가되기 일쑤이다. 내면의 크기가 큰 목사가 '큰 목사님'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교회의 크기를 키워놓으면 '큰 목사님'으로 불리는 종교, 그것은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한 종교상인의 집단이라고 밖에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목사직을 성직이 아닌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보는 세속의 시각을 두고, 남을 탓 할 이유가 없겠다.
반면 불교의 경우 큰 절의 스님이 ‘큰 스님’이 아니라, 정신의 크기가 큰 스님이 ‘큰 스님’으로 불린다. 성철 큰 스님이 ‘큰 스님’인 이유는 그분이 큰 절의 주지라서가 아니라, 그 정신의 크기에 있어 큰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목회자의 경우에는 너나할 것 없이 외형적인 '크기'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목회자들이 모여도 온통 '크기'에 관한 얘기뿐이다.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올해 몇 명이 새로 등록 했냐, 어떻게 전도(광고) 할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 관심에 동참하지 않거나 다소 비판적인 거리라도 취할라 치면 “교만하다, 복음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으며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처럼 정신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 들어서기보다 외형적인 ‘크기’를 키워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돌아본다. 건강한 아이가 키와 몸무게가 성장하듯, 건강한 교회가 적절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크기에만 집착하여 아이가 100 킬로, 200 킬로, 500 킬로그램이 되고, 심지어 메가톤급 아이로 성장해도 마냥 좋다고 박수치는 것은 크기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은 크기에 집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의 근본정신을 꼭 붙들고 그것을 잃지 않고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와 진실한 믿음의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이 우선이지 성장이 우선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교회성장을 위해 ‘꼼수'를 부려서는 머지않아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빈곤한 정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영혼으로는 깊은 바다와 같은 성숙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 크기에 집착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개신교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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