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7-0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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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는 한 인간의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적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임철규,『눈의 역사 눈의 미학』)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1. 눈의 역사에서
 사람만이 ‘보는 것’을 통해 사유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전제조건인 보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 역사, 문명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해를 청각을 통해 수용했던 히브리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어 ‘나는 안다(oida)’는 ‘나는 본다(eidon)’의 과거로 ‘나는 보았다’와 같은 뜻이다. 즉 보는 순간 안다, 보는 것이 아는 것, 감각 작용이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이라 부르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제반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도 ‘내가 보다(horao)’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인 ‘보여진 것(idein)’의 과거분사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게 된다.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타자화하고, 비(非)동일적인 것으로, 반(反)정체성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폭력은 이렇게 눈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눈과 같은 저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라.『참회록』에서 “눈의 음욕”을 경계한 어거스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성상과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화, 목판화 등을 통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눈의 이성적 능력을 비판한 바울의 가르침(고후 4:18)을 따라 종교개혁가 칼빈은 ‘믿음이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뜨게 한다’고 말하며 청각만이 구원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했으나, 가톨릭은 성상, 성화, 십자가 이외에도 눈부신 성당, 각종 대회, 축제, 가면, 장관을 이루는 분수 등의 볼거리를 통해 시각문화를 창조했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평가하며 ‘영혼과 가장 빠른 교섭을 가지는’ 시각에 대해 예찬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이르러 눈의 잔치는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총체적 반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서전적인 시집『서곡』에서 이렇게 눈의 폭력을 지적한다. “우리들 감각들 가운데 가장 폭군적인 감각”이며 “그 힘이 잠들 수 있는 어떠한 표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애통해 한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 역시 바깥을 향한 육체의 눈은 언제나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내면을 향한 눈이며 이러한 눈은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대, 천상의 빛이여 마음속에 빛나라, 그리고 마음의 모든 능력을 비추어라. 거기에 눈을 심고, 거기서 모든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내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가 보고 말할 수 있도록.”
 실존주의에 와서는 타자의 시선은 지옥으로 변한다. 타자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세계를 훔쳐가고 동시에 나에게 객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와 투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밀폐된 방』에서 사르트르는 가르생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잡아먹을 듯 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2. 예술의 눈으로
 타자가 갖는 이 새로운 지위를 보여주기 위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건 나에 관한 진실을 얻으려면 나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기형도의 시를 통해 요절한 그의 속내를 이해하는 것’,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여린 작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현대 문명을 진단하는 영화감독의 시선을 맛본다는 것’,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그의 울분에 공명한다는 것’,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그의 고독을 맛보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세계를 달리 표현하는 타자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가.’ 눈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눈이며 이러한 눈이 선한 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과 눈을 되찾아야할 것이다. 거기에 예술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예언자들이 경험하는 신적 현전(Divine Presence)과 예술적 경험 사이에는 유비(analogia)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한 개인의 체험의 표현”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맥락 하에 나온 말이다. 예술 작품을 보고, ‘계시적 탈자(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하며, 그 작품의 아름다움 안에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있었다고 말하는 틸리히는 “그 순간은 나의 삶 전체를 감동시키고, 인간 실존의 해석의 열쇠를 주었다. 그것은 내게 생명의 기쁨과 정신적 진리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사실 시각예술과는 거리가 먼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개신교는 ‘말’에 묶여 있으며 시각예술과는 극히 의심스런 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종교음악과 찬미시에서는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의 성취를 능가하기도 했으나, 시각예술에서는 그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그러나 청각과 시각은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선한 눈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눈의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 배경에는 우상숭배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본성은 그 현존의 체험에서 눈의 배제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영은 모든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눈의 예술, 혹은 예술의 눈을 간과한 개신교의 역사를 통탄한다. “개신교적 삶의 맥락 안에서, 눈의 예술의 결핍은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계적으로는 지지할 수 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후회스런 것이다.”
 
3. 구별하는 눈과 공생하려는 눈 사이
 나치즘을 공공연하게 대변한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공법학자인 독일의 카를 슈미트의 대표적인 저작『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는 슈미트의 말에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물소신학(Water Buffalo Theology)으로 유명한 태국의 일본인 선교사 코스케 코야마(Kosuke Koyama)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문화, 언어, 종교는 없습니다. 이 연결되어 있음은 생태학, 도덕, 신학의 양식입니다. 나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단언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내 자매와 형제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구별하는 눈을 넘어 공생하려는 눈을 제시한 것이다. 코야마 박사가 언어, 문화,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던 그의 삶 때문이었다. 시속 3마일로 걸어가시는 분이라는 물소신학을 통해 태국적인 상황 신학인 ‘물소신학’은 불교라는 종교 문화적 전통사회에서 기독교적 토착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변증법적이며 선교적 신학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한때 원수와의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악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듯이, 원수 속에도 선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냉전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듯이 우리만 선이고 원수는 악이라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원수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원래 머리 위에 숯을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받기 위한 고문행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양심을 움직이는 사랑의 행위로 재해석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원수 속에 꽁꽁 얼어붙다시피 한 선한 마음, 곧 양심이 상대방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는 진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 양심의 작동은 원수 간의 증오의 관계를(곧 구별하는 눈) 대화와 화해의 관계(공생하려는 눈)로 바꾼다. 그래서 악순환은 선순환이 되고,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호적 상생 관계로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별하려는 눈이 공생을 지향하는 눈으로 변화되어야만 참된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의 눈이 우리들을 바라본다.
 
4. 예수의 눈: 바보의 눈, 역설의 눈
 한완상의 『바보예수』에는 바보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들, 특히 영악한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바보 예수’의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비유 말씀에는 꼴찌에 대한 진한 사랑의 표현이 있다. 탕자 같은 존재, 경멸받았던 이방인, 여성, 죄로 인해 중병에 시달리는 죄인들, 지체장애자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은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기득권층에게는 바보스런 편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심각한 바보다운 선택은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이다. 원래 메시아란 칭호는 당당하게 승리하는 지도자, 용기 있게 해방시키는 지도자, 신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패배하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승리자 메시아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우아한 패배’를 역설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산 위에서 바보처럼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시어 바보가 되신 것”, 지금 만신창이가 된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가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우아한 패배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완상의 말처럼 모두가 승리하려 한다면 우리 안의 악이 더욱 활개 치게 되니(發惡), 우아한 패배를 선택하여 우리 안의 숨겨진 선을 발선(發善)해야 한다. 이때 평화가 깃들며 함께 이기는 상승(相勝)과 함께 사는 상생(相生)이 이뤄질 것이다.
 3세기경 외전인 『요한행전』에 의하면 예수는 단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는 예수의 이러한 감시의 눈은 중세 사람들은 ‘정의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삶은 가난한 이들, 땅의 사람들(암하레츠)을 위한 것으로 보면 예수는 그들의 고통에 단 한 번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도처의 인간들이 경험하는 숱한 고통 때문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전하는 아픔과 비통함에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선한 눈을 죽인 인간들의 악한 눈이 이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암흑과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책임 있는 철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는 그 사태를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부활의 신앙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암흑과 절망을 구원으로 바라보는 역설의 눈을 가졌다.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은 따라서 역설의 눈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눈을 어떻게 떠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대는 땅이 될 것이다. 그대가 신을 사랑하는가? …… 그대는 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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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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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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