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실천을 통한 삶으로 복음 증거 하는 공동체
-청소년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큰바위얼굴장학회 설립
-강지원 변호사, 김영란 교수, 천종호 판사 등 각계각층 인사 참여
-청소년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큰바위얼굴장학회 설립
-강지원 변호사, 김영란 교수, 천종호 판사 등 각계각층 인사 참여
ㆍ조건 없는 사랑, 실천을 통한 복음 증거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눔공동체를 형성했다. 지역의 유지들로부터 십시일반 후원을 받아 실제적 혜택을 주는 지역 민간사회안전망운동을 전개했다. 이 나눔공동체는 나눔을 함께 노력해야할 사회적 과제요, 이 시대의 새로운 희망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의 실천을 위해 지난 1999년 설립됐다. 이 공동체가 (사)나눔플러스(총재 강지원 변호사, 이사장 이현식)다.
‘다함께 행복한 세상 만들기’를 비전으로 내세운 (사)나눔플러스의 목적은 나눔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이 더하게 하고, 나눔으로 사랑을 보여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전국 16개의 지역본부와 센터는 지역사회의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차상위계층을 지원하고 있다. 자발적 나눔을 통해 조건 없이 활동으로 반찬나눔, 무료급식, 청소년멘토링, 지역아동센터, 노인요양원 및 방문요양, 교도소교화활동 등 각 센터 마다 고유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ㆍ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큰바위얼굴장학회
부산지역본부장 김성우 장로(기쁨교회)는 지난해 12월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을 위해 ‘큰바위얼굴 장학회’를 설립했다. 장학회는 부산지역본부 주관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부산 극동방송국의 추천을 받아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희망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성우 장로는 “지역사회에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장학금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장학회를 만들었다. 이 장학회는 부산에만 있다”며 “장학금은 청소년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모아진 후원금은 오로지 장학금으로만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부산지역본부장 김성우 장로(기쁨교회)는 지난해 12월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을 위해 ‘큰바위얼굴 장학회’를 설립했다. 장학회는 부산지역본부 주관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부산 극동방송국의 추천을 받아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는 희망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김성우 장로는 “지역사회에 어려운 가정의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장학금을 체계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장학회를 만들었다. 이 장학회는 부산에만 있다”며 “장학금은 청소년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모아진 후원금은 오로지 장학금으로만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큰바위얼굴장학회는 임미영 운영위원장(센텀조은병원 원장)과 송홍안 심시위원장(동아대 교수)을 중심으로 대학 교수와 의사, 기업가 등 지역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청소년들을 위한 연2회 4천여만원 규모의 장학사업을 계획, 추진하고 있다.
부산지역본부는 비행청소년의 대부라 불리는 천종호 부장판사와 사역을 함께하고 있다. 천 판사가 지원하는 쉼터에 생필품과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사역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또 부산지역 인지중학교와 부산전자 공고에서 각각 8명과 5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으며, 최근 부산국제금융학교에 민간단체로는 처음으로 부산가정법원을 통해 장학금을 전달했다. 오는 11월에도 장학금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성우 장로는 다양한 곳에 사회안전망을 구축해 청소년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후원시스템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ㆍ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평신도 본부장을 맡았다는 김성우 장로는 “세상에서 방황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소망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세상에서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김성우 장로는 “예수님을 믿기 전 사도바울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 누가 전도를 하거나 식사기도를 하면 예수가 나에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며 너희나 잘 먹고 잘 살라고, 재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IMF 때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굉장히 어려워졌는데, 그때 나쁜 마음을 먹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었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깨어난 김 장로는 갑자기 교회를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1980년대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때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시며 예수를 믿게 됐는데, 늘 전화통화에서 교회를 가라고 하셨다. 한국에 나오셨을 때 내 차에 성경책을 두고 가셨는데 그 책을 들고 교회를 찾아갔다”는 김 장로는 정작 교회를 가고 싶어도 어떻게 가는 건지 몰랐다고 한다. 김 장로는 “오래전 교회를 다니던 부하직원이 생각나 그 친구에게 교회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며 기쁨교회를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개척교회로 작은 교회였지만 처음 교회를 들어갔을 때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가슴이 떨렸고 소름이 돋았다”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김 장로는 그때부터 그저 목사님만 붙잡았다. 말씀을 배우면서 하루 3~4갑씩 피우던 담배와 술을 끊었다. “담배가 독가스처럼, 술이 휘발유처럼 느껴졌다. 집에 쌀도 없을 만큼 힘든 형편이었지만 예수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다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도 전도했다”고 말했다.
주위에서는 예수를 믿더니 제정신이 아니라며 비난했다. “당시 사업의 부도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냉동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 고3이던 아들이 사고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대학을 못 갔다. 군대도 갈 수 없을 만큼 다쳐서 폐인처럼 살았다. 딸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꿈을 제대로 펼치질 못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감사한 것은 그때 교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전도도 많이 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돈을 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길을 선택할 것 같아 포기했다. “주위에서 막노동이라도 하라고 했지만 직장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 2008년 담임목사님이 봉사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며 요양보호사를 알려주셨다는데 마음에 이끌림이 있었다”면서 가진 것이 몸 밖에 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게 됐다. 첫 월급을 받아 난생 처음으로 십일조를 냈다. 수입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고 2008년 기쁨방문요양센터를 시작했다.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길 기도하며 일했다.
김 장로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면서 “육신의 생각대로 따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현재의 처지와 형편대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작은 것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크게 갚아 주셨다. 자녀들을 잘 되게 하셨고 사업장을 확장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실천 방법을 찾으면서 나눔플러스 부산지역본부장을 맡게 됐다.
김성우 장로는 “믿지 않는 사람,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족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믿는 우리의 삶이 변하고 또 지역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자”고 당부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평신도 본부장을 맡았다는 김성우 장로는 “세상에서 방황하다 예수님을 만나고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소망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세상에서 방탕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김성우 장로는 “예수님을 믿기 전 사도바울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 누가 전도를 하거나 식사기도를 하면 예수가 나에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냐며 너희나 잘 먹고 잘 살라고, 재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IMF 때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굉장히 어려워졌는데, 그때 나쁜 마음을 먹고 수면제 수십 알을 먹었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깨어난 김 장로는 갑자기 교회를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1980년대에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때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시며 예수를 믿게 됐는데, 늘 전화통화에서 교회를 가라고 하셨다. 한국에 나오셨을 때 내 차에 성경책을 두고 가셨는데 그 책을 들고 교회를 찾아갔다”는 김 장로는 정작 교회를 가고 싶어도 어떻게 가는 건지 몰랐다고 한다. 김 장로는 “오래전 교회를 다니던 부하직원이 생각나 그 친구에게 교회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며 기쁨교회를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개척교회로 작은 교회였지만 처음 교회를 들어갔을 때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데 가슴이 떨렸고 소름이 돋았다”며 그때 느꼈던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김 장로는 그때부터 그저 목사님만 붙잡았다. 말씀을 배우면서 하루 3~4갑씩 피우던 담배와 술을 끊었다. “담배가 독가스처럼, 술이 휘발유처럼 느껴졌다. 집에 쌀도 없을 만큼 힘든 형편이었지만 예수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다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내도 전도했다”고 말했다.
주위에서는 예수를 믿더니 제정신이 아니라며 비난했다. “당시 사업의 부도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냉동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때 고3이던 아들이 사고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대학을 못 갔다. 군대도 갈 수 없을 만큼 다쳐서 폐인처럼 살았다. 딸로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꿈을 제대로 펼치질 못했다. 기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감사한 것은 그때 교회를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전도도 많이 할 수 있었다”면서 당시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돈을 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길을 선택할 것 같아 포기했다. “주위에서 막노동이라도 하라고 했지만 직장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중 2008년 담임목사님이 봉사를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며 요양보호사를 알려주셨다는데 마음에 이끌림이 있었다”면서 가진 것이 몸 밖에 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요양보호사로 활동하게 됐다. 첫 월급을 받아 난생 처음으로 십일조를 냈다. 수입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고 2008년 기쁨방문요양센터를 시작했다.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길 기도하며 일했다.
김 장로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면서 “육신의 생각대로 따르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현재의 처지와 형편대로 섬기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 작은 것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크게 갚아 주셨다. 자녀들을 잘 되게 하셨고 사업장을 확장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는 실천 방법을 찾으면서 나눔플러스 부산지역본부장을 맡게 됐다.
김성우 장로는 “믿지 않는 사람,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족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믿는 우리의 삶이 변하고 또 지역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자”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