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지득용 장로의 장례는 12일 오전 6시 고신대복음병원에서 교계인사와 보육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고신총회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한 지 장로의 장례에서는 교계인사들의 환송을 받고 소양보육원이 있는 따뜻하고 양지바른 가덕도 뜰에 안장됐다.
△지 장로의 파란만장한 삶
1950년 6.25 사변이 터지자 길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부모 잃은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가 그들을 먹이고 재우며 기르기 지금의 부산 가덕도 1662평을 매입하고 1951년 12월 24일 정착했다. 대지와 밭을 개간하여 전쟁으로 지치고 실의에 빠진 아동들에게 희망과 신념으로 갖게 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길러낸 것은 지득용 장로의 남다른 박애정신이었다.
그는 일찍이 1942년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예과를 1년 다녔고 훗날 1958년~1960년 중앙신학교(지금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정식 졸업하며 사회사업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경상남도 아동복지 시설연합회 이사, 부회장과 회장을 역임하고 경남 사회복지협의회 회장도 역임하며 평생을 사회복지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그 일들로 대통령 공의포장(1962), 국민훈장 석류장(1970), 제15대 호암상 사회복지부분(2005)에 수상했다. 지득용 장로는 호암상의 상금 1억 원을 모두 이 소양보육원에 기탁하여 아동들의 음악치료를 위해 리듬밴드부를 만들었고, 전국을 순회했다. 1999년 7월에는 소년, 소녀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순회공연으로 하면서 국위선양과 함게 아동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등 아동육성에 헌신해 살아왔다.
△숨은 뒤안길에 아픔도 겪어
지득용 장로는 평소 뛰어난 지략가로 故 송상석 목사가 이끌던 법통경남노회의 회계로 송 목사를 보필하는 일급 참모였다. 故 김해룡 장로(진해민선시장)와 故 현기택 장로(마산문창교회)와 함께 송 목사의 오른팔 역할을 하여 고신 총회적으로는 사건 사고가 나면 꼭 전권위원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중요 멤버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
그의 탁월한 웅변가이자 이론가였다. 조리를 맞는 그의 발언에 그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재치 있는 변론을 하여 총회적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고신 교단에서 손꼽히는 장로 지도자로 각광을 받아왔다.
그래서 고신 총회 장로부총회장을 역임하고 은퇴 후 전국원로장로회장직을 맡으며 평생을 장로들의 권익과 친교로 우의를 돈독히 한 섬김의 삶을 살았다.
故 지득용 장로의 말년에는 그의 업적이, 그의 섬김이 롤모델이 되어 주위 신·불신 간에 가장 존경받는 어른으로 대접을 받았다.
아동과 같이 천진난만한 성격을 가졌던 지득용 장로. 아론의 지팡이에 옴이 돋고 순이나고 꽃이 되어 살구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가 일구었던 소양동산에 편안히 잠들게 하시고 하늘의 보좌 옆에 영원히 천국천사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계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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