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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9 : 깡통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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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읽고 그 속에 감춰진 신학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펼치다 보니, 안목과 시선이 날로 새롭게 변해가기도 하지만 기발하거나/엉뚱해지기도 한다. 여기 엉뚱한 깡통 철학이자 깡통 신학 몇 가지를 소개해보니 독자들은 웃어넘기시기 바란다.
1. 곡선의 신학
▲ 곡선과 직선
2016년을 10년 정도의 근시적인 눈으로 보면 ‘사드’라든지, ‘경주 지진’이라든지 ‘최순실과 K스포츠, 미르재단’이라든지 하는 것으로 역사에 남겠지만, 100년 정도의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에서 인간이 4대 1로 졌다’는 것과 또한 ‘포켓몬고 열풍’을 들 수 있다. 바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2016년 국민미래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1등만 살아남습니다.”라고 말한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등의 신산업이 주도할 미래는 가장 빨리 관련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나 국가가 계속 시장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자동화, 융합화, 연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자동화는 가속화될 것이고, 개별적으로 발달한 다양한 정보기술은 융합되어 연결될 것이며 생각지도 못한 변화와 혁신이 일상화되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아날로그의 여유로운 곡선’을 ‘디지털의 빠른 직선’으로 만든 것이다. 디지털의 직선은 자동화와 가속화를 상징한다. 모든 ‘실재적인 것’은 시공간의 4차원을 가지고 있지만, 디지털화를 통해 차츰 4차원에서 움직이는 입체는 조각품의 세계(시간 없는 입체)→ 그림의 세계(깊이 없는 평면)→ 텍스트의 세계(평면 없는 선)→ 컴퓨터화 된 세계(선 없는 점들)로 요약되는 자동화와 가속화, 그리고 디지털화의 추상게임을 시작한다. 이렇게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변화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양적 성장은 당연하고, 더 많은 양을 획득하려면 더 빨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속도를 내야 한다. 이처럼 속도와 양적 성장과 목표지향적인 직선의 가치관이 오늘 화살처럼 창처럼 사회와 세상과 교회와 교인들, 특히 목회자들에게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본래 곡선이었다. 곡선인 자연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직선의 마음은 급하게 지식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며 획일적이다. 하지만 곡선의 마음은 때를 기다리며 곰탕과 같이 우려내어 지혜를 잉태시킨다. 따라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o Gaudi)는 이렇게 말한다.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신이 만든 선이다.”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F. R. D. Hundertwasser)도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강조하면서 “직선은 신의 부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하나! 성경은 하나님의 곡선을 인간이 직선으로 만든 사건들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직선과 같은) 인간의 교만과 탐욕은 속도와 성장의 다른 이름으로 (신(神)인) 곡선을 지워버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선의 획일성과 가속성에 곡선으로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만하고 강팍한 직선들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2. 거미 신앙
“스피노자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미 한 마리가 왕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내 스피노자가 길거리에서 동종의 거미를 구해와 그만의 세계에 개입시킨다.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와의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의 세상에서 ‘왕’이 되기 위해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스피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한 마리를 거미줄의 세계에 집어 던진다. 그 거미들은 파리를 잡아먹고 다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 긴호랑거미
종교적 박해와 빈곤 그리고 불치의 질환과 항상 싸워야 했던 고독한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그 불행한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화와 삶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평범한 실천 속에서 조용한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거미가 집을 짓는 과정을 바라보며(혹은 거미들의 싸움을 보면서) 기뻐하곤 했는데, 거미를 통해 자신의 철학을 엮어가는 큰 보람과 기쁨을 찾은 것은 아닐까?
인간은 거미처럼 자유의지로 자신의 세상(비록 거미줄 위의 세상이긴 하지만)을 만들며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어떤 ‘의지’(위 인용구에 의하면 스피노자를 통한 동종 거미같은 것이긴 하지만,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하다.)와 대립하며 충돌하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비극적 존재이기도 하다. 스피노자의 거미의 자유의지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철학적 동물은 올빼미가 아니라 거미이다.”
사실 거미는 빛을 보지 못한다. 어떠한 빛의 형상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미는 자신의 다리로 세상과 소통한다. 촉각으로 전해오는 미세한 파장에 반응해서 소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거미의 집짓는 과정이나 동종간의 싸움 등에 흥미를 느낀 스피노자와는 달리 거미의 타고난 비자발적 신체구조에 흥미를 느낀다. 들뢰즈의 말을 들어보자.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 이 거미는 오직 기호에 대해서만 응답한다. 그리고 미소한 기호들은 거미에게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 기호들은 파장처럼 거미의 신체를 관통하고 그로 하여금 먹이에게로 덤벼들게 만든다. (…) 거미줄과 거미, 거미줄과 신체는 하나로 접속된 기계이다. (…) 비자발적인 감수성, 비자발적인 기억력, 비자발적인 사유는 (…) 매순간 강렬한 전체적 반응들 같은 것이다(『프루스트와 기호들』277-278).”
스피노자의 인간 세상의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기도 한 타자의 의지, 혹은 신의 의지는 들뢰즈의 말로는 ‘홈이 패인 공간, 정주적 공간,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되는 공간’인 것이다. 이에 대립되는 것으로 들뢰즈는 ‘매끈한 공간, 유목적 공간, 전쟁 기계가 전개되는 공간’을 언급한다. 따라서 들뢰즈는 고정 불변의 이상향(이데아나 천국)을 향해 뻗어 있는 홈-패인 길(이것은 직선일 것이다.)을 건설하는 철학을 비판하며 올빼미로 상징되는 전통의 철학서와는 다른 글쓰기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들뢰즈의 거미의 철학은 비자발적 노출에 놓여진 감각을 중시하고 따라서 매순간 생동하는 시간을 살아가는 거미의 차이 생성을 찬양한다. 그것은 홈 패인 공간이 아니라. 매끄러운 공간으로 미끄러져 가는 공간, 유목적 사유, 노마디즘인 것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둘!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율법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홈 패인 직선의 공간 속에서 그것을 가로질러 미끄러져간 사유와 실천의 기록이 아닐까? 따라서 예수님의 신앙을 거미의 신앙이다. 홈 패인 직선의 획일성과 고정 불변한 이념을 곡선으로 미끄러져 튕겨져 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주적이며 국가 장치에 의해 설정된 이 폭압적인 자본주의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기 위해 다시금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3. 색깔 목회
우리말 가운데 ‘새빨간 거짓말’은 흰 것을 오염시키는 색깔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표현이다. 서양은 ‘하얀 거짓말(white lie)’을 선의의 거짓말로 표현한다. 기색(氣色), 본색(本色), 생색(生色), 특색(特色), 정색(正色), 이색적(異色的)이라는 말도 색깔을 통한 정서를 보여준다. 조선의 선비들은 육체와 정신을 구분하여 남성을 양(陽)으로 여성을 음(陰)의 존재로 보았다. 따라서 육체적 본능을 천시하였는데, 여색(女色)을 밝힌다거나 주색잡기(酒色雜技), 곧 술과 여자와 노름에 빠져 패가망신한 사람을 천한 인간으로 여겼다. 반면 재색(才色)을 겸비한 미인과 같이 긍정적인 표현들도 동시에 존재한다. 푸른색에 관련하여 독야청청(獨也靑靑), 청춘(靑春), 청상과부(靑孀寡婦), 청출어람(靑出於藍), 청산유수(靑山流水)라는 말들은 색깔이 주는 상징이 문화의 경험을 통해 맺어진 정신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이하 성기혁,『색의 인문학: 색으로 엿보는 문화와 심리산책』(교학사, 2016) 참조).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같이 색을 보는 포유류는 원숭이 밖에 없다고 한다. 따라서 강아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빨강 옷을 입힌다거나 노랑 밥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주인의 만족이지 강아지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이제 색깔의 의미를 살펴보자.
자동차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색은 노랑이다(따라서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의 색이 노랑색). 유아나 어린이가 탑승하는 자동차를 노랑으로 정해 놓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 노랑은 가장 밝게 느껴지고 어떤 환경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색이기 때문이다.
진찰실에서 진료하는 의사들은 흰색 가운을 입지만 수술실에 들어갈 땐 초록색 수술복을 입는다. 수술복이 흰색이라면 옷에 묻은 선명한 피가 의사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초록 수술복에 피가 묻으면 갈색으로 보인다. 초록은 빨강의 보색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초록은 피로를 회복하고 마음을 안정시킨다. 사실 눈의 피로와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는 초록은 자외선과 적외선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눈이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색이기도 한다.
남(藍)색이라고 부르는 쪽빛은 파랑의 백미이다. 영원한 하늘의 색이고 그리움의 색이다. 동시에 쪽빛은 청결, 심원, 성실, 창조,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파랑은 지성과 연결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을, 감성보다는 이성을 내세우는 색이기도 하다. 미국인의 이상이자 젊은 대통령의 상징인 케네디가 짙은 파랑 정장차림으로 대중 연설을 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첨단 기술을 내세우는 회사나 통신회사, 신용을 생명으로 여기는 은행들은 파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파랑은 식욕을 억제하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색으로 요리한 음식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음식의 배경색으로는 아주 좋은 색이 바로 파랑이다.
파랑의 심리적 반대색인 빨강은 자극적이고 활동적이며 의지력을 특징으로 삼는 색이다. 빛의 스펙트럼(빨주노초파남보)의 첫 번째에 위치하는 빨강은 애정과 흥분, 진취적 기상, 신체적인 힘, 강인함과 연결된다.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과 욕망도 빨강이 지닌 독특한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빨강은 귀신을 물리치는 색으로도 최고라는 것이다. 동짓날 문설주에 팥죽을 뿌리거나 장을 담글 때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띄우는 것 또한 빨강의 적극인 에너지로 귀신을 물리치겠다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귀신은 어둡고 습하고, 죽음과 음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빨강은 양기가 왕성한 색으로 태양과 밝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남쪽을 뜻하는 양의 색인 빨강을 귀신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 마지막 10번째 재앙인 장자 죽음에서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어린양의 빨간 피가 아닌가!
회색은 빛의 강약에 의해서 생긴다. 어두움과 밝음의 중간에 서는 회색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성향을 보여준다. 단아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색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에서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삼독(三毒), 곧 탐진치(貪瞋痴, ‘탐욕’과 ‘분노/노여움’과 ‘어리석음’)를 경계하기 위한 승려의 옷은 회색이다.
여기서 깡통신학 셋! 색깔 신학은 예수님께 옷 한 벌 맞춰드린다. 노란 목도리에 회색 옷을 입혀드리고, 그 위를 파란색과 빨간색을 연결한 태극 모양의 겉옷을 걸친 패션인데, 서 계신 배경은 초록 들판이다. 이렇게 옷을 입으신 예수께서 거미와 더불어 매끄러운 곡선의 길을 가시며 우리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색깔 목회가 아닐까?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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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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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탁지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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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이단 전문가 탁지일 교수의 신간 <교회와 이단>(두란노, 2016)이 발간됐다. 저자는 사회와 이단이 교회에 던지는 설득력 있는 질문에 눈을 열어 직시하며 한국 교회의 잘못된 모습과 변형된 정체성을 지적한다. 개혁의 필요성을 교회가 운명으로 받아들여, 비도덕적이고 비상식적인 교회가 정결한 개혁의 첫 발을 내딛기를 바라고, 이단 문제가 온전한 치유와 회복을 이루기를 바라는 저자의 의도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탁지일 교수는 현재 부산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현대종교> 이사장 겸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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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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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18] 제도가 바뀌면 여성리더십의 역할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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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동등’은 예수님의 새 창조 질서이다
아직도 상당수 한국 교회에는 부끄러운 사실이 하나 남아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창조 기사에 나타난 남자와 여자는 평등성에 기초하여 창조되었다. 그렇지만 구약의 세계에서 여성은 분명히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당시 유대의 문화가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유대의 문화와 관습을 뒤집었다. 여성의 지위를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예수님의 말씀 곳곳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내세운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유대 회당과는 달리, 여성의 활동이 남성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저자는 그동안 보수적인 교회가 여성을 굴종시키기 위해 내세운 성경 구절에 대해 신학적 오류 등 문제점을 지적하며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신약의 주된 흐름은 남녀의 동등성과 상호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복음을 왜곡하여 선포할 때, 교회는 해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억압을 가져온다”고 결론짓는다.◈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 저자인 김세윤 교수는 현재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신약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바울 복음의 기원》 《바울 신학과 새 관점》 《구원이란 무엇인가》 등 다수가 있다. 두란노, 2016. 8,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나라의 양성 평등지수는 얼마나 될까? 겉으로 보기에는 여성 대통령을 탄생시킨 나라지만,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의 젠더격차지수는 조사대상 145개국 중에서 115위였다. ‘유리천장’ 지수도 OECD 국가 중 꼴찌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떨까?
#여성 안수, 개인적으로는 찬성하지만…
김길구 : 최근 들어 한국 교회에는 영성 시대의 도래와 함께 가부장적 남성 위주의 문화에서 부드럽고 포용적이며 관계지향적인 여성문화의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김현호 : 얼마 전 서점에 오신 모 보수교단의 원로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성 안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개인적으로는 찬성하지만 교단 전체적인 분위기는 아직도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신학적으로 절벽’이라는 말에,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수성 : 단적으로 교회가 역사의 흐름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이끌어가던 기독교가 이렇게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처지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 최근 들어 여성정치인의 부각은 시대적 요구였습니다. 세습 정치와 부정부패, 과다한 권력욕 등 남성성의 정치적 현황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은 여성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여성리더십의 부각은 이런 시각에서도 긍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우리나라 교회에서 아직도 여성 목회자와 장로를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는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몸은 교회에 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겉으로는 성경말씀을 내세우는 것 같습니다.김길구 : 10년도 더 지났습니다만, 모 교단 증경총회장을 역임했던 어떤 목사님이 모교 신학교 채플 시간에 “여자들이 기저귀를 차고 강단에 올라가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을 해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같은 생각을 가진 교인이나 지도자들이 많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28절. [출처: www.kingjamesbibleonline.org]
#여성목회자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 요인김수성 : 여성 목회자를 인정하고 있는 교단도 생색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장 통합의 ‘2014년 교단총회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목사 1만 7468명 중 여성목사는 1,477명으로 8.5% 수준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중 임시목사 298명, 무임목사 158명 등으로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한 교역자가 30%가 넘습니다.김길구 : 예장 통합은 1995년 총회에서 여성의 안수를 결의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2012년 총회 자료에 참석한 대의원 1,500여명 가운데 여성은 단 14명이었고, 여성목사는 4명에 불과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좀 더 앞섰다고 하는 기독교 감리회도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김현호 : 몇 년 전 미국장로회에서 교인 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여성목회자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전체의 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여성 장로들도 3%만이 지지하고, 남성 장로의 경우 한 명도 없었습니다. 대다수 교인이 하나님을 남성으로 이해한다고 응답했는데, 이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 아닐까요?김길구 : 우리나라에서 신학대학원 교수와 신대원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는 또 다른 설명을 합니다. 여성목회자에 대해 누가 편견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여성평신도라는 응답이 28.9%로 가장 많았습니다. 다음으로 남성목회자(25.5%), 담임목회자(20.1%) 순이었습니다. 물론 교인들을 대상으로 직접 설문조사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응답내용이라 하겠습니다.김현호 : 여성목회자 스스로의 노력도 한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남성목회자에 뒤처지지 않음에도 목회 현장에서 일정 직책이나 임무에 만족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이너스 요인을 작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서도 여성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봅니다.김수성 : 최근 젊은 여성 교인이 대폭 감소하고 있다는 자료가 나왔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여성연합회에서 20~40대 교회 여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교회 내에서 불평등한 성역할이 가장 큰 이유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김길구 : 여성리더십 스스로 ‘착한 그리스도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여성들도 남성 못지않은 놀라운 믿음과 담대함으로 순종의 미덕을 넘어 지도력을 발휘해 왔습니다. 드보라나 훌다 같은 구약시대의 여선지자, 안나와 루디아 등 초대교회 여성 지도자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복음의 기본정신은 혁신이었다김현호 : 이 책 저자는 남녀동등을 성경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성경 구절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제시합니다. 다른 어떤 성경 구절도 이 구절을 뛰어넘지는 못한다고 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말씀은 예수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이죠.김길구 : 예수 복음의 기본정신은 혁신이었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할 때 교회는 항상 하나님 나라 구원의 현실화로 노예 해방과 여성 해방, 그리고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만민의 인권이 증진되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 모든 차별을 무너뜨렸습니다. 김수성 :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보면, 기득권층이 자기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김현호 : 저자인 김세윤 교수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은 증인이 될 수 없었는데, 예수 부활에 대해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이들의 증언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여 성서에 기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여성의 동등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성 : 문제는 교회의 실천의지입니다. 몇 년 전 장신대에서 지난 10년 동안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여학생 1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여성목회자를 회피하는 이유로 남성 위주의 목회문화라는 응답이 48.8%였습니다. 이어서 여성목회자에 대한 불신이나 편견이 19.9%, 출산 및 육아 16.9%로 나타났습니다. 그나마 오래 전 감리교에서 예시했던 부부목회일 경우 신도들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것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목회자에 대한 편견, 자체 노력 등도 시스템이 변하면 함께 변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감리교는 성별·세대별 할당제(15%) 의무화를 통과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성목회자와 여성장로의 참석이 대폭 늘어날 것이고, 그에 따라 이들의 의욕과 역할도 달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개교회에서도 여성목회자 못지않게 여성장로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교회에서 남녀동등을 이룩하는 첩경일 것입니다.다음에는 박경수 교수 편저 《종교개혁, 그 현장을 가다》(대한기독교서회, 2013)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여교역자 입을 열다》 / 오인숙 외 / 새물결플러스《한국교회와 여성》 / 이덕주 외 /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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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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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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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비 영화와 좀비의 실체
좀비가 출몰하고 있다. 마니아층을 넘어 국내외 게임, 소설, 영화의 인기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공포영화나 문학의 하위 장르 주인공으로 여겨지던 좀비가 극장의 은막과 TV 채널, 서점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영화 <부산행>(2016)을 통해 이제 서울과 대전을 점령하고 부산을 향한다.
좀비 영화 장르를 처음 정립한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데뷔작이자 ‘시체 3부작’의 첫 영화 인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 나오는 좀비들은 혐오감을 주는 외형과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부러져도 멈추지 않고 사람들을 물어뜯어먹기 위해서 다가오는 것으로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비록 최근의 좀비처럼(2013년 작 <월드 워Z>와 <부산행>) 속도감은 없지만 당시 미국인들에게는 이 흑백 영화의 좀비는 마냥 허구 속의 살아있는 시체가 아니었다. 미국은 외부적으로 소련과 냉전 중이었고 베트남에서 전쟁을 벌이는 등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흑인 민권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전쟁 반대 시위로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따라서 좀비들은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미국 사회를 습격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좀비 영화는 영화 내적으로는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투영하고 비판하는 고도의 우화장치들을 보여줌으로 호러물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1)
로메로 감독의 두 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새벽>(1979)은 좀비 영화의 전설이다. 2)
첫 번째 흑백 영화와는 달리 두 번째 영화에서는 총천연색과 환한 조명을 통하여 도심 한가운데 대형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쇼핑몰을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은 흡사 백화점을 쇼핑하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 체제와 중산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읽을 수 있는 역작이다. 좀비를 통해 점점 더 난폭해지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공포스러운 속성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3번째 시체 3부작인 <시체들의 낮>(1985)은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렬하고 복잡한 휴먼 드라마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캐리커처와 욕설, 살육만이 남았지만(가장 고어씬이 강한 작품), 좀비들을 학습시키려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가령, ‘정중한 행동을 하면 보상을 받는다’라는). 사실 좀비는 주요 장기들을 다 제거했는데도(위가 없는데도) 먹을 것을 갈망한다. 따라서 문제는 뇌와 원초적인 본능인 것이다. 아무튼 조지 로메로의 좀비 영화가 잔혹한 취향의 공포 장르였다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와 <28일 후>(2002), <월드워 Z> 등 최근 좀비 영화는 인류의 종말과 연결되는 바이러스 재앙 영화로 진화해 버렸다. 3)
한국의 좀비 영화라면 2010년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이웃집 좀비>(오영두 감독 등)를 뺄 수 없다.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퍼진 ‘좀비 바이러스’가 서울 전역에서 발생하자 좀비 색출을 위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정부와 ‘감염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서민들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부산행>처럼 좀비를 폭력의 대상으로, 마동석의 ‘슈퍼파워~ㄹ!’로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4)). 따라서 기존 헐리우드의 좀비처럼 무참히 찢겨지고,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이웃집 좀비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맘몬숭배 시대에 대형정당(새누리, 더민주), 대형마트, 대형교회, 대형기업(재벌)이라는 골리앗이 존재하는 이때 좀비는 허구의 괴물이 아닌 실체를 가진 작은정당, 구멍가게, 미자립교회, 중소기업의 이름으로 출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의 뜻은 ‘호모 사케르’이다.
2. 자본주의 좀비서사 : 호모 사케르
헤겔과 하이데거, 데리다로 부터 언어와 존재에 관해, 그리고 벤야민과 슈미트를 통해 역사와 법, 정치 신학을 수용하고, 아렌트와 푸코를 통해 전체주의와 생명정치를 사유한 조르지오 아감벤(G. Agamben)은 유기(遺棄)된 채로 존재를 드러내는 인간, 곧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이야기 한다. 호모 사케르는 말 그대로의 성스런 인간(sacred man)이 아닌, 벌거벗겨진 생명(bare life)으로 살해는 가능해도 희생제로는 드릴 수 없는 것, 가령 소, 양과 달리 지렁이와 벌레 등을 뜻한다. 죽여버릴 수는 있어도 희생으로 쓸 수 없는 것.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다. 물론 아감벤은 이 용어를 무젤만(Muselmann, 무슬림)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가령 용산에서 불에 타 죽은 존재들로부터 시작하여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 세월호에 갇혀 죽어간 아이들, 지하철 역 안의 노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재래시장 상인들, 지체 장애우 등으로 확장된다.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들이며, 예수께서 친구로 부르며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던 생명의 동지들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 범주는 ‘동지-적’(칼 슈미트의 구분처럼)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zoe)-비오스(bios) 5),‘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이다. 따라서 서양 정치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신에게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해 내며, 그것을 자신과 대립시키는 동시에 배제함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인간이 좀비를 배제하듯 자본주의가 창출한 좀비는 자본주의의 혜택을 받은 대형 골리앗들(대형정당, 대형마트, 대형교회와 대형기업)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 그들에게 좀비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맞았던 좀비가 노동자 계급출신으로 묘사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자유롭게 노동력을 팔면서도 사물로 변해버린 노동자의 형상은 좀비와 닮았기 때문이다.
3. 사라지는 매개자
영화 <이웃집 좀비>는 2010년 바이러스로 인해 좀비로 초토화된 서울을 그리고 있다.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좀비 감염자를 찾아가 제거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감염될 위험도 무릅쓰고, 가족이었던 좀비들을 숨겨주고, 먹여주며, 오직 함께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모은다. 가령 두 번째 에피소드 인 ‘도망가자’에서는 좀비가 되어가는 남자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을 보여주고 있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남자는 여자가 떠나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다. 좀비가 되어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차라리 그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고결한 사랑을 보여준다. “Love Conquers All”
세 번째 에피소드인 ‘뼈를 깎는 사랑’에서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좀비가 되자 신고하지 않고 집에 가두어 자신의 신체를 희생하여(특히 자신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장면을 보라) 어머니의 생명을 부지하는 딸의 사랑을 보여준다. 피를 먹어야 하는 좀비가 되었지만, 딸에게는 그 좀비는 어머니였고 지켜야 할 대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결국 <이웃집 좀비>에서 인간들에게 좀비는 제거 대상이기 전에 사랑을 하고, 밥을 주고, 인정도 베풀어야 할 애인이며, 엄마이고, 이웃사촌이었다. 이웃집 좀비는 그렇게 탄생된다. 생긴 건 달라도 이웃사촌인 것이다.
레닌과 헤겔을 부활시키고 싶은 슬라보에 지젝(S. Zizek)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 헤겔의 도움을 받아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개념을 현실 분석의 도구로 사용한다.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퇴장하는 개념을 뜻하는데, 지젝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때의 자코뱅이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코뱅은 구체제(Ancien Regime)를 부수어 새 체제의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의 석우(공유 분)와 상화(마동석 분)가 그렇지 않은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주인공 벤을 죽임으로 정치적 현실과 사회적 갈등을 드러내었다면, <부산행>은 석우와 상화의 사라지는 매개 역할을 통해 모성과 순수성이라는 한국적 감성으로 이끌며 관객 천만을 (불행하게도) 돌파한다. 예수의 죽음 역시 그의 부활을 기리는 이들에게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성령의 등장을 이끄는 매개자였다. 대형들이 판치는 세상에 교회가, 교단 총회가, 교계의 어른들이, 소금이 짠맛을 음식에 남겨주고 사라지듯, 아니 상화가 그렇게 좀비가 되어가듯, 이웃집 좀비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3)”
----------------------------------------------------------------------- (각주)
1) 가령,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성적이고 지적이며 리더십이 있는 데다 잘 생기까지 한 주인공 벤(드웨인 존스 분)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안도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민병대원들에게 사살된다. 그들은 벤이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벤을 좀비로 간주하여 사살한다. 왜냐하면 벤이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아이와 임산부를 살려줌으로 복잡한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현실을 순수성과 모성으로 봉합한다.
2) 잭 스나이더 감독의 2004년 작 <새벽의 저주>는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며, 같은 해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도 이 작품의 오마주 영화이다.
3) 반면 좀비 영화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모티브를 담아낸 영화로 1993년 브라이언 유즈나 감독의 <리빙 데드 3>가 있다. 공포와 멜로 장르를 결합한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성 좀비와 인간 남성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고어 영화의 잔혹함에 슬픈 로맨스를 결합하였다. 잔혹하고 노골적인 고어 취향 때문에 대중적인 인기 대신 컬트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웜 바디스>(2012)가 있다.
4) <부산행>이 재미있는 3가지 이유에 관해 김세윤 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첫째 마동석, 둘째 기차, 셋째 우리가 부산행 KTX를 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마동석은 관객의 한 줄 평, “<부산행>은 좀비가 마동석을 피해 부산으로 도망가는 영화”라는 말처럼 ‘정의로운 근육’이었다.
5) 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생명을 뜻한다. 곧 생체활동을 통해 발현되는 생명이며 비오스는 한 사회 내에서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위치 혹은 태도를 통해 발현되는 생명을 말한다. 사실 그리스 아테네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생명은 비오스로서 생명이었다.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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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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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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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 영등포산업선교회 60주년 기념도서 ‘인명진을 말한다’가 출간됐다. 지난 7월 4일 초판이 발행됐다.정의화 제 19대 국회의장을 비롯해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그리고 고성국 정치평론가,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임현모 한·호기독교선교회 상임이사 등 교계와 교육계, 정치계 인사 29명이 공동집팔한 책이라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인 목사는 1970년대부터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상황에서 하나님의 정의화 평화를 이루는데 온 몸을 던져 동참하며 노동운동에 앞장서왔다. 경기노회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위가 1958년 4월 19일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창립하여 60년의 역사와 더불어 인 목사는 40년 목회(갈릴리교회 담임)와 반독재,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이 시대의 예언자적 사명에 뛰어난 공로를 높이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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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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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 17] “목사답지 못한 목사가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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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길 위에서 찾은 십자가의 따뜻한 위로
저자는 문득 길 위에서 십자가 형상을 하나 보았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서 지금 여기, 내 삶 주위에 십자가가 있음을 깨달았다. 카메라 렌즈 속에 모습을 드러낸 십자가는 다양하다. 깨진 보도블록 틈새로 가만히 돋아난 풀잎을 안고 있는 십자가, 활짝 핀 꽃잎에서 향기와 함께 드러난 십자가, 바위 틈새에 고인 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십자가, 가시 철조망 십자가 등.갖가지 모양의 이들 십자가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위로를 받고,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를 듣는다. 십자가를 너무 멀리서만 찾은 우리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올바른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되짚어본다. 십자가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아무 조건 없이 용서받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사랑이 완성됨을 되새기게 한다.이 책은 혼자서 읽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권 사서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가만히 소리 내서 읽다가, 누군가 목소리 좋은 사람이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낭랑하게 읽어준다면 더욱 좋겠다는 것을 깨달았다.“공원 산책길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십자가를 만났습니다. 넓적한 검은 돌과 초록 잔디가 어울려 역동적으로 춤추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이 좋은데 어떡합니까!’하며 예수님 손을 잡고 덩실덩실 춤추고 싶었습니다(24쪽).”◈ 《길 위의 십자가》 || 저자인 최병성 목사는 환경운동가, 생태교육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 《복음에 안기다》 《들꽃에게 귀 기울이는 시간》 등이 있다. 이상북스, 2016. 13,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입니다.
#짙은 어둠속에서 홀로 빛나던 십자가김길구 : 며칠 전 새벽 2시께 문득 잠에서 깼습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다시 잠들기가 어렵더군요. 그래서 거실로 나와 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들면서 날이 훤하게 밝을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습니다. 피서 가는 분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하고 싶습디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는지요?김현호 : 저는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저자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독서캠프 일정 중 하나로 강원도 영월로 최병성 목사를 찾아갔는데,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을 하나씩 벽에다 비춰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짙은 어둠 속에서 오로지 십자가만이 홀로 빛났습니다. 그날 밤의 십자가는 평생 잊기 힘들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의 경우는 첫 글이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십자가는 ‘짐’이 아니라 ‘쉼’입니다. 십자가는 … 세상으로부터 지친 내 영혼이 위로받고 안식받는 참된 쉼터입니다.” 보도블록 사이의 깨진 틈에서 피워낸 작은 생명의 이파리를 찍은 사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도 십자가를 찾을 수 있구나! 책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김길구 : 저는 신앙적 감수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책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빌딩 현관의 신발털이, 녹아내리는 시냇가의 살얼음, 바위틈에 고여 있는 물, 구름, 꽃잎 등 우리가 흔하게 마주치는 일상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재로 하여 다양한 주제로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김현호 :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우리가 전혀 다른 곳으로 십자가를 찾을 수 있게 합니다. 교회의 첨탑 위에 우뚝 선 십자가나 사람들의 목걸이에 달린 십자가에서, 생명이 피어나는 현장의 십자가, 사람들에게 짓밟히면서도 사랑을 놓치지 않는 십자가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김길구 : ‘길 위의 십자가’라는 책 제목은 중첩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십자가라는 단순한 의미에다, 교회 안에서만 십자가를 찾는 우리 기독교의 현실에서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더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 감수성은 개인 묵상은 물론, 사회적 영성을 위해 부르짖던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 로마의 콜로세움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대리석 기둥 하단에서 발견한 십자가 흔적. 누구를 위해 새긴 십자가였을까?
#기독교 본질은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김수성 : 이 책의 편집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의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하다가 점차 변화해야 함을 제시하고, 십자가를 따르는 길은 예수님의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심의 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온전한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함을 힘주어 이야기합니다.김현호 : 내가 아는 한 저자는 바보 목사입니다. 교회 목회를 포기하고, 멍들고 찢긴 이 땅의 자연을 지키고자 목숨을 건 자연 생태 목회자이기 때문입니다. 강 상류에 건설하려던 쓰레기매립장에 대한 법적 투쟁, 쓰레기 시멘트의 비밀을 들춰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치열하게 살아가면서도, 숲길을 걸으면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길섶의 풀 하나 벌레 하나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는 창조의 섭리를 따르는 목사이기도 합니다.김수성 : 그렇기 때문에 초심을 유지하면서 환경운동과 투쟁을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치열한 투쟁만을 해온 사람의 경우, 나중에 초심을 잃어버리고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저자가 투쟁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습니다. 기성교회를 향해 쓴 소리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김길구 : 기독교 영성을 바로 세우려면 ‘십자가’뿐이라는 지적이죠. 교회에서조차 십자가가 도구화된 세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겸손한 자세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이에 더하여 자연 앞에서 겸손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스스로에 대해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김현호 : 영월에서 최병성 목사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풀잎에 맺힌 이슬 사진을 보여주면서 가능한한 몸을 낮추어야 이슬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려면 스스로를 낮추어야, 아니 사도 바울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려야’ 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김길구 : ‘일상 속에서의 거룩성’이 부족한 것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란 지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길 위의 십자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김수성 : 이 책을 읽은 후 내게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우선 주위에서 끊임없이 십자가를 찾는 버릇이 생긴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과연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설교 쇼핑’ 등 말씀도 소비재로 전락김현호 : 저자가 최근에 올린 SNS에 이 책과 관련된 내용이 있습디다. “이렇게 목사답지 못한 목사가 최근 《길 위의 십자가》 신간을 출간했습니다. … 십자가를 설명하는 책인데, 목사다움을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달콤한 이야기만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십자가 안에 달콤한 솜사탕 같은 이야기도 담겨 있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십자가이기에 따름과 변화라는 입에 쓰디쓴 보약을 처방해야했습니다. 그러나 그 보약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입에 대자마자 토해버리고, 십자가의 쓴 보약이 덜 필요한 분들은 맛나다고 즐겨 드시고 있습니다.”김길구 : 최근 ‘설교쇼핑’이란 말이 나돕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만 순례하는 신자들의 행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핵심인데, ‘설교’도 ‘쇼핑할 수 있는 소비재’로 변모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망각하고, 듣기 좋은 설교만 가려가며 들으려는 쇼핑족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교회의 현주소를 이야기합니다.김수성 : 주위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무언가에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김현호 : 최병성 목사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니가 목사야? 목사면 목사답게 살아!” 그러나 “목사답지 못한 삶은 배부름의 길이 아니라 앞뒤 살펴 다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고소와 소송뿐 아니라 죽인다는 협박도 날아왔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최 목사는 “이 길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기에, 아픔 많은 이 세상에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기에, ‘네’ 순종하며 기쁜 마음으로 달려갈 것입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김길구 :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그 나라는 이미 너의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안’에는 너희 ‘가운데’라는 뜻도 있지요. 믿음의 눈으로 ‘일상에서의 거룩성’ 회복을 통하여 은혜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에는 김세윤 교수의 《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 성경적 남녀 관계와 여성 리더십》(두란노,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여러 모로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복음에 안기다》 / 최병성 / 새물결플러스《꽃과 복음》 / 전병호 /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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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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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7 :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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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위해 태어났으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 섬세하게 직조된 기쁨과 슬픔은 신성한 영혼을 위한 안성맞춤의 옷, 모든 비탄과 갈망 아래로 비단으로 엮어진 기쁨이 흐른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중 일부
1. 서로 잡아먹는 비굴한 울혈(鬱血)사회와 감정의 윤리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울혈(鬱血)사회’이다. 국민이 화병에 걸린 사회라는 것이다.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는(아니 나는) 쉽게 화를 내고, 남 탓을 일삼지 않는가? 나아가 신문 사회면(아니 1면)은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저지르는 증오범죄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윤평중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공정성과 부당한 대우”가 그 원인이라고 한다.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사, 2014)에서 우리 시대 가장 급진적이고 예외적인 지식인인 박노자 교수는 지금 한국 사회를 ‘전례 없는 더러운 시대’,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라고 말한다. 사회적 연대 의식은 증발하고, 저마다 자신과 몇 안 되는 피붙이들의 잇속만 추구하고,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각자도생의 사회라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사라져가는 곳’이며,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이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유신 때보다 더한 ‘공포를 먹고 사는 사회’라고 본다.
박노자 교수는 『당신들의 대한민국1/2』(한겨레출판사, 2001/2006)에서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뿌리 깊은 전근대성도 질타하고 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근대적이고 극단적인 우상숭배’라는 교집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라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적극적인 폭력을 가르치는 군사문화, 굴종과 타협을 강요하는 대학 사회의 현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우리’의 선 밖으로 내몰고 있는 인종주의적 편견 등은 박노자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제도적·사회적 폭력에 대해 울부짖고 있다.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말한 고 신영복 교수의 말은 지식과 감정과 실천의 문제를 잘 요약한다. 감정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칸트(I. Kant)의 냉철한 이성과는 달리 감정을 긍정하고 지혜롭게 발휘하자고 이성을 주장했던 스피노자(B. de Spinoza)는 ‘이성의 윤리학’이 아니라, ‘감정의 윤리학’을 옹호했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의 말이다. “우리들의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즉 우리는 타자를 만났을 때 기쁨과 슬픔 둘 중 하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더 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반대로 자신이 불완전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전자를 기쁨의 감정이라 하고 후자를 슬픔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이한 상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슬픔을 주는 관계를 단절하고, 기쁨을 주는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인간의 행복한 삶일 것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의 감정의 윤리학이 기쁨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까닭이다.
▲ 낙타, 사자, 어린아이
2. 르상티망의 낙타와 저항하는 사자
스피노자는 분노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분노(indignatio)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좀 더 명료하게 말한다면, “우리와 유사한 대상에게 불행을 준 사람에 대해 분노한다.”라는 것이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y)의『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느꼈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아라. 그리고 그 돈의 도움으로 나중에 전 인류와 공공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라. 네 생각은 어때, 하나의 하찮은 범죄가 수천 개의 선한 일로 무마될 수는 없을까?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켜 수천 개의 생명을 부패와 맞바꾸는 건데, 사실 이거야말로 대수학이지 뭐야! 게다가 저울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폐병쟁이에 멍청하고 못된 노파의 목숨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 아니 그만도 못한 목숨이야. 남의 목숨을 좀먹고 있거든.”
『죄와 벌』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분노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냐라는 창녀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분노는 타당한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한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냉혹한 사회 구조를 보고 그것을 향한 비판적 실천으로 나가지 못한 시대적 한계도 포함한다.니체(F. W. Nietzsche)는 권력의지에 의해 촉발된 강자의 공격욕에 대한 약자의 격정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불렀다. 사전적 의미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원한, 분노,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더 적극적으로 약자가 강자를 ‘진정한 선이나 삶의 가치를 모르는 불쌍한 인간’이라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인류는 원래 도덕적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행위의 기준은 고귀와 비천이라는 미적 가치관뿐이었다. 강자에 대한 반감이 이러한 가치관을 전도시켜 이른바 도덕적 선악의 관념이 생긴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심리가 바로 르상티망”이라고 한다.
기독교 도덕관의 핵심은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약자의 르상티망을 엿볼 수 있다. 풍요의 신(이집트 태양신 라와 가나안 풍요의 신 바알과 바벨론의 신 마르둑까지)으로 상징되는 고대 근동의 강대국들의 신과 로마제국의 힘과 권력과 같이 맞설 수 없는 강자에게 학대당한 스트레스를 발산하지 못한 채 르상티망에 빠져 있는 것이 기독교 도덕관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는 약자들에게 강자를 악인으로 간주하고 강자를 정의를 모르는 자라고 불쌍히 여김으로써 정신적 우위에 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이 예수가 약자에게 베푼 도덕관의 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기독교)의 도덕관은 르상티망을 바꿔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기독교인들은 근원적인 원한과 분노에서 도망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극복은 무엇인가?
니체는 인간 정신의 발달 과정을 ‘의무와 복종을 상징하는 낙타의 단계’, ‘부정과 자유의 정신을 뜻하는 사자의 단계’, ‘망각과 창조를 의미하는 어린아이’의 3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낙타의 정신은 금욕과 복종이다. 낙타는 전통과 명령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져야만 그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렇게 낙타처럼 노예의 근성을 쫓아 무거운 짐을 지고 들어가는 길은 사막이다. 영성의 길이 아닌 노예의 길이 사막인 것이다. 낙타처럼 살면 삶이 사막화된다. 겁이 많은 낙타는 두려움 때문에 복종한다. 이렇게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살면 스스로의 욕망이 좌절되고 자존심이 상처를 입어서 그 정신이 르상티망이 되는 것이다.
무서움 때문에 무릎을 꿇고는 살지만 그 속에는 원한의 감정이 쌓여 간다. 이 르상티망이 자신에게는 죄의식으로, 타인을 향해서는 공격적인 분노로 나타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일어난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고 덮어씌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 방어를 삼는다.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타의 정신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니체의 사자의 정신 단계에 이르면, 정신은 용감하고 자유로워진다. 인습을 비판하고 불의에 저항한다. 니체는 “황량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이곳에서 정신은 사자가 되고,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사자는 전통의 질서에 저항하며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옛 주인 되는 용과 대결한다. 사자는 “사물의 모든 가치는 나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자는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또한 무엇을 획득하려고 무릎을 꿇는 법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사자가 아무리 자유를 쟁취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부정의 정신이 긍정의 정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분노에서 죄의식으로 넘어갔다면, 니체의 사자의 단계는 자본주의에 저항한 맑스(K. Marx)의 모습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3. 자긍심의 아이
스피노자는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에 관해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한다. 즉 되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아름답고 매력적인지를 확인할 때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사실 낙타 같은 사람들만 많으면 비겁한 세상, 혹은 정신병동이 된다. 그래서 사자의 정신 단계로 변화되어야 하지만 사자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한다. 자유와 창의적인 존재들은 있지만 조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아이의 정신 단계가 되면 인생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저항하고 투쟁에 주력하는 단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자는 비판하고 부정하지만 아이는 자기와 세계를 긍정한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는 순수이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순수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다.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움직임이며, 거룩한 긍정이다.” 아이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몸을 그대로 본다, 아이는 르상티망을 망각한다. 아이는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발명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꿈을 좇아서 자발적으로 놀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이러한 아이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고,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4.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니체가 바라본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 더 이상 서로 잡아 먹기 위해 싸우는 세상이 아닌, 비굴한 울혈사회가 아닌 기쁨의 세상, 기쁨의 윤리학, 나아가 기쁨의 신앙은 도대체 가능할까? 앞서 언급한 박노자는 자신이 꿈꾸는 대한민국을 이렇게 제시한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좌익 정당들이 국회 의석을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공산당의 기관지까지도 국고 보조금을 받아 발간하는 다양성의 나라, 입사 때 여성이나 장애인이 ‘정상적인 남성’보다 더 유리한 평등의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감옥에 잡혀가지 않는 나라, 학생들이 교수를 만날 때 노르웨이처럼 동등한 인간으로서 웃으면서 악수할 수 있는 나라,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에 각종 원조를 제공하는 일이 덴마크처럼 지성계의 가장 중대한 관심사가 될 수 있는 나라, 여성들이 손님의 냉면을 잘라주는 ‘음식집 아줌마’ 정도의 역할밖에 맡지 못하는 나라가 아닌’ 그런 대한민국이다.
따라서 박노자는 자본의 한계를 직시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닌 폐허를 딛고 일어나,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슴에서 발까지가 엄청 먼 여행이 될지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의 힘’만 있다면 못 이룰 것도 없는 것이다 “새로운 참사가 계속 일어나도 아무런 투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결국 역사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일일 것”이라는 말에 (최근 박근혜 정부의 세월호, 메르스, 개성공단 폐쇄, 노후원전 재가동과 신규원전 건설, 생화학 세균무기 쥬피터 프로젝트 실시, 사드 설치 참사 등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린다.
헤게모니 이론으로 유명한 안토니오 그람시(A. Gramsci)는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I’m a pessimist because of intelligence, but an optimist because of will).”고 했다. 합리성이 아닌 힘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그람시는 “소수의 혁명 보다는 다수의 조금의 혁명이 더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람시의 다음의 말에서 우리는 낙관을 발견한다.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 나는 조용히 다시 내 할 일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게다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사람은 그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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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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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 16] 진정한 화해는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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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진실하게 기억하라!”
저자는 1984년 유고슬라비아 군대에서 당했던 심문의 기억으로부터 이 책을 시작한다. 정보장교 G대위의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옭아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미국인과 결혼하고 서구사회에서 공부했으니 스파이가 틀림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빨리 실토하라고 다그쳤다.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자, 갑자기 심문을 멈추었다.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심한 고문을 받지는 않았으나, 제대한 이후에도 그때 받은 학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G대위는 저자의 마음속에 편안히 자리 잡고서 거듭거듭 그를 심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겨우 그를 한구석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G대위가 비록 가해자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화해해야 그 악연이 해결됨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기억하라!”고 말한다. 기억하더라도 진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가해자가 내게 행한 악행을 피해자가 진실하게 기억하는 것에는 이미 그 악행에 대한 정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정죄는 심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해의 한 요소이다.저자는 기억이 구원의 수단이 되려면, 기억 자체가 구속(救贖)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억의 종말》 || 저자인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치면서 예일 신앙과문화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배제와 포용》 《베풂과 용서》 등이 있다. 원제 The End of Memory. 홍종락 역. IVP, 2016. 16,000원.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우리나라의 사회갈등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타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01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OECD 국가 중에서 5위였다. 우리보다 갈등지수가 높은 나라는 터키를 비롯해 그리스, 칠레, 이탈리아였다. 2010년에는 2위였다.
#먼저 정죄해야 ‘진정한 화해’ 가능해김길구 :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의 주제는 다소 묵직합니다. 피해에 대한 기억과 용서, 그리고 화해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위안부 문제, 옥시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이 갈수록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 지난 6월 26일은 UN이 정한 ‘고문 생존자/피해자(victims) 지원의 날’이었습니다. 1998년부터 지켜온 이 날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코피 아난 UN사무총장)입니다. 나쁜 권력에 고난을 당한 기억은 한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립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날인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가 겪었던 ‘심문의 기억’을 읽으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기억났습니다. 저자가 심문을 당했던 해가 1984년이었고, ‘빅 부라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거짓 기억이 동원되었고, 날조한 역사를 새로 써넣기도 했다고 합니다.김길구 : 당시 유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정치적으로 상당히 혼란을 겪을 때였습니다. 결국 1991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내전을 겪었고, 인종청소라는 추악한 역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렇듯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었던 분쟁지역에서 평화신학을 공부했고, 화해를 주장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김현호 : 시대적 갈등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에 일조하는 책인 것 같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화해 문제를 뛰어난 통찰력으로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남북 분단,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진정한 화해를 모색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회가 이념을 떠나 서로를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김수성 : 저자는 무조건적인 화해만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즉, 정죄할 것은 정죄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야 진정한 화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김길구 : 우리나라의 경우 역사 문제는 물론이고, 세월호 사고와 최근 부각된 옥시 사건 등 다양한 사회적 갈등도 제대로 치유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계가 갈등의 당사자가 아닌 화해자 역할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 화해는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여기에는 정죄가 포함된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함에 힘입어 용서가 이루어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진실하고 정의로운 기억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 출처: zesukchon.com]
#‘값싼 은혜’로 진실 봉합해서는 안돼김수성 :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하게 기억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그동안 심리학적으로 많이 연구된 기억과 관련된 문제점을 적시합니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으로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하는 것에 주의하라고 강조합니다.김현호 : 현재 우리나라에서 갈등이 치유되지 않고 증폭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정부나 기관에서 유리한 것만 기억하려고 하고, 불리한 것은 덮어두려고 하는 것이죠. 세월호의 경우, 사고가 발생한 원인이나 구조상의 문제점 등은 덮어두고 보상금만 내세우며 이제 그만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빨리 잊기를 원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김길구 : 저자의 말처럼 악행의 기억은 오히려 상처를 줄 수도, 무관심을 낳을 수도, 상처를 덧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진실하고’ 여기에 더하여 ‘정의롭게’ 기억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진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합리화로 기억을 왜곡하려 해서는 상처가 곪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불거진 옥시 문제도 비슷합니다. 배상금만 지급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교만함이 엿보입니다.김현호 : 교회에서 죄에 대한 회개는 철저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의 문제는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부 교회에서는 ‘은혜롭게’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사회적 갈등이 빨리 봉합되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봉합은 그냥 숨기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언급되었던 ‘값싼 은혜’라 할 수 있습니다.김수성 :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용서하고 치유하기 위해서이고, 서로가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물쭈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정죄해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의롭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정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이는 치유도 화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김길구 : 여기서 우리가 ‘사과의 기술’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구체적으로 보상하는 단계를 거칠 때라야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정성이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성 없이는 사회적 갈등 해소 못해김현호 : 저자는 진정성에 더하여 십자가의 죄사함을 내세우며 모두가 화해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자발적 용서’는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대속하심에 힘입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용서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 이 책에서는 기억과 용서, 망각 등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많이 제시합니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십자가 보혈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러한 행위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가 불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김현호 : 우리 사회에는 앞으로도 갈등이 불거질 소지가 많습니다. 세대 갈등을 비롯하여 양극화에 따른 소득 갈등, 다문화가족의 급증으로 인한 갈등 등. 그만큼 교회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정부 등에서 기왕에 벌어진 갈등을 빨리 잊을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그 상처를 감싸주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김수성 :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다. 우리의 몸과 영혼이 피폐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성전이다. 때로는 폐허가 된 성전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신성한 공간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절실한 지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김길구 : 진실하게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불의를 행하는 것이고, 잘못된 기억은 오히려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구조적으로 변화를 가져와야 우리 사회에도 화해의 바람이 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을 구속(救贖)해야만 합니다.다음에는 최병성 목사의 포토 에세이 《길 위의 십자가》(이상북스,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 같이 읽으면 좋은 책《화해의 제자도》 / 에마뉘엘 카통골레 / IVP《왜 용서해야 하는가》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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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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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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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물 실험: ‘원숭이에게 미사일 쏘기’
“왜 사람들은 건물이나 예술작품과 같은 인간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야만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신의 창조물을 파괴하면 ‘진보’라고 치부하는가?” (간디)
해마다 50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물고기를 빼면 매년 250억 마리의 동물이 인간의 음식이 되기 위해 죽고, 매년 4천 만 마리의 동물이 모피가 되기 위해 죽어간다. “한 국가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의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마하트마 간디는 말한바 있다. 그러나 고양이가 사람을 보고 도망가고, OECD 국가 중 유기견 수출 1위(고아 수출 1위일 뿐만 아니라!)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동물들이 살기에 대한민국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물은 법적으로 철저히 ‘물건’이다. 물건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의 ‘물권’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동물은 소유와 점유의 객체가 되고, 그 권리자인 인간에게 처분권이 있다. 동물은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사용되고 처분되고 심지어는 필요가 없으면 폐기된다. 2010년 11월 구제역이 처음 발생한 뒤 매몰 살 처분된 가축 수가 무려 350여만마리에 달했다(부산 시민 인구가 이 정도도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 부동액, 브레이크액, 표백제, 탈모제, 눈 메이크업, 잉크, 선탠오일, 손톱 광택제, 마스카라, 헤어스프레이, 페인트, 지퍼 윤활유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많은 상품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모두 동물을 이용한 독성 실험을 거친 것들이다. 동물은 인간의 윤택한 삶을 위하여 실험실에서도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시카고 대학의 ‘쥐를 33일간 잠재우지 않는 실험’, 오레곤 대학의 ‘갓 태어난 생쥐의 앞다리를 잘라 그럼에도 자기 몸을 단장하는지 관찰하기’, 하버드 대학의 ‘사냥개에 플루토늄 주사하기’, 옥스퍼드 대학의 ‘10일 된 새끼 고양이 양 눈을 꿰매 시력 상실의 영향에 대해 관찰하기’, 케임브리지 대학의 ‘생쥐의 두뇌에 헤르페스 바이러스 주사하기’, 미 국방부의 ‘원숭이에게 신경가스, 청산가리, 방사능, 총알 혹은 미사일 쏘기’, 미 농무부의 ‘어미 뱃속에 있는 새끼 돼지 태아의 목을 자르고 그것이 임신한 암퇘지의 인체 화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관찰하기’, GM의 ‘자동차 충동실험에 돼지나 원숭이 이용하기’ 등은 분명 ‘인류 문명의 진보’와 ‘동물의 고통’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잘 보여 준다. 곧, 인류의 진보는 동물 학대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2. 동물해방과 동물신학 탐구: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 종차별도 극복가능한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나치’라고 말하는 호주 출신의 도덕철학자이자, 동물윤리학자인 피터 싱어(P. Singer)는『동물해방』(인간사랑, 2006)이라는 책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어떠해야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동물의 권리(animal rights)’ 분야의 바이블인 이 책은 동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 “인간의 도덕적 관심에 동물을 포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동물이 단지 인간의 종(species)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반대함으로 종간의 원칙적 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서구 역사에서 종차별주의의 발생사적 근원을 찾으면 로마와 기독교라는 두 문명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은 콜로세움 등의 원형경기장에서 수많은 동물들을 사람들의 호기심 거리와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고 학살했다. 이러한 경기는 시민들에게 먹을 양식을 배분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행사였다고 하니 가히 로마의 동물학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 동물과 함께 학대당했던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인권의 신장에 큰 기여를 했지만, 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인간과 다른 종간의 차별을 공고히 한 종교가 되었다. 따라서 싱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기독교)는 여러 면에서 진보적이었으며, 그리하여 로마인의 제한된 도덕적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하지만 인간 아닌 다른 종에 대한 처우와 관련시켜 생각해볼 때, 그러한 교의는 구약성서에서의 인간 아닌 동물들의 낮은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저하시켰다. 구약성서에는 인간이 다른 종을 지배해야 한다고 쓰여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는 다른 종들의 고통에 대한 희미한 관심이나마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는 동물에 대한 가혹 행위에 반대하는 어떠한 명령도 찾아볼 수 없으며, 동물의 이익을 고려하는 권고 또한 찾아 볼 수가 없다.”
종차별은 사실상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과 ‘성차별(sex discrimination)’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종차별이 도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근거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잠재하고 있는 지적 능력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가령 유색인종은 백인에 비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오해처럼 종차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다른 종(동물)을 차별하는 것은 인간이 그들보다 지적 능력이 탁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은 인간에 비해 하등동물이니 거기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동물 학대의 이유는 첫째,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고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는 전제이며, 둘째는 ‘동물은 도덕적 권리의 합법적 주체가 아니라’는 전제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전제에서 동물이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기반으로, 차이는 ‘특별한 도덕적 배려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데, 차별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늘날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도 그러하듯,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 능력 운운하며 그 차별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만일 그것을 인정하면 무뇌아로 태어난 아기(혹은 치매 노인들)는 침팬지보다 그 지능이 못하니 그 생명권을 연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설령 좀 더 나은 지적 능력을 소유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좀 더 나은 지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인간에게 인간 아닌 존재를 착취할 권한이 부여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도덕 지평 확대의 역사이다. 여성과 흑인, 사회적 약자와 장애인, 혹은 소수 종교인들과 동성애자로 그 도덕적 배려와 책임의 지평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성과 인종을 넘어 종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동물권 신학의 핵심인 ‘관대함의 윤리(ethics of generosity)’를 부르짖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부 교수이자, 기독교 채식주의자인 앤드류 린지(A. Linzey)는『동물신학의 탐구』(대장간, 2014)에서 싱어가 말하는 연약하고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는 ‘평등한’ 고려가 아니라, ‘더 큰’ 고려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싱어의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며 동물의 권리 신학인 동물신학을 전개하고 있는데, 동물과 같은 약자에게 ‘도덕적 우선순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린지는 이렇게 말한다. “윤리에서 내가 견지하는 이론적 입장은 약자와 상처 입기 쉬운 자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3. 예수와 동물들: “노새를 때리지 마라. 자비를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동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기독교 사상은 동물 복지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1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초기 기독교 외경 문학은 종종 예수와 동물과의 관계에 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콥트교회의 문서조각은 ‘노새를 치유하신 예수’의 모습을 들려준다.
“그 일은 주님이 도시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산을 넘어 가실 때에 일어났다. 그들은 산에 당도했고, 올라가는 길은 경사져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짐을 실은 노새와 함께 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동물은 쓰러져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남자가 너무 무거운 짐을 지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노새를 때렸고, 노새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 남자에게 다가가 말씀하셨다. ‘남자여, 왜 당신은 당신의 동물을 때리는가? 당신은 이 동물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자 이 남자는 대답하여 말했다. ‘그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내가 만족할 때까지 이놈을 때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놈은 나의 재산으로, 큰돈을 주고 샀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이 나를 알고 이 사실에 대해 알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 중 몇몇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주님, 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그가 노새를 어떻게 샀는지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노새가 어떻게 피를 흘리는지 보지 못하고, 어떻게 신음하며 울부짖는지 듣지 못하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하여 말했다. ‘아닙니다. 주님, 그놈은 신음하고 울부짖지만 우리는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슬퍼하며 외치셨다. ‘노새가 하늘에 계신 창조주께 하소연하며 자비를 구하며 우는 것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너희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그러나 이 노새가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게 만든 자에게는 세 배나 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 동물에게 다가가서 손을 대셨다. 그러자 노새는 일어났고 상처는 치유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남자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그리고 지금부터 다시는 노새를 때리지 마라. 그러면 너도 자비를 얻을 것이다.’” (곱트교회 문서조각)
마태복은 5장 7절의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긍휼의 대상이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물들을 소개한 ‘유사 마태복음서’도 있다. 인용해보자.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지 삼 일째 되던 날, 마리아가 동굴에서 나와서 마구간으로 들어가 그 아이를 구유에 눕히자 황소와 당나귀가 그에게 경배했다. 그럼으로써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이 성취되었다. ‘황소는 그의 주인을 알고 당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 그리하여 그 동물들, 황소와 당나귀가 그들 가운데 계신 예수와 함께 있으면서 그분께 끊임없이 경배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예언자 하박국이 말 한 것이 성취되었다. ‘두 동물 사이에서 당신은 나타나실 것입니다.’ 요셉은 삼 일 간 마리아와 함께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 (유사 마태복음)
아기 예수의 가족이 사막으로 들어갈 때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다른 동물들이 나타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구절도 있다. 계속해서 유사 마태복음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처음에 마리아가 그들을 둘러싸는 사자들과 흑표범들과 여러 야생 짐승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아기 예수는 그녀의 얼굴을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어머니. 저들은 어머니를 해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저를 서둘러 섬기려고 오는 겁니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몰아냈다. 사자들은 그들과 함께 계속 걸었고, 그들의 짐을 옮기는 짐승들과 황소들, 당나귀들과도 함께 걸었다. 이들과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자들은 이 중 단 하나도 해치지 않았다. 사자들은 그들이 유대로부터 함께 있다가 데려온 양들 사이에서 온순했다. 양들은 늑대들 사이를 걸었으며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동물에 의해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라는 예언자의 말이 성취되었다.” (유사 마태복음)
4.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세상: ‘사자가 소 여물을 먹는 하나님 나라’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뽐내지 마십시오. 동물들은 죄를 짓지 않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가지고 땅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통과 조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말한다. 그러나 역지감지(易地感之)도 필요하다. 사지는 머리로 하지만, 감지는 가슴으로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단계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사자가 소가 먹는 풀을 뜯어 먹는 것’, 곧, 강자가 약자의 주식을 먹음으로 자신의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 ‘역지식지(易地食之)’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돼야 정말 조화로운 평화의 나라가 올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실생활에서 이러한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의 생명 존중의 사상을 실천했다. 까치를 위해 감을 다 따지 않은 ‘까치밥’, 음식을 먹기 전제 조금 떼어내 뭇 생명과 더불어 먹고자한 ‘고시래’,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어 한 알은 새가 먹고 다른 한 알은 땅 속 벌레가 먹게 한 농부의 배려, 길을 나설 때 미리 지팡이로 땅을 쿵쿵 굴려 벌레들이 도망하게 한 나그네의 세심한 배려, 하루 수십 리씩 걸어야 하는 소들을 위해 소장수들이 소에게 신겨준 ‘쇠짚신’, 작은 생물이라도 해할까봐 뜨거운 물도 식혀 버렸던 어머니들의 살뜰한 살림살이, 소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은어를 사용하며 한순간에 소의 명줄을 끊고자 노력했던 백정들의 우직한 배려, 한 집안에서 더불어 먹고 사는 존재들을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모두 생구(生口)라고 불렀던 포용적인 마음,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실천했던 채식위주의 삶 등.
생각해보라. 아버지 기스의 암나귀들을 찾으러 떠났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던 것처럼(사무엘상 9장 참조), 동물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혹시 알겠는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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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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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둥근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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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환 목사가 쓴 소설 <둥근 별>
신이건 장로(한국기독신문 사장)
왜 <둥근별>이라 이름 지었을까? 인간의 생사화복,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주먹을 불끈 쥐면 둥근 주먹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는 누구나 부모, 형제들과 첫 만남으로 시작해서 돌아가는 귀착점도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끝맺음하기 때문일까? 둥근 원으로 반짝거리는 하늘에 수놓은 무수한 이름 모를 별을 보며 붙인 것일까? 아쉬움이 남는 이 땅의 만남을 통해서 누구나 갖고 있는 향수, 마음의 고향을 두고 이름 지었을까? 매우 궁금해 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 안유환 목사와는 그가 젊은 집사였던, 지방지 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시절부터 교계기자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열심히 다니던 교회가 담임목사와 교인간의 갈등을 겪는 것을 보며 신앙의 회의를 느꼈다. 어느 날, 교회를 개척하는 동료들과 함께 새 둥지를 틀었다. 그때부터 그는 교계 영적 지도자는 어떻게 가야하고, 어떤 흔적을 남겨 놓아야 하는지에 고민했고, 고민 끝에 잘 다니던 일간신문 기자직을 내려놓고 광나루신학대학원에 입학을 했다. 3년간 수학한 끝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부산의 변두리에 위치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부터 그는 시를 썼고, 중년 목회시절에는 수필을 썼다. 조기은퇴를 한 이후 삶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게 됐다. 이번에 그가 출판한 둥근별을 읽으면서 ‘그랬구나. 출발지와 종착지가 같은, 결국 하나의 둥근 원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기독교적인 신앙으로 그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목회를 하면서 또 은퇴 후의 삶을 소재로 삼고 그리운 현대인의 향수를 수북이 쌓아 묻어두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이번 소설 <둥근별>의 핵심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그는 잘 나갈 때 직장을 그만뒀고, 목회에 성공할 때 조기은퇴를 했다. 텃밭을 가꾸고 귀향해 노을이 물드는 초저녁 오늘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듯 살아가고 있다. 조용히 천국의 만남을 향해 준비하는 여정에서 이런 소설집을 냈다는 생각에 부럽기도 하고 삶의 여유를 가진 안 목사의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평화가 오고 삶의 여유와 함께 마치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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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