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서구 대신동 부산대의 판잣집 건물로 잘생긴 벽안의 미군 장성이 들어선다. 윤인구 부산대 초대총장의 초청을 받고 온 위트컴 미군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다. 반갑게 위트컴을 맞은 윤인구는 집무실에 붙여 놓은 그림 한점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장군, 내 그림을 한 점 사주시오”라고 말하자 “무슨 그림 말이요?”라고 위트컴이 말했다.
윤인구는 “이 땅의 꿈과 교육비전이 담긴 내 그림이오”라고 말하자 “하하, 그거 흥미롭군요. 좋소. 내가 그림을 사겠소”라고 위트컴이 말했다. 폐허가 되다싶이하고 피난민들의 집합지인 부산에 가장 위대하고 기념비적인 ‘예술작품’이 부활되는 순간이었다. 그 그림은 부산대 장전동 캠퍼스 배치도였다. 대학문을 열었으나 캠퍼스 부지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던 윤인구는 위트컴의 통큰 수락에 감격했다. 윤인구가 요구한 캠퍼스 부지는 금정구 장전동의 산지 50만평 일대 임야를 말했다. 어마어마한 면적이었다. 1952년에 준공한 서구 대신동의 부산대 건물 면적이 1566평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1000배 가량 넓은 땅이었다.
위트컴은 곧바로 정부와 경남도지사를 설득했고 장전캠퍼스 165만㎡(50만평)가 무상 양도되는 꿈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캠퍼스 시설 공사비 25만 달러를 대한미군원조처(AFAK)를 통해 자금을 지원 받게 되었다. 미군 제434공병부대는 온천장~부산대 길이 1.6km의 진입도로를 뚫어주었다.
오늘날 국립 부산대학교는 이렇게 한 크리스천 교육사역자의 꿈에 의해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그것도 개인을 떠난 이 민족의 교육대계를 위해 인재양성의 기틀을 마련한 계기가 된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보잘 것 없는 한 기독 청년의 기도제목이 그림 한장으로 군수기지사령관을 감동시킨 것은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으로 믿는다고 훗날 윤인구 목사는 말했다.
위트컴(1894~1982) 사령관도 부산을 사랑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한 크리스천이고, 그의 묘지는 지금 부산UN묘지에 안장됐다. 미군 32명 중 유일한 장성이다. 그는 한국인 여성(한묘숙 여사, 91세)과 결혼해 윤인구 총장과 함께 부산대 건설을 이뤄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며 성령의 도움으로 청년의 꿈이 실현됐다.
윤인구 박사가 프린스턴신학대학에서 공부한 것도 다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하신 과정이기도 했다. 문제의 그림은 시골에서 흔히 보이는 언덕 위의 교회 종이었다. ‘부산대 동래캠퍼스 평면도’라는 그림을 종 모양의 그림 안에 부산대 캠퍼스가 그려져 있다.
“하나님이 천상을 가꾸듯 부산대를 천상화원으로 가꿨다. 집에서 주먹밥을 뭉쳐서 현장에 나오고, 인부들과 함께 국수를 말아먹고 군용침대에서 주무셨다.” 효원교사를 지을 때 함께 일했던 전 부산대 교수 오점량 씨(78세)의 얘기다. 오늘날 남아있는 염원한 웅비의 탑과 교기의 독수리상은 윤인구가 창안한 것이고 부산대 구석구석에 윤인구의 평소 꿈꾸던 그의 꿈의 비전과 정신이 요소요소에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영적아들이었던 정권섭 장로(소정교회 원로)는 정직과 믿음, 교육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도 따라 올 자가 없을 만큼 대단했다고 말했다.
윤 박사는 부산대에서 15년간 근무했다. 61년 연세대 총장으로 부임해 4년간 근무했다. 80년 중풍으로 눕기까지 부산신학교(지금 부산장신대학교), 영남신학교(지금 영남신학대학교) 교장 등 교직자로 살다가 1986년 1월 25일 하늘나라로 갔다.
훗날 윤인구 박사는 전재산 2억 원을 부산대 후진양성을 위해 장학기금으로 희사하고 인덕기념관이 대학안에 세워져 있다. 그와 그의 부인 이름을 한자씩 딴 인덕기념관. 그는 영원한 이 땅의 교육자이자 (광복교회를 일본인으로부터 인수받아 목회) 목회자이자 애국애족한 민족의 지도자요 부산이 낳은 교계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 정도다.
(참고문헌: 국제신문 새로 쓰는 인물사 2016.3.7.일자)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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