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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할리우드의 공룡사랑에 감춰진 인간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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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의 결합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영화는 돈과 컴퓨터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의 경연장이 되었다. 요즘 한창 제작 붐을 타고 있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같은 SF액션물의 경우 평균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높은 제작비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천정부지로 오른 스타들의 몸값도 크게 한몫 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최신작 <스카이 스크래퍼>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은 6,450만 달러(한화 약 720억 원)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가 되었지만, 이내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어벤저스3> 출연료로 1억 달러(약 1,120억 원)를 받은 것이 밝혀지면서 2위로 물러나야 했다. <어벤저스3>의 총예산은 약 3억 4000만 달러로 할리우드가 스타에 지불하는 비용만큼이나 엄청난 돈을 실제작비에 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2011)로 3백억 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은 할리우드의 제작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다름 아니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대형 스타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정 제작비만 약 1억7천만 달러에 달한다. 고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제작된 공룡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가상의 공룡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 탄생시킨 값비싼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공룡의 피부조직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묘사되는 영상을 만드는 일과 공룡 특유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들이는 인건비와 시스템사용 비용은 할리우드가 대형 영화를 제작하는데 감수해야할 내역인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강점은 또 있다. 최신 과학 정보들을 재빠르게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할리우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우 민감하다. 즉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최신 과학정보를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개연성은 당장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멋진 화면을 전개시키더라도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관객을 설득할 만한 논리구조를 갖지 못한 저급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전편에 이어서 유전자 합성을 통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Indominus rex)와 벨로시랩터(Velociraptor)의 유전자를 재교배하여 탄생한 인도랩터(Indorapto)라는 새로운 종을 보여주며 관객 설득에 나서고 있다. 전편인 <쥬라기 월드>(2015)에서 인도미누스 렉스는 가장 거대한 공룡으로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를 기본으로 갖가지 공룡들의 장점을 결합시켜 만든 무서운 공룡으로 탄생했었는데, 후속편에서는 여기에 가장 잔혹하고 교활한 공룡인 벨로시렙터의 유전자를 결합시켜서 더욱 공격적인 공룡을 만들어냈다.
특정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상품성 있는 공룡을 만드는 일이 관객에게 그럴 듯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현시대의 유전자공학 기술의 발전을 재빨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2013년 미국의 생화학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가 발견하여 유전공학의 혁명으로 불리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CRISPR/Cas9)’는 <쥬라기 월드>에서 보여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보다 강력한 공룡을 만들 수 있는 과학적 개연성으로 작용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특정 유전자만을 정밀하게 조준해서 편집함으로써 유전병이나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의료기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얼음에 오랜 시간 갇혀있었던 매머드 (mammoth)의 온전한 사체를 가지고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시키는 일을 진행하는데 이 유전자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현재 상용화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벌레에 강하면서도 맛도 좋고 빛깔도 좋은 과일품종을 개량하는 일로부터 크고 맛있고 빨리 성장하는 돼지(영화 ‘옥자’에 나오는 유전자 변형 돼지처럼)를 생산해 내는 일 등에 손쉽게 적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최첨단 기술이다. 그런 까닭에 공룡의 유전자를 편집하여 새로운 공룡을 만든다는 <쥬라기 월드>의 설정은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채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공룡의 유전자를 채득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제시된 설정보다 훨씬 개연성이 높은 편이다.
인간복제의 문제를 감추는 방법
할리우드 영화가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은 이름 하여 ‘소매치기 수법(The method of pickpockets)’이다. 관객들이 관심을 둘 만한 사항을 부각시키면서 은근슬쩍 관객의 저항이 따를 만한 메시지를 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말한다. 소매치기가 지하철에 탄 승객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몰래 빼내려할 때 그는 절대 혼자 행동하는 법이 없다.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승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던 동료 소매치기가 지갑을 터는 방식이다. 정말 중요한 것으로부터 생각을 빼앗아 다른 것에 시선을 모으도록 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치기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채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지갑을 털린 사람의 후회는 이미 때가 늦을 수밖에 없다.
<쥬라기 월드:폴른 킹덤>은 ‘인간 복제’라는 사회의 안주머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지갑이 털려도 관객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바람에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비껴간 영화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 수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보호 차원에서 공룡의 생명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사나운 공룡들에 대한 책임은 모두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돈에 대한 탐욕은 보다 사나운 공룡을 만들어 전투에 참가시키려는 군사용 공룡제작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든다. 관객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대상은 공룡이 아니라 돈이 된다면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요하게 공룡에 몰입하는 탐욕에 물든 자본가들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애완동물을 아끼듯 공룡에 대한 애정을 부각시킴으로서 인간복제의 위험성에 눈을 감고 만다. <쥬라기 월드>를 만든 투자자의 손녀는 공룡복제기술로 탄생한 복제인간 소녀 메이지(이사벨라 서먼)다. 영화에서는 어린 나이에 죽은 손녀딸이 복제된 인간임을 직접 공표하기 보다는 그녀를 키운 보모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녀의 젊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비춰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복제인간 메이지는 자신과 같이 유전자 기술을 통해 탄생한 공룡들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난동을 부리는 사나운 공룡들을 가스로 죽이려는 순간에 메이지는 그 공룡들을 인간세계에 풀어 놓았다. “다 살아있는 생명이잖아요.” 그녀의 멘트는 생명의 귀중함을 뜻하는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리지만 그로 인해 복제생명체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인간의 탐욕에 따라 이미 모든 것을 저질로 놓고서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유전자복제와 변형이 가져올 수 있는 비윤리적인 문제부터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세계관
제니퍼 다우드나는 그녀의 동료 새뮤얼 스턴버그와 함께 쓴 책 <크리스퍼가 온다:진화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서 유전자 편집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가져올 희망적인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는 두려운 미래를 생각하며 의료윤리 혹은 기술윤리의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생각한 대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퍼 유전가위 기술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드는 신체부위만을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신 만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맞춤형 태아를 출산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가 시도했던 우생학적 인간 실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창3:3-5)에 도전하고 있음을 감추고 있다. 기술의 혁신적인 진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계관이다. 어떠한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인간 사회의 현실화된 재앙의 예고편일 수도 있고, 잠깐의 즐거움을 주는 여흥으로 남을 수도 있다. 영화의 태도는 애매하다. 말콤 박사를 통해 유전자 변형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복제기술이야말로 앞으로 할리우드가 애용해야 할 영화의 소재이자 다가오는 현실임을 긍정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변형기술을 통한 인간조작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그리스도인 태도가 더욱 더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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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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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39]근본주의의 소중한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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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근본주의가 남겨준 유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부제(副題)에서 알 수 있듯, 근본주의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주의가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저자의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주의의 문제점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근본주의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부각시킨다.약점과 강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강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강점은 강점대로 살리고, 약점은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앙에 있어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래서 서로를 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에서 주장하는 개인 구원의 중요성과, 행동주의에서 강조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 시스템의 타파는 어느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나머지 다른 모든 것들의 기반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이 책에서 ‘톱밥’은 저자가 어렸을 때 참석했던 야외전도집회 천막 아래 바닥에 깔아놓았던 톱밥길, 이 길을 따라 집회장 앞으로 걸어 나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라는 요청을 받았던 길의 표상이다. 즉, 톱밥길은 ‘회개의 길’을 의미한다.◈ 《톱밥 향기》 || 저자 리처드 마우(Richard J. Mouw)는 미국 칼빈대학교 등에서 기독교 철학과 윤리학을 가르쳤고, 1993년부터 20년간 풀러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문화와 일반 은총》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있다. 원제 The Smell of Sawdust(2000). SFC, 2016. 12,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무례한 기독교》 / 리처드 마우 / Ivp《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 제임스 스미스 / Ivp
복음주의의 강점은 여전히 소중하다
“인내와 겸손을 통해 ‘제2의 소박함’ 촉진해야”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복음주의의 가장 큰 장점인 신앙적 순수성은 어떤 경우에라도 소중하다. 이 장점을 더욱 살리면서 단점을 고쳐나갈 때 한국 교회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사진은 2016년 버몬트주 벌링턴에서 개최된 부흥회에서 '톱밥길'을 따라 나와 기도하는 모습, 출처:greensboro.com]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중 스스로를 점검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너무 적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바로 자기반성이 특히 어울리는 운동이다. 운동은 방향감각을 필요로 한다. 어디에서 왔고,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본문 37쪽에서]
신앙부흥운동의 뜨거운 열기 기억해야
김길구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마우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을 미국 복음주의에 도입한 학자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즉,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김현호 아브라함 카이퍼는 네덜란드 신학자이자 정치가죠. 그는 국회의원을 거쳐 총리로 재직한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현실 참여주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오늘의 네덜란드가 있게 한 주역 중 한 명이었습니다.
김길구 리처드 마우가 이러한 사상의 영향으로 뒤에 ‘공공신학’의 실천자가 된 것은 우연한 결과가 아닙니다. 공공신학에서 신학은 창조, 역사, 문화, 사회,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삶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사회적 형식,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교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춥니다.
김수성 한마디로 종교와 세상을 분리해서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러니 세상살이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상당히 현실참여적인 신학을 이야기한 학자가 근본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김길구 미국 기독교의 발전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를 좀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저자는 미국 기독교를 청교도 신앙으로 대표되는 1세대, 복음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대립하던 2세대, 그리고 상호 문제점을 뛰어넘고자 하는 3세대로 구분하여 이야기합니다.
김현호 1세대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하나님의 땅’으로 여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던 청교도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으려고 노력했던 세대라 할 수 있겠죠. 복음의 열정으로 똘똘 뭉친, ‘종교 대각성운동’으로 대표되는 순수한 신앙운동 시기였습니다.
김수성 이 책에서 언급된 ‘톱밥길’은 1세대 신앙인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시 자료를 보면 대형 천막 안에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이 책의 표지 사진은 에디 마틴의 집회 때 모습인데, 이에 앞서 드와이트 무디의 신앙부흥운동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이지만 독선적이지 않아야
김길구 1세대 신앙부흥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부작용도 부각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반(反)지성주의, 내세지향성, 분리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이 미국 땅에도 들어옵니다. 그러자 이들 양 진영의 대립이 첨예화되고, 그런 가운데 근본주의가 부각됩니다.
김현호 근본주의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물론, 당시 팽배하던 다원주의와 사회주의, 새로운 철학 사조와 문화 운동 등 모든 것을 비판하며 오직 성경을 모토로 전도와 선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아직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김수성 저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기억합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불어 닥친 교회성장론과는 달리, 한편에서는 역사비평과 양식비평, 편집비평 등의 방법론으로 기술한 신학서적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다 제3세계의 해방신학 서적까지 더해지자 기성교회에서는 이들 서적을 불온시하기도 하였습니다.
김길구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성장에 관한 이론이 연구되었던 곳이 바로 풀러신학교였습니다. 이로 인해 풀러신학교가 나중에 비판을 받기도 했죠. 어쨌든 이들 두 진영의 대립은 각자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드러냈습니다. 저자는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적절하게 지적합니다. 첫째, 자유주의적이지 않지만 온건한 태도, 둘째, 타협하지는 않지만 정중한 태도, 셋째, 대화를 계속하겠다는 일종의 다짐, 넷째, 만약에 기독교가 자신이 있다면 더욱 세상에 대해서 겸허할 것을 주장합니다.
김현호 복음주의적이지만 독선적이지 않아야 한다, 지킬 것은 지키더라도 정중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그럼에도 대화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세상의 지식도 포용해야 한다는 뜻이죠.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김수성 사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교회역사를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타협한 사례가 너무도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에 빌붙어 세력을 확장했는가 하면, 그러한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을 간접적으로 탄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후유증이 이제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죠.
김현호 복음을 지킨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교회가 독선으로 빠져들기도 했죠. 그러면서 교회의 태도가 거칠어졌습니다. 이러한 것이 복음 전파를 오히려 위축시켰습니다. 이제는 부드럽고 상냥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분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야
김길구 저자는 3세대 신앙으로 신(新)복음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근본주의든 자유주의든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니 각자의 단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근본주의의 강점으로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톱밥 향기’를 내세웁니다.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열정과 순수,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죠.
김현호 실제로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기억과 느낌이 신앙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 배웠던 것들에 허점이 많았던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주일학교에서 체험했던 신앙적 순수성이 있기에 온전히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수성 근본주의 못지않게 자유주의 신학에 따른 문제점도 있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게 근본주의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열성적인 신앙을 감정적으로 치부하고, 개인전도 중심의 활동을 폄하한 것이죠. 또한 주지주의와 계몽주의로 인해 경건주의가 나타나게 되었음을 새삼 일깨웁니다.
김길구 그렇기에 저자는 ‘제2의 소박함’을 강조합니다. 기왕에 드러난 단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을 견뎌낸 믿음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두 가지 언급합니다. 인내와 겸손입니다. 독선주의를 떨치고 신실한 행동을 요구하는 제자도로 나가기 위한 덕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한마디로 하면 ‘거룩한 현세지향성’이죠. 내세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현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되, 근본주의의 가장 큰 덕목인 거룩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인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 현실에서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그동안 우리가 몇 차례 거론했던 지역을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길구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용상 우리 한국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9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기는 하지만, 철학자인 김용규의 《신》(Ivp, 2018)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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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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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디지털 시대 태초에 인간이 새로운 천지를 코딩으로 창조하시니라(코딩복음 1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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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물리법칙과 물리상수들로 코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체 역시 디지털 코드로 코딩 되어 있습니다.” (박준석,『세상을 만드는 글자, 코딩: 창의와 소통을 위한 코딩 인문학』동아시아, 2018)
1. 언어와 기호, 이미지의 세상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환상 속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인식이 아니라, 희미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잘 보았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리고 이 희미한 환상 공간은 언어, 기호, 이미지 등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언어를 통해 상상하는 세계, 기호로 구성하는 세계, 이미지로 체험하는 세계 등. 실재의 현실은 ‘그때’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인식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인간의 정체성을 ‘주체(subject)’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이루어진 상징체계 아래로(sub) 던져진(jet) 존재, 즉 상징체계의 지배를 받는 (미셀 푸코 식으로 표현하면 사목권력 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와 같이, 군주의 지배를 받는) ‘신민(subject)’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체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서사(롤랑 바르트는 이를 ‘신화’라고 불렀지만)’의 형태를 띤다. 따라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생산되는 신화들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신화에 반응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치는 그 신화들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는 인식, 아니 표현 가능할까? 푸코적 ‘신민(subject)’을 벗어나 진정한 참된 ‘주체(subject)’는 가능할까? 아니 실재 현실을 제대로 이해는 할까?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1781)에서 인간이 지닌 이성을 비판했다. 우리 이성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우리 감각이 경험하는 것이 현상(phenomenon)일뿐, 물자체(Ding an sich)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세기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도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상황들이 실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데카르트는 “악령이 나의 경험을 조작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의심한적이 있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이 감각하는 모든 것들은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과거로 가보자.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어떤가? 그는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어떤가? 장자는 ‘꿈에 꾼 나비’를 통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보았다. 영화 <매트릭스>(1999)는 초인공지능이 사람의 뇌에 디지털 데이터를 집어넣어서 사람들이 마치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사람의 신체는 기계를 돌리기 위해 피를 제공하는 밧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보는 기호, 내가 경험하는 이미지는 진짜인가? 아니 무엇이 진짜인가? 아니 진짜는 진짜일까?
2. 코딩 창세기
코딩(coding)이란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컴퓨터에 내릴 명령을 말이 아니라 글자, 즉 코드(code)로 표현하는 행위이다. 컴퓨터는 1과 0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와 ‘컴퓨터의 언어’를 이어줄 언어가 필요한데, 이 중간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이다. 따라서 코딩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코딩의 핵심인 알고리즘(algorithm)이 필요한데, 알고리즘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순서 또는 절차를 말한다. 그 알고리즘을 컴퓨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코딩인 것이다.
인간의 단순 노동(계산)을 대신하는 컴퓨터, 그 컴퓨터에게 일을 주문하는 것이 바로 코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것이다. 코딩을 하는 것이다. 사실 코딩은 전 세계 아이들의 필수 교육과목이 되었다. 핀란드는 현재 4살부터 8살 아이들에게 무료 코딩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코딩전문학교도 생겼다. 영국에서는 2003년부터 코딩을 고등학교 이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고, 2014년부터는 5살부터 16살까지 모든 아이들이 배워야할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미국, 중국, 일본도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코딩을 배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초등학교에서는 2019년부터 실과교과로 연간 17시간을 지정했고, 중학교에서는 2018년부터 연간 34시간이상 코딩을 배워야 한다.
아무튼 미래사회인 디지털 시대는 컴퓨터가 주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컴퓨터 언어인 코딩을 알지 못하면 미래 세상에서 소통을 할 수 없다. 서양의 고전어인 헬라어-라틴어가 옛날의 보편 언어였다면(그리고 영어가 오늘날 보편 언어인 것처럼) 미래의 보편어는 코딩이 될 것이다. 스마트폰은 물론 마트 계산대, 은행 현금자동인출기(atm), 인터넷쇼핑도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컴퓨터 사고력과 프로그래밍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사고력과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한 필수 수단이 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코딩을 배워야 한다. 코딩은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코딩이 논리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양 과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비디오 게임을 사지만 말고 직접 만드세요. 휴대폰을 갖고 놀지만 말고 프로그램을 만드세요.”라고 말한다. 따라서 최근 강남 쪽 유치원 아이들이 라틴어와 코딩을 배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읽는 책 1페이지는 보통 25줄 정도가 들어간다. 하루 종일 집중해서 글을 쓸 때 30페이지를 쓴다고 가정하면 한 사람이 대략 750줄을 쓸 수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은 550만 줄의 글에 해당하는 글자가 살아 움직여 모니터 속 ‘세상’을 창조한 것이다.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는 ‘1,200만 줄’, 윈도7은 ‘4,000만 줄’, 페이스북은 ‘6,200만 줄’, 놀라지 말라. 구글은 무려 ‘20억 줄’ 이상의 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코딩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기 스스로 구체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프로그래머들은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로 코딩할 수 있고 바로 제품으로 만들 수 있다. 프로그램은 미리(pro) 작성해둔 것(gram)으로, 컴퓨터가 읽도록 미리 작성해둔 글이 프로그램이다. 지금 디지털 시대 최초에 인간은 코딩을 통해 새로운 천지를 창조하고 있다. 코딩 창세기가 개막된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살아가는 현실이 코딩언어와 기호, 스크린의 이미지로 재생될 때 그것은 환상 공간인가? 실재 공간인가? 혹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3. 디지털의 영혼, 소스코드
소스코드(source code)는 원시코드라고도 한다. 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그 안에 들어가는 모든 동작의 코드를 총체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가령, 모든 제품에 설명서가 있듯, 디지털기기에 담긴 모든 내용을 컴퓨터 언어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 바로 소스코드이다. 소스코드는 소프트웨어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 공개될 경우 기업의 개발 기밀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이 소스코드를 보호하려고 한다(하지만 최근에는 오픈소스라 불리는 개방형 소프트웨어도 있다). 디지털 시대의 영혼은 바로 소스코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세상은 원자와 분자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와 분자를 알면 모든 물질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을 알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비트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원자의 세계와 비트의 세계는 서로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비트 세계는 원자 세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인간이 작성한 코드도 결국 물리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코드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나 자기, 아니면 전파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비트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원자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코드는 전자회로 혹 전자들의 흐름을 제어하고, 나아가 원자들을 움직여 결국 프로그래머가 원했던 결과를 물리 세계에 만들어 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크게 보면 ‘무생물’과 ‘생물’이 존재한다. 물, 바위, 지구, 별, 공기 같은 것들이 무생물이고, 박테리아, 꽃, 강아지, 사람과 같은 것들이 생물이다. 둘 다 원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는 생명 현상, 곧 ‘생장, 생식, 진화, 자극 반응성’ 등 4가지를 갖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생물의 생명현상을 인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다양성, 통일성, 연속성’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생물도 지능이 있는 생물과 지능이 없는 생물로 나눠진다.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에는 지능이 없지만, 바퀴벌레, 강아지, 원숭이, 사람 같은 동물에게는 지능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디지털식으로 말하자면 소스코드의 유무로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무생물과 생물은 원자와 분자가 일정한 형태로 뭉쳐져 있지만 그 안에 소스코드가 없는 것은 무생물, 소스코드가 있는 것을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소스코드는 카피 앤 페이스트(복사하기 및 붙여넣기)가 가능하다. 다양성과 통일성, 연속성을 통해 생장하며 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돌멩이는 복사해서 2개로 만들 수 없지만, 나무는 번식을 통해 2그루로 만들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지능은 무엇을 할까? 창조한다.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능이 만들어내는 것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하드웨어, 반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이다.
하드웨어는 책상, 의자, 망치와 같은 것이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가 만들어 낸 것들은 모두 하드웨어였다. 이것들은 내부에 소스코드가 없기 때문에 복사가 불가능하다. 반(反)하드웨어는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회로와 같은 것들이다. 내부에 소스코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를 보면 하드웨어와 같이 생겼다. 이러한 기기들은 모두 소스코드가 없는 하드웨어와 소스코드가 있는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제품들인데, 하드웨어에 내장된 소프트웨어를 쉽게 지우거나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하드웨어와 한 몸으로 취급된다(이것을 펌웨어, 말 그대로 딱딱한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순수한 소프트웨어는 프로그램, 애플리케이션(앱, 응용 소프트웨어)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사람이 소스코드를 작성해서(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해서) 만든 것이다.
자, 다시 인간의 지능으로 돌아가 보자. 지금 인간은 자신의 지능으로 반하드웨어인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인 가상현실을 만들어냈다. 물론 가상현실은 당연히 코딩으로 만들어졌다. 가상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을 물리적 현실이 제공하는 데이터양만큼 늘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부터 사람들은 가상현실과 실재 현실을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와 기호, 이미지로 구성되는 세계는 이렇게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제 영혼은 자신의 안식처로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4. 디지털 소통: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
글의 서두에 인용한 책에서 박준석은 이렇게 말한다. “비트 세계는 점점 현실 세계를 닮아갈 것입니다. 코딩을 모른다는 것은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과학 지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초에 신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디지털 세상은 이제 인간이 코딩으로 천지를 창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다.
성경은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소통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코딩으로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과학 기술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박준석의 다음의 말은 코딩을 통한 새로운 소통을 잘 보여준다.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프로그래밍 언어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고 있습니다. 코딩은 언어를 구사하는 지능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대치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무슨 말을 하건, 그 말은 컴퓨터를 통해 세상에 유의미한 형태로 출력됩니다. 그리고 컴퓨터끼리는 서로 디지털 언어를 매개로 소통합니다. 결국 지능은 언어를 낳고 언어는 코딩을 낳고 코딩은 통신을 낳았습니다.”
코딩계시록 22장 21-22절의 말씀이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코딩이여 오시옵소서. 코딩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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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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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버지를 용서하니 찬양이 됩니다 -어윈 형제 감독의 ‘아이 캔 온리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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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음악을 하나로 엮다
인기 높은 가수의 명곡을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며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비앙 로즈>(2007)는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가 당신 신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배우 이브 몽탕과 사랑에 빠져있을 때 불렀던 노래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곡은 불과 15분 만에 만들어져서 에디트 삐아프의 열정 넘치는 노래의 이유가 사랑에 있음을 엿보게 한다. 영화 <라밤바>(La Bamba, 1988) 또한 18세 나이로 요절한 가수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의 명곡 ‘라밤바’를 제목으로 삼아 가수의 짧은 삶과 사랑을 묘사했다. 한국 영화 <사의 찬미>(1991)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한국 최초 여성 성악가로 활약한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의 사랑을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윤심덕의 애절한 노래인 ‘사의 찬미’를 제목으로 사용한 영화다.
이번에는 기독교 신앙을 노래하는 가수의 차례다. 미국의 유명 크리스천 록 밴드인 ‘머시미(MercyMe)’의 리드 보컬인 바트 밀라드(Bart Millard)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 <아이 캔 온리 이매진>(I can only imagine, 2018)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노래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1999년 ‘워십 프로젝트(The Worship Project)’ 앨범에 처음 수록된 이후로 머시미의 다양한 음반을 통해 거듭 발매되면서 2003년과 2004년에는 기독교 계통의 방송뿐만 아니라 ‘Top 40’같은 일반 방송의 인기 차트에서도 오랜 기간 수위를 기록하면서 미국에서는 라디오를 켜면 이 노래가 나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많이 방송을 탄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음반으로는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250만장의 음반 판매기록을 달성하면서 2002년에는 기독교 최고의 음악상이라 할 수 있는 ‘도브 어워드(Dove Award)’의 ‘올해의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노래한 바트 밀라드의 숨은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미국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3월 16일 미국에서 첫 개봉 당시부터 박스 오피스 3위에 올라 첫 주에만 1천7백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함으로써 7백만 달러로 추정되는 제작비를 불과 한주 만에 회수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6월 첫째 주말까지의 총수익이 8천 3백만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기독교영화 사상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이후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게 되었다.
크리스천 가수의 찬양곡에 얽힌 사연을 영화화 한 만큼 제작 또한 기독교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가 세운 ‘케빈 다우니스 프로덕션(Kevin Downes Production)이 맡았다. 내용에서부터 감독 및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크리스천에 의한 크리스천을 위한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케빈 다우니스는 우리나라에는 DVD로만 출시됐지만 미국 크리스천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은 영화 <우드론>(Woodlawn, 2015)이나 <커레이져스:용기와 구원>(Courageous, 2011)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중견 배우이다.
그러나 유명 크리스천 가수의 노래제목이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지 노래가 유명세를 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에 담긴 사연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신앙적 감동과 결합되어 있을 때 기독교 관객을 극장으로 모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신앙과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영화의 순수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의 구원
이 영화는 바트 밀라드의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의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바트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일으키는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찬양사역자로서 성공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바트의 아버지 아서(데니스 퀘이드)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잦다.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만으로 권위적이며 자신의 뜻대로 가족을 움직이려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폭력을 행사한다. 바트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된 바트는 오갈 데 없는 상황 가운데서 아버지와의 불편한 동거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받게 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이미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부정적 자아나 부정적 대인관계의 경향을 보일 수 있으며, 결혼 후 낳은 자녀에 대해서 심지어 자신이 과거 아버지에게 당한 것과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흔히 말하는 폭력의 대물림 현상을 빚기도 한다. 특히 역사가들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자란 사람이 인류 역사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예로 히틀러와 스탈린을 들기도 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무공무원이었지만 술꾼에다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며 흉폭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는 구두 제화공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을 이루었지만 술에 취하면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는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술주정뱅이였던 그는 스탈린이 열한 살 때 남과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비록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지만 폭력적인 아버지의 독재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신앙적 가치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바트가 어떻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데 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기 전 바트를 교회가 주관하는 캠프에 맡기고 그곳에서 바트는 청소년 목회자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배우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 가운데서 불태우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 손에 붙들린바 된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부재 혹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어린 학생들이 받게 될 부정적 영향을 신앙교육이 어떻게 바로잡아주며 건강한 성장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린 청소년시기에 예수님의 사랑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만지게 돕는 일은 장래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까닭이다. 마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슬그머니 옷 가에 손을 댔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결과(눅8:43-44)처럼 말이다.
노래보다 용서가 먼저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가장 흥미 있는 요소는 찬양사역자로서의 음악적 성공이 바트의 재능이나 기술의 향상을 통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아버지와의 내적 갈등이 해결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바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 본 유명 프로듀서인 브리켈(트레이스 애드킨스)로부터 자신이 노래가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브리켈:가끔 자넨 무대 위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애. 흉내 내는 거지. 그럼 믿음이 안 생겨. 근데 가끔은 진짜가 보여. 근데 그게 나타나면 (자네는) 겁을 먹는데 그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지. 그래서 자넨 알다가도 모르겠네. 하나 묻지 자네는 뭘 피해 도망가는 건가?
바트:아버지요. 저를...
브리켈:때리셨군. 그런 속내는 못 감춰.
바트:그걸 안고서 감내하며 살아야 해요. 언제까지나
브리켈:그럼 그걸 곡으로 써. 도망치는 건 관두고. 그 고통을 영감으로 승화시키라구. 그럼 사람들이 믿어줄 뭔가가 탄생하겠지. 헌데 그러려면 두려움에 맞서야 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상처와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영감있는 노래를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바트는 췌장암에 걸려 죽어 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는 찬양사역자의 길을 가는 아들을 응원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밴드에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순식간에 써내려간 찬양이 바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파를 탄 노래는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한 후 창작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어렵다면 사람들과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실현시켜보자.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인생이라는 명곡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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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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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38] "너 지금 올 수 있겠지?" 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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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관한 묵상집
이 책은 ‘장례예배’ 설교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목회하는 분들, 특히 신임 목회자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례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그대로 묻어난다. 아이를 출산하러 병원에 갔던 30대 산모가 주검이 되어 나온 사례가 있는가 하면, 가족과는 달리 교회에 나오지 않았던 고인에 대한 고별 예배, 우울증으로 자살한 신자의 죽음 앞에서 저자는 메시지의 한계를 절감한다.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신자들에게도 ‘심각한’ 의미를 부여한다. 신앙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냥 툭 던지는 메시지가 아니다. 고인이 평소 어떻게 살아왔는지 등 그의 이력과 성품을 소개하면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해석’한다. 고인의 이력을 보면, 미국에서 살았다는 것만 빼면, 우리네와 비슷한 삶의 여정이기에 그 의미가 진득하게 다가온다. 부록으로 게재한 ‘거룩하고 의미 있는 장례예배를 위해’는 목회자에게 실제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임종 과정에서의 목회’ ‘임종에서 애도까지’ ‘장례 설교에 대해’ 세 부분으로 나눠, 간략하지만 핵심적인 사항을 정리해 놓았다.
◈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 저자 김영봉 목사는 미국 남감리교대학교 퍼킨스신학교, 캐나다 맥매스터대학교에서 연구하고 협성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지금은 미국 와싱톤사귐의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숨어계신 하나님》 등이 있다. Ivp, 2016. 11,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애도수첩》 / 캐시 피터슨 / 샘솟는기쁨《삶을 위한 죽음 이해》 / 김명선 / 대한기독교서회
“너, 지금 올 수 있겠니?”이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너, 지금 올 수 있겠니?”라는 주님의 질문은, ‘내 품에 안기는 것이 그곳에서 사는 것보다 더 복되다고 믿느냐?’라는 뜻이었습니다. [본문 20쪽. 그림 출처: everplans.com]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흔들리지 않는 것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있고, 흔들리지 않는 나라가 있으며, 흔들리지 않는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믿는 데까지 자라가야 하며, 그것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기까지 이르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을 사모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여는 묵상’ 중에서]
고인의 삶을 성경에 비춰 ‘의미’ 부여
김길구 이 책에는 16편의 장례 설교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고인들의 죽음을 나름대로 분류해보니 절반 이상이 돌연사를 비롯해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신 경우입니다. 물론 책 편집을 위해 사례를 선별했겠지만, 어쨌든 상당수는 장애나 병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는 데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김현호 이 책을 보면서 살아있는 자들이 돌아가신 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죽음이든을 막론하고, 품격 있는 죽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예의를 갖추는 것은 오로지 살아있는 자의 몫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장례문화가 예의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가를 되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수성 저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저자가 맞춤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부러웠습니다. 인용한 성경구절도 우리가 장례식 때 흔히 보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인의 삶과 죽음에 적절한 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한 편의 시를 더하기도 하였습니다.
김길구 그러기 위해 저자는 고인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삶을 누렸는가에 대해 자료를 찾고 분석했다고 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고인의 삶을 성경에 비추어 ‘해석’하고 생전 삶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요. ‘사귐과 섬김’에 초점을 맞춘 목회를 하였기에 이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대형교회에서는 이런 장례 설교를 하기 힘든 게 현실 아닌가요?
김현호 대형 교회의 경우, 교구목사들이 집례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사정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목회자는 교구목사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상당수 교인들이 장례 예배를 담임목사가 집례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섭섭해’ 한다는 것이지요.
김수성 이 책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사례가 몇 건 있습니다.
유가족에 대해 지속적으로 배려해야
김길구 우선 고인에 대해, 칭찬 일색이거나 미화하지 않는 절제된 깊은 성찰을 들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과 불화가 잦고, 한번 등지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다시 보지 않는 까칠한 화가를 회고한 설교가 그러합니다. 고인이 그린 그림을 소재로, 내면의 외로움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고인의 열망을 하덕규의 노래 〈가시나무〉 가사에 빗댄 설교가 마음에 와 닿았어요.
김현호 자식들의 부탁으로, 교회에 나오지 않던 아버지에 장례 예배도 인상 깊었습니다. 교인 중에는 믿지 않는 분에 대한 장례 예배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릴 이유가 충분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결국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김수성 저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분에 대한 장례 예배 때의 메시지가 새삼스러웠습니다. 자살이라는 외형적인 사건만을 보고 교리적으로 판단하는 교인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므로, 인간이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이죠.
김길구 그러면서 저자는 일반적인 자살과 고인의 죽음을 구분하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이다. 그러나 마음의 병도 질병이므로 우울증 등으로 인한 자살은 암과 같은 병으로 돌아가신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유가족과 주위 분들을 위로합니다.
김현호 유가족에 대한 배려도 감동적입니다. 사실 생각지도 못했던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은 유가족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줍니다. 그렇기에 장례 설교는 이들 유가족을 충분히 생각해야 하고, 장례식이 끝이 아니라 이들이 그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나기까지 일정 기간 동안 계속해서 보살피고 배려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길구 특히 둘째 딸이 분만실에 들어갔다가 주검으로 나온 사실에 망연자실한 부모에게 목사인 저자도 할 말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신정론으로 변호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목사 노릇’을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김수성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죽어가는 데 “왜 당신은 계속 침묵하고 있느냐”고 절규하던 장면이 생각나게 합디다. 세월호 사건 때 몇몇 목회자가 어설프게 유가족을 위로했다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했죠.
김현호 이럴 때는 저자와 같이, 유가족과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고 울어주는 목회자가 필요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대들기도 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목회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둔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다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비하라는 메시지도 돋보여
김길구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부록입니다. 우선 미국과 한국의 장례 예배를 비교해볼 수 있는 점입니다. 또한 목회자가 주의하고 준비해야 할 점을 세세한 부분까지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장례 예배를 ‘고별예배’라는 부른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고 하듯이, 집례자가 말씀을 통해 고인의 인생을 정의한 것도 의미가 크고요.
김현호 임종 예배 때 성찬을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죽음을 앞둔 분들이 성찬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도 휴대용 성찬기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만, 이런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김수성 부록의 내용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연세 높은 분들이 많은 우리나라 교회 현실에서 목회자들에게 좀 더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핵심적인 부분을 잘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목회를 새롭게 시작한 목사들에게는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는 지침서라 할 것입니다.
김길구 설교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장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만큼 많은 노력과 깊은 묵상을 통해 준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현호 뿐만 아니라 집례자가 고인의 삶을 통해 오히려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흔치 않은 목회 고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수성 이 책의 부제가 ‘삶과 죽음에 관한 설교 묵상’입니다. 죽음 못지않게 삶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지금 올 수 있겠니?’라는 제목의 글로 이 책을 시작합니다.
김길구 맞습니다. 저자는 설교를 통해 장례 예배에 참가한 신자들에게도 죽음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를 적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더욱 다가오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풀러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리처드 마우의 《톱밥 향기》(SFC,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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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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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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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다.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 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다.” (성북교회 육순종 목사)
1. 희생 시스템
20세기 초,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은 ‘전쟁절멸보장 법안’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각국에 이런 법률이 있다면 전쟁을 없앨 수 있다. 전쟁이 터지면 10시간 안에 다음 순번에 따라 최전선에 일개 병사로 파견한다. 첫째로 국가원수 둘째로 그의 친족 셋째는 총리, 국무위원, 각 부처 차관 넷째는 국회의원. 다만 전쟁에 반대한 의원은 제외. 다섯째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계 지도자들!” 홀름에 의하면 전쟁은 국가 권력자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며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자들부터 희생되는 시스템을 만들면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는 신선한 착상이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북미정상회담이 남았으나, 한반도에 평화의 물결은 뒤돌릴 수 없는 ‘하수(아모스 5:24)’와 같이 되었다. 비록 분열을 조장하고 평화체제에 배 아파하는 이(나라)들이 있지만 그들은 곧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홀름의 ‘전쟁절멸보장 법안’은 원전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야스쿠니 문제』등의 저작을 통해 ‘국가와 희생’의 문제를 파헤쳐온 철학자이자 도쿄대 교수인 다카하시 데쓰야는『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돌베게, 2013)에서 홀름의 제안을 원전 사고에 적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원자로의 방사능 누출을 막을 ‘결사대’에 총리(한국의 대통령), 각료(장관), 주무 부처 차관과 간부, 전력회사 사장과 간부, 원전 추진 과학자·기술자, 원전을 인구 과소지에 떠넘기고 전력을 써온 도시 사람들 순으로 파견해야 한다.” 따라서 데쓰야는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개념으로 원자력 발전의 후쿠시마와 미일 안보체제를 상징하는 오키나와 섬을 그 예로 들고 있다. 사실 ‘후쿠시마’는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어난 중대사고와 그 영향에 관한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데쓰야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은 추진되는 순간부터 희생을 상정하며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 타자에게 모든 희생을 떠넘기는 국가적 희생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오키나와도 마찬가지이다. 주일 미군 전용시설 면적의 74%가 집중된 섬인 오키나와는 국가가 지속적인 희생을 전가함으로써 ‘본토’의 평화를 유지해 온 희생의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 두 지역 ‘희생 시스템’의 구조를 통해 일본 사회가 구성된 것은 아닌지, 과연 경제 성장과 안보 같은 공동체 전체 이익을 위해 누군가 희생하는 시스템이 정당한 것인지를 데쓰야 교수는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핵발전소와 ‘성주 사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휴전협정과 휴전선은 남북 모두의 희생 시스템, 그 견고한 틀이었다. 이것이 남북 두 정상의 만남으로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다운 제자도의 삶은 어떤 것일까?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이 말은 주후 4세기의 유명한 수도사 텔레마쿠스의 말이다. 그는 원래 세상을 등지고, 광야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수도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는 세상을 등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늙어서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은 세상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그리하여 텔레마쿠스는 그 당시 세계의 심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로 갔다.
때마침 로마에서는 어떤 장군의 개선을 축하하기 위해서 축전이 열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원형극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로마는 이미 기독교 국가였지만, 주말이 되면 원형극장 안에서는 포로로 잡혀온 검투사들의 칼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경기는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는 경기이다. 로마 사람들은 그 잔인한 칼싸움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텔레마쿠스도 사람들 틈바구니에 싸여서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드디어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황제 앞에서 인사를 하고,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맹세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서서히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텔레마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이것을 막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로마로 보내셨구나!’ 텔레마쿠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경기장 안으로 뛰어들면서 온 힘을 다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즉시 멈춰라!”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쇼의 일종인 줄 알고서 그저 웃기만 했다. 경기장 측에서 늙은 수도사 복장을 한 어릿광대를 집어넣어 경기를 흥겹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텔레마쿠스는 두 검투사 사이에 들어가서 결사적으로 그 싸움을 막았다.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마쿠스는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급기야 경기를 진행시키던 지휘관이 검투사 가운데 한 사람에게 텔레마쿠스를 먼저 처치해버리라는 손짓을 했다. 번쩍이는 칼과 함께 텔레마쿠스는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숨이 멈추기까지 계속해서 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싸움을 멈춰라!”
시간이 지나며 주변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경기장 밖으로 퇴장했다. 그의 뒤를 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한 사람씩 두 사람씩 그 자리를 떠났다. 나중에는 두 검투사들마저도 고개를 푹 숙인 채 퇴장했다. 주후 391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에서는 더 이상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던 텔레마쿠스의 외침과 그의 희생적인 죽음이 그 잔인한 경기를 종식시킨 것이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며 그동안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쓴 이 땅의 텔레마쿠스들의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오늘 지하철과 역 앞, 이웃 종교의 사찰과 사당 앞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그들의 외침을 진정 외쳐야 할 곳은 평화적 만남을 방해하는 이 땅의 분단 세력들 앞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3. 제자도: 믿음의 외적 실천
자신이 잘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훈련시킬 수 없다.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 총을 들면 그것은 흉기가 될 것이다. 『예수도: 몸으로 실천하는 진짜 제자도』(IVP, 2013)에서 예수님의 혁명적인 가르침을 삶으로 실험하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열정을 쏟아 온 저자 마크 스캔드렛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기술을 익혀야 하듯이, 예수의 제자도는 영성의 훈련장인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연마되고 성숙되어 간다.”고 말한다.
달리기, 자전거 타기, 요리, 쓰레기 뒤지기, 커피 로스팅, 오랫동안 산책하기, 아내와 데이트, 아이들과 텔레비전과 영화 보기를 즐기는 스캔드렛은 개인 중심 실험, 그룹 실험, 장기 프로젝트, 1회성 실험, 4-6주간의 단기 실험, 6개월-1년 이상의 장기 실험을 어떻게 준비하고 실천하며 인도할 수 있는지를 실례를 통해 보여 준다. 예수의 제자도를 삶 속에 실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이고 창의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를 바꾸는 거대한 변화는, ‘한 사람의 작은 실험과 순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는 단순히 고상한 교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우리 삶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역사 속에서 그분의 삶에 매혹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르기로 선택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이 가신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제자도는 개인주의적이고 지식에 치우칠 때가 많다. 따라서 지금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가난, 폭력, 착취, 경제적 불의와 다툼이 넘쳐난다. 스캔드렛은 진정한 제자도란 ‘믿음의 내적인 여정을 외적인 실천으로 나타내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실 스캔드렛은 오래전부터 기독교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하는 공동체 운동을 이끌어 왔다. 소유의 절반을 처분해 나누는 절반의 나눔 운동을 벌이고, 노동 착취와 인신매매에 바탕을 둔 불의한 경제 구조에 대한 저항 운동을 펼치는 등(이를 ‘노예해방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개발하고 가르쳐 왔다.
스캔드렛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소유의 극히 적은 부분만 나누어도 가난과 굶주림의 위기에 처한 전 세계 10억 인구를 살릴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돈과 소유에 관해 우리가 기존에 택해 왔던 방식들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러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움을 동반한다.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스캔드렛은 “노예 해방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우리가 배운 놀라운 교훈 가운데 한 가지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실천할 때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었다. (…) ‘당신이 도장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장이 당신을 선택한다.’ 변화는 프로젝트 자체를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팀으로 일하며 갈등을 통해 성장하는 가운데에서도 일어난다.” ‘더디 가도 지속적이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진리를 보여준 것이다. 스캔드렛은 “우리는 그 운동에 헌신했던 수백 명과 더불어 우리 이웃들이 사는 지역에서 더디지만 지속적인 향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자유로운 이웃 운동을 통해, 소그룹이 창조적으로 동역할 때 그 파급력이 얼마나 커지는지를 깨달았다. 하나님의 치유를 일으키는 대리인으로서 우리의 목적을 실천에 옮기자 공공의식이 촉발되었다.”고 매듭짓는다. 통일운동, 평화운동과 더불어 이제 ‘노예해방 프로젝트’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왜냐하면 서두에 인용한 ‘디테일(detail)이 없으면 스케일(scale)이 없고’, ‘각론은 없고 총론만 있는 현재의 상태’로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테일과 각론은 한 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 미완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한 사람들의 연대가 될 것이다. 예수님 한분으로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이 12제자로, 나아가 초대교회로, 마침내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처럼!
4. 미완의 시대, 끝나지 않은 싸움
영국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명이자, 평생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던 진보적 지식인인 에릭 홉스봄(E. Hobsbawm)은 자신의 자서전인『미완의 시대』(민음사, 2007)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종결된 꿈이다. 그러므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든 다른 방식의 사회를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 홉스봄은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혁명의 시대』(1962), 유럽 자본주의의 성장을 다룬『자본의 시대』(1975),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식민지 전쟁을 다룬『제국의 시대』(1987) 3부작으로 19세기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하여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끝났다고 주장하며, ‘긴 19세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적이 있다. 역사가의 과업에 관해 ‘단순히 과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현재와 관련성을 제시하는 것’을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모순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에릭 홉스봄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곧, ‘위대한 위인들의 이야기’, ‘당연한 결과가 있다는 목적론적 인식’, 기후가 온난하고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 당연히 강한 힘을 갖게 된다는 ‘지정학적인 논리’, 모든 것이 운과 불운의 결과일 뿐이라는 ‘카오스 이론’까지)을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을 넘나들면서도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라는 통찰을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홉스봄은 이렇게 말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무기를 내려놓지 말자. 사회 불의에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만으로 이 땅에 평화가 오지는 않는다. 희생 시스템은 얼마나 견고한지! 촛불혁명에 참여한 깨어있는 시민들이 이 미완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제자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도『생의 한 가운데』(문예출판사, 1998)에서 주인공 여류소설가 니나 부슈만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행동일까, 겁에 질려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전부터 가치 있었고, 아마도 앞으로 영원히 가치 있을 것들을 위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인가?”
생의 모든 것을 껴안는 니나와 달리, 니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슈타인 박사는 고통을 피하고 안정을 지향하며 관조적인 삶을 살았다. 이것을 안타까워했던 니나의 말은 미완의 시대,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주는 충고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선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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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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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선교의 야성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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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 아버지 같은 선교사
금년에도 선교다큐멘터리 영화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2009년과 2017년 사이에 국내에서 개봉된 기독교 극영화는 단지 4편에 불과했지만, 같은 시기에 무려 26편의 기독교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16편은 선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선교사역이 스크린 위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개봉한 이성관 감독의 영화 <파파 오랑후탄>(Papa Oranghutan)은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사적인 흐름의 한끝을 잇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파파 오랑후탄>은 말레이지아의 밀림 속 우루깜바 마을의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박철현 선교사의 행적을 여러 모양으로 담은 헌신적인 사랑의 얘기다. 말레이시아어로 ‘파파’는 아버지, ‘오랑’은 사람, ‘후탄’은 정글 숲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서 합치면 ‘정글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원시성과 원주민의 인간애이며, 아울러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선교사의 신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야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현대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야생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선교현장으로 달려가는 박철현 선교사의 모습에는 초대교회로부터 비롯된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야성적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오직 뜨거운 가슴을 안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마침내 사랑의 고지를 점령하는 신앙의 전사(戰士)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부분은 박철현 선교사의 말레이시아 밀림 속의 선교사역현장의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져있고, 뒷부분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박철현 선교사의 고뇌와 다시 선교현장으로 돌아가 죽기를 다짐하는 신앙의 결단이 펼쳐진다.
<파파 오랑후탄>은 지금까지 제작된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원시적 이미지나 경제적으로 낙후된 환경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고통을 드러내며, 결정적으로 믿음 안에서 갖게 되는 희망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 방식이다.
선교현장의 기적을 지켜보다
<파파 오랑후탄>은 기존의 선교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외형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복합 구성 양식을 갖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철현 선교사의 선교현장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사역하는 현지 목회자의 인터뷰와 교회 개척 상황이 펼쳐지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후 주술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현지인들의 생활과 예배 모습이 담는 것은 여느 선교다큐멘터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거 박철현 선교사가 원주민으로 부터 당했던 핍박의 상황과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일은 인터뷰나 내레이션이 아닌 연기자를 통한 재연 드라마로 묘사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속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방식은 영화는 시각적 매체의 특성을 살린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과거의 사실을 보다 깊이 그리고 사실적으로 인식시키는 한편으로 정서적인 면에서 보다 강한 울림을 일으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현재는 과거의 사실이나 현장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연기자와 극본 그리고 드라마 전문 연출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제작비와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에 선교 다큐멘터리 감독이 선뜻 선호하는 제작 방법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하도록 돕고 있는 점이다. 식인종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족이 한 사람의 선교사의 헌신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일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치유과정을 보여주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는 우르깜바 마을에서 박철현 선교사를 가장 핍박했던 까심에게 임한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다. 그는 박선교사를 죽이려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지만 폐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박선교사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 살아났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함한 까심은 놀랍게도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박철현 선교사와 함께 현지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또 다른 기적의 사건은 박철현 선교사 자신에게서 일어났다. 한국에서 대장암 말기를 진단받고 병원에 누워있던 그가 선택한 곳은 말레이시아의 밀림 속 이었다. 원주민 곁으로 돌아간 그는 뜻밖에도 이제는 신앙인으로 변한 원주민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서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와 사랑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은 선교현장에서 기적을 일상적인 일처럼 만들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사실적 표현을 중심으로 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 신앙전파에 영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아닐 수 없다.
가성비 높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나라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메시지를 담아왔다.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아는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제작비는 현지제작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부족하고, 유명 기독교 연예인을 출연시켜 진행하는 내레이션은 재능기부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 상업영화들이 기획사(대형 영화사는 자체 기획과 제작을 함께 맡기도 한다)를 중심으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상영 후 얻게 된 이익을 나누는 구조와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기획의 단계부터 흥행에 따른 결과로 이익을 낼 것을 기대하고 제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수익과 상관없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상업영화 제작자들의 희망사항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일반영화 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곧 흥행수익을 뜻하지만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하나님 말씀과 기독교 신앙이 보다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파파 오랑후탄>은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빛을 본 다른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같은 제작 이력을 갖고 있다.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향할 때 출발한 제작진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이성관 감독과 주인공 박철현 선교사의 대역을 연기한 배우 염광호 이렇게 두 사람이다. 산 속을 헤치고 강물을 건너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와 삼각대 등의 촬영 장비를 직접 손에 들고 현지 촬영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업영화 제작자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어려운 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일이다. 마침 현지에서 단기사역을 하고 있던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백방으로 돕는 바람에 분장과 의상, 섭외 심지어 오디오 담당 스탭을 꾸릴 수 있었다. 현지를 잘 아는 선교사들은 섭외를 맡았고, 대역 연기를 담당할 현지 연기자들을 찾는 일도 현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한 과제
<파파 오랑후탄>은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독립영화의 성격을 갖는다. 즉 흥행성 높은 대중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상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관객으로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상을 통한 복음증거의 현장에 함께 하는 것, 즉 기독교 영화를 꾸준히 소비하는 일이다. 기독교 영화가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경제논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즉 소비가 되는 곳에 생산이 있기 마련이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기독교인들이 몰리면 극장주들은 자발적으로 이 영화들을 수용할 것이다. 극장은 많은 관객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에 일차적 관심이 있음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복음전파라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 영화를 만드는데만 열정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극장이 추구하는 경제논리를 염두해 두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극장에 달려가는 수고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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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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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37] 기독교문화의 풍성한 발전이 곧, 복음 전파의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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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읽는 십계명
요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구태의연한 옛날 이스라엘의 법규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십계명을 현대적 의미로써 풀이한다. 문화의 옷을 입혀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화현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종교는 문화의 옷을 입고 나타나므로, 십계명을 기독교문화로 표현해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래서일까,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가 아닌, 현재 우리의 삶과 환경에서 확장하여 해석한다. 또한 그의 그림에 관한 지식을 보여주듯, 곳곳에서 다양한 명화를 꺼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괜찮은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학적인 문제를 문화로 설명하려고 하니, 가끔 부대끼는 곳이 툭툭 튀어나와 앞뒤 맥락을 연결하며 읽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도 십계명을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한 시도만큼은 충분히 흥미를 끌만하다.
이 책은 저자가 2015년에 《월간고신 생명나무》에 연재했던 글을 정리하고 다듬어서 펴낸 것이다. 당시 《월간고신 생명나무》에서는 한 해 전체를 십계명 특집으로 배정하고, ‘원문으로 읽는 십계명’ ‘문화로 읽는 십계명’ 등 다섯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 《십계명, 문화를 입다》 || 저자 안재경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경기도 남양주의 온생명교회 담임으로 시무하면서 웹진 〈개혁정론〉의 운영위원 및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고흐의 하나님》 《렘브란트의 하나님》 등이 있다. SFC, 2017.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칼로그-십계명,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김지찬 / 생명의말씀사
《삶의 목적과 의미》 / 마이클 호튼 / 부흥과개혁사
《오래된 새 길》 / 김기석 / 포이에마
기독교문화의 풍성한 발전이 곧, 복음 전파의 지름길이다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
▲ 십계명은 오늘 우리의 무분별한 문화에 비춰 새롭게 인식해야 할 중요한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은 마르크 샤갈이 그린 ‘Moses Beholds All the Work’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십계명을 케케묵은 옛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요구 또는 명령들의 모음집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람이 이룬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한다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문화를 피하거나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상 문화로 말미암는 십계명에 관한 왜곡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문화로 인해 왜곡된 십계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결국 믿음까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서문’ 중에서]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십계명
김길구 오늘날 우리 한국 기독교계가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로 기독교문화의 침체 또는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야기할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문화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기독교 예술단체가 설립되어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라는 카테고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까지 어필하거나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작품 활동은 부족한 것도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성 저자는 십계명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대체로 독자에게 익숙한 그림을 먼저 끄집어내 소개합니다. 서문에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며 어디로 가는가?〉를, 제1계명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제6계명에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제시하였습니다.
김길구 계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예시로서 그림 등 유명한 작품을 먼저 소개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하는데, 현대인들에게 다소 멀게만 느껴지는 십계명의 의미를 우선 그림을 통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저자는 그림과 관련된 책을 저술하기도 한 분이죠.
김현호 십계명을 현재 우리 사회의 현상과 비교하면서 설명한 것도 관심을 끄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제3계명을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 제대로 된 ‘고백문화’를 만들어 가야함을 역설합니다. 그리고 제1계명에 ‘신들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제3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찾아주세요’ 같이 친근한 제목을 붙인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타 종교에 비해 상당히 윤리적인 규범
김길구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사실 종교개혁 이후 기독교문화는 장르 간에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말씀을 내세움으로써 문자적인 면에서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조각이나 회화 쪽은 상당히 침체일로를 걷습니다.
김현호 초대교회 이후 계속 논란은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상을 일반화하였지요. 특히 문맹자가 많은 현실에서 그림이나 조각으로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한다는 의도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콘(icon)이 크게 발달하였죠.
김길구 루터와 츠빙글리,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성상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루터는 이것이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행위’라며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은 우리에게 빛과 지침을 제공’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책의 종교’로서 발전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 미술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데 그칩니다.
김수성 기독교가 말씀 중심으로 발전해왔다면, 십계명 역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진 규범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십계명은 당시 인근 지역의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 행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윤리적인 생활규범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처음에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고 선포한 것부터 그러합니다.
김길구 당시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에서는 인신공양이나 신전 창녀들과의 결혼예식 등이 횡행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스라엘민족에 대해서 ‘살인하지 못 한다’ ‘간음하지 못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인명존중사상을 고취하고, 예배를 빙자한 난혼(亂婚)을 경계하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선 윤리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오늘날에도 십계명은 우리 믿음의 나침반으로 역할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십계명은 나침반과 같이 결국 우리가 나아갈 바를 바르게 가리켜줍니다.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올바로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김수성 십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궁극적으로 해방과 평등공동체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규범이라고 지적하는 분도 있습니다.
김길구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들에게 하나님은 참인간다운 삶을 누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이집트 종살이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달콤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간의 유대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김현호 그런데 주 5일 근무가 일반화된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안식일은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생산성 향상에 내몰린 현대인, 오로지 발전만을 추구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쉬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조금 더 깊게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도
김수성 디지털 네트워크가 우리의 안식을 빼앗아 가버렸죠. 쉴 사이 없이 울려대는 벨 소리와 문자 소리, 여기에 더하여 소셜 미디어(SNS)가 더해져 스스로 24시간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아주 가볍게 터치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김길구 이 책이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문화만 입힐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좀 더 깊이 있게 분석하면서 십계명 본래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참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입니다. 단적인 예로, 제8계명 ‘도둑 아닌 사람이 없다’에서 앤디 워홀의 〈마르린 먼로〉 작품을 인용하면서 천박한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가짜 복제에 대한 부분만 강조했습니다. 대중이 그에게 환호하는 이미지의 대중화, 과거 소수 특권층의 소유에 대한 표현의 보편화와 같은 의미는 간과하였습니다. 또한 미술사의 교과서라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서론은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기독교문화를 논하기에 앞서 인용된 사진 11컷 전부가 저명한 서양예술인의 작품인데, 성경을 소재로 한 것은 3건에 불과합니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신학적 의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한계 때문이 아닐까요. 또한 잡지에 ‘문화로 읽는 십계명’이라는 타이틀로 연재해야 하는 한계도 작용했을 것이고요.
김수성 어쨌든 십계명에 문화의 옷을 입히는 시도는 바람직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빈약해져가는 기독교문화의 토양에 대해 우리 모두의 관심을 촉구한 저작이라 생각합니다.
김길구 저자가 지적했듯이 현대는 이미지라는 우상이 지배하는 사회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주체성이 부족한 사람은 아예 이미지를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기독교가 나가야 할 길은 기독교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김영봉 목사의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IVP, 2016)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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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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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자, 아내 그리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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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성실한 사회인이자 친절한 동료, 착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직장, 친구관계, 가족관계에서 실패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매번 같은 실수를. 어찌된 일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인권,『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
1. 남자의 탄생
『남자의 탄생』은 5살부터 12살까지 자신의 유년기를 소재로 삼아 한국 남자의 인성 형성 과정을 심리적ㆍ정치적ㆍ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여, 이 시대 한국 남자들의 정체성을 결정지은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사회의 구조적 특징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전인권에 의하면 ‘한국식 남자는 동굴 속 황제’이다. 부모에 의해 철저하게 한국식 남자로 길러지는데, 동굴 속 황제는 모성의 공간에서 양육되고 부성적 질서에 의해 완성된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가 낳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식 남자인 동굴 속 황제는 모든 인간관계를 진선미의 우열에 따라 상하관계로 설정하는 봉건적 인간이며 자신을 ‘진선미의 화신’이라고 여기며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한다. 또 그러한 신분관계에서 생겨나는 심리적 영토를 끊임없이 넓히려는 행동원칙을 갖고 있다.
전인권의 말을 들어보자. “‘동굴 속 황제’의 허영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두 가지의 특징적 증상이 있는 듯하다. 첫째는, 그저 ‘남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진선미(眞善美)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주지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심리적 영토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넓히려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위주의와 자기애의 동굴에 갇힌 황제의 성에 대한 인식도 신분관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과 성을 물건처럼 다루는 성적 체험에서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자리 잡혔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관심의 범위도 단순했고 평화로운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거칠었다. 전인권의 다음의 진솔한 고백은 비단 그만의 열등감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남자들의 모습이다.
“(동굴 속 황제는) 일단 손을 대었다 하면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고향도 내 것이고, 대한민국도 내 것이며, 출신 학교도 내 것이며, 가족도 내 것이고, 직장도 내 것이 된다. (…) 심지어 경제학자나 회사원인 내 친구가 플라톤 이야기를 하면, 굳이 틀린 이야기도 아닌데, 괜히 속이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 들곤 했다. 플라톤이나 막스 베버는 정치학을 전공한 나의 소유물인데, 엉뚱한 직업을 가진 의사나 경제학자가 뭐라고 하면, 다른 집 사람이 내 아파트 열쇠를 들고 있는 것처럼 이상했다는 말이다. 사정이 이 모양이나 나의 학문이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동굴 속 황제’라고 부르는 전인권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자신이 갇혀 지내온 동굴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버릴 때 가능하며, 그때 비로소 자신과 주변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권위주의, 아버지를 ‘신분의 감옥’에 가두고 어머니에게 세 얼굴(여자와 현모양처, 어머니)을 만들어준 그 권위주의의 그물도 걷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아내란 무엇인가?
메릴린 옐롬은 ‘아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서양 역사 속에서 아내의 지위 변화를 살펴보며 아내의 개념, 지위, 역할이 언제 형성되어 어떻게 변해왔으며, 역사 속에서 아내들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고, 이를 바꾸려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 순종과 반항의 역사를 우리들에게 들려주며『아내』(시공사, 2007)에서 “부부 간에 지위, 역할, 성별 등 어떤 차이도 없는 결합이라면 아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묻는다.
먼저, 아내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남과 여의 결합에서 파생된 것이다. 아내라 불리는 여성의 역사는 결혼과 이혼, 여성성, 모성, 임신, 성과 사랑에 관한 역사와 다를 바 없으며 더불어 아내의 역사는 남편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실 아내의 시작은 성서 속 하와이며, 이때 아내는 ‘아담의 갈비’, 곧 남자의 갈비뼈로 태어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아내는 남편이 사용하는 ‘가재도구, 혹은 재산’이었다. 나아가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아내는 ‘출산의 그릇’이었다. 이 시기 여성들 중 아내의 지위는 처녀, 과부, 그 다음이 아내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 섹스는 타락이었으므로 여성들 내부의 서열은 금욕을 기준으로 매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 아내는 ‘일하는 기계’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아내상 혹은 아내 관념이 급격하게 변한다.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 이래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은 남편의 의무였다. 아내는 그 대가로 섹스, 아이, 가사노동을 제공했다.” 그러나 맞벌이 아내들이 대거 등장함으로 이 관념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질문 두 가지!
첫째 질문, ‘아내’와 ‘어머니’의 관계는 무엇인가? 옐롬은 이렇게 말한다.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지 않았던 여자들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박해를 받고 죄인 취급 받았다(구약성서의 유다의 며느리 다말을 보라). 반대로 아내가 아니면서 어머니인 여자들은 독신모라는 낙인을 피하려고 갓난아이 살해를 자행하였다. 그러다 들켜 마녀로 오해받고 처형당했다. 아내는 ‘아내로서 어머니’가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질문, ‘그렇다면 아내는 여성인가?’ 오늘날 캐나다,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 되는 이때에 동성 결혼에서 아내는 누구인가? 현대에 들어 아내라는 이름이 멸종 위기에 직면한 것은 아닌가? 다시 돌고 돌아 아담과 하와 시대로 돌아가야 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2:21-23)
코뼈도 다리뼈도 아닌 왜 하필 ‘갈비뼈’일까? 갈비뼈가 감싸고 있는 가슴은 사랑으로 콩닥거리는 감성의 진원지이며, 갈비뼈가 위치한 옆구리란 남녀의 동등한 지위를 암시하는 인체의 중심이 된다. 성서학자인 매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지배할 머리 꼭대기도, 남자에게 짓밟힐 발도 아닌, 동등하게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졌으니, 이는 남자의 팔로 보호받고 그 가슴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함이다.” 이탈리아의 성서학자 움베르토 카수토도 “좋은 아내란 그의 옆에서 조력자로 서며 영적으로 남편과 단단히 매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3. 아버지란 무엇인가?
동굴 속 황제인 남자가 영적으로 맺어진 아내와 하나가 되어 이제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아버지란 무엇인가』(르네상스, 2009)에서 융이 설립한 국제분석심리학회 회장을 지낸 분석심리학자 루이지 조야는 “서구 사회, 나아가 오늘날의 인류 전체가 아버지 상을 잃어버림으로써 거대한 공황 상태에 처했다.”고 분석한다. 조야는 역사적, 심리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아버지의 발생사적 연원을 추적하지만, 핵심은 ‘심리학적 관점’이다. ‘원형’, ‘집단무의식’ 같은 융의 심리학 개념을 근거로 서구 사회 집단무의식 안에서 발견되는 아버지 상의 원형을 찾아 서구 문화의 시원으로 들어간 뒤 거기서부터 역사를 밟아 내려온다.
1단계, ‘선사시대’에 아버지가 탄생했다. 여기서 조야는 아버지 곧, ‘부성’과 ‘남자’를 구분한다. 남자가 생물학적 속성이라면, 부성은 사회적·문화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라고 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자는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충동과 욕구에 직접적으로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충동과 욕구를 제어하고 인내, 의지, 지성으로써 삶을 계획하고 끌어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책임감이야말로 부성의 핵심 특징이 된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원시 인류가 진화의 어느 단계에 이르러 이런 특성을 지닌 아버지를 탄생시켰고, 그 탄생은 문명의 출발과 다르지 않았다.”
2단계, ‘고대’에서는 ‘문화적 형성물인 아버지’는 그 내부에서 ‘원시적 남성성’과 다툼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다툼을 신화적 장대함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그리스의 트로이 정복을 그린 『일리아스』의 경우, 부성과 남성의 대결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난다. 헥토르는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남성적 힘의 분출 욕구만을 따르는 거친 전사이다.『일리아스』에서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패배하는데, 남성이 부성을 이겼다는 사실은, 부성 내부의 남성이 지닌 힘의 파괴성을 잘 보여준다.
▲ 남성성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아킬레우스
▲ 아버지의 상징인 영화 <트로이>의 헥토르
트로이 함락 후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그린 『오디세이아』역시 부성과 남성 사이의 대결 드라마이다. 여기서는 ‘고향에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와 ‘한없이 충동에 이끌리는 오디세우스’의 대비로 부성과 남성의 대결을 잘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싸움은 거인-괴물 퀴클롭스와 오디세우스의 싸움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산 채로 잡아먹는 퀴클롭스가 원시적 남성성을 상징한다면, 지략을 발휘해 퀴클롭스를 제압하고 탈출하는 오디세우스는 부성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기나긴 유혹과 충동의 항해를 끝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아버지의 귀환이며 남성에 대한 부성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야의 분석은 좀 더 나아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문화의 이런 아버지 승리는 동시에 어머니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다. 부성은 남성을 제압함으로써 여성도 함께 종속시켜 가부장제를 확립했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자비로운 여신들』이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아이기스토스와 정을 나누고 아버지를 배신한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인 아들 오레스테스가 존속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는데(물론 이때 공범은 누나이자, ‘엘렉트라 콤플렉스로 유명한 엘렉트라이다), 판관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오레스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판관은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생산자가 아니라, 아버지 씨의 양육자일 뿐.” 이 판결은 서구 문명사에서 어머니의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신화적 판결을 과학과 철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이나 노예보다는 우월한 존재라고 보았던 것이다.『정치학』제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노예에게는 생각하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여성은 그 요소는 갖고 있으나 권능이 결여되어 있다. 아이는 생각하는 요소를 갖고 있으나 불완전하다.” 그리고 그리스를 이어받은 로마는 법률로 가부장제를 확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부성이 모성을 처단한 역사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3단계, ‘중세’에는 이렇게 확립된 아버지의 권위가 기독교라는 저항에 부딪혔다. 기독교는 천상의 신만을 아버지로 섬기고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부성적 권위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지상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남은 것은 ‘형제 관념’과 ‘평등 관념’이었다.
4단계, ‘근대’에는 18세기 계몽사상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아버지는 숙청당했으며, 산업혁명은 아버지들을 공장으로 밀어 넣어 무력한 존재로 만들었다. 우울증 걸린 아버지들은 술에 찌든 불량한 아버지가 되어 남은 권위마저 잃어버렸다.
5단계, 아버지의 상실은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것을 찾게 되는데, 이때 등장한 파시즘이 무력한 아버지들을 규합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며 텅 빈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했다. 조야는 이렇게 말한다. “파시즘이 겉보기에는 가부장적 권위의 발현 같지만, 실은 부성 상실의 반작용이었다.” 게다가 포스트모던의 부친살해는 현대의 질환을 더욱 그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파시즘이 부성 상실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포스트모던은 해결이 아니라, 무덤까지 이장하여 삭제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명의 위기는 ‘모성의 부활’인가, 아니면 ‘부성의 새로운 자리 비워주기인가’가 되었다. 따라서 조야의 다음의 말은 현대 문명의 질환을 치유하기 위해 ‘아버지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되찾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부성 상실 문제는 오늘날 더욱 깊은 문화적 질병으로 산재해 있으며, 그 질병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아야 한다. … 집단무의식 속의 아버지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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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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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삼손, 신앙의 영웅이 가야할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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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기를 뺀 영화 ‘삼손’
<십계>와 <벤허>를 기독교영화의 진수로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미지들은 모두 세실 드밀(Cecil B. DeMille)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949)로부터 나왔다. 드밀 감독은 근육질을 뽐내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빅터 마추어)을 히브리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어기고 이방인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데릴라(헤디 라마)와 사랑에 빠져 몰락하고 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연도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만큼 크게 성공했고 그 영향력은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손이 그리는 사랑과 모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았으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과 사자를 찢어죽이고 블레셋 사람을 몰살하는 액션장면은 자칫 선정성과 폭력성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란 성경의 기본 배경덕분에 윤리적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은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대중영화로서 충실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의 힘이 너무 큰 것인지 지금까지 그에 필적할 만한 ‘삼손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교회 교육용으로 나온 DVD나 TV용 드라마로 연출된 작품들이 있었지만 1949년작 <삼손과 데릴라>에 필적할 만한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삼손>이 2018년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했다. 나름 그 이유가 있다.
최신 영화 <삼손>이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 점은 제목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러난다. 성경이 주목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삼손’이지 ‘데릴라’가 아니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실 드밀 감독 이후 삼손은 항상 데릴라와 짝지은 캐릭터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삼손의 타락과 비극적 인생에 데릴라는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에 언급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삼손이다. 드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데릴라를 삼손과 대등한 비중을 부여하며 연출했다. 삼손의 고뇌만큼이나 데릴라의 유혹은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삼손 관련 영화들 가운데는 바로 데릴라의 유혹에 연출 역량을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삼손>은 데릴라의 선정적 유혹을 걷어내고 삼손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삼손이 놀라운 힘으로 벌이는 살육장면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한도 내에서 폭력이 절제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대중이 기대했던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며 더 나아가 선정적인 장면은 쏙 빠진 기독교 신앙영화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삼손>은 국내개봉을 앞두고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는 <삼손>을 만든 제작사의 면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손>을 제작한 퓨어 플릭스(Pure Flix Entertainment)는 미국에서 기독교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기독교영화전문제작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개봉된 퓨어 플릭스의 영화만 해도 <신은 죽지 않았다1,2>를 비롯해서 <예수는 역사다>, <신을 믿습니까> 등 이미 네 편에 달한다. 퓨어 플릭스가 미국에서 제작‧배급한 영화 타이틀이 수십편에 이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퓨어 플릭스 영화들은 계속 대한민국에 수입 개봉될 가능성이 높다.
퓨어 플릭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화 사역(MOVIE MINISTRY)’에 대한 사명선언문을 붙여놓고 있다.
‘우리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창작하는 것입니다(Our passion is to create films that impact our culture for Christ)’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세속적이며 상업적인 성공과 달리 기독교 신앙영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퓨어플릭스의 사명선언문은 <삼손>이 왜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영화 <삼손>은 삼손과 데릴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밀 감독의 영화와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 삼손과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과 그의 패역한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과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은 삼손의 정체성을 데릴라와의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적어도 90% 정도는 일치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삼손과 우상 다곤(Dagon)을 섬기는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묘사되며, 그 내면에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블레셋 왕 발렉이 우상 다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언급을 통해 다곤신이 진정한 신이 아닌 단지 통치의 수단에 불과한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고 있다.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은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저들에겐 상징이자 평민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겐 통제의 수단이야. 내가 다곤이고 너도 다곤이 될 수 있어.”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자 하는 과거 권력자의 속성을 한순간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한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삼손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약속을 소홀히 여긴데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나실인이란(민6:1-21) 구별된 자의 의미로 삼손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이 약속들을 모두 어기는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만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일로써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삼손이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에 붙잡혀간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삼손이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감동되어 있을 때 그 힘이 나타났을 뿐이다. 즉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을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고(삿14:6),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굴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일 수 있었다(삿14:19). 삼손의 힘의 근원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삼손은 말한다. “벌써 두 개를 어겼는데 머리마저 자르면 내 힘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
2018년 영화 <삼손>은 예술적이거나 대중적 의미보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영웅의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본적으로 사사기의 문화적 상황은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이를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이 보다 더 사사기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방 족속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으면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늘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잡아주고 인도할 지도자가 부재했던 까닭이다.
예술과 패션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하다. 지나친 상대주의는 진리마저도 개인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신앙과 전통 그리고 도덕적 규범은 무시당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삼손의 힘이 넘치는 외모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다. 누군가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도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의견으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영화 <삼손>의 한국어 포스터에는 ‘주여 당신의 힘을 주소서!’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삼손이 힘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던 표현이다. 어벤져스와 같은 만화적 영웅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화들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웅의 일갈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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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