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28(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1.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쟁이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과 욕망의 표출,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생존하려는 인간 의지의 분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욕망과 의지의 실험장이자 대결장이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전쟁과 함께 폭력이, 폭력과 함께 변절자들이, 변절자들과 함께 꼭 희생이 따른다.
동시에 전쟁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군이 ‘군대의 효율성 때문에 군위안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교수는 군위안부는 사기 진작도 진작이지만,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병사 하나가 성병에 걸리면 그 한 병사만 기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이를 들쳐 엎고 가야 할 여럿이 있어야하기에 성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네댓 명의 전투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병을 방지하면 몇 십만 명을 더 징병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보는 거죠. 그런데 남자 몇 십만을 징병하는 대신에 총 들고 싸울 일 없는 여자 몇 십만을 들여보내면 군대를 100만 명, 200만 명 더 징병한 셈이나 마찬가지겠죠.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다가 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특강: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성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3-6)에서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99마리 양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효율성 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기면(지면 정반대이겠지만) ‘땅과 재물은 물론이고, 노예를 획득할 수 있는 고대 전쟁’으로부터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인류의 삶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곧, 인류의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성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사, 이후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예수 당시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이다. 따라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다음의 말은 타당하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 68,452,000명 대 134,756,000명: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 이야기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옳았다. 전쟁은 여성을 무국적자로 만들며 희생을 요구한다. 구약 사사기의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이에 해당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12부족이 국가로 발전해가는 단계인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로 나중에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암몬이 이스라엘을 칠 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서 입다는 서원을 하게 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30-31).”
그러나 전쟁에 이기고 미스바로 돌아왔을 때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다. 그 결과 딸은 죽임을 당한다. 입다의 전쟁은 자신의 승리(장관이 되기 위해)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으나, 여성인 그 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전쟁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군인만을 죽이고 무장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병사보다는 시민들이, 죄 없는 백성들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한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000명이고, 자국민의 수는 134,756,000명(20세기에 한해서)이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의심하게 만든다. ‘테러방지법’의 속뜻이 국민을 감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듯, 전쟁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딸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다의 ‘부당 거래’를 폭로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11:36)” 전쟁의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사사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동족간의 전쟁인 ‘베냐민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았으나,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레위인은 첩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리고 돌아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한 노인(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주하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날 밤 그 성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로 나와서 말한다.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19:23-24)”고 했으나, 무리가 듣지 않았다. 남성들의 폭력과 음행에 여성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끌어낸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었다!
 
레위인의 첩.jpg▲ 죽임을 당한 레위인의 첩
 

이렇게 죽임을 당한 첩을 레위인은 나귀에 싣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시신을 열두 조각 내고 이스라엘 각지파마다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미스바에서 모여 벤야민 지파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동족 상잔은 참혹했고(“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20:28),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과 ‘실로의 여자들’을 빼앗고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베냐민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짓밟히는 존재인 것이다.   
 
3. 거룩한 전쟁?: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전쟁의 용사(출15:3)”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회피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응이 있고(대부분 진보적인 평화주의자가 이에 해당될 것), 둘째 이러한 전쟁신 관념을 근거로 군사행동 내지는, 혁명과 테러의 정당성을 찾거나(극단적인 근본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그리고 편향적인 진보주의자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쟁 용사’로 비하시키며 대립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 85~16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들을 삭제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의 10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용사로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김이곤 교수는『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3)에서 ‘눌림 받는 자를 변호하고,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해방 이데올로기’로 본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사를 ‘정복설’에 따라 이해하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적 전쟁 이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관점이며, 오히려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평화적 ‘이주 가설’과 멘덴홀(George E. Menderhall)과 갓월드(Norman Golttwald)의 소외된 계층의 반란 및 ‘혁명 가설’¹에 근거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히브리인)를 강자(애굽)로부터 해방시키는 이러한 야훼의 해방 의지는 ‘고난의 떡을 먹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의 해방 역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신인협력사상)’와 폭력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 서두에 인용한 출애굽기 14장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대신 싸우시니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인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 왕권을 부정하며 ‘야훼의 유일한 왕권 이념’과 ‘야훼에 대한 절대 배타적인 신뢰’로 이어진다(이렇듯 성서의 배타성은 ‘다른 종교 자체’에 대한 배타성이기 보다는 ‘세속 왕권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다). 기원전 8세기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유다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 땅과 아하스 왕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야훼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7:4-9).” 오직 야훼, 오직 예수만인 것이다.
바울 사도도 전쟁을 이용하는 권력자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잘 간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약자를 위해 강한 자를 무너뜨리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이렇게 지금의 전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가에 선하다.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4.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엘피, 2014)에서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셋째,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라고 한다. 적용을 해보자. 가령,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이것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본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야스퍼스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다.” 불의한 권력을 따를 것인가? 오직 예수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각주)-----------------
1) 멘덴홀은 히브리인의 가나안 정복을 농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 조직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통계적으로 중요하게 기록할 만한 팔레스타인 정복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급격한 대치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며, 왕정 행정지도자들에 대한 불가피한 축출을 제외하고는 본토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축출도 없었다. 요컨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그런 뜻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실제로 없었다. 그 대신에 다만 사회-정치적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역사가들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이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결속된 조직망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일종의 농민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 E. Mender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vol.3(1970), p.107. 여기에 동의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복 가설’, ‘이주 가설’, ‘혁명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하느냐는 것보다, 이 세 가설들이 저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씩 그 배경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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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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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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