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신 교단 소속으로 본당 규모가 3068석인 대형교회 크기로 건축하고 이 자리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담임목사를 청빙했다. 부산 남부민동 소재의 초장동교회에서 20년 넘게 시무하던 박수만 목사를 전격 청빙해 갔다. 그러나 해가 갈수로 교인이 모이기는커녕 차츰 수가 줄어들게 됐고, 그 넓은 본당을 두고 작은 부속공간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지난 14일, 박수만 목사는 정년으로 수요예배시간에 원로목사 2년이 모자란 18년 만에 은퇴고별예배를 드리고 물러났다. 비전과 꿈을 안고 부임 했지만 부흥은 생각만큼 되지 않았고 부담이 컸다.
부산남교회하면 생각나는 것은 고 한명동 목사의 생생한 목회 현장이다. 기억에서 아른거리는 그의 카리스마 목회 철학을 떠올려본다. SFC<학생신앙운동>탄생과 고려신학교의 첫 출발이 중구 동광동에 소재한 부산남교회에서 초창기 기초를 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고신대복음병원 1만5천여 평 자리도 부산남교회 한명동 목사와 함께 천사당 박봉화 장로의 도움으로 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개척자 정신이 묻어 있는 부산남교회의 그 찬란한 역사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고 덩그러니 썰렁한 공간만 남은 교회당이 과거를 손짓하고 있다.
박수만 목사는 순복음교단에서 자랐다.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그 당시 가장 잘 나갔던 젊은 패기가 넘친 목회자였다.
부산남교회는 신축 당시만 해도 대형교회로 한강 이남에서 제일 큰 교회당이었다. 그런데 교회 신축의 후유증에 시달려야했다. 교회시무장로가 주일날 헌금을 압류하는 소동으로 장로 파직을 당하는 등 허망한 사태가 줄을 이었다. 고 신명구 목사의 시대가 지나가고 18년 전 제3대 담임으로 박수만 목사가 부임했다. 박 목사는 지난 14일,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은퇴하는 자리가 되었다. 교회 당회는 사택도 내려놓고 은퇴위로금으로 일금 3억 원으로 예우했다. 박 목사는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사역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모든 은총에 감사한다”고 퇴임인사를 말하고 떠났다.
부산남교회 역사에 큰 오점은 대형교회로 신축하기 위해 연제구 현재의 장소로 이전한 것, 두 번째는 부산제일남교회로 교회가 분리된 사건을 꼽힐 수 있다.
무모한 교회 신축을 교훈으로 삼아 크게 지으면 교인들이 모인다는 징크스는 여지없이 깬 가슴 아픈 모델이다.
신이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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