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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나라’
    평신도들을 위한 기독교 신앙 가이드북 저자 김형국목사는 연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5년 동안 간사로 청년사역을 했는데, 전도한 청년들이 기존 교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현실을 고민하다 목회를 결심하고 미국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Ph.D.신약학)에 수학했다. 18년전 나들목교회를 개척하여 1,300여명의 교인을 둔 목회 경력 30년의 중견목회자이다. 대형교회보다는 온전한 복음에 충실한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 책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친절하게 소개하면서 그의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하나님나라’에 있다며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다. 지난 5월 200~300명 규모의 5개의 지역형 네트워크체제로 교회를 분립한 그의 도전이 최근 교계에 큰 화제가 되고 있다. || 저서로는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 《교회를 꿈꾼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주기도문》등이 있다. 비아토르, 2019. 11,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 김형국 지음 / 비아토르 / 2017 《풍성한 삶으로의 첫걸음》 김형국 지음 / 비아토르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 < <나들목교회의 도전: 창립 18년만에 5개 독립교회로 새 출발하는 파송예배/국민일보 인터넷판에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초기 기독교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던 힘은 예수가 전한대로 하나님나라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실제로 이 세상에 임했다고 믿은 데 있었다.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다고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을 따라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려 했다.” <정림건축>의 김정철 회장김길구 오늘은 화제의 인물 저자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도전》이라는 이 책은 기독교 근간을 소개한 기본진리 안내서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목회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김형기 저자의 약력은 신간소개 난에 있으니까 가족이야기부터 해보죠. 부친인 故 김정철 회장은 국내 건축설계의 1위 업체인 정림건축의 설립자입니다. 청와대 본관과 춘추관, 인천국제공항,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전주예닮교회, 전주 서문교회, 한국교회100주년기념 순교자기념관 등 한국건축사의 기념비적 작품을 남긴 존경할만한 건축가요, 진정한 크리스천 건축가라는 평가를 받는 분이지요.김현호 개인중심의 우리나라 건축분야에 조직과 협업을 통한 기술의 표준화와 선진화에 기여한 분으로, 한 통계를 보니 2017년에는 정림건축이 세계 16위에 랭크된 세계적인 건축설계업체가 되었습니다. 2010년 고인이 되셨는데, 자신이 소유한 회사 주식 10%(60억원)를 유언에 따라 임직원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서 놀라게 하더니, 고인의 주식 30%를 두 재단에 기부한 윤리적 경영인이기도 해요. 김길구 저자의 간증을 들어보니 고교 1학년 때 회심을 경험하고 건축을 전공하여 ‘가업을 이어라’는 부친의 간곡한 청을 거절하고 ‘건물이 아닌 사람을 세우겠다’고 연대 사회학과를 나와 IVF 간사를 거쳐 신학을 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더군요. ‘너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라는 부친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고집을 꺾지 않았다니 대단하죠.김형기 신학을 하게 된 동기가 기독청년회(IVF) 출신들이 기존교회에 들어가면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라고 했는데 저도 새문안교회 대학부 출신이지만 젊은 열정을 수용하지 못하는 기존교회가 반성할 부분이 많아요.김현호 2001년 대학로에서 첫발을 뗀 나들목교회는 고등학교 생활관에서 출발해서 기존교회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규모보다는 건강한 교회였어요. 나들목교회의 중심가치김길구 저자는 사회학도답게 한국의 대다수의 교회가 교인중심, 이원론적 영성, 개인주의 영성, 기복주의, 기복주의적 예배라고 진단하였는데 이런 기성교회의의 현실을 극복하는 목회전략을 세우고 꾸준히 추진했어요. 7~8년 후 회고해 보니 그의 계획대로 목회를 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김형기 그래서 성도들의 지속적인 양육을 통해 나들목교회는 찾은 이 중심, 진실한공동체, 균형 있는 성장, 안팎의 변혁, 소망하는 예배 중심가치로 둔 목회였어요.김현호 사실 교회가 목적문이나 교회사명문 등을 두고 있으나 새해 등 한동안 반짝이지 전교인을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하긴 힘든데 이런 훈련이 네트워크체제의 교회분립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김길구 교회분립문제는 마지막부분에 다루기로 하고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이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무엇이죠?김형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하늘나라, 천국 등의 용어들이 혼재되어 있어요. 학자들 사이에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선포와 사역의 중심에 놓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요. 다만 하나님나라를 말하기는 하지만 그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서 다양한 학문적인 논쟁이 있습니다.김현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나라의 시기 문제 즉 현재인가 미래인가? 구원과 심판 중 어느 쪽이 더 강조된 기대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라는 역동적 개념인가, 아니면 영토라는 공간적 개념인가? 등이죠.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김형기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내 안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예수의 이름과 함께 땅 끝까지 전파되는 하나님 나라, 믿는 자들이 가는 영원한 천국, 그리고 역사의 초월로서 예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이지요.김길구 저자는 예수가 이야기하신 하나님나라를 죽으면 가는 천당 같은 곳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를 번역의 문제로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라는 표현이 하나님의 호칭을 입에 올리기 불편해 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쓴 표현을 종전의 한글 개혁성경이 천국으로 옮기면서 이를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는 의미로 생각한데 있다고 지적했어요.김현호 그러나 성경은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완성될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뿐 아니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곳의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 여기에 예수 가르침의 독특성이 있습니다.김형기 저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운 성품에서 찾으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품인 사랑과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되었다며, 정의 없는 사랑은 무용지물로 우리사회의 문제도 정의의 실종에서 찾고 있어요.김길구 저자는 사회참여문제에서도 적극적입니다. 교회의 나들목교리신조에도 나와 있는데 나들목교회는 1974년 7월 스위스회의에서 채택된 로잔언약와 1989년 마닐라선언문, 2011년 케이프타운 헌신의 10개 신앙서약과 행동을 위한 요청으로 이어지는 정신을 계승하고 있습니다.김현호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정의, 자유, 평등, 인권을 위해 살아왔으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나라 공동체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회문제에 참여하여 서로 연대하고 지원하는 공동체가 되어서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입장이지요. 5개 교회로 분립김길구 지난 5월이니 따끈따끈한 소식입니다. 저자가 시무하는 나들목교회의 새로운 도전, 네트워크체제의 교회분립에 대하여 의견을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김현호 창립 18년 만에 1,300여명의 중견교회를 200~300명 정도의 5개의 독립교회로 분립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교회들이 한 명의 교인이라도 더 모으려고 하는데 스스로 도시형 네트워크체제의 작은교회를 지향하는 실험이므로 교계가 주시하고 있지요. 이러한 실험은 설립초기부터 계획하여 수년간의 협의 과정을 거쳐 민주적으로 분립하게 되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김형기 이번 나들목교회의 분립은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8년 전 자신이 세운 교회에 정년도 아직 안된 60세의 나이로 원로목사도 포기한 체 내려온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결과를 떠나 이미 교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고 생각합니다.김길구 본문에도 언급된 ‘링반데룽’Ring-Wanderung 야간이나 악천후로 산에서 길을 잃으면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원을 그리며 계속해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산악인들의 용어인데요. 우리교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이번 책읽기가 저로서는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이며 교회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티머시 R. 제닝스 저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9-07-09
  •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대중에게 전하는 법
    대중성을 갖춘 영화사회학의 출현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봉준호 감독의 이 간단한 약력 안에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담겨 있다. 그것은 ‘사회’와 ‘영화’다. 대부분의 영화감독이 사회현실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사회와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봉준호 감독만큼 세밀하게 사회를 관찰하면서 영화 안에서 압축적이고 은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은 매우 드물다. 거기다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찾는다는 점에서 대중성도 갖추고 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괴물>(2006)은 미국과의 미묘한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환경오염의 위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었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극물에 의한 결과가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영화 첫 장면에 제시함으로써 환경오염의 해악성을 알리면서 동시에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있는 것인 양 정보를 왜곡하고 위험을 확대재생산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935만 명을 동원한 <설국열차>(2013)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는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한 인류의 미래가 오직 기차 안의 승객들에게 달려있다는 가정 하에 기차의 앞쪽칸과 제일 뒷 칸인 꼬리칸에 탄 승객들과의 대결을 영화는 흥미 있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계층이 고착화되어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앞쪽칸 쪽으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옥자>(2017)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슈퍼돼지를 생산하고 친환경기업인양 감추려는 다국적 거대 기업의 숨은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거대기업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써 유전자조작식품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대중친화적인 영화로 인식되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은유적 묘사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감각적이고 사실적으로 와 닿게 만드는 감독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봉감독이 다룬 주제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면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어디서든 터지는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봉감독의 유머는 극적 긴장을 해소하는 역할과 더불어 부정적 사회현실을 객관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유머를 통해 실현되는 풍자와 해학은 오히려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셋째는 가족이다. 가족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봉준호 감독이 제시한 부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우군이다. 특히 아버지의 희생과 자녀의 생존을 통한 가족의 존속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대중성을 갖게 만든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빈부격차의 한국사회를 그리다 <기생충>은 빈부격차가 큰 한국사회의 현실을 봉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은유적이고 압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반지하에서 가족 전원이 백수로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화려한 주택에서 살고 있는 박사장(이선균)집의 고액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대학도 못간 기우가 학력위조를 통해 최상류층 집안의 선생이 되는데서 오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기택이네 가족이 생존을 위해 피자박스를 접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가족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박사장 집 지하에 숨어 지내며 살아가는 가정부 국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의 발견과 기택네 집안과의 갈등은 다분히 서스펜스 스릴러를 방불케 하고, 결과적으로 박사장과 기택과의 충돌은 빈부격차에서 오는 사회현실을 묘사한 사회심리 혹은 사회비판 드라마로 읽힐 수 있다. <기생충>은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최상의 이층 주택이라는 공간의 배열을 통해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빈부격차에서 오는 갈등과 공존을 압축적이며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제목이 주는 혐오적인 어감과 달리 부잣집에서 붙어 사는 지하와 반지하 가족들의 비현실적인 실상은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압축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박사장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기택에게서 ‘지하철을 타다 보면 나는 냄새’가 난다며 기택의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대목은 향기가 아닌 ‘냄새’가 ‘주거 공간’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신분과 계층을 대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봉감독의 사회를 보는 눈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알 수 있다. 지난해 4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60만으로 1년 전보다 3.6% 증가했다. 그러나 근로활동을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위 20%의 소득 5 분위 가구는 932만 4000원으로 10.4% 증가한 반면, 하위 20%의 소득 1 분위 가구는 123만 8000원으로 오히려 17.7% 줄어들었다. 이 수치는 통계가 잡힌 이래로 사상 최대폭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잘살게 되지만 못 사는 사람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현실을 통계는 숫자로 표시하고 <기생충>은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봉준호 장르의 한계 봉준호 장르의 영화들은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기 보다는 계속되는 위협과 위험의 현실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곤 한다. <살인의 추억>(2003)의 연쇄살인범은 잡히지 않았고 <괴물>은 한강 어디에선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험이 제거된 온전한 평안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즉 온전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제시하기 보다는 끝에 희망의 단초를 제시하는 정도다. 영화감독에게 사회문제의 해결점까지 제시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경우에도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통해서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설국열차>에서 투쟁 끝에 전복된 기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어린이들이었다. <괴물>에서 송강호는 자신의 딸과 같이 있던 고아를 아들처럼 여기며 밥상을 마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기생충>에서 아들은 부잣집을 매입하고 아버지를 지하로부터 구하는 상상으로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가 제시한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막연하나마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게 만든다. 예수님이 <기생충>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그린 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로 나선다면 어떠했을까? 찰리 채플린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막연하게 희망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제시하셨을까?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관원’과 ‘세리장 삭개오’라는 두 인물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에서 그려내지 못한 다른 길과 다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부자 관원은 누가복음 18장에 언급된 표면적인 사실로 보더라도 퍽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계명을 모두 지켰고(21절) 거기다 부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외형적으로나마 훌륭한 신앙인이었으며 거기다 성경은 그가 ‘큰 부자’(23절)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다. 자신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전시키는(22절) 일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문제를 물으러 왔지만 재물의 문제에 막혀 심히 근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인 누가복음 19장에는 또 다른 부자 관리인 삭개오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성경은 그가 세리장이면서 아울러 부자라고(2절) 언급하고 있다. 그는 부자관원과 달리 말만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4절)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는 주변인들의 수근거림에도(7절) 개의치 않았으며 예수님이 얘기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8절) 폭탄발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9절) 영적인 응답을 하셨다. 봉준호감독이 영화를 통해 제시한 갈등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죽음으로 귀결된 빈부격차의 문제는 근심하며 돌아 간 부자관원의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을 올릴 수밖에 없다. 봉감독은 돈의 문제가 성경이 지적한대로 영적인 문제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적인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어떠한 물리적인 싸움도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돈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사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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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6
  •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온전한 가치를 위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본 신학과 인문학의 대화 이 책은 작년 932쪽의 대작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이야기’란 부제가 붙은 《신》의 출간을 계기로 저자가 신학과 인문학의 관계를 강연한 내용을 보완하여 펴낸 110쪽 분량의 단행본이다. 신학이라 따분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견은 버려도 좋다. 고대의 플라톤부터 최근의 유발 하라리까지 고금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인문학적 소양과 얇은 두께에 손에 꼭 쥐어지는 소책자에는 22장의 친절한 도표가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질적으로 보이는 신학과 인문학이 서로에게 영향을 줘 발전해 왔으며, 따뜻한 시선으로 ‘온전한 신학’을 위하여 인문학의 필요성을 설파한다. 키치kitsch 그 가벼움이 일상이 된 시대,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저자 김용규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후설의 현상학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몰두했고, 튀빙겐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위르겐 몰트만과 에버하르트 융엘의 강의를 들었다. 전업작가로 최근에 출간된 《신》을 비롯하여 《데칼로그》, 《생각의 시대》, 《설득의 논리학》,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영화관 옆 철학카페》 등 다수가 있다.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깊이 있는 성찰에 생동감 있는 문체가 어우러진 다양한 대중철학서와 인문 교양서를 집필하여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신》 김용규 지음 / IVP / 2018《묻고 답하다》 강영안, 양희송 / 홍성사 / 2012《서양철학과 신학의 역사》 존 프레일 / 생명의 말씀사 / 2018 ▲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폭력이다! 그러나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 역시 폭력이다!(본문 93P 중에서)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신학은 통합과 융합의 산물“기독교신학은 지난 2천년동안 성서의 계시와 시대의 인문학, 신앙과 이성,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즉 서로 이질적이고 때로 상반되는 둘이 만나 빚어낸 이름답고 거대한 정신적 구조물이다.” 믿음은 지성을 배제 안 해김길구 순서를 바꿔 이번호에는 <신>의 저자 김용규의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란 책에 대하여 얘기해 보죠. 저번 시리즈에서 다뤘던 <신>이 932쪽의 방대한 책이라면 이 책은 100쪽이 조금 넘는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양도 적고 내용도 강의를 바탕으로 쓴 책이라 그런지 평소 신학에 관심이 없던 분들도 쉽게 접할 수 있어 기독교인문학 교재로 좋을 것 같아요.김형기 최근에 일기 시작한 기독교인문학의 지침서로서 좋은 자료가 될 수 있겠네요. 4차 산업혁명을 겪고 있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입니다.김길구 들어가기에 앞서 교계의 반지성적 정서가 적지 않은 풍토에서 우리의 신앙에서 과연 지성은 필요한가? 하는 문제부터 다루어 보죠.김형기 성경은 지성을 강조하지도 않고 지식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보지도 않아요. 오히려 지식보다는 체험이나 실천을 우선하지요. 히브리적 전통에서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때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성이 무시되지도 않아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는데 ‘회개’의 뜻은 지성을 완전히 바꾸라는 뜻이에요. 지성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갈수 없다는 것이죠.김현호 사도 바울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고 했을 때 ‘마음’은 앎의 능력 즉 지성을 바꿔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라는 의미가 있다고 해요. 인문학의 도움으로 신학도 발전김길구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면 믿음 안에는 어느 정도 지성이 전제 된다는 의미네요. 그럼 한걸음 더 들어가 보죠. 오늘의 주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지금 왜 인문학입니까?김현호 우리사회에 한동안 붐을 이뤘던 인문학 열풍의 영향이 아닐까요? 미미하기는 하지만 저희 서점에도 독서모임 등을 통한 기독교인문학 관련 책들을 찾는 이들이 있고, 평신도 중에도 교양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관심도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김형기 인본주의와 인문학은 구분돼야겠지요.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면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는 우리가 소위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학을 도구로 초월적인 신앙을 시대의 사유양식으로 표현하여 대중과 소통하면서 복음사역에 도움을 주려는 의미도 있겠죠. 김길구 저자도 신학이 신 중심사회였던 중세까지 제1학문으로서 지위를 유지하다가 근대에 이르러 인간에게 자리를 내줬는데, 모두가 신이 되어버린 지금 분열과 투쟁과 파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알아야 하며, 나아가 문명과 인간을 구원하고 치유하려면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합니다.김현호 신학이 하나님 중심적 사유체계라면 인문학은 인간 중심적 사고체계라 대립과 갈등이 늘 있어 왔지만 그럼에도 인문학은 부단히 기독교신학에 새로운 피를 제공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김형기 소책자라 너무 단순화 한 위험이 있지만, 고대신학은 플라톤, 중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 근세에는 개혁신학이 인문주의라는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았으며, 근대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현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듯이 시대를 불문하고 인문학이 신학에 크든 작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영향을 미쳐왔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시대, 그 유동하는 공포김길구 니체는 1882년 그의 책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가 신을 죽였다-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라고 외쳤는데 그가 죽인 신은 어떤 신일까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 누려왔던 신본주의의 몰락을 얘기 합니다. 신의 자리에 이성, 합리성, 객관성, 과학, 계몽, 자유, 평등, 박애, 진보, 혁명 등등 인본주의 가치들이 대신하게 되지요. 니체의 ‘신이 죽었다’는 말은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놀라운 선언이죠. 그 자리를 인간의 이성을 뜻하는 이신교(理神敎), ‘집단적 인류’가 하나님인 인류교. 급기야 인간이 신이 되는 호모 데우스의 시대가 도래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류는 행복할까요?김현호 그렇지 않죠.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백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문명은 발달하면 할수록 파괴될 위험이 증가하는데 이 문명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 곧 파멸로 이어진다며 우리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했어요. 핵무기, 생화학무기, 환경오염, 기후변화 등의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를 말합니다.김형기 여기에 2017년에 죽은 유대인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2008년 미국의 서브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보듯 세계화가 낳은 인류의 단일화는 “근본적으로 달아날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뜻이‘라며 신과의 유대를 단절하고 삶을 스스로 통제토록한 근대적 이성이 만들어낸 위험과 공포를 ’유동하는 공포‘라고 했어요.김현호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이런 불확실의 시대에 바로 이때다!고 나온 종교가 ‘데이터교’입니다.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명명했는데 실리콘밸리가 만들어 이제 막 태어났어요. 유명배우 안젤리나 졸리의 예에서 보듯 건강한 유방을 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이유로 수술한 컴퓨터 알고리즘이 곧 ‘신’이고 데이터가 ‘말씀’인 종교입니다. 온전한 가치를 향하여김길구 요즘은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있어요. 개인의 심리와 성적취향, 다양한 문화와 요리, 놀이, 주거, 관광, 레저 같은 작은 이야기에만 몰두해요. 신문, 방송, 인터넷도 온통 이런 얘기들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카르페 디엠, 인생은 단 한번 뿐 이라는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小確幸)과 같은 것인데 그 밑바닥에는 소비를 통해 생존하려는 후기자본주의의 교활한 상술이 도사리고 있어요.김현호 예로 대형서점의 인문학 코너에는 신, 진리, 사랑, 이성, 계몽, 혁명 같은 거대담론이 거의 사라졌어요. 그 자리를 차츰 작은 이야기들로 채워지는 추세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성, 보편성, 객관성, 역사성 등을 내세워 자행된 그동안의 폭력성을 차단할 수 있으니까요.김형기 그래서 포스트모던니즘을 ‘큰 이야기에 대한 불신’이라고 리오타르는 정의했는데, 저자는 생명, 진리, 선함, 아름다움, 정의, 위대함 같은 전 근대적, 신본주의가치뿐 아니라 이성, 계몽, 혁명, 과학, 진보, 해방과 같은 근대적, 인본주의적 가치와 상대성, 다양성, 개별성, 현재성 등 탈근대적, 개인적 가치들까지 되살려 냄으로써 ‘온전한 가치’가 되게 하자고 합니다.김길구 저자는 기독교는 거대한 용광로라며, 기독교가 처음부터 물과 기름 같은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사상과 사조들의 숱한 도전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아 마침내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더욱 풍성하고 강해진 것처럼 ‘경직된 교리를 뛰어 넘는 사고’의 유연성과 올곧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번호는 토론보다는 책을 요약하여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호엔 저번에 예고해 드린 김형국목사의 《하나님나라의 도전》을 읽고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9-06-11
  • [영화] 죽음으로 살아나는 신앙-영화 ‘교회 오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켜보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죽음의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외면’이다. 죽음을 바로 응대하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태도가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되는 듯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죽음과 연관된 어떤 것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는 ‘부정’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을 때 44번이 나오면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4자가 F로 둔갑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아라비아 숫자 4가 얼마나 홀대를 받아왔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라도 집안에 부정 타는 일이 생길까봐 상가 집에 같다오면 집 앞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옛 사람들의 풍습이기 조차 했다. 셋째는 ‘혐오’다. 화장장이나 추모공원 등과 같은 죽음과 연관된 시설을 우리 사회에서는 혐오시설로 분류한다.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일은 애를 받는 산부인과의 존재처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결코 곁에 두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이를 싫어한다. 객관적이거나 과학적 지식과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호경 감독의 영화 <교회 오빠> 는 최준식 교수가 얘기한 한국의 죽음의 태도를 모두 불식시킨다. 주인공은 죽음과 고통 앞에서 부정도 외면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기독교 신앙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름을 이 영화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 2017년 12월 22일 ‘KBS 스페셜 앎’ 2부작으로 방영된 동명의 프로그램을 재촬영·편집하여 극장용 영화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서른일곱 나이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남편 이관희 집사와 림프종 4기 진단을 받은 아내 오은희 집사의 투병장면이 신앙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구약의 욥기의 진행 과정을 따라 영화는 욥과 주인공 이관희 집사의 신앙적 면모를 비교해 가면서 흥미로운 연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욥과 같은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했을 때 신앙인이 보이는 반응과 또한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묘사하며 죽음 앞에 선 신앙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6:12) <교회 오빠>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기암의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믿음의 싸움이며, 이를 통해 많은 관객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증인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를 봐야하는 이유 <교회 오빠>는 개봉 일주일을 맞았을 때 다음 사이트에서 일간 영화 검색어 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위 <알라딘>과 2위 <악인전>에 이은 순위다.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교회 오빠> 다음 순서로 밀려나 있다. 관객 수도 3만 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의 관객을 모은 외화 <어벤져스:엔드 게임>이 1천3백5십3만 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너무 왜소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개봉 첫날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전국 2760개의 스크린에서 1만2545회 상영되었다. 하루에 1만 2545회가 상영되었다는 말은 한 번 상영에 10사람만 봐도 10만 2천 명이 훌쩍 넘는다는 뜻이 된다. 첫날 상영점유율은 80.9%, 좌석점유율은 85%로 역대급이다. <교회 오빠>는 상영하는 극장 보다 상영되지 않은 극장이 훨씬 많다. 극장에 걸리더라도 하루에 고작 1회 내지 2회가 전부다. 상영시간도 아침 첫 회 아니면 늦은 시간을 배정 받아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교회 오빠>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극장에서 외면당하는 독립예술영화의 설움을 고스란히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까지 기독교영화가 한국 영화계에서 받아왔던 기대와 실망을 교차시킨다면 꼭 서럽게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개봉 5일 만에 달성한 3만 관객이란 숫자는 서울의 대형 교회 출석 교인 수보다도 적다. 기독교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실무자들은 항상 기대감을 갖고 출발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의 10%만 볼 수 있다면 1백만 관객을 모을 수 있다고. 이런 얘기를 예전에 했다면 영화가 가진 작품성이나 예술성 혹은 오락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신앙영화는 재미가 없더라도 보러가란 말이냐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오빠> 만큼은 이에 대한 변명을 적극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서 <교회 오빠>의 작품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말기암 환자의 투병생활과 부부애 그리고 신앙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다루는 영화의 정서적 접근은 결코 신파적이 아니다. 눈물을 짜내기 위해 억지스런 연출 보다는 인생의 희노애락 가운데 다가오는 죽음을 신앙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일 이호경 감독이 대중의 충격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길 원했다면 암환자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고, 죽음으로 끝을 맺는 환자 보다는 신앙의 기적으로 회복되는 주인공을 택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근본적으로 소재주의를 택한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특이한 인물과 사건을 쫓아다니는 특성이 다큐멘터리에는 있다. 부부가 함께 암투병을 해야 하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기독교 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오빠>는 분명 다큐멘터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는 ‘생각하는 영화’로서의 장점이 있는 반면 드라마는 생각하는 순간 망해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는 관객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계속 자극적인 장면을 쏟아내야 한다. <교회 오빠>는 다큐멘터리로서 충분히 죽음에 맞서는 신앙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가 구약의 욥기를 따라 진행되며 중요한 욥기의 성경구절이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날 때 마다 관객들은 그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배운 욥과 성경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영화를 위한 변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관객들은 마치 한편의 잘 만든 드라마를 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흔히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주인공들은 일반인으로서의 어색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상황에 잘 녹아들고 있다. 이것은 ‘편집의 예술’이 <교회 오빠>에는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으며(만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연기를 하려든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본래적 성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죽음의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일어난 현실일 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이관희 집사는 이제 다른 영화에 다른 배역을 맡아 출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배우와는 다르다. 그는 오직 한 편의 영화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영화계를 은퇴한 셈이 되고 말았다. 감동이란 말은 영화의 오락성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대중의 가치를 말한다. 대중영화가 오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감동은 즐거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감정을 분출시키는 가운데 일상의 기대감을 넘어서는 경험을 넘어설 때 쓰는 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일에 느닷없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주는 동료들에게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서 기다리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평범한 집사의 마지막 시간은 감동적이다. 기독교영화가 재미없고 작품성이 떨어져서 보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기독교영화가 없다는 애기는 이제 할 필요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나 칸영화제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도 올해로 16회를 맞은 기독교영화제인 ‘국제 사랑 영화제’도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영화가 문화계를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르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맛집에 찾아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 본 적이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영화관을 수소문 해볼 일이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찾아 유튜브를 뒤적여 본일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볼 일이다. 신앙의 감동은 25년 평론을 해온 기독교영화의 전문가가 보장해드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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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7
  • 복음 위에서 교회 밖을 보는 안목 길러야
    기독교적 정의를 말한다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은 가라!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은 온 우주에 편만하다고 믿는 철저한 개혁주의자이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신앙과 삶이 괴리된 이분법적인 사고에 있다며, 신앙과 삶을 일치시키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선 통전적인 신앙과 실천을 강조한다. 윤리신학을 전공한 신학자답게 설교 30편이 수록된 이 책은 1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선 신앙 제2부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 제3부 세상의 소망인 교회 제4부 정의와 공의 제5부 맘몬과 환경, 평화와 통일로 다양하고 균형 있게 구성되어있다. 눈에 띄는 것은 한, 두 달에 한 번씩 평화, 정의, 경제, 통일, 다문화 등의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저자의 영적, 지적인 통찰력이다. 교회에만 머물고 있는 반쪽짜리 소시민적 그리스도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 저자 최현범 목사는 중견교회인 부산중앙교회에서 16년째 목회 중인 목회자이다. 서울대와 총신대 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하고, 사랑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다 독일로 유학하여 보쿰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교윤리로 신학박사(Th.D) 학위를 취득했다. 도르트문트제일교회를 담임하기도 했으며, 학위논문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 그의 관심은 교회와 일상의 삶이 분리된 이원론적 신앙을 극복하여 온전한 크리스천으로 세상을 변혁하는 일이다. 부산기윤실의 공동대표와 극동방송 시사칼럼 등의 사회적 활동에도 열심이다. 나침반, 2019.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함께 살아가는 마을과 교회》 정재영 지음 / SFC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 지음 / 비아토르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통전적인 신학으로 프레임 전환 필요“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야 한다. - 이 칼빈의 가르침이야말로 선교 역사 한 세기를 넘긴 한국교회가 담아야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신학에서 벗어나 통전적인 신학으로의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김길구 이번 모임은 최현범 목사님을 모시고 최근에 출간된 설교집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에 대한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존스토트 목사님의 유작 《제자도》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매뉴얼 같은…저희도 설교집은 처음인데 목사님께서 굳이 설교집 형태로 내신 이유는?최현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인데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평소에 익숙한 설교집으로 출간했습니다. 설교는 우선 쉬워야 하니까요.김형기 그게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아요. 저도 설교자인데 이 설교집은 어려운 주제를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영적, 지적, 정서적 필요를 다 아우르고 있어 매우 유익했습니다.김현호 저는 특히 4,5부의 정의와 공의, 맘몬과 환경, 평화와 통일 같은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김길구 이 책을 쓴 동기일수 있는데 목사님은 머리말에서 ‘한국교회는 프레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고 하셨습니다. 이유는?최현범 위기 때문이죠. 과거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교인들과 부딪히는 과정에서 생겼다면, 최근에는 재정, 세습, 성적일탈 및 수구적인 정치행태 등 공적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젊은이들의 이탈이 심각해요. 사회적 영향력도 예전만 못하고.김현호 목사님은 그 이유를 세상과 교회를 나누는 이원론적 신앙에서 찾으셨는데‥최현범 100년 전 얘기입니다만 3.1운동을 보세요. 교인이 국민의 1%에 불과했지만 나라의 큰 희망이었지요. 지금은 덩치만 커졌지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초기의 교회는 영적인 부흥성장뿐 아니라 신분타파, 여성운동, 인권존중 등 당면한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민족의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사회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김형기 활화산처럼 분출했던 3.1운동이 일제의 총칼 앞에 좌절되자 그 공허한 마음을 이용도 목사 같은 분들의 신비주의적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되고, 현실에 눈감은 내세지향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면서 사회성을 상실한 채 신앙이 개별화, 내면화 되고 말았어요. ‘생각하지 않는 죄’최현범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기독교 전통에는 세상과 교회의 관계에 대한 2가지 견해가 있어요. 전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탕으로 세상나라와 하나님나라를 분리하지 않은 칼빈의 <그리스도 주권설>과 정교분리를 주장한 루터의 <두 왕국설>이지요. 물론 루터는 세속권력을 끌어들여 무력을 행사하는 로마가톨릭교회나 정부로부터의 간섭을 피해 교회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교분리는 나중에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교회가 용인함으로써 유대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도 듣게 됩니다. 김현호 1974년 WCC에 대항해서 복음주의권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서 사회참여를 통한 정의, 평화문제 등에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를 선언했는데‥최현범 그때 한국교회는 1972년 유신정권의 출현으로 사회분위기가 사회참여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들었던 엄혹한 시절이라 엄두를 못 냈지요.김형기 1961년 독일 SS친위대장 히믈로의 오른팔이었던 ‘아이히만’이 600만 유대인 학살의 주범으로 사형 당하는 세기의 재판을 참관하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를 쓴 한나 아렌트의 예화를 드셨는데, 그런 세기의 학살자도 우리처럼 가족을 사랑하고, 직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시키는 대로 성실히 일하고, 교회생활도 잘하는 그저 평범한 이웃아저씨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예화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최현범 그런 평범한 사람이 왜 세기의 엽기적인 괴물이 되었을까요? 한나 아렌트는 그의 죄목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성도인데, 교회의 울타리만 넘으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요. 세상은 하나님이 아닌 마귀가 득세하는 죄악된 곳이니 세상의 원리에 타협하며 ‘이중윤리’로 사는 겁니다. 사회가 부패하니 정직하게 살다간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 때문이죠. 그러니 그리스도인과 세상사람을 구별할 수 없어요. 도리어 세상의 왜곡된 문화만 교회 안으로 들어와 더 혼탁해지죠. 동성애, 낙태 반대 등 개인윤리에 머물러 김현호 목사님은 현재의 개신교가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 등 영광신학에 물들어 있다고 하셨는데‥최현범 원래 이 말은 루터가 복음을 왜곡하여 면죄부를 파는 부패한 가톨릭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 그리고 교회갱신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신의 신학을 십자가 신학이라고 했는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개혁을 앞세우며 시작한 개신교가 500년이 지난 오늘날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개신교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고난이 아닌 돈과 권력을 얻으려 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으며, 헌신과 섬김으로 세상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김길구 한국의 교회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무관심하다 최근에 일부가 정치화하는 경향이 있어요.최현범 3.1운동이후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정교분리에 충실하여 정치적인 분야에서는 무관심과 중립으로 일관하다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 자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기독NGO를 조직하고 반정부집회를 열고, 설교대에서 목사가 정치적 발언도 해요. 한국교회의 정교분리는 사실상 폐기되었습니다. 다만 동성애, 낙태 반대 같은 개인윤리에 머물러 우리사회가 당면한 부의 불평등 등 사회구조적인 면에 소극적이란 점은 생각해 봐야죠.김현호 기독교윤리적 측면에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요?최현범 이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것이 과연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일까요? 저는 대학생 시절에 이런 고민 없이 살았어요. 온 나라가 민주화운동으로 떠들썩해도 이원론적 신앙에 갇혀 세상과 교회를 철저히 구분했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목사가 되겠다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니 군부독재가 저항에 굴복한 6.29 선언을 즈음하여 신학생들과 함께 저도 데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는 물론 저에게도 놀라운 경험이었죠. 그후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유학을 결심하고 학위논문도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것을 썼지요. 그래서 얻은 결론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시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손엔 성경을, 또 한손엔 신문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가 더 확장되도록, 우리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어야합니다. 정의를 묻는다김길구 본문 중 ‘한국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성경 속의 정의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적인데요? 수년전 마이클 샌들은 하버드대학 강의록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하여 한국의 ‘정의론’에 불을 지폈는데 이 책이 미국에서는 10만부 정도 팔린 것에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100만부가 넘는 장기베스트셀러가 되었어요. 그 이유를 ‘한국사회는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분석했는데‥ 과연 ‘기독교적 정의’는 무엇입니까?최현범 우리사회의 문제는 ‘공의의 부재’와 ‘정의의 실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공의와 정의를 내가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칭의’로 바꾸는 경향이 있어요. 복음을 단순히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틀 속에 가둬버립니다. 평화라는 말도 마음의 평안으로 해석하고, 가난도 마음의 가난으로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다보니 평화와 빈곤의 문제를 우리와 무관한 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중요한 말씀들을 개인구원과 내면의 문제로 바꾸면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되겠죠.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우선 공정한 재판입니다. 국가는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악은 벌주고, 선은 상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빈곤의 문제를 치유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돌봐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peacemaker로서 평화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곳이 공정한 사회이며 기독교적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지 반문해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도록…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김형국 목사의 《하나님나라의 도전》이란 주제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9-05-13
  • [영화] 예술이 신앙의 가치를 위협할 때
    난해하거나 인간적이거나 1970, 80년대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각본을 써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감독이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영화를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2천 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자신의 개성을 살린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다. 공포영화에서 범죄와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평론가들로부터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의 특기는 종교적 감각을 활용한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를 심미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켰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꿈꾸는 듯한 환상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원하는 욕망과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운명가운데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가톨릭을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이 이 영화를 성토했고 상영반대 시위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의 최신작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예수가 아닌 목사라는 성직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부조리한 인간의 욕망을 들추면서 어쩌면 그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내용을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만든 자기 고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교회비판의 외형 속에 담긴 내면의 부조리 군목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라크 전쟁에서 잃어버린 에른스트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250년 역사를 지닌 시골의 작은 교회 ‘퍼스트 리폼드 처치’의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화란의 개혁교단 출신의 이민자들이 세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지만 지금은 가끔씩 관광객들이 들려가고 주일이면 열 명도 채 안 되는 교인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박물관식 교회가 되고 말았다. 대신 이 교회를 발판으로 인근 도시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건축되어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외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골교회의 목사 톨러는 여성신도인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자신의 남편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메리의 남편 마이클은 극렬한 환경주의자로 상담을 진행하던 중에 숲 속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톨러 목사는 메리를 위로하며 그녀에게 남다른 느낌을 받고 아울러 신비적인 경험조차 하게 된다. 툴러 목사는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큰 기부를 한 에너지개발 업체 대표인 교회 성도로부터 환경주의자의 장례식에 성가대원 일부가 참석하고 노래한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다. 톨러 목사는 리폼드 처치의 설립 2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마이클의 유품으로 나온 자살폭탄용 조끼를 입고 퍼스트 리폼드 처치에 들어가려던 중 메리가 있음을 알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그는 토끼 울타리 용으로 사용했던 철조망을 몸에 감은 채 세제를 먹고 고통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 고난을 지고 가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던 중 그를 찾아 온 메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단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이러한 줄거리 요약은 별 의미가 없다. <퍼스트 리폼드>는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감독의 독특한 이미지 구성 방법에 의존하여 뭔가 부조리한 현실세계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인간의 심리를 영상이미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보면 알 수 있지만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 단어는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읽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를 교회나 기독교신앙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관객이 본다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목사의 테러미수 정도로 읽혀질 수 있다.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성직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는 자연파괴를 통해 돈을 번다고 믿는 에너지 기업이 후원하는 대형교회의 행사에 불만을 품고는 교회 행사에서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래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곰곰이 따져보는 관객이라면 두 가지의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는 환경파괴에 무관심한 현대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기업화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영화를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자살한 교회의 성도가 옛날 작은 교회에 출석한 환경운동가인 반면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기여한 성도는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에너지 기업의 대표란 점 말고는 구체적인 상황은 나타나 있지 않다. 에너지 기업의 대표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으며 그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교회 또한 환경훼손에 무관심하거나 반성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필자가 현대교회에 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으지 모르지만)영화는 단지 외형적 규모가 클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부자교인들도 다니는 보통의 평범한 교회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다. 오히려 작은 리폼드 처치로부터 성장한 대형교회의 흑인 목사는 백인 툴러 목사를 청빙한 장본인이이며 동시에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가 행사를 마친 후에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하는 사려 깊은 목회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철저히 툴러 목사 개인의 삶과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영화 제목은 ‘퍼스트 리폼드’이지만 내용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아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툴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일기는 쓰지만 은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말 적막하고 어쩌면 수도원적 생활이 어울릴 것 같은 시골의 목사관에서 매일 일기를 쓰는 툴러 목사의 삶은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최적의 환경일 수 있다. 시끌벅적 시장 같이 시끄럽지 않으며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얼마든지 개선하기 위한 시도도 가능하다. 비록 큰 교회의 지원을 받지만 그는 250년 된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주님으로부터의 목회적 소명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울러 그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에서 알코올 중독증세도 보이는 등 성직자로서 불안한 문제를 갖고 있다. 기도로 못한 이야기를 일기에 적는 다고 하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자신의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외부의 문제에 대한 공격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순교로 착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신이 비판한 부조리한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툴러 목사를 이해하는 방법은 폴 슈레이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는 일이다.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문명화된 도시사회의 인간소외를 잘 그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핵심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영웅화된 이미지로 그려나갈 때 생기는 또 다른 부조리한 모습에 있다. 트레비스는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밤에만 운전하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부패한 도시 뉴욕을 청산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어린 여성을 성매매하는 포주들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부조리를 발생시킬 뿐이다. 툴러 목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정하지 못한’(딤후3:5) 인물을 대표한다. 겉으로는 환경을 생각하고 자본주의에 물든 기업형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경건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데는 실패했다. 성직자로서 극렬한 환경주의자인 마이클에게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가 계획했던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마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툴러 목사는 자신과 주변의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폭탄으로 제거되어야 할 부조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인가? 부조리한 세상을 구원할 존재를 영화는 놀랍게도 마이클의 미망인 메리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리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름이며, 툴러 목사가 급히 자살폭탄 조끼를 벗어던졌던 이유도 메리가 교회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다. 메리와 그녀의 복중에 있는 아이는 툴러 목사로부터 보호받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감독의 가톨릭 신앙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이 같은 해석은 부조리한 세상의 왜곡된 구원의 모습이다. 툴러 목사는 멸망과 구원에 대한 인식을 환경주의자가 아닌 성경으로부터 얻어야 했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메리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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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9
  • 교회를 경로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파급
    한국에 얽힌 문제 삼일운동에서 해법찾아 지난 3월1일은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교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예배 중에 독립기념문을 낭독을 하는가 하면 교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당시를 재현하기도 했다. 한 달이 지난 오늘은 어떤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하나가 되어 메아리 친 외침이 무색하게 나라는 여전히 동강나고,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갈라져있다. 저자는 100년 전 일어난 이 운동의 정신을 세계열강의 외세에 맞선 독립운동이자 대중민주주의운동, 일제의 폭압에 맞선 비폭력 평화운동, 민족정신과 시대정신이 만나 한국근현대사의 중심과 뼈대를 이룬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한국근현대사의 정신과 철학의 꼭대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기고 설긴 문제의 해법을 삼일정신에서 찾고 있다. || 저자 박재순은 어릴 때부터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닐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로부터 성서신학과 민중신학을 박봉랑 교수에게 바르트와 본회퍼를 배웠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서주석서를 번역하였으며 대학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에 매료돼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을 지내고 재단법인 씨알사상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씨알사상을 알리는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삼고 있다. 저서로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등이 있다. 홍성사, 2015. 10,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3.1운동과 민족대표 16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 《세상을 밝힌 한국기독교 저항사, 저항하는 그리스도인》 강성호 지음 / 복있는 사람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기독교는 앞장섰고,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 당시 기독교인은 한국인구 1,600만명 중 20만명에 불과했으나 수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 학생,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삼일운동에 앞장섰고, 삼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3.1운동은 기독교 민족운동 김길구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으로 전국이 떠들썩할 때를 피해서 차분히 기독교적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취지로 한 달 늦게 마련했습니다. 100주년을 맞았던 소회가 어떠했는지? 김형기 나라 안팎에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 시점에 맞이하는 100주년이라 더 많은 생각을 했어요. 기독교가 난국에 국민통합의 주역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스스로 반성하며 지냈습니다. 김현호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행사로 기념하는데 비해 기독교출판계는 삼일운동의 평가에 인색한 편이어서 아쉬웠습니다. 제대로 된 저술은 두어 권 밖에 없어서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김길구 목사님은 선정 작업을 할 때 적극적으로 이 책을 추천하시더니 막상 읽으시고는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어떤 점이 문제였나요? 김형기 저자와는 친구사이인데 막상 기독교보다는 천도교의 영향력을 크게 평가했고, 결론 부분에서는 씨알사상에 편향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학자이기도 한데 3.1운동에 대한 구속사적 언급이 미흡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김현호 이 책은 교회사가 아닌 한국사의 맥락에서 이 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말하고 있어요. 이 운동의 위대성은 위기의 국면에 종교의 차이를 넘어 온 백성과 기독교와 천도교와 불교가 하나가 되어 이룬 세계사적으로도 드믄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 점입니다. 김길구 삼일운동을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민(民)의 개념 즉 씨알들이 스스로 함께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 운동으로 보았는데, 이들은 한국적 언어로 기독교를 말하는 기독교사상가로서 기존의 교리에 억매이지 않아 일반교인들이 읽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김형기 3.1운동은 민족사의 범주를 넘어서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대 사건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의 5.4운동, 인도 간디의 비폭력 대영 항쟁과 필리핀, 베트남, 이집트의 민족운동에도 영향을 준 것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2.8독립선언에 대한 언급 없이 바로 3.1운동으로 들어갔어요. 아시다시피 2.8독립선언은 적국 일본의 한복판 동경YMCA회관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동이 되고 춘원 이광수가 선언문은 썼지요. 김길구 저자는 당대의 천재라던 30세 최남선이 쓴 명문 3.1독립선언문의 작성에 영향을 끼친 이로 손병희 선생을 지목합니다. 그가 준 3대 지침은 평화적이고 온전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과 둘째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을 바탕 한 정의와 인도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기독교인인 안창호의 민족정신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을 통해 국가주의를 넘어 세계평화를 지향한 교육입국운동도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김형기 당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청교도적인 신앙관을 가진 분들이었죠. 밖으로는 선교를 위하여 정·종분리를 주장했으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한 선조들의 개척정신을 경험한 이들의 가르침은 나라를 빼앗긴 이 나라에 복음이 혁명적 힘으로 작용하여 강인한 독립심과 엄격한 도덕성, 부정에 대한 항거에 저항할 수 있는 추동력이 됐다는 평가도 있어요. 또한 주권재민과 공화정을 추구한 민주정신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이었다고 봅니다. 김현호 성서는 어떤 면에서 저항의 책입니다. 구약성서는 이런 저항의 사례집이라고 할 만하지요. 이집트에 맞선 모세, 폭군으로 전락한 사울왕에 저항한 다윗처럼. 한국성도들은 당연히 일제의 침탈과 박해에 저항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요. 독립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33인 중 16명, 운동을 촉발한 48명 중에 그 절반이 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고 봅니다. 김형기 그럼요. 기독교 십자가 신앙의 배경 없이 거국적 비폭력 대중항쟁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온 겨레가 함께한 거사였지요. 총독부의 축소된 통계에 따르더라도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전 국민이 1,600만 명이 채 안되었는데 200만 명이 넘고, 전국 36개의 군 가운데 35개 군에서 참가한 기록과 당시 선교사들의 리포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독립시위에 참가했다는 말은 지금 한국에서는 동의어로 쓰인다’ 고 보고할 정도였으니까요. 예수를 믿는 것과 독립시위는 동의어 김길구 조선왕조가 망하고 10년이 안된 시점에 일어났고 그것도 고종의 장례에 참여한 군중시위 이후 다시 과거의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움직임도 없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공화정을 외치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세계평화를 주장한 것은 대단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형기 그래서 저자는 한국근현대사의 꼭대기에 삼일운동이 있다는 것이지요. 위기의 시대에 우리민족의 정신과 열망이 가장 깊고 높이 들어나고 실현됐다는 주장입니다. 세계사에서 이런 예는 없었지요. 우리의 민족 지도자들이 100년 앞을 본 것이지요. 김현호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의 기독교인들의 면면을 보면 기독교와 천도교의 가교역할을 한 남강 이승훈, 가난과 싸우며 수형생활과 교회부흥을 이끈 이필주 목사, 권서인으로서 한국최초의 목사 7인중 한분인 양전백 목사, 대표적 영적 지도자 길선주 목사, 민족목회자 동오 신흥식, 대금업자에서 민족대표가 된 춘헌 이명룡 장로, 후에 기독교 친일의 상징이 된 정춘수, 조선에 YMCA운동과 투옥지사로서 선교사의 생을 다한 최성모 목사. 김형기 그 외에도 신앙적 결단으로 민족대표가 된 신석구 목사, 민족대표에서 임정요인으로 구국운동의 실천가 김병조 목사, 법정에서 대한이 독립하면 공화정부가 되고 열강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한 유대여 목사, 동학에서 기독교로 귀의한 오화영 목사, 조선독립은 예수생명의 힘으로 된다고 한 근곡 박동완 목사, 당시엔 누구보다 열심이었지만 후에 친일파가 된 박희도 목사, 3.1운동 거사의 가교 입법위원 이갑성 선생, 북으로 간 김창준 목사였습니다. 김길구 3.1운동의 기독교 역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어요. 이를테면 손병희에게 거사자금 500원을 받은 것과 공식조직을 통해 3.1운동 참여를 공식적으로 결의한 사실도 없이 개인자격으로 참여했다든지 선교사의 반대로 거사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일 등 입니다. 김현호 교회사학자 민경배 박사는 ‘기독교회가 이 운동의 근원적 통로요, 맥락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교회가 가진 국내의 뚜렷한 전국적 조직, 해외와의 유기적 네트워크를 통한 실질적 활동을 들고 있어요. 김형기 서명에 참가한 16명의 대표 중에 세분은 당일 참석을 못했고, 다른 종교와의 연대에 미온적인 기류도 있었지요. 천도교가 이전의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였으니 서양 문물을 적대시하고,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나라를 위해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완의 운동 김길구 흔히들 한 세기를 지난 3.1운동을 미완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무엇이 끝나지 않았을까요? 김현호 일제강점과 분단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약소국의 소홀한 내부개혁 때문이지요. 북핵사태를 보더라도 우리의 선택권은 매우 제한적이죠. 그런 면에서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평화통일의 묵은 과제가 있습니다. 김형기 민족의 자주독립,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세계평화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천명한 3.1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죠. 교계가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 되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어 반듯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요?. 김길구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은 기독교와 민족 운동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운동의 측면은 정의, 자유, 평화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대, 민족운동의 측면은 자유와 평등, 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국가와 민족자주에 있다 고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은 저자인 최현범 목사님을 모시고 신간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9-04-12
  • 선교와 사랑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다
    새로운 기독교영화의 탄생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은 디지털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기독교영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비싼 관람료와 극장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짜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우선 선택을 받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영화란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형 성서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독교인을 놀라게 하는 일인 동시에 문화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한국기독교영화계에 가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일이란 점에서 주목받기에 합당하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콜링>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는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platform)으로 일반 극장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택했다는 것과 둘째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물씬 느껴진다. 플랫폼의 변화는 디지털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할 만큼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콜링>은 일반 영화관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선택했다. 즉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전달하는 플랫폼에는 영화관과 TV와 같은 전통적인 상영방식을 비롯하여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VCR과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DVD가 있다. 또한 최근 각광받고 있는 IP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VOD 등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성격을 지닌다. 과거 영화의 경우 플랫폼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곤 했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극장뿐만 아니라 DVD와 영화전문 케이블 TV 그리고 컴퓨터 게임과 책으로 까지 연계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활용될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은 스마트폰과 연계되어 정보콘텐츠를 디지털세계 안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자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 해당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VOD는 가장 성장세가 빠른 영화의 플랫폼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지난 해 한국인들의 영화관람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2018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총 2억1,649만 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편수는 4.18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의 영화관람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7의 2억 1,987만 명 보다 약 3백만 명 이상 줄어든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극장입장권 판매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이유는 극장관람료가 올랐기 때문이다. 평일 일반 영화를 관람비가 1만원이고 3D나 4D를 주말에 보려면 2만원을 줘야하는 현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약한 학생들의 입장을 줄어들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지만 전체관람료 수익은 증대시킨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료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젊은층들이 대신 찾아간 곳은 넷플릭스(Netflix)를 볼 수 있는 인터넷 VOD시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온라인시장의 규모는 극장관람료 수입이 감소한 것과는 다르게 상승세에 있다. 2017년 4,362억 원이었던 온라인 영화시장은 2018년 4,739억 원으로 8.6% 증가했다. 이것은 영화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만이 아니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기독교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세계와 유튜브 세상에 발을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이 유튜브를 놀이공원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매우 적절한 문화선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을 코믹하고 성경적으로 풀다 <콜링>이 이전의 기독교영화들과 다른 두 번째 면모는 작품의 내적인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제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심과 응답을 다루고 있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며 새롭다. 중고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재민(임재민)은 어느 날 자동차를 보러 온 시연(김시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동안 시연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민은 정직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재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옛 사랑에 대한 성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재민은 시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시연이를 따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만일 시연과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매우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교회에서 나름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울러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를 영화는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영화는 정답도 제시한다. 선교는 선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선교를 사랑과 혼합시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잡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관객에게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청년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부르심 혹은 소명, 아니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철저히 현실적인 언어로 영화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독의 영화관이라 볼 수 있는 재미의 추구는 기독교영화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연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주변 상황을 만들어가는 조연은 매우 코믹하다. 재민이 정직한 중고차딜러로서 방송을 타고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장은 재민에게 아메리카노 커피 투 샷을 건네주면서 격려하지만 재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거야.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최실장이 괴롭혀? 재민: “아닙니다.” 사장: “그럼 뭐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어? 재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차 파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임실장, 정신차려 자네가 대한민국 중고차 딜러 중에서 최고야. 자네가 웬만한 딜러 다섯 명 여섯 명 보다 훨씬 많이 팔고 있어. 재민: “저는 이제 선교를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 “그걸 왜 니가 해? 재민: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장: “하, 하나님은 너를 중고차 딜러로 부르셨어!” 영화 연출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심오하고 중요한 얘기를 코믹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신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무거운 톤으로 연출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포영화는 무섭게 만들고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게 묘사하듯 기독교영화라면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기품있고 은혜가 넘치는 느낌이 나도록 표현하면 될 것이란 생각을 영화는 뒤집는다. <콜링>은 결정적 순간에 코믹한 발상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세대가 좋아하는 쿨한 방식인 셈이다. 슬프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잘됐다고 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진짜 멋진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사표를 쓰고 하나님의 소명임을 언급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은 얼마나 훌륭한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묘사했다면 관객은 곧 부담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했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통한 코믹한 연출은 선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가볍게 선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유머는 두려움의 해독제란 사실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디지털 세대에게 유튜브로 다가가는 코믹한 기독교영화 <콜링>. 중요한 신앙의 주제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미래 기독교영화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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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3-27
  • [기독교교양읽기46]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팀 켈러의 짝퉁 神 식별법 십계명 제1, 2 계명, 다른 신을 네게 두거나 섬기지 말며, 우상은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고대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오늘을 사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다. 다만 그 모양이 조금 바꿨을 뿐이다. 섹스와 돈, 끝없는 욕망에 대한 성취와 이를 위한 권력의 추구뿐 아니라 기독교로 둔갑한 문화의 가면을 쓴 짝퉁들이 할거하는 ‘우상공장’인 우리의 마음에서 가짜를 몰아내고 하나님을 제자리에 모셔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하여 신학적, 성적, 종교적 및 문화적 우상 등 10가지의 우상의 유형과 이를 식별하는 방법 등을 소개하였다. 이를 위하여 친숙한 성경의 얘기의 재해석과 권말목록을 활용한 심도 깊은 Tip은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즐거움을 더하게 한다. || 저자 팀 켈러(Timdthy Keller)목사(67세)는 미국 맨해턴의 리디머 장로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 하면서 약 6천명의 교인을 둔 교회로 성장시켰다. ‘21세기의 C.S.루이스’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기독교변증가로도 영향력이 큰 구도자 중심의 복음전도자였고, 리디머교회를 통해 센터처치론을 정립하였다. 지역을 섬기는 사회참여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여 한국에서도 새로운 세대를 위한 모델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조기은퇴 하여 리디머교회를 3개 교회로 분립하는 10년 장기계획인 리디머교회의 도시교회 개척네트워크인 ‘시티 투 시티’ 프로그램에 동참하고 있다. 저서로는 《팀 켈러의 묵상》 《센터처치》 《탕부하나님》 등이 있다. 두란노, 2017. 14,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하나님을 말하다》 팀 켈러 지음 / 두란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톰 라이트 지음 / IVP 인간은 하나님을 인간욕망의 도우미로 전락 시켰다 ‘쾌락의 역설’, 내가 만든 신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인간의 마음은 우상공장“우상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든 당신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보다 더 크게 당신 마음과 생각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얻으려 한다면 그게 바로 우상이다.” 우상,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인간의 모든 시도김길구 21세기의 C.S.루이스라 불리는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 입니다. 원제는 counterfeit gods입니다. 카운터핏은 가짜의, 모조의 라는 의미인데요,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상,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경고의 말로 시작합니다. 김형기 ‘세상에는 실체보다 우상(偶像)이 더 많다’란 니이체의 말을 인용했는데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는 슈퍼리얼리티의 영화 <트루만쇼>의 거대한 가짜세트장에 내가 들어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김현호 당시 종교백화점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이방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가짜인지 아닌지를 비교적 구분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고대종교의 그런 이방신들과는 또 다른 현대인들의 위장된 신들을 얘기합니다.김길구 우상은 금이나 은, 돌과 목재 등으로 형상을 만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데 사도 바울에 와서는 탐심 등 정신적 영역까지도 포함한 개념으로 확대됩니다.김형기 구약에서도 바벨론 백성을 향해 ‘자신들의 힘을 자신들의 신’으로 묘사한 하박국 선지자나 이스라엘이 애급과 앗수르를 상대로 맺은 보호조약을 우상숭배로 질타한 에스겔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도 있어요. 저자는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을 차지하는 것.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다른 데서 찾으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가 바로 내가 만든 신, 곧 우상숭배라고 합니다.김현호 저자의 지적처럼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고, 좋은 것 일수록 더욱 그러기 쉽겠죠. 나의 평생소원, 사랑, 돈, 성취, 권력, 문화와 종교, 은혜 없는 복음도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대중문화가 소비자 중심으로 발전하다보니까 사람들의 종교성에 편승하여 내 입맛에 맞게 신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목상이나 신상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마음속을 지배하는 가짜 신들이 널려 있습니다.전인격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과하지 않은 중요하고 사랑스런 것들이 바로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경종입니다. ▲ 팝아티스트의 거장 앤디 워홀作 <마를린 먼로> 복제화 된 이미지가 환한 미소에도 덧없이 느껴지는 것은 허상을 좇는 우리 삶이 투영됐기 때문일까? 내가 만든 신은 반드시 나를 배신한다!김길구 왜 이런 우상들이 횡횡할까요? 우리 삶의 자본주의화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마저도 내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됐다는 의미지요. 이런 체계에서 중요한 것은 욕구의 충족입니다. 우리의 신앙마저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예수를 닮아가는 제자로서의 삶이 아닌 종교소비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김현호 교인들은 설교와 은혜의 소비자가 되고 목회자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대신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도와는 거리가 멀어지겠죠.김길구 이 책은 각장 마다 우리에게 친숙한 성경인물의 얘기를 통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평생소원, 야곱과 라헬과의 사랑이야기, 세리장 삭개오와 돈, 나아만과 성취, 느브갓네살과 권력, 요나를 통해온 문화와 종교가 그렇습니다. 팀 켈러는 다 아는 성경이야기를 새롭게 잘 풀어내는 재능이 있어요.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지만‥김형기 그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사랑편에서 7년을 고생한 야곱에게 라헬대신 속임수를 쓴 레아와의 가상대화에서 야곱이 레아에게 “나는 어둠 속에서 라헬을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지?”라고 묻자 레아는 “당신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에서를 불렀는데 당신이 대답했어요? 왜죠?”라고 되묻어 야곱의 분노가 잦아들었다는 랍비의 주해를 인용했는데, 곳곳에 통찰을 얻을 수 있어 유익한 글 읽기였습니다.김현호 저는 야곱이 원치 않은 결혼을 한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한 체 장남 르우벤(본다), 둘째 시므온(듣는다), 셋째 레위(연합하다)를 낳고도 마음을 얻지 못했으나 후대에 그 자식들을 통해 예수를 낳게 되는 내러티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형기 풍족한 소유와 소비는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표면적 우상숭배에서는 단호하기 쉬우나 숨겨진 내면의 근원적 우상숭배에 대해서는 통제하기가 더 힘듭니다. 거부인 록펠러, 포드, 카네기가 자선사업을 많이 했지만 돈이라는 마음 속 우상까지 제대로 제어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김현호 은혜 없는 복음은 가짜하나님을 만든다는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리나 은사를 강조하다보면 은혜에 의존성이 상실되고 교리의 정확성에 의존하게 되지요.김길구 성취는 우리시대의 술이다. 개인적인 성공과 성취는 여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우리자신이 신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주게 됩니다.김현호 작은 성공에 우쭐해서 거짓된 안정감을 느끼며, 자신을 왜곡해 보기 시작하고, 제한된 분야의 성공을 모든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한다면 우선 성공을 우상으로 삼는 징후로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든 우상, 그리고 그 식별법김길구 이 책 에필로그에 우상의 종류를 수록해 놓았는데 다 열거할 수 없겠고 그중 몇 개만 소개하면 우선 신학적 우상입니다. 교리적 오류는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심히 왜곡시켜 거짓 신을 만들게 되고요, 정치적·경제적 우상도 좌우파, 자유방임 등 어떤 단면을 절대화해 궁극의 해법을 삼거나 자유시장을 신격화 하거나 악마처럼 여기는 것도 우상이라고 볼 수 있고요.김현호 종교적 우상의 경우 도덕주의와 율법주의, 성공과 은사의 숭배, 종교를 빙자한 권력남용 등과 인종적·민족적 우상은 인종차별, 군국주의, 국수주의 등으로 민족적 자긍심도 지나쳐 적의나 압제로 변하면 우상이 됩니다.김형기 관계적 우상도 있는데요. 병적으로 의존하는 역기능적 가족관계, 부적절한 끌림, 자녀를 통한 대리인생을 사는 것 등이 해당됩니다. 관계에 대한 의무감, 집착 등이 지나치면 분별력을 잃어 양심을 거스리게 되지요. 성적 우상도 마찬가진데요. 포르노와 페티시즘 같은 중독은 친밀감과 수용을 약속할 뿐 실제로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자신이나 파트너의 외모를 떠받드는 행위나 로맨틱한 이상주의자도 여기에 해당 되겠지요. 그리고 모든 ‘중독’도 우상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김길구 마지막으로 팀켈러의 우상퇴치법을 소개해 봅시다. 저자는 먼저 생각의 내용을 점검하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대주교 윌리엄 템플이 ‘혼자 있을 때 하는 일이 곧 당신의 신앙이다.’이라는 말의 의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돈을 어떻게 쓰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김형기 그리고 꾸준히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통제하기 힘든 자기감정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말씀의 묵상과 기도의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계속 대상만 바뀔 뿐 우상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됩니다.김현호 팀 켈레는 세속적인 관심이나 욕구충족에만 관심이 있는 가짜들과 결별하고 래디컬하게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진짜냐 가짜냐?김형기 읽으면서 허구이긴 하지만 환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탐욕에 물든 악의 군주 사우론에게 압도적인 악의 실체를 느꼈다면, 이 책에서는 우리의 내면에 꽈리 튼 탐욕의 실체와 문화와 종교로 교묘히 위장한 가짜우상들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책이었습니다.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이번호는 300쪽도 안 되는 작은 규격의 책이었습니다만 다룰 부분이 많아 토론이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다음에는 3.1절 특집으로 씨알사상연구소 박재순소장의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19-03-14
  • [영화] 기독교인은 코미디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코미디와 경건한 신앙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웃음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제시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윌리엄 수사와 그의 조수 아드조가 등장한다. 죽은 수도사들마다 손가락과 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을 발견한 윌리엄 수사는 그들이 모두 독살되었고 모종의 책과 연계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도원에서 결코 읽으면 안 되는 금서로 밝혀진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제2권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웃게 만드는 희극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호르헤 수도사는 경건한 수도생활에 웃음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두려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호르헤 수사는 신앙의 본질이라 여긴다. 즉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만큼 두려움을 없애는 웃음은 신앙에서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르헤는 응징의 차원에서 남몰래 시학 제2권을 읽는 수도사들이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습관을 이용 책 귀퉁이마다 독을 발라놓았었다. 그는 독살의 장본인으로 밝혀지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시학 2권을 씹어 먹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어두운 문화적 분위기를 현대인에게 잘 전해준다. 웃음과 핏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이름아래 무겁고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원 안팎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수도원의 타락과 수도회와 교황간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가 소재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지금 현존하는 시학 제1권 6장에는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서 관해서 논의해보자.”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먼저 쓰고 나중에 희극을 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에 착안 <장미의 이름>의 끝 장면처럼 시학 제2권이 사라진 연유를 중세 수도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웃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영화의 분야에서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과 메시지를 주는 코미디 장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독교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나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한 드라마 장르에서 웃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신앙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선교적 소명 등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이슈를 다루었지만 웃음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기독교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진중한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본질을 잘 살린 대중영화다. 설 연휴에는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를 선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개봉시점도 매우 잘 선택했다. 거기다 맞대응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극한직업>은 불과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마약범죄조직을 감시·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5명의 마약반 형사들이 작전상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코미디의 주요 장면을 구성한다. 치킨장사는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까닭에 수사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진선규)가 개발한 ‘수원 왕갈비맛 통닭’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치킨집은 맛집으로 소문나게 되고 형사라는 본업은 오간데 없이 치킨 장사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종합선물세트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상대방을 비꼬는 언어감각이 살아있는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의 형식이 주효하지만, 범인검거 현장에서 드러난 형사들의 과장되고 어설픈 행동들은 찰리 채플린이 했던 것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의 연장선을 잇고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녀 형사의 애정표현은 이 영화가 나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 관점에서 <극한직업>은 왜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코미디영화 제작을 꺼려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기도 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유발의 특징들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요소의 핵심에는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위의 붕괴’란 선하든 악하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며,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같거나 그 보다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강력범을 잡은 경찰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비록 위장전술이긴 하지만 형사들이 치킨집 종업원으로 변신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경찰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웃음이 유발되는 ‘권위의 붕괴’를 보여준다. “180도 기름에 대이고 칼에 베이고 얼마나 쓰라린 줄 알아?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마형사는 마약범을 잡다 몸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닭을 튀기다 얻은 상처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의 얼굴은 닭을 잡을 때의 표정이 아닌 범인을 잡을 때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범인이 아닌 닭을 잡는데 온 힘을 다 쏟는 형사의 모습에서 권위는 전복되고 만다.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 운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며 고반장(류승룡)은 반원들에게 크게 한마디 한다. “정신 안차릴래. 우리가 지금 닭장사하는 거야? 야 그럼 이 참에 사표 쓰고 닭집을 차리던가!” 마약반의 책임자로서 이 같은 말에는 권위가 살아있음을 관객은 느낀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리자 그의 말은 곧 변해버린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 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왕갈비 통닭입니다.” 급 반전된 반장의 말과 억양에서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가 가져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다.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마약조직의 보스인 이무배(신하균)나 테드창(오정세)이 잔인하고 포악한 범죄자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로 등장한다. 심지어 헤어밴드와 노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악당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도 코믹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권위를 버릴 것인가? ‘권위의 붕괴’는 곧 잘 조롱이나 폄하 혹은 풍자로 읽혀지다. 지배자의 권위를 앞세우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민주화를 지향하던 한 대통령은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언급을 공식적으로 할 만큼 한국사회는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로 얻는 것도 있다. 바로 대중적 친밀함이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방식이며 또 다른 리더십이기도 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경찰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이지만 경찰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치킨집은 일상 그 자체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면서 퇴직 후 선택하는 1순위 직장이기도한 치킨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으로 인식된다.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에 몰두할 때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결코 천만 흥행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역할은 살아있었다. 결국 형사들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과 더불어 도덕적 만족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을 주는 의미에서 권위를 되찾고 싶다면 권위 자체에 몰두하기 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바로 세울 일이다. 소금의 권위를 쫓기 보다는 본래의 맛을 내는 역할(마5:13)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미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기꺼이 허용한 사람이다. 왜 일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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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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