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장 박사를 뵙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를 부를 때 호칭을 박사, 원장, 장로보다는 선생이라고 부르면 참 좋겠다”고 했다. 그와 동향인인 故 함석헌 선생도 늘 ‘함 선생님’으로 불렸다. 장 선생은 우리나라 유명 외과의사 중에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니다.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외과 전문의 자격을 사양하고 평생 일반의로 봉직했다. 그래서인지 박사보다 선생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필자가 “장 장로님”이라고 불렀더니 “에이, 장로보다 선생으로 불러다오”라고 하지 않는가. 가만 생각하니 그가 섬겼던 부산 산정현교회에서 교회를 떠나 가정교회를 염원했던 터라 일반 한국교회는 문제가 많아 뜻 맞는 의사들을 중심으로 가정에서 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렸던 것일까?
어쨌든 그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했다. 병원에서 ‘원장선생님’으로 불렸는데 원장 역시 그냥 ‘선생’으로 불러달라고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20년이 지난 지금 장 박사를 추모하는 물결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장기려 박사 소천 2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장 박사를 추모하는 토크콘서트를 열고 관련된 인사들을 초청, 장 박사에 대한 회고를 엮어 출판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CTS에서는 2015년 성탄절을 기해 장기려 박사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를 회고하는 영상을 상영하며 평소 근면하고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장 박사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장 박사의 신앙적 행보
일찍이 이북에 있을 때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했다. 젊은 의학도로서 유기형 장로(치과의사), 유기선 장로(의사, 부산영락교회 원로), 유기천 장로(전 서울대 총장), 유기진 장로(의사)와 신앙생활을 같이했다. 주기철 목사, 조만식 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훗날에는 우치무라 간조의 신앙적 삶에 심취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과 교류하면서 한국교회 장로교가 여러 갈래로 분열이 되자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무교회주의보다 무교파주의적 시각에서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나게 됐다. 그를 뒤따라간 손동길 안수집사도 가정교회를 세워 주일 예배를 드렸다. 이 일로 부산 산정현교회(당시 담임 박광선 목사, 현 산정현교회 원로)는 재정자립면에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병원경영악화로 어려움 겪고, 진료거부사태
유일하게 전문의가 아닌 그냥 외과의사로 남아 의사생활을 했다. 그가 세운 복음병원은 규모가 차츰 커지게 되자 인원이 많아지고 경영과 수입에 애를 먹게 되었다. 병원비가 밀린 환자들은 뒷문으로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의 인건비가 한두 달씩 밀리는 일도 많았다. 하루는 김병삼 내과과장이 급료가 두어 달 밀리자 원장실을 찾아가 “원장님, 왜 월급을 안 줍니까?”라고 물었다. 장 박사는 “김 과장, 자네는 그래도 생활에 여우가 있는 과장이 아닌가. 좀 참게나...”라고 대답하니 김 과장은 “아니, 원장님은 지금 당장 처자식이 없으니 생활비 걱정은 없을 것 아닙니까? 나는 처자식이 있어 월급이 없으면 못 살아갑니다”라고 항의한 일이 있었다. 결국 병원이 부도 위기를 맞자 침례병원 외과 과장이던 박영훈 선생이 오게 됐고, 6개월 만에 경영이 정상으로 돌아오게 됐다. 이 일로 제자(박영훈 원장)가 스승을 몰아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때 병원은 경북의대와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의 파워게임을 방불케 했다. 1차 의사파동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다. 부산의대 출신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박 원장을 매도하기 시작해서, 주동한 채종묵 의사 등 부산의대 출신의사 3~5명이 당시 부산지검 초임 박철언 검사에 의해 구속 수감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故 이동기 씨 부부를 맺어줬던 장기려
부산 서구 아미동 87번 버스종점 부근은 과거 화장터였다. 지금의 까치고개는 대부분 공동묘지였고, 달동네 판자촌에서 장기려 박사는 5평 남짓한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마련했다. 이곳에서 25년 동안 척추결핵병을 앓고 있던 이동기 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장 박사는 어느날 병원 입구에 쓰러져 있는 이동기 씨를 발견하고 그를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갔다. 수술을 하는 중 척추신경을 건드려 전신마비가 돼 일어서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장 박사는 이동기 씨를 위해 처소를 마련해주었고, 그를 위해 매달 쌀과 부식을 날라다 주었다. 또 그를 보필한 어느 가난한 여인을 반려자로 맺어주었다. 장기려 박사가 쌀을 사서 어느 산 중턱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뒤를 따라가면서 이 같은 사연을 듣게 됐고, 이동기 씨의 가정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됐다. 이들 사이에 자녀가 태어났다. 현대의학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이동기 씨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훗날 이동기 씨의 큰 아들은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공군 파일럿이 되었다. 이동기 씨는 ‘5월의 환상’이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늘 강하고 담대 하라는 장기려 박사의 권면으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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