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는데 문득 “너는 내 것이라.” 라는 이사야서 말씀이 스친다.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며, 믿음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변한 사랑의 고백이시다. 또한 가변적이나 사랑하는 사람끼리, 특히 연애하는 젊은이들이 찐하게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야구장 등, 경기장 응원석에서 좋아하는 선수에 대한 팬 심, 피켓구호이기도 하다.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읽지만 이날에는 산행 전체가 그 말씀 묵상 시간이 되었다. 연애시절 만남의 장소에서 기다릴 때, 환희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뜨거움이었다. 그처럼 그 말씀의 느낌은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연애하시는 것이라 믿어졌고 나는 답을 제대로 드리지 못했으니 짝사랑을 하시게 하였다는 죄송스러움에 가슴이 메어졌다.
또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이라 생각하면서 산 중턱 한적한 곳에 앉았다. 그 말씀의 깊이를 묵상하며 새해에 드릴 답으로의 기대, 비전은 무엇인가고 생각했다. 틀에 박힌 것이 아닌 것 무었을 어떻게 드릴까 생각했지만 결국 무릎으로 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찬송하는 것 외엔 없었다. 기도, 올리는 그 많은 기도가 바라는 것의 실상인데 언제나 제목이라는 메뉴를 제대로 정리하여 내어 놓지 못하였다. 어쩌면 응답을 바라는 청구서, 분명한 증거물을 제시하듯 뜨겁지 못한 것이었다.
흔하게 ‘하나님 알아서 하시지요.’는 믿음이 없는, 기대하지 않는 실상이라 느껴졌다. 그분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적극적인, 또 씨름하여 답을 요구하는 야곱의 투지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는 의식이어야 하는 것일 터이다. 자신과 가정에 대한 항목이나 교회와 나라와 세계에 대한 항목을 만들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에 사로잡힌 느낌마저 가졌다.
인생은 언젠가 떠나는 것이다. 그날에 너는 내 것이라 하시며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다 기다리시는 곳으로 간다면 웃을 수 있다고 믿어졌다. 행복을 느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다. 만남의 장소에 상대가 오지 않은 것처럼 쓸쓸하고 초라한 것도 없다.
교회가 기도를 가르치고 사랑을 가르친다. 혹, 교회 안에서만 입으로 외치는 기도와 사랑을 가르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또한 기도생활과 사랑의 방향성도 옳았는지 모르겠다. ‘마더 테레사’는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 했다. 많은 시간 교회에 나가 큰 소리로 부르짖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제목을 조용히 올려놓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기다리는 것이다. 또 사랑하라는 말씀도 열심히 전달하는데 소란스러운 교회들이 더러 있다.
상당기간동안 교회 앞 도로변에 교통경찰이 출동하고 교인들 간에 편을 갈라 서로 출입을 제지했다. 어느 교회는 자동차에다 누가 어떻다는 악평 현수막을 달고 교회주변을 돈다. 한 교회는 목사와 다른 뜻을 가진 장로에게 출교 명을 내렸다. 또 한 교회는 사회법정을 통해 수습되었다. 또 어느 교회는 발생한 문제를 노회에 올렸는데 이를 수습위원들이 유야무야한 답을 내고는 손을 씻었는데 이는 분명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진위도 잘 모르면서 누가 잘못했다라고 단정했다가 사실이 아닌 줄 알았으면 즉시 사과하면 되는 것도 사과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도 강단에서 사랑과 용서를 선포하는 이들을 보면 안타깝다. 사과에 권위가 떨어질까 두려워서일까? 왜, 사과하지 않아 일을 크게 만드는가. 분명 사랑의 깊이를 모르거나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그러한 분들로 인해 교회는 계속 소란스럽고 ‘너는 내 것이라’ 하신 분의 뜻은 가려질 뿐이다. 새해에는 기도의 바른 자세와 사랑의 덕목을 갖춘 자가 앞에 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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