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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약산이 6,25의 원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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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若山)이 약산(龠散)되었다고 마구 짓밟지 마라!
약산 김원봉 의열단단장에 대한 논란이 많다. 약산의 처조카 이었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한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글깨나 쓴다는 논객들이요 교수들이다. 정치인들도 몇 마디씩 한 것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독립운동사에서는 산(若山)이 되어 한 산맥을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약산(龠:피리 약,散:쓸모없는 산) 즉“쓸모없는 피리”가 되었다고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먼저 역사를 바로알고 평가하자! 겉으로 나타난 어떤 사실 하나만 가지고 단순하게 말하지 말고, 그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알고 평가하자는 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도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평가하는데 한 인물을 가볍게 단정 지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약산을 심지어“6.25의 원흉”,“6.25남침에서 핵심역할을 했던”,“6.25전쟁의 1등공신으로 훈장”, 모 당 대변인은”북한정권수립의 공훈자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을 많이 죽인댓가로 김일성 훈장을 받은“, 그 당 대표는 독립군을 괴롭힌 간도특성대 출신 모 장군을 찾아가 약산을“6.25남침의 주범가운데 한 명”, 모 신문사설에는“6.25남침에도 공을 쌓았다고 훈장까지 받았다”고 단정하였다. 거기다 댓글 쓴 것을 보면 더 가관이다.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며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듣길 정도이다.
그러면 약산이 흔히 말하는 6.25전쟁의 주범이고 원흉인가?
김일성이 빨치산 동료들을 감시 보고하는 프락치 역할로 소련군부의 신임을 얻어 1945년 9월초에 소련 극동전선군 제88독립보병여단의 애송이 대위가 스탈린에게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그 여단은 만주 빨치산 출신 조선인들이다. 이들이 조국을 떠난 지 오래되어 해방후에 귀국하면서 국내에 기반이 없으므로 소련군에 업혀 귀국한다. 나중에 김일성이 북한 실세가 될 때 북한의 핵심세력으로 발판을 구축한다.“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비록下.중앙일보.1993.”에 김일성이“빨치산그룹을 중심으로 소련파가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하고 연안파에 내각의 요직을 맡기며 ~ 자신의 수족인 빨치산파와 소련파로 하여금 당과 군대를 장악케 한 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선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당이며 그 다음이 군대이기 때문이다”라 밝혀주고 있다. 약산은 1948년 4월에 남북협상으로 늦게 북으로 갔다. 9월에 북한내각구성에 보면 군이나 당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김일성은 군의 실권은 빨치산출신 인민집단군총사령관인 최용건에게“민족보위상”을 맡긴다. 그리고 군의 핵심자리에는 유성철에게 인민군 작정국장을 맡겼다. 소련이 북한을 통치하려니 김일성도 못 믿어 소련에 있는 지식이 있는 고려인 200여 명을 5차에 걸쳐 북한으로 데려온다. 이들을 소련파라 한다. 북한의 권력은 빨치산을 거친 제88여단 출신과 소련파가 핵심요직을 장악한 실세들이 된다.
이제 김일성은 자기세력중심으로 권력구조를 구축해놓고 눈을 남한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1950년 3월 30일 ~ 4월 25일까지 박헌영과 같이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허가를 받고, 5월에는 중국으로가 마오쩌둥을 만나 우리는 2~3주안에 남한점령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 후 소련 군사고문단은 남침작전 계획을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에게 넘겨 1950년 6월 25일에 남침을 개시하여 한반도에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약산은 북한에서 그의 세력이 없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해방 후에 거의 다 흩어졌고, 한글학자인 정치력이 없는 김두봉의 연안파와 협력하지만 그 핵심세력에는 밀린다. 나중에 인민공화당으로 독자세력을 구축한다. 그러나 김일성 세력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끝까지 “조선로동당(공산당)”에는 가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북한의 정치판도에서 약산이“전쟁의 원흉”이 되고 전쟁에 참가하여“국군을 많이 죽일 수 있는”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1952년 3월 19일에 공훈을 받은 것은“국가훈장 1급 최고훈장”이 아닌 1951년 조선인민공화국 군사위원회평북도 전권대표로 있을 때 평북지역 보리파종실적이 우수하다고 인민회의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준“로력훈장”이다. 전쟁도 끝나지 안했는데“전쟁공로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전쟁 후에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3일 만에 끝낸다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이 실패하게 되자“시베리아의 유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임은(북조선창설주역.김일성왕조著)은 말해주고 있다. 그는 전쟁실패로 군 장성 70여명이 숙청을 당했는데 전쟁공훈자는 최현이라고 한다. 최현은 빨치산출신으로 한글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무학자이다. 그는 전쟁 후에는 승승장구하여 인민무력부장까지 지냈다. 북한에서 군의 모든 실권은 빨치산출신들이 장악했는데 약산이“6.25의 원흉”이고“6.25전쟁의 1등 공신으로 훈장”을 받았다는 것은 그 당시 북한 정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전쟁이 나면 남한에 잔존한 남로당 20만이 대환영 할 것이라 장담했던 박헌영의 말이 공수포가 되어버리자 김일성은 전쟁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어 평양에 있는“미제간첩”으로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약산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탈북(?)하려다 발각되어 역시 중국 장제스의“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되어 가족 모두 사라졌다. 약산의 죽음은 아무도 모른다.
20대 초반부터 조국해방독립을 위해 활동한 약산(若山)이다. 한때는 서슬이 푸른 일제경찰도 약산을 수배하기 위해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 수십 년간 뒤쫓았으나“산 같이”흔들림 없는 약산(若山)이었다. 오히려 우리 동포가 약산을“쓸모없는 피리”같은 약산(龠散)으로 만들어 버렸다.
금년은 약산을 중심으로 조직된“의열단”창단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쓸모없는 피리가 된“약산(龠散)”을 다시“약산(若山)”의 자리로 세워볼 수 없을까?
이번기회에 산산조각으로 갈라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지난날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선열들의 유지(遺志)를 이 땅에 이루어나가도록 다 함께 힘써보자!
지금은 기독교의 성령강림절기이다.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라"(엡4:3)라 말씀하셨다. 이번 절기에 우리 민족의 분열된 생각과 마음을 하나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자!
▲ 박의영 목사(전 경성대학교 교목. 박문희 박차정 의사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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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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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를 살리고 돕는 힐링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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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21세기포럼(이사장 홍순모 장로) 비전100인위원회(위원장 이선복 교수, 동서대)가 주최한 제8회 부산지역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에서 청소년부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세상은 다음세대들을 망가뜨리기 딱 좋은 환경과 공간인 듯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저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고 있고, 많은 다음세대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모른 체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세상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셨고, 다음세대들을 살리고 특별히, 어린아이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겨주는 사람이 되리라는 마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1. 비전수립의 계기와 과정들
저는 어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봉사, 고아원 봉사 등 어린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자원 봉사를 많이 해왔고, 특별히 4년 전부터 저희 수영로교회와 러브부산에서 주최/주관하여 요트경기장에서 열리는 ‘어린이 대축제’ 행사에서 빠짐없이 하루 종일 봉사하며 섬겨왔습니다. 사랑스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다른 것들보다 더 즐겁고 행복해서 저는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중학교 3학년 말부터 저의 진로와 비전으로 만들기 위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저는 이 비전이 그리 확실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이 비전을 확실하게 해준 사건 중 하나는 작년 2018년 여름방학, 늘 그래왔듯 수영로교회 고등부 수련회에 참여한 후에 조금 쉬고 싶었지만 이어서 곧바로 진행된 ‘이웃교회 수련회’에서 저는 피아노 건반으로 그 곳에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웃교회 수련회’는 저희 수영로교회에서 주관하는 미자립교회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인데,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다음세대들의 수가 작은 교회들을 위해서 2박3일 동안 1,2차에 걸쳐 저희 수영로교회가 모든 수련회를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청소년캠프입니다. 그때 저는 취학아동과 청소년 중 취학아동부서에서 피아노 반주를 섬기게 되었고, 초등학교 4학년인 남자아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둘째 날 저녁집회 때였습니다. 제가 그 어린 아이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한 이 저녁 집회 기도회에서 유일하게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서서 주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수련회가 끝나는 셋째날 아침 시간, 물을 먹기 위해 잠시 내려온 그 아이를 저는 만나게 되었고, 그 아이에게 어제 밤에 본 그 모습에 대해 칭찬을 한 후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예배드릴 수 있었어? 무슨 교회 다니니?” 그 아이는 저와 옆에 계신 선생님들을 보며 “하나님이 힘 주셨어요. 그리고 할머니랑 저랑 온 거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했고 그때 어린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도 그에 맞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생명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지치고 힘겨워하고 상처받는 다음세대 영혼들을 살리고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비전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건은 앞 사건과 똑같이 작년 여름, 저는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에서 진행하는 G-impact캠프(2박3일)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엔 친구 없이 혼자 가는 캠프라 정말 가기 싫었었는데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특별한 동역자들을 저에게 붙여 주셨고 제가 평생에 뵙고 싶어 했던 이지선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만남으로써 상담심리에 관해, 사회복지에 관해 깊게 공부하고 배워서 제대로 된 실력을 쌓아 다음세대들과 지역사회의 다른 사람에게 제가 가진 은사와 재능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캠프를 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문구가 있는데, “배워서 남 주자”라는 문구입니다. 처음 이 문구를 한동대학교에서 보았을 땐 그냥 멋진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계속 이 문구를 보면 볼수록 ‘아, 나도 열심히 배워서 다음세대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다음세대들을 살리는 곳에 사용해 주세요. 주님의 어린 자녀들을 살리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고치는 곳에 나를 사용해 주세요. 주의 심장으로 섬기는 리더가 되게 해 주세요.”
2. 미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앞으로 저는 지금처럼 교회에서 다음세대들을 위해 섬길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긴다면 그 곳에서 자원함으로 봉사하며 제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 될 것이며 지금 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배워서 저를 필요로 하는 그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특별히 저는 현재 상담 심리나 사회 복지학과를 선택하여 조금 더 사회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넓히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왜 아동 복지나 아동 교육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아동 복지와 교육에 대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담 심리나 사회 복지에서는 아동 심리 뿐만 아니라 노인, 임상, 중독 등 다양한 심리학을 배울 수 있고, 아동 복지 말고도 지역사회, 국제사회, 학교사회 등 아주 폭넓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저는 그 2개의 과를 공부하고자 열심히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또, 아동, 심리, 복지에 관한 다양한 책들을 찾아가며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고, 다양한 봉사들도 더 많이 해볼 계획에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년도에도 이웃교회 수련회에 참여해 봉사할 것이며,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방문해 어린 아이들을 돕는 일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제가 섬기고 있는 수영로교회 유년부 찬양팀 아이들에게 찬양의 기쁨과 감사를 더 열심히 가르치고, Q.T나 암송 등 아이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성경을 풀어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 중에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모습들
모태 신앙으로 살아온 저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전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교만한 사람이었고 저의 능력을 믿으며 살았으며 특히 예배 부분에 있어서는 수련회나 다른 집회에 참석하면 마치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바지가 내려간 줄 모를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저 또한 그렇게 찬양하며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정작 주일예배나 적은 인원이 모여 드리는 예배에서는 그냥 대충 드리고 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겨울 고등부수련회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놀라우시고 넓으시고 깊으신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저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래도 사랑한다, 화영아”였습니다. 먼지보다 더 작고 쉽게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던 저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고,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며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이 수련회가 끝나고 나서, 저의 예배 태도는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대충 찬양하던 저는 주일예배도 수련회에 참석 한 것처럼 열정적으로 주님을 기쁘게 찬양하게 되었고 그런 저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에 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교회에서 하는 6개월짜리 제자훈련과정을 밟으며 저의 신앙이 더 잘 자라고 성장하는 기회를 만들었고, 지금은 고등부 찬양팀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피아노 반주자로 섬기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또, 유년부 아이들과 함께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함께 예배도 드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믿는 크리스천 학생으로서 매일 점심시간 열리는 기도회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중학생 때 기도장을 맡으며 학교 기도회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 학교에서도 주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기도장으로서 기도회를 인도하고 리드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고등학교에 와서도 꾸준히 그 자리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참 어려울 때도 많았습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반 아이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매주 금요일마다 드리는 금요철야 예배를 가는 것을 알고 저를 놀리며 비난하는 아이들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를 응원해 주시던 한 전도사님께서 낙망하고 좌절해 있는 저에게 시편 34편 18-20절 말씀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를 알려주시며 그리스도인은 고난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본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을 크게 생각하기보다 그 고난을 통해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힘을 기르기 위해 이 말씀을 지금까지도 매일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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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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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 나의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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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21세기포럼(이사장 홍순모 장로) 비전100인위원회(위원장 이선복 교수, 동서대)가 주최한 제8회 부산지역 청소년청년 비전 컨테스트에서 대학청년부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무교집안에서 자란 저에게 꿈과 비전이란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저는 중학교 시절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찬양을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반해 교회에 따라가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기도응답을 받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큰 선물을 통해 불평하고 짜증내던 저의 삶이 감사와 사랑이 넘치는 삶으로 변하였고, 내 입술의 말과 생각 또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비전을 찾고 그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전이란 나의 성공과 욕심만을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할 때 비로소 나의 비전이라 말할 수 있고, 그 비전은 반드시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의 빌립보서 2장 13절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고 비전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학창시절 낙상사고를 당해 허리를 다쳐 수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제가 깨달았던 것은 의료종사자들의 일이 아프고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로 의료 전문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산가톨릭대학교 방사선학과에 진학하였습니다. 4학년이 될 때까지 특별한 꿈과 비전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 때 저의 비전은 단순히 방사선사가 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때에 맞게 비전을 깨닫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이 주신 제 마음에 첫 번째 소원은 유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날씨 좋은 봄날, 하루는 같은 과 친구에게 한 선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그 내용은 저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혼자 호주에 가서 스스로 학비를 벌어 남쪽도시 멜버른에 있는 RMIT 대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제 머릿속에는 온통 유학에 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 전공을 살려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너무 유학하고 싶은데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싶습니다. 응답해 주세요”라고 밤마다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 주일 아침 예배당 앞자리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러 갔습니다. 류태영 박사님의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을 소개하며 목사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책은 가난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도우심을 통해 저 멀리 덴마크에서 유학을 성공적으로 마치신 한 박사님이 쓰신 책이었습니다. 너무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기도의 응답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에게 미디안 군대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드온 300용사의 말씀을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도 함께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작은 것도 하나님께 묻고 구하며 호주에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하였습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해 호주에 갈 비용을 모았습니다. 주위에서는 저에게 “네가 무슨 아브라함이냐? 겁도 없냐?”고 많이들 물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응답을 생각하면 마음이 평안하다가도 그런 질문을 받을 때엔 또 제 마음은 한없이 요동친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함께하자, 같이가자”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졸업 후 9월에 저는 고작 현금 700불과 편도티켓 한 장만 가지고 시드니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도우심 없이는 갈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제가 도착한지 일주일 만에 직장을 구하게 해주셨고, 안전하게 지낼 집도 구해주시고 훌륭한 목사님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제 믿음도 조금씩 자라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감사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호주에 간 목적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공한 방사선학을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배우고 보다 더 크게 쓰임 받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제 삶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시드니대학교 방사선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었고 제가 자란 환경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님이 하시면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고 눈으로 직접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구해진 직장을 통해 2천만원의 학비를 모은다는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자 만료기간이 다가올수록 지금 당장 공부를 시켜주실 것이라는 편협한 나의 생각은 오히려 저를 힘들게 하였고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학교입학을 위한 영어시험 점수까지 준비했지만 무용지물이었고, 결국 1년 3개월 만에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현실에 부딪힌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언제 있었던 일이었냐는 듯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타이밍과 나의 타이밍이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가 아닌 가장 좋은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인도해주실 것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회가 올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지금도 꾸준히 영어공부와 전공공부를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실망과 좌절하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시편37편 5-6절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는 말씀으로 낙담했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저를 인도하셨고 지금은 여성병원에서 태아정밀초음파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10년 전, 5년 전에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를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나의 삶도 감히 하나님께 맡기고자 합니다. 태아정밀초음파를 배우며 제가 갖게 된 또 다른 마음의 소원은 의료선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태아정밀초음파가 시행된 기한은 10년정도 되었고, 정부에서 수가지원을 해줄 정도로 임상에서 태아정밀초음파는 크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더 발전되는 의료장비와 전문지식을 통해 초음파검사는 보편화되어지고 그 중요성이 높아질 것으로 사료됩니다. 초음파를 하다보면 아기들이 자라면서 크고 작은 기형을 갖게 되는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작게는 손가락기형, 구개구순열 등이 있고 크게는 태어나자마자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심장기형들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통해 각자에게 주시는 신호나 사명이 있는 줄로 알지만 산전에 꼭 알아야하는 심장기형을 진단받지 못하고 태어나는 아기들은 수술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도 한없이 슬프고 죄책감에 스스로 아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이 기회를 통해 의료지원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하고 싶습니다. 금전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겪지 않도록 제가 배운 것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언어공부를 꾸준히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다면 잘 펼쳐나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 모두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배운 전공과 기술을 이용하여 전문적인 의료선교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소원합니다. 이를 통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거나 하나님을 알지만 멀리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들을 찾고 깨닫는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가운데 다양하고 많은 기도와 응답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이 꿈과 비전들을 제 힘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이루고자 합니다. 일상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자녀답게 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한 야망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현재 셀모임 장을 맡으며 또래 청년들과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 역할을 통해 말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깊이 깨닫게 되었고, 말씀만이 나의 삶을 지탱하고 세워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음이 좋거나 잘하여서 장으로 세우신게 아니라 부족한 나를 그 사랑으로 더 채우시기 위해 세우셨음을 잊지 않고 이 시간들을 통해 더 온전한 자로 서길 바랍니다. 아무리 내가 가진 지혜와 능력이 크다하여도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의 비전은 세상 사람들이 이룬 것들과 다를 것이 없다 생각합니다. 셀모임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는 것처럼 주신 비전을 위한 것도 구별된 모습으로 늘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이루어내길 바랍니다.
나의 실력과 능력치도 최대로 끌어올려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믿음과 삶을 살아내는 실력이 같아져서 세상에 나아가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리더가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최종적인 목표는 나의 성공과 부를 이루는 것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 사랑을 전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 속에 망가진 부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내게 주어진 작은 역할까지 잘 감당해 낼 것입니다. 물론 실수하고 넘어질 때가 있겠지만, 그때마다 다시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 걸어갈 것입니다. 앞으로도 나의 부족한 지혜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계획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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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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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3.1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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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동안 교회들은 이 운동에 개신교회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고무되면서도, 교회가 국가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지금의 목회방향과 연결시키는 것에서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찾아오는 3.1운동에 다소 소극적이었는데, 다행히 올해는 많은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이와 관련된 기념행사를 가졌습니다. 100주년이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뭔가 달리진 정치적인 분위기의 영향도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보수나 진보를 떠나 3.1운동은 한국 역사 뿐 아니라, 짧은 개신교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매년 돌아오는 3.1운동의 올바른 의미를 돌이키고 기념할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 삶의 자리에 적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한국개신교회는 130년의 짧은 역사에서 세계 기독교사에 남을 만한 부흥과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교회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과 아울러 다양한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한국교회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은 회개를 통한 성결운동에서 시작하면서 사경회를 통한 말씀공부와 기도로 건강한 영성운동을 일으켰고, 여기서 더 나아가 100만인 구령 등의 전도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20년밖에 안 되는 어린 개신교회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입니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 등 암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성령운동은 자칫 역사를 외면하고 사회현실에서 도피하는 신앙운동으로 흘러가기가 쉬웠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령운동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런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1907년에 기독교지도자 안창호와 이승훈 등은 서북지역(평안도)을 중심으로 신민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벌렸고, 이것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한 일제는 한일합방이 된지 2년 후인 1912년 이들에게 총독살해음모라는 없는 죄를 뒤집어 씌워 105인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때 유죄선고를 받은 105인 중 92명이 개신교인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교인들의 신앙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도 개신교가 있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중 1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전국의 교회당이 만세운동의 전초기지로 사용되는 등 한국개신교회는 3.1운동에 가장 앞장서는 집단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희생을 당했고, 많은 교회당이 파괴되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과 3.1운동은 보수와 진보가 나뉘어져서 일어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 3.1 운동에 앞장선 사람 중에는 길선주 목사와 같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주류에 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성령운동은 하나님나라 운동이요, 역사와 민족의 문제에 책임 있게 행동하는 신앙운동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실패한 이후, 교회는 사회와 역사의식을 가진 많은 지도자들을 잃어버렸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혹독한 값을 치러야 하는가를 직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현실에서 물러서서 개인구원과 인격성장, 영적체험과 내세에 집중하게 되었고, 신앙생활은 주로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정치와 무관함을 선포하면서 일제통치에 순종적인 집단이 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는 불의한 일제의 정치적인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교단 지도자들은 나선일체의 민족말살 정책을 적극 선전하고, 교인들에게 황국시민이 될 것을 가르쳤고, 일본이 일으키는 전쟁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이것을 교인들에게 계몽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제말기에 가서는 신사참배를 신앙의 문제가 아닌 애국의 문제라고 합리화하면서 수용했고, 이로 인해 교회는 신앙의 본질까지 훼손되는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해방이후 개신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다룰 때에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했느냐, 참회하느냐 안하느냐는 논쟁에만 집중하면서 심지어 이 문제로 인해 교단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다수의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간과하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3.1운동 이후의 교회가 지향해온 이원론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이 이원론적인 신앙은 사회 국가의 일을 세상일로 치부하고 신앙에서 제외함으로, 결국 이신칭의 신앙만 지키면 세상일은 아무렇게나 되도 상관없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정의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고 국가권력에 맹종하는 집단이 되고 국가의 명령에 순응해서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광복이후 70년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와 철저한 이원론적인 신앙 아래서 모든 역량을 개인구원, 교회성장에만 집중시켜 커다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인들은 교회 울타리 밖의 세상을 막연히 마귀가 지배하고 심판받아 멸망할 곳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 조금 더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자연히 교회는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 무책임했습니다.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해방이후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오랜 세월 독재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온갖 불법과 불의 그리고 인권유린에 침묵하였고 교단지도자들은 그들의 왜곡된 통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근간에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 등 다양한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적어도 한 가지에 있어서는 일치해 가고 있습니다. 국가의 문제는 우리 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 3.1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당면한 사회문제를 책임 있게 끌어안았습니다. 이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것이 독립의 문제이건, 민주화나 인권의 문제이건, 남북문제이건 우리는 세상국가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사용되는 기관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전인격적인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향한다면 그 속에 정치적인 책임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지난 2천년 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 그릇된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교회의 정치화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긴 올바른 국가의 길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때로 정치지도자들을 권면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잡아주는 예언자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국가 사회가 그릇된 윤리와 이념을 좇아가거나 불의한 통치를 자행할 때에 비판하고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파성과 정치권력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공공연히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을 비호하거나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후견 역할을 하는 것은,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한 교회의 본질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앙양심 안에서 보수나 진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행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도리어 신앙적인 차원으로 영화시켜서 절대시하는 것은, 성경말씀이 아니라 정치이념의 포로가 되어있는 위험한 모습입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뿐 아니라, 근세 서양의 역사에서 교회가 이러한 과오를 얼마나 많이 저질렀는지 모릅니다.
3.1 운동 100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지향했던 이 소중한 신앙과 행동을 보다 깊이 돌아보면서 계승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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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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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태동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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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김태동 목사
故 김태동 목사님은 1930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시고 사모님과 3남 1녀 손자, 손녀들을 두고 2018년 12월 17일 밤 8시 30분에 89세를 일기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김태동 목사님 곁에서 손발 노릇 그림자처럼 함께한 세월이 45년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은퇴하실 때에 목사님의 약력소개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행사시에 인사말, 설교, 격려사, 축사, 문서작성 초안을 부족한 사람에게 부탁하기까지 신뢰하였던 관계입니다. 그리고 교회나 노회에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와 함께 상의하여 결정을 하는 관계이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동성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38년간계속 시무할수 있었던 것도 노회, 총회, 연합운동에서 직책을 맡아 활동 할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의 관심과 배려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때문에 현재의 제가 있습니다. 얼마나 저를 사랑하고 아꼈는지,
부족한 종이 은퇴후 고신대 복음병원에 수개월간 입원하고 있을 때 4번이나 혼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병문안을 오기도 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실때에 부족한 사람은 기도하면서 감동이 오기를 만약 목사님이 돌아가시면 목사님의 장례식을 준총회장 수준으로 장례식을 치르도록 힘써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 제83회 부총회장에 출마하셨을 때 투표에서는 앞섰는데 검표에서
부정이 있어 결국 부총회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목사님이 많이 상심한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종이 요즈음 노회와의 불편한 관계로 적극적으로 힘쓰지 못하고 노회장(설교 부총회장 김태영 목사)으로 치루어지는 장례식 진행을 지켜만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었습니다. 총회장을 지내신 친구분들도 오시게 해야 할 텐데.......목사님 부족한 사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 아쉬운 마음에서 목사님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너무 그리워서 살아계실 때 매일 생명의 양식을 카톡으로 보내 드리던
생명의 양식을 한 달이 지나도록 보내드리는데, 지금도 읽고 계시데요.
목사님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 후, 총회신학교를 졸업하시고 (3회 1953년)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으시고, (1954년) 군목 으로 계시면서 1964년부터 구 반여교회에서 강단을 지키시다가 중령으로 예편하신 후 부산교회(현 예린교회) 시무를 시작하여 오직 부산교회만 36년 시무하시면서 교회를 3차례 건축 대형교회로 부흥시켰으며, 부산교회 원로목사로 노회 공로목사가 되기까지 부산노회와 부산동노회에서 활동하셨습니다.
1. 목사님의 신앙은 말씀에 뿌리를 내린 보수적이면서 개방적이며,
긍정적이며 포용적인 신앙이셨습니다.
2. 목사님은 효자이셨습니다.
어느 정도 효자이시냐하면 9순이 되시는 모친권사님에게
식사시 고기반찬을 숟가락위에 얹어 드릴 뿐 아니라
물으시는 말씀에 한번에 귀찮게 여기시지 않으시고
대답해 주실 정도로 효자 중에 효자이셨습니다.
3. 목사님은 발로 뛰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대외활동이 아무리 바빠도 찾아가는 심방목회, 어려움 당한자,
병든 자, 병원에 입원한자, 개업, 입택, 이사 시에,
반드시 찾아가서 심방하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목회를 하셨습니다.
4. 목사님은 너무 너무 자상하셨습니다.
교회에서 면담후 헤어질 때는 반드시 교회입구까지 나오셔서
손을 흔들어 주셨으며 함께 목사님 승용차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먼저 내리면 함께 내려서 인사하고 다시 자기 승용차를 타고 가셨습니다.
음식점이나 커피숍에서 많을 사람을 제끼고 돈을 먼저 내셨습니다.
전국각지 선·후배 교회, 단체마다의 길흉사에는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동안 부조한 것을 합치면 수 억원은 될 것입니다.
5. 목사님은 사람만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을 좋아하셨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사람이 많이 있는 곳에 있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모임에도 빠지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만나자 하면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사람은 분명히 하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6. 목사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셨습니다.
부드럽기로는 양털처럼, 솜처럼 부드러워셨습니다.
그러나 강직할때는 아주 강직하셨습니다.
7. 목사님은 집념이 강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집념이 강하시냐하면 한 평생을 총회장에 대한 꿈을 갖고 살아오신 목사
님께서 제83회 부총회장에 낙선된대에 대하여 총회선관위에 고소하여 재 검표한 결
과 당선후보에게 다른후보의 표가 61표가 산정된 것이 확인되어 부정선거 결과가 나
와 총회 재판국으로부터 선거무효 당선무효로 판결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의 1차에서 최득표가 됨)
그 후 국법에 재소했으나 국법에서도 부정선거를 인정했으나
이미 총회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기각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후 총회에 이 사건에 대해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거무효, 당선무효로 그 진상이 밝혀진 것은
목사님의 강한 집념 때문입니다.
8. 목사님은 일에 대한 욕심이 많으셨습니다.
어느정도 욕심이 많으시냐? 하면 무슨 직책이든지 맡기시면 적극적으로 맡으셨습니
다. 그래서 목사님의 경력이 무려 80여개가 됩니다. 그 만큼 힘과 능력이 있다는 증
거입니다. 이렇게 목사님은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9. 목사님은 개 교회 위주에서 연합적인 활동에 힘쓰셨습니다.
개 교회는 힘이 없다. 여러교회 여러교파가 합쳐야 힘이 있다고 하시면서 세계는 나
의 교구다 라는 말씀처럼 좁은 목회보다 폭 넓은 목회에 치중하셨습니다. 개 교회의
교인양육도 중요하지만 교단연합운동의 인재양성이 절실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런 인품과 성품과 신앙과 정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많은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습
니다. 그러면서도 쩨쩨하지 않고 선이 굵어 굵직굵직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
여 추진하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경력 목사님의 살아온 발자취는
눈 부수실 정도로 다양하고 화려하고 찬란합니다.
그 많은 경력 중에 몇 가지 예를들면은
목사님의 군목활동입니다.
24세에 군목이 되셔서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시기까지 23년간의 군목시절에
특이할 만 것은 6.25사변에 참전 하였으며 전방 초소 위문을 시작으로 군 복음화를 시작하였으며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베트남장병을 위해
기도하며 신앙과 생명을 지켰으며 군 장병 3471명에게 세례를 주므로 당시 최다
세례로 세계언론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며 당시 기네스북에 기록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군종활동의 기틀과 인식, 군선교, 군 복음화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는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노회, 총회 및 지역을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노회적으로는 1980년 부산노회장을 역임하시고, 부산성서신학원장,
장로회 부산신학 이사장, 부산신학 교장, 이기풍 선교센터 건립
부산동노회 위원장, 기독교 케이블 TV 방송 부산동노회 위원장
을 역임하시고 총회적으로는 총회장이 되지 못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래도 총회중심권에서 군 선교(군목부장), 농·어촌선교(위원장),
국내선교 (전도부장 국내선교부장), 총회창립 100주년 배가운동 운영위원장으로,
만사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총회 21세기 기독교 2천년 선교대회 대회장,
사이비이단 방어척결(사이비 대책 위원장), 신학교육부 실행위원 및
목사후보생 지도위원장으로 후배양성과 신학교육,
세계선교(세계선교부 선교사 인선위원) 전산망(전산망 운영위원장)을 도입하므로
총회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게 하는 등 노회와 총회의 방향을 잡아가는데
기여하셨으며 지역적으로는 우리 총회의 동부지역 15 노회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동부지역교회의 결속과 위상을 높이며, 의식을 갖게하며,
방향을 잡는데 기여하셨으며, 총회 21세기 및 부산·경남 장로교 대회 대회장으로
대회를 성공리에 가지므로 장로교단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는데 역량을 발휘
하셨습니다.
부산복음화 및 초교파 연합활동을 하셨습니다.
영남목회연구원 원장으로 부산·한국 목회자포럼회장으로
초교파 영남지역 목회자들의 목회정보제공과 자질향상을
위해 힘쓰셨으며, 경찰선교를 위해 부산경찰청교회를 설립하고 (2002)
부산시경 경목실장을 비롯하여 부산시경 교경협의회 초대회장,
전국시도 경목총회 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부산복음화협의회회장, 80년 세계복음화 대회 부산복음화 총무
94년 민족통일 부산복음화 대 성회 공동대회장,
부산복음화대회공동회장, 21세기 복음화운동 대회장
부산목회자 포럼 공동회장, 체육선교회 부산본부 부 총재
부산세계선교회 초대회장 (부산바울선교회 전신)
부산기독교 TV 추진위원회 부산대회장 [CBS]
북한선교협의회 11대 협동총무
부산지부 선교회 회장, 부산복음화 협의회 회장, 세계할렐루야 선교회
지도이사 해운대구 기독교 협의회 초대회장, 부산기독교 총연합회회장,
범죄예방 국민운동본부 민생치안 지도자 협의회 본부장
YMCA 건축위원회 상임회장,
기독교 재산관리법 제정추진위원회 부산대표회장,
기독교 공동시국 대책위원회 대표회장,
부산성시화운동 이사장, 은퇴하신 후에는 은퇴목사를 위한
초교파 은목교회를 설립하시고 (2000년)
통합교단 은퇴목사를 위한 목은교회를 설립하여 (2008년)
목은교회를 설립하여 초대회장으로 활동하셨으며
부산복음화운동본부 고문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전국 은퇴목사회 회장을 역임하시고, 은퇴목사를 위한 복지재단을 만드시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었습니다.
부산시와 국가사회를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해운대구 자문위원을 비롯하여, 부산시 자문위원,
부산시 질서를 위한 (부산시경 선진질서위원)
88 올림픽 및 장애인 올림픽 부산후원회장
법무부 사단법인 한성갱생 보호회 부산지부장
남·북 인간 띠 잇기대회 부산대표회장,
지구촌 지체장애인 초청 사랑대회 고문,
범죄예방 국민운동본부 민생치안 지도자 협의회 본부장
사랑의 장기기장 부산지부 이사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목사님은 훈장, 감사장, 표창장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베트남 참모 1등 공로훈장 (1968년),
베트남 전공 표창, 베트남 종군기장,
한국교회 100주년 본 교단 총회장 표창 (1984년, 2012년) 내무부, 통일원 장관 감사패 및 공로패 (1985년, 1986년)
대통령 표창장 (1992년)
한국기독교 환경대책협의회 환경대상 외에 감사패, 공로패 41회
표창장 12회를 수상할 정도로 교회와 노회와 총회와 사회와
국가를 위해시간과 마음과 몸과 정열을 쏟아 바친 생애를
살아오셨습니다. 목사님께서 교회와 노회와 총회, 국가 사회를 위해
살아오신 그 마음, 그 정열은 목사님의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선한싸움을 싸우고 달려 갈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셨으니 의로운 재판장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과
큰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목사님은 슬픔도
눈물도 아픔이 없는 주님 보좌 앞에서 기쁨과 즐거움과 편안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실 것입니다. 언젠가 부족한 종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그때 천국에서 뵙기를 바라면서 환송 찬송을 불러드립니다.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낙원 있네 믿는 이 만 그 곳으로 가겠네
황금문을 들어가서 주님 함께 살리로다 너와 날 위해 황금 종 울린다
은 빛 바다 저 너머로 우리 모두 건너 가서 죄와 고통 모든 슬픔 잊겠네
예수님의 사랑 속에 영원토록 살리 로다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우리 일생 다 지나고 주의 품에 편히 쉴 때 나의 영혼 자유함을 얻겠네
괴로움 짐 모두 벗고 주와 함께 살리 로다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후렴] 저 울리는 종소리와 천사들의 노랫소리 영광 일세 할렐루야 기쁘다
빛나는 저 강건너 아름 답고 영원한 곳 너와 날 위해 황금종 울린다.
2019년 2월 1일
▲ 김창영 목사(예장통합 부산동노회 공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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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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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과 한국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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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월 28일 부산롯데호텔에서 열린 재단법인 21세기포럼 주최 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포럼에서 이상규 교수가 강의한 원고입니다. )
1. 문제와 과제
‘삼일운동’이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 억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서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독립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약 2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때의 독립운동 기간 동안 전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고, 전국 218(232)개 부,군 가운데 212(229)개 부,군에서 1,491(1,542) 건의 시위기 일어났다.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지만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이었고, 피검된 자는 46,948명에 달했다. 피해상황이 보여주는 바처럼 1919년의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거족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정되고 있다.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삼일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고,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세계인들에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역량을 알리는 기회가 된 것 또한 삼일운동의 의미를 더해 준다. 평양 주제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Moore, 1874-1963)은 “조선인의 삼일운동 후 일 년 간의 사상적 진보는 50년의 진보와 같은 진보”라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삼일운동은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으나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첫째, 그해 4월 11일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서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둘째, 삼일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 투쟁이 일어나, 북간도에서의 국민군회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 부대가, 같은 해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대결하는 등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삼일운동이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피 압박 약소 만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경대학 중심의 5.4 운동, 인도 간디 중심의 ‘샤타 그라하’ 비폭력 무저항운동이 그것이다.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 등지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어 비록 가식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에서 개괄한 삼일운동을, 이기백은 거족적 ‘민족운동’으로, 함석헌은 ‘민중운동’으로, 김성균은 ‘민족정신 환기운동’으로, 현상윤과 이병혁은 ‘조국해방운동’으로 인식했는가 하면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일어난 농민 노동자운동이기 때문에 ‘인민혁명운동’ 혹은 ‘계급투쟁운동’으로 평가한다. 어떤 평가를 하던 분명한 사실은 삼일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구릅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발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삼일운동에 대한 연구는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삼일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아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다. 첫째, 삼일운동 준비단계에서 러시아 혁명이나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삼일운동은 대중 혹은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거사에 참여한 주도적인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국제 정세에 민감할 수 있었을까? 지도부를 형성한 소수의 엘리트 구릅이 국제정세에 민감했고, 그것이 삼일운동의 시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민중동원의 실제적인 동력원이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삼일운동 발발배경에 있어서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 그리고 양자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가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이 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기독교계가 관여한 민중 세력인가? 이 운동의 외연에 있어서 주도적인 세력 혹은 조직은 무엇인가? 셋째, 삼일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운동이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아 동학농민운동, 개화자강운동, 의병운동 등 세 갈래의 민족운동이 합쳐진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와 개항 이후 추진되어 온 민족운동의 하한점으로 보고 이후의 민족운동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사학계의 해석과 더불어 기독교계의 삼일운동 참여정도에 따라 삼일운동 성격규정이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위의 세 가지 논점에 대해 유의하면서 삼일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기여 혹은 역할이 어떠했던 가에 대해 고찰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는 개별 기독교인들(Christians)과 집합적 개념으로서의 기독교회(Christian church) 양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삼일운동과 기독교에 대해서는 이미 논구된 바 있으나, 이 글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수렴하되 새로운 정보 혹은 자료를 기초로 삼일운동의 준비단계, 거사 실행단계, 그리고 피압박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의 열망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 형성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체한 선교사들은 3.1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가 하는 점에 대해 부다 구체적으로 논구하였다. 특히 국제사적 시각에서 이해한 선교사들의 견해, 특히 삼일운동에 있어서 선교사의 역할이 어떠했던가에 대해 고찰하였고, 또 필자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글에서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3.1운동 백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시의적절한 논구로 판단되며, 향후 기독교와 삼일운동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의 토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2. 삼일운동의 배경과 준비과정
19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11월에는 독일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1920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1918)과 함께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예견되고 있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연두교서에서 새로운 전후 질서의 ‘14개조’(The Fourteen Points) 원칙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민족자결주의와 국제평화유지를 위한 국제연맹의 결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민족자결주의(self-determination) 원칙은 식민지배 하에 있던 약소국을 크게 고무하였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민족자결주의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고, 1918년 11월 미국대통령 특사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 여운형은 그를 만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크레인은 1919년 1월의 파리강화회의(Peace Conference at Paris)에 한국 대표 파견을 권유하고 국내외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피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여운형을 비롯한 장덕수 김규식 서병호 선우혁 신석우 조동호 등은 이를 즉각 실행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위한 조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만들었다. 이들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하여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였고,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을 준비하게 했다. 이에 1919년 2월 8일 400여명의 학생들이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이를 일본 정부와 공공기관 그리고 언론기관에 발송했다. 이 독립선언식의 주도적 인사들이 기독교신자들이었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백남훈은 2.8 독립선언 실무를 담당했던 기독교 신자였다.
반면 선우혁(鮮于爀)은 1919년 2월 조선으로 들어와 선천과 평양 정주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파리평화회의 소식을 알리는 한편, 서북지역 개신교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과 협력하도록 했다. 위의 신한청년당의 7인의 지도적 인사들을 포함하여 삼일운동의 추진 과정에서 활약했던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신자였다. 한편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도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키로 했는데, 중심인물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비록 이들은 일본 영사관의 방해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이 소식이 일본의 영자신문에 보도되어 재일 유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종교적으로 두 갈래로 준비되고 있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천도교측 인사들은 일본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접하고, 1919년 1월 중순경 만세시위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고, 이 운동의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의 3대 원칙을 정했다. 한편 평양의 기독교계는 정주교회 집사 출신으로 상하이 한인교회에서 일하던 선우혁을 통해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근황을 전해 듣고 1919년 2월 중에 기독교계 학생들과 신자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김선두 강규찬 도인권 이덕환 윤원삼 김동원 등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었다. 천도교 측은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손병희 최린을 중심으로 기독교 측의 이승훈 함태영과 접촉하여 운동의 일원화를 협의했다. 2월 24일의 일이었다.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은 연합하여 1) 독립을 선언하고, 2) 일본 미국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며, 3)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3가지 방식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최린과 함태영은 각각 양측을 대표하여 실무를 협의하였다. 이 때 서울에서는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전문학교 강기덕, 조선 YMCA 전국연합회 박희도, 세브란스병원구내 교회 이갑성 등 학생 중심의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들 학생들에게도 참여를 요청하였다. 불교계도 동참케 하여 성사되었으나 유림(儒林)과의 연합은 성사되지 못했다.
운동지도부는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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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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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적응하는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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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곤 장로(여수동광교회, 전 예장통합 여수노회장)
인생의 삶에는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가 있다.
누구나 거쳐 가야할 인생의 삶의 여정이다.
우리가 처한 한국교회의 시기는 언제인가 우리가 한 번은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교회를 볼 때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하는 판단에 매우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1995년 노회장로회수련회(예장통합 여수노회)에 변화에 적응하는 [장로인의 상]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발표를 했는데 장로 선배들로부터 많은 꾸중을 들었다. 한국교회 북한에 정통한 박완신장로를 모셔서 2000년대는 북한에 갈 수 있다는 말씀도 선배들로 부터의 꾸중의 또 한 대목이 되었다. 그리고 필자가 발제한 앞으로 한국교회의 변화를 예측하는 주제를 놓고 발표를 하면서 지도자는 미래를 예측 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필자가 발제한 내용은
1) 외부적 환경 변화의 대응에 적응
가) 영상 미디어 문화의 변화
(영상예배 도입/컴퓨터 문화의 발전
나) 찬양 문화의 변화
(열린예배의 수용/복음찬양과 경건 찬양의 구분
다) 주 5일근무제도 근무 형태의 변화
(교회 예배의 형태의 변화/저녁예배/오후예배/가족예배의 변화)
2) 내부적 구조변화에 대응하라.
가) 임직자연령의 연소화와 소 교회 임직이동
나) 항존직의 과다현상과 교회의 직분의 계급화
다) 항존직 직무 연령과 근속관계 (70세)
라) 대형교회의 안착화 (출석교인으로 안주하는 현상)
마) 기독교의 종교화 현상 (성령운동의 소멸문제)
위와 같은 내용은 필자가 외국회사에 근무하면서 현상에 만족하지 않는 기업의 운영방식을 보고 2000년대에 한국교회의 다가오는 변화에 대한 예측을 해보고 23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을 볼 때는 밀물처럼 다가온 한국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필자가 1999년도에는 교회의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1) 교육관의 개방 활용 - 지역과의 개방유대관계유지
2) 교회종탑의 홍보용 - 지역주민의 알림터기능
3) 교회식당의 개방 - 식당개방운영
교회가 함께 변화하고 대응하는 3가지를 제시한 바가 있었다. 이것 또한 현실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
필자가 2013년 노회장(예장통합 여수노회)을 역임할 때 후배들이 지난 번 예측은 20년 후에 예측가 결과가 맞아 떨어졌는데 앞으로 10년 후는 어떻게 보느냐의 질문에
1) 대형교회가 쇠퇴한다.
2) 교회의 재정이 감소하고 사업이 축소된다.
3) 말씀의 존엄성과 축복론이 소멸된다.
4) 연합사업이 축소된다.
5) 원로와 은퇴제도가 교회의 발목을 잡는다.
6) 이단대처가 미흡하면 기존교회가 흔들린다.
크게 6가지를 나누어 보았다. 이제 그로부터 5년이 조금 지났는데 하나씩 걱정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면 예측만 할 것이 아니라 대응전략은 무엇이냐고 한다면 지금 부터가 문제다. 교회 하나 하나가 이것을 인식하고 내려놓음을 시작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로 책임진 모든 임직자가 위기의식을 갖고 지금 변화의 돌을 던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변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때다.
우리교회와 나는 괜찮다는 의식을 지금 즉시 버리고 다가올 다음세대에 물려줄 믿음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금 나부터 우리가 함께 변화라고 내려놓음을 실천 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고 빛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함께 가야할 길이기에 몇 자 적어본다 그리고 깊은 묵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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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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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단 거점’으로 변한 ‘선교 중심’ 부산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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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상담전화가 걸려왔다, 동구 범일동에 위치한 한 건물에 대한 문의였다. 연수원으로 사용되던 이 건물에 최근 하얀 상의를 입은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들고 있는데, 혹시 무슨 종교단체가 아니냐는 문의였다. 신천지 12지파 중 부산과 제주 지역을 담당하는 안드레지파의 본부 건물이었다.
「한국기독신문」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상담소(권남궤 실장)에 따르면, 부산 동구 범일동의 옛 경남산업 연수원이 신천지 안드레지파 본부 건물로 용도 변경되었다고 한다. 2014년 연제구 연산동에 신축하려던 시도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비밀리에 장소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수많은 기독교이단들이 발흥한 부산은 여전히 이단들과의 첨예한 영적 전쟁터가 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 이단인 통일교가 발흥한 동구 범일동에는 통일교 제1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구 초량동 YMCA 건너편에는 JMS 정명석의 거점인 사ㅇ카페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동구에 한국교회 최대 골칫거리인 신천지가 그들의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바야흐로 부산의 중심 동구가 이단의 중심이 된 것이다.
부산 동구는 부산경남지역 선교의 중심이다. 가장 오래 복음전도 역사의 상징인 부산진교회와 초량교회가 있으며, 교육선교와 3.1운동의 시발지인 부산진일신여학교가 있고, 의료선교의 중심인 일신기독병원이 있는 곳이다. 유서 깊은 ‘선교의 중심’이 ‘이단의 거점’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다.
한국교회의 중심 평양과 서울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부산은, 이단들이 자유롭게 뿌리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게다가 불교가 다수인 부산에서의 이단논쟁은 개신교 내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지기 십상이었다. 안상홍과 장길자를 각각 하나님 아버지와 어머니로 믿는 국내 최대 규모 이단인 하나님의교회가 부산에서 생겨나 급성장하고 있으며, 박옥수 구원파의 IYF는 매년 여름 해운대에서 대규모 집회를 보란 듯이 열고 있다.
한편 이단대처의 중심이어야 할 부산의 기독교 연합기관들은 안일한 무관심과 내부 혼란으로 인해 효과적인 이단대처의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필요한 시기이다. 교파 간 갈등이나 교권에 대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이단대처를 위한 연합전선의 구축이 시급하다.
효과적인 이단대처를 위한 각각의 역할이 있다. 연합기관은 이단들과의 영적전쟁의 전선을 구축하고, 각 교단은 소속 교회들과 교인들의 보호를 위한 자체적인 예방교육을 진행하고, 상담전문가는 이단피해의 회복과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이단연구자는 이단의 정체와 폐해를 교회와 사회에 알려 경각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하나로 모여 효과적인 이단대처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부산이 ‘이단의 거점’이 아닌 ‘선교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교계 지도자들의 관심과 참여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소수의 이단 전문가나 상담자 혹은 언론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부산 교계, 특히 동구 지역 교계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관심이 간절히 요구된다. 선한 세력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교계 지도자들의 희생적인 결단과 선도하는 지도력을 위해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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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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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슬람의 실체와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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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4HIM, 무슬림선교훈련원)
Ⅰ 이슬람의 정체 이슬람의 13교리를 보듯 이들의 교리는 인류 도덕적 일반 가치나 종교의 상식과도 거리가 멀다. 기존의 사회와 종교의 생각하는 사회통념 자체를 무시하고 그들의 교리를 거짓으로 속여(타끼야) 기존 사회에 억지로 맞추어 넣으려고 하며, 급진적인 확장 방법으로 기존 사회를 무시하고 엄습해온다.
교회당이 이슬람에 팔려 모스크가 되었고, 한국여성이 무슬림의 아내들 중 하나가 되고 있고, 그들 중 기독교 여성도 있다. 히잡을 쓰고 경남의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저곳에 모스크와 포교처 그리고 문화센터가 많이 있다. 다문화 가정과 우리의 산업전선에서 무슬림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다.
무슬림들은 꾸란(코란)을 절대적으로 따르면서 ‘우스와 하사나’라고 부르는 ‘하디스’에 기록된 모함마드가 한 모든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삶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수염을 기른다던지, 하루5번 기도하는 것, 심지어 결혼의 방법도 모함마드가 했던 행동을 따라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슬람은 종교의 영역을 넘어 총체적인 시스템으로 취급한다. 이는 국방, 사회,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가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위치해 있어 이슬람은 단지 종교의 구분에 두지 않고 ‘이데올로기’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란의 국회가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법안을 ‘수프림 리더 이맘 호메이니’가 동의하지 않으면 즉시 효력을 상실하며, 이란 대통령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선포한 제도도 그의 반대 선언 한 마디로 다음날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취소하기까지 한다.
Ⅱ 이슬람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1.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거짓말 하라 : 타끼야 정연대 목사의 말에 따르면 ‘시무했던 교회 중에 무슬림들이 2명 왔던 기억이 있다. 교회는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기거할 집도 알아봐 주고, 비자가 만기가 되자 교회가 나서서 열심히 그 기간도 연장시켜주고, 그들 또한 열심히 예배 나오고, 성경 읽으며, 세례까지 받았다. 난 그들이 정말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판단했고, 그 생각은 그들을 본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간 지나고 그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된 시점에 그들의 말은 놀라웠다. “그동안 고마웠다. 우리는 다시 알라의 품으로 돌아간다.”였다. 그 당시는 그 말이 충격이었지만 그 후에 그들의 교리 중에 타끼야가 있음을 알았다. 크리스천이 준 돈으로 그들은 모스크 짓는 일에 헌금하고 있었을 만큼 그들은 철저했다.’고 했다.
이슬람 포교를 위해서는 거짓말과 위장 평화쇼를 하라고 그들은 타끼야 교리로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많은 언론이나 방송은 그들의 타끼야에 속아 그대로 ‘평화의 종교 이슬람’을 방송한다. 물론 이런 교리가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타끼야 한다.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 경전에서 한국인들을 속이기 위해서 여러 구절들을 바꾸거나 없애 버리기까지 한 무서운 종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한국의 대부분의 이슬람 관련 책이나 방송들은 타끼야 된 책과 자료를 보고 만든 자료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타끼야 중 가장 성공한 타끼야는 “알라는 곧 기독교의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말이다.
2. 여성들의 인권은 나락으로 이슬람의 교리상 알라가 여성을 창조한 목적은 단지 자손번창과 성적(性的) 도구이다. 알라가 남편에게 아내를 주어 성의 도구로서 자손을 번창케 함으로 삶의 목적이 달성된다고 한다. 또한 여성을 유혹과 간음의 주체로 보아 부르카나 히잡 등으로 머리 또는 전신을 감싸게 하고 있어 대부분 지역의 무슬림 여성들은 아버지나 남편의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꾸란 4:34에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고용주)로 본다.
■ 너무 쉬운 이혼 이슬람 남자들은 남자가 원할 때 언제든지 그의 부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 최근 한국 전주의 이맘(기독교의 목사 같은 종교 지도자)이 “이슬람은 절대 이혼 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는 타끼야 이다. “꾸란 2:229 이혼은 두 번까지 허용된다.”고 하였는데, 이 두 번이 남자개인의 평생에 두 번이 아니라, 한 여자 당 2번이다. 이혼도 아주 간단히 해결된다. 이혼에 해당하는 아랍어는‘딸락’인데, 이 딸락 이라는 말은 3번 하면 이혼이 가능하다. 실제 구소련해체 후 타지키스탄의 남자가 돈을 벌기 위해 타국으로 나가 일을 하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돈이 생기자 전처와는 자신의 격이 맞지 않다며 휴대폰 문자로 “딸락, 딸락, 딸락”으로 보냈다. 이에 그 부인은 펑펑 울며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갔는데, 이런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되어 사회 문제가 되니 이 일을 접한 타지크스탄 대통령이 TV에 나와 담화문을 발표하며 ‘이혼을 하려면 최소한의 예를 갖추어 얼굴과 얼굴을 보고 이혼을 통보하는 것이 좋지 문자로 이혼을 통보하는 것이 말이 안된다’ 라고 하자 이슬람 성직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난리가 났었다는 내용이 해외토픽으로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 여자에게 너무 힘든 결혼 이란의 이맘 호메이니는“여성의 결혼은 나이에 상관없다. 한 살이나 두 살 때 결혼해도 되지만 합방은 9세 부터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9세 이전에 합방을 해도 범죄로 취급되지는 않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합방을 하여 성기가 파열되면 그 여인의 평생 의식주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그 아이는 4명의 부인의 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이는 이슬람의 실정을 말해준다. 9세가 되면 히잡을 써야함과 동시에 결혼 내 성관계가 가능하다. 방글라데시 결혼 여성의 57%가 16살 이전에 결혼, 20살 넘도록 미혼인 여성이 6%일 만큼 이슬람의 결혼은 빠르고, 이는 대부분 본인이 아닌 팔려가는 형식의 부모에 의해 결정된다.
■ 여자는 남자의 절반의 능력 ‘한 남성의 증거는 두 여성의 증거에 해당한다(꾸란2:282)’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서 효력을 발휘 하는데, 상속도 남성의 절반이고 증인으로서의 효력도 절반으로, 그것도 여성들만으로는 증인으로서의 능력도 발휘치 못하고, 증인 중에 남자가 하나 있어야 그나마 남성의 1/2이 증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3. 치외법권 - 샤리아 율법의 통치권
최근 인도에서 휴대폰 문자로 딸락 3번으로 이혼을 통보하는 것에 대해 여성단체가 여성인권모독으로 헌법소원을 냈는데, 불법으로 판결나자 거기에 사는 무슬림학자와 이슬람성직자들이 “우리는 인간이 정한 법과는 상관없고, 알라가 정한 법(샤리아 율법)이 우리의 법이니 우리의 법에 상관 말라.”라고 하며 정부의 공권력을 거부하였다. 이는 무슬림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일어나는 약속된 현상인데, 한국의 안산과 김해가 이미 이러한 추세를 보이고 있다. 무슬림들이 모이면 그것은 단지 종교단체가 모인 것이 아니다. 서두에 기술했듯 그들의 군집은 이미 독립된 집단으로 구분된다. 한국 내에 와서 그들이 군집을 이루기 시작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기다렸다는 듯 정부는 그것을 순순히 응해주는 추세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샤리아 율법으로 자치권을 행사한다.
Ⅲ 한국 사회를 향한 이슬람의 접근
한국 이슬람 중앙회는 “한국 이슬람 50년사 ”라는 책자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보면 1)마스지드(회교사원) 건립 2)국제 이슬람 학교 설립 3)이슬람 문화센터 설립 4)꾸란의 새로운 번역 추진 5)이슬람대학 건립 6)이슬람 관련서적 출판 7)국제결혼을 통한 무슬림 자녀 출산 등의 전략을 통해서 10년 후 4500만 한국인의 대부분(many of 45millions of Koreans)이 무슬림이 되도록 하는 전략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 50년사, 한국 이슬람 중앙회, pp38-42) 이들의 공언이 허황된 꿈이 아닌 것은 엄청난 오일 달러지원과 함께 산유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정치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회교사원에 참배할 때 한국의 고위 정치인들이 동행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인데, 예를 들면 98년도 사우디 황태자(압둘라 이븐 압둘아지즈:현국왕)는 50만불을 헌금하고 갔으며 2000년도에는 사우디 국방장관이 이슬람 학교를 건축하라고 30만불을 헌금하고 갔고 2004년 7월 카타르정부의 지원으로 충북 충주에 무슬림 공동묘지를 설치했다.
1. 이슬람의 물결 : 난민법 최근 한국에 난민 신청한 사람들의 추세가 이상하다. 2017년 기준으로 난민신청자의 사유가 종교(2,927건), 정치적 의견(1,565건), 특정사회집단구성원(778건) 순으로 종교적 사유가 가장 많음을 볼 수 있다. 종교난민이라 하면 분명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이슬람의 진군은 한국을 이슬람화 하기위한 철저한 전략이 보인다. 난민의 종교적 사유가 증가한 만큼 난민 신청자도 급증하고 있는데, 2009년 324건이었던 것이 2017년 9,942건으로 급증하였다. 이는 정부의 난민 우호정책이 한몫하고 있는데 “난민법 제 3조 강제송환의 금지”에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로 송환되지 아니 한다’고 되어있어 실제로 난민신청자는 난민인정 여부에 관한 결정이 확정될 때까지 대한민국에 체류할 수 있다.
2. 보장된 3년의 생활비 지원 난민신청자의 권리와 처우에 생활비 지원이 있는데, 이는 난민 신청 시 소송기간이 대략 3년 소요되는 중 그동안 난민들의 생활을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한다는 것이다. 2018년 법무부 기준 1인 432,999원, 6회 지급해서 년간 1인당 2,597,000원이 지급(가족구성원이 늘면 그 수만큼 곱하기가 될 것이다)되는데, 난민 신청 후 6개월이 지나면 취업도 할 수 있고, 주거지원까지 된다. 또한 건강검진, 초중등교육, 변호사까지 국가가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준다.(필자도 아직 이정도 지원은 받은 적이 없다) 이러니 무슬림들이 자신의 나라보다 더 나은 한국으로 오는 것이다. 2015년 난민인권센터가 법무부로부터 제출 받아 공개한 아래의 자료에 따르면 1인당 약 129만 7900원(http://news.joins.com/article/18715642)이 지원 되었다. 아직 난민의 소송에 대한 국선변호사 제도가 없는 상황인데 저 금액을 지원해 가며 난민 소송해 봐야 승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또 한 가지의 문제이다. 상황을 정리하면 난민 인정받기가 힘든 줄 알면서 대한민국에 난민신청한 사람들을 그들이 난민으로 인정받아 국내 계속 체류하기가 힘든 것을 아는 국가에서 소송비와 생활비 등의 많은 복지 혜택 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주어가며 3년간 데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필히 한국을 이슬람화 하려는 전략과 이를 동조 하겠다는 정책으로 밖에 볼 수가 없다. 독일과 스웨덴 등 유럽의 나라들이 이슬람 난민 정책을 수정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3. 이슬람이 상륙한 나라들의 실정 이혜훈 의원은 "한국 내 이슬람 침투전략"이라는 강의에서 지역 내 이슬람이 1%미만일 때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 다수에 의해 차별받는 종교로 포장하고, 2-4% 정도면 수감자를 개조해 무슬림 전사로 양성하며, 지역 내 5% 정도 되면, 이슬람사회에서 중요한 임계점으로 본격적으로 이슬람화전략을 펼친다"고 증언하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런던에서만 이슬람 증오범죄 하루 3.5건 꼴2017/06/21) “영국 수도 런던에서 하루 3.5건의 이슬람 혐오(이슬라모포비아) 성격의 증오범죄가 일어난다고 진보성향 영국 일간 가디언이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략.. 가디언은 2016년 4월~2017년 3월까지 수도 런던경찰청에 모두 1천260건의 이슬람 혐오 성격의 증오범죄가 기록됐다고 보도했다. 2012년 4월~2013년 3월 343건에 그쳤던 이 건수가 꾸준히 증가해 2015년 4~2016년 3월에 1천109건으로 1천건을 넘어섰다. 이어 지난 3월까지 1년간 14% 증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2050년에는 유럽의 몇 가지가 크게 변하는데 스웨덴인구의 3명중 1명이 무슬림이 될 전망이고, 이민을 완전히 차단해도 자연증가에 의한 무슬림이 1000만이 증가 될 전망이다. 또한 작년 프랑스 출생의 절반은 무슬림이었다.
Ⅳ 결어 이슬람과 기독교는 영이 다르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마19:6)”고 하신 분이 “이혼은 두 번까지 해도 된다(코란2:229)”고 하시겠는가? “어떻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요1:1-3)” 그분이 “모든 생물을 물로 창조했다(코란21:30)고 하시겠는가? 그들은 기독교를 주 공격 대상으로 보고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타끼야하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 제 1조의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20:7)”하신 말씀을 정면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어려운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서 도와야한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부수기 위해 전진해오는 거대한 이슬람의 물결이라면 우리는 자세를 달리 해야 한다. 최근 몇몇 교회들이 무슬림들과 같이 예배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한 처사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이슬람에 넘기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교회여 깨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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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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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성(性)정치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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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길 목사(바른軍인권연구소 대표)
1. 성정치의 출발
‘성정치’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욕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하여 쾌락을 통한 만족감을 찾고 자기의 행복을 위해 기존 사회질서를 대항하는 정치 체계이다. 즉 정상적 가정 질서를 파괴하며 인간의 성적 욕구 분출의 정당성으로 부여하는 성해방 사상이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저들에게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면서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지만 결국 남자와 여자를 부정하게 하는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에는 제3차 법무부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2018~2022) 초안에 ‘성인권’이 명문화됨으로써 더욱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성정치의 출발은 성정치의 전도사로 불리우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1897.3.24.~1957.11.3.)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성혁명 사상가이다.)에서 근원을 찾고 있으나 근본적인 배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없애고 성경의 권위가 부정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 정신을 없애기 위한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성정치의 사상적인 출발은 구조주의와 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인간에게는 어떠한 진리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구조가 있었다. 인간 사회는 한 마디로 옳고 그름이 존재하고, 선과 악의 기준이 존재하며, 순결하고 불결한 것이 존재하고,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특히 인간도 당연히 남자와 여자의 기준이 존재한다. 이러한 기준의 원칙은 성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2. 지방자치단체의 인권관련 조례와 학생인권조례를 통한 성정치
2012년 4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회는 ‘인권 기본조례 제․개정 권고’라는 제목으로 각 지방자치단체의 장과 행정자치부장관에게 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도록 권고하였다. 이는 차별금지법의 다른 형태로 인권을 명분으로 인권조례를 제정하도록 권고하였으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 지자체의 인권관련 조례이다.
인권관련 조례는 사실상 법적으로 위임사항이 없어 근거가 부족하여 위법적 요소가 강하다. 따라서 최근 헌법개정에 지방분권 강화를 내세워 지방권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것이 실행될 시에는 잘못된 각종 인권관련 조례는 법률적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3. 군 인권강화의 명분으로 동성애 합법화
우리나라가 동성애 합법화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 제한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동성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 36조 2항과 군대내 항문성교를 금지하는 군형법 92조의 6이다.
특히 저들은 손밑에 가시같은 군형법 92조 6을 한겨레 21, 8.25일자에서 ‘마지막 보루’라고 칭하며 『10년간 인권운동 vs 보수 개신교 대립의 중심에 선 ‘92조 6’ 전투』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집중적으로 공략하려고 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군동성애 합법화 시도는 2005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2006년 6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군내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군형법 및 군 인사법 시행규칙을 개정하라는 권고하였고, 국방부는 훈령으로 <동성애자 관리규정>을 제정하였다.
4. 여성가족부를 통한 합법화
우리나라의 여성가족부는 전 세계에서 특이하면서도 유일하게 재정과 행정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이를 통해 성혁명 사상을 실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여성가족부의 영어식 표현은 Ministry of Gender Equality & Family(MOGEF)로 되어있다. 이 부서의 명칭만을 정확히 알아도 젠더 평등(성평등)을 추구하고자하는 부서임을 알 수 있다.
성평등(Gender)개념은 앞에서 일부 언급했지만 성혁명 사상을 주입하기 위한 대표적 개념이다. ‘Gender’개념은 생물학적인 성별(sex)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에 의해 교육되고 숙련된 사회적인 성, 후천적 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용어의 도입은 뉴질랜드의 심리학자인 존 머니(John Money, 1921~2008)(뉴질랜드 출신의 심리학자, 성과학자이다. 데이비드 라이머 사례를 통해 성정체성은 양육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했으나 거짓으로 밝혀져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버클리대 쥬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립하였다. 특히 버틀러는 젠더 용어를 재정리 하면서 페미니즘과 젠더가 결합된 젠더 페미니즘을 시작하였다.
이후 정치적으로 확장된 시점은 1995년 제4차 북경여성대회에서 인정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때의 연설자가 바로 힐러리 다이앤 로댐 클린턴( Hillary Diane Rodham Clinton, 1947 ~ )이였으며, 이 대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미지가 새겨서 미국의 대통령 후보로까지 선출되기도 하였다.
현재 헌법으로까지 제정되려고 하는 성평등은 성혁명 사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앞으로 여성가족부를 중심으로 성차별 교육 철폐론(Gender Mainstreaming)의 명목으로 진행중인 젠더 개념은 분명 성혁명 사상의 핵심이 될 것이다. 이는 창조 질서를 근본적 부정하는 세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자와 여자의 신체적 특징인 성별의 구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동성애가 쾌락이라면 젠더는 혼란 그 자체이고 인간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개념이다. 남자성기를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법적으로 여자로 인정한 판결이 2017년 2월 16일에 있었다. 이로 인해 신체적 남자가 여자 목욕탕에 갈 수 있으며, 남자가 군대 가기 싫다고 자신을 사회적 성으로 여자라고 우겨 군대 가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나오기도 하였다.
5. 국가인권위원회법의 문제점과 실태
최근 법무무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의 근간이 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책을 살펴본다. 그동안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군대 내의 항문성교(동성애)를 금지하는 군형법의 폐지, 법 개정을 통한 성별정정 요건 완화, 트랜스젠더의 호르몬 요법 및 성전환 수술 등에 지출되는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것 등으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를 정상으로 인정하려는 것들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동성애 옹호 활동이 이와 같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2001년에 제정된 국가인권위원회법(이하 인권위법)에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 사유로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2001년 인권위법 제정에 참여하여 찬성한 당시의 많은 국회의원들이나 대다수 국민들은 ‘성적지향 차별금지’의 정확한 법적인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인권위법이 제정된 지 15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다수의 국민들은 동성애 성행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향후 성도덕 붕괴로 인한 문란한 성행위의 만연, 건전한 가정 질서 붕괴 사례의 확산, 선량한 성도덕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양심, 신앙 및 표현의 자유 침해 확산 등의 폐해가 발생할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책으로 나타난 가장 큰 문제점은 급속한 에이즈 환자의 증가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에이즈 감염인의 의도적인 전파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삭제하라고 법무부에 권고하였다. 이와 같은 인권위의 동성애 옹호 활동으로 인하여 동성애 성행위가 정상이라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확산되고, 대대적인 문화축제를 열어 동성애 성행위를 하도록 유혹하게 되자,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와 에이즈 확산은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의 문제는 대한민국 국가의 존망과 관련될 정도로 심각하다. 특히 다음 세대들이 용어 혼란에 의해 분별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인권단체들은 동성애 하면 ‘혐오’ ‘포피아’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간다. 대신 성적지향 또는 성소수자라는 용어를 통해 배려와 다양성 또는 인권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기에 미성숙한 청소년들은 좋은 것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6. 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운동 실태
라가르드 IMF총재가 작년 10월 이화여대 강연 후에 우리나라 페미 여성계를 두고 ‘한국은 집단적 자살사회 같다’라고 하며 한국의 페미니즘의 심각성을 경고한 바 있다.
그럼 페미니즘은 왜 젠더와 동성애를 조장할까요? 우선 페미니즘의 개념은 단순히 여성인권운동 사상이 아니다. 여성들이 수 천년동안 다소의 제약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약 100여 년 전 1세대 여성참정권 운동 등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인권운동이었다.
페미니즘 세력들은 1세대 여성운동을 억지로 끌어와서 자신들의 계보로 포장하지만 순수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1960년대 여성급진주의자들이 ‘제2의성’이라는 책을 쓴 <시몬느 보부아르>를 멘토로 삼아 여성해방론과 <마르크시즘>을 도용하여 생겨난 것이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페미니즘이다.
물론 그전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에 의해 가족관계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부르주아적 관계로써, 가족은 혁명적 사회 안에서는 완전히 해체되어야 하며, 연애를 통해 서로를 소유하려는 부르주아적 연애관은 약탈적이고 불건전하다고 주장하여 시동을 건바 있다. 콜론타이의 이러한 사상은 오늘날 주장되고 있는 모성에서 해방!! 무상보육!! 미혼모 보호!! 등의 구호를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마르크시즘의 토대 위에 한발 더 나아간 것이 오늘날 세계 페미니즘의 주류인 <래디컬>, 즉 급진 페미니즘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페미니즘>이라 함은 곧 이러한 <급진 페미니즘>이다.
당시의 급진여성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법적으로 남녀평등이 이루어졌음에도 여성들이 고위공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요인들이 모두 지배계급인 남성의 착취와 더불어 출산과 육아, 가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60-70년대의 가사노동은 지금과 달리 환경이 낙후하여 장시간 노동해야 했고 힘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이 가정에서 벗어나야 했고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질서를 파괴해야 한다고 믿었다,
첫 번째로 이들은 성차별 철폐를 위한 <낙인찍기>를 획책했다. 가부장제도의 무조건 폐해점을 주장하며 지배계급인 남성의 타도를 외쳤다. 모든 것을 여성중심의 시점으로 관찰하면서 성차별적인 요소를 있는 대로 찾아내고 적절한 이름을 붙혀 공격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오늘날 자주 접하는 <잠재적 성범죄자>, <여성혐오(미소지니, misogyny)> 같은 것들이 이것이다. 이렇게 낙인을 찍고 마녀사냥을 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의 여성편향적인 매스컴들을 보면 이해가 쉽게 간다.
두 번째로, <낙태 확산운동>이다. 여성자기결정권에 따라 태아의 생명권 보다는 여성 개인의 자율권만을 강조한 개념이다. 여성단체들은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의 위헌판결을 위해 23만명이 청와대 청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최근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으로 되고 있다.
▲ (국민일보, 2010-03-17 “10대 임신·낙태 상담 매년 증가”)
세 번째로, <동성애 옹호운동>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결혼과 출산, 가정, 심지어 여성의 생식기마저 여성해방의 걸림돌이 된다고 여기어 낙태와 더불어 성전환 – 60년대 당시 심리학자 존머니가 주창한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 의 개념을 적극 도입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성전환 개념이 페미니즘의 주요 강령이 되었다. 이것을 페미들은 90년대에 포괄적 ‘젠더’개념으로 재정비하면서 <동성애 옹호>로 적극 부활시켰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요 쟁점이 강령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 등에서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한 ‘감수성 훈련(Sensitivity training)’이라는 것을 실시하여 사회 곳곳에 혐오의 프레임을 적용시켜 남성가해자의 논리로 ‘남성잡기 사냥’을 펼쳐나갔고 요새 우리가 접하는 <젠더 감수성>이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신세대 남성들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피해와 부조리, 역차별을 호소하는 것들을 결코 엄살이나 푸념으로 간과해서는 안된다. 젠더라는 가면을 쓰고 성별과 가정을 파괴하는 계략이 현재 전 세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페미 여성계에 의해 심각한 법안과 정책들이 발의되는 중이다.
페미 여성계는 마치 자신들이 모든 여성들을 대표하는 양, 이와 같은 <성차별감별사> 역할을 벌인다. 페미니즘은 이른바 <성차별감별사>를 양산하는 플랫폼과 같다. 어느 정도 세력화가 되면 출산을 부정하고 낙태를 당연시 여긴다. 남성을 혐오하여 남성과의 굴레를 끊게 하기 위해 젠더 다양성을 통한 성별 파괴를 주장하고 있다. 자연적인 성별을 부정하여 마음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젠더 자유를 외치다보니 당연히 동성애를 옹호하면서 모든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 트랜스젠더들을 끌어모아 페미니즘 세력으로 규합시키고 있다.
남성혐오를 확산시키고 지구상에 동성애를 확산시켜야만 저들이 주장하는 페미니즘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페미니즘>은 듣기에 그럴듯하지만 인류를 영혼까지 파괴시키는 병폐 중에 최악이다.
페미 여성계는 국가 예산의 1/4을 탕진해가면서 광신의 행위를 펼치고 급기야 교육방송까지 장악하여 우리 자녀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있다. 작년 까칠남녀의 몰지각한 방송들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다. 공영방송을 빌어 급진 페미니즘의 교리를 순서대로 노출시킨 수순에 불과하다. 더 이상 페미니즘을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할 것이다.
바로 가정의 몰락은 물론 출생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절반이 부모 중 한명이 없는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의 형태에서 태어난다는 보도가 있었다. 바로 페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여성들의 가치관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들에서 교회를 굳건히 지켜 내야 한다.
바른軍인권연구소 대표
김영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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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