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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삼손, 신앙의 영웅이 가야할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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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기를 뺀 영화 ‘삼손’
<십계>와 <벤허>를 기독교영화의 진수로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미지들은 모두 세실 드밀(Cecil B. DeMille)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949)로부터 나왔다. 드밀 감독은 근육질을 뽐내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빅터 마추어)을 히브리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어기고 이방인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데릴라(헤디 라마)와 사랑에 빠져 몰락하고 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연도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만큼 크게 성공했고 그 영향력은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손이 그리는 사랑과 모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았으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과 사자를 찢어죽이고 블레셋 사람을 몰살하는 액션장면은 자칫 선정성과 폭력성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란 성경의 기본 배경덕분에 윤리적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은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대중영화로서 충실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의 힘이 너무 큰 것인지 지금까지 그에 필적할 만한 ‘삼손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교회 교육용으로 나온 DVD나 TV용 드라마로 연출된 작품들이 있었지만 1949년작 <삼손과 데릴라>에 필적할 만한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삼손>이 2018년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했다. 나름 그 이유가 있다.
최신 영화 <삼손>이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 점은 제목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러난다. 성경이 주목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삼손’이지 ‘데릴라’가 아니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실 드밀 감독 이후 삼손은 항상 데릴라와 짝지은 캐릭터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삼손의 타락과 비극적 인생에 데릴라는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에 언급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삼손이다. 드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데릴라를 삼손과 대등한 비중을 부여하며 연출했다. 삼손의 고뇌만큼이나 데릴라의 유혹은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삼손 관련 영화들 가운데는 바로 데릴라의 유혹에 연출 역량을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삼손>은 데릴라의 선정적 유혹을 걷어내고 삼손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삼손이 놀라운 힘으로 벌이는 살육장면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한도 내에서 폭력이 절제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대중이 기대했던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며 더 나아가 선정적인 장면은 쏙 빠진 기독교 신앙영화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삼손>은 국내개봉을 앞두고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는 <삼손>을 만든 제작사의 면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손>을 제작한 퓨어 플릭스(Pure Flix Entertainment)는 미국에서 기독교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기독교영화전문제작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개봉된 퓨어 플릭스의 영화만 해도 <신은 죽지 않았다1,2>를 비롯해서 <예수는 역사다>, <신을 믿습니까> 등 이미 네 편에 달한다. 퓨어 플릭스가 미국에서 제작‧배급한 영화 타이틀이 수십편에 이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퓨어 플릭스 영화들은 계속 대한민국에 수입 개봉될 가능성이 높다.
퓨어 플릭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화 사역(MOVIE MINISTRY)’에 대한 사명선언문을 붙여놓고 있다.
‘우리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창작하는 것입니다(Our passion is to create films that impact our culture for Christ)’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세속적이며 상업적인 성공과 달리 기독교 신앙영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퓨어플릭스의 사명선언문은 <삼손>이 왜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영화 <삼손>은 삼손과 데릴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밀 감독의 영화와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 삼손과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과 그의 패역한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과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은 삼손의 정체성을 데릴라와의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적어도 90% 정도는 일치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삼손과 우상 다곤(Dagon)을 섬기는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묘사되며, 그 내면에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블레셋 왕 발렉이 우상 다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언급을 통해 다곤신이 진정한 신이 아닌 단지 통치의 수단에 불과한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고 있다.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은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저들에겐 상징이자 평민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겐 통제의 수단이야. 내가 다곤이고 너도 다곤이 될 수 있어.”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자 하는 과거 권력자의 속성을 한순간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한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삼손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약속을 소홀히 여긴데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나실인이란(민6:1-21) 구별된 자의 의미로 삼손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이 약속들을 모두 어기는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만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일로써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삼손이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에 붙잡혀간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삼손이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감동되어 있을 때 그 힘이 나타났을 뿐이다. 즉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을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고(삿14:6),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굴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일 수 있었다(삿14:19). 삼손의 힘의 근원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삼손은 말한다. “벌써 두 개를 어겼는데 머리마저 자르면 내 힘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
2018년 영화 <삼손>은 예술적이거나 대중적 의미보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영웅의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본적으로 사사기의 문화적 상황은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이를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이 보다 더 사사기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방 족속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으면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늘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잡아주고 인도할 지도자가 부재했던 까닭이다.
예술과 패션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하다. 지나친 상대주의는 진리마저도 개인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신앙과 전통 그리고 도덕적 규범은 무시당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삼손의 힘이 넘치는 외모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다. 누군가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도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의견으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영화 <삼손>의 한국어 포스터에는 ‘주여 당신의 힘을 주소서!’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삼손이 힘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던 표현이다. 어벤져스와 같은 만화적 영웅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화들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웅의 일갈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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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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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36] 한 마리 벌레처럼 오래 걸으니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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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이 책은 저자가 강원도 고성 명파초등학교에서 출발하여 인제-양구-화천-철원-연천을 거쳐 경기도 파주 임진각까지 DMZ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약 380킬로미터의 길을 열하루 동안 오롯이 걸었던 기록이다. 그것도 유월 하순의 무더위 속에 햇빛 피할 곳도 제대로 없는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어떤 때는 생애 최악의 폭우 속에 온몸을 맡기고 걷기도 했다. 생각만으로도 지칠 것 같은 그 고통의 길을, 아름다움을 기도하면서 한발 한발 내디뎠다.
걷는 가운데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길가를 걷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내달리는 차량을 보면서 ‘무례한 것은 곧 난폭한 것’이라고 느꼈다. 인적 드문 길을 가면서 제 자리에 서 있는 조그마한 표지판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한참을 산 뒤에 뒤돌아보아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 걸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체득했다.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을 밟고 있다는 느낌과 제대로 된 삶의 속도이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 땅을 새롭게 느꼈고, 너무도 빨리 변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속도는 걷는 속도와 닮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왜 하필이면 DMZ를 걸었느냐고 묻는 분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 길을 걷고 싶다는 분도 있으리라. 중요한 것은 그 길이 기도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 || 저자 한희철 목사는 현재 부천 성지감리교회를 섬기고 있다. 시인이며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은 머슴도 안 살아봤나》, 동화책 《네가 치는 거미줄은》 등이 있다. 꽃자리, 2018. 17,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작은교회 이야기》 / 한희철 / 포이에마
《어느날의 기도》 / 한희철 / 두리반
▌좌담: 김길구, 김수성 경성대 초빙외래교수, 김현호 기쁨의집 기독교서점 대표▌특별손님: 한희철 목사
▲ 한희철 목사는 DMZ 길을 순례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두 발로 이땅을 밟으면서 현실을 느꼈고, 삶의 적절한 속도를 찾았다고 한다. <’기쁨의 집’에서 오른쪽부터 한희철 목사, 김길구, 김현호, 김수성>
하나님께 지고 싶어 순례길을 떠나다
김길구 오늘은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를 쓴 한희철 목사님을 특별손님으로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DMZ 길을 걸었습니까?한희철 두어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래 전부터 걷고자 다짐했던 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산티아고 순례길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만, 우리 산하에도 걸어야 할 순례길이 많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또한 평소 나라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는 했지만, 허리 잘린 조국에 대해 항상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직접 현장을 걸으며 동강난 허리를 ‘호는’ 마음으로 걸었습니다. 이후 다른 분들이 좀 더 촘촘하게 꿰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호다’는 ‘헝겊을 겹쳐 바늘땀을 성기게 꿰매다’는 뜻].김현호 책에 보면, 목사님 스스로도 목회 중 일어난 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나섰다고 하는데….한희철 맞습니다. 교육관 건축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논어에 ‘군자는 의를 따르고, 소인은 이익을 따른다’는 구절이 있는데, 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돈과 관련된 문제는 소인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안타까웠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지요. 나 역시방향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닌가 하고.김수성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군요?한희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에, 그가 한 수도사와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그 수도사는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데, 하나님을 이기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지고 싶어서 싸우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하나님께 지고 싶어서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김길구 열하루 내내 걸으면서 기도했다, 그것도 태어나서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도했다는 말이 감동적이었습니다.한희철 새해가 되면 전 교인들에게 기도카드를 적게 합니다. 그 카드를 강대상에 올려놓고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제단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자세를 좋은 기도 자세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번에 걸으면서 기도를 해보니 이 자세도 상당히 좋은 자세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여태껏 나와 인연을 맺었던 분들을 떠올리며 기도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기도는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김현호 열하루 동안 걸으면서 모든 분들이 다 생각나던가요? 시간이 모자랐을 것 같은데.한희철 내가 그렇게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지 않아서 그런지, 열하루 동안 내 기억 속에 있던 모든 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 보니 얼굴이나 이름이 아니라, 먼저 그분들의 아픔과 만나게 되더군요. 즉, 모두가 무엇이든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에는 아픔 없는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기도는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나와 인연을 맺은 분을 위해서 기도를 쉬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김수성 걸으면서 기도하는 것 못지않게, 자연과 함께 드린 예배도 인상적이었습니다.한희철 예배는 내용과 함께 형식도 중요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 갔을 때 한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예배시간이었는데, 그레고리안 성가로 이어지는 수도자들의 예배 자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걷는 중에 맞이한 주일,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가 찬송하고, 나무가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계곡을 따라 부는 시원한 바람이 축도를 한 예배는 결코 혼자 드린 예배가 아니었습니다.김길구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한희철 사실 갑자기 떠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준비가 소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걷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코스는 함광복 장로님께서 일일이 적어준 로드맵에 의존함으로써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함 장로님은 DMZ에 관한한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또한 중간 중간 교회 장로님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기꺼이 동행해주셔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김현호 걷는 동안 날씨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던데.한희철 유월 하순이었는데도 삼복더위 못지않았습니다. 걸핏하면 스마트폰에 무더위 주위보가 날아와 ‘바깥활동은 삼가라’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죠.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을 걸을 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특히 진부령을 오를 때는 뇌성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우박까지 쏟아졌는데, 내가 여태껏 살아오면서 만났던 가장 심한 악천후였습니다.
걸으면서 ‘삶의 적절한 속도’ 깨달아김수성 저도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길, 사람보다 차를 중시하는 길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한희철 DMZ 길도 아찔한 곳이 많았습니다. 인도가 아예 없는 길도 여럿 있었고, 있다 하더라도 주행하는 차의 폭력적인 운전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특히 탱크가 내 옆으로 지나갈 때는 머리털이 곤두설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를 피할 곳이 마땅찮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문득 2002년 경기도 양주 마을도로에서 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떠오르더군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길에 대해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김길구 오래 걸음으로써 삶의 적절한 속도를 찾으셨다고 했습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우리 사회는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너무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한희철 삶의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에서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우리 인생은 평생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래 걸으면서 내 발이 비로소 이 땅에 딛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 것이지요. 참으로 중요한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김현호 순례길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무언가 변화가 있었나요? 교인들의 반응 같은….한희철 특별히 변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지요. 더 이상 상황에 끌려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비가 되기를 기도하며 한 마리 벌레 같이 걸었지만, 오히려 번데기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김수성 그래도 번데기가 되었으니 한 단계는 진전한 셈입니다. 번데기를 거쳐 때가 되어야 나비가 될 수 있으니까요[웃음].김길구 이 책을 처음에는 편하게 읽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와 북한의 관계 등 현실을 생각하면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한사연 목사님의 순교 등과 관련된 ‘바이블루트’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쁘신 가운데서도 이렇게 부산까지 오셔서 자리에 함께해주신 한희철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안재경 목사의 《십계명, 문화를 입다》(SFC, 2017)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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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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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6 :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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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과 어린양 신학, “미투”
1. 종말론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테러와 악의 존재에 대한 답과 그 의미를 성서에서 찾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힘을 빗대면서, 공식적으로 ‘악의 축’과 싸우는 미국인들의 힘을 성서에서 찾았다. 하지만 테러와 악에 대하여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많은 해답들을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으며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종말론(Eschatology)에서도 볼 수 가 있다.폭력과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지구촌에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와 같은 묵시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종말론과 같은 잘못된 종말론이 판을 치고 있는 이 때에 기독교 근본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종말론 소설들, 영화,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게임 등의 ‘휴거산업’은 우리의 영성에 어떠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가? 더 나아가 잘못된 종말론의 영향으로 인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국제 정치에서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 실제로 미국의 종교사회 학자들은 미국 기독교인의 45%가 휴거나 아마겟돈 전쟁과 같은 부류의 종말론을 믿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가령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규정해 버린 트럼프의 정치적 행동을 무조건 찬성하는 것이다.사실 종말론에 관한 입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우주의 마지막에 대한 신학적 이론이다. 그 근거는 마태복음 24장 예수께서 언급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조직신학의 한 부분에서 ‘개인의 죽음’과 ‘인류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다루게 되었는데, 부활 승천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때에 다시 재림하는 것이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이다. 슈바이처 (A. Schweitzer)의 연속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불트만(R.Bultmann)의 실존적 윤리적 종말론, 몰트만(J.Moltmann)의 혁명적 종말론, 오스카 쿨만(O.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현대신학자들의 종말론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슈바이처와 바이스가 예수의 종말론을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으로 미래 대망적 종말론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미국의 천년왕국 운동자들에 의해서 재강조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견해로, 도드의 실현된 종말론에서 시작되어 여러 가지 실존주의적, 윤리적 종말론과, 최근에 이르러 정치신학과 결부되어 혁명적 행동의 이념으로 이해된 종말론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을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약속과 성취’라는 구조 안에서 그 나라의 양면성(‘이미’와 ‘아직 아니’)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측면과 차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했으나, 아직도 종말론(하나님 나라)은 풀기 어려운 신비로 남아 있다.
2. 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종말에 관한 소설들을 살펴보면 성서의 문자를 폭력적으로 해석하며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설교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유엔의 평화 정책이 실패하였고, 지진과 같은 자연 재앙과 테러 등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가르친다. 더구나 이들 중 몇몇은 신의 각본에 의한 우주적 종말인 피비린내 나는 ‘아마겟돈 전쟁(Armageddon)’ 속으로 이 세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의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 한 소설이 성서의 이야기를 왜곡하며 꾸며낸다는데 있다.아마겟돈은 세대주의 종말론이 갈망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사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단 한번 등장한다(계 16:16). 그러나 세대주의 종말론은 이 단어가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아마겟돈이 단순히 단 한번 수행되는 전쟁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의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곳곳에서 수행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첫 번째 전쟁은 페트라(Petra) 또는 에돔(Edom) 지역(현재 요르단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곳은 ‘주님의 옷이 적들의 피로 얼룩지는 곳’이며 상상할 수 없는 두렵고 충격적인 군사적인 참상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아마겟돈 전쟁을 갈망하는 이유가 예수의 재림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는 폭력과 전쟁을 일삼으면서 재림하지 않으신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토록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재림에 열광하는가? 어떤 이유로 그들은 피와 죽음을 강조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성자들은 땅에서 하늘로 휴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하늘로 휴거 된 이후, 저 높은 하늘에서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과 세상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과 위배되는 행위이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자신들은 폭력의 고통에서 탈출하여 휴거 된다는 아주 이기적인 신학이다. 마치 영화관 앞자리에서 총격전을 관람하듯 휴거된 이들은 하늘이라는 2층 특별석에서 지구에 남아 있는 자들의 종말을 구경하겠다는 것이다.사실 요한계시록은 근본주의자들이 익히 알듯이 선한 서구(미국과 이스라엘)가 악한 중동(구체적으로 아랍 이슬람)을 쳐부수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평화를 외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로 하여금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으로(God’s Shepherding Lamb) 우리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며 폭력과 힘의 구조를 성찰하도록 가르친다. 동시에 억압의 구조에 도전하고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가르친다. 더 나아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임을 이야기 한다. 이렇듯 요한계시록의 오독(거짓된 휴거와 기획된 미래)은 파괴주의 종말론을 형성하고 종말론적 광신을 불러일으킨다.
3. 어린양의 신학예수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1:1)’ 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예수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지, 중동이나 유럽의 마지막 시대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 예수의 이미지는 처음에는 검을 가진 위엄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나중에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요소로, 144,000명의 거룩한 시온 산 전사를 소집하고(14:1), 악한 적과 싸우며(17:14), 전쟁이 끝난 후에 결혼을 하며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19:7, 22:3). 실제로 요한이 사용한 헬라어 ‘양’은 단순히 어린양이 아니라, 정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어린 양’, ‘작은 양’(아르니온)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오직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을 파송 할 때만 사용한 것이다. 가령,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10:3).” 그 어떤 묵시문학도 신적인 존재에 대해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유대교의 관점에서는 결코 어린양이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가장 연약한 모습의 예수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한 표현이 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셨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로마제국의 폭력을 무효화시키는 하나의 대안으로 1세기 초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군사적 승전 이데올로기(팍스 로마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에 쓰여 졌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용감하게도 로마가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선포한다. 세상은 그 어떤 제국이나 강대국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나 노예들이 다스린다는 것이다. 요한이 있었던 에베소는 노예무역의 중심적인 도시로서 초대기독교인들은 이 도시에서 노예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약 30% 이상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요한은 노예들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획기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가장 힘없는 노예들에게 요한의 이러한 약속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었을까! 어린양은 식민지 노예들에게 제국주의 고통에서 구출하며 폭력, 욕심, 두려움, 그리고 불의에 중독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출애굽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오늘날 가장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진정한 힘이 과연 무엇인지 보여준다. 곧. 우주의 가장 중심에 서 계시는 예수의 힘은 하나님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이사야 53장의 내용(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을 기억에 떠올리면, 예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 침묵하는 어린양과 같은 이미지와 유사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은 결국 승리로서 장식한다. 그 승리는 군사와 전쟁을 통한 승리가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희생함으로써 승리를 장식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의 시작부터 끝까지 바로 이러한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약함에서 드러난다는 놀라운 아이러니의 신학인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바울의 서신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어린양 신학은 요한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악은 폭력과 군사적인 힘에 의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린양의 사랑의 희생으로 정복된다는 놀라운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신학은 희생자가 승리자가 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어린양 신학은 진정한 승자(Nike), 곧 최후의 나이키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양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이들 역시 ‘승리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핵심이다. 사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들은 폭력적인 장면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폭력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의미들을 파악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자와 정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바로 어린양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싸움이나 전쟁을 통해 얻어지는 승리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서 얻어지는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대안적인 면을 가진 ‘어린양 신학’은 세대주의 종말론이나 파괴주의 종말론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귀중한 메시지이다.
4. 어린양, 미투이러한 어린양의 비전은 놀라운 이미지이자 동시에 적개심을 없애는 위대한 비전이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의 승리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요한계시록의 어린양 이미지는 너무나 나약하고 보잘것 없기 때문이다. 군사적 힘을 의지하는 관점에서 보면 어린양의 이미지는 비폭력을 상징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잔인한 살육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자기 자신을 살육의 희생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의 이야기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역시 남성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잔인한 폭력의 희생양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어린양과 같은 비폭력적 고백운동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어린양과 같은 힘을 가지라고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어린양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기를 가르친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린양과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사실 어린양의 힘은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힘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랑의 힘이다. 어린양의 힘은 비폭력적의 힘이자,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이다. 미투 운동이 그렇다. 어린양의 힘은 견고한 힘으로서 용서하는 힘이다. 미투 운동이 지향해야 할 목표이다.이 험난한 세상에 우리는 언제든지 ‘어린양의 힘’과 ‘짐승의 힘’ 둘 중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어린양의 힘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의 정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정의(혹은 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어린양의 힘은 희망과 저항을 향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이다. 또한 어린양의 힘은 짐승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래이며 결속력이다.우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하여 비폭력적인 어린양의 힘과 증언으로 이 불의한 세상(짐승들, 즉 바벨론/로마제국)을 정복하였음을 듣는다. 그들은 신성한 하나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초대하여 생명의 강과 나무를 상속하실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복된 소식은 이미 우리가 이 하나님의 비전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어린양이 가신 비폭력의 길과 정의의 길처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양, 미투!” 왜냐하면 이러한 새 세상으로 어린양은 우리 모두 오라고 초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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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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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새롭게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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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시킨 역사와 영화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막달라 마리아-부활 의 증 인 >(Mary Magdalene, 2017)이 개봉예정이다. 영화 <라이언>(Lion, 2016)을 통해 인도출신 입양아가 동생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작품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다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 역에 연기파 배우인 루니 마라, 예수 역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역을 맡아 유명해진 호아킨 피닉스를 등용시켜서 잔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의 조합이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TV가아닌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성서영화(Bible Cinema, 기독교신앙의 증진이나 전파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된 성서영화들은 모세의 출애굽사건(엑소더스:신들과 왕들, 2014)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노아, 2014)과 같이 일반대중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건들을 다루거나, 예수의 극적인 삶을(부활, 2016) 보여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과거 성서영화의 전통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일로서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도했던 세신 데 밀(CecilB. DeMille) 감독의 영화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즉 성서영화의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핵심문제는 사실 소외에 있지 않고 왜곡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성경과 다른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화는 잘 못 반영했거나, 교회가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영화는 그대로 실어 날랐다고 볼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과는 다른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등장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감독이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성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나 ‘죄인’으로 언급된 일은 없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단지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 내준여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되게 한결정적 원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40~604)의 실언 때문이다. 그는 591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동시에 그녀를 창녀로 설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가톨릭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르기 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게 되었다. 1969년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다.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성과(마26:6-7) 동일시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그레고리우스1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은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이를 참회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 한국의 개신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조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연인 혹은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2006)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제자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결혼한 후 낳은 자녀의 후손이 프랑스로 건너가 메로빙거왕조를 이루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쏟아냈었다.기독교 역사와 현대문화 할 것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교회 안팎으로 늘 있어왔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제자의 위치로 복권시킨 영화<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은 성경에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첫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 배경과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는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미혼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눅8:2)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정혼을 거부한 가운데 미친 상태에 놓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귀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렸는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일곱 귀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정황으로 봤을 때 딸이 부모의 정혼을 거부하는 일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는 점에서 감독의 묘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없는 연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 및 열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했고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눅8:3)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남성 제자들과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견제하며, 남성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거듭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록 여성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와 달리 진정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셋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발견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친밀성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온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 반면에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단독으로 만난 여성제자로서의 면모는 매우 강조된다. 그것은 주변에 발각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제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를 강조하다 일으킨 실수
복음주의 기독교권에서 성서영화는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곤했다. 하나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의 개입여부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묘사나 언급은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연출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구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펼치는 태도 역시 기독교문화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기독교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여기서 드러난다. 성경과도 부합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시각적 연출력을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연출은 마치 한편의 시를 쓰듯 축약과 상징을 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사와 장면을 통해 참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고통 앞에 선 인간의 면모를 잘 묘사하고 있다.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이다. 이 성만찬은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한 자리로서(마26:20) 그 인원이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성찬식 장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인원구성을 감독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막달라 마리아를 성찬식 장면에 집어넣은 것은 결국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여성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시각에 달려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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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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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35] 정서와 영성은 아날로그 영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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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날로그의 반격
아날로그는 살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온통 디지털로 뒤덮인 이 세상에 아직도 아날로그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아날로그가 건재하고 있는 이유를 꼼꼼하게 하나씩 제시한다.저자는 새로 이사한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준레코드’라는 상점이 문을 연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CD와 인터넷 다운로드로 시작한 디지털 음악은 차츰 파일로만 유통되다가, 특히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스트리밍으로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게끔 변신했다. 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LP 레코드점이라니, 뿐만 아니라 디지털 세대인 젊은이들이 오히려 LP 레코드를 찾는 기현상(?)까지 나타나다니….이 책에는 이외에도 아날로그로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종이 수첩과 책, 보드게임, 학교, 오프라인 매장 등을 죽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심의 일격을 날린다. 디지털의 본거지 실리콘밸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아날로그의 현상을 하나씩 적시한다. 내로라하는 IT 기업에서 명상이나 선(禪)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허락하고, 종이와 펜을 사용하여 먼저 디자인하는 교육을 시키고, 갈수록 대인 커뮤니케이션을 장려하는 등 아날로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 기업의 직원들도 아이들은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들도록 교육하고 컴퓨터조차도 없는 대안학교에 보낸다.
◈ 《아날로그의 반격》 || 저자 데이비드 색스(David Sax)는 캐나다의 문화 전문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이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 어크로스, 2016. 16,8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국원의 문화이야기》 / 신국원 / IVP《과학의 영혼》 / 낸시 피어시 / SFC
▲ 느리고 불편하지만 아날로그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업계는 누구보다 아날로그를 중시한다고 한다. 아날로그의 가치에 충실할 때 디지털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림출처: www.nmgncp.com]
이번 시간에는 지난번에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과 관련,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 기독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아날로그’였다.
아날로그, 디지털 만능 속에 살아남다김길구 먼저 지난 시간에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시작하도록 합시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일상화되면 일자리 문제는 물론이고, 우리의 신앙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교회가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김현호 아날로그가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가 틈새시장으로서 버티고 있는 다양한 품목과 현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적절하게 활용하면 좋은 대안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수성 사실 디지털 세상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우리나라와 서구 사회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디지털을 산업적 측면에서만 소개하고 홍보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뒤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에 비해 서구 사회는 문제점도 직시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도 충분히 살펴봐야 합니다.김길구 LP레코드판의 보급을 보면, 분명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LP 판매량이 2007년 99만 장이던 것이 2015년에는 1200만 장 이상으로 늘었고, 연간 성장률도 20%를 웃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는 2015년에 새로 생산된 레코드판이 3000만 장 정도 될 것으로 추산합니다. 더구나 이 LP판을 사는 소비자층이 20대를 주축으로 10대까지 가세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미미한 실정이죠.김수성 LP판의 경우 가격 문제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음악을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또는 염가로 다운로드하든지 스트리밍하여 듣는데 익숙해진 젊은 층이 기기를 구입하려면 적지 않은 돈이 들기 때문이죠. 외국에서는 요즘 디지털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저가의 턴테이블이 많이 보급되고 있는데, 이런 것이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소개되고 있습니다.김현호 저는 서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종이와 관련된 내용이 더 눈에 들어옵디다. 종이 수첩이 아직 건재하고 있고, 종이책은 전자책에 전혀 밀리지 않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 몇 년 전 전자책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학자들은 곧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자료에 따르면 전자책 리더 판매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관계는 아날로그’라는 의미 되새겨야김길구 아날로그가 아직도 건재하는 이유에 대해 ‘실재감’ 때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스트리밍한 음악은 듣고 나면 사라지죠. 전자책도 내용만 스크린을 통해 글을 읽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날로그는 불편하고 더디더라도 ‘내’가 그것을 직접 만지고 조작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오감을 통해 ‘내것’이라는 실재감을 느끼는 것이죠.김현호 디지털의 가장 큰 특징은 빠르고 간편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뒤떨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특히 전자책을 볼 때와 종이책을 볼 때 뇌의 활동에 차이가 많다고 합니다. 즉, 종이책을 볼 때 뇌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이로 인해 더 오래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죠.김수성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만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이책은 그 책을 드는 순간부터 오감이 작동하죠. 책의 크기와 두께, 종이의 질감, 표지 그림과 제목의 서체 등 모든 것이 독서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줄을 긋는다든지 간단하게 메모를 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책을 읽는 것에 속하는 동작입니다.김길구 이 책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관계는 아날로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이 가상공간에서 SNS 등으로 많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정작 필요할 때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현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서도 되새겨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김현호 우리 교회와 예배가 디지털화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교회 공동체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성에 심어준 독특성은 모두가 아날로그일 것입니다. 느리고 불편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단 뒤편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은 자칫 성도들을 예배를 ‘보는’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김수성 스크린을 통해 성경말씀과 찬송가 가사를 보여주고 교인들은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게 현실이죠. 성경봉독할 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 교인이 성경 구절을 찾고, 마찬가지로 찬송가도 함께 찾는 과정이 예배에 있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디지털안식일 운동 전개하길김길구 “정서와 관련된 모든 단어가 아날로그 영역에 있었어요”라는 말도 의미심장합니다. 디지털의 특징은 무미건조합니다. 우리 교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성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아날로그는 따뜻합니다. 웹진과 종이로 만든 소식지가 신자들에게 훨씬 더 감동을 줍니다.김현호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일반적으로 종이잡지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언급했고, 얼마 전 〈중앙일보〉에서도 보도했듯이, 오히려 소수의 마니아들을 위한 독립잡지는 훨씬 활성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잡지가 다양화되고 전문화되고 고품질화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이잡지가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때문이지요.김수성 몇 년 전 서구사회에서 일어난 ‘디지털안식일’ 운동을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전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즉,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아예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지 않든지, 최대한 절제하는 운동입니다. 비슷하게 ‘디지털 다이어트’ ‘디지털 금식’이란 말도 사용합니다. 이 책의 저자도 신자는 아니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디지털안식일을 만들어 지키고 있다고 고백합니다.김현호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아예 스마트폰 등을 집에 놔두고 오는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에 따른 준비를 미리 하게 되고, 부수적인 효과도 극대화될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예배시간에 폰을 쳐다보는 일은 사라지겠죠. 또한 교인들 간에 대화가 늘어남으로써 신앙이 ‘이야기’로 계속 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김길구 디지털은 우리가 멈출 수 없는 흐름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가 언급했듯이, 디지털 사회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때까지 중시해온 ‘가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교회가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앞으로도 이 사회에서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한희철 목사가 쓴 《한 마리 벌레처럼 DMZ를 홀로 걷다》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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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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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5 : 젊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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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영화 <택시운전사>와 <1987>에 열광하는 40-50대가, 지금의 20-30세대가 열광하는 암호화폐, 가령 비트코인(BTC)으로 대표되는 가상화폐의 발생사적 기원에 관한 인문학적 통찰이 없다면, 또한 전 세계 젊은이들이 방탄소년단(BTS)에 신앙을 고백하는 이 현실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로 그들이 <1987> 속 전두환이며, 박처장(김윤석 분), 나아가 오늘날의 적폐세력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젊은 세대(10-30대)의 분노는 그들 자신의 문제(가령, 게으름이나 불성실 같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택시운전사>의 광주, <1987>의 함성 이후, 지금의 50-70세대가 만든 것이다.
▲ 비트코인
1. 20-30세대: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청춘
‘88만원 세대’로 젊은 층을 지칭했던 우석훈은 최근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비트코인 열풍을 통해 20-30세대의 욕망을 잘 포착하고 있다. “암호화폐 투자 광풍은 젊은 세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실패이다.” 사실 욕망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정확히 말하면 권력구조의 산물이다. 따라서 각자 도생에 익숙한 생존주의 세대인 2030세대가 <택시운전사>와 <1987>을 보고 감동받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청춘들의 욕망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무지라고 할 수 있다.
20-30세대가 성공할 희망이 없어 불로소득을 노리는 암호화폐 투기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하는 60-70세대, 계층이동 사다리가 사라진 탓에 젊은층이 ‘투기세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40-50세대 때문에 지금 청춘들의 세상은 우리와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사실 419혁명을 20대에 겪은 세대(현재 70대)는 여의도와 강남 개발로 재산을 형성했다. 유신을 20대에 겪은 세대(60대)는 경기 과천과 서울 개포동, 목동, 상계동개발 수혜자이다. 6월 항쟁의 주역인 386세대(50대)는 강남과 신시가지 아파트 값이 3-4년만에 두세 배씩 뛰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분당, 일산, 평촌 등의 신도시를 기반으로 중산층이 됐다(물론, 이들은 그 세대의 극소수이며, 대다수 사람들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20-30세대는 어떤가? 투기공화국의 역사 속에 이들에게 비트코인 투기를 중단하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정치의 민주화는 경제의 민주화를 완성하지 못했으며 도덕성의 이름은 처음부터 정치민주화에 없었다.
암호화폐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단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암호화폐의 원천기술인 블록체인을 지배하는 자가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이라는 것. 주식과 달리 24시간 거래되는 가상화폐의 특성상 실시간으로 등락하는 주가에 투자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투자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전용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그들의 은어가 일상생활에서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데, 지난해 말 최고의 유행어 중 하나인 ‘가즈아’는 토토나 주식 투자자들이 사용하던 언어였지만,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유행을 타게 된 신조어이다. 이 유행어 하나가 20-30세대를 이해하는 인문학적 통찰이 된다.
그렇다면 왜 20-30세대는 암호화폐, 비트코인에 열광하는 걸까? 그들의 말을 옮겨보자. “한탕주의, 도박 등이 만연해 있고 집값, 결혼비용, 육아비용 등의 부담을 사회가 줄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부동산 신화처럼 사두면 무조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산이 없는 세대가 단돈 몇 만원을 투자해 수십, 수백 배까지 돈을 불릴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매달 넣는 적금 이자에 비해 ‘한방에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니 눈이 뒤집혀졌다.” “부모세대가 부동산, 주식에 열광했듯 비트코인에 열광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분석해보면,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정부와 중앙시스템에 관한 의구심이 그 중심에 놓여있다. 사실 화폐제도는 회계시스템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개인간(P2P)의 ‘정직한’ 회계시스템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기술로 새화폐시스템을 만든 것이 바로 암호화폐이다. 이 암호화폐가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2008년 월가 파동이 터진 후, 다시 말하면 국가와 중앙은행 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이었다. 이러한 가상통화의 혁신성은 은행과 국가라는 ‘제3자’의 개입 없이 지급결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3자들에게 뜯기던 중개 수수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은행 VIP가 아니면 늘 출금과 계좌이체에 몇 백원이 뜯기지 않는가?
따라서 비트코인과 그 기반 기술인 블록체인은 언젠가 국가 혹은 중앙은행(제3자)의 법정화폐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시민들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착취와 간섭을 일삼았던 제3자를 축출할 것이다. 이것이 만약 정치와 산업(용역 대행업체), 선거와 민주주의(가령, 대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에도 가능하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바뀔까? 지금 20-30세대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고, 비트코인의 P2P라는 정직한 회계시스템과 블록체인의 보완 기술은 그 시대를 여는 세례 요한이 될 것이다.
2. 10대들의 신앙의 대상, 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우릴 공부하는 기계로 만든 건 누구일등이 아니면 낙오로 구분 짓게 만든 건 틀에 가둔 어른이란 걸 쉽게 수긍할 수밖에 단순하게 생각해도 약육강식 아래 친한 친구도 밟고 올라서게 만든 게 누구라 생각해” (BTS, 가사 중 일부)
‘연애, 결혼, 출산, 내집마련, 취업, 취미, 인간관계’ 등을 포기한 ‘7포 세대’. 지금 이 시대의 청춘들의 미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포기한 희망의 단어들로 쌓여가고 있다. 왜 포기할까? 의지가 약해서? 신앙이 없어서? 그렇지 않다. 포기의 중심에는 경제적 문제가 있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고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두 손에 남은 건 갚아야 할 학자금 대출과 취업걱정이다. 눈이 높아서 취업을 못한다고 기성세대는 말하지만, 매월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면 편의점 시급수준의 월급으로는 어림없다(더 기가 막히는 것은 최저 임금 인상으로 경제가 무너진다는 보수언론과 보수정치인들이다). 부모님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면 빚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지금의 청춘들이다. 따라서 황새(금수저)들은 금수저보다 좋은 길로, 뱁새(흙수저)들은 흙수저보다 못한 길로 가는데, 그건 시간문제다. 경제에 성서적 희년(Year of Jubilee)은 없고, 희망은 사라지고, 고통은 친근한 친구로 바로 옆에 자리 잡는다.
“3포 세대 5포 세대 /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 세대 / 언론과 어른들은 의지가 없다며 우릴 싹 주식처럼 매도해 / 왜 해 보기도 전에 죽여 걔넨 enemy enemy enemy / 왜 벌써부터 고개를 숙여 받아 energy energy energy / 절대 마 포기 you know you not lonely / 너와 내 새벽은 낮보다 예뻐 / So can I get a little bit of hope yeah / 잠든 청춘을 깨워 go” ‘BTS, <쩔어>가사 중 일부)
BTS는 “이런 세상에 살게 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비난은 무시하고 죄책감을 벗어나 너의 담론을 만들어 내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BTS가 옆에 있어준다.”고 희망을 준다. “노력만으로 쉽게 극복되는 것도 아니니 네 탓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과 불의를 평등과 옳음으로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BTS는 황새들만을 위한 룰을 바꿔야 한다고 노래한다.
“룰 바꿔 change change 황새들은 원해 원해 maintain 그렇게는 안 되지 BANG BANG 이건 정상이 아냐” (BTS, <뱁새>가사 중 일부)
그리고 이러한 룰을 바꾸는데, BTS는 ‘디지털’과 ‘부드러움’을 내세운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겨울 촛불의 따스한 혁명이 세상을 바꾼 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10대, 아니 세계의 청춘들은 BTS의 음악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BTS가 내 인생을 바꿨어요.”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을 때 BTS의 음악 하나로 버텼어요.” “차마 마주보기 힘들었던 제 모습을 똑바로 보게 되었고 이제는 사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져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고마웠어요.” “노래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BTS를 알고 위로받았으면 좋겠어요.” “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꿈을 포기하지 말라는 가사는 많이 들어봤지만 마음에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어요.”
이것은 간증이다. 복음송가가 아니라, 찬송가가 아니라, BTS의 음악을 듣고 청춘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얻는 것이다. 대중음악이라고 폄하한다면, 세속음악이라고 무시한다면 교회는 영영 기성세대의 무덤이 될 것이며 그 무덤에 꽃을 갖다 줄 청춘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가사를 살펴보면 BTS의 음악은 한 사람의 인생을 빛나게 바꾸려는 선한 의도,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주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는 힘을 가진 메시지와 철학이 깃들어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가사가 일반적인 단련의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와 음악에 실려 가장 파워풀한 미디어들을 통해 청춘들의 삶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차민주, 『BTS를 철학하다』, 비밀신서, 2017 참조). 목하 BTS는 10대들의 신앙의 대상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언을!
“창의성은 지그재그(zigzag)로 온다.”라고 워싱턴대학교 심리학과 키스 소여(Keith Sawyer)교수는 말한다. 어떤 유형의 창의성을 연구해도 창의성이 발생하는 과정은 똑같다. 창의성은 단한 번 번쩍하고 눈부신 섬광으로 세상을 밝히는 번갯불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조치들, 약간의 통찰력, 점진적 변화를 통해 왔다는 것이다. 곧, 창의성은 ‘지그재그’로 온다는 것이다(키스 소요, 『지그재그, 창의력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청림출판, 2014 참조).
이러한 지그재그의 발생사적 기원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기원전 5000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신석기 인간이 만든 빗살무늬토기가 바로 그것이다. 토기 위에 새겨놓은 ‘∧∨∧∨∧∨’ 이러한 빗살무늬가 바로 지그재그 패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그재그가 산업디자인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두 차례 세계대전 후이다. 악몽 같은 전쟁을 목격한 인류는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인간 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성으로 쌓아올린 반듯한 세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그재그로 상징되는 비정형적 디자인의 탄생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불러온 것이 지그재그라는 것은 지그재그가 이성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휘돌아 나가는 강이나 긴 세월 쌓인 퇴적층 등 자연은 지그재그와 가깝다.
10대로부터 20-30세대들이여! 삶은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인생이 아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는, 굴곡 있는 삶, 탄탄대로가 아닌 인생. 우리의 삶은 바로 지그재그의 삶과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2018년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 2018년 새해 첫날부터 직선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인 것이다. 따라서 BTC이 주는 ‘한방의 매력’도, BTS이 주는 ‘저항의 매력’도 한 템포 쉬어가며 돌아가는 여유도 필요할 것이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언제국가가 헛된 희망이나마 품게 해줬냐” 그렇다. 맞는 말이다.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밑 칸부터 없어진 세상, 능력주의가 비집고 들어가야 할 좁은 입구에 배경과 연줄, 학연이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앉은 세상에 대한 그들의 절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의 이익이 궁극적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방식으로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극소수의 대박을 위해 대다수가 눈물흘리는 것은 MB의 다스로도 족하고, 최순실-박근혜의 야합으로 족하다.
‘분노’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분노할 수 있으며, 그러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도 말한다. “적절한 상대에 대해,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목적으로,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하기는 어려우며, 모두가 그런 능력을 지니지는 못한다.” 자, 지금부터 청춘들이여,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분노를 표출해 보자. 10대들이여, 포기하지 말고 돌아돌아 “가즈아!” 20-30세대여, 힘들고 어렵더라도 “존버!” 그때 마침내 ‘떡락’이 아니라, ‘떡상’의 세상이 올 것이다. 우리의 스승 예수도 그렇게 살았고, 우리더러 그렇게 살라 한단다.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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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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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즈니, 내세를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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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코' 포스터
디즈니가 말하는 ‘좋은 죽음’
디즈니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가 만든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소년 미구엘이 죽음의 세계에서 조상(고조할아버지)을 만나 음악을 금지한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는 낭만적 모험을 그리고 있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증명되기라도 하듯 <코코>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노래와 춤이 있는 흥겨운 축제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코>가 묘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배경은 멕시코의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로부터 가져왔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망자의 날’은 매년 10월 31일에서 11월 2일 까지 벌어지는 멕시코의 국민축제의 날로써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를 벌인다. ‘망자의 날’은 고대 아즈텍문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식과 결합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망자의 날’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올 만큼 대중화된 데에는 죽은 자들이 ‘망자의 날’에는 저승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생각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는 대중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는 가톨릭이 지키는 모든 성인 대축일(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전날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망자의 날’이 연계되면서 국가적 축제일로 변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멕시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묘사한 <코코>의 장점은 죽음을 가족의 사랑과 연계시킴으로써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지낸 최준식 교수가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죽음은 외면되고 있고 부정적이며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놀라운 것은 부활과 천국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현실에서 <코코>는 가족의 사랑을 연계시키면서 죽음을 삶 가까이 끌어들인다. 특히 가족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야 저승으로부터 죽은 영혼이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가족의 가치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코코>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죽은 조상과 현실 세계의 가족과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통해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기억하는 한국의 유교전통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 보는 만화영화 치고는 달리 죽음과 내세를 묘사하는 심도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는 한국에서 27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코>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관객이 발견한 것은 ‘좋은 죽음’이다. ‘좋은 죽음’은 살아있을 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일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디즈니의 내세관에 딴지를 걸다
가족과의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죽음을 통해 언급한 <코코>의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세관은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 오락영화인 까닭에 굳이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입하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만큼 허구와 진실을 분별하지 않은 채 영화관 밖을 나선다면 영화가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코코>는 기독교의 내세관이 갖고 있는 핵심 사항인 심판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 <코코>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해골 모양을 한 영혼들이 세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를 독살한 음악가조차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존재도 그리고 최소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따른 심판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히9:27)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심판과 형벌에 따른 지옥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보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 책임을 일차적으로는 영화 제작에게 물을 수 있지만, 아울러 교회에도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부드러우며 교양이 넘치는 설교는 현대 설교자의 덕목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시키기 쉬울 뿐이며 전도가 중요한 현대교회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올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현대인들은 <코코>가 보여주는 내세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옥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4-45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히 낳은 모습이었다.
디즈니의 위력을 경계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이 한창이었던 1959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제1서기장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가 이 초청을 받아들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측 인사에게 디즈니랜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경호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떠나면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말할 만큼 그의 마음은 미국 방문 내내 디즈니랜드에 꽂혀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디즈니랜드에 마음을 둔 것은 디즈니의 만화 때문이었다. 레닌에 이은 스탈린의 강권통치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어떤 문화들도 소련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었다. 그런데 단 예외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코흘리개 애들이나 보는 만화에는 미국 자본의주의 이념적 내용이나 색깔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고, 단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해 12월, 524억 달러(약 57조원)를 들여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하나인 21세기폭스사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는 매머드급 ‘빅딜’을 체결했다. 1996년 ABC 방송을 2백억 달러에 인수한데 이어서 2006년에는 픽사 스튜디오를 그리고 2009년에는 미국의 양대 만화제작사 가운데 하나인 마블을 합병했다. 2012년에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제작사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일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디즈니가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날이 다가온 듯하다. 만화영화 <코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이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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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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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잃어버린 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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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러버린 장갑
김지수 지음 / 12,000원 / 2017년 12월 22일 발행
미미라는 어린 고양이를 통하여 세상을 향한 아이들의 끊임없는 호기심을 드러내며 아이들이 불안해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변함없는 가족과 이웃의 사랑과 그리움과 기다림을 묘사함으로써, 아이들이 따뜻한 어른들의 보살핌 속에서 축복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따뜻한 색감과 일러스트가 잘 어우러져있는 창작 동화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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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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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양 읽기 34] AI, 로봇, 빅 데이터, 생체공학 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기독교회, 4차 산업에 적극 대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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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
이제 교회가 응답할 때
이 책은 잡지처럼 편집되었다. 전문가 ‘대담’에 이어,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에 관해 전문가 4명의 글을 실었다. 그리고 뒷부분에 ‘북 리뷰’ 페이지를 두어 5권의 책에 관한 소개로 책을 마무리하였다. 단행본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잡지 스타일이다.2016년 3월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로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하게 인공지능에 쏠렸다. 이어서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잇따랐다. 그동안 기독교 신앙이 외면해오던 과학이, 엄청난 파워로 산업계는 물론 우리 일상생활에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제 기독교회가 대답해야 할 때이다. 아니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응답해야 한다.이 책에서 필자들은 교회가 지성적 신앙을 더 이상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과학을 경원시할 것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써 시대와 동행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 기술이 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교회가 먼저 고민하고, 그에 대해 신앙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관련된 도서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종교적 중립성의 신화》 《호모 데우스》 《슈퍼 인텔리전스》 《지능의 탄생》 다섯 권을 소개한다.◈ 《인공지능과 기독교 신앙》 || 편저자 한국교회탐구센터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교회, 한국 교회를 위한 탐구’를 모토로 2011년에 설립되었다. 2016년부터 ‘과학과 신앙’에 대한 시리즈 기획물로서 《뇌과학과 기독교 신앙》 《외계인과 기독교 신앙》 등을 출판했다. Ivp, 2017. 12,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인공지능 시대가 두려운 사람들에게》 / 리처드 왓슨 / 원더박스《호모 데우스》 / 유발 하라리 / 김영사
▲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이 성큼 들어온 지도 제법 되었다. 그런데 교회는 아직도 못 본 척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한다. [출처: www.regmedia.co.uk]
AI, 로봇, 빅 데이터, 생체공학 등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기독교회, 4차 산업에 적극 대응해야
세계경제포럼(WEF) 창립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밥의 《4차 산업혁명》이 2016년에 출판된 후, 전 세계의 IT업계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4차 산업혁명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국가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인공지능, 일상생활 속으로 뛰어들다
김길구 2016년 이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낱말 중 하나로 인공지능(AI)을 들 수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적인 기술로서 AI와 함께 로봇, 빅 데이터, 생체공학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이런 첨단 과학기술의 일상화가 우리 기독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김현호 인공지능이 일반인들에게까지 각인된 계기는 아무래도 2016년 3월에 벌어졌던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 간의 바둑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이 무엇인지에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까지, 이 바둑대결을 계기로 AI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니까요.
김수성 ‘알파고 쇼크’ 이후 뉴스를 타고 불길한 전망이 이어졌죠. 사람을 위해 설계한 인공지능이 오히려 역작용을 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AI도 ‘강한 지능’과 ‘약한 지능’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현재 거론되거나 실용화되고 있는 것은 ‘약한 지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김길구 정말 ‘쇼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직후,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문학상 공모전인 제3회 ‘호시신이치상’ 일반부문에 인공지능이 집필한 소설 11편이 출품돼 최소 1편 이상이 1차 심사를 통과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일반부문에서만 1450편의 소설이 출품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인공지능이 신문 기사도 작성하고, 작곡을 한다든가 그림을 그린다는 발표도 잇따랐죠.
김현호 알파고의 발전 속도도 놀랄 정도입니다. 이세돌과 맞붙은 알파고는 ‘알파고 리’였습니다. 이후 ‘알파고 마스터’ ‘알파고 제로’로 발전을 거듭했죠. 그런데 발표에 따르면 ‘리’가 ‘제로’와의 바둑대결에서 0:100으로 완패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리’가 이세돌과의 대결 이전에 학습한 시간이 7개월이었는데, 2017년에 개발한 ‘제로’는 바둑을 하나도 모르는 밑바닥(zero)에서 이 경지에 도달하는 데 고작 사흘이 걸렸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수성 알파고 이전에도 1997년 IBM의 ‘딥블루’와 체스 챔피언의 대결, 2011년 IBM의 ‘왓슨’과 텔레비전 퀴즈 쇼 ‘제퍼디’ 챔피언의 대결 등이 있었습니다. 이후 ‘왓슨’은 병원의 암센터와 연결되어 암 진단 등에 활용되고 있는데, 몇몇 우리나라 병원에서도 왓슨 프로그램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AI가 전문직 일자리까지 넘보는 현실
김현호 최근 TV를 보면 인공지능 도우미에 관한 광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통신회사에서 내놓은 것으로, 음성으로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디지털 기기들입니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이 우리 생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김길구 인공지능이 우리 일상생활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곧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으로 일자리 부족을 들 수 있습니다. 컴퓨터 도입과 자동화 시스템으로 벌써부터 일자리가 크게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일상화되면 상당수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전망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김수성 이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태까지는 단순 반복 노동과 관련된 일자리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앞으로는 소위 전문직까지도 위협할 것이란 전망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김길구 작년에 ‘아마존’ 유통창고의 ‘키바’ 로봇시스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넓은 창고에 사람은 몇 명 없고, 그나마 로봇의 보조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인공지능화된 로봇으로 처리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에서도 이 비슷한 시스템을 속속 도입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마존 고’라는 무인 편의점은 곧 우리 주변에 나타날 것 같습니다.
김현호 아까 왓슨을 이야기했지만, 의사나 약사 업무도 인공지능이 처리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옵니다. 2016년에는 ‘인공지능 변호사’가 뉴욕 로펌에서 ‘근무’를 시작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습니다. 특기는 법률문서 검토로서, 초당 1억 장의 판례를 검토해 사건에 맞는 가장 적절한 판례를 추천한다고 합니다. 도저히 사람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죠. 그러자 1년여 만에 수십 곳의 로펌이 이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김수성 인공지능이 발달함으로써, 이제는 패턴화된 업무는 모두 처리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예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으로 인해 대체되기 어려운 직업 중 하나로 심리 상담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심리 상담을 잘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심리 상담도 패턴화할 수 있는 업무라는 것이지요.
유발 하라리, “‘데이터교’ 일반화될 것”
김길구 이런 흐름이 곧 기독교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태까지 교인에 대한 목회상담은 목회자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이러한 목회상담까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는 기술휴머니즘과 데이터교가 일반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합니다. 즉, 인간의 삶이 기술과 데이터에 종속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죠.
김수성 이로 인한 소득의 불균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때 20대 80의 사회라는 공식이 정보사회로 들어서면서는 10대 90의 사회로, 이제는 1대 99, 심지어는 0.01대 99.99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김현호 앞으로 기독 과학자들이 여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제점을 충분히 고려한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김수성 문제는 자본입니다. 자본의 후원을 받아 연구하는 과학자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이와 같은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1960년 현재 전체 응용곤충학자의 2퍼센트만이 생물학적 방제 분야에서 일하고, 나머지 98퍼센트는 화학 살충제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즉, 자본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지요. 지금 상황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김현호 외국에서는 ‘사이언톨로지’라는, 과학을 신으로 섬기는 종교도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 종교처럼 파고든 스마트폰이나 인터넷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대세라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더디더라도 본질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편리함을 따르다 보면 영혼과 정신세계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지요. 교회는 거대한 흐름을 선순환 구조로 바꾸는 노력을 사회적 선교개념으로 접근하여야 합니다.
김길구 결국 교회가 팔짱만 끼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적극 나서서 연구할 인력을 지원한다든지, 템플턴(Templeton) 재단 같은 재단을 설립한다든지 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이 거대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존재가치를 잃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데이비드 색스(David Sax)가 쓴 《아날로그의 반격》을 읽고, 오늘 나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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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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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병학 목사의 문화펼치기 34 :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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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도 트렌드 키워드 슬로건은 ‘WAG THE DOGS’” (김난도 외, 『트렌드코리아 2017』)
▲ 웩더독 큰 그림
1. 무술년, 황금 개의 해,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WAG THE DOGS).
올해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이다. 무(戊)는 오행에서 흙(土)과 노랑(중앙)에 속한다. 12간지 동물 가운데 개를 뜻하는 술(戌)도 양(陽)과 흙(土)에 해당된다. 따라서 2018년 무술년은 ‘노랑(황금) 개띠의 해’로 풀이된다고 한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는 해마다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주요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매년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2018년에는 어떤 트렌드가 한국 사회를 주도할 것인가? 『트렌드 코리아 2018』 (미래의 창)은 2018년의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WAG THE DOGS’로 선정하였다.
왝더독은 일종의 속어로, 권력자가 어떤 불미스러운 행동이나 부정행위 등으로 인해 여론의 비난을 받을 때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가령 <왝더독(Wag the Dog, 1997)>이라는 영화를 보면, 선거를 앞둔 현직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스카우트 학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치 문제 해결사들이 이름도 생소한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포장하고 여론을 조작해 성추문을 덮는다.
그러나 원래는 금융시장 용어로 주식시장에서 선물시장(꼬리)이 현물시장(몸통)을 좌우할 때 쓰는 경제적 의미이다. 그러나 이처럼 정치, 경제에서 쓰이는 말이 이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발견된다. 곧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사은품을 본상품보다, SNS가 대중매체보다, 1인 방송이 주류 매체보다, 카드뉴스가 TV뉴스보다, 노점의 푸드트럭이 백화점 푸드코트보다, 인디레이블들이 대형 기획사보다, 인터넷의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들이 대형스타보다, 싱글 프로덕트 브랜드가 대형 종합 브랜드보다 인기를 더 끄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일련의 정책은 시급 노동자,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하청과 협력업체의 권익을 향상시키고자 하고 있는데, 이 역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다. 사회적 약자인 언더독(underdog)의 약진이 뚜렷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하는 의미로 김난도 교수팀은 2018년의 트렌드로 ‘WAG THE DOGS’를 선정했다는 것이다(김난도 외, 8-9).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교회와 목회자 관련으로),
1) What’s Your ‘Small but Certain Happiness’? 소확행,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수필집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을 이렇게 말했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돌돌 말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겨울밤 부스럭 소리를 내며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고양이의 감촉.” 작지만 확실한 행복. 그렇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으며 거창하지 않다. 그런데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일상에서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는 소확행을 위해 강소형 교회가 힘을 내야 한다.
2) Added Satisfaction to Value for Money: ‘Placebo Consumption’ 가성비에 가심비를 더하다: ‘플라시보 소비’
플라시보 효과는 “이 약을 먹으면 낫는다.”는 말을 들으면 가짜 약이라고 할지라도 증상이 호전되는 효과를 말한다. ‘마음의 힘’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가성비에 마음을 더한 ‘가심비’는 소비자에게 심리적 안정을 줌으로써 불안을 잠재우고 스트레스를 덜어준다. 오늘날 목회자의 설교는 가심비는커녕, 협박과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가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3) Generation ‘Work-Life-Balance’ ‘워라밸’ 세대
워라밸은 ‘일과 삶의 균형(Work-and-life balance)’의 준말이다. 개인의 원자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타인과의 관계보다 스스로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중요시되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직딩’이 출현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칼퇴’는 기본, 취직은 ‘퇴직 준비’와 동의어이며, 직장 생활은 더 소중한 취미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이다.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이 신세대 직장인, ‘워라밸’ 세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교회의 미래가 밝을 것이다.
4) Technology of ‘Untact’ 언택트 기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무인(unmanned) 기술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contact)을 지워버리고 있다. 공항에서든 패스트푸드점에서든 이제 어디를 가나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모니터 화면이다. 사람과의 접촉이 부담스러운 디지털 원주민들은 언택트 기술을 반기는 반면, 늘 대면 접촉을 하고 살았던 디지털 이주민들은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편하고 저렴하고 빠른 언택트 기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람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잊지 말자. 이것은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5) Hide Away in Your Querencia 나만의 케렌시아
스페인어인 ‘케렌시아(Querencia)’는 ‘나만이 알고 있는 아늑한 휴식 공간’을 뜻한다. 하지만 그냥 편하게 쉬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원래 케렌시아는 투우장의 소가 투우사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르는 곳이다. 즉, 뭔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최대한 에너지를 모으는 곳이란 뜻이다. 바쁜 일상에 지쳐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공간이 바로 ‘케렌시아’가 아닐까? 케렌시아는 공간 비즈니스와 수면 산업 등 현대인에게 필요한 신산업 분야의 발전을 예고한다. 교회가 케렌시아가 될 수 있을까? 영적인 창조의 공간으로, 고통스런 삶의 재충전 장소로서 교회가 이 시대의 케렌시아가 되지 못하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6) Everything-as-a-Service 만물의 서비스화
최근 아파트를 고를 때 시공사와 인테리어보다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발레파킹은 기본이고 하우스키핑과 컨시어지 서비스, 호텔급 조식까지. 자동차를 살 때도 앞으로는 자동차 제조업체가 아니라, 내부 서비스가 더 고려 대상이 될 전망이다. 자동차가 그저 운송수단이 아니라 달리는 ‘서비스 단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인터넷과 클라우드 기술의 발전은 만물의 서비스화를 더욱 앞당기는 배경이다. 물건을 사면 서비스는 공짜인 시대는 지났다. 이제 서비스는 제품의 선택을 좌우하는 결정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예배라는 몸통보다 주차장부터 교회의 건물, 환경까지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세상, 신앙의 본질도 흔들리고 있다.
7) Days of ‘Cutocracy’ 매력, 자본이 되다
매력의 ‘매(魅)’는 ‘도깨비 매’자다. 도깨비처럼 사람을 홀리는 힘에 누군들 끌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력은 이처럼 이성의 힘을 약화시킨다. 상품이 넘쳐나는 시대, ‘선택장애’에 걸린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 ‘매력’이 필수다. 그냥 속수무책으로 집어 들게 만드는 라인과 카카오의 캐릭터 상품들을 생각해보라. 저항 불가. “그래, 졌다”라고 말하면서도 소비자는 행복할 뿐이다. 오늘날 교회가 목회자가 카카오의 캐릭터 상품보다 못한 처지가 되었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자본주의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은 어떻게 매력을 발휘할까?
8) One’s True Colors, ‘Meaning Out’ 미닝아웃
소셜네트워크의 해시태그는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세상에 소리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슬로건의 시대’이다. 무엇을 걸치고 어떤 가방을 들고 무엇을 먹느냐가 ‘나’라는 사람을 정의한다. 소비를 통해 부를 과시하던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소비는 투표와 마찬가지로 신념의 표를 던지는 행위가 되어가고 있다. 교회는 사회에 어떤 미닝아웃을 드러내야하는가? ‘생명, 평화, 정의’의 가치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교회는,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교인은, 이미 그 슬로건에 있어서 세상에 졌다.
9) Gig-Relationship, Alt-Family 이 관계를 다시 써보려 해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 때로는 짐으로 다가오고, 소셜네트워크의 수많은 지인들은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너무나 많은 관계의 압박 속에서 이제 사람들은 소수와 오랫동안 깊게 관계를 맺기보다 다수와 짧게 얕은 관계를 맺는 것을 더 선호한다. 가장 확실한 관계 맺기라고 여겨지는 결혼조차 흔들리고 있다. 이혼은 물론이고 해혼, 졸혼이 유행하고 2040년쯤이면 결혼제도 자체가 소멸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제 관계 이후의 관계를 고민해야 할 때다. 성도 간의 관계, 목회자와 성도간의 관계, 성서는 아니 교회는 이러한 시대에 창조적 관계를 통해 여전히 사람들에게 힘이 될까?
10) Shouting Out Self-esteem 세상의 주변에서 나를 외치다
자세히 보라.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다. 지금처럼 자존감이 낮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흙수저를 자처하고, 끊어진 계급 사다리 앞에서 절망한다.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자기계발서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몽땅 차지하고 있다. 낮은 자존감은 어떻게 소비로 발현되는가? 무너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교회의 전략이 더한층 필요한 때다. 예수는 세상의 주변인 갈릴리에서 ‘나’를 외쳤다. 자존감 있는 교회! 자존감 있는 교인!! 세상의 중심에서 주변을 외치라. 세상의 중심에서 예수를 외치라. 개도 2018년에는 소리 짖는다. “멍, 멍!”
2. 개 때문에 인간이 네안데르탈인을 이겼다?
황금 개의 해에 개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개 때문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그 경쟁자인 네안데르탈인을 이겼다는 가설 때문이다. 미국의 고인류학자인 팻 시프먼의 『침입종 인간: 인류의 번성과 미래에 대한 근원적 탐구』 (푸른숲, 2017)이 바로 그것인데, 요약을 하자면 이렇다.
45억년 지구의 역사 중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지금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사실 600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뒤 250만년 전 호모속이 출현한 이래 네안데르탈, 호모 하빌리스, 호모 에렉투스, 베이징 원인, 루시, 데니소바인 등 다양한 호미닌(호모과와 호모속 중간의 사람족)들이 살았다.
특히 인간과 경쟁하다 3만년 전 사라진 ‘최후의 비인간 호미닌’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30만년 앞서 유라시아에서 진화해갔다. 네안데르탈인은 인간처럼 도구를 제작하고 불을 피울 줄 알았으며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무리 지어 매머드 같은 대형 포유류도 사냥했다. 사피엔스보다 뇌가 크고 다부진 근육을 갖춘 데다, 멸종 이전에도 한차례 빙하기를 이겨냈던 강인한 네안데르탈인은 왜 갑자기 멸종한 것일까?
시프먼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물론 여기서 제목인 ‘침입종’은 고유종, 자생종이 아닌 원래 그 지역에 속하지 않는 종을 일컫는다. 외래종 중에서도 생태계에 미치는 침입의 영향력이 클 경우 생태학자들은 ‘침입종’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각별히 경계한다. 그러나 지구 역사상 사피엔스만큼 강력한 침입종은 없다. 시프먼은 이렇게 말한다. “일단 인간이 발을 들이고 나면 그 지역의 동물상(특정 지역에 사는 모든 동물)이 붕괴하고 생태계에 격변이 일어난다. 이러한 전 지구적 패턴은 지금까지 알려진 예가 없다.”
시프먼이 이 책에서 집중한 공간은 인간이 침입종으로 처음 활동한 4만년 전 유라시아 대륙이다. 아프리카에 살던 사피엔스가 유라시아로 이동하자, 본래 이 지역의 주인이었던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졌다. 그동안 인류학계에선 네안데르탈인들이 멸종한 이유를 놓고 ‘기후변화설’과 ‘사피엔스와의 경쟁설’이 맞서왔는데, 시프먼은 이 두 가지가 배타적인 학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해 네안데르탈인이 능숙한 사냥 솜씨를 발휘하던 숲이 사라지고 평원과 툰드라가 늘어난 것에 겹쳐, 새로 이주한 사피엔스와의 먹이 경쟁이 강한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즉 네안데르탈인들 입장에선 예전에 살던 대로 살기엔 환경이 척박해졌고, 사피엔스와 먹잇감을 나누기엔 부족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프먼은 생태적 지위가 같은 두 종은 공존할 수 없다는 ‘가우제의 법칙(Gauze’s axiom, 생활요구가 비슷한 2종류는 동일 장소에서 공존하기가 어렵고, 종간경쟁에 의해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한쪽이 다른 쪽에 의해 배제된다는 가설)’을 예로 들며,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중 어느 한쪽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네안데르탈인들은 왜 인간에게 밀려난 것일까?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지를 살펴보면,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들을 살해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직접 학살했다고 단정할 순 없는 것이다. 시프먼은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DNA) 분석, 세포핵 디엔에이 분석, 탄소연대측정법, 동위원소 분석 다양한 과학적 분석 기법을 종합해 네안데르탈인들의 멸종 과정을 짚어나간다.
정리하면 이렇다. 몸집이 큰 네안데르탈인들은 생존하기 위한 에너지 필요량이 사피엔스보다 7~9%가량 더 많아 신체적 조건이 불리했다. 인간은 변화한 환경에 맞춰 식물성 먹이와 소형 동물에도 손을 대는 등 식단을 다양화했지만, 네안데르탈인들은 중대형 육상동물 위주의 입맛을 고수했다. 초원지대에선 창을 손에 들고 직접 먹잇감을 찌르는 네안데르탈인들보다는 발사형 무기를 투척하는 사피엔스의 사냥 기법이 더 효율적이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유적지에서 동족을 잡아먹었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생존 위기에 내몰린 이들의 절박함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더욱이 시프먼은 2009년 벨기에의 인류학자 미체 제르몽프레가 현생 늑대, 현생 개, 선사시대 개의 두개골을 분석한 결과를 거론하며, 늑대도 개도 아닌 중간지대 ‘늑대-개’가 3만2000년 전에 살았다는 점에 주목하여 ‘개의 가축화’가 신석기 시대 농부가 아니라, 구석기 시대 수렵 채집인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농작물을 기르기 시작한 9000년 전에 개의 가축화가 이뤄졌다는 기존 학설을 뒤집는 것이다. 게다가 ‘늑대-개’의 출현 시기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시프먼은 “개의 가축화가 인간이 네안데르탈인과의 먹이경쟁에서 승리하는 주요 원인이 됐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끌어낸다.
인간은 바늘을 이용해 야무지게 털옷을 챙겨 입고, 위협적인 무기를 만드는 능력 외에도 ‘살아있는 도구’, 즉 가축을 ‘창조’함으로써 그들의 예민한 후각과 청각, 뛰어난 사냥 실력을 빌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이 개를 데리고 사냥하면 사냥개의 도움을 받지 않을 때보다 획득한 사냥감이 56% 증가한다고 한다. 시프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처음으로 가축화한 것은 도구를 최초로 발명한 것과 맞먹는 커다란 도약이다.”
물론,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개의 가축화와 연관 짓는 시프먼의 가설은 많은 논쟁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연대 측정기법 등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사피엔스의 실체를 놓고 더 풍성한 대화가 오가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이것은 또한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인공지능 시대에 개의 가축화가 로봇의 인간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2018년은 황금 개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봇의 시작은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강아지였다는 사실!
최 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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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