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28(화)
 
1. 동물 실험: ‘원숭이에게 미사일 쏘기’
“왜 사람들은 건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진보’라고 치부하는가?” (간디)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어간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한바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고, OECD 국가 중 유기견 수출 1위(고아 수출 1위일 뿐만 아니라!)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동물들이 살기에 대한민국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물은 법적으로 철저히 ‘물건’이다. 물건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의 ‘물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동물은 소유와 점유의 객체가 되고, 그 권리자인 인간에게 처분권이 있다. 동물은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처분되고 심지어는 필요가 없으면 폐기된다. 2010년 11월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뒤 매몰 살 처분된 가축 수가 무려 350여만마리에 달했다(부산 시민 인구가 이 정도도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 부동액, 브레이크액, 표백제, 탈모제, 눈 메이크업, 잉크, 선탠오일, 손톱 광택제, 마스카라, 헤어스프레이, 페인트, 지퍼 윤활유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많은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은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하여 실험실에서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시카고 대학의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는 실험’, 오레곤 대학의 ‘갓 태어난 생쥐의 앞다리를 잘라 그럼에도 자기 몸을 단장하는지 관찰하기’, 하버드 대학의 ‘사냥개에 플루토늄 주사하기’, 옥스퍼드 대학의 ‘10일 된 새끼 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 상실의 영향에 대해 관찰하기’,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쥐의 두뇌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주사하기’, 미 국방부의 ‘원숭이에게 신경가스, 청산가리, 방사능, 총알 혹은 미사일 쏘기’, 미 농무부의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 태아의 목을 자르고 그것이 임신한 암퇘지의 인체 화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기’, GM의 ‘자동차 충동실험에 돼지나 원숭이 이용하기’ 등은 분명 ‘인류 문명의 진보’와 ‘동물의 고통’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곧, 인류의 진보는 동물 학대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2. 동물해방과 동물신학 탐구: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 종차별도 극복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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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라고 말하는 호주 출신의 도덕철학자이자, 동물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 Singer)는『동물해방』(인간사랑, 2006)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 분야의 바이블인 이 책은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동물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물이 단지 인간의 종(species)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반대함으로 종간의 원칙적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서구 역사에서 종차별주의의 발생사적 근원을 찾으면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문명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은 콜로세움 등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사람들의 호기심 거리와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학살했다. 이러한 경기는 시민들에게 먹을 양식을 배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행사였다고 하니 가히 로마의 동물학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동물과 함께 학대당했던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인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인간과 다른 종간의 차별을 공고히 한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싱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었으며, 그리하여 로마인의 제한된 도덕적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하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에 대한 처우와 관련시켜 생각해볼 때, 그러한 교의는 구약성서에서의 인간 아닌 동물들의 낮은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저하시켰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다른 종을 지배해야 한다고 쓰여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는 다른 종들의 고통에 대한 희미한 관심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동물에 대한 가혹 행위에 반대하는 어떠한 명령도 찾아볼 수 없으며,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권고 또한 찾아 볼 수가 없다.”
종차별은 사실상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과 ‘성차별(sex discrimination)’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종차별이 도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잠재하고 있는 지적 능력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가령 유색인종은 백인에 비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오해처럼 종차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다른 종(동물)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 그들보다 지적 능력이 탁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에 비해 하등동물이니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동물 학대의 이유는 첫째,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전제이며, 둘째는 ‘동물은 도덕적 권리의 합법적 주체가 아니라’는 전제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전제에서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차이는 ‘특별한 도덕적 배려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차별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도 그러하듯,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 능력 운운하며 그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인정하면 무뇌아로 태어난 아기(혹은 치매 노인들)는 침팬지보다 그 지능이 못하니 그 생명권을 연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설령 좀 더 나은 지적 능력을 소유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나은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인간에게 인간 아닌 존재를 착취할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도덕 지평 확대의 역사이다. 여성과 흑인,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혹은 소수 종교인들과 동성애자로 그 도덕적 배려와 책임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성과 인종을 넘어 종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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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권 신학의 핵심인 ‘관대함의 윤리(ethics of generosity)’를 부르짖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자, 기독교 채식주의자인 앤드류 린지(A. Linzey)는『동물신학의 탐구』(대장간, 2014)에서 싱어가 말하는 연약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는 ‘평등한’ 고려가 아니라, ‘더 큰’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싱어의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며 동물의 권리 신학인 동물신학을 전개하고 있는데, 동물과 같은 약자에게 ‘도덕적 우선순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린지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에서 내가 견지하는 이론적 입장은 약자와 상처 입기 쉬운 자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3. 예수와 동물들: “노새를 때리지 마라. 자비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사상은 동물 복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1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초기 기독교 외경 문학은 종종 예수와 동물과의 관계에 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콥트교회의 문서조각은 ‘노새를 치유하신 예수’의 모습을 들려준다.
“그 일은 주님이 도시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산을 넘어 가실 때에 일어났다. 그들은 산에 당도했고, 올라가는 길은 경사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짐을 실은 노새와 함께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쓰러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노새를 때렸고, 노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남자여, 왜 당신은 당신의 동물을 때리는가? 당신은 이 동물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자 이 남자는 대답하여 말했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놈을 때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놈은 나의 재산으로,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나를 알고 이 사실에 대해 알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몇몇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가 노새를 어떻게 샀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노새가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 신음하며 울부짖는지 듣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아닙니다. 주님, 그놈은 신음하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슬퍼하며 외치셨다. ‘노새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께 하소연하며 자비를 구하며 우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러나 이 노새가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게 만든 자에게는 세 배나 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동물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셨다. 그러자 노새는 일어났고 상처는 치유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남자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는 노새를 때리지 마라. 그러면 너도 자비를 얻을 것이다.’” (곱트교회 문서조각)
마태복은 5장 7절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긍휼의 대상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물들을 소개한 ‘유사 마태복음서’도 있다. 인용해보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삼 일째 되던 날, 마리아가 동굴에서 나와서 마구간으로 들어가 그 아이를 구유에 눕히자 황소와 당나귀가 그에게 경배했다. 그럼으로써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황소는 그의 주인을 알고 당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리하여 그 동물들, 황소와 당나귀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그분께 끊임없이 경배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예언자 하박국이 말 한 것이 성취되었다. ‘두 동물 사이에서 당신은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셉은 삼 일 간 마리아와 함께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 (유사 마태복음)
아기 예수의 가족이 사막으로 들어갈 때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다른 동물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구절도 있다. 계속해서 유사 마태복음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처음에 마리아가 그들을 둘러싸는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여러 야생 짐승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그녀의 얼굴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들은 어머니를 해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저를 서둘러 섬기려고 오는 겁니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냈다. 사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속 걸었고, 그들의 짐을 옮기는 짐승들과 황소들, 당나귀들과도 함께 걸었다. 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자들은 이 중 단 하나도 해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들이 유대로부터 함께 있다가 데려온 양들 사이에서 온순했다. 양들은 늑대들 사이를 걸었으며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동물에 의해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라는 예언자의 말이 성취되었다.” (유사 마태복음)
 
4.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세상: ‘사자가 소 여물을 먹는 하나님 나라’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뽐내지 마십시오.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가지고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통과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그러나 역지감지(易地感之)도 필요하다. 사지는 머리로 하지만, 감지는 가슴으로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단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사자가 소가 먹는 풀을 뜯어 먹는 것’,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지식지(易地食之)’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돼야 정말 조화로운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이러한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생명 존중의 사상을 실천했다. 까치를 위해 감을 다 따지 않은 ‘까치밥’, 음식을 먹기 전제 조금 떼어내 뭇 생명과 더불어 먹고자한 ‘고시래’,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새가 먹고 다른 한 알은 땅 속 벌레가 먹게 한 농부의 배려, 길을 나설 때 미리 지팡이로 땅을 쿵쿵 굴려 벌레들이 도망하게 한 나그네의 세심한 배려, 하루 수십 리씩 걸어야 하는 소들을 위해 소장수들이 소에게 신겨준 ‘쇠짚신’, 작은 생물이라도 해할까봐 뜨거운 물도 식혀 버렸던 어머니들의 살뜰한 살림살이, 소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은어를 사용하며 한순간에 소의 명줄을 끊고자 노력했던 백정들의 우직한 배려, 한 집안에서 더불어 먹고 사는 존재들을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생구(生口)라고 불렀던 포용적인 마음,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실천했던 채식위주의 삶 등.
생각해보라.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들을 찾으러 떠났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것처럼(사무엘상 9장 참조), 동물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혹시 알겠는가!
최병학 목사2.JPG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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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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