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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십자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 ‘십자군의 길’을 걸을 것인가?
    오늘 ‘생명의 도’(행 7:38, 개역성경)라 불리는 기독교를 믿는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은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인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인가? 요즘 기독교인들끼리 나누는 대화나 SNS(카카오톡, 페이스 북) 등을 통해 주고받는 글들과 유튜브 영상을 보며 안타까운 때가 많다. 그것은 자신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이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시대 때 일어난 ‘십자군 전쟁’(The Crusades)을 보자.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II)의 “성지(聖地)인 예루살렘을 어찌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에게 허락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교황의 말로 시작된 이 전쟁은 무려 198년간(A.D. 1095~1291)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부끄럽게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치러진 전쟁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당시 로마교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를 눈이 날리는 카노사의 겨울 성문 앞에서 얇은 옷과 맨발 상태로 3일 동안 꼬박 세워 눈물로 용서를 빌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성지를 수복하자는 교황의 말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것이다. 멋진 명분과 종교심에 불타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지 수복을 향해 나아갔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당황한 로마교회는 이 전쟁에 참여하여 순교하면 천국이 보장된다는 약속도 하였다. 더 나아가 어린 소년 소녀들의 신앙의 힘으로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킨다는 목표로 유럽 각지에서 수만 명의 소년들을 조직한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까지 조직하여 전쟁에 참여케 했다. 이 전쟁의 참상은 너무 끔찍하여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분명 그들이 주장하는 명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명분을 이루는 방식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길인 ‘십자군의 길’(The way of the crusade)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고 외치며 이런 저런 일들을 한다. 그 열정과 헌신은 분명 귀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인 ‘숫자’와 ‘힘’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사람을 규합하고, 그 힘으로 세상과 싸우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군의 길’이다. 우리 주님은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을 선택하셨다. 주님의 선택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는 낮아짐이셨다. 스승으로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기셨다. 5병 2어의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아 로마를 뒤집으려고 할 때 홀로 산으로 가셨다(요 6:15). 유대 종교권력자들과 로마군병들에게 잡히셨을 때 그들이 가진 검과 몽치보다 더욱 강력한 하늘의 12군단의 천사를 동원하지 않으셨다(마 26:53).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십자군의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인 스타크는 불신자이다. 그런 그가 로마제국에서 신흥종교와 같았던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300여 년 만에 그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로마를 정복하고, 지금까지 2천 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결국 초대교회가 로마제국을 점령한 것은 당시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역병 때문이었다. 1차가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전 제국의 1/3 정도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2차로 251년 알렉산드리아 인구 2/3가 사망할 정도로 엄청난 전염병이 있었다. 로마 사회나 기성 종교가 좌절하고 역병 앞에서 종교인들이 먼저 도망갔을 때, 쌓여있던 시체들이 방치돼 쥐들이 병을 더 옮길 때,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를 다 정리하고 장례를 치렀다.” 당시는 오늘날과 같이 의료가 발달한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코로나 19와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전염병은 이교도를 믿는 로마 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크리스천을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이때 종교지도자와 돈 많은 제국의 사람들은 전염병이 제국에 돌자 안전지대를 찾아 달아났다. 결국 남은 사람들은 도망갈 힘도, 돈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경계의식을 풀지 못했다. 전염병에 걸린 감염자와의 접촉을 극도로 피했다. 이때 초대교회의 교부인 키프리안(Thascius Caecilius Cyprianus)이 외쳤다. “우리가 단지 그리스도인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풉시다. 원수도 사랑합시다.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것이 오늘 이 땅과 교회 안에 드리워진 수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군의 길’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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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1
  • 오늘, 고신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코로나-19(COVID-19) 팬데믹 가운데 교단과, 신대원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두 분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고신대 신학과 75학번, 신대원 93 학번인 진신덕목사입니다.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온 지 23년째입니다. 고신가족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신앙의 모태인 사랑하는 고신의 현주소를 찾으며,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두 분의 지혜와 경륜을 빌어 저의 질문에 해답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개질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무례하다 외면하지 마시고 저의 어리석음을 속 시원하게 깨우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코로나-19 대유행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1.1 정부 당국이 대유행 조짐이 보여 거리두기 2.5 단계 방역지침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비대면 예배 행정명령을 내렸는데, 2020.8.21 <고신-대신-합신 총회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명서 발표가 늦은 감이 있습니다. 미리 이런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에 대한 교단 입장을 발표했더라면 8.23 주일예배 대면 예배를 강행한 일부 고신교회들과 행정기관과의 마찰이 예방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부산기독교총연합에는 고신교회들도 가입되어 있는데 정부 방역지침에 반발해 대면예배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교단 방침과 충돌하고 있습니다. 부산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같은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고신 총회가 가입한 한국교회총연합은 정부 방침에 반발해 대면예배를 사수하겠다고 하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신속히 조정할 것인지요? 1.2 주일예배를 대면예배를 드려야만 주일성수가 되는 것입니까? 비상상황에서 비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심각한 교리 위반 행위인 것입니까? 성명서만 발표한다고 개교회와 성도들이 이해하고, 전적으로 동참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신학적 연구와 해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2. 고신교단과 전광훈은 어떤 관계인지요? 2.1 전광훈은 예장 대신에서 제명된 사람이고, 한기총 회장일 때, 이단 변승우를 이단 해제하고, 한기총 공동회장으로 받아들인 이단 옹호자입니다. 이런 자가 주최하는 정치행사와 주일예배, 부흥회 등의 각종 집회에 고신 목사, 장로,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은 개인 신앙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까? 전광훈이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진작에 전광훈에 대한 명확한 이단 규정을 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뉴스에서는 총회 이단대책위에서 이번 총회에 상정할 문건이 보도되고 있지만 아직 총회 홈페이지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고신 이대위는 전광훈을 “이단성 있는 이단 옹호자”로 보고서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미 고신 깊숙이 전광훈을 지지하고, 추종하는 많은 ‘전광훈들’이 자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전광훈 집회에 집단적으로 동참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단 옹호자’라는 규정이 너무 약하고, ‘사후약방문’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3. 고신교단과 대장연(대한민국장로연합회)은 어떤 관계인지요? 대장연은 정치활동을 안한다고 하면서도 정치적 발언과 집회를 계속하고 있는데 고신 장로들이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에 해당하는 일인지요? 4. 고신교단과 소위 “태극기부대”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태극기부대”에 일반국민도 있지만 고신 목사 장로들도 상당수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도 개인의 판단에 따른 정치참여로 교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입니까? 5.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고신의 입장은 무엇인지요? 지금 국회에는 장혜영 의원의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있습니다. 다른 의원들도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한 상태입니다. 소셜 미디어에는 온갖 반대의견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고신교단의 신학적 입장은 무엇인지요? 동성애 조장, 동성애 비판 설교시 처벌 등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신학적으로 법안에 대한 정확한 검토에 근거한 입장을 밝혀주셔야 찬반 논란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6. 고신의 ‘개혁주의적 미디어 리터러시 정책’은 무엇인지요? 한국의 소셜 미디어 환경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온갖 이단들의 선전 동영상은 물론이요, 가짜 뉴스와 선전선동물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많은 성도들도 이런 미디어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가짜뉴스가 교인들 단톡방을 통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유포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개인의 취사선택에 맡겨두기가 힘든 위험한 미디어 환경입니다. 적어도 신앙과 신학에 관계된 미디어에 대한 ‘필터링’과 비판, 바로잡기를 위한 체계적이고 상시적인 기구와 활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합니다. 총회-신대원-고신대-고신언론사-기독교언론-시민운동단체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성도들의 건강한 신앙생활을 돕는 다양한 활동이 요청된다고 생각하는데 교단과 신대원의 입장은 무엇인지요? 7. 총회의 민주적 운영과 소통 강화에 대한 정책은 무엇인지요? 정기총회는 1년에 한번 모이기에 코로나 -19와 같은 돌발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긴급한 사안은 임시총회를 열기도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총회 임원회와 각 부서와 위원회가 가동되지만 전국 교회와 성도들과 소통이 어렵습니다. 총회 홈피에 자유게시판이 있지만 청와대 국민청원과 같은 대화 창구가 활짝 열려서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고, 총회 차원에서 응답하는 소통의 광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특히, 총회 총대제도는 목사 장로로만 총대가 구성되고, 그것도 교세와 연차에 따라 선출되어 전체 교회의 의견 수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총대 선출에 대한 혁신적인 방안을 마련할 의향이 있으신지요? 예를 들면, 전국여선교회 대표, 주교교사 대표, SFC 대표, 안수집사회 대표 등을 총회 언권회원으로 받아서 발언할 시간을 주고, 정책제안을 하게 하는 방안입니다. 이사회와 총회 부서, 위원회 구성도 여러 문제점들이 누적되어 왔는데도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는 것은 아닌지 공개토론과 방안 모색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총회의 각종 회의록과 안건 등 교단 운영에 관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소통하는 방안은 있으신지요? 신대원은 총회에서 연구보고를 주문하는 것만 기다리고, 능동적으로 <교회의 교사> 역할을 할 의향은 없으신지요? 과문한 탓에 신대원이 자발적으로 교단 발전을 위한 세미나, 연구 등을 진행하는 소식을 듣지 못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신앙의 중심을 잡고, 고신의 정체성과 생활의 순결을 지켜 나가도록 총회와 신대원이 긴밀하게 협력하여 등불과 지팡이 역할을 잘 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저의 질문에 대해 우문현답을 기대하며 이만 줄입니다. 2020. 9월 미국 일리노이 샴페인에서 진신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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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8
  • 이상규 교수 '광복 75주년, 뒤돌아보는 역사'
    이 원고는 지난 8월 9일(주일) 부산 세계로교회에서 열린 경남기독교총연합회와 경남성시화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8.15특별성회'에서 강사로 나선 이상규 교수의 특강 내용이다.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이런 뜻 깊은 자리에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신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박정곤 대표회장님과 경남성시화본부 오승균 대표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민족의 역사와 관련하여 두 차례 기념 예배를 드렸는데, 첫째는 매년 3월 첫 주에 드렸던 3.1절 기념예배였고, 둘째는 8.15일과 가까운 주일에 드렸던 광복기념예배였습니다. 이 전통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으나 그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경남의 교계지도자들이 이런 한국교회 전통을 계승하고 있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예배를 통해 오늘의 교회와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6편에 기대어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난과 수난의 여정을 뒤돌아보고, 우리에게 광복의 기쁨을 주셨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감사하면서 오늘 우리 교회와 국가의 현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뒤돌아보는 역사 : post tenebras lux 우리나라는 1910년 8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타율에 의해 해방되었던 1945년까지 35년 간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만 일제의 한국침략은 점진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1876년 일본대표 이노우에(黑田淸隆)와 조선대표 신헌(申櫶)사이에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입니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이 조약이 일본의 조선 침략의 발판이 된 조약입니다. 이 조약 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권을 갖는다”고 명시하므로 청(淸)의 세력(宗主權)을 배제하고자 했고, 1882년의 임오군란은 일본세력의 조선 진출에 대한 반일감정의 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894-5년에는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침략의 방해가 되는 청나라 세력을 제거하고, 1904-5년에는 러일 전쟁을 통해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러일강화조약, 곧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선점하게 됩니다.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권을 강탈하고,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차례로 강탈하게 됩니다. 1907년에는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켜 국방력을 마비시키고, 이준 열사의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점진적인 침략과정을 거쳐 일제는 1910년 8월29일에는 '합방'(合邦)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행위를 정당성하기 위해 ‘한일합방 韓日合邦’ 혹은 ‘한일합병 韓日合倂’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한일병탄 韓日倂呑’이라고 말합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혹은 ‘국권피탈國權被奪’'이라고도 합니다. 이렇듯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고, 조선은 주권을 상실함으로서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시작된 조선 왕조는 27대 순종(純宗, 1872-1926)을 끝으로 518년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때로부터 우리나라는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배경을 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937년 7월 7일에는 중국을 침략합니다. 우리는 ‘지나사변’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이 전쟁을 시작으로 동남아전 지역과 태평양지역으로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1941년 12월 7일에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라고 부르지만 보통 ‘태평양전쟁’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이 하와이를 공격함으로서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것입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대외 팽창에 따른 제2차 대전이 전개되고 있었으나 미국은 참전을 꺼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주만이 일본에 의해 기습공격을 당하게 되자 미국이 참전하게 되었고, 미국의 참전은 전세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까지 전선을 확대하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1944년 7월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 이후 전세는 급변하였고, 1944년 11월 사이판에 비행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이오지마(硫黃島, 1945. 2-3)와 오끼나와(沖縄, 1945.6)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일본은 패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지역의 경우, 이탈리아가 1943년 6월에 연합국에 항복했고,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했습니다. 수도 베르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의 자살로 독일은 항복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전세가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게 되자, 1943년 11월 12일, 영국의 처칠, 미국의 루즈벨트,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전후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카이로회담입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 것입니다. 이 결의문 작성자는 루즈벨트의 최측근인 해리 홉킨스였는데, 그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습니다. 독일이 항복하고 두 달이 지난 1945년 7월 17일에는 연합국대표는 독일 포츠담에 보여 일본의 무조적적인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 라고 선언하여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습니다. 이때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 미국은 히로시마(廣島, 1945.8.6.)와 나가사끼(長琦, 8.9)에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하게 됩니다. 원자폭탄 투하로 2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고,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迪官裕仁, 1901-1989)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 대만,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대부분의 동남아국가들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35년간의 질고를 끝내고 해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어둠 후의 빛’(post tenebras lux)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광복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박정곤 대표회장이 인사말에서 언급처럼 빛을 회복한 것입니다. 2. 광복의 의미 그렇다면 이 해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3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빨리 해방을 맞게 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적같이 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독립은 우리의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싸워 쟁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3.1운동 때 전인구의 10%인 2백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1,700여회의 집회를 하고 5만여 명이 수감되고, 7천5백명이 죽임을 당하고 1만6천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독립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국땅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며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 애국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 때문에 독립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제국과 제왕을 다스리시고 역사와 자연을 주관하십니다. 그가 전쟁의 승패를 관장하시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서울과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120년 간의 통일 왕국시대 이후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스라엘왕국의 존속기간은 509년으로 우리나라 조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대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당시 제국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은 바벨론이 최강국이었으나, 바사라고 불리는 페르샤가 신흥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기원전 549년에는 메데를 정복하여 바사에 통합시켰습니다. 그래서 고레스는 메데와 바사를 연합국으로 만들고 두 나라를 동시에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메데 바사’ 혹은 ‘바사 메데’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에1:3, 18, 19, 10:2, 단5:28, 6:8, 12, 15, 8:20 등). 이 신생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했을 때가 기원전 539년이었습니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바사의 고레스(Cyrus II)왕은 그 이듬해에 칙령을 내렸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조서'(詔書)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그 내용이 역대하 36장 23절, 에스라1장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민족에게 해방을 선언한 것입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본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 때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오늘 읽은 시편 126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 ‘시온의 포로’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포로된 자들을 시온으로 돌리실 때’(the captives to Zion)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고토(故土) 곧 두고 온 고향을 의미합니다.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를 얻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해방을 얻는 자유민은 본토로 돌아오는 데, 그 거리가 1,200km였습니다. 1차 귀환 때 약 5만 명이 이 먼 거리를 걸어 귀국하게 됩니다. 이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남의 나라에 지배하에 있다가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大事)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절과 2절, 3절,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가 주체이자 주어입니다. 시편 기자는 해방을 주신 이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126:2)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체가 여호와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생제국인 페르샤의 고레스는 이스라엘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된 백성의 해방을 선언하고 성전 건축을 허락하고, 과거 바벨론이 빼앗아 갔던 모든 기병들 곧 지금의 문화제를 다 돌려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해답이 역대하 36장 22절과 에스라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The Lord moved the heart of Cyrus of Persi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던 것입니다. 해방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즉 해방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대가 없이 얻는 것이기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였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할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 신도, 1900여개처의 교회,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 선교사 270명, 3백 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상의 재학생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식민지배의 성패가 달린 문제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회가 반일운동의 거점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교회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일면 회유, 일면 탄압의 이중적 정책을 시행했는데, 한국교회를 탄압하여 그 힘을 축소하고자 했습니다. 한국기독교를 친일 세력으로 물들여 황도주의(皇道主義) 기독교로의 변질시키거나, 일본의 조합교회의 조선 전도를 통해 조선인들을 충량한 일본국민으로 교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는데, 첫째는 법적 제제를 가하고자 했습니다. 보안법, 범죄즉결령, 조선 태형령과 같은 일반적인 법령 외에도, 한국교회 종교활동을 통제하려는 ‘포교규칙’(1915)을 제령83호로 공포했는데, 포교자의 자격을 제한하고 교회당 설립의 경우 총독부의 허가를 얻게 하는 등 신교의 자유를 제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사립학교령(1911. 8), 사립학교 규칙(1911.10), 개정사립학교 규칙(1915,3) 등과 같은 법령을 통해 기독교 학교를 옥죄고 종교교육을 제한했고,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각종 집회를 제한하고 설교를 감시했습니다. 성경 중 출애굽기 에스겔 등을 설교하지 못하게 하는 등 설교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셋째, 일부 찬송가를 금지시키거나 개사(改詞)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찬송가는 1934년에 편찬된 신편찬송가였는데,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주 예수의 강림이 불원하니” 등 만왕, 신앙적 결의, 재림 찬송은 금지곡이었습니다. 특히 만유의 쥬(32장), 면류관 드리세(33), 만왕의 왕(54), 믿음이 세상을 이김(201), 하나님은 피난처(206), 십자가 군병(222), 영원한 문아 열어라(286), 여호와만 섬기세(337), 의의 길(385)를 못 불렀습니다. 자구 수정을 강요당한 사례도 있습니다. ‘전능왕’(7장)을 ‘쥬시여’로, ‘만유의 대왕’(10)을 ‘우리의 쥬님’으로, ‘만유의 쥬’(38)를 ‘우리의 쥬’로, ‘만유의 주제’(48)를 ‘우리의 쥬님’으로, ‘태평왕’(56)을 ‘우리 쥬’로 변경하여 부르게 했습니다. 넷째는, 기독교회를 줄이기 위해 교회를 통폐합시켰습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 처 교회가 있었으나 108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경남노회 지역의 교회 3분지 1을 폐쇄시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한 것입니다. 가장 큰 박해는 우상숭배의 강요였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이름의 우상숭배 강요는 1935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10년간이 가장 고통스런 시기였습니다. 신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부인 한 것입니다. 이 일로 200여개 처교회가 폐쇄되고, 2천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했습니다. 이때 순교하신 대표적인 경남의 인물이 최상림, 주기철, 이현속 장로 같은 분들입니다. 이처럼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성도들이 은밀하게 하나님께 손을 펼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본이 패망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했던 권력은 길어야 십년입니다. 권불십년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투옥되어 있었으나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은 사악한 일제 권력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해방은 정치적 자유일 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였습니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던 26명의 종들(평양감옥 20명, 대구 3명, 부산 2명, 청주 1명)이 8월 17일 감옥문을 열고 출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안 일입니다만 일제는 패색이 짙어지자 기독교신자를 비롯한 민족지도자 5만 명을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지령을 하달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총독부 보호관찰령 제3호’인데, 학살 예정일이 8월 1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모가 결행되기 3일 전에 해방이 왔고, 처형대상자들이 처형되기 전날 밤에 석방된 것입니다. 해방이 하루만 늦었더라면 이들은 다 처형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31편 1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나이다. My times are in thy hand”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일제의 학살음모가 ‘이루어질 수 없는’ 미수사건이 된 것입니다. 거짓 불의 위선 음모와 같은 인간의 모사(謀事)는 한줌 모래 위에 쌓는 누각일 뿐입니다. 해방은 정치적인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얻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해방기념 주일을 지키고 자유를 주신 하나남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건국 대통령으로 기도할 때 늘 드렸던 기도가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옵소서.”(갈5:1)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너무 늙고 지쳤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민족을 위하여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하소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그는 90세가 되던 1965년 7월 19일 망명지 하와이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해방은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체제의 나라를 건설하느냐는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해방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변화의 길목이었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동시에 분단을 맞게 된 것은 한반도 문제에 소련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나타난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참전하였습니다. 일본과 홀로 싸우며 큰 희생을 치루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대해 대(對) 일본전에 참전을 요구했고 소련은 계속 미루다가 종전 6일 전에 참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위력을 본 일본이 곧 항복하자 소련은 별 희생 없이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한국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전 선언 후 소련은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기 시작하는데, 8월 12일에는 함흥 청진 원산을 점령하였고, 24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해 38도 이남인 개성까지 진출했습니다. 이것이 동북아시아 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인민위원회 중심의 공산주의 독제정권이 북한에 자리 잡게 됩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소련군에 의해 실질적인 분단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미군은 소련군 보다 한 달 늦은 9월 6일에야 인천으로 상륙합니다.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미군정(美軍政,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이 실시되는데, 당시 남한은 혼란했습니다. 그 혼란을 해방정국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 정치 결사체가 난립했습니다. 여운형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 주도의 조선공산당, 김성수 송진우 중심의 한국민주당 등이 조직되었고,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등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를 허위로 끌어들이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자 했으나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28일 발표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신탁통치안은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 안이 발표되자 민족 세력 중심에 있던 이승만, 김구, 좌익 계열인 조선공산당, 건국동맹 등도 반대했습니다. 특히 이승만은 미소합의에 의한 한국문제해결이라는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고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책은 소련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좌익은 찬탁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 및 좌파계열과 이를 반대하는 민족주의 계열 간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전자는 허울 좋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후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남한에서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결국 1947년 8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완전 결렬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이, 북한에는 소련이 주도하는 독자적 정부 설립을 촉진 시켰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전국적인 반탁운동은 남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독자적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물론 남한에서 좌익들의 반발과 폭동이 이어졌습니다. 소련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박헌영 계열의 좌익들은 반미운동을 선동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사회 혼란을 가중시킵니다. 이에 대해 남한의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남한만이라도 공산화되지 않는 나라를 만듦으로써 공산화된 북한과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여 남한의 독자적 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독립정부를 우선 남한만이라도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북한까지 참여하는 정부를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를 주장한 이가 이승만이었고, 후자를 지지한 인물이 김구와 김규식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남북 총선거는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남북협상을 통해 문제해결을 주장하고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4월 19일 북으로 올라갔으나 본격적인 회담도 못한채 이용만 당하고 빈손을 돌아왔던 것입니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김구, 김규식은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유엔은 1947년 11월 유엔 결의안을 통해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 모두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선거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1948년 1월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구성되어 한국에서의 선거관리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거부로 위원단이 북한 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자, 유엔은 다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우선적으로 선거를 통한 정부 구성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5월 9일 선거를 하려 했습니다만 일식(日蝕)예보도 있었지만 기독교인들을 배려하여 하루 늦춘 5월 10일 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의도로 일부러 주일 선거를 실시했지만(1946.11.3)남한에서는 주일을 피하게 한 것입니다. 이 선거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보통, 평등, 비밀원칙에 입각한 민주적 방식의 선거였고, 이것이 의회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준 것은 스위스(1971)보다 앞섭니다. 이 선거에서 총 200석 중 4.3폭동이 발생했던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명의 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5월 31일에는 구 중앙청 회의실에서 첫 국회, 곧 제헌국회를 개원하게 됩니다. 이때가 오전10시였습니다. 이 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이 무엇이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이윤영 의원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윤영 의원은 감리교 목사였는데, 서울의 종로구 갑 지역구 의원이었습니다.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공식 순서에도 없는 기도를 부탁하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은 기도했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신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 이 기도를 드릴 때 모든 제헌국회의원들이 다 일어섰습니다. 대한민국 공문서 제1호라고 할 수 있는 국회속기록 제일 앞에 바로 이 기도문이 기제 되어 있습니다. 국회는 헌법 제정에 착수하여 헌법기초위원이 제정한 전문 및 본문 103조의 대한민국 헌법이 7월 12일 국회 의결을 거쳐 7월 17일 공포되었습니다. 제헌 헌법은 개인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헌법 절차에 따라 7월 20일 회집한 국회 제32차 본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승만 박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7월 24일에는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선서했습니다. 8월 15일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독립(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기념사에서 그날의 행사가 우리 민족의 광복과 건국을 동시에 축하하기 위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여,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는 찬성 48, 반대 6표, 기권1 이라는 절대 다수로 대한민국을 합법적 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결의안, 제195-III호). 이어 미국을 시작으로(1949.1.1.) 개별적인 승인이 뒤따라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승인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때 참전이 통과되었고,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한국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단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의 원래 계획은 소련과의 합의를 통해 한반도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했고, 서울의 미군은 평양의 소련군에게 물자의 자유로운 교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이를 거부하고 38선을 차단합니다. 북한을 동유럽의 나라들처럼 공산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미 1945년 9월 20일자 전문에서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장 소련식 공산정부를 세우기보다는 좌우합작의 연립정부를 세우게 지시했습니다. 기만전술이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같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협조하지 않자 1946년 2월 공산주의자들의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처럼 광복된 지 6개월 만에 정부를 세워 놓고는 분단의 책임을 회피하기위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선포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한이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니 북한은 9월 9일 이미 세워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노선을 취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공헌이며, 이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46년 8월 미군정이 조사한 여론 조사,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8,453명의 응답자 중 70%에 해당하는 6,037명이 ‘사회주의’를, 7%에 해당하는 574명이 공산주의를 찬성했습니다. 곧 77%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를 찬성했고, 자본주의를 선택한 이는 1,189명으로 14%에 불과했습니다. 좌익이 유리한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반공(反共)노선을 고수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는 공과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승만(1875-1965)의 큰 업적은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제로 확립한 일입니다.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3년만인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을 거쳐 귀국했는데, 11월 28일(수요일) 김규식 김구와 미군 아놀드 대령과 같이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는 황치헌 목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성경책을 선물로 받고 인사말을 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성경말씀의 토대위에 굳건히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으로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이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해방된 조국에서 어떤 정부를 세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맺는말: 우리의 과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게 되었고, 오늘 75주년을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차 대전 후 탄생했거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나라는 85개국인데,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화와 산업회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합니다. 해방당시는 유엔기구로부터 원조를 받아 살던 최빈국이었고, 휴전 당시 국민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으나 70여년이 지난 2017년 3만 달러가 넘어 OECD회원국 가운데 22번째로,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에는 7번째로 3만 달러를 달성해 3050클럽(인구 5천만 명 이상,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인 국가)에 진입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해방을 얻지 못하고 자유와 인권을 탈취당한 채 독제정권하에서 신음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살게 되었고, 짧은 시기에 민주화와 산업화 두 가지를 다 성취했으나, 북한은 공산체제하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마크 크라머 라는 사람이 쓴 ‘공산주의의 검은 역사 The Black Book of Communism’라는 책을 보니 공산주의 혹은 공산국가에서 죽임을 당한인구가 무려 9천 4백만 명, 곧 1억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에서만 기근, 문화혁명, 대장정 기간에 6천5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고, 소련에서 2천만 명, 캄보디아에서 2백만 명이, 북한에서 3백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공산주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3대 세습국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이유로, 혹은 성경을 소지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투옥된 자가 5-7만 명에 달합니다. 월드워치리스트(WWL: World Watch List)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북한은 19년 째 세계 최악 기독교 박해국 제1위라고 합니다. 정치법 수용소에 갇힌 이들이 12만 명에 달합니다. 북한에서 살 수 없다며 생명 걸고 탈북한 이가 3만5천명에 달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공산주의 북한의 실상입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백주에 공산주의가 좋다는 사람들이 활개치고 다니고, 김정은 정권을 칭송하는 백두칭송위원회라는 괴이한 조직이 설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고 전향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장관에 임명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념적으로 혼란합니다. 해방정국과 비슷합니다. 1947년 해방을 기념하는 주일, 손양원 목사가 부산 제일영도교회에 와서 설교하면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좋습니까, 민주주의가 좋습니까?” 그때만 해도 이런 이데올로기에 무지했고 분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주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경주의입니다. 여러분,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손양원 목사를 순교자로만 아는데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였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좌익이 될 수 없고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움을 받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한 3개월 후인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에 잡혀 끌려 다니다가 28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북한은 일제하 35년, 공산정권 하에서 75년 꼭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난 가운데 시달리고 있습니다. 북한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6명의 한국인이 억류되어 있습니다. 김정욱(2013.10), 김국기(2014.10), 최춘길(2014.12), 고현철(2016.7), 김원호(2016.7), 함진우(2016.7) 선교사입니다. 북한 주민 탈북자를 도와주거나 성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혔고,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등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형에 처해 있습니다. 이들은 부서지는 육신을 안고 하루하루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억류된 자국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북한이 오만방자해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죽은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유해를 발굴하고 정중히 모시고 예우를 다하고, 억류된 자국민을 구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하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여 구출하지 않습니까?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이들의 구출과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둔가 진정한 해방과 광복을 누리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다시 종의 멍에를 매지 않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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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8
  • [기고] 국가권력은 예배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1. 문제점 제기 정세균 국무총리는 지난 7월 8일,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모임과 행사, 식사제공 등을 금지하고, 출입 명부 관리도 의무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7월 10일 오후 6시부터는 교회 수련회, 구역예배, 기도회, 성가연습, 성경공부 등 각종 대면 소모임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심지어는 정규예배에서 찬송가는 작게 해야 하고, 통성기도는 금지해야 하는 등 소소한 세칙까지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시 300만 원 이하의 벌금과 교회 운영을 일시 중단시킬 수 있다고 위협했다. 심지어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방역수칙을 준수하지 않는 종교시설에 대하여 신고할 경우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지했다고 한다. 수도권에 이어 광주, 전남 지역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게 되자 이를 예방하려는 조치로 볼 수 있지만 기독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한 제한 조치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교계 지도자들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교회 이름으로 모이는 집회를 제한하고 이를 규제하려는 것은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기독교회는 그동안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협조하고 방역 수칙을 준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마치 코로나감염병의 진원지인 것처럼 간주하고 교회 집회를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회 집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게 한다는 점이다. 셋째, 불교나 천주교 등 타 종교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고 유독 기독교회에만 이런 제한 조치를 강제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않고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감염자의 교회 출입으로 문제를 야기한 경우는 전체 6만여 교회 중 30여개 처 교회로 0.053%, 교회 관련 확진자는 전체 성도수의 0.0057%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는 매우 부당하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이며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제한 혹은 금지 조치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역사에 기대어 지적해 두고자 한다. 2. 국가권력의 예배의 자유 제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기독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worshiping community)라고 불리는데 예배는 교회의 생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예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고투해 왔고,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예배의 자유는 곧 신앙의 자유였고, 예배 금지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기원 64년 6월 로마의 화제 사건을 계기로 로마제국이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하기 시작했을 때, 최초의 조치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 금지였다. 기독교인들의 공개적인 집회를 불법화한 것이다. 그 다음 조치가 교회 지도자들의 색출이었다. 근거 없는 소문을 빌미로 기독교를 해로운 미신으로 간주했던 로마 사회는 기독교를 혐오집단으로 규정했다. 로마 사람들이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단하다는 이유였다(행16:21). 다시 말하면 로마인들이 받아드릴 수도 실행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습(unlawful custom)을 전한다는 이유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그 시대의 풍속으로 볼 때는 도널드 크리빌의 말처럼 ‘전도(顚倒)된 가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암적 존재로 규정되었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불법의 종교(religio illicita)로 규정되어 공식적인 집회를 금지한 것이다. 그래서 비밀집회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공개된 장소에서 회집할 수 없었기에 은밀하게 가정집에서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정교회’(domus ecclesiae)로 출발했다. 공개적으로 모일 수 없었고, 이방인이나 불신자들은 참석할 수 없는 기독신자들만의 모임이었기에 이런 비밀 집회를 ‘잠근동산’(enclosed garden)이라고 불렀다. 아가서 4장 12절에서 빌려온 이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이는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안이었다. 그가 신자들 간의 비밀 집회를 ‘잠근 동산’(hortus conclusus)라고 불렀던 것은 이교도나 불신자 등 외부인들에게는 닫혀진 비밀 집회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공개적인 집회를 할 수 없었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에서 모였지만 로마제국은 이 마저도 통제하고자 했다.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트라이얀(Traijan, 98-117) 황제조차도 어디서든 어떤 형식이나 조직이든 15인 이상 모이는 집회를 금지시켰을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집회의 제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그 첫 번째 조치는 집회의 자유였다.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종교 시장에서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조치가 바로 기독교에 대한 공인(公認)이었다. 공개적인 집회가 가능했고, 몰수 되었던 재산은 되돌려 주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의 자유는 곧 집회의 자유라고 할 수 있고, 집회 자유에 대한 통제는 기독교 탄압의 첫 번째 단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구소련이나 중국 같은 공산국가에서도 동일했다. 중국은 최근 기독교 예배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집회소에 대한 자기 표현인 십자가를 철거하고 집회소를 통폐합하고 축소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4개월간 안후이성 루안시, 마안샨시, 화베이시, 푸양시 등에서만 250여 교회를 파괴하거나 십자가를 강제로 철거했다. 집회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기간 루안시에서는 183개 이상의 교회 십자가가 철거되었다. 이런 집회 방해와 함께 18세 미만 청소년들의 예배 참석을 금지시켰다. 기독교 박해 국가 23위(오픈 도어즈의 발표)인 중국에서의 집회방해 혹은 집회 제한 조치는 기독교 박해의 첫 번째 단계에 속한다. 해방 이전까지 북한은 기독교가 융성했던 지역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2천여 개 처의 교회,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산정권의 수립과 함께 기독교는 서서히 멸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취한 첫 번째 조치가 집회 방해였다.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 것이다. 처음에는 집회를 제한하고 축소하고 감시했다. 두 번째 단계는 교회 지도자들을 검거하고 투옥시키거나 살해했다. 세 번 째 단계는 신학교를 축소, 통폐합하고 후에는 그 마져도 폐쇄했다. 교회당은 몰수 되거나 전용되었다. 집회소가 사라지고 공개적인 예배는 불가능했다. 물론 이와 병행하여 어용기독교 조직을 이용하였다. 북한에서 기독교 탄압의 결정적인 사례가 1946년 11월 3일 주일날 시행된 선거였다. 기독교를 탄압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11월 3일 주일날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예배를 방해할 목적이었다.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결의했으나 집회는 통제되었고, 이를 미끼로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교회는 서서히 북한 땅에서 사라져 갔다. 집회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기독교 박해의 첫 번 째 단계에 속한다.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도 기독교회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1910년 조선을 병탄할 당시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회는 1900여개 처의 집회소, 20만 성도, 300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이 넘은 재학생, 외국인 선교사 270명, 조선인 교역자 2천3백명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보다 더 높게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기독교는 선교사들을 통해 외국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기독교 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가 식민지배의 중요한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의 정책은 일면 탄압, 일면의 양면적인 것이었다. 탄압의 첫 번째 단계는 집회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집회를 감독하고 설교를 정탐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동향을 사찰하고, 목회자들의 거주 이전을 신고하게 했다. 이런 연유 때문에 조선 총독부에 제출했던 주기철 목사의 거출계(居出屆)가 남아 있다. 물론 기독교회에 대한 법적 규제를 병행했다. 후에는 기독교 집회소를 축소하기 위한 교회 통폐합을 실시했다. 1942년 경남노회 지역의 경우, 325교회 처가 있었으나 108 개 교회는 통폐합되어 교회수는 217개 처로 축소되었다. 경남노회 지역의 3분지 1의 교회를 폐쇄시킨 것이다. 집회에 대한 제한이나 예배 방해는 기독교 탄압의 시작이었다. 정리하면서 이상에서 집회 제한 혹은 금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역사에 기대어 제시하였다. 이번의 정규 예배 이외의 집회에 대한 제한 혹은 금지 조치는 코로나 현실에서 불가피한 잠정적인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제한 조치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훼손일 수 있고, 자칫 기독교에 대한 통제 혹은 탄압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록 그것이 비의도적인 잠정적인 요구라할찌라도 후일의 전례가 될 수 있고, 특별한 상황에서는 비의도성으로 포장된 의도적인 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고 불리는 국제적인 위기 현실에서 기독교회가 앞장서서 방역 수칙을 지키고, 코로나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협조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밀집 회합 조직 중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집회를 통제하거나 금지하는 행정 명령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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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0-07-21
  • [기고] 부산장신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2001년 교육부 인가를 받아 김해시 구산동에서 새롭게 시작한 부산장신대학교는 52명의 교육부 인가를 받은 신학생을 받았다. 최무열 교수, 박만 교수, 김형동 교수, 김은정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학교를 아름답게 세워갔다. 신입생이 학부를 졸업하기 전인 2003년에 신학대학원이 세워졌고 총회 인준 50명과 교육부 인준 25명 등 75명이 신학대학원을 입학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여러 교수가 세워지고 총회와 노회 그리고 교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훌륭한 목회자들을 길러내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이 약 20년이 흐른 2018년에 교육부로부터 3순위 평가를 받아 2019년 신입생부터 국가장학금 신청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새로 부임한 허원구 총장은 전국을 다니며 학생들의 학비를 구하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시술을 받기도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는 주인이 없다는 것과 둘째는 주인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주인이 없다는 것은 책임을 진 주체가 없음을 말한다. 학교의 위기에 자기희생이 필요한데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이 너무 많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통해 자신을 유익을 구하는 자들과 학교의 위기를 기회 삼아 자리다툼이나 조건부 기부를 약속하는 자들만 득실거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2020년 7월 교육부는 부산장신대학교에 대한 새로운 평가 결과를 발표한다. 총장 이하 모든 교직원은 교육부의 좋은 평가를 통해 학생들이 국가장학금이라도 받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필자도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미래의 부산장신대학을 그려야 한다. 먼저는 교육부의 평가와 관계없는 내실이 있는 학교를 만들 것과 다음으로는 학교를 지지하고 도와줄 중심 교회들을 늘려야 한다는 것. 교육부평가와 관계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 이는 영신과의 통합을 말하지만, 교육부가 영신 부산캠퍼스를 영신과 묶어서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안은 종교로 특화된 학교로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종교로 특화된 학교가 되면 교육부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산장신대학의 사복과나 특교과를 대폭 줄이거나 폐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과의 비중이 50% 이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현재 부산장신대학은 신학과의 비중이 50%가 되지 않음). 문제는 이러한 대안들로는 학교를 정상화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부산장신대학에 필요할까? 첫째, 대학원 위주의 학교로 전환해야 한다. 대학원 위주로 학교를 전환하면 교육부의 평가를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학원생들은 국가장학금이 없기 때문이다. 2001년 52명이 입학을 했을 때 학부 졸업생은 16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5년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75명의 학생 중 약 70명이 3년 후에 졸업했다. 따라서 학교 재정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석박사 중심의 대학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박사학위를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교수진을 제외한 나머지 교수들은 구조조정을 하여야 한다. 더불어 나머지 학과들도 폐지하여 순수신학 중심의 대학으로 변경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새롭게 변한 학교를 미국의 여러 신학교와 아시아와 남미의 신학교들과 연계하여 이들 신학의 장단점 등을 연구 발전시켜 아시아 신학의 중심이 되는 학교로 세워나가야 한다. 특히 학교 내에 가족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여 가족 중심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그들 자녀 교육과 생활 목회 경험 그리고 그들의 의료문제 등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신학교육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아시아에서 한국 신학을 동경하는 많은 학생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부산장신대학의 장점인 국외파 교수들의 이중언어를 통해 그들을 문제없이 교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부산 경남의 중견교회들이 부산 장신 출신의 목회자를 담임으로 청빙해야 한다. 학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총장 이하 이사장과 이사들 그리고 부산·경남의 교회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산·경남의 중견교회 목사 중에서 부산 장신 출신을 청빙하는 경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산장신대학교를 발전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해도 과부가 렙돈 두냥 드리듯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부산 경남의 중견교회가 지금이라도 부산 장신 출신의 담임 목회자를 청빙하기만 한다면 머지않아 부산장신대학은 여러 교회들의 힘과 지지를 얻어 안정될 수밖에 없다. 이제 부산장신대학교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 길에 오래전부터 12 기둥을 붙잡고 기도한 학생들의 눈물이 하늘과 연결된 향로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2001년부터 13년간 부산장신대학교를 다닌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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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기고] COVID19 이후 교회교육의 회복 및 개선 방안
    SNS에 코로나 19로 인한 진단과 이후의 대책을 논하는 여러 가지 글이 올라오고 있지만, 교회학교에 대한 위기에 대한 글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에 교회교육전문가로서 책임을 느끼며 이 글을 통해 고민하는 일선 교회교육 담당 교역자와 교사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다. 전통적인 교회들은 교회는 건물의 개념이 아닌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 공동체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교회당 건물과 성도의 숫자에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아부었던 한국교회에 이번 코로나 19는 교회를 특정 장소로만 생각하는 건물 중심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성도의 모임'이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고, ‘하나님과 만남’이란 예배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모이는 예배가 안 되고, 더욱이 ‘하나님과 만남’이라는 예배의 모습은 더더욱 갖추지 못했는데 이는 일시적인 변화가 생겼다기보다는 그동안 가르쳐 왔던 것에 대해 혼란이 생긴 것이다. 교회교육에서는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안 그래도 한국교회 전체의 60% 이상 교회학교가 없고, 그나마 교회학교를 가진 40%의 교회들마저 아이들이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가 이후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물론 소수의 교회는 온라인 서비스를 통해서 교회에 오지 않아도 각자의 집에서 교육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중지되었던 교회학교의 예배와 교육을 다시 정상적으로 이어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미 교회의 출석을 끊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언제든지 일이 생기면 안 나가도 된다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는 과제 앞에 큰 부담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앞으로 교회학교의 회복을 위한 방향과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교육의 회복 방향 교회학교의 문제는 이미 코로나 19 이전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고 단지 심화된 형태로 드러났다고 본다. 이를테면 교회교육이 그 내용보다는 숫자에 관심이 치중되었던 상황에서 코로나 19는 남은 아이들까지 출석을 걱정하게 된 수준에 이르렀다. 교회학교마다 이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생각이지만 이전에도 그 위기의 정도 차이일 뿐 수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교회학교의 회복 방향은 수적인 것보다는 그동안 부족했던 교육의 본질인 내용으로 가져가야 한다. 따라서 지금 몇 명이 남았든지 먼저 이 아이들의 신앙 성장을 위한 교육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교육적으로 피교육자의 수가 적을 때 개인을 위한 교육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위기가 오히려 올바른 교육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리고 난 후에 수적인 성장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점차 교회학교의 회복을 기대하게 된다. 1) 1:多數(소그룹 포함)의 교육보다는 1:1에 초점 맞추기 ① 개인의 신앙상태 및 상황에 대한 이해 확대 이미 교사들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코로나 19 이후에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예측이 안 된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부모의 생각에 움직이는 아이들은 그렇다 하지만 이후에 교회 출석의 의지를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신앙으로 이를 결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사가 아이들의 신앙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면 이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뿐 아니라, 사태 전후의 신앙교육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반 아이들은 多數지만 교사는 1:1로 아이의 신앙상태를 알고 있어야 한다. ② 개인의 ‘신앙 성장 로드맵’ 가지기 교사가 아이들의 신앙상태를 안다는 것은 개인의 신앙 성장을 위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어 아이들이 어떤 신앙 위치에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신앙 성장 로드맵’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순하게 ‘구원의 확신’ 여부부터 ‘교사의 관리가 많이 필요한 아이’인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혼자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아이’인지, 그리고 ‘신앙이 어린 친구들을 도울 정도가 되는지’ 등에 대한 신앙 성장 단계를 기록한 그림을 말한다. 교사는 이러한 신앙 단계에 따라 사태 이후 아이들의 교회 출석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아이들 개인 ‘신앙 성장 로드맵’을 만들어 보자. 그리고 이는 아이들의 신앙 성장에 적합한 교육을 위해 교재를 선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방향 제시가 될 수 있다. ③ 수적 회복 프로세스 가지기 수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무조건 전에 나왔던 모든 아이에게 똑같이 통지해서 오라고 하는 방법은 좋지 않다. 상황에 따라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기에 대상별로 분류하여 프로세스를 가지고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좋다. 우선 전체적으로는 그간의 상황과 이후의 새로운 교육계획을 담은 가정통신문을 작성해서 보내고, 첫 번째 부류로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을 알리고 전달만 하면 올 수 있는 아이들에게는 sns와 전화로, 두 번째 부모의 반대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님을 만날 심방 계획을 세우고, 세 번째 아이들의 마음이 돌아선 경우는 아이들 대상의 심방 및 미팅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후 교회학교의 변화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교회학교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앞에 언급한 교회학교 교육 방향이 한 아이에게 초점이 맞춰진 경우라면 아이들과 부모들은 교사를 대할 때 이전과 다른 교육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면 회복을 위한 노력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리고 다음은 선물 공세로 인한 단회적인 초청이 아닌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춘 전략적 전도 계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학교 전도전략은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한다. 교회교육 개선 방안 1) 예배에 대한 본질적 교육 Digital 도구는 코로나 19로 인한 여러 가지 악조건에서도 나름 방법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부여했다. 특히 예배에 대한 대체적인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어서 이에 대한 나름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후의 주일예배와 거의 중지되었던 교회교육을 재개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검토와 점검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가 ‘하나님과 만남’이라는 본질을 찾아가는 교육이 돼야 한다. 이는 교회학교의 예배 특히 유초등부 예배는 ‘예배자’로서의 기대보다는 ‘예배교육과 훈련’의 측면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예배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하고, 단지 교회에 오면 당연히 드리는 예배로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예배에 대한 교육이 우선되어야 하되, 예배의 목적에서부터 예배의 모든 요소에 대한 의미를 정확하게 가르치고 교회학교 예배를 통해 이를 함께 훈련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만남’이라는 예배의 본질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2) Digital 도구 활용에 대한 이해 범위 확대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의 가장 큰 간격은 Digital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다. Digital 도구를 게임과 탈선에 대한 염려의 시각으로 보는 부모들과 자신의 놀이와 존재감을 극대화하는 공감으로 활용하고 싶은 아이들 간의 이해와 현실의 충돌이 일어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 19는 이러한 Digital 도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계기가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교회는 Digital 도구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가져야 하는데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원격교육이다. 원격교육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학습자와 교육자 간에 원격통신 등 전파장치를 사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교회의 출석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원격교육을 통한 교회교육의 장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19는 원격교육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본다. 단, 원격교육이 학습능력의 편차가 다양함으로 인해 학생들에게 똑같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며, 나이 어린 학생들은 경우 별도의 심화학습이 필요함을 유념해야 한다. 둘째는 새로운 자기표현의 장으로의 활용이다. Digital 도구가 사용되는 cyber 공간은 획일적이고 고정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우리의 현실에서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발달 기회를 제공한다. 즉, 이 공간에서는 한 개인의 표현에 여러 친구가 공유하면서 이들은 하나의 공동체적 모습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그는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특성으로 각기 다른 집단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 이로 인해 그는 다양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 형성할 수 있어 현실 세계보다 훨씬 확장된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따라서 Digital 도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 교육의 대안으로 활용할 수 있다. 셋째는 개인적 소통 도구로의 활용이다. Digital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는 ‘개인적 소통’이다. 교육이 1:多數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효과적이지만 1:1의 도구가 될 때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효율적인 교육이 될 수 있다. 이는 다수가 같이 대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필요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소통 시간과 장소만 서로 맞으면 된다. 이로 인해 교사는 다른 아이들과 교육의 균형을 맞출 수 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긴밀한 상담을 통한 개인 신앙 관리가 가능하다. 3) off-line과 on-line 교육의 병행 주일예배와 교육이 재개되면 off-line 교육과 on-line 교육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기왕에 형성된 on-line 교육의 모든 방법을 없앨 필요는 없고, 여러 가지 교육의 필요에 따라 병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주일예배와 교육 그리고 주중 교육의 차별적 시행이라는 방향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예배는 분명히 주일에 드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교육은 주일 공과 공부 때 충분치 못한 교육시간을 on-line 주중 교육으로 확대할 수 있다. 이는 교육을 off-line에서만 해왔던 그동안의 방식에서 벗어나 on-line을 활용할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공과 시간을 주일에는 ‘storytelling’을 통한 성경 말씀의 전달 중심으로 진행하고, 주중에는 on-line을 통한 개인의 ‘이해와 적용’을 한다면 더욱 효과적인 성경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4) non-contact 교육 코로나 19가 가져온 사회현상 중 두드러진 것은 ‘사회적 거리 두기(non-contact)’인데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것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회문화로 남아 있게 된다는 예측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혼자서 먹고, 놀고, 즐기는 문화를 개발하는 것이다. 반면 교육적으로는 어울려 하는 교육도 필요하지만 혼자 할 수 있는 교육 컨텐츠가 개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에듀넷’ 운영이다.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들어올 수 있는 cyber 교회학교를 만들어 교회에서 배운 내용을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도록 교육 관련 내용을 디지털화하여 온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인터넷 서핑이 ‘에듀넷’까지 드나들게 된다면 교사가 가진 한계로 인해 contact 교육에서 얻을 수 없는 실질적인 결과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 밖에 인터넷 교재를 개발하여 교회나 청소년 스스로가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거나,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에 대해 탐색하는 공간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가면서 코로나 19로 인한 후유증으로 생사기로에 서 있는 한국교회, 특히 교회교육은 커다란 방향의 전환과 본질적인 교육으로의 회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는 회생 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숫자에 매인 교육에서 벗어나 한 영혼이 믿음으로 세워지고 성장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코로나의 풍랑에 좌초될지 아니면 더 빨리 갈지,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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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독자투고] 인간의 숙명과 창조주의 섭리
    오랜 인간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때 인간의 숙명(運命)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동양의 관상학과 사주팔자(四柱八字), 풍수지리 따위나 농업과 깊은 관계를 가진 음력을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삶을 통한 경험이나 통계적 시각에서 체계화시킨 인간의 숙명은 자유 의지적 선택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인생이 숙명적(宿命的)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한 사람의 숙명에 대한 타당성과 창조주의 섭리(攝理,야훼의 의지))와의 관계에 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창조주의 섭리‘라는 말은 창조론을 믿는 학자가 아닌 ‘진화론적 개념’을 따르는 학자들은 완강히 부정한다. 인간사의 모든 일은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 뿐 숙명 따위는 결과론적 변명이란 것이 행동주의자들의 태도인 반면 숙명론자들은 한 사람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숙명이나 운명을 강조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떤 사건이나 사고의 결과를 두고 마치 자기합리화를 위한 변명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인간생활에는 불가항력적인 사건도 적잖게 일어난다. 그러므로 무조건 인간의 운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가령,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향해 인도로 걸어가는 도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승용차와 기타 여러 종류의 차가 갑자기 운전미숙이나 엔진고장 등으로 인해 인도로 돌진하여 지나가던 행인을 치어 숨지게 한 경우를 목도하다보면 갑자기 피해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숙명이나 운명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불가항력적으로 닥친 사건을 두고 생각해 보면 그 순간 본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과는 전혀 관계없이 어떤 사고나 사건이 발생했다면 자유 의지적 선택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과 Covid19로 인한 수십만 명의 인명피해 그리고 근래 38명의 희생자를 낸 이천물류창고 폭발사건의 피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재에 가까운 이 모든 사건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숙명이란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들 사건에는 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즉, 우리나라 형법에서도 불가항력적인 사건과 긴급피난 따위의 행위는 흔히 무죄가 되는 이유가 바로 본인의 자유의지나 선택의 여지가 전혀 반영 될 수 없는 조건을 전제로 한 불가항력적인 경우에 한해 적용된다. 인간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두고 따져볼 때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종교의식, 기술이나 취미, 잠재능력, 성격, 생활방식에 따라 선호하는 기호가 다르고 선택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많은 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생활의 적응에 있어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능의 개념을 사고능력이나 종합적인 문제의 해결능력 또는 환경의 적응능력이라고도 한다. 나는 지금까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숙명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해서 나쁜 결과를 초래했는데도 마치 자기합리화를 도모하기 위해 숙명이란 말로 포장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수영을 좋아해서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사망한 경우, 흔히 사람들은 숙명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다. 익사를 방지하려면 아예 수영을 하러 가지 않으면 될 것이고 또 굳이 수영하고 싶으면 수영의 기술을 충분히 익혀 연습하면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본인의 자유의지와 선택이 전혀 반영될 수 없는 여건이거나 조건이 주어질 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형법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이란 상황은 자유 의지적 선택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5층 건물에서 갑자기 불이나 급히 대피해야 하겠는데 순간적으로 너무 급한 바람에 창문을 열고 급히 뛰어 내렸더니 그때 마침 불구경하던 다섯 살 아이가 깔려 죽었다면 살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을 분석해서 부주의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문제가 된다. 사건당시 창문을 열고 밖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잘 살펴보지 못하고 뛰어 내렸을 경우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반면에 반대로 5층에 불길이 심하게 번져 피할 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생명에 위험이 닥쳐와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밖을 살펴 볼 겨를이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뛰어내렸다가 설사 아이를 치어 죽였다 하더라도 살인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인 긴급피난이 적용’되기 때문에 무죄가 성립된다. ‘창조주의 섭리’가 곧 불신자들이 흔히 말하는 운명이나 숙명과 유사한 점도 없지 않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전문어부인 베드로를 가리켜 후일에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분히 계획적이고 마치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생각을 떠 올리게 한다. ‘모세의 사건’이나 ‘요셉의 일생’ ‘바울사도의 신앙심’ 그 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알파(창조주)와 오메(심판주)가 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손으로 지으셨다. 즉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이루어 졌음을 짐작케 하는 동시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창조의 역사를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시고 섭리 하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소불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우리는 만세전에 예비하시고 섭리하셨다는 말을 곧잘 한다. 구약이 신약의 예언서요 매시야가 오실 것과 예수님의 부활 역시 예언이요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적인 선택을 두고 논할 때 학자들은 인간여생이 마치 커다란 파이프 같은 카테고리라는 한계적 상황에서 좌, 우로 움직일 수 있는 미세한 운신의 폭이 곧 자유 의지적 선택이라고 역설하는 학자도 있다. 즉, 건강관리를 위해 음식과 운동을 적절히 병행함으로 다소 건강하게 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모든 인간은 병들거나 죽음을 면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란 사실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결정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일을 하다가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또 아무리 과학적으로 계획하고 검정하고 도전해도 Covid19처럼 자연 재난이 닥쳐오고, 태풍에 바닷물이 쓰나미로 밀려 올 때는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 막을 길이 없는 지극히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일 뿐이다. 육지와 하늘, 바다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각종 사고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자유에 의한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 나머지 도전하여 성취감과 혜택을 누구보다 많이 본 사람으로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이를테면 밤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은 무엇을 먹을까? 라고 생각해서 선택하는 일이나 오늘하루 나는 무엇을 할까? 라고 생각해서 결정하는 일은 모두가 본인의 생각과 자유 의지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지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이나 피 동체란 생각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디 불완전하고 순간순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심지어 불신자들도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때때로 급변하는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기적이란 말에 공감이 갈 때가 많다. 나는 부끄럽게도 나의 의지에 의해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를 지혜롭게 잘 피해가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았다. 솔로몬은 일찍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강조한다. 무소불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무척 쉬운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분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손에 쥐어 주어도 모른 다’는 속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울사도가 무식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이방전도에 힘을 쏟은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요 그분의 뜻에 달린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살아간다. 불교에서는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공덕을 쌓으므로 비로소 ‘성불’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숙명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유 의지적 선택’이란 뜻이 된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에서는 구원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요 아무런 조건 없이 받은 은혜”란 차원에서 개인의 공덕이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16절에 명시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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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기고] 21대 국회와 차별금지법
    4.15총선을 통해 여당이 180석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개헌을 제외한 모든 입법을 할 수 있는 거대 여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21대 국회가 개원되기 전인데 벌써 여당 인사들은 각종 입법을 예고하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가 4월16일 발표한 입장문에서 “제21대 국회는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 시행하는 ‘평등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21대 국회에서도 우리 기독교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차별금지법’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로 새로 출범하는 국회마다 발의되고 있으나,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동성애를 문제 삼으며 반대함으로 지금까지 통과되지 못하였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12월 12일 노무현 정부가 ‘차별금지법안’을 만들어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 12월 2일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안’ 발의, 2012년 11월 6일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명이 ‘차별금지법안’ 발의하였으나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2013년 2월 12일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명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하였고, 같은 해 2월 20일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 등 12명도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였으나 보수기독교의 반대로 본회의에서 철회하였다. 차별금지법을 만들려는 시도는 이렇게 국회의원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소위 대권 잠룡이라 일컫는 인사들이나 진보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요구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엔인권이사회, 유엔 경제사회문화적권리위원회, 유엔 국가별인권상황정기검토(UPR) 심의 등 국제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대한민국에 인종, 성별,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HIV 감염 등의 차별금지 사유의 항목이 들어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 권고하는 상황이다. 위와 같은 국내외의 흐름 속에서 21대 국회에서도 ‘차별금지법’의 발의는 반드시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제까지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못한 것이 “보수 기독교계의 집단 협박 및 항의 전화”, “보수 기독교계의 압력”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가 힘들거나 불가능할 상황이라고 예측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첫째, 대응팀(task force team)을 만들자. 한국교회언론회(4월17일)는 “기독교의 가치관과 활동을 제한하는 많은 법률들이 거대 여당을 통하여 끊임없이 제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예상하고 있다. 이런 예견을 앞두고 전직 기독국회의원, 법률가, 행정가, 교수, 신학자, 목회자, 언론인, 시민운동가 등 입법에 관한 전문적인 분들로 구성된 교파를 초월한 범기독교적인 대응팀을 만들어야 한다. 가능하면 현직에 있고, 사명감을 가진 경륜 있는 국회의원과 보좌관이 직접 대응팀원이 되거나, 자문위원이 되면 발의 이전단계부터 대응전략을 모색하기에 용이 할 것이다. 둘째, 대안을 제시하자.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발의하여 입법 예고하면 무조건 반대하며 폐기를 외쳐서는 안 된다. 대응팀에서 발의된 법안에서 기독교의 가치관에 반하거나, 기독교의 활동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 사항들을 면밀하게 찾아내고, 대안을 마련하여 수정을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도 그 내용을 빠른 시간에 알려 공유하여야 한다. 셋째, 조직적인 대응을 하자.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함에도 입법을 강행할 때에는 교회를 통해 전체 기독교인들이 연대 서명을 하여 국회와 언론에 전달함으로 의사표시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수정법률안을 만들어 통과될 때까지 조직적인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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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기고] 초기 기독교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 우리가 대역병(大疫病) 혹은 전염병을 말하면 중세기 특히 14세기의 흑사병을 생각한다. 그것이 대역병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유의 질병은 그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염병은 초대교회 시대에도 창궐하여 교회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시대에도 끊이지 않고 발병하여 인류 사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1918년의 스페인독감 이후만 보더라도 1957년의 아시아독감, 1968년의 홍콩독감, 2002~2003년 사스, 2003~2009년의 조류독감, 2009년의 신종 플루, 2015년의 메르스 등이고 최근(2019-2020)에는 중국 후베이성 무한(武汉)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 이런 질병이 창궐할 때 그 시대 교회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이런 호기심을 가지고 이번에는 초대교회 시대의 역병과 교회의 대응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역병(165-180) 첫 3세기 동안의 초기교회 시대에는 크게 두 차례의 국제적인 전염병이 발병했다. 첫 번째 경우가 2세기 중엽, 곧 165년 겨울에 발생한 역병이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21-180) 황제 치하에서 근동 실루기아에서 베르스의 군부대에서 발병한 이 역병은 180년까지 15년간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역병이 안토니우스 역병(Antonine Plague)인데, 이 병의 확산을 목격하고 기록한 그리스 의사의 이름을 따 ‘갈레노스 역병’(Plague of Gal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역병은 골(Gaul)로 그리고 라인강을 따라 확산되었고, 원정에서 돌아온 군인들에 의해 동부의 로마 제국으로도 전파되었다. 고대 사회는 통계에 무관심하여 정확한 사망자를 알 수 없으나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은 로마제국 인구의 4분지 1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한다. 매우 높은 치사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세균학자이자 의사학자인 한스 진저(Hans Zinsser, 1878-1940)는 “사망자가 많아 이탈리아의 도시와 마을이 공동화되고 황폐화 되었다”고 썼다. 이 역병은 일, 이년 정도로 유행하다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 무려 15년간 지속되었고 166년 이전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기 때문에 사태가 매우 심각했다. 황제 아울렐리우스 자신도 이 역병으로 180년 3월 17일 사망했다. 흔히 지병의 악화가 사인이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역병으로 고생하던 중 비엔나에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시신은 테베레 강변의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한스 진저는 이것이 서구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천연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엄청난 인구가 유실되자 인력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다. 두 번째 역병(249-262) 두 번째 발병은 249년 시작되어 251년 창궐하기 시작했다. 262년까지 계속된 이때의 전염병은 도시와 농촌으로까지 파급되었는데 이번의 역병은 홍역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키프리아누스 역병’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천연두나 홍역을 경험해 보지 못한 지역에서는 면역력의 부재로 피해가 컸고 치사율도 높았다. 이때 로마시에서만 하루에 5천명이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고 맥닐은 주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인구의 3분지 2가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우크(A. Boak)는 추정했다. 이때의 역병에 대해서는 기독교 관련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우리 가운데 많은 이가 이 전염병과 흑사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몇 년 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청천벽력처럼 그 어떤 재앙보다도 공포스러운 존재인 이 질병이 임했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기독교회의 대처 문제는 이런 역병이 창궐했을 때 기독교회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그리고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종교의 가치는 위난한 상황에서 유효한 역할을 통해 드러나는데 이 당시 대역병의 현실에서 종교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첫 째는 왜 이런 재앙이 일어났는가 하는 재앙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앙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제시해야 한다. 자연과학과 의학이 발전한 오늘에는 그것을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초대교회 당시는 사람들은 종교가 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방종교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도피였다. 그래서 이교의 사제들은 피신했고 고위층 관리들이나 부유한 이들은 도시를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이교도들은 환자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보아 격리만이 최상의 도피였다. 물론 그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았으나 도피가 최상의 대책이라고 여겼다. 부모는 자녀를 버렸고, 자녀도 부모를 버렸다. 돌보지 못한 자녀들과 연로한 부모들이 회생의 가능성이 고려되지 못한 채 보호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했을까? 이때의 역병에 대처 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데, 당시 교회는 모든 질병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보았고, 도피가 최상의 길이 아니라 보살핌과 배려라는 사랑으로 질병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점이 이방종교와 그 신봉자들과의 현격한 차이였다. 이때는 데시우스(Decius, 재위 249-51)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가 조직적인 박해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c. 200- c. 265)는, “이교도들은 처음 질병이 발생하자 아픈 자를 내쫓았고, 가장 가까이 이는 자들이 먼저 도망쳤고, 병든 자가 죽기도 전에 거리에 버려지고 매장하지 않는 시신을 흙처럼 취급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서 치명적인 질병의 확산을 막고자 했으나 아무리 몸부림쳐도 도망치기 어렵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랐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역병의 현장에서도 사랑의 시혜자이고자 했다. 자기만 살겠다고 도피하는 현실에서도 도피가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감염된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폈고 소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베풀었다. 도움을 베풀되,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했다. 키프리아누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단지 우리(그리스도인)들만을 소중히 여기고 우리끼리만 자비를 베푼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푸신 것 같이 관용을 베풀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며, 주님께서 권고하신 대로 핍박하는 자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내리셔서 씨앗들을 기르시고 이러한 모든 선하심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렇게 하신다. 만일 누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본받아야 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키프리안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역병이 절정에 달하던 260년 디오니시우스는 부활절 설교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 형제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무한한 사랑과 충성심을 보여 주었으며 한시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보살폈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었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들은 환자로부터 병이 감염되자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을 간호하고 치유하다가 사망을 자신에게로 옮겨와 대신 죽음을 맞았습니다.” 자신이 감염될 수 있고 또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형제 사랑을 실천했는데 이는 이교도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단어가 ‘파라볼라노이 παραβολάνοι’ 곧 ‘위험을 무릎쓰는 자들’이라는 단어였다. 3세기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파라볼라노이라는 칭호가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위난자들에게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했다는 중요한 증거였다. 디오니시우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사랑을 실천한 대가로 죽음을 맞았고, 또 이런 사랑을 실천했던 장로나 집사 혹은 평신도들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들이야 말로 순교자와 다를 바 없다고 설교했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후일 ‘사랑은 영혼의 손’(Love is the hand of the soul)이라고 말한 것이다.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키프리아누스나 디오니시우스, 그리고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등은 이런 역병이 기독교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든 자를 간호하고 위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푼 결과로 죽음을 맞기도 했으나, 모든 치료가 중단된 상태에서 기본적인 간호만으로도 사망률을 현저히 낮출 수가 있었다고 의사학자 맥닐은 주장한다. 물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쇠약해진 이들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 종교 신봉자들에 비해 기독교 공동체의 생존율이 월등히 높았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베푼 형제애적 사랑은, 이교 숭배자들의 마음을 열어 기존 종교를 폐기하고 새로운 종교를 수용하는 변화, 곧 기독교로의 개종이라는 종교적 이행(移行)이 이루어져 기독교의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이런 질병이 로마제국 쇠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에드워드 로밀리 보크(Author. E. R. Boak, 1888-1962)와 역사가들은 계속되는 일련의 역병의 발발로 인구가 감소하였고, 모자라는 군인을 농부와 지역 공무원으로 충당하였기 때문에 식량 생산량도 감소하였다. 또 도시와 농촌 등 행정 지원 부족으로 야만인 침략을 막는 로마제국의 역량이 약화되었다고 지적했다. 자연재해나 역병이 역사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런 대 변역의 와중에서 기독교는 절망한 민중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현세적이든 내세적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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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한국교회언론회 논평] 군을 무너트리는 행위는 좌시할 수 없다
    그 동안 군인권을 빌미로 우리 사회에 자주 등장하던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이 시민단체인 바른군인권연구소(대표 김영길)와 자유와인권연구소(대표 고영일)로부터 지난 8일 “군사기밀 보호법 및 무고/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임 소장의 국방부 군인 복무정책 심의위원회 위원 해촉을 촉구하는 요청도 하고 있다. 그 고발의 주된 내용은, 두 단체가 낸 성명서에 의하면, 임 소장이 지난 2018년 12월 소위 계엄령 문건이라며 폭로한 사건으로, 기무사령관을 지낸 이재수 전 사령관을 죽음으로 내 모는 계기가 된 사건과, 2018년 7월 박찬주 대장에게 소위 ‘공관병 갑질 사건’으로 프레임을 씌워, 대한민국 군대의 4성 장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을 들고 있다. 또 2017년 11월에 국방부가 군인들의 복무 주요 정책을 다루는 정책위원회 심의 위원에 임 소장을 위촉한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이를 해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이 위원회의 심의 위원에 해당하는 사람은, 군대에서 3성 장군급(차관급)으로 하는데, 임 소장은 2004년 군형법 92조 6(항문성교 금지)을 이유로 군대 입영을 거부하여, 헌법 제39조 ‘국방의 의무’를 위반한 사람으로,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발 내용은 첫째는 형법 제156조의 ‘무고죄’ 조항인데, 임 소장은 피해자 박찬주로 하여금 형사 처벌을 받게 할 목적으로, 공무소인 국방부 종합민원실에 피해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하였다고 본 것이다. 둘째는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보고 있다. 임 소장은 피해자(박찬주 대장)가 공관 비품을 절취하였다고 언론 기관에 보도 자료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에 대한 무혐의 처분이 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언론에 허위 사실을 적시함으로, 피해자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군사기밀 보호법 위반행위이다. 소장(訴狀)에서는 임 소장의 소위 계엄령 문건 유출은, 기무사가 작성한 문건이라면 군사기밀보호법상의 군사기밀을 일반에 누설한 경우로 군사기밀 보호법을 위반한 경우에 해당하고, 피고발인이 작성하여 생성한 문건이라면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죄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2009년에 임태훈 소장에 의하여 설립된 시민단체로 국방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고 있으나, 2012년 민주당 비례 대표에 공천 신청을 한 적도 있고, 또 2017년 11월에는 국방부가 군인들의 복무 주요 정책을 다루는 정책위원회 심의 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여, 정치적으로 편향된 시민단체라는 지적을 받아 온 바 있다.이 단체는 나름대로 군대 내 인권을 개선한다고 하여 출발했지만,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의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현상금을 내건 건이 법에 어긋난 ‘모금 활동’을 벌여서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거기에다 이번에 시민단체인 바른군인권연구소와 자유와인권연구소로부터 “군사기밀 보호법 및 무고/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당한 사건은, 임 소장이 과도하며 과욕에 의한 폭로성 행위가 문제점으로 보여진다. 군인권을 위한 활동도 필요하지만, 피의(被疑) 대상자를 억울하게 하고, 국가의 기밀을 비전문가 입장에서 함부로 폭로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할 문제이다. 군인권센터는 지난 10년간 활동에서 시민단체로써 상당히 알려졌다. 그것은 그만큼 책임감과 정확성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발 사건을 검찰에 접수한 바른군인권연구소와 자유와인권연구소가 발표한 성명서에 보면, 군대의 생명은 보안과 군기이며, 군인은 명예를 생명과 같이 여기는데, 이에 대하여 (군인권센터는) 군에 대한 불신과 장군의 명예를 더럽히는 치욕스러움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군대는 국가 안보의 최후 보루이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아주 막중한 역할을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군인권센터가 무리한 활동을 통하여 군을 무력화 시키고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데 ‘갑질’ 행동을 한 것이 법률적 판단으로 잘못이 드러나면, 이에 대하여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이든지 세우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무너트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우리 군의 기강과 명예, 수고와 희생을 세우는 것은 민/군 서로 간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만큼 안보 문제는 중요하다. 만약에라도 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곧 국가를 해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군이 무너지고 국가가 해체된다면 누구에게 유익이 되며 누구에게 피해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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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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