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증 목사는 어떤 인물인가?
1930년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86세 고령이지만 그의 정신적인 나이는 아직 60대 초반의 활발한 성격을 소지한 전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이다. 그야말로 한국교회 안에 두 번째라면 서러워할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가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 서울대 예과를 거쳐 사회학과에 입학했으나 좌우대립으로 194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에즈베리대와 에즈베리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이승만 박사가 나온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에큐메니칼운동 연구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부친은 한국전쟁 때 입북된 초대 성결교 총회장 박현명 목사다. 그는 1958년 귀국한 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1961~1967)를 거쳐 1967년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실무자로 활동했다. 1980년 민주동지회 사무국장, 1981~1990년 아시아기독교교회협의회(CCA) 부총무, 총무로 맡아 활동하였고 국내 민주화 운동을 해외에서 지원하는 것은 물론 남북교회 교류에 물꼬를 튼 1984년 일본 도산소회의, 86, 88년 스위스 글리온회의 등의 실질적인 산파역을 맡았던 분이다.
육순을 맞아 1990년 재차 귀국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에 취임, 연구와 에큐메니칼 강의를 하고 다녔고, 1991년 여성신학자인 부인 이선애 목사와 갈현교회를 개척하여 공동목회(팀목회)를 했다.
그의 부인을 병중에서 간호하면서 뜨거운 순애보 같은 깊은 사랑의 부부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품에서 결국 하늘나라로 보낸 후 지금까지 홀로 그 옛날 주택의 서울 녹번동에서 살고 있다. 그의 집 대문에는 아직도 한자로 쓴 박상증-이선애 공동문패가 나란히 걸려있을 정도로 아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스며져 있다.
그는 한 때 1996년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KCF) 이사장과 1997~2007년 참여연대 공동대표 그리고 1999~2012년까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대통령 총선 때 “내가 왜 유신 두목 딸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조선일보 보도에 부정도 않고 오죽했으면 그렇게 했을까?”라는 긍정을 준 것이 결국 중도 좌파 인사들이 대거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데 큰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김형오 장로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경남 고성읍 출생으로 부산고등학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정치인이다. 그 집안은 독실한 불교 집안인데 기독교인 사모가 시집 와서 부산 영도교회에 출석, 안수집사를 거쳐 서울 신일교회(통합)에 시무장로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고성읍에서 행정사법법무사로 행정면이 밝아 늘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바로 위에 있는 형 김형래는 마산고등학교 21기로 부산대 법대를 거쳐 부산지방법원 행정계통 공무원으로 있다가 현재 부산 서구 부민동에서 사법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978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 중 강영훈 외교안보연구원 원장에게 발탁 돼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가면서 청와대 비서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2004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2006년에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맡았다. 2008년 7월~2010년 6월까지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재직했다. 김 의장은 새누리당에 대한 실망감을 갖고 탈당한 상태다.
한때 영도에서 국회의원으로 첫 출마할 때 필자와 같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형님, 좀 도와주십시오” 할 정도로 같은 기독교인으로 신앙적 교감이 있었던 사이다.
매우 온화한 성격이나 불의와는 타협을 좀처럼 안하여 포용적이면서 한가지 일을 선택하면 추진력있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 불교 집안에 기독교 장로가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로 부산 영도에 영도교회 안수집사로 있다가 교회가 분리하는 바람에 새생명교회로 옮겨 다니다가 서울 신일교회로 옮겨 신앙생활 하다가 장로가 되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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