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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⑫ 기억과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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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6:4-9)
1. 추억의 소환과 기억의 귀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핵심은 추억의 소환이자, 기억의 귀환이다. 지난 2015년 말 개봉된 영화 <히말라야> 역시 죽은 후배와의 추억을 소환하여 그의 시신을 가지러 히말라야의 그 험준한 산을 오른 것이며, 영화 <대호>도 기억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호랑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새끼시절 자기를 살려주었던 포수를 기억하고, 포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환에 그 모든 기억을 끝내기 위해 망각의 길로 호랑이와 함께 떠난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꽃에 대한 원초적 기억인 산과 바다의 이데아(idea)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식을 얻는 학습 과정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이데아가 밝혀지기 때문이고 지식은 순수한 영혼이 과거에 보았던 것을 우리 몸이 기억해내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기억 이론인 상기론(anamnesis)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추억을 소환하며 기억의 귀환을 당연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마찬가지이다. 망각(lethe)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어머니는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한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매혹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숙모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Combray;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고백이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 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던 그 한 모금의 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쳐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작용할 때처럼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초라하고 우발적이며 죽어야만 할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다. 마르셀을 매혹적인 쾌감에 빠뜨린 것은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그 답을 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7부작)로 제시하고 있다. 곧,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된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 위안부 소녀상
따라서 기억은 이 시대의 화두인 동시에 영원한 실존적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기억의 귀환(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이러할진대 사회적 기억은 어떨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 등)¹를 세우고, 기록보관소를 만들고(세월호 관련 저 엄청난 SNS상의 담론들을 보라) 기억의 조형물(위안부 소녀상처럼)들을 세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기억의 연구(사회적 기억)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나치 치하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 홀로코스트의 영향과 제3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영향, 그리고 1990년 전후 세계적 탈냉전이 1945년 이전 식민주의나 1945년 이후 냉전하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 치열한 ‘과거청산’ 논쟁과 함께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기억 연구는 5·18민주화 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이다. 여기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동학농민혁명 등도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담론(나아가 기억혁명)은 공식적인 역사가 민중의 경험을 다루지 못할수록 강력하게 요청되며, 이후 체계화된 기억은 다시 역사 영역으로 편입이 된다.²
2.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
▲ 야드바셈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는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는 이사야 56:5절 말씀에서 인용되었다.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특히 이사야 본문에 의하면 ‘고자’로 배척받는 이들로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 분배의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국가적 횡포가 막아 더 큰 아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주며 ‘기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님의 기억의 귀환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든 절차는 기억의 귀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반복적 상기는 공통된 기억의 반복이며 이를 통해 신앙적 전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귀환은 신앙의 본질적 토대가 된다.
또한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례인 성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진대, 그렇다면 기억은 단순히 의지적인 머릿속 작용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연결시킨다. ‘참여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밀양과 강정 마을, 세월호,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에 대한 공권력의 과도한 물대포 살수 등 최근의 사건들도 잊혀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억의 길이는 가슴으로 느낀 아픔의 길이와 비례하건만, 아직도 아픔은 기억으로 소환되어 망각의 강으로 떠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3. 애도와 우울증: 망각의 강으로
사람은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한다(그러나 망각과 동시에 ‘앞서의 이야기와 같이’ 기억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도 못한다). 오직 인권과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하다 갖은 고초를 겪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만이 계속되는 삶을 위해 망각을 불러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트라우마(外傷, trauma, 전쟁, 성폭력, 재난, 사고와 같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인 사건의 영향으로 이 사건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정신적 충격) 증후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다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억을 통제하려면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함으로 기억을 통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집행할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없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역사적 외상에 있어 국가의 과도한 망각 집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상처와 고통에 대한 망각은 어떻게 가능할까?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모두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지만 몇 가지의 차이가 발견하며 이렇게 말한다. “애도의 경우 빈곤해지는 것은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 자아가 빈곤해진다.” 애도(Trauer, 슬픔)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서 아무리 격심하다 해도 치료를 요하진 않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아픔은 가라앉고 다시 일상이 열린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지면 상실로 인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 능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자애심, 곧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픔은 세상을 텅 비게 하고, 우울증은 내 안을 텅비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과 우울증의 원인을 밝혀, 자신이든 타자든 합당한 결과를 수용하거나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나갈 때, 슬픔은 위로받고, 우울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망각은 자연스레 따라와 지나가버린다.
4. 망각
인간의 내면적인 삶과 관련된 트라우마와는 달리 인간의 외면적인 삶과 관련되어 국가 혹은 정치 권력이 개입해서 망각하는 행위가 있다. 역사적 사면(赦免, Amnesty)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9월 19일 처칠 영국 수상의 취리히 연설은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국가들 사이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쓰자는 ‘망각의 신성한 행위’를 호소한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면을 우리 인간 전체를 향하여 펼쳐 보이셨다. ‘기억의 귀환인 동시에 죄에 대한 망각 대선언’인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43:2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4-15).”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후손이 기억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에서 자녀들은 쓴나물을 먹으며 부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가 이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부모는 이렇게 답한다. “조상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각주)-----------------1) 문자적인 의미로는 기억(記憶)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는 것’이며 기념(紀念)은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현하지만 그 속에 기억이라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 제의와 축제에 불과할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기억혁명이 항상 인권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국가주의적 기억을 해체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억의 전환은 주로 민주화 국면(또는 ‘민주정부 10년’ 기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반기억 혁명’의 맥락에서 국가주의적 기억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기억의 터를 조성하려고 한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나 박정희 기념도서관 등).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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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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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⑪] ‘제자도’는 교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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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 이유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낸다.”저자는 이 책이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심경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알만하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 그것도 ‘급진적 제자’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왜 급진적 제자인가?‘급진적’이라는 말은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왔다. 예수님은 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데 대해 “뿌리가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셨다. 급진적 제자는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깊게 내림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이다.급진적 제자는 여덟 가지 자질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불순응으로, 세상에 대해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모두를 피해야 한다. 둘째는 닮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셋째는 성숙으로,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넷째는 창조 세계를 돌봄으로, 자연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단순한 삶으로, 돈과 소유에 있어 단순함을 제안한다. 여섯째는 균형으로, 예배와 일 등에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의존으로, 자립 못지않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여덟째는 죽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제자도》 | 저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이다. 1974년 ‘로잔 언약’ 입안자로 참여했고, 랭햄 파트너십 인터넷을 설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하고 있다. 원제 The Radical Disciple. IVP, 2010. 8,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2016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사람들은 묵은해를 보내면서 크든 작든 새해 소망을 하나쯤 품는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제자도》를 읽은 우리에게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 아닐까?
▲ 왜 ‘제자도’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더 성숙해지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림 출처: jrforasteros.com]
보수와 진보의 간격 줄인 복음주의자김길구 존 스토트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기초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스토트 목사의 유언이라고 할 정도로 비장함을 가지면서도 평이한 내용이어서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김현호 스토트 목사는 랭햄(Lanham)재단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학자를 많이 키운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 중에도 이 재단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 책이 결국 그분의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2011년 7월 27일 런던 바나바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김길구 로잔 언약은 그의 주도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절대권자라면 그 창조세계에서 정의로운 제도나 문화 창조에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렇듯 스토트 목사는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 큰 울림을 주었던 중재자였습니다.김수성 이 책의 본래 제목에는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 전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작 읽으면서는 오히려 지극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김현호 개인적으로는 한국어판 제목에 ‘래디컬’을 뺀 데 대해 불만입니다. 그가 쓴 책이 50권이 넘습니다만, 그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공들인 책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현재 만연한 서방세계 교회의 문제점, 즉 반지성주의와 현대 사회에 대한 무관심 등에 던지는 메시지 아닐까요?김수성 우리나라에서는 ‘급진적’이라는 말을 제목에 사용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낀 것 아닐까요? 사실 내용을 보면 ‘철저한 제자도’ 또는 ‘온전한 제자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구신학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한 책김길구 이 책에서는 제자도의 자질을 여덟 가지 들고 있습니다만, 첫 번째로 언급한 현대의 잘못된 풍조에 휩쓸리거나 순응하지 않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원주의의 도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김수성 다원주의에 대해서 참으로 묘하게 대응하라고 합니다. “지극히 겸손해야 하고, 개인적인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외유내강이라고 할까요, 스스로 조심함으로써 상대를 자극하지 않되, 우리가 주장할 바는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김길구 이 역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저자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이 대체로 관대하다는 지적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윤리적 상대주의 풍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만, 혼전 동거와 동성애 등 성 윤리에 관해 저자는 성경을 인용하며 엄격한 잣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김현호 저는 이 책 5장 ‘단순한 삶’에서 깊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돈과 소유에 대해 청지기적 단순함을 제안한 ‘로잔 언약’을, 오늘날 제자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로 물질주의 풍조에 관한 지적이죠.김길구 저자는 물질주의에 대해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한국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김현호 “우리는 모두 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낭비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식주와 여행과 교회 건축을 위해 사치하지 않기로 결단한다.”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언약’에 나와 있는 이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김수성 또 하나의 문제점인 나르시시즘 풍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는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김길구 ‘자기애(自己愛)’와 ‘자존감(自尊感)’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르시시즘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기애’라고 한다면, 김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균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김현호 이 문제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은 소홀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김길구 앞서 이야기한 네 가지 풍조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미국 교회처럼 성장주의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신학은 서구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의 변화는 아직도 굼뜨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 책으로 ‘업’시켜 제자 훈련했으면김수성 저는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언급한 죽음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이야기했던 ‘순례’와 관련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온전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밖에 없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김현호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난이나 박해를 각오하고서라도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를 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허덕이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정도의 마인드만 가져도 한국 교회의 당면한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김현호 1980년대 한국 교회가 제자 훈련으로 성장했다면, 이제는 이 책을 중심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리더십 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수성 저는 목사님들이 이 책의 주제를 하나씩 나누어 설교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김길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 가지 잘못된 풍조에서 벗어나 진리의 공동체,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 순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침묵》(홍성사, 2003 개정판)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급진적 제자도》 / 존 하워드 요더 / 죠이선교회《제자 제곱》 / 프랭시스 챈 / 두란노
《공동체 제자도》 /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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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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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⑪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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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Monkey Bars’”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6』)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니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
1.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새벽이나 해 질 녘,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진실과 거짓을,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러한 불투명성을 견디고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저 언덕 너머에 있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진실과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하고 속이는 언행을 비유)로 끝난 2014년에 이어 2015년도 혼용무도(昏庸無道,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음)로 끝나, 이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사건의 진실을 명확하게 깨달은 지금, 사람의 중요성을, 사랑의 힘을 믿어야 할 시간이 2016년 붉은 원숭이의 해와 함께 다가왔다.
2. 헬조선과 혼용무도의 시간
가장 빛나고 희망찬 시절을 보내야 할 21세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지옥(헬, Hell)과도 같은 계급 국가라는 말이다. 이러한 헬조선과 함께 등장하는 4가지 키워드는 ‘수저계급론’과 ‘노오오오력’, ‘N포세대’와 ‘열정페이’이다. ‘수저계급론’은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자수성가한 부자가 없는 나라를 뜻한다. 가령, 미국의 억만장자 75%는 자수성가형 부자이지만, 대한민국의 억만장자 75%는 상속자들이라고 한다. 수저계급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노오오오력’은 힘든 삶에 대한 관심보다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만 해대는 것을 비꼰 말이다. 앞이 안 보이는데 대통령까지 나서서 노오오오력하라고만 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더 노오오오력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N)을 포기한다. ‘N포세대’의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저녁이 있는 삶, 여가, 꿈, 희망 등 포기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세대이다. 더구나 시간, 정성, 열정을 쏟아 부어 일해도 받는 돈은 형편없이 적은 ‘열정페이’만을 받고 있다.
헬조선을 떠나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이다. 2016년은 중국의 경기침체와 미국의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로 자산가격의 급변동과 잠재성장률의 저하, 원자재 가격의 추가 하락 등 세계 경기 회복에 큰 부담을 주는 요인들로 가득하다. 지난 고도성장기에 우리는 항상 수요가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상품이 부족하니 생산하는 대로 소비됐고, 주택이 부족하니 집값은 항상 올랐고, 자금이 부족하니 이자율은 높았다. 더구나 인력이 부족하니 젊은이들은 쉽게 취직이 됐다. 그러나 이제 모든 분야에서 공급이 과잉되면서 소비 부진, 취업난, 물가하락 등 경기침체로 접어들게 되었다. 과도한 규제와 간섭을 최소화하고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혁신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나 혼용무도의 시대에 정치와 행정의 혁신, 리더십의 복원은 요원하다. 특히 올 4월에 있을 총선으로 인해 문제를 풀어야할 정치가 더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2016년 병신년(丙申年) 붉은 원숭이해에 정말 병신년이 되어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원숭이처럼 능숙하고 재빠르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다방면의 개혁이 일어날지(사실 丙은 火로 새로운 문화와 창조를 의미하며, 申은 金으로 법의 강화와 다방면의 개혁을 의미한다) 걱정반 기대반 우려가 된다.
3. 붉은 원숭이의 해, Monkey Bars!
원숭이는 영장류 가운데 사람을 제외한 동물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사람과 모습이나 행동이 비슷해 친근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원숭이는 영리하고 재빠르다. 순우리말로는 잔나비(원숭이의 고유어인 ‘납’에 날쌔다는 ‘재다’가 합쳐짐)라고도 하는데, 원숭이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주가 많고 총명하며 언제나 좋은 면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속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재주를 너무 믿다가 실수를 하고 낭패를 볼 가능성도 있다. 김난도 교수팀의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6년 전망인 『트렌드코리아 2016』 (미래의 창, 2015)는 2016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을 ‘Monkey Bars’로 정했다. 몽키바는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구름다리 형태의 놀이기구이다. 2016년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적 위기의 깊은 골을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 신속하고 현명하게 무사히 건너 안정된 2017년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고 한다. 그 10가지 트렌드를 간략히 살펴봄으로 2016년도 새롭게 다가올 문화를 펼쳐보자(이하, 『트렌드코리아 2016』에서 인용함).
1) Make a ‘Plan Z’(‘플랜 Z’, 나만의 구명보트 전략) 플랜 A가 최선, 플랜 B가 차선이라면 플랜 Z는 최후의 보루이다. 저성장, 취업난, 고용불안, 양극화 등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면서도 풍요의 시대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여전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 한다 이 역설적인 긴장 속에서 나타나는 소비형태가 플랜 Z인데, 단지 무조건 아끼고 긴축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쓰지만 만족은 크게 얻으려는 전략’이다.2) Over-anxiety Syndrome(과잉근심사회, 램프증후군) 불안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안이 일상화되고 있다. 대중매체와 SNS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재난과 사건사고를 시각적으로 접하면서 대리외상을 경험한다. 또한 기업은 이러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하여 상품화하고 판매 전략(공포마케팅)을 세운다. 램프증후군은 근심이라는 환영의 마술램프를 들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동화 속 알라딘이 마술램프에서 마법의 거인을 깨우듯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걱정들을 램프에서 불러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과잉근심시대가 도래했다. 3) Network of Multi-channel Interactive Media(1인 미디어 전성시대) 과거 비주류로 여겨지던 1인 방송이 최근 들어 메이저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다. 공중파 TV에서도 1인 미디어를 전격적으로 수용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류 전파의 새로운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블로그로 시작,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로 성장했다가 이제 1인 방송의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4) Knockdown of Brands, Rise of Value for Money(브랜드의 몰락, 가성비의 약진) 구매의 나침반이던 브랜드의 역할이 흔들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이제 브랜드가 약속하는 환상을 믿지 않으며 소비자끼리 소통하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한다. 가격과 성능의 대비를 의미하는 ‘가성비’가 브랜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사치의 시대’가 가고, ‘가치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를 가린 복면 뒤에서도 절대가치라는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기업이, 그리고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5) Ethics on the Stage(연극적 개념소비) 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기부에 기꺼이 동참하지만 자발성보다는 부분적 강요로 기부 피로를 느끼는 소비자들이 이제 개념소비로 과시가 된 착한소비, 놀이가 된 기부 등을 창출했다. 사실 메리 제인 라이언이 『줌: 행복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의 ‘주는 행복론’에서 설파했듯이 베푸는 것이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자신을 사랑해서 남도 사랑하는 것(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이제 기부는 헌신적인 기부에서 본인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주는 기부로 바뀌고 있다.
6) Year of Sustainable Cultural Ecology(미래형 자급자족) ‘늙어갈 용기’가 필요한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래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은 커졌지만 환경오염과 자연재해가 심각해지고 도시생활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악화되면서 자족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어떻게 하면 현대 자본주의의 도회적 교환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보완해 줄 좀 더 지속가능하고 인간적인 삶을 누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은 친환경적, 생태주의적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가령 베란다와 옥상 등의 주거공간을 활용한 ‘친환경 상자텃밭’이 바로 그것이며 차후 전기차 시장의 급성장과 상용화가 시작될 것이다.
7) Basic Instincts(원초적 본능) ‘단기 불황에는 매운맛, 장기 불황에는 단맛’이 뜨는 것처럼 자극적인 것이 주목을 받는다. 최근 대중문화 현상을 살펴보면 하드코어급의 극단적 콘텐츠에 주목하고 세련된 A급 보다는 촌스런 B급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적나라한 솔직함에 공감하며, 질서정연함보다는 어이없는 부조화에 열광한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확산된 절망, 분노, 갈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감각에 탐닉하도록 주문한다. 이러한 ‘원초적 본능’은 잔인하고 유치하고 솔직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추구함으로 힘든 현실을 돌파해 나가고자 하는 사회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8) All’s Well That Trends Well(대충 빠르게, 있어 보이게) 자원이 충분하지 않고 정식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대단히 있어 보이게 만드는 능력인 ‘있어빌리티’가 SNS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역량이 되고 있다. ‘보이게’를 강조하면 있는 ‘척’이 되지만, ‘능력’에 방점을 찍으면 포장력이자 연출력이 되고 자신을 브랜딩하는 하나의 기술이 된다. 돈과 센스, 인맥이 있어빌리티의 과시대상이 되었다.
9) Rise of ‘Architec-kids’(‘아키텍키즈’, 체계적 육아법의 등장) 최근 젊은 부모들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체계적 육아’에 대한 열기가 심상치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똘똘 뭉쳐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정성 들여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 마치 검증된 공법을 총동원해 건축물을 설계, 시공해나가는 것 같다. 자녀들을 빌딩 건축하듯 하나씩 하나씩 공들여 키운 아이라는 의미로 건축의 아키텍쳐(Architecture)와 아이의 키즈(kids)를 붙여 아키텍키즈가 등장했다. 고도성장기인 1980년대에 태어나 본격적인 치맛바람, 바짓바람 속에서 성장한 1세대가 이제 스스로 부모가 되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육아에 대한 정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10) Society of the Like-minded(취향 공동체)대세를 따르기 보다는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은 이제 이색적인 취미를 당당하게 혼자 즐기기도 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기도 한다. 돈이 없는 것보다 취향이 없는 것이 더 부끄러운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식당에서 주문할 때, ‘아무꺼나’는 사라졌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공동체를 추구한다. 교회도 자신의 특성을 가질 때 성장하고 부흥할 것이다.
이처럼 2016년 붉은 원숭이해는 원초적 본능의 과잉근심을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취향공동체로 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현상의 기반에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빈부의 격차가 취향을 넘어 존재 자체로 까지 확장되는 헬조선에서 그 맹위를 떨칠 것이다.
4.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에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고 ‘부의 숭배를 부추긴 기독교의 원죄’를 지적하며 그 해결방법을 제시한 영국의 경제사학자인 R. H. 토니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이 넘칠수록 필요한 건 ‘연대와 평등’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평등과 연대의 회복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한다. 2016년 어쩌면 험난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기반한 연대와 평등을 통해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에서 고단한 삶의 영속성을 이야기하는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장성한 사람이 되어 이 험난한 세상에 사랑을 품고 붉은 원숭이해를 살아가야할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의 앞 절(11절)과 뒷 구절(13절)에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절)
그렇다. 우리에겐 아직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and the miles before I sleep)’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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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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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 ⑩] “크리스마스에 이웃과 함께 하는 식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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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으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저자는 아주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식탁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뿌리내린 자’로서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가정은 물론이고, 교회도 식탁 대신 다른 것을 우선함으로써 신앙의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관계’와 ‘식탁’, 그리고 그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은 이야기로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며 연결된다. 기독교 신앙 역시 ‘내러포’(narraphor, 은유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식탁에서 전달되는 내러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식탁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먹고 마시는 곳이다. 모든 식사의 자리에 ‘진정성’과 ‘진리’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탁에 함께 앉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저자는 자기 가정의 예를 들며 가족들이 식탁에 마주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몇 가지 제시한다. 특히 식사할 때 무엇이든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은 안 된다는 원칙이 눈에 띈다. 식사시간에 책, 핸드폰, 아이패드, 컴퓨터 등은 전부 사용금지다. 우리도 지켜야 할 원칙이라 하겠다.◈ 《태블릿에서 테이블로》 | 저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은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이자 복음과 문화,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는데 뛰어난 복음전도자요 저술가이다. 원제 From tablet to table. 예수전도단, 2015. 12,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의 ‘태블릿(tablet)’이 ‘태블릿 컴퓨터’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즉, 우리 일상에서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식탁의 중요성을 깨닫자는 내용으로만 생각했다. 책을 읽은 후에야 ‘태블릿’이 패스트푸드와 같은 인스턴트 신앙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았다. 저자는 오래 전 교회학교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반사 선생님이 들려주던 성경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부직포 칠판’과 반대되는 의미로 쓴 것이다.
▲ 예수님은 항상 배척받던 사람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셨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가족은 물론, 주위의 불우한 이웃과도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 [그림 출처: dreamstime.com]
#식탁공동체의 중요성에 관심 가져야
김길구 :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소위 ‘맛집, 먹방’ 등 먹는 것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식탁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 그동안 핵가족화,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음식문화 등으로 인해 우리의 전통적인 식탁이 무너졌고, 이에 따라 가족 공동체도 함께 붕괴되고 있습니다. ‘맛집’이나 ‘먹방’ 같은 프로그램이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건 아닐까요?김길구 : 최근에는 특히 ‘집밥’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맛집’이나 ‘먹방’이 식당에서 외식하는 것을 상징했다면, ‘집밥’은 역으로 우리의 식탁을 되찾아야 한다는 흐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김수성 : ‘집밥’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혼자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집에서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에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재료만 가지고도 간단하게 요리를 해서 어느 정도 ‘격’을 갖춘 밥상을 차려서 먹을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 아닐까요?김길구 : 출연자 대부분이 그동안 부엌과 동떨어진 남성들임을 보면 ‘집밥’의 의미가 가족식탁 공동체의 재발견이란 생각도 드네요. 이 책의 저자는 은유로 된 이야기를 뜻하는 ‘내러포’가 식탁을 통해 신앙과 매너가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고 주장하는데,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김현호 : 올해 초에 나온 한 설문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횟수가 일주일(21회)에 평균 9.6회였습니다. 60대 이상은 약 12회인 반면, 20대는 7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김길구 : 횟수도 문제지만 식탁에 같이 앉아서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죠. 텔레비전을 켜놓고 시청하면서 밥을 먹는다든가, 각자 스마트폰에 집중하면서 식사한다면 혼자서 밥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죠.김수성 : 식탁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이야기죠. 그래서 저자는 식탁을 함께 할 때에 원칙을 정해놓아야 한다며, 자기 가족의 식탁 원칙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107~110쪽 참조).
#예수님은 배척받는 자와 함께 식사해김길구 : 저자는 모든 식탁에는 ‘진정성’과 ‘진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잘못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음’을 서로에게 드러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죠. 즉, 식탁에서 서로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화해하고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김현호 : 일반적으로 우리 교회의 메시지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목회자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메시지, 교리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는 삶과 생활을 신학화하여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지혜를 좀 더 많이 전달했으면 좋겠습니다.김길구 : 이 책에서의 좋은 식탁은, 삶의 현장과 괴리된 바리새인들의 ‘율법, 규정, 배척’으로 상징되는 식사가 아닌, ‘사랑, 자비, 용납’으로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유쾌한 식탁에의 초대를 은유합니다.김수성 : 교회에서의 식사도 점차 한끼를 때우는 식탁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오후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 봉사하는 분들은 물론, 식사를 하는 분도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밥 먹기에 급급한 현실입니다.김길구 : 가정은 물론, 여건이 문제지만, 교회에서의 식탁 문화도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러앉아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치유의 식탁’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 식당의 분위기도 의도적으로 밝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김현호 : 주일날 교회에서 하는 공동식사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만찬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거룩한 식탁’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목회자와 직분 맡은 이들이 평신도들과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식사를 나누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가 강조하듯, 식탁을 차릴 때는 반드시 하나님/예수님의 임재를 초청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군요.김현호 : 예수님께서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신 것처럼, 리더가 먼저 섬기는 마음을 가지는 식탁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김길구 : ‘열린 식탁’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교에서 배척받던 작은이들과 식사하기를 즐기셨습니다. ‘끼리끼리’ 혹은 익명성 뒤에 숨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폐쇄성이 좋은 관계요, 좋은 공동체라는 착각으로 그들만의 식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봐야겠죠.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음식’ 만들자김수성 :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의 주제인 식탁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야기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 먼저 가족들과 함께 모여 성탄을 축하하는 식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또는 케이크를 자르면서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김길구 : 교회에서는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하는 식탁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슬로처치’에서 언급했던 포틀럭(potluck) 식탁을 차리는 것이죠. 이웃을 초청하되, 교인들이 각각 조금씩 음식을 준비하여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김수성 :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만의 ‘크리스마스 음식’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하면 칠면조 요리가 생각나듯이, 교회에서 공동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절기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을 되새기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현호 : 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음식이면 더 좋겠죠. 그리고 그 음식을 이웃과 나눈다면 더욱더 의미있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습니다.김길구 : 이러한 절기 음식은 기독교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식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이 피는 식탁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물론,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다음에는 존 스토토가 마지막으로 쓴 책, 《제자도》(IVP, 2010)를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예수님께서 내시는 식사 오병이어》 / 이준 / 새물결플러스《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데이비드 그레고리 / 김영사《만찬, 나를 먹으라》 / 김기현 / 죠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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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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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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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는 한 인간의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적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임철규,『눈의 역사 눈의 미학』)“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1. 눈의 역사에서 사람만이 ‘보는 것’을 통해 사유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전제조건인 보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 역사, 문명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해를 청각을 통해 수용했던 히브리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어 ‘나는 안다(oida)’는 ‘나는 본다(eidon)’의 과거로 ‘나는 보았다’와 같은 뜻이다. 즉 보는 순간 안다, 보는 것이 아는 것, 감각 작용이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이라 부르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제반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도 ‘내가 보다(horao)’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인 ‘보여진 것(idein)’의 과거분사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게 된다.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타자화하고, 비(非)동일적인 것으로, 반(反)정체성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폭력은 이렇게 눈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눈과 같은 저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라.『참회록』에서 “눈의 음욕”을 경계한 어거스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성상과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화, 목판화 등을 통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눈의 이성적 능력을 비판한 바울의 가르침(고후 4:18)을 따라 종교개혁가 칼빈은 ‘믿음이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뜨게 한다’고 말하며 청각만이 구원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했으나, 가톨릭은 성상, 성화, 십자가 이외에도 눈부신 성당, 각종 대회, 축제, 가면, 장관을 이루는 분수 등의 볼거리를 통해 시각문화를 창조했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평가하며 ‘영혼과 가장 빠른 교섭을 가지는’ 시각에 대해 예찬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이르러 눈의 잔치는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총체적 반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서전적인 시집『서곡』에서 이렇게 눈의 폭력을 지적한다. “우리들 감각들 가운데 가장 폭군적인 감각”이며 “그 힘이 잠들 수 있는 어떠한 표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애통해 한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 역시 바깥을 향한 육체의 눈은 언제나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내면을 향한 눈이며 이러한 눈은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대, 천상의 빛이여 마음속에 빛나라, 그리고 마음의 모든 능력을 비추어라. 거기에 눈을 심고, 거기서 모든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내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가 보고 말할 수 있도록.” 실존주의에 와서는 타자의 시선은 지옥으로 변한다. 타자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세계를 훔쳐가고 동시에 나에게 객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와 투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밀폐된 방』에서 사르트르는 가르생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잡아먹을 듯 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2. 예술의 눈으로 타자가 갖는 이 새로운 지위를 보여주기 위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건 나에 관한 진실을 얻으려면 나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기형도의 시를 통해 요절한 그의 속내를 이해하는 것’,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여린 작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현대 문명을 진단하는 영화감독의 시선을 맛본다는 것’,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그의 울분에 공명한다는 것’,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그의 고독을 맛보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세계를 달리 표현하는 타자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가.’ 눈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눈이며 이러한 눈이 선한 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과 눈을 되찾아야할 것이다. 거기에 예술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예언자들이 경험하는 신적 현전(Divine Presence)과 예술적 경험 사이에는 유비(analogia)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한 개인의 체험의 표현”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맥락 하에 나온 말이다. 예술 작품을 보고, ‘계시적 탈자(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하며, 그 작품의 아름다움 안에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있었다고 말하는 틸리히는 “그 순간은 나의 삶 전체를 감동시키고, 인간 실존의 해석의 열쇠를 주었다. 그것은 내게 생명의 기쁨과 정신적 진리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사실 시각예술과는 거리가 먼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개신교는 ‘말’에 묶여 있으며 시각예술과는 극히 의심스런 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종교음악과 찬미시에서는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의 성취를 능가하기도 했으나, 시각예술에서는 그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그러나 청각과 시각은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선한 눈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눈의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 배경에는 우상숭배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본성은 그 현존의 체험에서 눈의 배제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영은 모든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눈의 예술, 혹은 예술의 눈을 간과한 개신교의 역사를 통탄한다. “개신교적 삶의 맥락 안에서, 눈의 예술의 결핍은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계적으로는 지지할 수 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후회스런 것이다.”
3. 구별하는 눈과 공생하려는 눈 사이 나치즘을 공공연하게 대변한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공법학자인 독일의 카를 슈미트의 대표적인 저작『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는 슈미트의 말에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물소신학(Water Buffalo Theology)으로 유명한 태국의 일본인 선교사 코스케 코야마(Kosuke Koyama)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문화, 언어, 종교는 없습니다. 이 연결되어 있음은 생태학, 도덕, 신학의 양식입니다. 나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단언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내 자매와 형제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구별하는 눈을 넘어 공생하려는 눈을 제시한 것이다. 코야마 박사가 언어, 문화,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던 그의 삶 때문이었다. 시속 3마일로 걸어가시는 분이라는 물소신학을 통해 태국적인 상황 신학인 ‘물소신학’은 불교라는 종교 문화적 전통사회에서 기독교적 토착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변증법적이며 선교적 신학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한때 원수와의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악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듯이, 원수 속에도 선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냉전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듯이 우리만 선이고 원수는 악이라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원수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원래 머리 위에 숯을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받기 위한 고문행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양심을 움직이는 사랑의 행위로 재해석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원수 속에 꽁꽁 얼어붙다시피 한 선한 마음, 곧 양심이 상대방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는 진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 양심의 작동은 원수 간의 증오의 관계를(곧 구별하는 눈) 대화와 화해의 관계(공생하려는 눈)로 바꾼다. 그래서 악순환은 선순환이 되고,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호적 상생 관계로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별하려는 눈이 공생을 지향하는 눈으로 변화되어야만 참된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의 눈이 우리들을 바라본다.
4. 예수의 눈: 바보의 눈, 역설의 눈 한완상의 『바보예수』에는 바보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들, 특히 영악한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바보 예수’의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비유 말씀에는 꼴찌에 대한 진한 사랑의 표현이 있다. 탕자 같은 존재, 경멸받았던 이방인, 여성, 죄로 인해 중병에 시달리는 죄인들, 지체장애자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은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기득권층에게는 바보스런 편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심각한 바보다운 선택은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이다. 원래 메시아란 칭호는 당당하게 승리하는 지도자, 용기 있게 해방시키는 지도자, 신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패배하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승리자 메시아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우아한 패배’를 역설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산 위에서 바보처럼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시어 바보가 되신 것”, 지금 만신창이가 된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가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우아한 패배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완상의 말처럼 모두가 승리하려 한다면 우리 안의 악이 더욱 활개 치게 되니(發惡), 우아한 패배를 선택하여 우리 안의 숨겨진 선을 발선(發善)해야 한다. 이때 평화가 깃들며 함께 이기는 상승(相勝)과 함께 사는 상생(相生)이 이뤄질 것이다. 3세기경 외전인 『요한행전』에 의하면 예수는 단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는 예수의 이러한 감시의 눈은 중세 사람들은 ‘정의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삶은 가난한 이들, 땅의 사람들(암하레츠)을 위한 것으로 보면 예수는 그들의 고통에 단 한 번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도처의 인간들이 경험하는 숱한 고통 때문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전하는 아픔과 비통함에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선한 눈을 죽인 인간들의 악한 눈이 이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암흑과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책임 있는 철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는 그 사태를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부활의 신앙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암흑과 절망을 구원으로 바라보는 역설의 눈을 가졌다.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은 따라서 역설의 눈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눈을 어떻게 떠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대는 땅이 될 것이다. 그대가 신을 사랑하는가? …… 그대는 신이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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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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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⑨] 빠르고 간편하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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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의 문제 해결은 가정에서부터!
이 책의 원제는 《사회성 키우기》다. 다양한 스크린에 몰두함으로써 사회성을 잃어가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디지털 기기로 인한 문제점 제기와 함께 해결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해결방안의 시작은 가정이다. 가정에서부터 스크린 타임을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모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먼저 앞장서야만 한다. 그 방안으로서 다섯 가지 사회성 교육을 제시한다. 대체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안이다. 다만 우리나라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등의 문제는 미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으므로,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 한다.스크린 타임이 긴 어린이들의 경우, 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더하여 비만, 행동 장애, 성적 저하, 폭력성 등 육체적·정서적 부작용도 나타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이버 따돌림 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스마트폰이 최선’이라는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아이들이 분노를 느끼는 이유가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서일 수도 있다. “자녀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함께하라”는 말을 명심하자.◈ 공동저자인 게리 채프먼(Gary Chapman)은 미국에서 널리 알려진 상담가로서, 그가 쓴 책 《5가지 사랑의 언어》는 1992년에 출간된 이래 줄곧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원제 Growing up Social. 생명의말씀사, 2015.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물론, 길을 걸을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길 모퉁이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에 집중하는 어린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스마트폰 천국’으로 변해가는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청소년 스마트폰 중독 심각한 상태김길구 : 이제 ‘스마트폰’은 우리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일반 가정의 아이들은 물론, 교회 성도의 아이들에게도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미국 사례를 주로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요?김수성 : 우리나라 상황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정보화진흥원에서 지난 4월에 발표한 ‘2014년 인터넷중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 중 스마트폰 중독위험군에 속하는 비율이 29.2%였습니다. 특히 중학생의 경우는 33.0%나 되고, 초등학생도 26.7%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스마트폰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5.3시간이나 됩니다(표 참조).
김길구 : 우리나라에 스마트폰 중독 비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IT산업 선두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요?김현호 : 전문 인력도 부족하고 치료기관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님께서 인터넷 중독 치료와 예방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데, 정부의 지원도 얼마 되지 않을뿐더러 활동하는데도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합니다.김수성 : 맞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IT산업 수출 비중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IT 사용률이 떨어지면 수출하는데 명분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작용에 관한 조사는 하지만 치료나 예방은 생색내는데 그칩니다.김현호 :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자식만큼은 다른 아이들에게 뒤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열성’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 것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불안해서 스마트폰을 사줍니다. 또한 아이들은 혼자 있다 보니 스마트폰에 빠져드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거죠.
#부모가 먼저 절제하는 모습 보여야김길구 :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자료에도 나타났지만, 갈수록 중독현상을 보이는 아이들의 나이가 어려진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식당 등에서 보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고는 식사하는 부모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김수성 : 미국 시애틀 어린이병원 연구팀에 따르면, 어린이들의 TV 시청시간이 한 시간 늘어나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위험은 10% 높아진다고 합니다. 특히 두뇌 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는 3세 미만 어린이들에게는 신경기능 발달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림 1] 성인과 7세 어린이의 전자파흡수율 비교.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휴대폰 전자파가 태아를 비롯해 아이들에게 대뇌 발육 저하, ADHD를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습니다. 미국 예일 의과대학 연구에 따르면, 휴대전화 전자파가 뇌의 사령탑인 전전두엽의 신경세포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등에서 전국 초등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3년간 실시한 ‘전자파 인체영향에 대한 종합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그림 1] 참조).김길구 : 스마트폰을 통한 성인광고 등 유해광고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해결책이 무언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책에서는 ‘해결책은 가정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우선 부모들이 스마트폰 사용을 절제해야 한다고 합니다.김현호 : 최소한 저녁식사만큼은 가족들이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가족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은 놔두고 식구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김수성 : 저는 오래 전부터 ‘디지털 다이어트(digital diet)’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모들이 아이들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스마트폰을 사용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와 이야기하고 싶어도 그럴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을 ‘도구’로 인식하고,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도 따라합니다.김길구 : 미국과 유럽의 경우,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독서가 디지털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김수성 : 당연히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너무 빠지면 아예 책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가 스크린에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줌으로써 독서가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는 스마트폰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김현호 : 아이들의 재미를 바꿔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한 교육전도사는 금요일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 앞으로 가서 아이들과 실컷 놀아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아이들도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노는데 집중하여 폰을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해요.김수성 : 중요한 지적입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습관을 고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다른 재미를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최근 아이들 간의 사이버 왕따가 문제인데, 서로 어울려 뛰노는 아이들에게는 왕따가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독서 습관도 아이들의 재미를 바꾸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뛰어놀게 해야김길구 : 얼마 전 광주에 있는 한 대안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성경암송을 습관화하더군요.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학습능력이 상당히 향상하는 효과를 거둔다고 합니다. 이런 훈련은 ‘디지털 치매’와 관련해서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2] 책 읽을 때와 게임할 때 뇌파 비교.
김수성 : 나름대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독서는 뇌의 많은 부분을 활성화시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에 익숙해지면 학습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뉴욕타임스〉에 실리콘밸리에 있는 대안학교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부분 IT 기업의 자녀들인데도 디지털 기기와는 거리가 먼 교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중학교 2학년이 되어야 겨우 배운다고 합니다([그림 2] 참조).김길구 : 스마트폰이 필요한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의문 나는 문제가 있거나 즉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죠. 얼마 전 이야기를 하다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즉석에서 스마트폰으로 그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스마트폰의 위력을 느낄 수 있죠.김수성 :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때는 스마트폰이 ‘도구’로 사용된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문제도 생각해야 합니다. 스마트폰은 ‘빠르고 간편한 도구’이지만 ‘좋은 도구’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에 따른 문제가 너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모두가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스마트폰을 꺼놓고 악기를 배운다거나, 각자 취미생활을 함으로써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죠.김길구 : 체육의 중요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근대 스포츠는 대부분 기독교 리더들에 의해 창안되고 보급되었습니다. 청소년들을 선도하기 위해 이들 스포츠를 보급함으로써, 심신 단련과 함께 협동심을 키웠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김수성 : 좋은 지적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교회에서 앞장서 주일은 ‘디지털 안식일’로 지키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즉, 주일은 아예 스마트폰을 꺼놓고 교회에 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관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김길구 : 올해 우리나라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하루 48분, 아빠와 아이의 교감시간은 고작 6분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최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제도가 율법적이라는 편견도 있지만, 회당에 갔다 와서 촛불이 켜진 정성스런 저녁식탁에서 아버지가 기도를 하고, 모성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성경 구절을 읽는 등 전 가족이 함께하는 날이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자연친화적인 활동을 하는 디지털 안식일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으면 좋겠습니다.김현호 : 교회학교에서 ‘우리 동네 알아보기’ 같은 활동을 하는 것도 좋겠네요.김길구 : 이 책에는 스마트폰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안을 많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적합한 내용을 받아들여 좋은 결과를 도출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는 레너드 스윗의 《태블릿에서 테이블로》(예수전도단, 2015)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IT전문가 가족의 사이버 중독 탈출기》 / 이지용 지음 / CUP《페이스북 영성이 우리를 구원할까?》 /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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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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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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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극 영화(드라마) 속의 왕의 모습몇 주 전만 하더라도 서울 강남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 <사도>(2015)를 관람하러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사춘기랍시고 부모 말 안 듣고 공부를 등한시했다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협박하기에 안성맞춤인 영화가 <사도>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영화 <사도>의 기표는 일자리(왕좌)를 놓고 부모와 자식 간의 대결을 다룬 것으로 현재 청년 일자리에 대한 부모세대의 양보를 요구하는 정부의 요청이 기의로 깔린 것은 아닐까? 아무튼 영화와 드라마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탄생인 2012년부터 사극 영화 속에 나타나는 왕의 모습을 어떤가?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를 통해 ‘가짜’라도 좋으니 ‘백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공의의 왕’, ‘강대국 사이에 실리 외교를 펼친 왕’을 바라는 민심이, 영화 <관상>(2013)에서는 이제 폭군(수양대군)을 막기 위해 그의 얼굴 관상까지 바꾸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폭군을 맞을 수밖에 없는 조선의 운명을 그려준다. <명량>(2014)은 이제 왕(선조)에게 의지하지 말고 왕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라고 한다. 왜구의 침입 때 조선의 왕 선조 임금은 백성을 따돌리고 도망을 갔으며 저 살자고 도망간 임금 대신 백성은 이제 이순신 장군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왕이 아닌 다른 영웅을 백성은 갈구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왕은 자신의 왕좌를 백성을 돌보는 자리가 아닌 신하들과 경쟁하고, 맘에 맞는 자식(<사도>에서는 손자)에게 물려주는 ‘내 입의 금수저’가 되어 버렸다. 서울 강남 학부모들의 <사도> 열풍은 이런 맥락 하에 그 의문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곧,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 등의 수저론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2. 다윗 왕과 솔로몬 왕에 대한 두 가지 시선고대 근동의 모든 역사가 지배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졌다면(따라서 앗시리아, 바벨론, 이집트 등의 역사는 왕들이 전쟁을 하거나 또는 이웃 나라를 정복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밑에서부터 위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구약성서 안에는 ‘신명기 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와 ‘역대기 역사서(Chronicler's History: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족장시대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올브라이드(Albright)학파와 달리 사사시대부터 시작된다는 알트(Alt) 학파의 마틴 노트(Martin Noth)는 ‘4경설(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을 주장한다. 따라서 모세 5경에서 신명기를 떼어 낸 뒤 나머지 뒷부분과 연결하여 이를 신명기 역사서(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라고 부른다. 이 역사서의 최종적인 형태는 바벨론 포로기 때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포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그들의 역사를 재정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가 야훼의 선언으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면 지금 그 땅에서 쫓겨나야만 하는가?”, “야훼는 정말 창조주인가? 아니면 바벨론의 마르둑이 위대한 하나님인가?”, “야훼와 마르둑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는가?”, “정말 야훼는 죽었는가?”, “정말 우리는 야훼로부터 버림 받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해답(“아니오”)이 바로 신명기 역사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포로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이스라엘이 야훼를 배신하였고, 야훼가 화를 내어 잠시 동안 바벨론으로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불러 올 것이다. 이러한 신명기사가의 대표적인 역사철학의 관점은 다음에 잘 나타나있다.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왕상6:12-13).” 또한 신명기 사가의 관점이 잘 반영된 것이 사사기와 열왕기서이다. 사사기는 원래 사사들의 행적에 관한 고대 전승에 신명기 역사가가 재편집하면서 ‘배신-징벌-회개-구원’의 도식을 적용시킨 것이며 열왕기서는 역대왕들의 평가 기준으로 신명기 역사서의 관점을 적용시킨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제의’와 ‘시내산 계약의 충실’인 신명기 사가의 입장에서 시내산 계약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계약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 왕에 대한 평가도 이러한 가치 기준으로 해석한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과 밧세바, 그리고 우리아에 대한 이야기(12장의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에 이르기까지)는 위대한 왕 다윗도 ‘배신-징벌-회개-구원’의 도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역사가의 입장이다. 즉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이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하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야훼 종교에서 멀어지는 솔로몬의 악행(왕상 11:1-3)을 신명기 사가는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역대기 역사서는 포로에서 귀환한 공동체가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려고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온전한 ‘성전예배를 드리는 신정사회’와 ‘이상적인 왕국의 건설(다윗 왕조 선택 사상)’을 위하여 역사를 재해석한다. 그들은 다윗왕조를 야훼가 다스리는 왕조라고 높이며, 예루살렘성전 제의를 유일하고 합법적인 예배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다윗(은 물론이고 솔로몬 조차)을 이상화했을 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에서 삭제하기도 하였다. 사무엘하 11장의 다윗의 범죄는 삭제되었으며, 솔로몬 왕의 범죄도 삭제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경건한 성전 건축가요 현명한 통치자라는 인상을 길이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3. 다양성 찬미신약성서는 3가지 기둥이 있다. 복음서의 기둥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서신서의 기둥을 통해 교회를, 계시록의 기둥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안내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핵심은 ‘예수님 잘 믿고 교회 생활 하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다가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기둥으로 들어가는 문이 4가지가 있다. 그것은 각각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다른 예수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왜 예수의 이야기가 각각 다를까? 다양성이야말로 진리를 보여주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에 타티안(Tatian, 120년경 출생)이라는 교부가 170년경에 <디아테싸론, Diatessaron>(문자적으로는 ‘through the four’, 곧 사복음서의 조화)라는 책을 통해 사복음서들의 자료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엮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만다. 예수에 관한 하나의 획일적인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흥미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다양성이 진리를 더 잘 보여주는 것이다. 철학자 지젝(Slavoj Zizek)이 포스트모던의 다양성을 ‘시차(parallax)’라는 천문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며 ‘역동적인 공존’을 이야기한바 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양한데,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획일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 그 자체를 인정해야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모순되는 것들이 더 큰 맥락에서는 하나의 통일적 세계관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부산에서 내가 보는 금성의 위치와 시카고에서 친구가 보는 금성의 위치는 다르지만, 그 다름으로 인해 금성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시차, 그 다양성과 차이가 사물의 실체를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차이를 강조하면 할수록 진리는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근대 회화의 아버지 세잔(Paul C?zanne)의 화법이 그렇다. 세잔의 정물화는 대상(과일과 같은) 하나하나에 시점들이 들어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점들이 전체 정물화를 구성하는데 이 정물화는 ‘시점들의 다원성’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 세계로 드러난다. 4복음서의 다양성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4. 획일적 역사관의 위험성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고한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의 다음 인용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선배들이 살아왔고 읽어왔던 성서를,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현실(특히 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을 바라봐야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불타는 교회를 바라보았다. 수도원은 오래전부터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오늘 우리는 적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요르게 영감의 얼굴 말이다. 철학자에 대한 증오로 일그러진 그 얼굴에서 나는 처음으로 적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적 그리스도는, 그 사자(使者)가 그랬듯이 유대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먼 나라 족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적 그리스도는, 지나친 신심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다. 이단자가 성자에서 나오고 신들린 자가 선견자에서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려이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요르게가 능히 악마의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 나름의 진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허위를 타파하는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높은데 이르면, 거기에서 찾아낸 것이 유용한 것이든 무용한 것이든 일단 올랐으니 사다리는 치워야 한다.…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지금 교과서 국정화 논쟁은 이미 신명기 사가와 역대기 사가의 다윗, 솔로몬을 보는 관점으로 성서 안에 다 나와 있다. 그리고 사극 영화는 그 마지막을 연도별로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 진리는 예수의 십자가처럼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 성서는 말하고 있으며 유용한 진리는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라고 에코는 말하고 있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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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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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⑧] “건강한 영성 위해서는 감정 숨기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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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영성은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여보, 당신과 사느니 나 혼자 사는 게 더 행복할 거 같아요. 이제 롤러코스터 같은 결혼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요. 당신을 사랑하지만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지는 않을래요. 많이 기다렸는데…….” 교회 부교역자가 스페인어 예배 출석자 200여 명을 데리고 나가버려 화를 삭이기 힘들었던 때였다. 늦은 밤,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데 아내가 들어와 이렇게 통보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당신이 섬기는 그 교회에도 이제 안 나갈래요. 당신의 리더십은 따를 가치도 없으니까.” 저자는 그때서야 자기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감성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위장한 자기를 발견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들 보기에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했다. 목사인 그는 더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가정에서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고,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의 제목인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영성도 병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2부에서 건강한 영성에 찾는 7단계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자기 자신까지 솔직하게 드러내고, 매일 기도와 안식, 그리고 사랑으로 화평을 이룩하라고 권고한다. ◈ 저자인 피터 스카지로(Peter Scazzero)는 미국 뉴욕 퀸즈에 있는 뉴 라이프 펠로십교회 설립자이자 담임목사로서, 자신의 사역을 책과 세미나를 통해 나누며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원제 Emotionally Healthy Spirituality. 두란노, 2015.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갈등을 이야기한다. 가정과 교회 생활에서 신앙과 감정이 상충하는 일이 벌어질 때,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극복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동안 우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능하면 ‘묻어두는’ 게 최선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저자는 ‘감정을 드러내라’고 충고한다.
#먼저 ‘문제는 바로 나’라고 고백해야김길구 : 목회를 하는 저자의 부인이 어느 날 ‘더 이상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리더십은 형편없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김현호 : 저자는 그동안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은 외면한 채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포장된 이미지’만 보여주려고 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가정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툼이나 갈등, 실패 등 우리의 추한 모습이 드러날 때는 더 그러했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달랐던 것입니다.김길구 :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죠. 지금은 고인된 저명한 목사님의 딸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슬픈 가족사’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책을 작년 말에 펴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그 목사님은 오직 연구와 집필 그리고 교회 일에만 매달린 반면, 가정에서는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김수성 : 이런 모순은 우리 대부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문제는 바로 나였다”고 고백하죠. 이러한 고백이 선행되어야 벗어날 길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김현호 : 최근에 열린 ‘바른 신학 균형목회 세미나’에서 장신대 이만식 교수가 교회 청년 2,135명을 대상으로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적인 문제’를 지적한 응답자가 53.6%나 되었다고 합니다. 즉, ‘교회 내부의 배타적 분위기’나 ‘정서적으로 수용적이지 못한 교회 신자’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김수성 : 지난번에 읽었던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있었죠. 교회를 떠나는 세 가지 이유 중에 하나가 ‘위선’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김길구 : 저자는 ‘건강한 정서’와 ‘관상적 영성’이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분노, 슬픔, 두려움 같은 감정을 무시하지 말고 드러내되, 그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관상적 영성과 통합될 때 우리 삶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난다고 충고합니다.김수성 : 폴 에크먼(Paul Ekman)이라는 심리학자는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은 모든 사회에서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이러한 기본 감정조차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 무너진 영적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서와 관상적 영성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심리학자 폴 엑크먼(Paul Ekman)은 기본 감정을 나타내는 얼굴 표정은 인종이나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 비슷함을 밝혀냈다. 위쪽은 기쁜 표정, 아래쪽은 화난 표정]
#치유 위해서는 ‘자기이해’ 선행돼야김현호 : 건강한 정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슬픔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감정을 인식하고, 다룬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감정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망가뜨리는 감정 패턴에서 도망쳐 나오는 것입니다.김길구 : 저자는 건강한 영성에 이르는 길을 7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중에서 ‘과거를 직면하라’는 권고는 인상적입니다. 특히 성경에서 ‘가족’은 보통 3~4대를 포함하는 확대가족을 이야기한다며, 과거의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미국의 경우, 이민사회로서 신앙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상처와 고통 없이 자리 잡은 가정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김현호 : 우리나라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이어진 전쟁의 고난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왔던 과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성공지향적인 물질문명 속에서 일에 우선하면서 가정은 뒷전으로 밀어두었던 것이 사실입니다.김수성 :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우리는 과다한 노동과 성과에 내몰리고, 이로 인해 ‘자기 착취’로까지 치달으면서, 결국에는 ‘소진증후군(burn out)’과 같은 신경성 질환에 시달리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김길구 : 이제 치유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한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자기 인식’ 또는 ‘자기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관상적 영성’을 해결책으로 제시합니다.김현호 : 그동안 한국 개신교회는 이런 영성적 방식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일부에서는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몇 년 전에 이동원 목사가 진행해 왔던 ‘관상(觀想, contemplation) 기도’ 세미나를 들 수 있습니다. 반발이 심해 결국 세미나를 스스로 중단했죠.김길구 : ‘관상적 삶’은 궁극적으로 ‘느리게 사는 삶(slow lif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동원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의 목회자는 물론, 교인들의 바쁜 삶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관상 기도를 보급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목회자의 ‘휴식기’ 제공해야김수성 : 저자가 밝힌 ‘자기 사랑’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라 할 수 있겠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족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조금은 느리게 살면서 먼저 자기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이를 위해서 목회자부터 정서적·영성적 건강을 스스로 체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한 휴가 개념이 아닌, 자기성찰 휴식기를 교회가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공동체를 기름진 초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영성을 훈련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저자는 특히 매일 기도와 안식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라는 뜻으로 말씀 묵상)도 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교계에 성경을 도외시하는 분위기가 자꾸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부교재에 치중함으로써 텍스트의 본래 의도가 왜곡되기도 합니다.김수성 : 잘못된 디지털 문화가 ‘21세기 짐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언급도 관심을 가질만한 대목입니다. 그렇기에 성경 텍스트와 안식의 중요성은 디지털 사회에서 더욱 절실합니다.김현호 : 이제는 가족에게 존경받는 성도, 팀원들에게 온유하고 수용적인 신도가 영적으로 더 건강한 성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교회도 이런 성도들이 더 많아지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런 성도들이 교회지도자로 세워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가족이든 조직이든 간에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도 우리에게 던져진 관심거리입니다. 단순히 봉합하거나 축소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서 적극적으로 해소하도록 해야 합니다.다음에는 게리 채프먼과 알린 펠리케인이 쓴 《스마트폰에 빠진 아이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생명의 말씀사, 2015)를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 / 피터 스카지로, 워렌 버드 / 이레서원《정서적으로 건강한 리더》 / 피터 스카지로 / 두란노《영적훈련과 성장》 / 리차드 포스터 /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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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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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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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극 영화(드라마) 속의 왕의 모습
최근 영화 <사도>에 이르기까지 사극 드라마, 혹은 영화가 인기가 있다. 사극의 형태를 빌려 현실정치의 코드를 풀어내는 영화와 드라마는 늘 시청자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러한 사극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는 영화 내용에 당대 대중의 욕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극 작품 속에서는 현실 정치의 사례를 풍자하고 그것을 간접적인 코드로 녹여낸 사례가 많다. 따라서 사극에는 시대별로 늘 큰 흐름이 있다(이하, 이털남 198회 문화평론가 하재근, <영화·사극 속의 정치코드 분석> 참조). 1980년대까지는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와 치정이 사극의 주된 내용이었다. 힘센 자가 권력을 잡고 그렇지 못하면 당연히 죽게 되는 구조를 그려, 당시 군부 권력의 쿠데타 등을 정당화 하였다. 이후에는 변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유행했던 <용의 눈물>(1996~1998)이라는 사극은 그 당시 난립하던 수많은 대권을 잡으려는 잠룡을 빗댄 작품이었으며 2000년대에는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타파되면서 사극을 통해서 국민의 정치적 열망이 드러나게 되었다. <왕건>(2000~2002)이라는 드라마는 김대중 정부 시절 지역감정 회복이라는 주제를, 노무현 정부 때는 정조 왕과 이순신 장군이 박정희 시대(그때 전국 초등학교에 이순신 장군이 세워졌다. 장군의 이미지와 자신을 결합하려는 의도였다)와는 다르게 역설적으로 부각되었다. 가령, <불멸의 이순신>(2004~2005)이라는 작품은 여소야대로 정책 추진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했고, 강력한 개혁 군주 정조의 이야기를 담은 <이산>(2007~2008)이라는 작품은 노무현 정부 말기부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당시 국민이 보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 연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강력한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모습은 그의 비극적인 운명과 함께 노무현과 오버랩 되었고, 대중은 강력한 CEO대통령을 갈구했다. 따라서 직선제 도입 이후 사상 최대 득표차로 당선된, 강력한 실용주의적 지도자 이미지의 이명박 대통령의 등장은 사극의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지지율은 바닥을 쳤다. 비록 윤리적으로 하자가 있을지언정 강력한 지도자인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고통을 씻어주겠거니 했는데, 대중은 국민과 소통하지 않고 편협한 인사, 일방적인 정책운영에 실망하게 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서는 세종대왕이 강력하게 조명됐다. 백성의 삶을 억압하지 않고 잘 어루만져 주는 온건한 관리자의 상이 화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힐링(healing)으로 시대적인 화두가 바뀐 것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이 당시에는 <대왕 세종>(2008), <뿌리 깊은 나무>(2011) 등 세종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인기를 끌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 시기의 사극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토론’이라는 코드이다. 가령 <선덕여왕>(2009)의 미실과 덕만도, <뿌리 깊은 나무>의 밀본의 수장과 세종도 꼭 토론을 하는데, 이처럼 소통을 통해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지도자 상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당시 이명박 정부의 불통이미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사극들에 나타나는 지도자들은 자신을 세일즈 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의>(2012)라는 작품을 보면 최영 장군과 신진 사대부들조차 공민왕에게 “내가 왜 당신 신하여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러면서 왕과의 대화를 통해 설득당하여 왕의 편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작품 안에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정당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동반되는 것이다. 또한 <대풍수>(2012)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를 우스꽝스럽고 즉흥적이고 가벼운 성격으로 묘사하지만, 호탕하고 의리가 있어, 자신을 지지하는 현자들의 말을 듣고, 지도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위화도 회군을 결심하는 이로 그리려 하고 있다. 결국 대부분의 사극은 영웅들 이야기이고, 국가를 다스리는 이야기이니 리더십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극을 통해서 국민들이 원하는 리더십의 방향, 지도자의 상이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이후 사극 분석은 다음 호에)
2. ‘신-왕’ 예수
그렇다면 성서는 어떤가?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공동체는 당시 로마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에 ‘신-왕 예수’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하였다. 즉, 요한공동체는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신이며 왕으로 고백하였다. 로마 제국의 신-왕 일치 사상이 제국의 통일성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 통치 이념의 일환이었다면, 요한공동체의 신-왕 일치 사상은 로마 제국에 대한 저항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영생은 제국 로마가 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허락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공동체가 전하는 예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로마라는 세상 제국을 배제하고 읽는다면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를 상실한다. 요한공동체는 세상(로마제국)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가령, 요한복음에서 현저하게 사용되고 있는 ‘영광’이나 ‘은혜’, ‘진리’, ‘길’, ‘이름’, ‘자유(롭게 하다)’, ‘생명’과 같은 단어들은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로마 황제를 표상하는 언어였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이러한 용어들을 비교급이나 최상급으로 사용하여(‘은혜와 진리가 충만’, 1:14, ‘은혜 위의 은혜’, 1:16, ‘참으로 자유롭게 하다’, 8:36 등) 황제보다 비교 우위로 표현함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 의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거짓된 세상 제국과의 대결, 거짓된 종교를 벗어나 참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진정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이미지는 요한 18:36절에 두 번이나 반복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언급으로 인하여 정치적 함의를 갖지 않은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연설문과 비교하여 “너희는 세상 왕국(kingdom on earth)의 백성이다”와 비교하여 읽어야 한다. 따라서 예수의 말에서 ‘내 나라’는 초월적인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인 로마에 대한 소속을 거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부는 이적 사건에도 나타난다. 가령, 예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임으로써 황제의 급식을 능가한다(요6:1-15). 북한에서도 김일성이나 김정일 생일 때, ‘이밥과 고기국’을 인민들에게 베푸는 것처럼 로마는 새로 황제가 즉위하면 백성들에게 급식을 나눠준다. 그러나 예수의 급식은 황제보다 양이 많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다. 이러한 비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도 나타난다. 요한공동체는 로마 황제의 대관식 장면과 예수의 죽음을 빗대어 묘사하는 것으로 예수의 정치와 로마 황제로 대표되는 세상 권력의 정치를 대조한다. 로마 황제가 ‘로마의 머리 언덕’(카리톨리노)에서 세상 제국의 황제 자리에 등극했듯, 예수도 ‘예루살렘의 머리언덕’(골고다)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온 우주의 황제 자리에 등극하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자.
여기서 예수가 빌라도 심문 당시 입었던 ‘자색 옷’과 가시‘관’은 황제의 복장과 금관의 상징으로, 당시 도미티안(Domitian A.D 81-96년) 황제가 대중들 앞에 나갈 때 자신을 쥬피터(Jupiter, 그리스의 Zeus) 신으로 드러내기 위해 입었던 의상이다. 따라서 권력의 상징인 자색을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입을 경우는 처벌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금관은 로마 황제들이 일반적으로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신적 표상을 담고 있다. 마가도 ‘자색 옷’이라 하고 있으나(막15:20), 마태는 ‘주홍색 옷(홍포)’으로 기록하여 왕적 표상을 손상시키고 있으며(마27:28, 31), 누가는 이러한 보도를 아예 생략하여 예수의 왕적 표상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이다. 이러한 상이한 관점은 각각의 복음서를 산출한 공동체들이 당면하였던 다양한 정황과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 추구와 관련이 있다. 곧 공동체는 자신들의 삶과 신앙의 핵심이었던 예수에 대한 고백 안에 자신들이 처한 정황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투사함으로 그들만의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였고,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추구해 나간 것이다.
3. 예수의 정치, 교회의 정치 로마 황제로 대표되는 세상의 정치는 한 사람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모든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짓밟고 제거하는 식의 무한 경쟁에서 승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예수의 정치는 모든 이의 유익과 복지를 위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예수의 정치, 곧 예수를 머리로 고백하는 교회의 정치란 타자의 유익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부인하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정치라 할 수 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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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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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⑦] “순례는 영원한 삶을 위한 큰 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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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
《여행》이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선택하면 후회할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여행이나 관광에 관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신학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여행을 이야기한다.저자는 여행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것을 비롯해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전통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래서 서두에 ‘기독교 신앙은 길 위에서 완성된다’며, 기독교는 ‘길 위의 신학’임을 강조한다.저자가 이야기하는 여행의 범주는 관광에서부터 피난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상당히 넓다. 여행, 관광, 이주, 순례, 방랑, 선교여행, 단기 집중여행 등 다양한 형식의 여행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은 분명하다. 단순히 관광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권력관계까지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한다.특히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제국주의의 연성(軟性) 권력에도 휘둘리지 말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신학적, 정치적 저항 행위가 되어야 제대로 된 여행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순수한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신학자는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그러나 일반인들이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힘겹다. 그렇기에 여행을 떠나되, 지금부터라도 좀 더 보람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저자인 요르그 리거(Joerg Rieger)는 미국 달라스에 있는 남감리교 대학교 퍼킨스 신학대학의 구성신학 교수이다. 독일 태생으로 신학을 전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원제 Traveling. 포이에마, 2015. 9,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여행!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낱말이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메르스 사태 이후 해외여행이 봇물 터지듯 급상승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 여행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이색적인 것을 접할 때 느끼는 신선함이 우리를 떠나게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번에 읽었던 책, 《여행, 관광인가 순례인가》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역설한다.
#여행은 구약-기독교 전통과 연결돼김길구 : 이 책을 열자마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위대한 여행의 모험에 관해 얘기하면서 이 세상은 거대한 책이라 했고 여행자만큼 이 책을 많이 공부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꼼짝 않고 자기 집에만 박혀 있는 사람은 이 책을 한 페이지만 읽은 것이다.” 상당히 인상적인 말입니다.김현호 : 저자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여행이란 구약-기독교 전통과 깊이 잇대어 있으며 신앙을 실천하는 현장은 바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로서의 여행은 ‘길 위의 신학’이라고 정의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신학과 관련지어 표현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난 것에서부터 광야 생활, 바벨론 포로 생활, 예수의 사역과 바울의 전도 여행 등 모두가 정적인 신앙이 아니라 끊임없는 길 위의 신앙입니다. 그렇기에 여행은 ‘나를 따르라’는 초대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합니다.김수성 :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행’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이나 관광보다는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단순한 관광보다는 순례, 방랑, 이주, 피난 등 자의적 여행은 물론 어쩔 수 없이 정주지를 떠나 이국땅에 머무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김길구 : 저자는 ‘길 위의 신학’과 ‘사유화(思惟化) 신학’을 대립시켜 여행을 이야기합니다. 궁극적으로 여행은 ‘좁은 길로 들어가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정주하는 신학은 자칫 안정을 유지하는 ‘넓은 길’이 될 수도 있음을 언급합니다.김현호 : 교회가 일정 지역에 자리를 잡더라도 안주할 것이 아니라, 안디옥교회와 같이 끊임없이 인근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지원하는 동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최근 교계에서는 선교사를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대폭 줄어 걱정입니다. 헌신보다는 안주를 원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여행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임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의 안락함을 버리고 길에서 만남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 여행은 구약-기독교 전통과 깊이 잇대어 있다. 신앙을 실천하는 현장은 바로 길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순례로서의 여행은 ‘길 위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Rene Magritte의 ‘The pilgrim’(1966)〉
# 길에서 자기를 찾고 하나님 만나야김수성 : 사실 저자가 강조하는 여행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여행과 많은 차이가 납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패키지관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여행 스타일입니다.김길구 : 우리나라도 조금씩 변하고 있죠. 여태까지 구경꾼에 그쳤다면, 최근에는 직접 체험하는 순례나 트레킹으로 변하고 있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벌써부터 자유여행이나 배낭여행 붐이 불고 있습니다.김현호 : 문화관광부 통계에 따르면, 이스라엘 인근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사람이 연간 2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지 순례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관광에 치우친 면이 많다는 것이죠.김수성 : 조지 리처의 책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 보면, ‘맥도날드화된 관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행사는 관광지의 사람, 문화, 제도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도록 하고, 자유시간은 거의 없도록 빡빡하게 일정을 짠다는 것이죠.김길구 : 그렇더라도 주위에서 성지 순례를 다녀와 달라졌다는 분이 많은 것을 보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달라져야 할 부분도 많지만, 현재의 흐름을 보면 머지않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순례는 ‘영원한 삶을 위한 큰 투자’라는 말이 실감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김현호 : ‘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돈만 지불하면 되는 관광은 편리함과 돈에 따른 대가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합니다. 이에 비해 순례 정신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은 조그마한 것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김수성 : 산티아고 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의 말을 들으면, 엄청난 고생을 하였지만 기회만 된다면 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길 위에서 자기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이 아닐까요.김현호 : 저는 가끔 제주도 올레길을 걷습니다. 이 길을 만든 서명숙 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독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올레길을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갈맷길, 초량 산복도로 길이라도 순례의 정신이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최근 부산에서도 기독교 순례 길을 개척하는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습니다. 부산장신대에서 ‘부산의 기독교 유적지’ 가이드북을 만들어 순례길을 안내하는가 하면, 부산기독교총연합회에서는 몇 년째 부산의 선교 역사를 돌아보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광복로 입구에 초기 선교사 첫 기착지 표지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신앙 성지 순례길 만들어야김현호 : 저는 몇 해 전부터 타 지역 기독인들과 부산의 청소년들에게 부산의 기독교역사를 간직한 초량교회, 장기려기념관, 부산진교회, 일신여학교기념관과 일신병원, 수정동성결교회, 삼일교회 등을 연결하는 지역 순례길을 몇 차례 안내해 왔습니다. 누군가가 나서 이런 순례를 정례화하고 좀 더 전문화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김길구 : 김현호 대표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교회가 이런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초기 부산에서 활동했던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교여행이나 순례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 길을 성지로 삼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김현호 : 필요하다면 도시 교회가 기독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의 농촌이나 어촌 교회와 연계하여 순례하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 한 권 들고 떠나는 신앙의 유적 탐사도 좋은 순례길이 될 것입니다.김수성 : 저는 교회의 여름학교가 이런 프로그램으로 방향을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실내에서 벗어나 길 위에서 하나님을 찾는 순례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개 교회에 부담이 된다면 지역 교회가 공동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어떤 분은 일본의 저력을 소위 ‘오타쿠’ 문화에서 찾기도 합니다. 개개의 민간인들이 하나의 주제나 관심사에 대해 평생 파고들어 전문가보다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문화이죠. 북유럽의 힘도 이와 비슷한 민간인들의 평생공부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열풍이 불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다음 달에는 피터 스카지로가 쓴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흔들리며 걷는 길》 / 김기석 / 포이에마《信行여행, 한국기독교유적지 137》 / 이성필 / 세줄《부엔 카미노! 산티아고를 걷다》 / 구철헌 / 예영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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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