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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7 : 감정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섬세하게 직조된 기쁨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한 안성맞춤의 옷, 모든 비탄과 갈망 아래로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 일부 1. 서로 잡아먹는 비굴한 울혈(鬱血)사회와 감정의 윤리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울혈(鬱血)사회’이다. 국민이 화병에 걸린 사회라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아니 나는) 쉽게 화를 내고, 남 탓을 일삼지 않는가? 나아가 신문 사회면(아니 1면)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저지르는 증오범죄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윤평중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성과 부당한 대우”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본다. 박노자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1/2』(한겨레출판사, 2001/2006)에서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뿌리 깊은 전근대성도 질타하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라는 교집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폭력을 가르치는 군사문화, 굴종과 타협을 강요하는 대학 사회의 현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선 밖으로 내몰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은 박노자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제도적·사회적 폭력에 대해 울부짖고 있다.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말한 고 신영복 교수의 말은 지식과 감정과 실천의 문제를 잘 요약한다. 감정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 Kant)의 냉철한 이성과는 달리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자고 이성을 주장했던 스피노자(B. de Spinoza)는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들의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즉 우리는 타자를 만났을 때 기쁨과 슬픔 둘 중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자신이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전자를 기쁨의 감정이라 하고 후자를 슬픔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이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슬픔을 주는 관계를 단절하고, 기쁨을 주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일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감정의 윤리학이 기쁨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 낙타, 사자, 어린아이 2. 르상티망의 낙타와 저항하는 사자 스피노자는 분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좀 더 명료하게 말한다면,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라는 것이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y)의『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라. 그리고 그 돈의 도움으로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죄와 벌』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분노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냐라는 창녀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분노는 타당한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한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 구조를 보고 그것을 향한 비판적 실천으로 나가지 못한 시대적 한계도 포함한다.니체(F. W. Nietzsche)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사전적 의미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분노,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 약자가 강자를 ‘진정한 선이나 삶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라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인류는 원래 도덕적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행위의 기준은 고귀와 비천이라는 미적 가치관뿐이었다. 강자에 대한 반감이 이러한 가치관을 전도시켜 이른바 도덕적 선악의 관념이 생긴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심리가 바로 르상티망”이라고 한다. 기독교 도덕관의 핵심은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약자의 르상티망을 엿볼 수 있다. 풍요의 신(이집트 태양신 라와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과 바벨론의 신 마르둑까지)으로 상징되는 고대 근동의 강대국들의 신과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과 같이 맞설 수 없는 강자에게 학대당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한 채 르상티망에 빠져 있는 것이 기독교 도덕관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는 약자들에게 강자를 악인으로 간주하고 강자를 정의를 모르는 자라고 불쌍히 여김으로써 정신적 우위에 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이 예수가 약자에게 베푼 도덕관의 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기독교)의 도덕관은 르상티망을 바꿔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근원적인 원한과 분노에서 도망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극복은 무엇인가?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달 과정을 ‘의무와 복종을 상징하는 낙타의 단계’, ‘부정과 자유의 정신을 뜻하는 사자의 단계’, ‘망각과 창조를 의미하는 어린아이’의 3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낙타의 정신은 금욕과 복종이다. 낙타는 전통과 명령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져야만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낙타처럼 노예의 근성을 쫓아 무거운 짐을 지고 들어가는 길은 사막이다. 영성의 길이 아닌 노예의 길이 사막인 것이다. 낙타처럼 살면 삶이 사막화된다. 겁이 많은 낙타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한다. 이렇게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살면 스스로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어서 그 정신이 르상티망이 되는 것이다. 무서움 때문에 무릎을 꿇고는 살지만 그 속에는 원한의 감정이 쌓여 간다. 이 르상티망이 자신에게는 죄의식으로, 타인을 향해서는 공격적인 분노로 나타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덮어씌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 방어를 삼는다.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타의 정신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니체의 사자의 정신 단계에 이르면, 정신은 용감하고 자유로워진다. 인습을 비판하고 불의에 저항한다. 니체는 “황량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사자는 전통의 질서에 저항하며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옛 주인 되는 용과 대결한다. 사자는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또한 무엇을 획득하려고 무릎을 꿇는 법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자가 아무리 자유를 쟁취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부정의 정신이 긍정의 정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분노에서 죄의식으로 넘어갔다면, 니체의 사자의 단계는 자본주의에 저항한 맑스(K. Marx)의 모습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3. 자긍심의 아이 스피노자는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에 관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한다. 즉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확인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낙타 같은 사람들만 많으면 비겁한 세상, 혹은 정신병동이 된다. 그래서 사자의 정신 단계로 변화되어야 하지만 사자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자유와 창의적인 존재들은 있지만 조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아이의 정신 단계가 되면 인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저항하고 투쟁에 주력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자는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아이는 자기와 세계를 긍정한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는 순수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거룩한 긍정이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그대로 본다, 아이는 르상티망을 망각한다. 아이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발명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좇아서 자발적으로 놀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고,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니체가 바라본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 더 이상 서로 잡아 먹기 위해 싸우는 세상이 아닌, 비굴한 울혈사회가 아닌 기쁨의 세상, 기쁨의 윤리학, 나아가 기쁨의 신앙은 도대체 가능할까? 앞서 언급한 박노자는 자신이 꿈꾸는 대한민국을 이렇게 제시한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좌익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공산당의 기관지까지도 국고 보조금을 받아 발간하는 다양성의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에서 발까지가 엄청 먼 여행이 될지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는 것이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라는 말에 (최근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메르스, 개성공단 폐쇄, 노후원전 재가동과 신규원전 건설, 생화학 세균무기 쥬피터 프로젝트 실시, 사드 설치 참사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헤게모니 이론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I’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igence, but an optimist because of will).”고 했다. 합리성이 아닌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그람시는 “소수의 혁명 보다는 다수의 조금의 혁명이 더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람시의 다음의 말에서 우리는 낙관을 발견한다.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은 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7-21
  • [기독교교양읽기 16] 진정한 화해는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하다
    “기억하라! 진실하게 기억하라!” 저자는 1984년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당했던 심문의 기억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정보장교 G대위의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인과 결혼하고 서구사회에서 공부했으니 스파이가 틀림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빨리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자, 갑자기 심문을 멈추었다.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심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대한 이후에도 그때 받은 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G대위는 저자의 마음속에 편안히 자리 잡고서 거듭거듭 그를 심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 그를 한구석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G대위가 비록 가해자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화해해야 그 악연이 해결됨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기억하라!”고 말한다. 기억하더라도 진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가 내게 행한 악행을 피해자가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에는 이미 그 악행에 대한 정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정죄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의 한 요소이다.저자는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려면, 기억 자체가 구속(救贖)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억의 종말》 || 저자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예일 신앙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배제와 포용》 《베풂과 용서》 등이 있다. 원제 The End of Memory. 홍종락 역. IVP, 2016. 16,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OECD 국가 중에서 5위였다. 우리보다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는 터키를 비롯해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였다. 2010년에는 2위였다. #먼저 정죄해야 ‘진정한 화해’ 가능해김길구 :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는 다소 묵직합니다. 피해에 대한 기억과 용서, 그리고 화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위안부 문제, 옥시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지난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 생존자/피해자(victims) 지원의 날’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지켜온 이 날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코피 아난 UN사무총장)입니다. 나쁜 권력에 고난을 당한 기억은 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립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날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가 겪었던 ‘심문의 기억’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기억났습니다. 저자가 심문을 당했던 해가 1984년이었고, ‘빅 부라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거짓 기억이 동원되었고, 날조한 역사를 새로 써넣기도 했다고 합니다.김길구 : 당시 유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결국 1991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내전을 겪었고, 인종청소라는 추악한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듯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던 분쟁지역에서 평화신학을 공부했고, 화해를 주장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 시대적 갈등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에 일조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 문제를 뛰어난 통찰력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회가 이념을 떠나 서로를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는 무조건적인 화해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즉, 정죄할 것은 정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김길구 :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문제는 물론이고, 세월호 사고와 최근 부각된 옥시 사건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도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가 갈등의 당사자가 아닌 화해자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 화해는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정죄가 포함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함에 힘입어 용서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출처: zesukchon.com] #‘값싼 은혜’로 진실 봉합해서는 안돼김수성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하게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동안 심리학적으로 많이 연구된 기억과 관련된 문제점을 적시합니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으로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하는 것에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김현호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기관에서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하고, 불리한 것은 덮어두려고 하는 것이죠. 세월호의 경우, 사고가 발생한 원인이나 구조상의 문제점 등은 덮어두고 보상금만 내세우며 이제 그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빨리 잊기를 원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저자의 말처럼 악행의 기억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무관심을 낳을 수도,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여기에 더하여 ‘정의롭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로 기억을 왜곡하려 해서는 상처가 곪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거진 옥시 문제도 비슷합니다. 배상금만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엿보입니다.김현호 : 교회에서 죄에 대한 회개는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부 교회에서는 ‘은혜롭게’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사회적 갈등이 빨리 봉합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봉합은 그냥 숨기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언급되었던 ‘값싼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성 :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이고, 서로가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물쭈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죄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이는 치유도 화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김길구 : 여기서 우리가 ‘사과의 기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구체적으로 보상하는 단계를 거칠 때라야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 없이는 사회적 갈등 해소 못해김현호 : 저자는 진정성에 더하여 십자가의 죄사함을 내세우며 모두가 화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발적 용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하심에 힘입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용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 이 책에서는 기억과 용서, 망각 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십자가 보혈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위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가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우리 사회에는 앞으로도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많습니다. 세대 갈등을 비롯하여 양극화에 따른 소득 갈등, 다문화가족의 급증으로 인한 갈등 등. 그만큼 교회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정부 등에서 기왕에 벌어진 갈등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 상처를 감싸주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수성 :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폐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이다. 때로는 폐허가 된 성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성한 공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지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길구 : 진실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잘못된 기억은 오히려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우리 사회에도 화해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을 구속(救贖)해야만 합니다.다음에는 최병성 목사의 포토 에세이 《길 위의 십자가》(이상북스,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화해의 제자도》 / 에마뉘엘 카통골레 / IVP《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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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7-06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6)
    1. 동물 실험: ‘원숭이에게 미사일 쏘기’ “왜 사람들은 건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진보’라고 치부하는가?” (간디)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어간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한바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고, OECD 국가 중 유기견 수출 1위(고아 수출 1위일 뿐만 아니라!)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동물들이 살기에 대한민국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물은 법적으로 철저히 ‘물건’이다. 물건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의 ‘물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동물은 소유와 점유의 객체가 되고, 그 권리자인 인간에게 처분권이 있다. 동물은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처분되고 심지어는 필요가 없으면 폐기된다. 2010년 11월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뒤 매몰 살 처분된 가축 수가 무려 350여만마리에 달했다(부산 시민 인구가 이 정도도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 부동액, 브레이크액, 표백제, 탈모제, 눈 메이크업, 잉크, 선탠오일, 손톱 광택제, 마스카라, 헤어스프레이, 페인트, 지퍼 윤활유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많은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은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하여 실험실에서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시카고 대학의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는 실험’, 오레곤 대학의 ‘갓 태어난 생쥐의 앞다리를 잘라 그럼에도 자기 몸을 단장하는지 관찰하기’, 하버드 대학의 ‘사냥개에 플루토늄 주사하기’, 옥스퍼드 대학의 ‘10일 된 새끼 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 상실의 영향에 대해 관찰하기’,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쥐의 두뇌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주사하기’, 미 국방부의 ‘원숭이에게 신경가스, 청산가리, 방사능, 총알 혹은 미사일 쏘기’, 미 농무부의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 태아의 목을 자르고 그것이 임신한 암퇘지의 인체 화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기’, GM의 ‘자동차 충동실험에 돼지나 원숭이 이용하기’ 등은 분명 ‘인류 문명의 진보’와 ‘동물의 고통’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곧, 인류의 진보는 동물 학대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2. 동물해방과 동물신학 탐구: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 종차별도 극복가능한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라고 말하는 호주 출신의 도덕철학자이자, 동물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 Singer)는『동물해방』(인간사랑, 2006)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 분야의 바이블인 이 책은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동물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물이 단지 인간의 종(species)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반대함으로 종간의 원칙적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서구 역사에서 종차별주의의 발생사적 근원을 찾으면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문명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은 콜로세움 등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사람들의 호기심 거리와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학살했다. 이러한 경기는 시민들에게 먹을 양식을 배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행사였다고 하니 가히 로마의 동물학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동물과 함께 학대당했던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인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인간과 다른 종간의 차별을 공고히 한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싱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었으며, 그리하여 로마인의 제한된 도덕적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하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에 대한 처우와 관련시켜 생각해볼 때, 그러한 교의는 구약성서에서의 인간 아닌 동물들의 낮은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저하시켰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다른 종을 지배해야 한다고 쓰여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는 다른 종들의 고통에 대한 희미한 관심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동물에 대한 가혹 행위에 반대하는 어떠한 명령도 찾아볼 수 없으며,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권고 또한 찾아 볼 수가 없다.” 종차별은 사실상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과 ‘성차별(sex discrimination)’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종차별이 도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잠재하고 있는 지적 능력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가령 유색인종은 백인에 비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오해처럼 종차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다른 종(동물)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 그들보다 지적 능력이 탁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에 비해 하등동물이니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동물 학대의 이유는 첫째,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전제이며, 둘째는 ‘동물은 도덕적 권리의 합법적 주체가 아니라’는 전제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전제에서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차이는 ‘특별한 도덕적 배려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차별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도 그러하듯,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 능력 운운하며 그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인정하면 무뇌아로 태어난 아기(혹은 치매 노인들)는 침팬지보다 그 지능이 못하니 그 생명권을 연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설령 좀 더 나은 지적 능력을 소유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나은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인간에게 인간 아닌 존재를 착취할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도덕 지평 확대의 역사이다. 여성과 흑인,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혹은 소수 종교인들과 동성애자로 그 도덕적 배려와 책임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성과 인종을 넘어 종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동물권 신학의 핵심인 ‘관대함의 윤리(ethics of generosity)’를 부르짖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자, 기독교 채식주의자인 앤드류 린지(A. Linzey)는『동물신학의 탐구』(대장간, 2014)에서 싱어가 말하는 연약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는 ‘평등한’ 고려가 아니라, ‘더 큰’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싱어의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며 동물의 권리 신학인 동물신학을 전개하고 있는데, 동물과 같은 약자에게 ‘도덕적 우선순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린지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에서 내가 견지하는 이론적 입장은 약자와 상처 입기 쉬운 자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3. 예수와 동물들: “노새를 때리지 마라. 자비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사상은 동물 복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1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초기 기독교 외경 문학은 종종 예수와 동물과의 관계에 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콥트교회의 문서조각은 ‘노새를 치유하신 예수’의 모습을 들려준다. “그 일은 주님이 도시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산을 넘어 가실 때에 일어났다. 그들은 산에 당도했고, 올라가는 길은 경사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짐을 실은 노새와 함께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쓰러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노새를 때렸고, 노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남자여, 왜 당신은 당신의 동물을 때리는가? 당신은 이 동물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자 이 남자는 대답하여 말했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놈을 때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놈은 나의 재산으로,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나를 알고 이 사실에 대해 알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몇몇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가 노새를 어떻게 샀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노새가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 신음하며 울부짖는지 듣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아닙니다. 주님, 그놈은 신음하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슬퍼하며 외치셨다. ‘노새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께 하소연하며 자비를 구하며 우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러나 이 노새가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게 만든 자에게는 세 배나 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동물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셨다. 그러자 노새는 일어났고 상처는 치유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남자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는 노새를 때리지 마라. 그러면 너도 자비를 얻을 것이다.’” (곱트교회 문서조각) 마태복은 5장 7절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긍휼의 대상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물들을 소개한 ‘유사 마태복음서’도 있다. 인용해보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삼 일째 되던 날, 마리아가 동굴에서 나와서 마구간으로 들어가 그 아이를 구유에 눕히자 황소와 당나귀가 그에게 경배했다. 그럼으로써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황소는 그의 주인을 알고 당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리하여 그 동물들, 황소와 당나귀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그분께 끊임없이 경배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예언자 하박국이 말 한 것이 성취되었다. ‘두 동물 사이에서 당신은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셉은 삼 일 간 마리아와 함께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 (유사 마태복음) 아기 예수의 가족이 사막으로 들어갈 때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다른 동물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구절도 있다. 계속해서 유사 마태복음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처음에 마리아가 그들을 둘러싸는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여러 야생 짐승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그녀의 얼굴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들은 어머니를 해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저를 서둘러 섬기려고 오는 겁니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냈다. 사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속 걸었고, 그들의 짐을 옮기는 짐승들과 황소들, 당나귀들과도 함께 걸었다. 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자들은 이 중 단 하나도 해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들이 유대로부터 함께 있다가 데려온 양들 사이에서 온순했다. 양들은 늑대들 사이를 걸었으며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동물에 의해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라는 예언자의 말이 성취되었다.” (유사 마태복음) 4.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세상: ‘사자가 소 여물을 먹는 하나님 나라’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뽐내지 마십시오.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가지고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통과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그러나 역지감지(易地感之)도 필요하다. 사지는 머리로 하지만, 감지는 가슴으로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단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사자가 소가 먹는 풀을 뜯어 먹는 것’,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지식지(易地食之)’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돼야 정말 조화로운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이러한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생명 존중의 사상을 실천했다. 까치를 위해 감을 다 따지 않은 ‘까치밥’, 음식을 먹기 전제 조금 떼어내 뭇 생명과 더불어 먹고자한 ‘고시래’,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새가 먹고 다른 한 알은 땅 속 벌레가 먹게 한 농부의 배려, 길을 나설 때 미리 지팡이로 땅을 쿵쿵 굴려 벌레들이 도망하게 한 나그네의 세심한 배려, 하루 수십 리씩 걸어야 하는 소들을 위해 소장수들이 소에게 신겨준 ‘쇠짚신’, 작은 생물이라도 해할까봐 뜨거운 물도 식혀 버렸던 어머니들의 살뜰한 살림살이, 소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은어를 사용하며 한순간에 소의 명줄을 끊고자 노력했던 백정들의 우직한 배려, 한 집안에서 더불어 먹고 사는 존재들을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생구(生口)라고 불렀던 포용적인 마음,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실천했던 채식위주의 삶 등. 생각해보라.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들을 찾으러 떠났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것처럼(사무엘상 9장 참조), 동물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혹시 알겠는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6-16
  • [신간] 둥근 별
    안유환 목사가 쓴 소설 <둥근 별> 신이건 장로(한국기독신문 사장) 왜 <둥근별>이라 이름 지었을까? 인간의 생사화복,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먹을 불끈 쥐면 둥근 주먹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부모, 형제들과 첫 만남으로 시작해서 돌아가는 귀착점도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끝맺음하기 때문일까? 둥근 원으로 반짝거리는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이름 모를 별을 보며 붙인 것일까? 아쉬움이 남는 이 땅의 만남을 통해서 누구나 갖고 있는 향수, 마음의 고향을 두고 이름 지었을까? 매우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안유환 목사와는 그가 젊은 집사였던, 지방지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교계기자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담임목사와 교인간의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며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교회를 개척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 둥지를 틀었다. 그때부터 그는 교계 영적 지도자는 어떻게 가야하고, 어떤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하는지에 고민했고, 고민 끝에 잘 다니던 일간신문 기자직을 내려놓고 광나루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3년간 수학한 끝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산의 변두리에 위치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그는 시를 썼고, 중년 목회시절에는 수필을 썼다. 조기은퇴를 한 이후 삶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게 됐다. 이번에 그가 출판한 둥근별을 읽으면서 ‘그랬구나. 출발지와 종착지가 같은, 결국 하나의 둥근 원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그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또 은퇴 후의 삶을 소재로 삼고 그리운 현대인의 향수를 수북이 쌓아 묻어두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번 소설 <둥근별>의 핵심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잘 나갈 때 직장을 그만뒀고, 목회에 성공할 때 조기은퇴를 했다. 텃밭을 가꾸고 귀향해 노을이 물드는 초저녁 오늘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듯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천국의 만남을 향해 준비하는 여정에서 이런 소설집을 냈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삶의 여유를 가진 안 목사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삶의 여유와 함께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 문화
    • 도서
    2016-06-03
  • [기독교교양읽기 ⑮] 교회가 ‘후반기 삶’의 안내자 역할 해야
    “천직은 하나의 명작이 아니라, 인생 전체라는 걸작이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직업 선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고민이 하나 다가온다. ‘과연 내 직업이 천직인가’라는 고민이다. 우선 먹고살기 위해 하나의 직업을 택해 대충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뜬금없는 고민이다.일자리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직을 찾기 위한 여정을 결코 마다하지 말라는 저자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천직이란 단시간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걸고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스런 연습기간을 견뎌내야만 하고, 전혀 엉뚱한 일을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아야 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그동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나타났다가 스러졌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저자는 성공이란 평생에 걸쳐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관계없는 일처럼 보이던 것이 의외로 나중에 도움이 되고, 그러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찾고, 비록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하나의 족적을 남기는 것이 바로 천직의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타 자기계발서가 살아가면서 무엇 하나라도 뚜렷이 이루어야 성공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일의 기술》 || 저자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는 강연가이자 저자이며, 파워 블로거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웹사이트를 방문한 사람이 전세계에서 400만 명이 넘을 정도다. 저서로는 《난파》 등이 있다. CUP, 2016.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젊은이들은 물론 노후를 대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취업할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천직’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치가 아닐까 하는 고민을 안고 좌담을 시작했음을 먼저 밝힌다. #천직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김길구 : 세대를 막론하고 취업과 관련된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입니다. 한때는 아이들이 어른을 가르치는 세태라고 해서 관심을 끌었던 신인류[돈 탭스콧, 《N세대의 무서운 아이들》(1998)]가, 이제는 일자리를 두고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직업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져가는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이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카피를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일의 기술이라 쓰고 삶의 기술이라 읽는다.’ 단순한 자기계발서라고 하기에는 영성적 사명으로서의 일에 대해 강조하고, 영성적으로 땀의 평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수성 : 천직이란 단숨에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여정으로 찾아가야 하는 것이라면서 결론을 맺는데 대해 공감했습니다.김길구 : 얼마 전 잡코리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47퍼센트 정도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20대도 34퍼센트, 40대는 65퍼센트가 두 번째 직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만큼 현재 직업이 불안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김수성 :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책을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러한 실패 가운데서 천직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을 깊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부딪쳐보는 것이 중요합니다.김현호 : 소명을 정의하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구했으나, 자신이 계획한대로가 아니라 오히려 틀어졌을 때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자기 정체성을 지켜가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확장해가는 것에서 천직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그동안 우리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의존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하고, 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가슴 뛰는 일을 찾아내고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죠.김수성 : 그래서 저자는 ‘미완의 작품’을 남길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천직을 찾아 헤매고 결국에는 미완이겠지만, 그 과정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포트폴리오’로 인생의 지평 넓혀야김현호 : 소명이 딱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라는 ‘포트폴리오 인생’에 대한 언급도 의미 있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직업을 통해 자기 인생의 지평을 넓혀가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상당히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직장생활 외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김길구 : 몇 년 전 미국 LA에 갔을 때 일입니다. 공식 초청방문이었는데도, 주말에는 나를 초청한 분의 얼굴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알고 보니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는데 주말이면 무대에 서기 위해 연극에만 집중한다고 하더군요. 또 하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입니다.김현호 : 요즘 우리 아이도 비슷한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일을 마친 직장인들이 한데 모여 보컬 연습을 한대요. 그러다가 봉사를 가기도 하고, 초대를 받아 공연을 하면서 자기의 ‘끼’를 발휘한다는 거죠.김수성 : 문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것이죠. 살아가기에 급급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유가 ‘사치’로 여겨질 것입니다. ‘투잡’을 하지만 소명이나 천직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흔히 ‘천직’이라 일컫는 학교 교사들도 유럽의 경우 평균 재직기간이 5년 정도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는 ‘투잡’도 흔하다고 합니다. 다중 직업이 일반화되는 추세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도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런 변화 추세에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는 것입니다.김현호 : 젊은이들의 경우 그런 상황을 ‘회전축’의 지혜로 활용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현실의 어려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약간 빗겨나서 다른 길을 모색하면 자기의 소명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천직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한 직업이 나중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 농구에서 크로스오버는 한쪽 발을 ‘회전축’으로 이용, 순간적으로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상대 수비를 뚫는 기술을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뜻밖의 사태와 실패를 만났을 때, 이를 회전축으로 삼아 미래로 나아가라고 충고한다. [사진 출처: 유튜브 사진 캡처] #유료 자원봉사로 지역사회 활성화해야김길구 :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주차관리요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한다는 공고가 나가자 지원자 중에는 시중은행 지점장과 증권사 간부, 중견 건설업체 임원, 공무원 출신도 있었답니다.[국제신문, 2016. 5. 16]김수성 : 우리가 직시하고 있듯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 경비 등 계약직 업무가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유료 자원봉사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보수를 보장함으로써 양질의 인력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이들의 업무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김현호 : 우리 교회가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지역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유료 자원봉사 등을 통해 지역의 인력이 진행한다면 그 효과는 상당할 것입니다. 지원처와 필요처를 연결시키는, 그 다리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이죠.김길구 : 여태까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지만 투자에 비해 효과는 미미합니다. 선진 외국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가 지역사회와 손잡고 이런 일에 적극 나선다면 바람직한 시스템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부는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 인공지능 시대에,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을 서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런 역할을 감당하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김현호 : 천직은 헌신과 함께, 즐거움 또는 만족도가 높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도 있습니다. 올바른 직업관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김길구 : 무기력, 무관심, 무의미. 소위 ‘3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결국 인간소외 현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갈수록 자동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 중 하나가 인간소외 해소에 있다면, 여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다음에는 평화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가 쓴 《기억의 종말》(IV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노동, 직업 그리고 하나님 나라》 / 정병길 / 성약출판사《일의 신학》 / 폴 스티븐스 / CUP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6-06-0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⑮ : 말(씀)
    ▲ 다양한 예수상 1. 말(言)의 복수 우화 ‘양치는 소년’의 이야기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온다는 거짓말을 즐기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나서 그 밥이 되고 말았다는 비극적인 소년의 이야기인데, 흔히 ‘거짓말하면 벌 받는다’라는 도덕교훈을 위해 단골로 인용되는 우화이다. 인문학자인 이왕주 교수에 따르면 이 우화는 훨씬 더 심오한 언어철학의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 소년은 거짓말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말의 박해 때문에 복수를 당한 것이다. 소년의 입술에서 학대당한 ‘늑대가 온다’는 말이 복수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다. 첫째는 말이 현실을 만들어내며 둘째는 그 현실 안에서 말이 스스로 무력해져버리는 것이다. 늑대가 나타난 것은 첫째의 증거고, 사람들이 소년의 외침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던 것은 둘째의 증거다.” 문제는 이 비극이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물론이고 인간이 살았던 모든 세상에서 조금씩은 다 이 양치는 소년의 운명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秦)나라 시황제를 섬기던 환관 조고(趙高)는 시황제가 죽자 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리고 어리석은 호해(胡亥)를 내세워 황제로 옹립했다. 이후 조고는 호해를 온갖 환락 속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한 다음 교묘한 술책으로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원로 중신들을 제거하고 자기가 승상이 되어 조정을 완전히 한 손에 틀어쥐었다. 어느 날 조고는 입을 다물고 있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를 가리기 위해 술책을 썼는데, 사슴 한 마리를 어전에 끌어다 놓고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指鹿爲馬)’ 무슨 소리요?” 조고는 완강하게 말한다. “아닙니다.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호해는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니, 제공들 보기에는 저게 뭐 같소? 말이오, 아니면 사슴이오?” 그러자 대부분 조고가 두려워 “말입니다.”라고 대답했지만, 그나마 의지가 남아 있는 사람은 “사슴입니다.”라고 바로 대답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대답한 사람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가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러고 나니 누구도 감히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조고와 같은 환관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나중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유방의 군대가 서울인 함양으로 밀고 올라오는 가운데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3대 황제로 옹립했으나, 똑똑한 자영은 등극하자마자 조고를 주살해버렸다. ‘양치는 소년’과 같이 거짓된 현실을 창조한 거짓말은 지속되지 못하고 징벌의 칼날로 변하여 자신을 발화한 인간을 엄벌한 것이다.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말에 의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이성과 공감과 배려의 감성이 상실되고, 난폭한 감정과 편견의 말들이 휘몰아쳤던 세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에는 말이 있었다. 2. ‘발화된 말’과 ‘수육된 말(씀)’의 자기희생 역사적 기독교는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 교훈과 행동 등 예수의 전 운명 때문에 생겨났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교회의 선포, 선교, 신앙 진리의 내용이고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대상으로서 예수는 복잡한 인간 이해의 범주(해석학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론인데, 다음과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예수가 기독교의 신앙과 실천의 궁극적 척도인가? 그는 쿠바의 게릴라 대장 체게바라인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빛나는 전태일인가, 억압받는 민중의 해방을 위한 투쟁가인가? 그렇다면 위대한 민중 항쟁사의 가장 큰 분수령을 이룬 전봉준은 예수인가. 민중신학자의 주장처럼 민중이 예수인가. 혹은 감상적 경건주의자와 낭만적 신비주의자가 그리는 것처럼 역사적인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예수인가. 그는 영적이고 내적인 세계에만 관여하는 골방 주인인가.” 따라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말은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기독론이라는 제목 아래, 신학에서 다양하게 논의되어온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따르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던진 예수의 말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들려온다. 그림 <다양한 예수상>처럼 다양한 기독론과 예수상이 전통적으로 해석되어온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는 믿고 고백하며 증거 하는가?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그의 삶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과 그 답은 기독교의 존폐가 걸린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신학은 이 질문에 대해 거듭 새롭게 대답을 해야 하며, 그 대답을 통해 창조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가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교회는 제 기능을 상실하고 도태될 것이다. 에밀 부룬너(E. Brunner)에 의하면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성육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칼 바르트(K. Barth)의 기독론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그에게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복음에 기초한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있던 말씀(logos), 곧 이성과 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성과 법칙이 우리 가운데에 임하셨다고 한다. 죄 없고 흠 없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말의 씀’은 ‘말씀’으로 우리말에서는 공경어가 되기도 하지만, 해석학적인 작업을 거치면 이제까지 발화된 말을 귀로 듣고 실천했던 종교가 ‘말을 씀’으로 쓰여진 문서(말씀)를 해석하는 해석학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저 찬란한 메시지로 인하여 우리는 신학적 상상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해석학의 바다를 향하여 노를 저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향해의 목적은 쓰여진 말들의 파편을 찾는 것이다. 이제껏 진리를 찾아 헤맨 인류 역사를 김성곤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the Word)은 곧 발화(utterance)의 힘으로 천지창조를 가능케 했던 완벽한 언어/로고스이자, 절대적인 진리/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 말씀과 직접 교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말씀 곧, 진리는 베일에 가려졌고, 신은 인간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후 인간은 그 사라져버린 진리를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으며 그 결과로 스스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또는 자신이 신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들은 권력을 쥐고 스스로의 신념을 절대적 진리로 선포했으며, 거기에 반대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과 적 그리스도라는 죄명으로 억압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의 종말(apocalypse)과 파멸(annihilation)을 재촉하는 진정한 적 그리스도(anti-Christ)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파멸과 연관되는 이 모든 것은 A자로 시작된다. 사실 A자는 알파벳, 곧 모든 문자의 시작이자 동시에 모든 것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파멸은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두 계층 간의 싸움과 갈등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화된 말’이 인류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말의 씀’으로 수육(육신을 입음)되었을 때, 그 말씀의 해석(기독론)은 다양해 졌으나, 다시금 말의 씀을 단 하나의 발화된 말로 왜곡하려는 적그리스도들 때문에 차이를 존중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교리, 배타적인 신앙이, 자기 부정이란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를 이상한 종교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사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탓에 평생 모욕과 수난이 그칠 새 없었던 갈릴레이(G. Galilei)는 말년에 이르러 미쳐 돌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옳았고, 당대의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은 잘못했다. ▲ 배타성의 희생자 갈릴레오, 세르베투스, 베잘리우스 진지한 성서주의와 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친 세르베투스(M. Servetus)는 법학과 의학을 전공하며 당시 과학 저서들을 번역하고 편집한 과학자였으며 개인적으로 신학을 연구한 신학자였다. 혈액 순환설을 제창했으며 ‘유대인의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른다’는 성서의 기록을 무시한 채 당시의 지리학설을 쫓은 죄로 종교 개혁자 칼뱅에 의해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담은『삼위일체론의 오류에 대하여』(1531)를 출판하여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의 자기표현 방식인 반면, 성령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활동 또는 능력이라고 주장하며 성자는 인간 예수와 영원한 ‘말씀’의 결합이라고 말했으나,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은 그의 복잡한 책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그리스도교 회복」(1546)이라는 글에서 세르베투스는 성부와 그의 아들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조 때문에 모욕을 당했으며, 교회가 타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구속되었고 1553년 칼뱅에 의해 이단혐의로 재판 받아 화형 당했다(당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이단으로 고소하기는 하였으나 화형은 반대했다). 세르베투스를 처형한 사건은 개신교도들 사이에 이단자에게 사형을 부과하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시대적 한계로 인한 장 칼뱅의 배타성’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1903년 세르베투스가 죽은 그 장소에 장로교 교인들은 기념비를 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는 칼뱅의 후예로써 감사한다. 우리는 시대의 오류에 대해서 회개한다.” 남녀의 갈비뼈 수가 같다는 상서롭지 못한 사실을 밝힌 근세 해부학의 대부 베잘리우스(A. Vesalius)는 교리 수호에 부심했던 교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구태여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어육(魚肉)으로 변했던 여자와 흑인과 유대인의 박해사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차이와 주변을 보는 시선은 이처럼 한때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백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고생시킬망정 한 명의 이단자를 놓치지 말라’는 중세 이단 심문소의 원칙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새롭고 낯선 것이란 그저 박해의 대상일 뿐이었다. 차이와 주변을 수용하는 성숙한 시대정신은 ‘발화된 말’이 ‘수육된 말씀’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지평에서 수육된 말씀을 발화된 말로 교리화, 획일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차이나는 수육된 말씀들을 배움의 조건으로 삼을 때 성숙한 깨침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수육된 말씀은 자기희생의 상징인 ‘유월절 어린양’이다. 사실 차이와 주변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지식인들에게는, 배타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지금의 지식인들에게도 ‘앎의 새로운 지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종교인들에게는 ‘성숙과 깨침’을 위한 화두가 된다. 곧, 자신의 동질성을 타자에게 강조하지 않고 타자와 자아와의 차이를 박해가 아닌 배움의 조건으로, 나아가 자기희생의 태도로 접근하는 겸손이야말로 한국 개신교가 나갈 성숙의 징표가 될 것이다. 3.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그 다스림 서양 최고의 고전인 호메로스의『일리아스』첫 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아킬레우스는 그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집에서 칼을 뺀다. 그때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금발을 등 뒤에서 잡아당긴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는 노여움을 삼킨다. 이성과 지혜가 분노의 불길을 제압한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인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이러한 지혜로운 행동 때문에 역으로 ‘분노의 다스림’에 관한 시가 된다. 태초에 있었던 발화된 말, 곧 이성과 질서가 우리 가운데 죄 없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임했다는 것은 ‘양의 희생과 이성의 제 역할’이 4?13 총선 이후 이 땅을 바로 세울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올바른 이성으로 지록위록(指鹿爲鹿)을 발화해야 할 것이며, 분노의 불길은 지혜의 손길로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본은 바로 발화된 말이 말의 씀으로 어린양 예수가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인 십자가 정신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인문학자의 다음의 외침은 참다운 말씀의 종교인 기독교인들의 외침도 되는 것이다. “누가 말에서 뜻을, 이름에서 실질을 박탈했는가. 누가 언어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들었는가. 바로 양치기 소년과 같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기억해두자. 우리가 해방되기 위해 진정 필요한 존재는 거짓말하는 똑똑한 지도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라는 것을.”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5-20
  • [기독교교양읽기 ⑭]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 전개해야
    대중음악 속에서 찾은 기독교 영성 이야기 대중음악과 기독교. 쉽게 조합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중음악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22곡의 음악을 펼쳐 보이며 “자, 이래도 내 말이 틀렸느냐?”고 반문한다. 영미 팝송이 14곡, 한국 가요가 8곡이다. 1960년대 음악에서부터 2009년 음악까지 다양하다. 머리말에서는 역사적인 증거까지 들이댄다.‘설마’하며 대충 읽었다. 설핏 지나치다가 ‘이런 신앙고백이 숨어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꼼꼼히 읽었다. 인터넷을 뒤져 음악을 들었다. 이들 음악이 내 마음속으로 성큼 새롭게 다가온다. 반전이다. 이 책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글을 쓰다말고 몇 시간째 음악만 들었다. 한 곡 한 곡 듣다보니 도저히 중간에 그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버전으로 듣기도 하고, 처음에 부른 것과 그 후의 것을 비교하며 들었다. 2003년에 U2의 보노(Bono)가 솔로로 부른 ‘원(One)’에 이어, 파바로티(Pavarotti)와 함께 부른 ‘아베마리아’를 듣고서야 겨우 음악을 껐다. 얼얼하다. 이 감동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글을 써야 하는데, 나의 필력은 미진하기 짝이 없다. 아쉬움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음악을 들으며 풀기 바란다.◈ 《윤영훈의 명곡묵상》 || 저자인 윤영훈은 미국 얼라이언스 신학교와 드루 대학교에서 종교와 대중문화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빅퍼즐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시대의 창의적 그리스도인》 《현대인과 기독교》 《복음주의와 대중문화》 등이 있다. 이 책은 월간 잡지 〈워십리더〉에 2년여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다. IVP, 2016.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김현호 대표는 이 책을 읽는데 김기석 목사의 《흔들리며 걷는 길》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했다. 이 책의 부제가 ‘길 위에서 자유롭게’이다. 대중가요와 기독교를 접합하여 기독교인에게 소개하는 길이 어쩌면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기도김길구 : “고등학생 때 신해철은 우리에게 우상이었어요.” 신해철 씨가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 아들이 한 말입니다. 문득 내가 아들 세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이끌어온 가수임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아들과의 세대차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습니다.김현호 : 인터넷에서 이들 음악을 찾아 들어가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멀리했던 어릴 때의 감성이 물씬 살아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소개된 음악은 대부분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작품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CCM이 무언가 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담아내는 모든 장르의 기독교 음악’이라고 해놓았더군요.김길구 : 사실 대중음악과 교회음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포크송을 퍼뜨린 ‘세시봉’ 멤버들은 거의 다 교회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었죠. 교회 문화가 일반 대중문화로 확산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김현호 : 이들뿐만 아니라, 대중가수들의 출신을 보면 어릴 때 교회생활을 한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보컬 활동 등을 하다가 자기의 ‘끼’나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시는 교회가 대중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최근 청소년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청소년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교회 교육이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예술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교조적으로만 인식, 현상을 성과 속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김수성 : 교회가 대중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화를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디어의 대중화로 모든 것이 대중문화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교회문화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는 찬송을 파일로 변환시켜 스마트폰에 넣어 다니면서 어디서나 듣는 세상입니다. #수단을 선택할 때 목회적 판단도 중요김길구 : 이 책에 소개된 노래 가사를 보면 마치 옛 선지자들이 일갈하는듯한 느낌조차 듭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사랑으로 전쟁과 갈등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가 하면,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는 하나님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는 우리의 삶을 고백합니다.김현호 : 개인적으로 최근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많이 불렀는데, 라트비아의 민요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더군요. 한 러시아 가수가 이 민요를 ‘백만 송이 장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수봉 씨가 인생의 의미와 기독교 신앙을 담은 자신만의 고백을 가사에 녹여냄으로써 감동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김길구 : 역사적으로 봐도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랫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노랫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음악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가지는 생명력과 절대적인 사랑이 힘든 생활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등이 그런 작품 같습니다.김수성 : 장기하와 얼굴들이 노래한 ‘싸구려 커피’를 들으면서 오늘날 취업을 비롯해 막연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잖아’에서는 위정자들의 입에 발린 말에 절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고요. 암울한 시대에 노래하는 시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디다.김현호 : 최근 한류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걸그룹의 노래는 삶이 담보되지 않은 음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지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노래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삶의 무게와 그 가치가 깊숙이 담긴 노래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죠.김수성 :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랫말은 상당히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선정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힙합이나 랩에 빠져든 청소년도 많습니다. 교회가 청소년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김길구 : 그런 문제는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언급했던 기독교 세계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나 교육을 위한 다양한 수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업주의, 배금주의 등에 물든 문화를 걸러내는 비판적 안목도 필요하지만, 목회적 판단에서 허용할 수 없는 수단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버는 이를 ‘변혁의 문화’라고 합니다.김수성 :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아직도 교조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갈수록 교회에서 벗어나는 현실에서 대책은 무엇인가요? #인류애를 노래하는 분위기 조성해야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미국의 저명한 강연가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가 쓴 《일의 기술》(CU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그리스도와 문화》 / 리처드 니버 / IVP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6-05-0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⑭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3장 22-24절) “그때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주가 되어 우리가 만든 기계인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간들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베어 물고, 기계들의 에덴동산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 인간은 창조주에 그렇게 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병학, 『현대사상과 영화이야기』 중에서) 1. 알파고의 승리 ▲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게 알파고가 가져간 승리는, 이제 우리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인공지능)에 관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될지 해치는 이리가 될지?)임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인간vs기계>(동아시아, 2016)에서 한 말처럼 “알파고의 승리는 어쩌면 그동안 경쟁자 없이 지구를 지배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 McLuhan)의 의수 이론(義手 理論)은 세련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의 결정판이었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기술결정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로운 기술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자율적으로 변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 한다”라는 말은 매체가 인간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계를 사랑하라”는 세련된 기술결정론과 맥루언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명제는 기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남기란 이러한 기계의 파도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 타는 법을 익히고 즐기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미디어와 결합되느냐?”가 된 것이다. 2. 혼종의 길?탈육신(disembodiment)의 시대에 전통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계, 나아가 네트워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혼종(hybrid)을 통해 존재를 확장하며, 존재의 새로운 터전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종의 운명은 199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수술을 감행하여, 인류 최초로 사이보그가 된 케빈 워릭(K. Warwick)을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보그(cyborg)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맨프레드 클라인즈(M. E. Clynes)가 만든 용어로, 인간과 기계간의 통신을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아무튼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김영사, 2004)에서 워릭은 미래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이러한 사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 진보적으로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날짜: 2050년 1월 1일. 지능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 아니면 로봇이 인간에게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갔음은 분명히 입증되어왔다. 지구는 사이보그가 지배하고 있다. 사이보그는 새롭게 개발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장치의 슈퍼 지능을 가동한다.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어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강력한 팔다리와 같이 직접적인 신체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연계 방식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무선장치를 이용해 직접 중앙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지적 능력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중앙 네트워크는 정보를 얻거나 임무를 수행시키기 위해 개별 사이보그를 불러들인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가동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사이보그가 네트워크의 무선 접속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개개의 사이보그가 없는 네트워크 또한 상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된다.”영화 <로보캅>이나 <아이언맨> 등에서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기계와 결합되는 혼종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역으로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에서처럼, 정보가 신체성을 입어 인간 혹은 생물체가 되는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로봇 공학 전문가인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식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post-biological)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식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역시 화제작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한바 있다. ▲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3. 21세기 초인과 사이버 주체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 논쟁을 이끌고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니체(F. W. Nietzsche)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J?rgen Habermas)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나치즘(Nazism)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받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의 탄생, 혹은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활용해야하며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2004)은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자연의 과정인 선택적 탄생을 기술로 가속화하는 것이다. 영화 <가타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일례이다. 따라서 나치즘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하였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만도 없을 것이다.동시에 생물학적 주체(Bio-I)에서 사이버 주체(Cyber-I)로 전환되어 가는 존재의 확장은 이제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존재인 ‘디지털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가령, 피터 벤틀리(P. Bentley)는『디지털 생물학』(김영사, 2003)에서 미래 디지털 기술이 생명의 특성을 모방함으로 기존의 모든 차원을 뛰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령, 생물처럼 번식하고 다양하게 ‘개체변이’를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 것이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는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며, 실패할 경우에는 도태되게 함으로 소프트웨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미래에 디지털 공학과 생물학이, 컴퓨터와 생물체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디지털 형태의 의미소(meme)가 자체 복제를 넘어 진화하기 시작할 경우, 궁극적으로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거듭해온 진화의 형태와 흡사하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4. 영혼 불멸? 인간 멸망? “크리스(주인공 로빈 윌리엄스) : 이게 진짜 나요? 앨버트 교수 : 나란게 뭔데? 자네 신체? 크리스 : 어쩌면… 교수 : 그럼 신체가 없으면? 크리스 : 그래도 나죠. 교수 : 어째서? 크리스 :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교수 : 생각 역시 우리 몸의 일부인 뇌를 통해서 하는데? 크리스 : 하지만… 생각이란 무형의 것으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죠. 교수 : 바로 그거야. 존재에 대한 믿음. 그게 해답이야. 크리스 : 세상에… 진짜야. 교수 :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생각만 하면 돼. 생각이 현실이고, 몸이란 환상이야…. 아이러니컬하지 않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 나오는 위 인용 대사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기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 존재란 몸은 삭제되고 정신만 있는 관념적 존재가 된다(물론 영화에서 이곳은 천국이지만). 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고, 현실의 불안과 한계를 극복하여 사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 인간의 탐구 열정은 천국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대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그 발생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2년부터 본격화한 딥러닝(deep learning) 이후의 인공지능은 전혀 차원이 달라졌다. 방대한 데이터(=빅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축적된 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에 지능이 생긴 것이다. 김대식은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는데, 알파고나 무인 자동차(우리는 이 무인 자동차의 아담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맛보았다)를 같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라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터와 같은 독립성이 있고 자아가 있고 정신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며, “강한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류보다 지적, 물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강한 인공지능이 판단하기에 인간이란 종이 지구에 불필요하거나 해롭다면 인류의 멸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경고이자, 대안이다.“강한 인공지능이 어느 한 순간 인간을 놓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지구에 왜 있어야 되나? … 만약에 제가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하고 물어볼 거예요.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인간’이 더 좋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충분히 낼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 약한 인공지능은 100%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영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이 그 ‘추구’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의 신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제 우리가 만든 제2의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이름을 던지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확신하거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문화
    2016-04-21
  • [기독교교양읽기⑬]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아직도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 이 책은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사역한 저자가 안식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등을 순례하며 영성의 시간을 가진 기록이다. 단순히 40여 일의 유럽 여행기라 하기에는 지그시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철학서나 비평서라 하기에는 에세이 같이 큰 부담없이 읽히는 미묘함으로 다가온다.그는 1980년대 초 양성우 시인이 낭송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 나는 얼만큼 작으냐”라는 대목에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날 많이 아팠다고 고백한다. 아직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저자는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책을 읽는 내내 그의 예술적 안목과 문학적 감수성에 빠져들게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문학적 향기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순례길 곳곳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참으로 ‘괜찮은’ 책 한권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 《흔들리며 걷는 길》 ||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청파교회 담임목사이면서 문학평론가이다. 깊이가 있는 글쓰기로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층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은 책으로 《삶이 메시지다》 《오래된 새 길》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등이 있다. 포이에마, 2014.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이해한다.” 한때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 인용해 널리 알려졌던 말이다.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의 글에서 따온 말이다. 김기석 목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이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기독교의 뿌리에 대해서 관심 가져야김길구 정말 이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세의 예술 작품 감상에 이어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와 사상,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까지를 놓치지 않고 연결시켜 이야기합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통섭’을 보여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터 시작해서 함석헌의 ‘얼굴’까지 10여 편의 시를 곳곳에서 읊조리며 순례를 계속한 것입니다. 그 시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죠.김현호 저자와는 10년 가까이 알아왔는데, 그분의 서재에 꽂힌 책을 보면 마치 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책을 취급하지만 희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학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만났고, 그 이후 신학을 했다고 밝힐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김길구 저자는 로마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가톨릭의 교회와 교부들, 수도원 등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김현호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오늘의 현실을 보기 위해 로마를 먼저 방문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교회의 지나친 물질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마치 종교개혁 이전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과 초기 교부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김수성 최근 우리나라에도 중세에 관한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뭉뚱그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려졌지만, 실상 중세에는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시대라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그늘에 가려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언제까지나 흔들리며 길을 걷는 순례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사진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출처: http://dowym.com). 지금부터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김현호 저자가 머리말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부하들이 ‘로터스’ 열매에 빠져 그 섬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했듯이, 우리 교회도 이제는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언제 들어도 가슴이 울울해집니다.김길구 평생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던 프란체스코가 묻힌 조그마한 교회를 방문한 후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길이 9미터, 폭 4미터에 불과한 작은 예배당이지만 이곳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는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반문하게 합니다.김현호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읽을수록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행에 관한 정보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정보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읽다보면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김수성 그래서 책 제목에 ‘흔들리며’라는 말을 넣은 것 아닐까요? ‘흔들리면서도 결국 제자리 찾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죠.김현호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길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야말로 편한 것이지만 둔감해지는 것’이고, ‘길들여지다는 것은 곧 영혼의 타락’이라는 말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두드러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부각시키려한 노력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 교회 권력에 억눌려 역사에 묻힌 사람들, 지금도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난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볼로냐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주거, 노동, 식생활 해결을 위해 조직한 협동조합이 지금은 4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김수성 2001년 아씨시에서 열렸던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채택되었던 ‘평화를 위한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김현호 ‘한가함’에 대한 언급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분주함에 길들여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분주함은 ‘폭력적’이고 ‘자기 착취’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기도원을 소개하는 글을 보다보니 몇 년 전에 봤던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납디다. 기도와 침묵, 예배와 노동으로 이어지는 수도사들의 일상이 보는 내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몇 번에 걸쳐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다큐를 다시 봤는데, 여전히 힘겹더군요. 분주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성과 청빈의 생활화 떼제공동체 김길구 저자는 순례를 떼제(Taize)공동체에서의 생활로 마무리합니다. 떼제의 생활은 한마디로 ‘단순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떼제 찬양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물을 찾아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기업이나 독지가의 후원, 가족의 유산마저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노동으로 벌어들인 것만 가지고 생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이 정신은 프란체스코의 ‘청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김수성 개인적으로 부산 인근에 이런 공동체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지극히 단순한 생활, 적당한 노동을 하면서 지친 영혼을 달래고,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지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유럽을 기웃거리고, 떼제공동체에 들어가 한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김길구 우리에게 절실한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템플스테이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목마름과 단순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특별한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중음악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고자 노력한 《윤영훈의 명곡묵상》(IVP, 2016)입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 2》 / 공지영 / 분도출판사《일상순례자》 / 김기석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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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⑬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1.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쟁이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과 욕망의 표출,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생존하려는 인간 의지의 분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욕망과 의지의 실험장이자 대결장이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전쟁과 함께 폭력이, 폭력과 함께 변절자들이, 변절자들과 함께 꼭 희생이 따른다. 동시에 전쟁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군이 ‘군대의 효율성 때문에 군위안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교수는 군위안부는 사기 진작도 진작이지만,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병사 하나가 성병에 걸리면 그 한 병사만 기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이를 들쳐 엎고 가야 할 여럿이 있어야하기에 성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네댓 명의 전투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병을 방지하면 몇 십만 명을 더 징병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보는 거죠. 그런데 남자 몇 십만을 징병하는 대신에 총 들고 싸울 일 없는 여자 몇 십만을 들여보내면 군대를 100만 명, 200만 명 더 징병한 셈이나 마찬가지겠죠.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다가 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특강: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성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3-6)에서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99마리 양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효율성 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기면(지면 정반대이겠지만) ‘땅과 재물은 물론이고, 노예를 획득할 수 있는 고대 전쟁’으로부터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인류의 삶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곧, 인류의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성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사, 이후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예수 당시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이다. 따라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다음의 말은 타당하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 68,452,000명 대 134,756,000명: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 이야기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옳았다. 전쟁은 여성을 무국적자로 만들며 희생을 요구한다. 구약 사사기의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이에 해당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12부족이 국가로 발전해가는 단계인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로 나중에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암몬이 이스라엘을 칠 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서 입다는 서원을 하게 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30-31).” 그러나 전쟁에 이기고 미스바로 돌아왔을 때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다. 그 결과 딸은 죽임을 당한다. 입다의 전쟁은 자신의 승리(장관이 되기 위해)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으나, 여성인 그 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전쟁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군인만을 죽이고 무장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병사보다는 시민들이, 죄 없는 백성들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한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000명이고, 자국민의 수는 134,756,000명(20세기에 한해서)이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의심하게 만든다. ‘테러방지법’의 속뜻이 국민을 감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듯, 전쟁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딸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다의 ‘부당 거래’를 폭로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11:36)” 전쟁의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사사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동족간의 전쟁인 ‘베냐민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았으나,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레위인은 첩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리고 돌아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한 노인(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주하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날 밤 그 성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로 나와서 말한다.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19:23-24)”고 했으나, 무리가 듣지 않았다. 남성들의 폭력과 음행에 여성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끌어낸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었다! ▲ 죽임을 당한 레위인의 첩 이렇게 죽임을 당한 첩을 레위인은 나귀에 싣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시신을 열두 조각 내고 이스라엘 각지파마다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미스바에서 모여 벤야민 지파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동족 상잔은 참혹했고(“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20:28),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과 ‘실로의 여자들’을 빼앗고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베냐민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짓밟히는 존재인 것이다. 3. 거룩한 전쟁?: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전쟁의 용사(출15:3)”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회피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응이 있고(대부분 진보적인 평화주의자가 이에 해당될 것), 둘째 이러한 전쟁신 관념을 근거로 군사행동 내지는, 혁명과 테러의 정당성을 찾거나(극단적인 근본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그리고 편향적인 진보주의자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쟁 용사’로 비하시키며 대립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 85~16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들을 삭제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의 10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용사로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김이곤 교수는『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3)에서 ‘눌림 받는 자를 변호하고,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해방 이데올로기’로 본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사를 ‘정복설’에 따라 이해하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적 전쟁 이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관점이며, 오히려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평화적 ‘이주 가설’과 멘덴홀(George E. Menderhall)과 갓월드(Norman Golttwald)의 소외된 계층의 반란 및 ‘혁명 가설’¹에 근거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히브리인)를 강자(애굽)로부터 해방시키는 이러한 야훼의 해방 의지는 ‘고난의 떡을 먹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의 해방 역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신인협력사상)’와 폭력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 서두에 인용한 출애굽기 14장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대신 싸우시니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인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 왕권을 부정하며 ‘야훼의 유일한 왕권 이념’과 ‘야훼에 대한 절대 배타적인 신뢰’로 이어진다(이렇듯 성서의 배타성은 ‘다른 종교 자체’에 대한 배타성이기 보다는 ‘세속 왕권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다). 기원전 8세기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유다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 땅과 아하스 왕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야훼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7:4-9).” 오직 야훼, 오직 예수만인 것이다. 바울 사도도 전쟁을 이용하는 권력자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잘 간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약자를 위해 강한 자를 무너뜨리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이렇게 지금의 전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가에 선하다.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4.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엘피, 2014)에서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셋째,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라고 한다. 적용을 해보자. 가령,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이것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본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야스퍼스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다.” 불의한 권력을 따를 것인가? 오직 예수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각주)-----------------1) 멘덴홀은 히브리인의 가나안 정복을 농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 조직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통계적으로 중요하게 기록할 만한 팔레스타인 정복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급격한 대치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며, 왕정 행정지도자들에 대한 불가피한 축출을 제외하고는 본토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축출도 없었다. 요컨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그런 뜻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실제로 없었다. 그 대신에 다만 사회-정치적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역사가들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이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결속된 조직망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일종의 농민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 E. Mender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vol.3(1970), p.107. 여기에 동의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복 가설’, ‘이주 가설’, ‘혁명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하느냐는 것보다, 이 세 가설들이 저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씩 그 배경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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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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