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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교양읽기 ⑭]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 전개해야
    대중음악 속에서 찾은 기독교 영성 이야기 대중음악과 기독교. 쉽게 조합하기 어려운 만남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중음악을 얕보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22곡의 음악을 펼쳐 보이며 “자, 이래도 내 말이 틀렸느냐?”고 반문한다. 영미 팝송이 14곡, 한국 가요가 8곡이다. 1960년대 음악에서부터 2009년 음악까지 다양하다. 머리말에서는 역사적인 증거까지 들이댄다.‘설마’하며 대충 읽었다. 설핏 지나치다가 ‘이런 신앙고백이 숨어 있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꼼꼼히 읽었다. 인터넷을 뒤져 음악을 들었다. 이들 음악이 내 마음속으로 성큼 새롭게 다가온다. 반전이다. 이 책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아는 만큼 들린다.글을 쓰다말고 몇 시간째 음악만 들었다. 한 곡 한 곡 듣다보니 도저히 중간에 그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버전으로 듣기도 하고, 처음에 부른 것과 그 후의 것을 비교하며 들었다. 2003년에 U2의 보노(Bono)가 솔로로 부른 ‘원(One)’에 이어, 파바로티(Pavarotti)와 함께 부른 ‘아베마리아’를 듣고서야 겨우 음악을 껐다. 얼얼하다. 이 감동을 그대로 간직한 채 글을 써야 하는데, 나의 필력은 미진하기 짝이 없다. 아쉬움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음악을 들으며 풀기 바란다.◈ 《윤영훈의 명곡묵상》 || 저자인 윤영훈은 미국 얼라이언스 신학교와 드루 대학교에서 종교와 대중문화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빅퍼즐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문화운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문화시대의 창의적 그리스도인》 《현대인과 기독교》 《복음주의와 대중문화》 등이 있다. 이 책은 월간 잡지 〈워십리더〉에 2년여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이다. IVP, 2016. 15,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김현호 대표는 이 책을 읽는데 김기석 목사의 《흔들리며 걷는 길》이 자꾸 생각나더라고 했다. 이 책의 부제가 ‘길 위에서 자유롭게’이다. 대중가요와 기독교를 접합하여 기독교인에게 소개하는 길이 어쩌면 ‘흔들리며 걸어야 하는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문화가 대중문화로 확산되기도김길구 : “고등학생 때 신해철은 우리에게 우상이었어요.” 신해철 씨가 의료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우리 아들이 한 말입니다. 문득 내가 아들 세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는 한 시대를 이끌어온 가수임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아들과의 세대차를 조금은 좁힐 수 있었습니다.김현호 : 인터넷에서 이들 음악을 찾아 들어가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멀리했던 어릴 때의 감성이 물씬 살아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소개된 음악은 대부분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작품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CCM이 무언가 하고 백과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contemporary christian music의 약자로, ‘대중음악의 형식을 취하면서 기독교 정신을 담아내는 모든 장르의 기독교 음악’이라고 해놓았더군요.김길구 : 사실 대중음악과 교회음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포크송을 퍼뜨린 ‘세시봉’ 멤버들은 거의 다 교회에서 노래하던 사람들이었죠. 교회 문화가 일반 대중문화로 확산된 경우라 할 수 있을 겁니다.김현호 : 이들뿐만 아니라, 대중가수들의 출신을 보면 어릴 때 교회생활을 한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보컬 활동 등을 하다가 자기의 ‘끼’나 음악적 재질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당시는 교회가 대중문화의 산실이 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 최근 청소년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교회가 청소년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교회 교육이 한편으로는 청소년들의 문화와 예술의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너무 교조적으로만 인식, 현상을 성과 속으로만 구분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김수성 : 교회가 대중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문화를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미디어의 대중화로 모든 것이 대중문화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교회문화도 마찬가지죠. 좋아하는 찬송을 파일로 변환시켜 스마트폰에 넣어 다니면서 어디서나 듣는 세상입니다. #수단을 선택할 때 목회적 판단도 중요김길구 : 이 책에 소개된 노래 가사를 보면 마치 옛 선지자들이 일갈하는듯한 느낌조차 듭니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악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마빈 게이의 ‘What’s going on?’은 사랑으로 전쟁과 갈등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가 하면,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는 하나님조차 들어올 자리가 없는 우리의 삶을 고백합니다.김현호 : 개인적으로 최근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많이 불렀는데, 라트비아의 민요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더군요. 한 러시아 가수가 이 민요를 ‘백만 송이 장미’라는 제목으로 발표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심수봉 씨가 인생의 의미와 기독교 신앙을 담은 자신만의 고백을 가사에 녹여냄으로써 감동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김길구 : 역사적으로 봐도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랫말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노랫말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음악은 시대를 불문하고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가 가지는 생명력과 절대적인 사랑이 힘든 생활에서 위안을 얻고 희망을 가지게 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등이 그런 작품 같습니다.김수성 : 장기하와 얼굴들이 노래한 ‘싸구려 커피’를 들으면서 오늘날 취업을 비롯해 막연한 미래 때문에 힘들어 하는 청년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잖아’에서는 위정자들의 입에 발린 말에 절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고요. 암울한 시대에 노래하는 시인들이라는 생각이 듭디다.김현호 : 최근 한류로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걸그룹의 노래는 삶이 담보되지 않은 음악인 것 같습니다. 물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다지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노래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삶의 무게와 그 가치가 깊숙이 담긴 노래는 오랫동안 사랑을 받죠.김수성 : 최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노랫말은 상당히 직설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에게는 선정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힙합이나 랩에 빠져든 청소년도 많습니다. 교회가 청소년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수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김길구 : 그런 문제는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언급했던 기독교 세계관적 입장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교나 교육을 위한 다양한 수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상업주의, 배금주의 등에 물든 문화를 걸러내는 비판적 안목도 필요하지만, 목회적 판단에서 허용할 수 없는 수단도 있다는 것입니다. 니버는 이를 ‘변혁의 문화’라고 합니다.김수성 :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는 하지만, 상당수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아직도 교조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청소년이나 청년들이 갈수록 교회에서 벗어나는 현실에서 대책은 무엇인가요? #인류애를 노래하는 분위기 조성해야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김현호 : 상업 문화가 판치는 현실에서, 꼭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니더라도 인류애와 삶의 가치를 노래하는 분위기라도 조성해야겠죠. 교회의 문화운동이라고 할까요, 가치 존중 사상의 전파라고 할까요. 교회가 청년정신과 감성을 노래하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 먼저 시민적 성숙과 교회의 포용적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죠. 교회나 사회 모두 역사와 문화적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화가 궁극적으로 ‘안식’을 의미한다는 스킬더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문화운동’은 언제든 펼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인식을 조금만 바꾸면 될 것입니다.김수성 : 한편, 교회가 이들 대중가요를 터부시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현호 :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타적 크리스천이 아니라 변혁적 크리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에 소개되었던 가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부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교회로 하여금 대중가요를 멀리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그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행위나 삶의 모습에서도 경건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적인 노래를 불렀지만, 몇몇 가수는 그들의 삶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에 배척한 요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본질적인 규범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미국의 저명한 강연가인 제프 고인스(Jeff Goins)가 쓴 《일의 기술》(CUP, 2016)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그리스도와 문화》 / 리처드 니버 /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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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⑭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끝없이 살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셨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공동번역 창세기 3장 22-24절) “그때는 우리는 새로운 창조주가 되어 우리가 만든 기계인 아담과 하와가 우리 인간들이 금지시킨 선악과를 베어 물고, 기계들의 에덴동산인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 인간은 창조주에 그렇게 도전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병학, 『현대사상과 영화이야기』 중에서) 1. 알파고의 승리 ▲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에게 알파고가 가져간 승리는, 이제 우리 인간이 기계(와 더불어 인공지능)에 관하여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될지 해치는 이리가 될지?)임을 가르쳐준 사건이었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가 <인간vs기계>(동아시아, 2016)에서 한 말처럼 “알파고의 승리는 어쩌면 그동안 경쟁자 없이 지구를 지배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고 말했던 마셜 맥루언(M. McLuhan)의 의수 이론(義手 理論)은 세련된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의 결정판이었다. “기술은 자율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기술결정론은 끝없이 다양해지는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을 미끼로 사람에게 계속 새로운 기술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자율적으로 변하는 기술이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 한다”라는 말은 매체가 인간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계를 사랑하라”는 세련된 기술결정론과 맥루언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명제는 기계의 바다 속에서 살아남기란 이러한 기계의 파도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 타는 법을 익히고 즐기는 것임을 뜻한다. 이제 바야흐로 인간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미디어와 결합되느냐?”가 된 것이다. 2. 혼종의 길?탈육신(disembodiment)의 시대에 전통적인 존재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과 결합하거나, 기계, 나아가 네트워크와 결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혼종(hybrid)을 통해 존재를 확장하며, 존재의 새로운 터전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혼종의 운명은 1998년과 2002년 두 차례에 걸쳐 스스로 사이보그(Cyborg)가 되는 수술을 감행하여, 인류 최초로 사이보그가 된 케빈 워릭(K. Warwick)을 통해서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이보그(cyborg)는 1950년대 말 미국의 맨프레드 클라인즈(M. E. Clynes)가 만든 용어로, 인간과 기계간의 통신을 뜻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생물(organism)의 합성어이다. 아무튼 <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김영사, 2004)에서 워릭은 미래사회에서는 기계가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간은 이러한 사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더 진보적으로 미래사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날짜: 2050년 1월 1일. 지능적인 기계(intelligent machine), 아니면 로봇이 인간에게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그다지 정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예측이 빗나갔음은 분명히 입증되어왔다. 지구는 사이보그가 지배하고 있다. 사이보그는 새롭게 개발된 컴퓨터 네트워크 제어장치의 슈퍼 지능을 가동한다. 인간과 기계가 결합되어 업그레이드된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이보그는 강력한 팔다리와 같이 직접적인 신체 조건의 개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신적 연계 방식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무선장치를 이용해 직접 중앙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생각만으로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지적 능력과 기억을 불러낼 수 있다. 반대로 중앙 네트워크는 정보를 얻거나 임무를 수행시키기 위해 개별 사이보그를 불러들인다. 이렇게 네트워크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가동된다. 하나의 개별적인 사이보그가 네트워크의 무선 접속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고, 개개의 사이보그가 없는 네트워크 또한 상대적으로 무력한 것이 된다.”영화 <로보캅>이나 <아이언맨> 등에서처럼, 인간의 정체성이 기계와 결합되는 혼종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이 탄생하고, 역으로 영화 <공각기동대, 攻殼機動隊>에서처럼, 정보가 신체성을 입어 인간 혹은 생물체가 되는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실 로봇 공학 전문가인 미국의 한스 모라벡(H. Moravec)은 <마음의 자식들>(Mind Children, 1990)에서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미래사회는 사람보다 수백 배 뛰어난 인공두뇌를 가진 로봇에 의하여 지배되는 후기 생물사회(post-biological)가 될 것이므로, 인류의 문화는 사람의 혈육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모두 넘겨받는 기계, 곧 ‘마음의 자식들’에 의하여 승계되고 발전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역시 화제작 <로봇>(Robot, 2000)에서는 2050년 이후 지구의 주인이 인류에서 로봇으로 바뀐다는 대담한 논리를 전개한바 있다. ▲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3. 21세기 초인과 사이버 주체1990년대 말 이후 유럽의 인문학 논쟁을 이끌고 있는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배아복제를 비롯한 유전공학의 기술적 성취를 철학적 사유의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니체(F. W. Nietzsche)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하버마스(J?rgen Habermas)와 대립하면서 독일 철학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나치즘(Nazism)과 잇닿은 궤변론자라는 악평도 받고 있다. 여러 면에서 ‘독일적’인 배경을 지닌 그의 사유는 21세기판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이라 불린다. 그는 근대적 휴머니즘의 패러다임을 비판하며 ‘포스트 휴머니즘’(post-humanism)을 주창한다. 그에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야만성과 투쟁해온 과정이다.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를 위해 문자를 매개로 한 ‘길들이기’ 전략을 택했지만, ‘문자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 방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른바, 새로운 미디어 사회의 도래와 함께 인간의 공존이 새로운 토대 위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는 ‘새로운 종류의 야만화’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과 제국주의,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일상적 야수화”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슬로터다이크는 유전공학에 주목한다. 그에게 인문학적 교육이나 유전공학은 모두 ‘사육(길들임)’의 한 방식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간섭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의 탄생, 혹은 인간성 창조는 현대 과학기술의 총아인 유전공학을 활용해야하며 바람직한 인간성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철학자와 과학자의 연합이라는 ‘21세기판 초인’이 필요하게 된다.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 2004)은 말 그대로 ‘차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자연의 과정인 선택적 탄생을 기술로 가속화하는 것이다. 영화 <가타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 일례이다. 따라서 나치즘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은 슬로터다이크의 말을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니체주의자의 궤변으로 간단히 일축하였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21세기적 지구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만도 없을 것이다.동시에 생물학적 주체(Bio-I)에서 사이버 주체(Cyber-I)로 전환되어 가는 존재의 확장은 이제 디지털이 중심이 되는 존재인 ‘디지털 생물학’으로 넘어간다. 가령, 피터 벤틀리(P. Bentley)는『디지털 생물학』(김영사, 2003)에서 미래 디지털 기술이 생명의 특성을 모방함으로 기존의 모든 차원을 뛰어 넘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가령, 생물처럼 번식하고 다양하게 ‘개체변이’를 일으키는 소프트웨어가 가능할 것이다.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경우에는 생존하고 후손을 남기며, 실패할 경우에는 도태되게 함으로 소프트웨어 스스로 진화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벤틀리는 미래에 디지털 공학과 생물학이, 컴퓨터와 생물체가 매우 유사한 형태를 갖는 단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디지털 형태의 의미소(meme)가 자체 복제를 넘어 진화하기 시작할 경우, 궁극적으로 자연계에서 생명체가 거듭해온 진화의 형태와 흡사하게 될 것이라 보는 것이다. 4. 영혼 불멸? 인간 멸망? “크리스(주인공 로빈 윌리엄스) : 이게 진짜 나요? 앨버트 교수 : 나란게 뭔데? 자네 신체? 크리스 : 어쩌면… 교수 : 그럼 신체가 없으면? 크리스 : 그래도 나죠. 교수 : 어째서? 크리스 :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교수 : 생각 역시 우리 몸의 일부인 뇌를 통해서 하는데? 크리스 : 하지만… 생각이란 무형의 것으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죠. 교수 : 바로 그거야. 존재에 대한 믿음. 그게 해답이야. 크리스 : 세상에… 진짜야. 교수 :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어. 생각만 하면 돼. 생각이 현실이고, 몸이란 환상이야…. 아이러니컬하지 않아?”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1998)에 나오는 위 인용 대사는 플라톤의 관념론에 기초한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인간 존재란 몸은 삭제되고 정신만 있는 관념적 존재가 된다(물론 영화에서 이곳은 천국이지만). 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확장해 나갈 수 있고, 현실의 불안과 한계를 극복하여 사멸하지 않는 세계를 찾아 나선 인간의 탐구 열정은 천국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의 모습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고대 플라톤의 이데아(idea)로부터 그 발생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와 인공지능은 이러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였다. 2012년부터 본격화한 딥러닝(deep learning) 이후의 인공지능은 전혀 차원이 달라졌다. 방대한 데이터(=빅데이터)를 그냥 집어넣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축적된 자료를 분류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알파고와 같은 기계에 지능이 생긴 것이다. 김대식은 인공지능을 ‘약한 인공지능’과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는데, 알파고나 무인 자동차(우리는 이 무인 자동차의 아담을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맛보았다)를 같은 인공지능이 약한 인공지능이라면, 영화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터와 같은 독립성이 있고 자아가 있고 정신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인공지능을 강한 인공지능으로 구분하며, “강한 인공지능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인류보다 지적, 물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될 강한 인공지능이 판단하기에 인간이란 종이 지구에 불필요하거나 해롭다면 인류의 멸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식의 경고이자, 대안이다.“강한 인공지능이 어느 한 순간 인간을 놓고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지구에 왜 있어야 되나? … 만약에 제가 강한 인공지능이라면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지구+인간’이 더 좋으냐 하고 물어볼 거예요. 강한 인공지능 입장에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구-인간’이 더 좋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충분히 낼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 약한 인공지능은 100% 실현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일이 이미 기계 같다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진 유일한 희망은 ‘우리는 기계와 다르다’입니다.”영혼 불멸을 추구하는 인간이 그 ‘추구’의 욕심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것이다. 처음 창세기의 신은 우리를 추방했지만, 이제 우리가 만든 제2의 아담과 하와는 두 번째 창세기에서는 창세기의 이름을 던지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니라) 확신하거나!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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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21
  • [기독교교양읽기⑬] 현대 도시인들에게는 ‘단순함’이 필요하다
    “아직도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 이 책은 한 교회에서 30년 동안 사역한 저자가 안식의 기간 동안 이탈리아, 터키, 조지아(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에 있는 교회와 수도원 등을 순례하며 영성의 시간을 가진 기록이다. 단순히 40여 일의 유럽 여행기라 하기에는 지그시 무게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철학서나 비평서라 하기에는 에세이 같이 큰 부담없이 읽히는 미묘함으로 다가온다.그는 1980년대 초 양성우 시인이 낭송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피를 토하듯 울부짖는 “모래야 나는 얼마나 작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 나는 얼만큼 작으냐”라는 대목에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날 많이 아팠다고 고백한다. 아직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저자는 길을 찾기 위해 멈추지 않을 뿐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책을 읽는 내내 그의 예술적 안목과 문학적 감수성에 빠져들게 한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문학적 향기도 맡을 수 있다. 그러나 순례길 곳곳에서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영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참으로 ‘괜찮은’ 책 한권을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 《흔들리며 걷는 길》 ||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청파교회 담임목사이면서 문학평론가이다. 깊이가 있는 글쓰기로 기독교문학의 새로운 층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은 책으로 《삶이 메시지다》 《오래된 새 길》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등이 있다. 포이에마, 2014. 13,8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이해한다.” 한때 유홍준 교수가 그의 책에 인용해 널리 알려졌던 말이다.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의 글에서 따온 말이다. 김기석 목사의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이 말이 떠올랐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기독교의 뿌리에 대해서 관심 가져야김길구 정말 이 책 한권을 읽고 나서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세의 예술 작품 감상에 이어 인문학적 소양을 과시하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와 사상, 그리고 우리 교회의 현실까지를 놓치지 않고 연결시켜 이야기합니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통섭’을 보여주는 책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부터 시작해서 함석헌의 ‘얼굴’까지 10여 편의 시를 곳곳에서 읊조리며 순례를 계속한 것입니다. 그 시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들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겠죠.김현호 저자와는 10년 가까이 알아왔는데, 그분의 서재에 꽂힌 책을 보면 마치 박물관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저도 책을 취급하지만 희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학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만났고, 그 이후 신학을 했다고 밝힐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김길구 저자는 로마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가톨릭의 교회와 교부들, 수도원 등을 살펴보면서 기독교 신앙의 뿌리를 재조명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김현호 가톨릭교회의 부패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역사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오늘의 현실을 보기 위해 로마를 먼저 방문한 것 같습니다.김길구 맞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교회의 지나친 물질주의와 성장주의에 대해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것은 마치 종교개혁 이전과 비슷한 양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과 초기 교부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한 것은,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김수성 최근 우리나라에도 중세에 관한 서적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뭉뚱그려 ‘암흑의 시대’라고만 알려졌지만, 실상 중세에는 뛰어난 기독교 사상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시대라는 겁니다. ‘기독교’라는 그늘에 가려 우리 사회에서는 이에 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언제까지나 흔들리며 길을 걷는 순례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묻고 또 묻지 않으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사진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출처: http://dowym.com). 지금부터라도 본질로 돌아가야 김현호 저자가 머리말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부하들이 ‘로터스’ 열매에 빠져 그 섬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했듯이, 우리 교회도 이제는 본질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청빈’ 이야기는,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언제 들어도 가슴이 울울해집니다.김길구 평생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던 프란체스코가 묻힌 조그마한 교회를 방문한 후 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길이 9미터, 폭 4미터에 불과한 작은 예배당이지만 이곳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는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반문하게 합니다.김현호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읽을수록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입니다. 여행에 관한 정보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정보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읽다보면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부끄러워지기 때문입니다.김수성 그래서 책 제목에 ‘흔들리며’라는 말을 넣은 것 아닐까요? ‘흔들리면서도 결국 제자리 찾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죠.김현호 현대인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믿음의 길로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익숙함이야말로 편한 것이지만 둔감해지는 것’이고, ‘길들여지다는 것은 곧 영혼의 타락’이라는 말을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두드러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부각시키려한 노력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거대 교회 권력에 억눌려 역사에 묻힌 사람들, 지금도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난받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잊지 않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볼로냐 협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주거, 노동, 식생활 해결을 위해 조직한 협동조합이 지금은 4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김수성 2001년 아씨시에서 열렸던 ‘평화를 위한 기도 모임’에서 채택되었던 ‘평화를 위한 십계명’을 읽었습니다. 이것을 아직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는데,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김현호 ‘한가함’에 대한 언급도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분주함에 길들여져 한가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철학자는 이런 분주함은 ‘폭력적’이고 ‘자기 착취’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김수성 기도원을 소개하는 글을 보다보니 몇 년 전에 봤던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생각납디다. 기도와 침묵, 예배와 노동으로 이어지는 수도사들의 일상이 보는 내내 얼마나 무겁게 짓누르는지 몇 번에 걸쳐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다큐를 다시 봤는데, 여전히 힘겹더군요. 분주함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성과 청빈의 생활화 떼제공동체 김길구 저자는 순례를 떼제(Taize)공동체에서의 생활로 마무리합니다. 떼제의 생활은 한마디로 ‘단순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떼제 찬양의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물을 찾아 어둠 속에서 방황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 목마름만이 우리를 앞으로 나가게 합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기업이나 독지가의 후원, 가족의 유산마저도 일절 받지 않고 오직 노동으로 벌어들인 것만 가지고 생활하고 봉사한다고 합니다. 이 정신은 프란체스코의 ‘청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김수성 개인적으로 부산 인근에 이런 공동체가 하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지극히 단순한 생활, 적당한 노동을 하면서 지친 영혼을 달래고,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김현호 떼제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믿음에서 출발했지요. 저도 기회가 된다면 이 책을 들고 유럽을 기웃거리고, 떼제공동체에 들어가 한동안 머무르고 싶습니다.김길구 우리에게 절실한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템플스테이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목마름과 단순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참가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제법 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어떤 길로 나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조금 특별한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대중음악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고자 노력한 《윤영훈의 명곡묵상》(IVP, 2016)입니다. 긴 시간 동안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1, 2》 / 공지영 / 분도출판사《일상순례자》 / 김기석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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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⑬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1.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세상에서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다. 인간의 희로애락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전쟁이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던 폭력성과 욕망의 표출,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생존하려는 인간 의지의 분출, 전쟁은 바로 이러한 욕망과 의지의 실험장이자 대결장이다. 기본적으로 전쟁은 국가가 하는 일이고, 전쟁은 살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발생에는 언제나 전쟁과 함께 폭력이, 폭력과 함께 변절자들이, 변절자들과 함께 꼭 희생이 따른다. 동시에 전쟁은 사회적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본군이 ‘군대의 효율성 때문에 군위안부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한홍구 교수는 군위안부는 사기 진작도 진작이지만,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가령, 병사 하나가 성병에 걸리면 그 한 병사만 기동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그이를 들쳐 엎고 가야 할 여럿이 있어야하기에 성병에 걸려 걷지 못하는 병사가 한 명만 있어도 네댓 명의 전투력 손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성병을 방지하면 몇 십만 명을 더 징병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보는 거죠. 그런데 남자 몇 십만을 징병하는 대신에 총 들고 싸울 일 없는 여자 몇 십만을 들여보내면 군대를 100만 명, 200만 명 더 징병한 셈이나 마찬가지겠죠. 인간을 생각하지 않고 효율성을 따지다가 보니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특강: 한홍구의 한국현대사 이야기』, 한겨레출판, 2009) 성서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눅15:3-6)에서 효율성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99마리 양이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전쟁은 효율성 면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이기면(지면 정반대이겠지만) ‘땅과 재물은 물론이고, 노예를 획득할 수 있는 고대 전쟁’으로부터 현대의 ‘정의로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변화를 인류의 삶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물론이고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곧, 인류의 문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성서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의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사, 이후 왕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니 예수 당시까지도 끊임없이 전쟁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도 전쟁은 그 자체로 끔찍한 폭력이다. 따라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의 다음의 말은 타당하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어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2. 68,452,000명 대 134,756,000명: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 이야기 “여성에게 조국은 없다”라고 말한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옳았다. 전쟁은 여성을 무국적자로 만들며 희생을 요구한다. 구약 사사기의 ‘입다의 딸’과 ‘레위인의 첩’이 이에 해당 된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12부족이 국가로 발전해가는 단계인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벌어지는 전쟁 이야기이다. 그런데 성서는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희생당하는 여성들을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입다는 아버지 길르앗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로 나중에 본처의 아들들에게 쫓겨나 돕 땅에 거주하며 잡류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그러나 암몬이 이스라엘을 칠 때 입다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의 장관이 되어 전쟁에 나서게 된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전쟁에서 입다는 서원을 하게 된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사사기 11:30-31).” 그러나 전쟁에 이기고 미스바로 돌아왔을 때 입다의 무남독녀가 소고를 잡고 춤추며 영접하였다. 그 결과 딸은 죽임을 당한다. 입다의 전쟁은 자신의 승리(장관이 되기 위해)를 위해 타인의 목숨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이었으나, 여성인 그 딸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전쟁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사실 전쟁법은 가급적 적의 군인만을 죽이고 무장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죽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병사보다는 시민들이, 죄 없는 백성들이,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한다. 국가에 의해 살해된 외국인의 수는 68,452,000명이고, 자국민의 수는 134,756,000명(20세기에 한해서)이다. 이것은 군대가 국민을 외국의 적으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의심하게 만든다. ‘테러방지법’의 속뜻이 국민을 감찰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이듯, 전쟁은 지배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한 최초이자, 최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입다의 딸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다의 ‘부당 거래’를 폭로한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11:36)” 전쟁의 극단적인 폭력의 한가운데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사사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동족간의 전쟁인 ‘베냐민 전쟁’의 기원에 관해 설명해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어떤 레위인이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았으나,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레위인은 첩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가서 데리고 돌아오다 베냐민 지파의 땅인 기브아에서 한 노인(에브라임 사람으로 기브아에 거주하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그날 밤 그 성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에 찾아와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22절)’고 한다. 그러나 노인은 그들에게로 나와서 말한다.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 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19:23-24)”고 했으나, 무리가 듣지 않았다. 남성들의 폭력과 음행에 여성은 한낱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은 자기 첩을 그들에게 끌어낸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 사람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고 밤새도록 능욕하다가 새벽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죽었다! ▲ 죽임을 당한 레위인의 첩 이렇게 죽임을 당한 첩을 레위인은 나귀에 싣고 집에 돌아온다. 그리고 시신을 열두 조각 내고 이스라엘 각지파마다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자손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미스바에서 모여 벤야민 지파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동족 상잔은 참혹했고(“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은 모두 다 불살랐더라”, 20:28), 베냐민 지파는 멸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한 지파의 멸망을 두고 볼 수 없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과 ‘실로의 여자들’을 빼앗고 납치하여 베냐민 지파의 후손을 잇게 하였다. 베냐민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여성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죽임을 당하고 납치를 당하고, 짓밟히는 존재인 것이다. 3. 거룩한 전쟁?: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구약성서의 “야훼는 전쟁의 용사(출15:3)”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 회피하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반응이 있고(대부분 진보적인 평화주의자가 이에 해당될 것), 둘째 이러한 전쟁신 관념을 근거로 군사행동 내지는, 혁명과 테러의 정당성을 찾거나(극단적인 근본주의자나 보수주의자, 그리고 편향적인 진보주의자가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이미지와 대조하여 구약의 하나님의 이미지를 ‘전쟁 용사’로 비하시키며 대립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초대교회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 85~160)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들을 삭제하여 누가복음과 바울의 10서신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의 용사로서 야훼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김이곤 교수는『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2003)에서 ‘눌림 받는 자를 변호하고, 억압자로부터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해방 이데올로기’로 본다. 곧,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사를 ‘정복설’에 따라 이해하고, 구약의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를 지배 이데올로기적 전쟁 이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은 성서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관점이며, 오히려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평화적 ‘이주 가설’과 멘덴홀(George E. Menderhall)과 갓월드(Norman Golttwald)의 소외된 계층의 반란 및 ‘혁명 가설’¹에 근거하여,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해방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약자(히브리인)를 강자(애굽)로부터 해방시키는 이러한 야훼의 해방 의지는 ‘고난의 떡을 먹고 희생의 피를 마시는’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도 연결이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야훼의 해방 역사는 ‘인간의 전쟁 참여(신인협력사상)’와 폭력수단의 사용을 거부한다. 서두에 인용한 출애굽기 14장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대신 싸우시니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신인협력을 부정하는 것은 세속 왕권을 부정하며 ‘야훼의 유일한 왕권 이념’과 ‘야훼에 대한 절대 배타적인 신뢰’로 이어진다(이렇듯 성서의 배타성은 ‘다른 종교 자체’에 대한 배타성이기 보다는 ‘세속 왕권과 지배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에 복종하는 종교’에 대한 배타성이다). 기원전 8세기 시리아와 에브라임이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유다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 땅과 아하스 왕의 마음이 바람에 휩쓸린 수풀처럼 흔들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이사야는 야훼의 말을 이렇게 전한다.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사7:4-9).” 오직 야훼, 오직 예수만인 것이다. 바울 사도도 전쟁을 이용하는 권력자와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잘 간파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에 약자를 위해 강한 자를 무너뜨리시는 야훼의 거룩한 전쟁은 이렇게 지금의 전쟁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말이 귓가에 선하다. “3차 세계대전에는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 몰라도, 4차 세계대전에서는 돌과 방망이로 싸울 것이다.” 4.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시민의 정치적 책임』 (엘피, 2014)에서 “죄에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 법률가의 관심사인 법적인 죄, 둘째, 인간의 운명에 공명하고 예술가적 인간에게 영감을 주는 형이상학적 죄, 셋째, 윤리학자나 정치철학자들의 사유를 진작시키는 도덕적 죄와 정치적인 죄”라고 한다. 적용을 해보자. 가령, ‘법적인 죄’는 소수의 독일인 전범들, ‘정치적인 죄’는 독일 국적자 시민 전체, ‘도덕적 죄’는 나치의 만행을 방관한 독일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 그리고 ‘형이상학적 죄’는 수용소 생존 유대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권력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우리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이것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본다. 따라서 야스퍼스에 의하면 정의에 봉사하는 의미에서 권력투쟁에 함께 나서지 않는 것도 ‘정치적인 근본 죄이자 도덕적 죄’가 된다. 야스퍼스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이비 교리와 ‘나만 무죄’라는 속물적 윤리 모두를 배격한다. (…) 침묵하는 태도 또한 ‘가면’이다. (…)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는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회피적인 태도에서 자라난 마음은 은밀하고 무해한 욕설로 해소되고, 냉혹한 불감증, 광적인 격앙, 표현의 왜곡을 통해 무익한 자기소모에 이른다”고 말했다. 맹자도 이렇게 말한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장 가벼운 것(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다.” 불의한 권력을 따를 것인가? 오직 예수를 따를 것인가? 믿음은 결단에서 시작된다! 각주)-----------------1) 멘덴홀은 히브리인의 가나안 정복을 농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열두 지파 조직이 시작되던 초기에는 통계적으로 중요하게 기록할 만한 팔레스타인 정복은 없었다. 거주민들의 급격한 대치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도 아니며, 왕정 행정지도자들에 대한 불가피한 축출을 제외하고는 본토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의 축출도 없었다. 요컨대 그 동안 일반적으로 알려져 왔던 그런 뜻의 팔레스타인 정복은 실제로 없었다. 그 대신에 다만 사회-정치적 과정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역사가들의 견지에서 본다면, 실제로 일어났던 것은 농민들이 가나안 도시국가들의 결속된 조직망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일종의 농민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eorge E. Menderhall,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The Biblical Archaeologist Reader, vol.3(1970), p.107. 여기에 동의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정복 가설’, ‘이주 가설’, ‘혁명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어느 것을 거부하느냐는 것보다, 이 세 가설들이 저마다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과 관련한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 하나씩 그 배경을 밝혀주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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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기독교 교양 읽기 ⑫] “그들을 죽인 후에도 바다는 더욱 침묵 지켜"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예수회 창설 회원 중 한 사람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1549년 일본에 도착해 2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였다. 채 한 세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기독교인의 수는 30만 명으로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러나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에 의해 포교가 금지되었고, 17세기 들어서는 일본 막부(幕府)와 지방 관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기독교인을 색출하였다. 이때 사용한 방법이 예수나 성모 초상을 새긴 동판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후미에(踏繪)’다. 기꺼이 밟거나 침을 뱉고 지나감으로써 배교(背敎)한 사람은 살려주었으나, 그렇지 않은 자는 갖가지 악랄한 고문과 함께 처형하였다. 특히 체포된 선교사들의 경우에는 처형하기보다는 신도들의 고문이나 처형을 옆에서 지켜보게 함으로써, 배교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배교하면 고문 받는 신도들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내거는 것이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후미에판’ 앞에 선 선교사에게 주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한 가톨릭 선교사가 배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침묵》 | 저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소설가로서,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이 소설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원제 沈默. 홍성사, 2003(개정판). 13,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올해는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 서거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침묵》은 영화로 제작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日, 총포에 더 관심있어 가톨릭 허용김길구 : 이 소설은 17세기 일본에서 일어났던 가톨릭 신자와 선교사들의 순교와 배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에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세계 60여 개국의 2억 명이 넘는 크리스천들이 아직도 국가의 압제 밑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저번에 읽었던 《제자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었죠. 존 스토트 목사는 타문화권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특성으로 인해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복음은 그 사회에 변화를 던지므로 도전에 직면합니다.김수성 :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가톨릭을 박해한 배경이 무엇인지가 우선 궁금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십자가가 그려진 군기(軍旗)를 사용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김길구 : 우리 천주교가 아래로부터의 선교(전교)였다면, 일본은 ‘위로부터’였습니다. 포르투갈로 부터 전래된 두 정의 철포(화승총으로 개량)와 화약제조법이 전투의 양상을 바꿔 일본 전국 통일의 초석이 되었듯이 앞선 문물 교류로 인한 막대한 이익, 강력한 불교 세력의 견제, 규슈지방 다이묘들의 가톨릭 포용정책,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역사의 아이러니인 하나님 호칭의 오역으로 불교의 한 종파로 오해한 점 등이 초기 선교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 후 그런 요인이 해소된 것이죠.김현호 :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는 가톨릭과 신교 간의 선교 대립,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무역 갈등 등 기독교인 간의 분열이 심각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분열상으로 인해 일본 권부의 신뢰감을 잃게 된 것도 기독교 박해의 한 원인 아닐까요?김수성 : 당시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럽 국가들이 선교를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한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치하에 박해가 본격화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김길구 : 한편으로 보면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가 교토시대와 결별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급격한 성장에 대해 기존 불교 세력의 불만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였던 고시니는 도쿠가와의 집권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죽음을 맞이한 장수이기도 합니다. ▲ 일본 막부는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동네사람 모두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성화가 새겨진 동판이나 목판을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이를 ‘후미에’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 보여줘김현호 : 17세기 들어서는 정말 갖가지 고문이 자행된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선교사를 배교시키기 위해 옆에서 신자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 가운데는 기꺼이 ‘후미에’를 한 신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관념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신자들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현장에서.김길구 : 작가가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런 고난과 죽음에도 ‘침묵’을 지키는 하나님. 그러나 후기에 나와 있듯이, 소설과 달리 실제로는 선교사들이 고문에 못 이겨 배교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의 ‘현존’은 나치 치하의 본회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고민이기도 했지요.김수성 : 작가는 일본에서 가톨릭이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로, 농민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 취급해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평생 굶주리고 비참하게 살아왔던 그들에게 선교사들이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어떤 고난이나 죽음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본 것입니다.김현호 : 그런데도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었죠. 선교사가 숨어서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의 신도가 바다에서 순교합니다. “지금 일본 신도의 순교는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입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세월호 침몰과 아직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김수성 :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들이 나를 살렸네》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본에 유독 기독교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구 기독교가 하나님의 부성(父性)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엔도 슈사쿠는 일본인들에게 모성(母性)도 가진 하나님을 보여주고자 했다. 일본의 어떤 속담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네 가지는 불, 지진, 벼락, 그리고 아버지이다.’김현호 : 결국 이 책은 인간애를 통한 이웃사랑이 궁극적인 신의 모습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참사랑은 타자를 위해 배교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지점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김길구 : 한편, 이 소설과 달리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의 순교는 훌륭한 신앙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을 앞두고 이 책을 보면서 양화진에 안치된 초기 선교사들의 삶과 죽음이 더욱 고결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요. 일본화한 그리스도인 지금도 존재해김현호 :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교자가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만 해도 3,792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일본에는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순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대로 복음화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김수성 : 작가도 배교한 선교사들의 입을 빌려 강조하듯이, 일본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는 ‘늪’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종교는 물론이고 모든 문화를 ‘일본화시키는 늪’이라고 할까요.김길구 : 신앙의 토착화와 관련된 내용입니다만, 필립 얀시에 따르면, 19세기 일본 정부가 나가사키에 가톨릭성당 한 곳을 허용했을 때 숨어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수 나타났다고 합니다. 240년 동안 비밀리에 모여왔던 ‘가쿠레 기리시탄(隱れ 切支丹)’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나 전례서 없이 존속해온 결과, 그들의 신앙은 가톨릭, 불교, 애니미즘, 신도(神道)의 기괴한 혼합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는 결사체가 있다고 합니다.김현호 : 작가는 이에 대해서도 관리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죠. 일본 권부가 선교사를 배교시키는데 힘을 쏟는 이유는 뿌리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이미 일부 지역의 농민들이 몰래 받들고 있는 하나님은 가톨릭교의 하나님과 비슷해도 사실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고.김길구 : 이 소설은 신학교 다닐 때 필독서 중의 하나였습니다. 시종 팽팽한 긴장감이 이어지면서 몰입하도록 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성취가 세월과 종파를 초월해 꾸준히 읽게 하는 요인인 것 같습니다.김현호 : ‘내가 죽으면 관 속에 《침묵》과 《깊은 강》 두 권의 소설책을 넣어 달라’고 유언할 정도로 작가가 애착을 가진 작품이라고 합니다.김길구 : 다음에는 김기석 목사가 쓴 《흔들리며 걷는 길》(포이에마, 2014)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깊은 강》 / 엔도 슈사쿠 / 민음사《예수양 주기철》 / 김인수 / 홍성사《십자가》 / 김응국 / 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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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5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⑫ 기억과 망각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6:4-9) 1. 추억의 소환과 기억의 귀환: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 TV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응답하라 시리즈’의 핵심은 추억의 소환이자, 기억의 귀환이다. 지난 2015년 말 개봉된 영화 <히말라야> 역시 죽은 후배와의 추억을 소환하여 그의 시신을 가지러 히말라야의 그 험준한 산을 오른 것이며, 영화 <대호>도 기억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호랑이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새끼시절 자기를 살려주었던 포수를 기억하고, 포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환에 그 모든 기억을 끝내기 위해 망각의 길로 호랑이와 함께 떠난다.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우리는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우리가 나무를 나무로, 꽃을 꽃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나무와 꽃에 대한 원초적 기억인 산과 바다의 이데아(idea)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 지식을 얻는 학습 과정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이데아가 밝혀지기 때문이고 지식은 순수한 영혼이 과거에 보았던 것을 우리 몸이 기억해내는 것이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기억 이론인 상기론(anamnesis)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이 추억을 소환하며 기억의 귀환을 당연시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진리 개념인 알레테이아(a-letheia) 역시 마찬가지이다. 망각(lethe)하지 않는 것,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진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의 어머니는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고 있는 마르셀에게 따뜻한 차와 ‘마들렌’이라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를 권한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을 차에 담갔다가 차를 마셨는데, 마들렌 부스러기가 섞인 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일찍이 느껴 보지 못한 ‘매혹적인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 차에 섞인 마들렌 부스러기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느꼈던 감각이, 어린 시절 아침 인사를 하러 레오니 숙모에게 갔을 때 숙모가 따뜻한 보리수꽃차에 마들렌 한 조각을 담가 준 일과 그 당시 콩브레(Combray; 소설의 공간적 배경)에서의 기억들을 연이어 떠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셀의 고백이다. “이윽고, 침울했던 그 날 하루와 내일도 서글플 것이라는 예측으로 심란해있던 나는 기계적으로 마들렌 한 조각이 녹아들고 있던 차를 한 숟가락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부스러기가 섞여 있던 그 한 모금의 차가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내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곤 소스라쳐 놀랐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미로운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그 매혹적인 쾌감은 사랑이 작용할 때처럼 귀중한 정수로 나를 채우면서, 즉시 나를 인생의 변전 따위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고, 인생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여기게 했으며, 인생의 짧음을 착각으로 느끼게 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초라하고 우발적이며 죽어야만 할 존재라고는 느끼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회상을 ‘무의지적 기억(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불렀다. 마르셀을 매혹적인 쾌감에 빠뜨린 것은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그 답을 3,000쪽이나 되는 방대한 장편소설(7부작)로 제시하고 있다. 곧,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된다.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된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 위안부 소녀상 따라서 기억은 이 시대의 화두인 동시에 영원한 실존적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기억의 귀환(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이 이러할진대 사회적 기억은 어떨까?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전직 대통령들의 기념관 등)¹를 세우고, 기록보관소를 만들고(세월호 관련 저 엄청난 SNS상의 담론들을 보라) 기억의 조형물(위안부 소녀상처럼)들을 세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기억의 연구(사회적 기억)는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나치 치하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 홀로코스트의 영향과 제3세계 권위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영향, 그리고 1990년 전후 세계적 탈냉전이 1945년 이전 식민주의나 1945년 이후 냉전하의 사회적 기억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 치열한 ‘과거청산’ 논쟁과 함께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기억 연구는 5·18민주화 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여성운동이다. 여기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동학농민혁명 등도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기억담론(나아가 기억혁명)은 공식적인 역사가 민중의 경험을 다루지 못할수록 강력하게 요청되며, 이후 체계화된 기억은 다시 역사 영역으로 편입이 된다.² 2.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 ▲ 야드바셈 나치 정권에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 이름을 기억하라) 홀로코스트 기념비에는 ‘망각은 추방으로 이끌고, 기억은 구원의 비밀로 인도한다(Forgetfulness leads to exile, while remembrance is the secret of Redemption)’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야드 바셈은 “나의 집, 나의 울 안에 그들의 송덕비를 세워주리라. 어떤 아들 딸이 그보다 나은 이름을 남기랴! 나 그들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이름을 주리라”는 이사야 56:5절 말씀에서 인용되었다. 이스라엘 안의 이방인들(특히 이사야 본문에 의하면 ‘고자’로 배척받는 이들로 이 세상에서 쫓겨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배제당한 사람들, 분배의 몫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슬픔과 고통의 원인을 국가적 횡포가 막아 더 큰 아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어 이스라엘의 아들과 딸들보다 더 나은 이름을 주며 ‘기억’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님의 기억의 귀환이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든 절차는 기억의 귀환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반복적 상기는 공통된 기억의 반복이며 이를 통해 신앙적 전통이 연결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의 귀환은 신앙의 본질적 토대가 된다. 또한 대표적인 그리스도교의 성례인 성찬에서 포도주와 떡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것은 그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일진대, 그렇다면 기억은 단순히 의지적인 머릿속 작용만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과 기억되는 대상 사이를 연결시킨다. ‘참여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이들의 고통과 고난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 밀양과 강정 마을, 세월호,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에 대한 공권력의 과도한 물대포 살수 등 최근의 사건들도 잊혀져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기억의 길이는 가슴으로 느낀 아픔의 길이와 비례하건만, 아직도 아픔은 기억으로 소환되어 망각의 강으로 떠날 줄을 모르는 것이다. 3. 애도와 우울증: 망각의 강으로 사람은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하지 못한다(그러나 망각과 동시에 ‘앞서의 이야기와 같이’ 기억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지도 못한다). 오직 인권과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하다 갖은 고초를 겪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만이 계속되는 삶을 위해 망각을 불러내야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트라우마(外傷, trauma, 전쟁, 성폭력, 재난, 사고와 같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외적인 사건의 영향으로 이 사건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정신적 충격) 증후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 다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의식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억을 통제하려면 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망각은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함으로 기억을 통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국가가 일괄적으로 집행할 아무런 권한도 의무도 없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역사적 외상에 있어 국가의 과도한 망각 집착에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상처와 고통에 대한 망각은 어떻게 가능할까?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 모두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지만 몇 가지의 차이가 발견하며 이렇게 말한다. “애도의 경우 빈곤해지는 것은 세상이지만, 우울증의 경우 자아가 빈곤해진다.” 애도(Trauer, 슬픔)의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데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어서 아무리 격심하다 해도 치료를 요하진 않는다.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아픔은 가라앉고 다시 일상이 열린다. 그러나 우울증에 빠지면 상실로 인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 능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우울증은 자애심, 곧 자신을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슬픔은 세상을 텅 비게 하고, 우울증은 내 안을 텅비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슬픔과 우울증의 원인을 밝혀, 자신이든 타자든 합당한 결과를 수용하거나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지나갈 때, 슬픔은 위로받고, 우울증은 사라질 것이다. 그때 망각은 자연스레 따라와 지나가버린다. 4. 망각 인간의 내면적인 삶과 관련된 트라우마와는 달리 인간의 외면적인 삶과 관련되어 국가 혹은 정치 권력이 개입해서 망각하는 행위가 있다. 역사적 사면(赦免, Amnesty)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9월 19일 처칠 영국 수상의 취리히 연설은 이제까지 적대적이었던 국가들 사이의 과거를 잊고 새로운 평화의 역사를 쓰자는 ‘망각의 신성한 행위’를 호소한다. 하나님은 역사적 사면을 우리 인간 전체를 향하여 펼쳐 보이셨다. ‘기억의 귀환인 동시에 죄에 대한 망각 대선언’인 것이다. 성경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할지라도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이시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43:25)”,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49:14-15).”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억의 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선조들의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고난을 후손이 기억하고자 한다. 따라서 유월절 식탁에서 자녀들은 쓴나물을 먹으며 부모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왜 우리가 이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부모는 이렇게 답한다. “조상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하기 위해서!” 각주)-----------------1) 문자적인 의미로는 기억(記憶)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는 것’이며 기념(紀念)은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념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재현하지만 그 속에 기억이라는 의식적이고 능동적인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단지 형식적 제의와 축제에 불과할 것이다. 2) 그러나 이러한 기억혁명이 항상 인권을 중시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국가주의적 기억을 해체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적 기억의 전환은 주로 민주화 국면(또는 ‘민주정부 10년’ 기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수적인 사람들은 ‘반기억 혁명’의 맥락에서 국가주의적 기억을 새롭게 부활시키려는 새로운 기억의 터를 조성하려고 한다(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나 박정희 기념도서관 등).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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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03
  • [기독교교양읽기⑪] ‘제자도’는 교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 이유는? “88세의 나이에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으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 고별 메시지를 보낸다.”저자는 이 책이 ‘마지막 인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어떤 심경으로 이 책을 썼는지를 알만하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 그것도 ‘급진적 제자’가 되라고 이야기한다. 왜 급진적 제자인가?‘급진적’이라는 말은 ‘뿌리’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에서 왔다. 예수님은 돌밭에 떨어진 씨가 말라죽은데 대해 “뿌리가 없으므로”라고 말씀하셨다. 급진적 제자는 좋은 땅에 떨어져 뿌리를 깊게 내림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씨앗이다.급진적 제자는 여덟 가지 자질을 가져야 한다. 첫째는 불순응으로, 세상에 대해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모두를 피해야 한다. 둘째는 닮음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셋째는 성숙으로,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넷째는 창조 세계를 돌봄으로, 자연에 대해 책임 있는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단순한 삶으로, 돈과 소유에 있어 단순함을 제안한다. 여섯째는 균형으로, 예배와 일 등에 있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의존으로, 자립 못지않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여덟째는 죽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정확히 말하자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제자도》 | 저자인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이자 신약학자이다. 1974년 ‘로잔 언약’ 입안자로 참여했고, 랭햄 파트너십 인터넷을 설립하여 전 세계적으로 문서·교육 사역을 하고 있다. 원제 The Radical Disciple. IVP, 2010. 8,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2016년 새해가 밝았다. 많은 사람들은 묵은해를 보내면서 크든 작든 새해 소망을 하나쯤 품는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제자도》를 읽은 우리에게 새해 소망은 무엇일까?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이 세상에 주님의 사랑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 아닐까? ▲ 왜 ‘제자도’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더 성숙해지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림 출처: jrforasteros.com] 보수와 진보의 간격 줄인 복음주의자김길구 존 스토트 목사는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채택한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을 기초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책은 스토트 목사의 유언이라고 할 정도로 비장함을 가지면서도 평이한 내용이어서 모든 분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김현호 스토트 목사는 랭햄(Lanham)재단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학자를 많이 키운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 중에도 이 재단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 책이 결국 그분의 마지막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스토트 목사는 2011년 7월 27일 런던 바나바칼리지 은퇴자 숙소에서 지인들이 읽어주는 성경 말씀과 헨델의 〈메시아〉를 들으며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김길구 로잔 언약은 그의 주도로, 하나님이 온 우주의 절대권자라면 그 창조세계에서 정의로운 제도나 문화 창조에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렇듯 스토트 목사는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 큰 울림을 주었던 중재자였습니다.김수성 이 책의 본래 제목에는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 전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정작 읽으면서는 오히려 지극히 복음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김현호 개인적으로는 한국어판 제목에 ‘래디컬’을 뺀 데 대해 불만입니다. 그가 쓴 책이 50권이 넘습니다만, 그중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책임》을 가장 공들인 책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현재 만연한 서방세계 교회의 문제점, 즉 반지성주의와 현대 사회에 대한 무관심 등에 던지는 메시지 아닐까요?김수성 우리나라에서는 ‘급진적’이라는 말을 제목에 사용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낀 것 아닐까요? 사실 내용을 보면 ‘철저한 제자도’ 또는 ‘온전한 제자도’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구신학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한 책김길구 이 책에서는 제자도의 자질을 여덟 가지 들고 있습니다만, 첫 번째로 언급한 현대의 잘못된 풍조에 휩쓸리거나 순응하지 않는 것이 제자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원주의의 도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김수성 다원주의에 대해서 참으로 묘하게 대응하라고 합니다. “지극히 겸손해야 하고, 개인적인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은 계속해서 주장해야 한다.” 외유내강이라고 할까요, 스스로 조심함으로써 상대를 자극하지 않되, 우리가 주장할 바는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김길구 이 역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저자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원주의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이 대체로 관대하다는 지적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윤리적 상대주의 풍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만, 혼전 동거와 동성애 등 성 윤리에 관해 저자는 성경을 인용하며 엄격한 잣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김현호 저는 이 책 5장 ‘단순한 삶’에서 깊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돈과 소유에 대해 청지기적 단순함을 제안한 ‘로잔 언약’을, 오늘날 제자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하는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로 물질주의 풍조에 관한 지적이죠.김길구 저자는 물질주의에 대해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참된 제자가 되려면 한국 교회는 가진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김현호 “우리는 모두 더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우리는 낭비하지 않고, 개인적인 의식주와 여행과 교회 건축을 위해 사치하지 않기로 결단한다.”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의 언약’에 나와 있는 이 말이 아프게 다가옵니다.김수성 또 하나의 문제점인 나르시시즘 풍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저자는 자신도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김길구 ‘자기애(自己愛)’와 ‘자존감(自尊感)’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나르시시즘이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기애’라고 한다면, 김 교수가 이야기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남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균형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김현호 이 문제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청지기 역할은 소홀히 하면서 살아왔습니다.김길구 앞서 이야기한 네 가지 풍조에 빠지지 말라는 말은 미국 교회처럼 성장주의에 한계가 왔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 신학은 서구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의 변화는 아직도 굼뜨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 책으로 ‘업’시켜 제자 훈련했으면김수성 저는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언급한 죽음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달 전에 이야기했던 ‘순례’와 관련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온전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밖에 없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김현호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난이나 박해를 각오하고서라도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자는 도피주의와 순응주의 둘 다를 피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허덕이지 않도록 항상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정도의 마인드만 가져도 한국 교회의 당면한 위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김현호 1980년대 한국 교회가 제자 훈련으로 성장했다면, 이제는 이 책을 중심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리더십 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수성 저는 목사님들이 이 책의 주제를 하나씩 나누어 설교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김길구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책도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 가지 잘못된 풍조에서 벗어나 진리의 공동체,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 순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엔도 슈사쿠가 쓴 소설, 《침묵》(홍성사, 2003 개정판)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급진적 제자도》 / 존 하워드 요더 / 죠이선교회《제자 제곱》 / 프랭시스 챈 / 두란노 《공동체 제자도》 /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 /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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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4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⑪ 원숭이
    ▲ “2016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Monkey Bars’”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6』)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니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 1.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새벽이나 해 질 녘,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말한다. 진실과 거짓을,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러한 불투명성을 견디고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저 언덕 너머에 있는 실루엣이 개인지, 늑대인지. 지록위마(指鹿爲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진실과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하고 속이는 언행을 비유)로 끝난 2014년에 이어 2015년도 혼용무도(昏庸無道,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음)로 끝나, 이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사건의 진실을 명확하게 깨달은 지금, 사람의 중요성을, 사랑의 힘을 믿어야 할 시간이 2016년 붉은 원숭이의 해와 함께 다가왔다. 2. 헬조선과 혼용무도의 시간 가장 빛나고 희망찬 시절을 보내야 할 21세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지옥(헬, Hell)과도 같은 계급 국가라는 말이다. 이러한 헬조선과 함께 등장하는 4가지 키워드는 ‘수저계급론’과 ‘노오오오력’, ‘N포세대’와 ‘열정페이’이다. ‘수저계급론’은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 자수성가한 부자가 없는 나라를 뜻한다. 가령, 미국의 억만장자 75%는 자수성가형 부자이지만, 대한민국의 억만장자 75%는 상속자들이라고 한다. 수저계급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노오오오력’은 힘든 삶에 대한 관심보다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만 해대는 것을 비꼰 말이다. 앞이 안 보이는데 대통령까지 나서서 노오오오력하라고만 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더 노오오오력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N)을 포기한다. ‘N포세대’의 젊은이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 내 집 마련, 인간관계, 저녁이 있는 삶, 여가, 꿈, 희망 등 포기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세대이다. 더구나 시간, 정성, 열정을 쏟아 부어 일해도 받는 돈은 형편없이 적은 ‘열정페이’만을 받고 있다. 헬조선을 떠나 지구촌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이다. 2016년은 중국의 경기침체와 미국의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로 자산가격의 급변동과 잠재성장률의 저하, 원자재 가격의 추가 하락 등 세계 경기 회복에 큰 부담을 주는 요인들로 가득하다. 지난 고도성장기에 우리는 항상 수요가 초과하는 상황이었다. 상품이 부족하니 생산하는 대로 소비됐고, 주택이 부족하니 집값은 항상 올랐고, 자금이 부족하니 이자율은 높았다. 더구나 인력이 부족하니 젊은이들은 쉽게 취직이 됐다. 그러나 이제 모든 분야에서 공급이 과잉되면서 소비 부진, 취업난, 물가하락 등 경기침체로 접어들게 되었다. 과도한 규제와 간섭을 최소화하고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혁신적인 체질 개선이 필요하나 혼용무도의 시대에 정치와 행정의 혁신, 리더십의 복원은 요원하다. 특히 올 4월에 있을 총선으로 인해 문제를 풀어야할 정치가 더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2016년 병신년(丙申年) 붉은 원숭이해에 정말 병신년이 되어 원숭이처럼 웃음거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원숭이처럼 능숙하고 재빠르게’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며 다방면의 개혁이 일어날지(사실 丙은 火로 새로운 문화와 창조를 의미하며, 申은 金으로 법의 강화와 다방면의 개혁을 의미한다) 걱정반 기대반 우려가 된다. 3. 붉은 원숭이의 해, Monkey Bars! 원숭이는 영장류 가운데 사람을 제외한 동물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것이다. 사람과 모습이나 행동이 비슷해 친근하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원숭이는 영리하고 재빠르다. 순우리말로는 잔나비(원숭이의 고유어인 ‘납’에 날쌔다는 ‘재다’가 합쳐짐)라고도 하는데, 원숭이해에 태어난 사람은 재주가 많고 총명하며 언제나 좋은 면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속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자기 재주를 너무 믿다가 실수를 하고 낭패를 볼 가능성도 있다. 김난도 교수팀의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6년 전망인 『트렌드코리아 2016』 (미래의 창, 2015)는 2016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을 ‘Monkey Bars’로 정했다. 몽키바는 원숭이처럼 매달려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구름다리 형태의 놀이기구이다. 2016년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치, 사회, 경제적 위기의 깊은 골을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 신속하고 현명하게 무사히 건너 안정된 2017년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고 한다. 그 10가지 트렌드를 간략히 살펴봄으로 2016년도 새롭게 다가올 문화를 펼쳐보자(이하, 『트렌드코리아 2016』에서 인용함). 1) Make a ‘Plan Z’(‘플랜 Z’, 나만의 구명보트 전략) 플랜 A가 최선, 플랜 B가 차선이라면 플랜 Z는 최후의 보루이다. 저성장, 취업난, 고용불안, 양극화 등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면서도 풍요의 시대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여전히 소비를 통해 행복을 추구 한다 이 역설적인 긴장 속에서 나타나는 소비형태가 플랜 Z인데, 단지 무조건 아끼고 긴축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 쓰지만 만족은 크게 얻으려는 전략’이다.2) Over-anxiety Syndrome(과잉근심사회, 램프증후군) 불안정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불안이 일상화되고 있다. 대중매체와 SNS를 통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재난과 사건사고를 시각적으로 접하면서 대리외상을 경험한다. 또한 기업은 이러한 소비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하여 상품화하고 판매 전략(공포마케팅)을 세운다. 램프증후군은 근심이라는 환영의 마술램프를 들고 스스로를 지나치게 괴롭히는 현상을 말한다. 동화 속 알라딘이 마술램프에서 마법의 거인을 깨우듯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걱정들을 램프에서 불러내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과잉근심시대가 도래했다. 3) Network of Multi-channel Interactive Media(1인 미디어 전성시대) 과거 비주류로 여겨지던 1인 방송이 최근 들어 메이저 콘텐츠로 급부상하고 있다. 공중파 TV에서도 1인 미디어를 전격적으로 수용한 포맷의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류 전파의 새로운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블로그로 시작,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로 성장했다가 이제 1인 방송의 형태로 진화한 것이다. 4) Knockdown of Brands, Rise of Value for Money(브랜드의 몰락, 가성비의 약진) 구매의 나침반이던 브랜드의 역할이 흔들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이제 브랜드가 약속하는 환상을 믿지 않으며 소비자끼리 소통하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한다. 가격과 성능의 대비를 의미하는 ‘가성비’가 브랜드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사치의 시대’가 가고, ‘가치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를 가린 복면 뒤에서도 절대가치라는 가창력을 뽐낼 수 있는 기업이, 그리고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5) Ethics on the Stage(연극적 개념소비) 기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기부에 기꺼이 동참하지만 자발성보다는 부분적 강요로 기부 피로를 느끼는 소비자들이 이제 개념소비로 과시가 된 착한소비, 놀이가 된 기부 등을 창출했다. 사실 메리 제인 라이언이 『줌: 행복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의 ‘주는 행복론’에서 설파했듯이 베푸는 것이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자신을 사랑해서 남도 사랑하는 것(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 이제 기부는 헌신적인 기부에서 본인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주는 기부로 바뀌고 있다. 6) Year of Sustainable Cultural Ecology(미래형 자급자족) ‘늙어갈 용기’가 필요한 100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오래 건강하고자 하는 욕망은 커졌지만 환경오염과 자연재해가 심각해지고 도시생활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악화되면서 자족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어떻게 하면 현대 자본주의의 도회적 교환경제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보완해 줄 좀 더 지속가능하고 인간적인 삶을 누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은 친환경적, 생태주의적 삶을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가령 베란다와 옥상 등의 주거공간을 활용한 ‘친환경 상자텃밭’이 바로 그것이며 차후 전기차 시장의 급성장과 상용화가 시작될 것이다. 7) Basic Instincts(원초적 본능) ‘단기 불황에는 매운맛, 장기 불황에는 단맛’이 뜨는 것처럼 자극적인 것이 주목을 받는다. 최근 대중문화 현상을 살펴보면 하드코어급의 극단적 콘텐츠에 주목하고 세련된 A급 보다는 촌스런 B급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적나라한 솔직함에 공감하며, 질서정연함보다는 어이없는 부조화에 열광한다. 이처럼 사회 전반에 확산된 절망, 분노, 갈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더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감각에 탐닉하도록 주문한다. 이러한 ‘원초적 본능’은 잔인하고 유치하고 솔직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추구함으로 힘든 현실을 돌파해 나가고자 하는 사회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8) All’s Well That Trends Well(대충 빠르게, 있어 보이게) 자원이 충분하지 않고 정식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대단히 있어 보이게 만드는 능력인 ‘있어빌리티’가 SNS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역량이 되고 있다. ‘보이게’를 강조하면 있는 ‘척’이 되지만, ‘능력’에 방점을 찍으면 포장력이자 연출력이 되고 자신을 브랜딩하는 하나의 기술이 된다. 돈과 센스, 인맥이 있어빌리티의 과시대상이 되었다. 9) Rise of ‘Architec-kids’(‘아키텍키즈’, 체계적 육아법의 등장) 최근 젊은 부모들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체계적 육아’에 대한 열기가 심상치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똘똘 뭉쳐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정성 들여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 마치 검증된 공법을 총동원해 건축물을 설계, 시공해나가는 것 같다. 자녀들을 빌딩 건축하듯 하나씩 하나씩 공들여 키운 아이라는 의미로 건축의 아키텍쳐(Architecture)와 아이의 키즈(kids)를 붙여 아키텍키즈가 등장했다. 고도성장기인 1980년대에 태어나 본격적인 치맛바람, 바짓바람 속에서 성장한 1세대가 이제 스스로 부모가 되어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육아에 대한 정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10) Society of the Like-minded(취향 공동체)대세를 따르기 보다는 자기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은 이제 이색적인 취미를 당당하게 혼자 즐기기도 하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기도 한다. 돈이 없는 것보다 취향이 없는 것이 더 부끄러운 시대가 된 것이다. 이제 식당에서 주문할 때, ‘아무꺼나’는 사라졌다. 자신의 취향을 찾아 공동체를 추구한다. 교회도 자신의 특성을 가질 때 성장하고 부흥할 것이다. 이처럼 2016년 붉은 원숭이해는 원초적 본능의 과잉근심을 있어빌리티를 추구하는 취향공동체로 구성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현상의 기반에는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빈부의 격차가 취향을 넘어 존재 자체로 까지 확장되는 헬조선에서 그 맹위를 떨칠 것이다. 4. 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한길사, 2015)에서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고 ‘부의 숭배를 부추긴 기독교의 원죄’를 지적하며 그 해결방법을 제시한 영국의 경제사학자인 R. H. 토니는 이렇게 말한다. “가난이 넘칠수록 필요한 건 ‘연대와 평등’이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평등과 연대의 회복이 모든 문제의 답”이라고 한다. 2016년 어쩌면 험난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에 기반한 연대와 평등을 통해 지난한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야 한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에서 고단한 삶의 영속성을 이야기하는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지만 나에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장성한 사람이 되어 이 험난한 세상에 사랑을 품고 붉은 원숭이해를 살아가야할 것이다. 서두에 인용한 고린도 전서 13장 12절의 앞 절(11절)과 뒷 구절(13절)에서 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절) 그렇다. 우리에겐 아직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and the miles before I sleep)’는 것이다.
    • 문화
    2015-12-31
  • [기독교교양읽기 ⑩] “크리스마스에 이웃과 함께 하는 식탁을…”
    “식탁으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저자는 아주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글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식탁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뿌리내린 자’로서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가정은 물론이고, 교회도 식탁 대신 다른 것을 우선함으로써 신앙의 위기가 닥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관계’와 ‘식탁’, 그리고 그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은 이야기로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며 연결된다. 기독교 신앙 역시 ‘내러포’(narraphor, 은유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전달된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식탁에서 전달되는 내러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식탁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먹고 마시는 곳이다. 모든 식사의 자리에 ‘진정성’과 ‘진리’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탁에 함께 앉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저자는 자기 가정의 예를 들며 가족들이 식탁에 마주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몇 가지 제시한다. 특히 식사할 때 무엇이든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은 안 된다는 원칙이 눈에 띈다. 식사시간에 책, 핸드폰, 아이패드, 컴퓨터 등은 전부 사용금지다. 우리도 지켜야 할 원칙이라 하겠다.◈ 《태블릿에서 테이블로》 | 저자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은 저명한 기독교 미래학자이자 복음과 문화, 사회현상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 성찰하는데 뛰어난 복음전도자요 저술가이다. 원제 From tablet to table. 예수전도단, 2015. 12,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의 ‘태블릿(tablet)’이 ‘태블릿 컴퓨터’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즉, 우리 일상에서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 사용을 줄이고, 식탁의 중요성을 깨닫자는 내용으로만 생각했다. 책을 읽은 후에야 ‘태블릿’이 패스트푸드와 같은 인스턴트 신앙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았다. 저자는 오래 전 교회학교에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반사 선생님이 들려주던 성경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부직포 칠판’과 반대되는 의미로 쓴 것이다. ▲ 예수님은 항상 배척받던 사람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셨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가족은 물론, 주위의 불우한 이웃과도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어떨까? [그림 출처: dreamstime.com] #식탁공동체의 중요성에 관심 가져야 김길구 :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소위 ‘맛집, 먹방’ 등 먹는 것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식탁 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 그동안 핵가족화, 패스트푸드로 대표되는 음식문화 등으로 인해 우리의 전통적인 식탁이 무너졌고, 이에 따라 가족 공동체도 함께 붕괴되고 있습니다. ‘맛집’이나 ‘먹방’ 같은 프로그램이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건 아닐까요?김길구 : 최근에는 특히 ‘집밥’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맛집’이나 ‘먹방’이 식당에서 외식하는 것을 상징했다면, ‘집밥’은 역으로 우리의 식탁을 되찾아야 한다는 흐름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김수성 : ‘집밥’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만큼 혼자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집에서 혼자 대충 끼니를 때우던 사람들에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재료만 가지고도 간단하게 요리를 해서 어느 정도 ‘격’을 갖춘 밥상을 차려서 먹을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 아닐까요?김길구 : 출연자 대부분이 그동안 부엌과 동떨어진 남성들임을 보면 ‘집밥’의 의미가 가족식탁 공동체의 재발견이란 생각도 드네요. 이 책의 저자는 은유로 된 이야기를 뜻하는 ‘내러포’가 식탁을 통해 신앙과 매너가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고 주장하는데,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중요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김현호 : 올해 초에 나온 한 설문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횟수가 일주일(21회)에 평균 9.6회였습니다. 60대 이상은 약 12회인 반면, 20대는 7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김길구 : 횟수도 문제지만 식탁에 같이 앉아서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죠. 텔레비전을 켜놓고 시청하면서 밥을 먹는다든가, 각자 스마트폰에 집중하면서 식사한다면 혼자서 밥 먹는 것과 다를 바 없죠.김수성 : 식탁에 앉아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이야기죠. 그래서 저자는 식탁을 함께 할 때에 원칙을 정해놓아야 한다며, 자기 가족의 식탁 원칙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107~110쪽 참조). #예수님은 배척받는 자와 함께 식사해김길구 : 저자는 모든 식탁에는 ‘진정성’과 ‘진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잘못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기 있음’을 서로에게 드러내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죠. 즉, 식탁에서 서로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화해하고 치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김현호 : 일반적으로 우리 교회의 메시지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목회자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메시지, 교리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는 삶과 생활을 신학화하여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실질적인 지혜를 좀 더 많이 전달했으면 좋겠습니다.김길구 : 이 책에서의 좋은 식탁은, 삶의 현장과 괴리된 바리새인들의 ‘율법, 규정, 배척’으로 상징되는 식사가 아닌, ‘사랑, 자비, 용납’으로 목마르고 굶주린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유쾌한 식탁에의 초대를 은유합니다.김수성 : 교회에서의 식사도 점차 한끼를 때우는 식탁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오후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 봉사하는 분들은 물론, 식사를 하는 분도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밥 먹기에 급급한 현실입니다.김길구 : 가정은 물론, 여건이 문제지만, 교회에서의 식탁 문화도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러앉아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치유의 식탁’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교회 식당의 분위기도 의도적으로 밝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김현호 : 주일날 교회에서 하는 공동식사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만찬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실천하는 ‘거룩한 식탁’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요. 목회자와 직분 맡은 이들이 평신도들과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식사를 나누는 자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가 강조하듯, 식탁을 차릴 때는 반드시 하나님/예수님의 임재를 초청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군요.김현호 : 예수님께서 부활 후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신 것처럼, 리더가 먼저 섬기는 마음을 가지는 식탁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김길구 : ‘열린 식탁’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겠죠.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교에서 배척받던 작은이들과 식사하기를 즐기셨습니다. ‘끼리끼리’ 혹은 익명성 뒤에 숨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폐쇄성이 좋은 관계요, 좋은 공동체라는 착각으로 그들만의 식탁으로 이끄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봐야겠죠.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음식’ 만들자김수성 :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오늘의 주제인 식탁 공동체와 관련하여 이야기할 부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김현호 : 먼저 가족들과 함께 모여 성탄을 축하하는 식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또는 케이크를 자르면서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김길구 : 교회에서는 불우한 이웃과 함께 하는 식탁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슬로처치’에서 언급했던 포틀럭(potluck) 식탁을 차리는 것이죠. 이웃을 초청하되, 교인들이 각각 조금씩 음식을 준비하여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입니다.김수성 :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만의 ‘크리스마스 음식’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하면 칠면조 요리가 생각나듯이, 교회에서 공동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절기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을 되새기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김현호 : 집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음식이면 더 좋겠죠. 그리고 그 음식을 이웃과 나눈다면 더욱더 의미있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습니다.김길구 : 이러한 절기 음식은 기독교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식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이 피는 식탁은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는 물론,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좀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다음에는 존 스토토가 마지막으로 쓴 책, 《제자도》(IVP, 2010)를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예수님께서 내시는 식사 오병이어》 / 이준 / 새물결플러스《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 / 데이비드 그레고리 / 김영사《만찬, 나를 먹으라》 / 김기현 / 죠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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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15-12-22
  • [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⑩
    “눈이 있는 한 인간의 세계는 파국을 면할 길이 없다. 종교적 용어를 구사한다면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임철규,『눈의 역사 눈의 미학』)“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8절) 1. 눈의 역사에서 사람만이 ‘보는 것’을 통해 사유를 한다. 따라서 인식의 전제조건인 보는 것이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유, 역사, 문명은 불가능 할 것이다. 이해를 청각을 통해 수용했던 히브리인들과 달리 그리스인들은 시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리스어 ‘나는 안다(oida)’는 ‘나는 본다(eidon)’의 과거로 ‘나는 보았다’와 같은 뜻이다. 즉 보는 순간 안다, 보는 것이 아는 것, 감각 작용이 바로 인식작용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이라 부르며 자연계에 대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제반 지식과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idea)도 ‘내가 보다(horao)’의 제2단순과거 부정사인 ‘보여진 것(idein)’의 과거분사가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대상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안다고 할 때 ‘보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게 된다. 보지 못하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을 타자화하고, 비(非)동일적인 것으로, 반(反)정체성으로 규정하는 인식의 폭력은 이렇게 눈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거대한 눈과 같은 저 로마의 원형극장을 보라.『참회록』에서 “눈의 음욕”을 경계한 어거스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는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성상과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화, 목판화 등을 통해 눈에 보이도록 만들었다. 눈의 이성적 능력을 비판한 바울의 가르침(고후 4:18)을 따라 종교개혁가 칼빈은 ‘믿음이 눈을 감게 하고 귀를 뜨게 한다’고 말하며 청각만이 구원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했으나, 가톨릭은 성상, 성화, 십자가 이외에도 눈부신 성당, 각종 대회, 축제, 가면, 장관을 이루는 분수 등의 볼거리를 통해 시각문화를 창조했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시각을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평가하며 ‘영혼과 가장 빠른 교섭을 가지는’ 시각에 대해 예찬한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이르러 눈의 잔치는 종교개혁 이후 최대의 총체적 반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자서전적인 시집『서곡』에서 이렇게 눈의 폭력을 지적한다. “우리들 감각들 가운데 가장 폭군적인 감각”이며 “그 힘이 잠들 수 있는 어떠한 표면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고 애통해 한다.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 역시 바깥을 향한 육체의 눈은 언제나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는 것은 내면을 향한 눈이며 이러한 눈은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대, 천상의 빛이여 마음속에 빛나라, 그리고 마음의 모든 능력을 비추어라. 거기에 눈을 심고, 거기서 모든 안개를 말끔히 거두어내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가 보고 말할 수 있도록.” 실존주의에 와서는 타자의 시선은 지옥으로 변한다. 타자는 자신의 시선을 통해 나를 바라보면서 나의 세계를 훔쳐가고 동시에 나에게 객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나와 투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밀폐된 방』에서 사르트르는 가르생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잡아먹을 듯 한 이 시선들… 아! 당신들은 고작 두 명뿐이었는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웃는다.) 이것이 지옥이지. 전에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었지… 당신들도 기억하겠지. 유황, 장작더미, 쇠꼬챙이… 아! 다 쓸데없는 얘기야. 쇠꼬챙이 같은 것은 필요 없어.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2. 예술의 눈으로 타자가 갖는 이 새로운 지위를 보여주기 위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내가 나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건 나에 관한 진실을 얻으려면 나는 반드시 타자를 거쳐야만 한다. 타자는 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딴 사람의 눈에 비친 세계에 관해서 알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기형도의 시를 통해 요절한 그의 속내를 이해하는 것’, ‘카프카의 소설을 통해 여린 작가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 ‘고다르의 영화를 통해 현대 문명을 진단하는 영화감독의 시선을 맛본다는 것’, ‘피카소의 회화를 통해 그의 울분에 공명한다는 것’,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고 그의 고독을 맛보는 것’은 바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세계를 달리 표현하는 타자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가.’ 눈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 타인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이 눈이며 이러한 눈이 선한 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과 눈을 되찾아야할 것이다. 거기에 예술의 길이 준비되어 있다.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P. Tillich)는 예언자들이 경험하는 신적 현전(Divine Presence)과 예술적 경험 사이에는 유비(analogia)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예술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한 개인의 체험의 표현”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맥락 하에 나온 말이다. 예술 작품을 보고, ‘계시적 탈자(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하며, 그 작품의 아름다움 안에 ‘아름다움 그 자체(Beauty itself)’가 있었다고 말하는 틸리히는 “그 순간은 나의 삶 전체를 감동시키고, 인간 실존의 해석의 열쇠를 주었다. 그것은 내게 생명의 기쁨과 정신적 진리를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사실 시각예술과는 거리가 먼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개신교는 ‘말’에 묶여 있으며 시각예술과는 극히 의심스런 관계에 있다고 지적하며 “개신교의 역사를 보면, 종교음악과 찬미시에서는 초기교회와 중세교회의 성취를 능가하기도 했으나, 시각예술에서는 그 창조적인 힘을 잃었다. 그러나 청각과 시각은 똑같이 중요한 것”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가 선한 눈을 찾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눈의 예술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 배경에는 우상숭배로 되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영의 본성은 그 현존의 체험에서 눈의 배제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영은 모든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눈의 예술, 혹은 예술의 눈을 간과한 개신교의 역사를 통탄한다. “개신교적 삶의 맥락 안에서, 눈의 예술의 결핍은 역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계적으로는 지지할 수 없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후회스런 것이다.” 3. 구별하는 눈과 공생하려는 눈 사이 나치즘을 공공연하게 대변한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공법학자인 독일의 카를 슈미트의 대표적인 저작『정치적인 것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도덕적인 것에는 ‘선과 악’의 대립, 미학적인 것에는 ‘미와 추’의 대립이 그 본질적인 규준이 되듯, 정치적인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과 대립을 그 본질로 삼는다”는 슈미트의 말에서 적이란 ‘사적인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철저하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물소신학(Water Buffalo Theology)으로 유명한 태국의 일본인 선교사 코스케 코야마(Kosuke Koyama)는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립된 문화, 언어, 종교는 없습니다. 이 연결되어 있음은 생태학, 도덕, 신학의 양식입니다. 나는 ‘내가 내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물음에 단언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내 자매와 형제로부터 분리된 ‘나’는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구별하는 눈을 넘어 공생하려는 눈을 제시한 것이다. 코야마 박사가 언어, 문화, 종교의 경계를 넘어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고난에 동참하려 했던 그의 삶 때문이었다. 시속 3마일로 걸어가시는 분이라는 물소신학을 통해 태국적인 상황 신학인 ‘물소신학’은 불교라는 종교 문화적 전통사회에서 기독교적 토착신학을 발전시키려는 변증법적이며 선교적 신학이었다. 한완상 전 부총리는 한때 원수와의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악이 우리 속에도 존재하듯이, 원수 속에도 선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냉전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확신하듯이 우리만 선이고 원수는 악이라면,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악을 사랑하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와 선한 관계, 곧 평화의 관계를 만들라고 한 것이다.” 사실 사도 바울도 원수를 사랑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효과를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라 말한바 있다. 원래 머리 위에 숯을 얹는 행위는 죄를 강제로 자백받기 위한 고문행위였다. 그런데 바울은 이를 양심을 움직이는 사랑의 행위로 재해석하였다. 쉽게 말하자면, 원수 속에 꽁꽁 얼어붙다시피 한 선한 마음, 곧 양심이 상대방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제대로 작동하게 된다는 진실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 양심의 작동은 원수 간의 증오의 관계를(곧 구별하는 눈) 대화와 화해의 관계(공생하려는 눈)로 바꾼다. 그래서 악순환은 선순환이 되고, 적대적 공생관계가 우호적 상생 관계로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별하려는 눈이 공생을 지향하는 눈으로 변화되어야만 참된 신앙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예수의 눈이 우리들을 바라본다. 4. 예수의 눈: 바보의 눈, 역설의 눈 한완상의 『바보예수』에는 바보들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들, 특히 영악한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바보 예수’의 이야기들이 있다. 예수의 비유 말씀에는 꼴찌에 대한 진한 사랑의 표현이 있다. 탕자 같은 존재, 경멸받았던 이방인, 여성, 죄로 인해 중병에 시달리는 죄인들, 지체장애자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지극한 배려와 사랑은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기득권층에게는 바보스런 편애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심각한 바보다운 선택은 스스로 죽으러 가는 메시아임을 선포한 것이다. 원래 메시아란 칭호는 당당하게 승리하는 지도자, 용기 있게 해방시키는 지도자, 신적 권위로 세상을 통치하는 지도자의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패배하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승리자 메시아로 착각하는 제자들에게 ‘우아한 패배’를 역설하였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이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산 위에서 바보처럼 말씀하셨던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몸소 그 사랑을 실천하시어 바보가 되신 것”, 지금 만신창이가 된 한국 기독교에 필요한 가치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가 우아한 패배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한완상의 말처럼 모두가 승리하려 한다면 우리 안의 악이 더욱 활개 치게 되니(發惡), 우아한 패배를 선택하여 우리 안의 숨겨진 선을 발선(發善)해야 한다. 이때 평화가 깃들며 함께 이기는 상승(相勝)과 함께 사는 상생(相生)이 이뤄질 것이다. 3세기경 외전인 『요한행전』에 의하면 예수는 단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낱낱이 지켜보는 예수의 이러한 감시의 눈은 중세 사람들은 ‘정의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삶은 가난한 이들, 땅의 사람들(암하레츠)을 위한 것으로 보면 예수는 그들의 고통에 단 한 번도 눈을 감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도처의 인간들이 경험하는 숱한 고통 때문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고통이 전하는 아픔과 비통함에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는 마침내 눈을 감았다. 선한 눈을 죽인 인간들의 악한 눈이 이제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암흑과 절망적인 사태에 직면했을 때 책임 있는 철학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시도는 그 사태를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부활의 신앙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암흑과 절망을 구원으로 바라보는 역설의 눈을 가졌다. 어거스틴의 다음의 말은 따라서 역설의 눈을 가진 자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눈을 어떻게 떠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든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존재와 똑같은 존재가 된다. 그대가 땅을 사랑하는가? 그대는 땅이 될 것이다. 그대가 신을 사랑하는가? …… 그대는 신이 될 것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경성대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 교수)
    • 문화
    201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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