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아래 편지는 미국에 있는 조카(장혜원)가 이북에 가서 직접 살아있는 아내 김봉숙 여사(80대)가 친필로 조카를 통해 보내 온 육필 서신이 바로 순애보를 연상케 하는 편지내용이다. 
김봉숙 사모의 답장>> 기도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만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아이들이 힘든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마음속의 당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하면 어떠냐고 응답해 주셨고, 저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잘 자란 우리 아이들, 몸은 헤어져 있었지만 저 혼자서 키운 것이 아닙니다. 꿈속의 당신이 무의촌에 갔다 오면서 주머니 속에서 쌀 봉투를 꺼내 주시면 저는 하루 종일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에서도 당신답게 사신다는 것을 혜원의 편지를 받기 전부터 저는 알았습니다. 이산 가족들과의 만남이 하루 빨리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십이 넘도록 살아 있음이 어쩐지 우리가 만나게 될 약속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썩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필 때에 오려나
일구월심 나의 맘에 그대 마음 간절하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언제나 도라 오려나
암만 말하여도 안타깝지만 하여 이만하고 당신과 기용이네 가족이 건강하여 만나게 될 그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으며 부디 옥체 건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 평양에서 김봉숙 올림 -

▲춘원 이광수씨의 ‘사랑’ 모델로 삼아
장기려 선생은 평양북도 용천군 양하면 입암동에서 1909년 7월15일에 유복한 믿음 좋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교육을 받고 송도 고보 3학년 때부터 자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삶을 살겠다며 그 때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평생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 후 경성의전에 입학하여 졸업시는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과학에 명성이 높은 백인제 선생의 조수와 제자가 되었다. 이때 춘원 이광수가 의전병원에 입원하여 신장 절제수술을 백인제 선생의 집도로 수술을 받고 장기려 선생이 이때 춘원을 도와주면서 인술을 사랑으로 섬기는 헌신을 보고 춘원이 훗날 ‘사랑’이란 소설의 주인공 모델을 장기려 선생을 ‘안민’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 후 장 선생은 일본인 기리하라 교수가 나고야 의과대학교수로 전근되어 간 계기로 나고야 의과대학에서 1940년 학위를 받았다. 백인제 스승의 추천으로 대전 도립병원 원장으로 가게 되었으나 가지 않고 기독교 병원인 평양에 있는 기홀병원 외과과장으로 갔다.
해방이 되자 평남 인민위원회 위생과장을 거쳐 제1인민병원 원장 겸 외과과장이 되었다. 

▲간첩 누명 쓴 일
훗날 월남 한 후에 남한 특공대로부터 간첩 누명으로 일주간 조사와 취조를 받았을 때 한상동 목사와 미국인 마두원 선교사가 선처를 호소함으로서 두 분의 신변보증과 신변인수를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1951년 6.25가 발발하자 국군이 북진하자 국군이 평양에 들어오고 국군을 야전 병원에서 군의관과 함께 진료하였다. 마침 수요일 오후 교회에 가서 장기려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함께 예배 드리던 미군 군의관이 같이 남하하자고 권유하여 짚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1950년 12월 3일 오후 집에 남아있는 둘째아들 가용이만 데리고 차에 탔다. 개성을 거쳐 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한 날이 바로 12월 18일이었다. 장 선생은 부산에 있는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돕고 있었다. 제3육군병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던 장 박사를 만나러 온 한상동 목사와 전영찬 선생이 찾아왔다. 전영찬 선생은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 도중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모금운동과 유엔미사원호처,<uncac>에서 병원을 지으면 약품을 제공하겠다는 말과 함께 장 박사를 설득하게 되었다. 불우한 사람들을 진료한다는 말에 장 박사는 하나님 앞에 서약할 때 불쌍한 내 민족을 위해 헌신 하겠다는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즉석에서 허락한 것이 복음병원과 깊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복음병원의 시작이 그때부터였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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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인간 장기려 박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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