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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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마다 새해가 되면 교회표어를 제정하고 1년 동안 기도하면서 그 제정된 표어 실천에 최선의 경주를 한다.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가장 많이 보는 표어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표어임에 틀림없다. 왜 이런 표어가 오늘의 교회 주제가 되었는가?
  ‘표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의, 주장, 강령(綱領) 등을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 즉 슬로건’이다.
  이런 표어를 제정하는 오늘의 교회 근간은,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초대 신앙회복을 위한 부흥운동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직설하자면 오늘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주일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대부분의 교회 실상은, 구별된 거룩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와 다를 바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라 슬픔을 넘어 아픔이 크다. 표면적으로는 행복하고 평안한 교회다. 그러나 며칠 함께 해 보면 실상은 갈등과 아픔과 분쟁과 분열현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가 단순히 표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사도행전 2:42-47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찡한 내용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 모진 고난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탄생된 것이 교회다. 이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사도행전적 교회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첫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지 불분명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주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수확물 없는 벌판 같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현상은 교제가 아니라 분쟁을 하고, 나눔이 아니라 할퀴며, 기도가 아니라 개인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셋째는 영적으로 죄인 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을 경외라고 한다. 경외(敬畏)란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그러니 기사와 표적이 사라지고 울리는 꽹과리와 구리소리가 높아간다.
  넷째는 믿음 있는 사람들은 ‘더불어의 삶’이어야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보편적 삶이 실천되어야 한다. 사회단체도 그럴진대 하물며 거룩한 공동체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너무도 개인주의다. ‘네가 없어야 내가 있다’는 사탄의 논리가 자리매김을 해 가고 있다.
  다섯째는 공생(共生)의 아름다움이 연주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 진정한 구제와 선교가 실천되고, 그 결과는 아름다움으로 진정한 복음의 은총을 공감하고 공유하게 된다. 진정한 공생(共生)은 복음의 삶에서 가능하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의 실현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이런 아름다움이 연주되고 있는가?
  여섯째는 예배가 살아있어야 한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배가 무당이 굿 놀음하는 것 같이 세속화 되고 있다. 표현이 과격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타락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성전에서의 모임이 약화되고 예배가 개인의 소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 가는 것이다.
  일곱째는 가정생활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집에서도 떡을 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 가정예배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기독교 가정도 붕괴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여덟째는 식음(食飮)의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제도를 굳이 오늘에 지키라고 하진 않겠지만 주초 금지 문제가 이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짐이 되는 현상이 아프다. 먹고 마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몰락 이유 중 또 하나다.
  아홉째는 감사와 기쁨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다. 만약 유행가는 잘도 외우면서 찬송가는 제대로 외워 부르는 곡이 없다면, 그런 그리스도인은 잠언 6:2절을 되새겨야 한다.
  열 번째는 지역사회에서 칭송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의 교회는 지역사회의 칭송을 받는가, 지탄을 받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스스로 눈을 감고 묵상해 보라. 대부분 지탄의 원인을 나에게 두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너 때문에’로 돌리는 현상이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이다.
  마귀는 항상 ‘누구 때문에’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항상 ‘무엇 때문에’를 강조하신다. ‘무엇 때문에’에 초점을 두면 ‘모든 영광은 주님께로 돌아가고 모든 잘못은 나에게로’ 맞추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변명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고, 걸면 넘어지며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실 말씀이 없었을까? 그렇게 자신을 모해하고 아프게 하는 무리들을 대항하실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다! 결단코! 주님은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그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실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찢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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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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