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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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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9회 부울경기독교수 선교대회에서 발표된 기조강연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1. 머리말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삶의 거의 모든 분야를 결정하는 오늘날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기독교적으로 정치하고, 사업하고, 예술창조 활동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기독교적으로 학문하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 할 수 있다. 다른 어떤 활동보다 오늘날의 학문을 기독교 신앙과 조화시키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학자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활동을 신앙과 연결시키는데 어떤 확실한 지침을 기독교 학자들이 제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정신활동이고 신앙과 가장 근접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활동 거의 전부가 지식에 근거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기대를 받고 있는 기독교 학자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지식인들의 이런 고민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헬레니즘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해야 했던 초대교회 지식인들도 그들의 신앙을 그 시대의 학문과 연결시키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시의 학문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려 했던 Justinus,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Irenaeus, Eusebius 등과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Tertullianus, 지식을 초월한 신앙을 강조한 Augustinus, Anselm of Canterbury, 그리고 양자의 종합을 시도한 Thomas Aquinas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있었다. 현대에도 Herman Dooyeweerd, Cornelius Van Til, Ravi Zacharias, Francis A. Schaeffer, Gordon Clark, G. K. Chesterton, C. S. Lewis, Carl F. H. Henry, Edward John Carnell, Bernard Ramm, Alvin Plantinga, Nicholas Wolterstorff, Bob Goudzwaard, Mark Noll 등의 학자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였다.
한국 교회도 이제 100여 년의 역사와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신도를 가지고, 수많은 신학자들과 학자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과 학문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일어나고 같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2. 현대 학문에 대한 이해
현대 학문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용은 전혀 없이 형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내용이 거의 전부인 역사학에 이르기까지 현대 학문은 매우 다양하므로 공통되는 특징을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진리발견을 그 목적으로 한다. 사실을 밝혀내고, 주어진 현상을 바로 설명하며, 원리나 법칙을 발견하여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역사학도 단순히 옛날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한, 두 가지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며 미래를 준비하려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학은 단순히 사실을 연대에 따라 기록하는 연대기 혹은 실록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학문이란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 논리적 체계 (systematic)가 있어야 한다. 앞의 발언과 뒤의 발언이 서로 모순되어서도 안 되고, 모순되는 명제를 한 글에서 주장해서도 안 된다. 유기체에서 모든 부분이 다른 모든 부분과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듯 한 학술논문은 전체적으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예술과 다르다.
(2). 현대 학문에 사용되는 방법론의 기본은 인과론 (causality)이다. 물론 양자물리학에서는 인과법칙이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인과론이고, 인과관계가 분명해져야 어떤 문제가 설명(explanation)되거나 예측 (prediction)될 수 있다. 물이 어는 것은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갔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면 날씨가 추워질 때 물이 얼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과학은 그 이전의 Aristoteles 과학의 목적론과 대조된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인과론적 설명보다는 공감하는 상상(sympathetic imagination)을 통한 이해(understanding)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실증주의에서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사용되는 방법론이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모든 학문은 원칙적으로 객관적 (objective)이라야 한다. 실제로 어떤 것이 객관적이며 그것이 사실 객관적인가에는 항상 논란이 있지만 모든 학문은 객관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개인적인 감정, 감각, 이해관계, 경험 등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general) 것이라야 보편적 진리란 전제가 깔려 있다.
(4). 이론이나 결론은 직관, 경험, 자료에 의하여 실증될 수 있어야 (verifiable) 한다. 현대자연과학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논리적으로 일관성만 있으면 충분히 객관적이라고 믿었다. 모든 인간에 공통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그 이성의 논리적 판단에 어긋나지 않으면 진리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Galileo 이후의 현대과학에서는 논리학과 수학을 제외하고는 실증될 수 없으면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진리로 수용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인문학인 역사학에서도 마찬가지다.
(5). 한 이론의 대상은 동질성을 가져야 한다 (homogeneity of the objects field). 즉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어야 같은 학문의 범주에 속할 수 있고, 동일한 체계에서 논의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영역으로의 전이 (“stepping into another field” - metabasis eis allo genos)는 허락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달(月)’과 ‘10원’은 동일한 이론체계에서 다루어질 수 없고, 심지어 ‘몸’과 ‘마음’도 동일한 체계 안에서 논의될 수 없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발언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학문적 명제가 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존재’란 지극히 추상적인 공통분모 외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6)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 (practical) 이라야 한다. 이런 관점은 이미 Bacon에 의해 시사되었지만 Comte에 의하여 강화되었고, 최근에 와서는 매우 두드러진다. 최근에 과학과 과학기술의 차이가 점점 무시되고 있는 것도 그런 경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진리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진리란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다. 힘 혹은 능력이 있어야 믿을 수 있는데 지식은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Bacon). 진리를 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Savoir, c'est pour prévoir. Comte),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제공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응할 수 있다. 역사학에도 이런 의의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학문은 넓은 의미에서 실용적이다. 논리학, 수학, 천문학, 이론 물리학 같은 순수학문은 아무 실용적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기초가 없으면 실용적인 학문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 학문은 직접적으로는 실용적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실용적이고, 실용적인 결과를 위해서 필수 불가결하므로 매우 실용적이다.
3. 경쟁관계에 있는 학문과 종교
예술과 달리 학문은 종교와 경쟁관계에 설 수 밖에 없다. 양자가 다 진리를 주장하고 (truth claim) 있고, 그 진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든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안 학문의 발달은 다른 어느 분야의 발달보다 인류에게 더 큰 힘을 제공하여 이익을 끼쳤고 사람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인간이 개발한 다른 어떤 능력보다 더 큰 힘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인류는 학문에 대해서는 상당한 믿음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주장하는 진리와 그 진리가 가능하게 하는 힘 때문에 학문은 종교와 갈등관계에 서게 되었다.
학문과 종교의 갈등은 이미 학문의 생성과 발전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상당히 오랫동안 학문은 종교를 “대체”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종교를 대체 하고 유학은 고대 중국의 무속종교에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철학이 그리스 종교를 대체했다면 그 철학은 아직도 종교의 형태로 남아 있는 기독교와 경쟁관계에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초대교회 교부 Tertullianus는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신앙의 도시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고 반문함으로 지식과 신앙의 갈등관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기독교는 인간의 모든 안전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하여 보장받는 것으로 믿는 반면에 그리스 사상에서는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와 법칙에 삶의 안전보장을 위탁한다. 그런데 그 존재와 법칙을 알아야 그것에 순응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진리를 아는 것, 곧 지식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비록 서양 중세에는 Thomas Aquinas의 사상에 따라 자연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그리고 초차연의 은혜 영역에서는 믿음이 지배하도록 영역을 분리함으로 학문과 종교의 불안한 공존이 시도되었지만 만족스런 조화는 이룩하지 못했다. 오늘날의 과학적 학문은 역시 그리스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적으로 학문한다는 것은 다른 편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경기하는 것과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다.
물론 현대의 과학적 학문에서는 종교적 요소는 거의 다 제거되었지만 그러나 그 유산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아직도 학문은 종교적 신앙과 경쟁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실용적인 가치 이외에 그 자체로 진리요 다라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그 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는 학문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어떤 형식적인 체계도 그 체계 안에서 그 체계의 타당성이 증명될 수는 없다 (Gödel). 학문에 대한 믿음은 인간 이성을 Archimedes의 거점으로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적 성격을 갖는다. 학문의 권위가 인간 이성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전제라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P. Feyerabend는 자연과학도 하나의 이념 (ideology)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4.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현대 학문
학문과 종교의 관계에는 3 가지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즉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과 (2) 성경이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 혹은 (3)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학문이란 입장은 대부분의 비기독교 학자들이 취하는 것이다. 학문이 그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학문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미신에 불과하던지 학문이 제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제시하므로 학문과 갈등관계에 설 만큼 권위를 가지지 못하거나 갈등관계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학문의 결과에 더 의존하므로 학문은 그들에게 일종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다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종교적’이란 함은 종교를 매우 넓은 의미로 이해해서이다.
상당수의 기독교인인 학자들은 (3)의 입장, 즉 학문과 종교의 영역은 서로 다르므로 양자가 병존할 수 있고 상호관련도 상호갈등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부분적으로는 불신 학자들과 동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손쉬운 타협이다. 상당하게 많은 경우 그런 입장을 견지할 수 있으나, 양자가 주장하는 진리가 상반되는 경우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대부분은 학문의 편에 서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1)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은 (2)의 입장, 즉 성경이 학문보다 더 권위가 있고, 학문은 성경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의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 입장을 다음과 같이 변호해 볼 수 있다.
1)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전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모든 영역에서 절대주권을 행사하시고,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않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절대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청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 논리, 법칙, 이성, 경험 등도 모두 하나님에 의하여 가능하고 하나님에 의하여 그 정당성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학문이 발견한 진리도 그것이 진정한 진리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물론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진리로 믿을 때 가능한 주장이다. 학문의 결과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종교적 전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종교적 전제다.
2) 학문적 지식은 항상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A. 과학적 학문은 “이런, 저런 양상” (modality)을 대상으로 하고 “이것, 저것 등 개체”(individuality)를 상대하지 않는다. “노란 색”은 학문은 개나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 혹은 양상이고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개체다. 학문은 보편적인 것을 취급해야 하는데, 양상만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 우리 집 뜰에 서 있는 개나리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개체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을 취급하는 학문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역사학은 “이순신”의 업적이나 영향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으나, “이순신 학”은 역사학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상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존재하는 여러 개체들에 속해 있는 속성 (property)이다. “노란 꽃” 은 있지만 “노란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하면 칠판에 그려졌거나 종이에 인쇄가 되어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진정한 3각형이 아니다. 3각형은 세 직선으로 이루어지고 , 직선은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일 뿐 넓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3각형은 이미 하나의 개체이므로 기하학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3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음을 증명하는데 분도기로 세 각을 제어서 합산하지 않는 것은 분도기로 젤 수 있도록 눈에 보이는 3각형이 진정한 3각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이 H₂O란 것도 비슷하다. 실재하는 물은 H₂O외에도 여러 가지 이물질을 다 포함하고 있다. 순수 H₂O는 3각형과 마찬가지로 이념으로만 존재한다. Max Weber는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하는 것들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형(ideal types)이라고 주장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순수 자본주의 국가나 순수 사회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문이 취급하는 대상은 실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이념(ideas)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 세계는 모두 개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노란 색을 보지만 그것은 노란 꽃, 노란 종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학문은 원칙적으로 개체들을 그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면 학문의 영역은 매우 제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만약 요즘 점점 더 인정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개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양상들의 합 이상”이라면, 개체를 대상으로 할 수 없는 학문의 세계는 지극히 제한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B. 학문이 상대로 하는 대상은 항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나머지는 동일하다는 전제하에” (“others being alike” = ceteris paribus)는 모든 이론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모든 현상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가지만 변하고 다른 것은 모두 그대라 남아 있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물은 0도에서 어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물이 실제적으로 다 0도에서 어는 것은 아니다. 물의 순도, 물이 위치해 있는 장소의 기압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물은 0도에서 언다”는 것은 물의 순도, 기압 등 다른 모든 조건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문적 이론은 Procrustes의 침대가 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Procrustes는 여관을 운영하면서 침대의 길이보다 키가 큰 손님은 머리나 발을 잘라서 침대에 맞추고 침대보다 짧은 사람은 잡아당겨 침대길이에 맞추었다. 말하자면 유기적이고 지극히 복잡한 현실을 학문적 이론으로 끌어 맞추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Karl Popper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우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현실을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을 이념의 틀에 맞추기 위하여 온갖 강제를 다 동원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학문적 이론의 권위를 과대평가 하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Procrustes의 침대를 만들어서 수많은 사람의 머리와 다리를 잘라버렸다 할 수 있다.
C.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학문이 설명할 수 없다. Max Weber는 학문 (Wissenschaft)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Tolstoy의 주장에 동감을 표시했으며 Wittgenstein은 그의 Tractatus에서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은 과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세계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삶의 의미, 사랑, 고통, 존엄성, 자유, 평등, 정의감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다 중요하지만 학문이 그런 것을 전제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도 없고 그것에 도움을 줄 수도 없다. 이론적으로 사랑을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명된 사랑이 우리로 사랑하는데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
3) 학문도 하나의 게임이다. 게임의 특징은 그것이 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동의하는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학문이란 게임의 규칙은 앞에서 제시된 학문적 이론의 요구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은 어떤 그 타당성이 우리의 직관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어떤 절대적 권위에 의하여 결정된 것도 없으며 어떤 객관적 근거에 의하여 확실하게 증명된 것들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자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후에는 달라질 수 있는 역사적인 것들이다. 현대과학 이전 Aristoteles 물리학에서는 목적론이 자명하게 보였지만 지금은 인과론이 그렇지 보이고, 인과론도 양자 물리학에서는 절대적이 아니라 한다. 그들 조건은 궁극적으로 학문 공동체의 약속에 불과하다. Th. Kuhn과 M. Polanyi (Personal Knowledge)는 영원불변한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학문공동체(academic community)가 학문과 학문 아닌 것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Thomas Kuhn에 의하면 한 시대의 과학의 성격은 그 시대의 과학 교과서가 대변한다고 보았다 textbook science). 그리고 학문의 “혁명”에서 혁명 이후의 paradigm이 그 이전의 것보다 더 발전된 것이라 할 수도 없고 그 전의 것을 포함하거나 능가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 이름에 “학문의 발전”이란 말 대신 “학문의 혁명”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게임이라 하여 심각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Huizinga는 인간의 문화 활동 거의 대부분을 놀이로 취급했다 (Homo ludens). 다만 그것이 어떤 만고불변의 규칙이나 영원한 직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에 의하여 만들어진 규칙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규칙에 적용되는 분야에서만 그 타당성이 인정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생물학적인 생존과 생활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에서 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할 수 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으나 꼭 한국식으로 먹어야 사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한국식으로 먹는 것은 놀이의 성격을 갖는다.
게임이기 때문에 학문은 상대적이고 부분적이다. 건물의 높이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건물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물질이 땅에 닿을 때까지의 시간을 재어서 계산하는 방법, 3각 측량법도 있지만 긴 줄자로 재는 방법도 있다. 한 가지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 할 수 없다. 과학적 설명은 주어진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학문을 하나의 놀이로 상대화하면 학문 발전에 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학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비판적, 상대적 태도이고 그런 태도로 접근할 때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창조는 “관념의 유희” (play with ideas)로 이루어진다. 학문을 종교적으로 절대화해 놓으면 비판적인 접근이 불가능하고 창조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기독교인이 더 훌륭하게 학문 활동을 할 수 있다.
5. 기독교적으로 학문하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명령은 학문 활동에도 적용된다. 진리 발견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기독교적 학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학문적 진리 발견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될 때만 그것은 가치를 가진다. 만약 진리 발견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이라면 학문은 종교의 위치에 서게 되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학문연구를 통해서 발견된 진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이 될 때 기독교 학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1) 그 진리가 정말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가를 재점검하고, (2) 그것과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경의 가르침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했는가를 반문해 보며, (3)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는 당분간 기다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적어도 너무 성급하게 그 어느 쪽을 취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적이고 그 이상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할 분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도 아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 이외에는 영원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학문적 연구로 발견된 진리는 얼마든지 바꿔질 수 있다. Ptolemaeus의 물리학은 Newton의 물리학으로 대체되었고, 그것은 다시 Einstein의 물리학으로 수정되었다. 양자 물리학은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한다.
우리는 가끔 과학의 발견을 이용하여 성경의 내용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주객이 전도된 방법이다. 지금 진리인 것으로 나타나는 과학적 발견이 항상 진리로 인정받으리라는 보증은 없다. 그리고 그런 시도는 과학적 지식을 과대평가하고 성경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즉 과학적 발견은 확실한 반면에 성경의 가르침은 좀 더 증명되어야 할 만큼 불확실하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성경보다 과학을 더 믿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과학종교일 것이다. 과학의 주장이 과학보다 더 확실한 근거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으면 몰라도 그 자체로 절대적이라 믿으면 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최근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학문과 기독교 간의 갈등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이라 할 수 있다. 특히 Richard Dawkins의 전투적이고 도발적인 저서들이 이런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3 가지 입장이 잘 구별된다. 창조론을 전혀 부인하고 진화론만이 옳다는 입장, 진화론은 과학적 이론, 창조론은 종교적 신앙의 내용으로 양자를 다 인정하는 입장, 그리고 창조론을 믿고 진화론을 상대화하는 입장 등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입장에는 진화론은 전적으로 부인하는 ‘젊은 지구 이론’ (young earth creationism)과 진화적 창조론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후자는 하나님께서 진화론적 과정을 사용하셔서 생명체를 창조하신다는 입장이다. 그런 주장은 창2:2-4절로 그 주장의 타당성을 성경으로 증명하려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진화론이나 창조론은 둘 다 과학적으로는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이다. 다만 진화론은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적 전제이지만 그 가설을 실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Popper의 주장대로 과학이 성립하려면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이 있어야 하고, 비록 이제까지는 반증되지 않은 경우라도 반증이 가능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과학적 이론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 가지 경우로라도 반증이 가능하면 과학적 이론으로서는 그 자격을 상실한다. 진화론 가설에 대해서 창조론자들이 계속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설에 그만큼 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캠브리안 폭발 (Cambrian explosion)을 둘러 싼 논란들은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생물학적 증거를 둘러싼 문제들 외에도 진화론은 “우연”의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인간의 자아의식과 언어현상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제시되지 않았다 한다.
물론 좀 더 확대해서 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진화론이 전제하는 자연의 동일성 원칙(the principle of uniformity of nature)이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지, 그리고 과 그것에 근거한 외삽 (外揷=extrapolation)이 과학적으로 합법적인지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연의 동일성 원칙이 영원불변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어길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에 근거한 것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것도 하나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법칙에 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6. 맺는말
신앙이 학문적 지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식이 신앙에 의하여 결정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신앙에 입각한 지식만이 참 된 지식이다. 지식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한 Augustinus나 Anselmus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 이란 결론을 내렸다. 즉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안다는 것이다. 만약 학문적 노력에 의하여 어떤 진리가 확실하게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진리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학문과 이성이 하나님과 독립하여 자율적이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적인 신앙의 위치에 서고 만다. 그러므로 학문은 종교적으로 중립적이 될 수 없다.
참고문헌
Conford, F. M., From Religion to Philosophy. New York: Harper & Row, 1957
Feyerabend, P., Against Method, New Left Books, 1975
Gerth, H. H. & C. W. Mills eds. From Max Weber,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8,
Holmes, Arthur F., All Truth is God's Truth, Grand Rapids, Eerdmans, 1977
Kant, Immanuel, Welches sind die wirklichen Fortschritt, die die Metaphysik sein Leibnizens und Wollf's Zeiten in Deutschland gemacht hat? 1804
Kuhn, Thomas,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Polanyi, M., 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 Chicago: Chicago University, 1974
Popper, Karl, The Poverty of Historicism, London and Henley: Routledge & Kegan Paul, 1957
Stevenson, J., ed., A New Eusebius: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history of the church to A.D. 337, London: S.P.C.K., 1957
Wittgenstein, L.,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
Wright, G. H. von, Explanation and Understanding, Ithi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71
(영문 요약)
To Do Sciences in Christian Way
Christian academicians have been wrestling with the problem ever since Christian faith was introduced to the Hellenistic world.
Most academic activities today have scientific character. They have to be systematic (logical), objective, empirical, useful, use the method of causal explanation and have homogeneous object field. Science is not value neutral as many claim; they are more for power than satisfying curiosity.
Conflict between Christian faith and science is inevitable for they both claim truth and truth, whatever the kind, is supposed to provide security. Many insist that science has replaced faith, some tried uneasy compromise, some put them opposite to each other, and some tried to explain away Christian faith with science. But the ultimate validity of scientific knowledge cannot be proved scientifically. It itself has a religious presupposition.
Both Christian faith and science claim truth and in some their claims collide each other. In principle we must put science under God’s sovereignty. If there is any truth in science, it also is God’s truth. The principles all sciences presuppose, such as the principle of the uniformity of nature, are, should be God’s principles if they are true.
Science is limited because it deals only aspects of reality, not the individuals, while the reality is composed of individual objects. Scientific knowledge is inevitably abstract because the method requires them to leave aside those irrelevant aspects (ceteris paribus). Further, science can never explain or solve the most important elements of human life, love, meaning of life, human dignity, freedom, right, etc.
Science is also a game. It is exercised according to the rules agreed upon by the contemporary academic communities. Therefore, they are temporal and transitory. If there is any conflict between science and Biblical teachings, (1) we should examine whether the scientific conclusion is truly valid. If is undoubtedly true, (2) we may reflect whether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correct. If the conflict is still not resolved, we should wait patiently until further discoveries are made. Not all the so-called scientific truths have been valid always and our understanding of the Bible is not absolute.
science, faith, truth, presupposition,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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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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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만 목사의 삶과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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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산ㆍ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에서 발표된 논문입니다.)
장성만 목사의 삶과 이념
김대식 (동서대학교 교수, 전 장성만 박사 비서실장)
시작하면서
학교법인 동서학원의 설립자인 장성만 목사는 신앙 에세이집 ‘약속의 땅’에서 “그 곳이 어디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 ‘거룩한 땅’이요, 그 부름(使命)에 발 벗고 나서는 자가 사명자인 것이다.”고 설파하였다. 믿음 아래 예배당 안과 밖에서 열정적으로 예수의 삶 쫓아 사역과 인재양성, 기독교정신 국민에 전파한 정치활동으로 한평생 봉사한 인물이다.
2015년 12월 6일 소천한 장성만 목사(1932-2015)는 “예수 빼면 허수아비”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삶 속에서 예수의 정신을 실천한 크리스천이었다. 장 목사는 예배당 안에만 머물지 않았으며, 성(聖)과 속(俗)이 구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배와 삶이 일치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크리스천은 적극적으로 사회 속에 뛰어 들어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런 믿음에서 장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으로 평생을 사역활동과 함께 인재양성, 정계 활동에 바쳤다. 대학을 세워 인재를 키우고 젊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국회에 나가 입법 활동을 통해 기독교 정신을 온 국민에게 펼치는 일도 목회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발 뿌리에 구원을 갈구하는 백성이 있는 한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든지 그 사람은 복음의 사역자라고 했다.
“생애에 일어난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계시다”면서 “겪은 수많은 일들 속엔 기쁜 일, 슬픈 일, 깜짝 놀랄 일, 숨이 막히는 고통, 환희의 순간들이 짜깁기처럼 섞여 있었지만 그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요, 은혜였다” 고 한 장성만 목사는 감사와 영광을 오로지 주님께 돌렸다.
장 목사는 1961년 일본 오사카 성서신학교를 졸업한 뒤, 1964년 미국 신시내티신학대학원을 수료, 1975 미국 미드웨스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80년까지 경남공업전문대학교 학장역임, 1981~88년까지 제 11,12대 국회의원 역임, 1988~2015년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1995~97년 동서대학교 총장역임, 2005~2015년까지 21C 포럼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77년에는 부산시 문화상(지역사회 개발분야)을 수상하였으며, 1978년에는 대통령 표창(교육공로)을, 2007년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장성만 에세이 전집 5권〉과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 〈民意와 政策사이〉, 〈디지털 사회를 사는 지혜〉 등 27권이 있다. 본 원고는 <경남정보대학교 50년사> 및 그 밖의 자료를 통해 요약, 발췌하였음을 밝혀둔다.
1. 첫 번째 부르심: 목회자로서의 삶
장 목사는 마크 맥시(Mark G. Maxey) 선교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원래 맥시 선교사는 미군 종군목사로 일본에 머물고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처참한 상황에 처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장 목사와 만난 것이다. 맥시 선교사는 “장성만 목사, 좀 더 웅대한 꿈을 가져라. 세계는 아주 넓다. 일본에 유학 와서 공부할 생각은 없는가, 내가 너의 모든 삶을 보장하겠다.”면서 ‘신학의 바다’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심어주었다. 당장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지만, 유학의 꿈을 갖고 계속 기도를 드린 끝에 일본 오사카 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당시 한 · 일 외교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아 비자를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맥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규슈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일본 유학은 장 목사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일본 유학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 할 무렵, 맥시 선교사가 조용히 장 목사를 불러 “장 목사, 이제 더 큰 물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미국의 친구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해두었다. 미국 신시내티의 신학대학교에서는 장 목사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이미 결정했다. 생활비를 지원할 후원자도 준비해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으로 유학이 결정되었다.
1961년 말, 2년여의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6남매를 헌신적으로 키워낸 어머니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부만을 생각해 어머니 곁을 또 떠나는 것에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흔쾌히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1962년 1월 첫 주일, 부산 항서교회 김길창 목사님의 특별한 배려로 새해 첫 설교를 맡게 되었는데 이날 예배를 통해 아주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 박동순,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이다. 박동순 여사는 당시 성가대에서 찬양을 담당했었는데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박 여사는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토플점수도 확보해놓고 유학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그런데 부모의 심한 반대 때문에 미국 유학의 꿈을 접어버렸다. 그런 여사는 장 목사의 설교를 듣고 용기를 냈다. 장 목사의 일본 유학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다고 한다. 박 여사는 집회가 끝난 며칠 뒤, 유학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장 목사를 찾아가 유학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고, 친절하게 대답해주면서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할 반려자가 되어달라고 프러포즈를 했다.
장 목사는 1962년 9월에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원래 약혼자 박동순 여사와 함께 미국에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약혼자의 비자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혼자 갔다. 신시내티 신학대학교에 도착하니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우편배달부였다. 미국의 여러 교회에서 많은 편지가 도착했다. 주로 설교 부탁을 하는 내용이었다.
대학원장인 루이스 포스터 박사부터 찾아갔더니, “장 목사, 당신을 많이 기다렸다. 장 목사에게 기대가 크다. 일단 교수 두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엘리오트 교수와 심스 교수였다. 그리고 자신의 부친인 R. C. 포스터 교수에게 장 목사를 데려갔다. 여든이 넘은 포스터 교수는 신약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그는 마치 손자를 맞이하듯 정겹게 장 목사를 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원 공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다고 한다. 거의 매일 리포트를 작성했는데, 짧은 영어로 논문을 준비하고, 그것을 발표하는 일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 목사는 신시내티에서 가장 분주한 학생이었다. 미국 20여 개 주의 교회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다. 서투른 영어로 한국의 참상을 또박또박 알렸다. 그들은 장 목사의 말에 때로는 눈물을 흘렸고, 때로는 활짝 웃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의 역사를 넘어 극한 혼란을 겪고 있는 한국은 그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장 목사는 수업이 없는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집회를 인도했다.
2. 두 번째 부르심: 교육자로서의 삶, 인재 양성의 꿈
그 힘겨운 시기에 낭보 하나가 날아들었다. 모든 고통을 일시에 날려버린 기쁜 소식이었다. 장 목사가 미국에 온 지 한 달 반 만에 약혼자 박 여사의 비자 문제가 깔끔하게 처리가 되어 미국에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사고무친한 미국 땅에서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과 위로가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에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늘 서운했다고 했다.
그렇게 장 목사는 신시내티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아내 박동순 여사는 기독교 교육을 공부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아내가 기독교 교육을 선택한 것은 좀 의외여서 “왜 기독교 교육을 전공하려 하는가?”고 물었더니, “당신은 조국에 돌아가 기독교 대학을 설립할 꿈을 갖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원대한 꿈을 펼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 좋은 내조자가 되기 위한 준비 공부라고 생각해다오.”라고 했다. 둘은 서로를 의자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미국은 기능사회이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다. 아이비엠(IBM)에서 컴퓨터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면 시간당 4달러 45센트를 받았다. 그러나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사람에게는 시간당 1달러 40센트가 주어졌다. 아무 기술도 없는 사람은 노동에 비해 적은 임금을 받았다. 심지어 공동묘지 잔디를 깎는 사람도 자동차가 두 대였다. 잔디를 깎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었다. 다시 한국 국민 1인당 GNP가 87달러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 본 장 목사는 “야, 바로 저것이다. 조국에 돌아가면 고급 기술자를 양성하리라. 기술을 가진 사람이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리라.”고 인생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계획을 놓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런 와중에도 장 목사는 여전히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여러 교회로부터 초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수많은 교회가 자신의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찌 알고 자기를 초청했을까. 정말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집회 초청을 한 교회에 넌지시 “나를 어떻게 알게 됐나?”고 물어 보았더니, “맥시 선교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한국의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미국에 올 것이라고···. 당신을 잘 도와주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수호천사였다. 당시 미국 교회와 크리스천들은 정말 뜨겁고 순수했다. 그러면서 장 목사는 한국에 기독교 대학을 설립해 기술과 신앙을 가진 인재를 양성할 것이라는 비전을 밝히고 기도를 당부했다. 장 목사는 공부와 설교를 병행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수 십 년 동안 유학해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미국에 유학하기 전 장 목사는 강릉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래쉬 선교사가 그를 초청한 것이다. 그는 선교활동에 약간 지쳐 있었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실망한 상태였다고 한다. 래쉬 선교사는 “장 목사,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다. 맘에 들지 않는다. 이들의 정신 상태를 좀 개조해다오.”고 부탁했다. 교회로 향하는 길은 질퍽거리고 지저분했고, 예배당 벽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도대체 예배당인지 쓰레기장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장 목사는 집회를 갖기 전에 청년 몇 사람을 불러 모아, 청년들과 함께 길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모래를 퍼와 새로 길을 단장하고 밝은 색 벽지를 사다가 예배당 벽면도 깔끔하게 도배했다. 하루 만에 전혀 새로운 예배당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본 래쉬 선교사는 깜짝 놀랐다. “장 목사, 넌 보통 한국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원한다. 미국에 다녀와서 무얼 할 계획인가?”고 물었다. 이에 장 목사는 “나는 대학을 세울 것이다. 고급 기술과 신앙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이다.”고 대답했다.
래쉬 선교사는 장 목사의 비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곳에서는 선교 활동에 한계가 있다. 나도 너와 함께 일하고 싶다. 미국에 다녀오면 나를 꼭 부산에 불러다오. 나 역시 학교 사업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둘은 그렇게 만나고 헤어졌다. 장 목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6개월 전, 그는 이미 부산에 내려와 있었다고 한다. 몇 년 전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킨 것이다. 그렇게 장 목사와 래쉬 선교사는 함께 영남기독교실업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다.
1965년 11월, 원대한 꿈을 향한 출발의 총성이 울린 날이다. 래쉬 부부와 장 목사 부부가 학교 건축을 위한 첫 삽을 뜬 날이다. 이것이 역사적인 학교 사업의 시작이었다. 장 목사가 교장을, 래쉬 선교사가 교감을 맡았다. 장 목사는 설립허가를 얻기 위해 서울과 부산을 무려 36번이나 왕복하는 힘겨운 과정을 거쳤다.
미국에서 귀국하기 2주 전에 가계(家系)를 이을 장남 제국이 태어났다. 신시내티는 동양인이 아주 드문 도시다. 동양인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아주 재미난 뉴스였다고 한다. 심지어 신문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왔다고 한다. 제국이를 낳고 2주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장 목사 부부는 미국 유학을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한다.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난 것이 최고의 축복이었다. 비록 피부·언어·풍습은 다르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공통점 하나 때문에 쉽게 친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으면 매우 고달픈 삶이었을 것이다. 둘은 항상 그것을 감사드렸다.
1965년, 드디어 그리운 고향 부산에 도착했다. 학교를 세울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오직 꿈과 비전만 초롱초롱 빛냈다. 강원도에서 사역하던 래쉬 선교사가 유일한 동반자였다. 우선 과수원을 하다가 그만둔 땅을 구입해 학교 건물인 알파홀을 짓기 시작했는데, 래쉬는 바위를 깨뜨리고 블록을 찍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장 목사가 잠을 자는데 빗소리가 들렸다.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장 목사는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학교 건물 공사를 하는 곳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물길을 내주지 않으면 산 아래 주민들이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빨리 물길을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장 목사는 삽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하나님, 학교를 지켜주세요. 만약 건물을 짓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도와주세요.”
학교는 지대가 높은 곳에 세워지고 있었다. 만약 공사장에 물이 차올라 산사태라도 나며 큰일이었다. 폭우를 맞으며 장 목사는 산길을 올라갔다. 순간 발을 헛디뎌 심하게 꼬꾸라졌다고 회고했다. 흙탕물에 휩쓸려 한참 동안 미끄러졌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위에 몸이 걸렸다. 조금만 더 떠내려갔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 뻔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믿음을 주세요. 소망을 주세요.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라고. 폭우 속에서 드린 간절한 기도였다. 그것은 일종의 절규였다.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깨달았다다고 한다. 그는 폭우 속에서 삽으로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계곡 쪽으로 유도했다. 이런 숱한 시련들을 딛고 첫 건물인 알파홀이 들어섰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일이 가능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장 13절).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됐다. 그러나 인가도 나지 않은 학교에 과연 학생들이 얼마나 찾아올 것인지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에는 인문계를 숭상하는 풍토가 지배적이었다. 기술자를 양성하는 실업계 학교는 가난하거나 성적이 신통치 않은 학생들이 가는 곳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트럭을 몰고 부산·경남 일대를 순회했다. 주로 극장·예식장·교회에서 “우리나라도 곧 기능사회로 변한다.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고의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학비는 걱정하지 마라. 모두 장학생이다.”고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첫 입학식이 열렸다. 학생은 총 19명, 주로 부산·경남 지역에서 강연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들이었다. 교육 슬로건은 ‘성경과 보습을 들고’였다. 학훈은 ‘근면·자립·협동·신앙’이었다. 이것이 2년제 초급대학의 첫 출발이었다. 장 목사가 가사를 만들고, 부산대 이상근 교수가 곡을 붙여 교가도 만들었다.
“낙동강 굽어보는/ 민석대 위에/ 진리의 이상탑이/ 우뚝 서 있네/ 새 시대 새 일꾼을/ 길러나가는/ 아! 그 이름/동서기독교실업학교/ 근면 자립 협동 신앙/ 우리의 학훈/ 만방에 펼치자/동서기독교실업학교”
장 목사가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은 성경적인 삶이었다.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불신자였으나 졸업할 때는 기독교인이 되어 사회에 나가도록 지도했다. 성경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친다. 장 목사는 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수이며, 경비원이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감당했다. 이런 정신이 우리 민족에게 정말 필요한 시기였다. 학생들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한국사람들은 너무 게으르다. 게으른 민족은 절대 잘 살 수 없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한다. 자립정신으로 무장해야한다.”
그런데 학교를 설립한 이듬해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의 정신은 ‘근면·자립·협동’이었다. 우리 학교의 교훈 4가지 중 ‘신앙’만 빠진 것이다. 사람들은 장 목사에게 “학교가 새마을 운동의 4대 정신을 모방했다.” 고 말한다. 그러면 장 목사는 늘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학훈을 흉내 낸 것이랍니다.”고 말했다.
장 목사는 비록 지금은 입학생 19명의 초라한 입학식이지만, 나중에는 젊은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을 믿었다. 그것을 어느 목사님은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은 처음부터 아예 하지 않기로 했다. 영광스런 그날을 상상하며 오늘의 시련을 극복했다. 절망의 벽은 탱크 같은 강한 기도로 분쇄하면 된다. 기도는 기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19명의 신입생을 나는 ‘엘리야의 구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엘리야가 처음 본 것은 손바닥만 한 구름이었지만 그것이 나중에 거대한 구름으로 변할 것을 믿는다. 어렵게 모집한 19명의 첫 신입생은 엘리야의 구름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기서 8장 7절).
장 목사는 학교의 발전을 위해 미국을 10여 차례 오가며 재정지원을 호소했고, 재미재단 이사회는 최선을 다해 장 목사를 도와주었다. 학생들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주로 일을 했다. 이제 갓 시작한 학교였기 때문에 항상 일손이 부족했다. 2년 후에는 감격적인 첫 졸업식을 가졌다. 입학생 중 5명은 중도 탈락하고 14명만 남았다. 졸업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서로 고생을 많이 했기에 감동도 컸다.
1970년, 정식으로 전문대학교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정말 ‘엘리야의 구름’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신입생 80명을 모집하는데, 구름처럼 많은 학생이 모여든 것이다. 2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보인 것이다. 일찍 기술을 배워 취업을 하길 원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최소한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각 도시를 순회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사람들은 장 목사에게 “대학을 빠른 시일에 크게 발전시킨 비전이 뭡니까?” 물으면, 장 목사는 “첫째는 설립정신에 충실한 것입니다. 둘째는 교육시설을 첨단화하는 것입니다.” 고 대답했다. 그는 학생들의 수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대리점을 통해 구매하지 않았다. 직접 본사에 가서 그것을 구입해왔다. 시마스제작소와 메그로회사의 전자계측기인 오실로스코프 싱크스코프 밸런스 등을 구입할 때도 장 목사는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담당자를 만났다. “난 부산실업전문학교 학장이다. 학생들의 실습 기자재를 구입하려 한다.”고 말하자 “우리는 개인에게는 기자재를 판매하지 않는다. 대리점을 통해 구입하기 바란다.”고 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잘 알고 있다. 학생들이 당신의 회사의 기자재를 익혀놓으면 나중에 엄청난 판매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저렴한 가격에 물건을 좀 다오. 결코 당신들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닐 것이다.” 고 설득했다. 그러자 담당자가 “당신의 열정에 감동했다. 기자재의 값을 40% 할인해주겠다. 계속 우리와 거래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교육은 곧 만남이다. 좋은 교육은 좋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장 목사 한 학기에 두 차례씩 ‘학장과의 대화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만남을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갖는 교직원과 학생들의 채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 중 하나였다. 모든 지식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빛이 난다. 신앙이 없는 교육은 때론 공허할 뿐이다. 그는 그룬두비히의 책을 읽고 그의 삶을 많이 연구했다. 그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혼자면 독서하고(知), 둘이면 노래하고(情) 셋이면 체조를 하자(意) 하나님·이웃·땅을 사랑하는 ‘심애의 마음’을 갖자.”
머리로 배우는 지적교육, 가슴으로 느끼는 정서교육, 손으로 일하는 의지적 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드시 1년에 두 차례씩 부흥회를 열었다. 주일은 대교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을 맡아 사역했고, 평일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방학 중에는 미국에 건너가 도움을 청했다. 최근 파악해보니 부산실업전문학교 출신 목회자가 11명이나 됐다. 교회에서는 세족회를 만들어 신앙 좋은 청년들을 선발, 훈련 시켰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목사가 2명 배출 됐다. 서울 답십리교회 박구하 목사와 중국선교사 김찬영목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장 목사는 졸업생 중 목사 장로 집사가 많이 배출된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기술교육은 시대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여러 회사에서 졸업생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 산업화를 외치며 중화학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졸업생들은 학교에서 충분한 실습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곧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울산 현대조선을 비롯해 각 회사에 수 천 명이 취업했다. 또 한 가지 호재가 있었다. 중동 건설 붐을 타고 측량 전기 토목 설계 기술을 가진 인력이 대거 중동에 파견된 것이다. 졸업생 취업률 100%.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다.
1971년, 부산실업전문학교는 국내 최초로 사회교육원을 운영했다. 당시 한국에는 ‘사회교육원’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그것은 장 목사가 미국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대학에 주부 · 신부 · 노인 · 꽃꽂이 교실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개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부산실업전문학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부와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캠퍼스는 학교가 아니라 공원처럼 변했다 그 즈음 사업을 하는 이학수라는 분이 그를 찾아왔다. “대학이 지역사회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더군요. 저는 중병에 걸려 곧 죽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면서 그는 장 목사에게 흰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봉투 하나에는 1,000만 원, 다른 봉투에는 500만 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당시 1500만 원은 지금의 1억 5000만 원과 비교할 수 없는 큰 액수였다. 그 돈으로 종훈 장학회를 만들어 매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장 목사는 정말 분주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의 성서학 강의는 물론 교회 대학 채플에서의 설교와 집필활동이 이어졌다. 결국 잠자는 시간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새벽 4시 30분에 기상했다. 먼저 기도를 드린 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낼 원고를 집필한다. 그날 하루 중요한 일들은 새벽에 거의 마무리한다. 장 목사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수면을 취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린도전서 1장 25절). 당시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할 4년제 대학을 세우는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장 목사 부부는 무려 12년 동안 기도했다. 그런 12년 동안의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1991년, 4년제 대학인 동서대학교가 인가를 받은 것이다. 오랫동안 염원해오던 꿈을 드디어 이루게 해주신 것이다. 그 대신 정치에서는 손을 때고 교육과 목회에 전념하도록 새로운 길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동서대학교는 인가를 받은 이듬해부터 신입생을 모집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장 28절) 그렇게 전문대학인 경남전문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편입학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이 생긴 것이다.
1995년, 동서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꿈과 비전과 신앙을 심어주는데 주력했다. 사실 그것이 학교를 설립한 목적이었다. 총장을 맡아 처음 선언한 것이 교육의 세계화였다. 국내에만 머무는 교육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장 목사는 세계 20여 국가 78개 대학 및 연구소와 교류협정을 체결했다.
3. 세 번째 부르심: 정치가로서의 삶
장 목사에게 교육은 평생의 소원이요, 꿈이었다. 경남공업전문대학은 일취월장 발전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 근대화의 물결도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일생 중 가장 보람 있고 분주한 나날이었다. 교육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시 문화상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캠퍼스 중심에 초현대식 건물을 짓고 그의 호를 따서 민석기념관이라 명명했다. 거칠 것이 없는 성장의 연속이었다.
1979년, 정국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해 10 · 26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시해당하고 이어 12 · 12사태로 이어졌다. 결국 최규하 총리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9월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부산의 여러 모임에 참석해 나라의 안정을 역설하곤 했다. 이때 새로 등장할 정당은 전국에서 참신한 인물들을 찾고 있었다. 그는 정치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두 차례나 받았지만 계속 거절했다. 그런데 평소 안면이 있던 어느 분이 조용히 그를 불러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이 뜻을 전하기 위해 심부름 온 사람일 뿐입니다.”
“우린 지금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에 물들지 않은 신선한 인물을 찾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당신을 추천했다. 이 지역의 새로운 인물은 바로 당신이다.”고 했다. 장 목사는 정치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갈 길은 목회와 교육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교육(Teaching Ministry), 둘째는 목회(Preaching Ministry), 셋째는 치유(Healing Ministry)다. 이 셋은 결국 하나다. 그는 목회와 교육은 해보았지만 사회의 아픔을 치유하는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 그렇다면 정치를 통해 치유 사역을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의 방향키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세 번째 부리심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새 역사 창조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 아래 민주정의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81년 3월, 제11대 총선에 출마했다. 물론 지역구는 부산 북구였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했다. 선거전에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경남정보대학교 사회교육원에 참여한 주민들이 그의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일순간에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확보했다. 돈을 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제11대 국회의원이 되어 여의도에 입성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장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국회 선교사’가 되려고 권고하는 분도 있었다. 하나님께서 국회에 보낸 뜻이 무엇일까? 어떤 일을 맡기실까?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하나님, 국회의원도 제게 주신 소명임을 믿습니다. 신앙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라고 기도로 단단히 무장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항상 길을 열어주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약한 듯해도 강하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일이 닥치면 더욱 기도의 강도를 높인다. 그때마다 놀라운 위로와 지혜와 힘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힘이다. 국회에서는 교통체신위원회에 배속됐다. 당시에는 각 위원회 중 가장 인기가 없는 부서였다. 초선인 나로서는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을 선택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런데 보고를 받아보니 철도사업이 엉망이었다. 철도청장은 대부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적자는 연 수백억 원이 넘었다. 직원들 간의 음해성 투서는 도를 넘고 있었다. 이런 조직이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었다. “이건 순전히 나랏돈을 집어삼키고 있구나.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는 생각이 들자, 양복을 벗어던졌다. 점퍼로 갈아입었다. 6개월 동안 완행열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그 결과 철도 운영 상황을 훤히 알게 됐다. 그는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철도사업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철도 철도병원 식당을 민영화하고, 적자노선은 버스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다. 현재 철도사업은 대부분 이때 장 목사가 제안한 정책대로 운영되고 있다. 철도 자재의 무분별한 수입도 문제였다. 그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철도청은 창고에 재고가 쌓여 있는데도 계속 발주를 하고 있다.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것은 소중한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행위다.”고 말하자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초선 의원이 직접 현장을 발로 뛰어 조사한 것을 토대로 밝힌 것이기 때문에 섣불리 반박할 수도 없었다. 택시 운영도 민원이 많았다. 그는 몇 개월 동안 택시를 타고 다니며 의견을 수렴해 ‘택시사업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주변에서는 참 별난 초선 의원이라며 장 목사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목사로서의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새문안교회 강신명 목사가 입법의원 시절, 국회의사당 지하에 채플룸을 마련해놓았다. 그는 11대 크리스천 국회의원, 사무처 직원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수요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국회조찬기도회 고문으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국회에서 해야 할 일을 준비해두셨던 것이다.
이후 1985년 2월에 치러진 12대 총선은 그야말로 혈투였다. 김영삼, 김대중 씨의 지지를 받은 신민당 바람이 전국을 강타했다. 하지만 장 목사는 4년 임기동안 양산~구포 간 도로확장, 구포역 신축, 도서관 신설, 서부터미널 유치, 그린벨트 완화조치 등의 업적을 열거하며 득표활동을 벌이는 등, 차분한 정책대결로 맞섰다.
12대 총선을 치르고서야 장 목사는 비로소 정치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아니 국민을 위한 새로운 정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관심은 온통 ‘복지사회 건설’에 있었다. 그가 정당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대학을 세워 젊은이를 교육한 것도 복지사회 구현 때문이었다. 정책위의장을 맡고 보니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정치국민을 위해 봉사할 결심을 하면 구체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 대학생들의 학자금 문제가 시급했다. 영세민 자녀들이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학자금 융자 제도’를 만들었다. 은행은 학생들에게 학비를 융자해주고 이자의 50%는 정부가 부담하는 제도였다. 학생은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원금을 상환하는 제도였다. 서민과 학생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은행과 정부는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모든 정책에 대해 분명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예수님은 이 일을 기뻐하실까. 과연 국민들이 기뻐할까. 이것이 국민을 위한 정책인가.”라는 이 물음이 바로 그의 정책 결정의 기준이 됐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장 목사는 정치를 하지 않아도 별반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정치 말고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학자금 융자제도를 반대하는 은행과 정부에 맞서 수차례 당정협의를 가졌다. 그리고 이 제도를 확정했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대학교수들의 연구년제를 도입했다. 교수들의 재충전을 위해 연구비를 지급하고 단기간 외국에서 연구 활동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안식년제보다는 한 단계 낮은 것이었지만 이 제도가 처음 실시된 1986년에 가장 많은 국공립대학 교수들이 연구비를 지원받아 해외로 나갔다.
그는 교육자다, 교육은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자녀가 어렸을 적에 좋은 습관을 심어놓으라. 그러면 그 습관이 평생 동안 이어지리라. 습관은 나무와 같다. 오래된 나쁜 습관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좋은 습관과 신앙이다.
장 목사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 가지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깨끗한 정치인의 꿈이었다. 적어도 물질의 유혹에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 한 평의 땅도, 당 한 푼의 돈도 옳지 않은 것이면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한다. 권력을 이용해 땅을 사거나 부를 취한 적이 없다. 초선 때부터 좋은 정치인의 습관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좋은 만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12대 국회 후반에게 뜻하지 않은 중직을 맡게 되었다. 국회 정 부의장 선거에서 이재형 의원이 165표를 얻어 국회의장에, 장 목사가 160표를 얻어 부의장에 선출됐다. 재선의 국회부의장은 분명히 이변이었다. 그는 당선 인사를 통해 용광로 같은 국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계층 세대 지역 간의 불화와 갈등을 수렴해 용해시키는 국회가 되자고 역설했다. 그는 일단 짐을 싸서 부의장실로 옮겼다. 공간도 널찍하고, 비서진도 중원이 되고, 관용차도 지급됐다. 이제는 지역구를 관리할 시간적 여유도 갖게 됐다. 의장단은 입법부를 대표해 외국 손님을 맞는 일이 많았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 대사를 접견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까지는 ‘정책’에 몰입했으나 이제부터는 조금씩 ‘정치’를 배우는 시기였다.
1988년 4월 26일, 제 13대 총선이 치러졌다. 장 목사는 민정당 공천을 받아 부산 북갑에 출마했다. 그동안 지역사회를 위해 일해 온 것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총선의 키워드는 ‘바람’이었다. 정치바람 앞에서는 ‘업적, 봉사, 지역발전’ 등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상대 진영에서는 선거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처리한 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 장 목사는 정치는 바람인 것을, 바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속수무책인 것을, 정책도, 공약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선거 결과는 참패였다. 제13대 총선 실패를 ‘사막에서 찾은 무덤’으로 정의했다. 무덤은 종말이 아니다 무덤은 실패가 아니다. 무덤은 곧 희망이다. 그는 총선 실패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았다. 그것을 ‘사막의 무덤’으로 표현했다.
〈탈무드〉를 보면 사막을 여행하는 부자(父子)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부자가 걷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그들은 완전히 탈진하고 말았다. 그때 눈앞에 펼쳐진 공동묘지···.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지가 주는 희망의 메시지, 그것은 가까운 곳에 마을이 있다는 암시였다.
낙선, 그것은 장 목사의 묘지였다. 새로운 희망의 암시였다.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선물이 있었다. 그를 지지해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은 표정으로 감사인사를 드렸다. “그동안 지지해준 여러분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낙선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일단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출범시킬 것입니다.”
그때 시작한 것이 사단법인 한국지역사회연구소다. 장 목사가 이사장을 맡았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지인들이 회비를 보탰다. 연구위원은 권영설 · 김동일 · 조승민 · 유동길 · 이성복 · 서의택 · 오석기 교수 등이었다. 자문위원은 정성모 · 서정화 · 이자헌 · 김중위 · 민병규 · 오한구 씨 등 현역 의원이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후회는 없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부산시선대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후보의 선거유세 때, 수영비행장으로 사용하던 장소에서 100만여 명을 모았다. 또 31개 개신교단 대표를 서울 힐튼호텔에 초청해 기도회를 가졌다. 노 대표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나, 딸 노소영 씨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노 대표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에서 나름대로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낙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장 목사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5남매를 기도로 키워온 한 여인의 삶이 89세로 마감된 것이다. 어머니는 폐암으로 1년간 고생하다가 가셨다. 아들이 정치를 한답시고 거처를 서울로 옮겼을 때도 부산에 남으셨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아들을 위해 새벽 한 시든, 두 시든 기다렸다가 손수 문을 열어주신 분이다고 회고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을 통해 세상 소식을 듣고자 했다. 그리고 목사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100% 진실이라고 믿었다. 제13대 총선에 실패해 어머니의 가슴에 충격을 안겨드린 것을 장 목사는 늘 죄스럽게 생각했다. 반드시 재기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재기를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아파했다.
맺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3대 총선 실패는 화가 아니었다. 그것이 오히려 복이었다. 나중에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실패처럼 보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나 큰 사랑이었다. 그즈음 그는 부산 북구에 4년제 대학 설립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대학 설립 조건은 까다로웠다. 우선 시설을 미리 갖추어야만 했다. 장 목사는 열심히 부지도 확장하고 건물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그 꿈은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2년제 전문대학 출신들이 4년제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것이 간절한 기도 제목이었다.
일단 대학설립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학교명도 ‘동서’로 잠정 결정했다. ‘동서’란 동쪽(East)과 서쪽(West)을 의미한다. 즉 동양과 서양, 한국과 미국의 협력을 상징한다. 장 목사는 종합대학 승인을 얻기 위해 정원식 문교부 장관과 협의했었다. 그는 공과대학 말고는 승인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공과대학으로 출발한 것이다. 선진조국 건설에 앞장서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장 목사의 견학이념과도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1991년 허가를 받아 이듬해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12년 동안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정말 감격적인 입학식이었다. 4년제 대학 설립이 현실이 된 것이다. 초대 학장에 정권섭 장로가 취임했다. 장 목사는 이 학교가 MIT 공과대학처럼 세계적인 학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세계 석학들이 몰려오는 명문이 될 것을 믿었다.
1995년 장 목사가 총장으로 취임해 본격적인 교육 개혁을 시작했다. 총선 패배가 학교 성장의 기회가 된 것이다. 원래 그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목회와 교육, 그것이 그의 달란트였다. 우선 대학의 과장 계장 제도를 모두 폐지하고 ‘담당역 제도’를 시행해 결제 단계를 대폭 축소했다. 기관이 활성화되려면 의사결정이 신속해야 한다. 담당자가 기안한 문서는 그 다음 단계를 거쳐 곧바로 총장에게 올라오도록 하는 시스템이었다. 5단계 절차가 3단계로 축소됐다. 또 캠퍼스를 교육존, 연구존, 스포츠존으로 분류해 공원화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강의실에서는 화상강의가 가능했다. 장 목사는 직원들에게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했다.
또한, 동서대학교 총장을 맡아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교수평가 제도를 도입해 모든 교수가 교육 연구 봉사 부문에 대한 자기평가를 하는 한편 상호 간의 상대평가를 해 ABC등급으로 나누었다. 그것에 따라 업적금을 차등지급하는 제도였다. 3년 연속 A등급을 받은 교수는 ‘브랜드 교수’라는 칭호를 주고 연구비 지급, 정년 보장, 강의시간 조정 등 특혜를 주었다. 교과과정에 영어 강좌를 18시간 포함시켜 어학 교육을 강화했다. 재학생 대부분이 전공에 따라 미국 중국 일본에 1년씩 연수하는 프로그램도 만들었다.
그리고 장 목사는 “후발 대학은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학과 동일한 과정으로 경쟁해서는 이길 수 없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 승산이 있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시작한 것이 디자인 분야였다. 우선 학부에 그래픽 디자인, 제품 디자인, 멀티미디어 디자인, 환경 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5개 학과를 만들어 280명의 신입생을 모집했다. 국내 여러 기업과 산학협력을 맺었고, 일본 나가오카조형대학, 독일 바이센제예술대학, 중국 베이징이공대학, 상하이공정대학, 홍콩폴레텍대학 등과 교류 협정을 체결해 교수 및 학생의 교류를 시작했다. 2000년에는 동서대에서 국제 디자인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 독일, 덴마크, 스웨덴, 일본 등의 수많은 학자들이 내한했다.
하나님은 2002년에 디자인 전문대학원 설립허가를 받도록 도우셨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처음 디자인 분야의 박사를 배출했다. 디자인 전문대학원장에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조영제 교수가 임명됐다. 일본나가오카조형대학 도요구치 학장과 독일 바이센제예술대학 기노부 교수가 객원교수로 초빙됐다. 최상의 교수진을 확보한 것이다. 그해 교육부는 우리학교를 디자인 분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했다. 특성화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다.
또한, 장 목사는 늘“우리 대학은 하나님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 설립했다.”고 강조했다. 이 정신에 따라 국내외 봉사에 주력했다. 교직원과 학생들이 개교 때부터 한센병 환자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특히 국제기술봉사단의 인도네시아 봉사활동은 15년째 계속되고 있다. 장 목사도 학생들과 함께 현지를 방문했고, 페트라대학은 ‘한국의 날’을 제정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나중에 수라바야 시장이 동서대학을 방문해 감사패를 전달했다. 경남정보대학교도 국제선교봉사단을 만들어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버림을 받느니라.”(잠언 12장 24절).
동서대학이 개교 10주년을 맞이 한 해에 슬로건 두 개를 정했다. 그것은 Top 10 and the world’와 ‘너희 가슴에 세계를 담아라’다. 첫 번째 슬로건은 특성화 분야에서 국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다. 다른 하나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내 대학끼리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즈음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장 목사는 “우리 대학에 임권택 영화예술대학이라는 단과대학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붙인 단과대학은 아마 처음일 것입니다. 영화연구소도 만들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하자 그는 쾌히 승낙해주었다. 임 감독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겠다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서대학은 부산국제영화제와 제휴해 AFA(Asia Film Academy)도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의 젊은 영화 지망생들이 이곳에 와서 수업을 받으며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2006년 1월 8일, 장 목사는 대학교회를 은퇴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김호규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현재는 최훈규 담임목사). 대학교회는 재적교인이 800여 명쯤 된다. 교회에 중보기도팀이 있어 365일 계속 학원복음화를 위해 릴레이 기도를 드린다. 대학교회는 장 목사가 설립한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계승한 것이다. 장 목사는 총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목회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회는 영적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이곳에서 모아진 에너지가 대학에 송전되어 기도의 불을 밝혀야 한다. 대학교회에서 기도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캠퍼스는 계속 영적인 빛을 발하며 발전할 것이다. 장 목사는 그것을 믿는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목사였다.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을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대학을 설립하게 하시고 전 세계의 대학들과 교류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 장 목사는 그 해답을 알고 있다. 그것은 캠퍼스 선교를 위함이다. 캠퍼스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캠퍼스는 낚시로 영혼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다. 그물로 한꺼번에 수많은 영혼을 낚는 가두리 양식장이다. 우리 대학에는 캠퍼스 선교사들이 있다.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돕고 있다. 많은 목회자와 선교사도 배출했다. 그것이 최고의 보람이다. 장 목사는 학기초와 학기말에는 직접 설교를 했다. “이 학교는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에 따라 세웠다. 기독교 정신이 희석되면 절대로 안 된다. 나는 우리학교 학생들이 Number One이 아니라, Only One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지난 50년간 우리 학교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다. 우리 학교는 이공계 중심으로 발전한 학교다. ‘경남공전’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은 인문사회계통을 비롯한 다양한 학과를 신설하며 그야말로 종합대학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대학은 그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해야 한다. 지역사회를 떠난 대학은 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난 50년 동안 동서학원은 지역사회에 많은 은혜를 입어왔다.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마다 엄청난 양의 흙을 실어 나르느라 먼지도 많이 날리고 고음도 심했을 텐데 큰 불평과 항의 한번 없이 많이 이해하고 참아주셨다. 장 목사는 “우리 학교의 모든 구성원들은 지역사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는다는 생각으로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법들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 지역사회가 발전하고 더불어 동서학원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발행연도순)
《세 번째 부름》 민석문화사, 1983.
《의정활동과 정책과제》 민석문화사, 1984.
《장성만 에세이 전집》 전5권, 민석문화사, 1986.
《민의와 정책 사이》 민석문화사, 1988.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 민석문화사, 1991.
《소향 박동순박사 회갑기념논문집》 소향 박동순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편집위원회, 1999.
《디지털사회를 사는 지혜》 양서원, 2001.
《예수님 때문에 = Because of Jesus》 동서대학교대학교회, 2003.
《동서대학교 10년사》, 2003.
《(장성만 목사 설교집)약속의 땅》 현학사, 2003.
《행복을 선택하는 것》 현학사, 2004.
《성서가 말하는 행복과 성공의 비결》 시리즈 5권, 현학사, 2004.
《플러스 파워》 민석문화사, 2006.
《소향산책》 동서대학교 소향 박동순 총장 문집편찬위원회, 2007.
《박동순총장 문집2》, 2007.
《빌사일삼》 국민일보, 2010.
《경남정보대학교 50년사》, 2015.
《동서대소식》 341호, 201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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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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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21세기포럼 故 장성만 이사장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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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목이 멥니다!
새벽기도회 때도 눈물만 흐릅니다.
이사장님이 실로암 공원에 묻히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문화대상 시상식을 마친 다음 날(4일) 병상에서 시상식 참석자와 수상자, 그리고 수상자들의 소감 내용을 전했을 때 수고했다는 뜻으로 잡아주시던 이사장님의 따뜻한 손을 다시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2005년 하순경 어느 날, ‘월요회’ 오찬모임을 마치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밥만 먹고 헤어질 수 있느냐? 맘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좋은 일 좀 합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21세기포럼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 아닌가, 혹은 ‘포럼 내에서 우리는 들러리만 서는 것이 아니냐는 등 색안경을 낀 사람들의 시선과 오해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고만 계시던 이사장님의 큰 그릇됨이 그립습니다.
2007년 10월 12일 마부노호 선원이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피랍되어 생사를 헤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그날 밤 ‘부기총’ 대표회장을 만나 기독교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동서대와 경남정보대 학생들의 축제비용에 쓸 2억 원을 생명을 구하는 데 쓰자며 학생들을 설득하셨고, 노구를 이끌고 서울과 부산을 다니시며 2주 만에 7억 원이란 거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이사장님은 정확한 사태판단과 신속한 대처능력을 보여 주신 탁월한 지도자셨습니다.
초창기 문화대상 시상금을 혼자 부담하시면서 힘들어하시던 모습과 2011년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애쓰시던 모습을 보며 포럼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았습니다.
제 평생에 이사장님과 같은 분을 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이사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CBS에서 성국경 목사님(아르헨티나 선교사로 계시다 순교)의 뒤를 이어 재부 기독교 기관장회 간사를 하면서 였습니다.
이사장님은 40여 년을 훌륭한 교육자로, 올곧은 정치인으로 활동하셨지만 그 보다도 눈물이 있고 사랑이 있고 교만하지 않는,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을 키우는 진정한 목회자이기도 하셨습니다.
저의 멘토(mentor)이신 이사장님을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메기의 추억’을 같이 부르며 “2절 가사가 참 좋다”라고 하시던 이사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제는 장 총장 말씀대로 예수 잘 믿어 천국에서 만날 수밖에 없으니 제 휴대전화에 담아 둔 이사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날을 마음 속 깊이 고대합니다.
2015년 12월 12일
21세기포럼 상임이사 임현모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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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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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회 법정으로 가는 교회 지도자들(목사,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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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송사 문제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심각해져가고, 교회 안팎에서 세상 법정으로의 송사가 더욱 더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한국의 대형 교회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세상 법정에서 재판 계류 중이거나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린도전서 6장 1~8절에서 세상 법정에 송사하지 말라하셨고 갈라디아서 5장 15절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의 저울에 달아보며 말씀의 척도에 재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고신 총회가 제 58 회, 제 59 회, 제 60 회, 제 62 회, 제 63 회 총회에서 세상법정에 고소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부득이한 경우에 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사실상 교회 안의 일을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직자이든 지도자들이든 우리는 거룩한 백성인데도 자신의 욕심과 탐심과 명예 때문에 사소한 일로 서로 다투고 싸우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목사와 목사, 목사와 장로, 교회 지도자 및 중직자들이 서로 싸워 놓고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과 경찰관, 변호사, 검사, 판사 앞에서 ‘우리가 싸웠는데 결판이 안나니 판결 좀 해주십시오.’ 하는 것은 정말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차라리 억울함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누명을 덮어써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하신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 처럼, 형제까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으로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주님의 참된 제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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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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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장로교단의 분열과 형성을 이룬 천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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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진 목사(총신명예교수 교회헌법)
디모데도 부러울, 3대 이룬 장로 가정, 바른신학, 바른신앙, 나침반된 고려신학
(승전) 1952년 제37회 총회가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회집되었는데, 출옥성도 중심의 고려신학교의 주체인 경남법통노회는 여전히 배제된 채 “…신학졸업생 목사 장립 규정에 관한 건에 있어서도 정 제14장 제12조 3항과 제3조 1항에 의하여 총회직영신학교 졸업생은 바로 강도사가 될 수 있고, 다른 신학 졸업생은 6개월 이상 후보생으로 있어야 강도사가 될 수 있으며, 제33회 총회결의대로 한다”(동 총회록 P.7)고 고려신학교 졸업생은 따돌림을 당하게 되자 기미년 독립만세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경남법통노회 엄주신 장로는 신앙절개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반대한 신앙과, 박해가 두려워 일본귀신(태양신) 앞에 참배한 신앙과는 본질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다고 여겼는지, 그래도 총회 안에서 총회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기대와 염원이 무너졌는지, 총회와의 고별을 선언하였고, 이 선언에 따라 옥중에서 죽다가 살아남은 산 순교자격인 출옥성도가 주축이 된 고려신학교와 경남법통노회는 같은 해, 즉 1952년 9월 11일 진주성남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제 1회로 회장 이약신, 부회장 한상동, 서기 홍순탁 등 임원을 선출하고 오늘의 고신과 총회의 초석을 놓게 된다.목사도 아닌 장로 엄주신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영적으로 교만한 독선주의자라고 지탄을 받던 출옥성도의 무리가 일사분란하게 엄주신의 결별선언을 따라 고려측 총회를 형성하게 되었는가? 대한예수교 장로회 칠원교회 100년사에 의하면 역대교역자 권남선, 고은서, 지창술, 임종만, 주홍근, 백성인, 제판호 목사 등과 함께 역대장로 1대 손종일, 2대 엄주신, 3대 안기림, 4대 엄영환, 5대 정재화, 6대 김재봉, 김명주로 기록되었는데, 엄영환 장로는 엄주신 장로의 자제분이시다. 그리고 엄주신 장로의 손자이며, 엄영환 장로의 자제분인 엄동규 장로는 서울 동산교회에서 시무 중에 있으니, 3대째 장로집안이다. 그리고 100년사는 1908년 1월 산림법을 공포하여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울 때에 영수 엄주신의 밭에 심었던 나무가 자라 그것을 찍어다가 예배당을 지었고, 1937년에 일본귀신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의 사당에 참배를 강요할 때에 칠원교회 아이들이 이에 불응하였다고 초등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내렸는데, 세 학생은 손종일 장로의 손자요 손양원 조사의 아들인 손동인 학생과, 엄주신 장로의 쌍둥이 아들 엄문섭, 엄무섭 학생이었다. 한의사이면서도 엄주신은 한의사를 생계수단의 차원을 넘어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구제하면서 복음전도의 방편으로 삼았던 자선가요 전도자요 애국지사였다.딤후 1장 3~6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기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한 것을 보면 디모데의 집안은 외조모와 어머니와 디모데, 이렇게 3대째 믿음으로 믿음을 승계한 거짓 없는 믿음의 집안이라고 하였거니와, 엄주신 장로의 집안도 벌써 3대째 거룩한 장로의 직분으로 장로의 직분을 잇게 한 집안이요, 2대 장로인 엄영환은 일본귀신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라는 태양신의 사당인 이른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40일 동안이나 계속된 왜경의 혹독한 취조에도 굴하지 않자, ‘영리하기는 해도 예수에 미쳐 망가졌다’고 온갖 능욕을 당했으며, 공산세력과도 맞서 싸워 한 몸이 부서져도 스스로 교회를 지키는 수문장 역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3대 장로인 엄동규는 서울 동산교회에서 작금 은퇴하였는데, 교회법에 탁월한 식견을 갖춘 정평있는 변호자로 약자를 돕는 일에 헌신해 왔다.민수기 14장을 보면 10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따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통곡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어찌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우리는 장관 한 사람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던 출애굽 1세대, 즉 유아와 보행하던 장정만 60만명 이었으니(출 12:37), 부녀자까지 합하면 얼마나 많은 수였겠는가? 성경은 저들이 정탐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여 광야 40년에 모두 죽었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 즉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민 6:6~9)고 외치던 두사람만은 출애굽 2세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세월은 흘러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영도한지 어느덧 14년, 그때에 그는 이미 110세의 파파노인이 되어 하나님이 부르실 날이 가까운 것을 내다보면서 유언적인 당부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시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 24:14~15, 21, 24) 그때에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고 여호와만 섬길 것을 거듭 거듭 다짐하고 서원하였으니 여호수아의 선언이야 말로 천추만대에 보화같은 선언이 아니었는가? “10년 후에 보자!” “총회장, 총회임원을 불신임한다”가 보화같은 선언이었을까? 태양신을 섬겼던 이들의 총회와의 결별선언이 보화같은 선언이었는가? 누가 여호수아의 선언을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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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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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장로교단의 분열과 형성을 이룬 천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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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진 목사(총신명예교수 교회헌법)
10년 후에 보자던 호통 왕성 ‘기장’ 현실 되고, 총회장, 임원불신임 선언 ‘통합’총회 터전 되다
1912년에 창설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난 박해 이전에 대원군이 박해하던 천주교회처럼 여기는 처지에서 혹심한 박해를 받아오던 중, 한일합방은 나라만 빼앗긴 것이 아니고, 이른 바 국어상용(國語常用)이라며 우리말과 우리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창씨개명(創氏改名) 운운하면서 대개 한글자로 된 성에 두글자로 된 이름을 가져온 한국 고유의 전통을 빼앗아 일본인들처럼 두글자 성을 가지게 하였으며, 처녀들을 잡아다가 일본군의 노리개를 삼았으며, 특히 일본귀신 ‘아마테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라는 태양신의 사당을 지어놓고 강제로 참배케 할 뿐 아니라, 일본의 군왕을 사람으로 나타난 신(現人神)이라며, 천황이 거하는 곳 동방을 향하여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는 동방요배까지 강행케 했었다.그러나 이같은 모질스런 박해에도 굴하지 아니하니 감옥에 처넣어 옥고를 치르게 하거나, 손톱 발톱을 뽑아내고, 귀를 자르고 눈을 뽑는 등 온갖 만행으로 죽임을 당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어찌되었든지 일제침략 시대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일본 기독교단처럼 둔갑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꾸준히 하나의 교단을 이루고 있은 것으로 볼 수는 있으려니와, 해방 후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신학을 가르치는 일로 해서 ‘기장측’이 갈리고, 이어서 해방 후 옥중에서 풀려난 산 순교자 같은 주의 종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려신학교에 대하여, 일본 침략시절에 신사참배에 미소끼바라이라는 귀신을 섬기는 의례에까지 앞장섰던, 그리하여 부산, 경남지역에서 교권을 장악했던 김 모 씨가 노회장이 되면서 고려신학교를 몰아내는 사태가 총회에까지 이어지니 고려측이 갈렸으며, 당시 총회가 정회된 후 난데없이 총회장과 총회임원을 불신임한다는 선언에 따라 오늘의 통합측의 터전이 형성되었으며, 1979년 제64회 총회시에는 총신 김학장의 모세 5경에 대한 이설(異說)과 총신의 재단이사회 사유화(私有化), 전권위원 전권정치, 노회에 대한 불법 난도질 등등으로 합동측이 주류와 비주류(당시 총회가 회집된 대구 일간지들은 진보계 인사는 예배당에 들어가서 총회를 진행하고, 보수계 인사는 예배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는 뜻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주류는 합동측의 보수계란 뜻에서 세칭 그대로 합동보수라고 불린다) 로 갈렸고, 합동보수측은 그 후에도 합동개혁이니, 예장이니, 개혁이니, 청담이니 하고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이어지고 있다.이같이 교단이 여러갈래로 나뉘는 과정 속에 교단을 새로 형성하는 선언과 천명(闡明) 등 상징적인 발언을 보면, 보는 이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는 있으려니와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자유주의 신신학의 대부 김재준 교수가 권 제6장 제42조(이단과 교회 불법분리 죄)에 의해 목사면직이 선포된 후, 조선신학교 출신은 강도사나 목사장립을 금하게 되자, 1952년 6월 3일 대구에서 호헌대회를, 그 이듬 해 6월 10일 서울 수유리 한신 강당에서 제38회 총회를 다시 따로 모여 총회장에 김세열을 선임하였고, 그 다음해에 ‘대한기독교 장로회 총회’로 칭호를 바꾸었는데, 당시 총회를 떠나가면서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가 회중을 향해 “10년 후에 보자!”고 하였다는데, 이 말이 ‘기장’형성에 깊은 인상을 준 선언처럼 여겨진다.같은 무렵 8.15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감옥으로 끌려가서 죽다가 남은 살아 있는 순교자 격인 주의 종들의 생각에는 평양신학교는 일제의 박해로 어용(御用) 신학교가 되는 일을 피해 자진 폐교되었고, 이남의 조선신학교는 조선총독부의 마음에 들어 허용된 자유주의 신신학의 모체가 되었으니 기대할 수가 없고, 그런즉 가장 시급한 것은 개혁주의 보수정통신학과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청순하고 순결한 삶을 표방하는 하나님의 종들을 양성하는 신학교 설립이라고 생각하고 1946년 9월 20일 부산 금성중고등학교 자리에 임시교사를 마련하고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는데, 교단의 힘을 모아 육성 발전케 하지는 못할망정, 1948년 4월 20일에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 “고려신학교 입학 지원자에게는 천서를 주지 않기로 가결하다”(1948년 제34회 총회록 p.23)고 결의하였으며, 그 이듬해 1949년에도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5회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가결하면서 (동 총회록 p.58), …’고려신학교에도 거년 총회결정대로 노회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일은 총회의 결의에 위반되는 일이매 삼가하심이 마땅하오며…‘라고 결의하였으며, 1950년 대구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된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의 회원권 문제를 보류한채 총회를 개회하였으나, 개회 후에도 양대 세력으로 갈린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고 정회, 혹은 비상정회를 거듭하다가 “금번총회는 9월 첫주일 후 화요일(19일) 오후 7시 30분까지 정회하되, 장소는 대구에서, 회원은 금번 총회원으로, 비용은 각노회 상납금 중에서 지출할 것” 등을 결의하였는데, 이날이 바로 1950년 4월 25일 이었다.그런데 정확히 2개월 후 즉 1950년 6월 25일에 동란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정녕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사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여겨질 때에 우리 민족의 살길은 총회의 정상화와 거족적인 회개에 달린 것은 아니었는가?정회되었던 총회는 6.25로 말미암아 9월 19일에 대구에서 속회되지 못하고 해가 바뀐 1951년 5월 25일에 부산중앙교회당에서 속회되어 마산측, 3분측, 중간측으로 갈린 경남노회 문제(실제로는 목숨을 걸고 신앙절개를 지킨 출옥성도들과 신시참배자들의 대립이 아니었을까?)에 있어서 출옥성도 중심의 경남 법통노회를 배격하고 비고려측 총대를 받아들였는데, 문제는 그 다음해에 터져 버리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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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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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죄로 망한 엘리 제사장의 책임 (삼상2:12-17,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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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세 목사(부산노회 공로목사)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가 사단의 유혹으로 타락하여 저희가 벗었음으로 두려워서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을 때에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이심으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구속사적 구상을 세우셨고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번성케 하시고 출애굽 역사를 통하여 구약교회를 세우셨다. 약 2천여 년 간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실 준비를 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 탄생과 십자가 정사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교회가 탄생되고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교회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사명이다. 그래서 교회가 빛을 밝혀야 세상이 밝아지고, 교회가 부패하면 사회도 부패하여 하나님의 징벌을 초래한다.
엘리 제사장 시대의 사례1. 엘리 제사장의 부패로 망한 역사적 상징삼상 2장-4장 “엘리 제사장에게 홉니와 비느하스, 두 제사장이 있는데 불량자라 그들의 습관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고기를 삶을 때 사환들이 세 살 갈고리를 갖고 솥이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찔려 나오는 것을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고 기름을 태우기 전에 사환들이 와서 제사장이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함으로 날것을 원한다 하여 듣지 아니하면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인 헌금탈취 행위의 상징이다. 뿐만 아니라 삼상 2:22-25 “회당 문에서 수종하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죄를 지어도 엘리 제사장이 이를 금하지 아니했다” 그래서 삼상 2:29-34 “너는 네 아들을 나보다 더 중하게 여겼느냐 그러므로 네 집에 노인이 없을 것이며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며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라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삼상 3:313-14 “엘리 집의 죄악은 어떤 제물이나 예물로도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했다” 삼상4:1-18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쳐 이스라엘 군 3만 4천명이 죽고 엘레 제사장의 두 아들이 한 날에 죽고 하나님의 법궤도 빼앗겼다. 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가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와서 보고하는 중에 법궤를 빼앗겼다 말하는 순간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서 놀래어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엘레의 나이 98세에 몸은 비대하고 눈은 보이지 않더라”이렇게 엘리 제사장의 조로 그 가문과 민족이 함께 망했다. 이는 후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부패 타락에 대한 엄중한 경고의 상징적 예언이다.법궤를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증거다. 한국교회도 회개치 아니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는 경고다.
2. 한국교회의 부패상황一. 한국교회 총회 지도자들의 부패로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인 헌금으로 총회장 운동비를 비롯하여 각양 명예와 영화를 위한 운동비로 수백, 수억대를 사용한다. 세례교인 매인당 세례비라고 하는 엄청난 금액을 다 어떻게 사용되는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의 세 살 갈고리로 찔러 내는 행위와 같은 행위다. 단테의 신곡 “천주교 법황 니콜라스 3세와 그 이전 시대의 법황들이 성직과 성물을 금과 은으로 매매하여 성물 모독한 죄로 지옥의 가장 고통이 심한 불구덩이의 형벌을 받고 있는 사실을 보였다.
二. 원로 목사들 세습을 금지해야 함하나님의 교회 사역자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는 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상고하기 위하여 교회가 깊이 기도하며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인데 원로목사가 자기의 아들에게 전수하기 위한 편법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도적하는 행위다.
三. 원로목사 제도 폐지해야 함원로목사 되려고 20년 근속 연한을 채우려고 교회와 목사 간 신경전을 벌리며 교회를 괴롭히는 일이 빈번하다. 그래서 교회가 싸움판을 벌리는 부끄러운 사건도 있다.
四. 총회 연금제도 이행 방해원로목사 모시는 교회는 총회연금제도를 외면한다. 그러므로 중소교회들만이 연금 적금을 하다가 말다가 하니 연금제도 시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합동 측 총회는 연금제도를 포기한 상태다. 원로목사들은 교회가 연금을 지급하니 생활이 유여하나 은퇴목사들은 자식이라도 넉넉지 못하면 병이 생겨도 치료도 못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 그래도 응급부라는데서 위문장 한 장도 없다. 그냥 은퇴 목사는 내버려져있다.감리교에 서는 원로목사 명칭은 있어도 연금은 강도사로부터 목회연조대로 연금을 지급한다.구세군은 원로목사제도가 없고 모든 사역자의 목회연조대로 연금을 지급하며 교역자들 노후 요양기관도 갖추고 있다. 마20:1-14 “포도원 일꾼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한 달란트 씩 준”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나요.
五. 신학교 난립으로 무자격자 배출 방지 할 것학력부족하고 사명감 없는 자들을 돈만 내면 입학시켜서 무자격 목사를 배출시켜 정치목회 세속화 목회 부덕행실로 교회 부패를 조장한다. 엘리 제사장의 불량한 두 아들을 양육함과 같다.결론, 한국교회의 타락으로 하나님께서 높이 드신 채찍 북한공산집단의 악한 사상과 악한 정한정책과 핵무기로 똑같은 동족인 남한을 그 무슨 원수로 불바다로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악담 저주를 하는 그대로 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가 미국을 의존하지만 별수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을 거두게 할 방법은 한국교회 총회 지도자들이 겸허히 베옷을 입고 땅에 엎드려 과거와 현대의 모든 죄악을 회개해야 하나님이 채찍을 거두실 것이다.욜 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찍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서야 한다. 욥 20:12-13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여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혀에 죽으리라”엘리 제사장의 죄로 그의 가문과 민족이 함게 망한 성경이 보여주신 표본이다.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루속히 남북이 평화적 통일이 이룩되기를 간곡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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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