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1일부터 1976년 6월 25일까지 만25년을 복음병원 원장으로 지내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인술을 베풀었던 장기려 박사.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민간 차원에서 최초로 설립한 공로로 1976년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1979년 제2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 부분)을 수상했던 그에게 남북한 대화의 물꼬를 트는 평화의 사도로서 하나의 상징적인 면에서 방북제의를 한 것이다. 정부는 흔쾌히 수락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장 박사는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 바람에 한완상 장관은 매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때 필자는 박정희 정부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해직된 서울대 교수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터라 현장취재로 동행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장기려 선생은 자신만 특혜를 얻게 되면 수많은 이산가족들로부터 빈축을 살 수 있다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평소 북에 있는 처자식을 그렇게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던 장 박사가 아니었던가? 필자가 품은 그 의문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시간이 매우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아내 김봉수 여사와 자녀들 생존확인
198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3차 적십자연맹총회 및 대표자회의에 참석했을 때 미국에서 거주하던 그의 조카로부터 여전히 북한에서 살고 있는 아내의 편지를 받게 됐다. ‘살아서 잘 지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들과 딸 또한 김일성대학 물리학교수로, 의사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장 박사는 옥탑 거실의 책상위에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매일 “여보, 오늘도 좋은 아침인데 그쪽은 어때요? 여긴 남쪽 바다 송도가 훤히 보이는 광경이 유난히도 좋구려. 자식들도 잘 있지요? 오늘도 나는 당신과 자식을 위해, 조국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라고 속삭였다.
어느 날, 정부가 평화사절 일환으로 주선한 방북제안을 왜 거절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기자의 근성이 솟구쳐 장 박사가 거처하는 병원옥탑에 올라가 장 박사에게 직접 물었다.
그는 “신 선생, 이생에서 못 만나면 하늘나라, 주님 품에서 죽도록 만날 것인데 무엇이 궁금한가?”라고 대답했다.
‘내가 아는 장기려 박사’를 통해 장 박사를 회고한 함석헌 선생
장기려 선생은 기독교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김교신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교신은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로 그의 ‘무교회주의’ 사상을 계승했다. 장기려 박사는 우치무라 간조의 정신을 이어 받은 이들과 교제하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친교를 갖는 이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이해했고, 매주 성서공부 모임을 가졌다. 장기려 박사는 그들이 발행한 신앙잡지 ‘성서조선’의 정기구독자였다.
장 박사의 여러 통의 편지 기록과 만 67세부터 만87세까지 21년간 ‘부산모임’의 회지 간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긴 것들을 보고 평화주의인 그가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인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우치무라 간조를 존경하며 관련된 글도 많이 읽었다. 함석헌은 “한 달에 한번은 자신의 집에서 무교회주의 성경모임을 하고 일반교회에서는 용납 안 되는 나를 초청해 그 모임의 강사로 인도케 했다.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만 더 말하면 의사면서 환자가 오면 전도부터 먼저하고,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것이 아니라 제 속의 제 힘으로 낫게 하는 것이라 역설하니 이런 의사가 어디 있는가?”라고 말했다.
21세기 방향성을 잃은 한국교회에 던진 간절한 메시지는?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 김재현)에서 펴낸 ‘역사의식을 갖고 살다간 장기려’ 전집을 출간했다. 장 박사가 21년간 써내려간 그의 신앙적 사상과 삶을 기록한 ‘부산모임’회지 내용을 담아 평소 장 박사에게 가졌던 의문(방북제의 거절과 무교회주의를 추종한 부분)을 대충 알게 됐다.
다음 편은 ‘장 박사는 말년에 무교회주의를 따라 종의모임을 주도했는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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