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병원과 인연
복음진료소가 영도 제3영도교회 천막과 교회 창고에서 시작 되었다. 그 당시는 전시 중이라 무료진료한다는 소식에 부산의 수많은 피난민들 속에서 화제가 되어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가 1951년 6월 21일 부산 남항동2가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복음진료소를 세운 당시 직원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 전영찬 선생이 모금 한 돈5천 달러로 수술 용구를 구입해 겨우 진료할 수가 있었고 전영찬 선생은 미군 하야리아부대에 가서 박영훈 학생을 동행하여 크리스마스 실과 그림엽서를 직접 제작하여 미군들에게 판매, 모금을 계속 할 수가 있었다. 장 박사가 그 해 7월 1일 복음진료소를 개원한 후 그의 명성을 듣고 피난민들이 인산인해로 도저히 진료를 감당하지 못해 1개월 후 영도 영선동 180번지 약 210평의 공지에 천막 3개를 치고 진료를 이어 나갔다. 그때 함께 도왔던 서울 의전 출신의 차봉덕 의사와 후배의사 전종휘 박사가 내과를 진료하는데 합류했다. 그 후 외과 담당 이상기 선생과 경북의대 학생이었던 박영훈 학생은 방학기간동안만이라도 심부름도하고 장 박사를 옆에서 도왔다.
복음진료소는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운 사람을 살리고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눠주는 병원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진 그 사랑을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나눠주는 참으로 병원 같은 병원 바로 기독병원의 역할을 다하는 복음 그 자체이었다.
한국전쟁의 소식을 듣고 어려운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모금한 5천 달러의 거금으로 병원 기초를 놓았던 전영찬 선생은 병원 총무일을 보는 중 해외 및 국내 모금에 사소한 잡음으로 의심받는 일이 생겼다. 전 선생은 더 이상 의심받아가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잠시 접어 두었던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다시 출국을 하고 말았다.
고신 대한기독교경남 구제회는 사람을 부려먹고는 의심과 의혹으로 전영찬 선생을 섭섭하게 한 것과 그가 세상을 뜨기까지 교단 차원에서 그 분을 불려다가 사과하거나 감사장을 준 적이 없다며, 훗날 그의 아들 전 교장이 교육협력위원장이 됐을 때 법인이 관선회복을 위해 찾아 간 교단 인사들에게 그런 말을 실토한 일이 있었다.
■복음병원 부지 확보의 공로자는
복음병원의 부지를 확보한 이면에는 부산남교회를 시무했던 한명동 목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한 것이다. 지금의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위치 한 1만3천평 중 병원 부지 5천평, 신학교용 교사부지 8천평의 땅 구입은 남교회를 시무하던 천사당 주인인 박봉화 장로와 삼일교회 주영문 장로, 주태화 장로, 이성태 집사, 김선애 집사의 헌금이 큰 몫을 작용한 것이다. 이리하여 1951년 6월 영도에서 개원한 복음의원이 만 6년만인 1957년 6월 1일 송도로 옮기게 되고 천막병원에서 콘크리트 벽돌 병원으로 단장한 종합병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박손혁 목사)가 주체가 된 복음의원이 비영리 의료법인으로 병원 개설 허가를 받았고 직원은 도합 39명이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재단에 재산을 편입시켜 명실 공히 교단 병원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복음간호학교 설립, 장 박사 초대교장이 되어
병원에는 절대적인 간호사가 필요하여 1968년 3월 3년 과정으로 복음병원 부속 간호학교로 설립 허가를 문교부로부터 받았다. 그때 초대 교장이 장기려 박사였다.
병원은 거듭 발전하여 1966년 7월 2일 보건의료기간으로 지정 받았고 67년 12월에는 레지던트 수련병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 목사는 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가 퀘이커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와 국내에는 김교신, 함석헌 선생을 불러다가 한달에 한번씩 강연하는 등 고신교단의 개혁주의와는 정반대의 신앙노선으로 가는 장 박사를 자진 사임케 하려고 했다. 그 방법으로 병원 경영이 어려우니 곧 병원 부도가 날 판국인데 어찌 하겠는가로 압박하자 장 박사는 미련 없이 병원장 사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때 제일영도교회 출석하는 장 박사의 제자 박영훈 의사를 후계자인 제2대 병원장으로 세우게 된 것이다.
■복음병원 분규 사태, 부산의대와 경북의대간의 대결
미국 하버드에서 간연구로 수학하던 박영훈 의사를 귀국하도록 장 박사가 지시 하는 바람에 서둘러 귀국하기에 이르렀다. 1973년 병원 안에는 부산대 출신 의사 채종묵, 김훈, 박영식, 김재만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의국을 중심하여 진료를 거부하고 경북의대 출신 박영훈 제일외과 과장은 물러가라며 스승을 배신한 제자라고 주장했다. 소위 의료진료 거부 사태에 이르자 당시 부산지검에 첫 부임한 박철언 검사가 이들을 선도한 의사들을 모조리 구속하게 되었다.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도 몇몇 시니어급 의사들을 입건하게 되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박영훈 의사는 침례병원 외과과장으로 자리를 옮겨 겨우 진정이 되었다.
1976년 1월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있자 침례병원에 있는 박 과장을 불러 제2대 원장으로 임명한 것이 당시 법인 이사장 이경석 목사이다. 장기려 박사는 명예원장으로 추대하고 박 원장이 1976년 6월 25일 제2대 병원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편 25년간을 오로지 병원 일에만 전념 한 인간 장기려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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