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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호, [한국 기독교교육학 문헌목록(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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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교육학 문헌목록(Ⅱ)임창호 지음 / 기독한교 / 2020.2.
임창호 교수(고신대)의 『한국 기독교교육학 문헌목록(Ⅱ) 2006-2018』이 한국기독교교육학회의 부설출판사 ‘기독한교에서 출판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기독교교육학계의 모든 연구문헌들의 전체적이고 완전한 총정리가 완결되었다. 이 책에는 2006년에서 2018년 사이에 기독교교육학 분야에서 출판된 단행본, 학술논문, 석박사 학위논문, 외국어 연구물 등 총 6,221건의 문헌이 가정, 교리와 성경공부, 교육목회, 교회교육, 기독교교육, 기독교학교, 노인과 영성,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 통일과 다문화 등 총 11분야의 주제별로 분류되어 서지되어 있다. 이 책의 출판으로 2008년에 출판된 오인탁의 『한국 기독교교육학 문헌목록(Ⅰ) 1945-2005』와 더불어 한국에서 이루어진 기독교교육학 분야의 전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지도가 완성되었다. 임창호 교수는 한국기독교교육학회 제35대 회장(2019년)을 역임했고, 현재 고신대 교학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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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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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부활’이 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갖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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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계절을 맞이한 영화
코로나19의 난국 속에서 새로운 영화나 관객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밀폐된 실내일수록 코로나19의 전파력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전문가의 진단은 영화관 좌석을 배정할 때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간격을 두고 객석을 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을 모으는데 실패했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전국 극장을 통 틀어 1일 관객 수는 2만 명대로 떨어지며 2004년 통합전산망 집계를 시작한 이후 역대 하루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국 513개 극장에 3,079개의 스크린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 1편을 하루 종일 틀어도 관객은 10명도 채 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CGV는 전국 직영점의 32%에 해당하는 35개 극장(전체 108곳) 영업을 임시 중단하고 문을 여는 극장조차도 일부 목 좋은 곳을 제외 하면 하루에 세 차례 밖에 영화를 틀지 않는 스크린 컷 오프(Screen cut off)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더 큰 문제는 코로나19 난국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한국영화 산업계 전반에 장기간 미칠 영향이다. 지난 3월 25일 영화제작가협회를 비롯한 11개의 영화직능단체와 롯데시네마를 비롯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주들은 ‘코로나19로 영화산업 붕괴 위기,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영화제작단체들과 멀티플렉스 영화관 사업주들은 오랫동안 특정영화의 스크린 독과점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사이였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뜻을 같이했다. 왜냐하면 한국 영화산업 전체 매출 가운데 영화관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80%에 이르는 상황에서 영화관에 관객이 없다면 영화산업은 몰락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음을 모두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관의 위기는 소비산업 전반이 위험한 상태에 처했음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쇼핑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극장 주변의 식당이나 카페, 상점 등을 방문하여 자연스러운 소비활동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영화관의 위기는 지역 경제와 소상인들의 생존에도 큰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시절에 호황을 누린 곳은 영화관 밖에 없었다. 가난과 실업이라는 현실적인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몰려들었다. 그 당시 개봉된 영화들 속에는 실직자나 가난한 노동자와 같은 빈곤의 현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멋진 저택과 고급 승용차, 그리고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상류층의 모습이 비춰졌다. 경제적인 곤란에 처한 사람들은 영화관 속에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며 위로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는 잠시나마 꿈을 꾸고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관마저 문 닫게 만들어버렸다. 사회적 거리를 통해 바이러스를 통제하려는 보건당국의 지침 속에서, 사람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문화 소비가 끊긴 현실을 바라보며 한국인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할까?
부활을 기다리는 기독교영화
부활절 전후로 개봉을 앞 둔 기독교영화는 네 편이 있었다. 지난 해 영화관을 감동의 눈물로 흠뻑 적시었던 <교회오빠>는 영화 검색어 순위 1위에 오르며 재개봉 날짜를 확정 지었지만 끝내 상영이 무산되고 말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특집 다큐멘터리로 방영한 KBS의 <걸레성자 손정도>와 MBC의 <부활>도 극장판으로 확장하여 부활절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 역시 코로나19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2019년 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기대를 모았던 외국영화 <하나님과의 인터뷰>(An Interview with God, 2018)는 지난해 9월부터 개봉일 잡지 못한 채 표류하다 이번 부활절을 예약했지만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특히 <순종>과 <제자, 옥한흠>을 연출한 김상철 감독의 <부활>은 제목이 뜻하는 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잃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나누고자 기획 때부터 부활절을 기다려 온 영화였다. <부활>은 2019년 12월 25일 새벽 1시에 MBC의 성탄특집으로 방영되어 동시간대의 평균 시청률의 10배가 넘는 대기록을 세운바 있었다. 제작진과 방송국 모두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경험했던 터라 이번 부활절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배우 이성혜와 김상철 감독의 페르소나 같은 존재인 배우 권오중, 그리고 췌장암 투병을 통해 죽음이 만만치 않은 대상임을 경험했던 이용규 선교사 등 세 사람이 인도의 바라나시(Varbnasi)를 시작으로 죽음의 순례를 떠나 이탈리아 로마의 카타콤( (catacomb)에서 왜 부활이 인생의 정답인지를 보여주었다. 바라나시는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이슬람의 역사가 한 곳에 집중된 보기 드문 종교성지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갠지스강가에서는 시신을 태우며 환생을 기대하는 힌두교인들의 장례식을 볼 수 있어서 죽음에 대한 탐구를 하기에 매우 흥미로운 장소임에 분명하다. 이곳에서 기독교의 부활은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세계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같은 세계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있을 때는 자신을 움직이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옆에 갔을 때는 분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왜 <부활>의 촬영장소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시작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세계관 속에 비춰진 죽음에 대한 이해를 뒤로하고 영화는 로마의 카타콤에서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로마시대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치했던 지하무덤이자 박해를 피해 숨은 기독교인들의 예배장소이기도 했던 카타콤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러 층으로 수 킬로미터의 미로처럼 얽힌 통로를 파고 수 만 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던 신앙인들이 부활을 기다렸던 거룩한 장소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얘기했던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어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카타콤에 누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목격한 사람들이며 또한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목격자가 되어 살아있는 부활의 신앙이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영화 <부활>의 가장 뛰어난 캐스팅은 미스코리아 출신의 이성혜와 비교문화학자인 이어령 교수를 등장시킨 일이다. 한국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와 한국최고의 지성인이 생각하는 죽음과 부활이란 생각만 해도 그 조합에서 어떤 말들이 흘러나올지 기대감을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이성혜는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 올 텐데.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죽음 앞에 서있을까?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 이어령은 죽음에 대한 호기심어린 눈망울 반짝이며 “나에게도 이 상흔이 없다. 상처는 있을지 몰라요”란 말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고 있다.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십자가의 상흔, 스티그마(Stigma).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흔적 없이 세상풍파에 찌든 상처를 내밀며 기복신앙에 몰두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남긴 노교수의 일침이 꼰대의 발언이 아닌 선배의 애정 깊은 충고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지금 아무런 의학적 처치 없이 죽음의 순례 길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 앞에 놓인 죽음의 길은 어떤 모양으로 인식되고 있는지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궁금하기만 하다.
새로운 플랫폼이 필요한 기독교영화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서비스는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서 영화를 살리는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온라인으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대학에 이어서 초중고 학생들도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코로나19에 대항하기 위한 사회적 격리와 사회적 거리를 두려는 문화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비교적 잘 버텨내고 있는 것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소비활동이 가능한 초연결사회(超連結社會, hyper-connected society)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에서 동네 재래시장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주문이 일상화되고 신선식품 마저도 새벽배송이 이루어져 아침식탁에 오르는 초연결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소비자들은 비대면 소비문화를 살아가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영화와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미국의 유튜브나 넷플릭스, 그리고 디즈니와 애플TV 같은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코로나19가 창궐할수록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여 바이러스만큼이나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글로벌빅데이터연구소가 지난 2월 15일부터 25일까지 넷플릭스의 온라인 정보량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 2월 22일 3,717건이었던 넷플릭스 정보량이 25일에는 5,070건으로 36.4%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3천 건 후반 대를 유지하던 일별 정보량은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폭발적인 소비가 일어난 것이다.
특히 중국을 제치고 코로나19 확진자수가 급속히 증가한 유럽의 경우 집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온라인 영상서비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접속자수가 늘어나자 넷플릭스는 일단 유럽에 한해서 인터넷 과부하로 인해 시스템이 다운될 것을 염려한 끝에 한 달간 화질을 낮추기로 결정했다. 최고의 영상을 제공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넷플릭스가 스스로 서비스 품질을 저하시키는 전략을 쓸 만큼 세계인이 영화를 보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극장에 가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는 문화에 사람들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기독교 영화에도 플랫폼의 변화가 필요로 함을 의미하는 일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문화는 콘텐츠 싸움이라는 얘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얼마나 양질의 내용이 들어있는가에 따라서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집 밖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결국 실내에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을 찾기 마련이다.
부활을 앞두고 정말 좋은 기독교영화들이 제작되었지만 극장에서 볼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플랫폼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할 때이다. 한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한국형 좀비영화 <킹덤>시리즈에 보인 관심의 십분의 일만 보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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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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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실천적 무신론자’의 득세가 위기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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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심중소회류호준 저 <교회에게 하고픈 말>
저자가 지난 2년 동안 월간 <목회와 신학> ‘유호준교수의 심중소회’(心中所懷)에 게재한 글들을 수정 보완하여 출판한 책이다.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 25년, 현장 목회자로서 25년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마음에 품고 있는 회포 - 생각이나 정을 정리한 글로 탄탄한 이론 못지않게 현장감이 남다르다. 그가 지적한 우리 교계가 고쳐야할 <교회와 신앙의 적폐 목록>이 62개 항에 이른다. 그것도 모자라 끝에는 등이라고 표시하여 더 있음을 시사하며, 그 원인을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득세로 보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위기에 직면한 한국의 기독교계가 원로 신학자 겸 목회자가 던지는 묵직한 돌직구와 따뜻한 격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 저자 저자 류호준 목사는 미국 칼빈신학대학원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 교수로 25년 재직했다. 미국 오하이오 톨레도 한인교회와 평촌 무지개교회에서 25년간 목회한 목회자이기도 하다. 2018년 은퇴 후 무지개 성서교실을 통해 평신도와 목회자들을 위한 신학교육에 힘쓰고 있다.저서로는 《일상행전》, 《일상신학사전》, 《생명의 복음》 등이 있다. 두란노, 2020. 14,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을 기독 서적들 《일상행전》 류호준 지음/ 세움북스 / 《슬로처치》 크리스토퍼 스미스, 존패티슨 지음 / 새물결플러스 /
‘실천적 무신론자’의 득세가 위기의 원인-교회와 신앙의 적폐 청산 시급-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 <소래교회>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생한 교회로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졌다.
존중하십시오!“ ‘첫째, 말씀(text)을 존중하십시오. 둘째, 강단(pulpit)을 존중하십시오. 셋째, 회중석(pew)을 존중하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은 그 후 목사가 되어 지금까지 설교단에 설 때마다 어디선가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신비롭고 소름 끼치는 유령의 손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교회 적폐들김길구 코로나19의 창궐로 교회가 임시폐쇄 되는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모두 건강에 유의해야겠습니다. 오늘은 류호준 목사님의 《교회에게 하고픈 말》입니다. 읽고 난 느낌부터 말해 볼까요?김형기 우선 저자의 뜨거운 마음이 전달되어 공감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문제 제기의 심각성과 광범위한 측면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일부 해법이 시대적으로 과연 적절한 처방인지는 생각해 볼 여지도 있어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자가 60여 개의 적폐목록 중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부’라는 주장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었습니다.김현호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우리 교회가 버려야 할 적폐 62가지와 그에 따른 해법 등을 날카롭게, 그러나 교회를 향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 노학자의 일갈에 우리 모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이 책을 그가 스승으로 여기는 손봉호 박사께 헌정했는데 두 분 다 네덜란드 자유대학 출신으로, 복음주의권의 개혁론자라는 공통점이 있어요.김길구 속표지 다음의 2장을 할애하여 사랑과 존중의 예를 표하는 것을 보고 흐믓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풍경이죠. 발표 당시 적폐목록이 화제였는데, 저자는 이런 폐습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을 ‘실천적 무신론자’들의 득세로 진단하고 있습니다.김형기 실천적 무신론자는 입으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말하고, 행동하고, 설교하고, 기획하고, 운영하는 교계지도자들을 지칭합니다. 언행불일치의 삶을 꼬집은 것이죠.
미국식 실용주의와 자본주의 병폐들김길구 북한 달력에는 한 주의 시작이 일요일이 아닌 월요일이 맨 앞에 있는 것을 보면서 한 주간을 주중과 주말로 구분하는 현대인들의 인식을 다시 생각해보았다는 저자는 지금의 세태가 크리스천의 생각마저 바꿔 놓아 일요일은 새로운 한주의 첫날에서 주말의 둘째 날로 폐위시켰다는 분석이 재미있네요.김현호 저자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안녕하지 못하다고 진단하면서 아닌 체 하지만 돈의 힘을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미국식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가 교회 안에 고스란히 이식되었다며, 호객행위로 교인 수를 늘이는 것이 마치 재벌기업이 골목상권을 잠식하듯 80%가 미자립인 한국교회에서 대형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는 추세를 우려하며, 저자는 이런 사태를 야기한 일부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에서 일하는 사역자들을 종교마약 거래상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처럼 교회성장주의는 교회의 외적 부흥과 함께 교회 간의 경쟁도 부추겨 규모를 키우기 위한 온갖 세속적 방식들이 동원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목회자도 성공한 회사의 CEO처럼 셀렙이 되는 세태를 냉소적으로 봅니다.김형기 저자는 신학교수의 경험에서 목회자들의 성경무시의 행태와 함께 목회현장에서 느낀 교인들의 성경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함이 어우러져 오늘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진단하면서, 특히 목회자들에게 마르텐 와우스트라 박사의 성경본문에 귀기우리는 말씀의 존중과 하나님의 현존이 경험되는 강단의 존중, 구원이 절실해 거룩한 굶주림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을 존중하라고 조언합니다.김길구 이 책은 21개의 칼럼의 모음집입니다. 본문 중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면‥ 저는 “슬픔과 비통함을 고귀하게 여기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겪는 비애와 슬픔에 귀기우리세요. 마음을 다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슬퍼하십시오. 그리고 ‘고치려 하지 말’고 말하는 연습보다 듣는 연습을 하십시오.” 란 대목입니다. 김형기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십시오. 과거의 실패와 성공을 모두 묻어 버리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습니다, 삶의 고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하십시오.”김현호 “‘늙은 개는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란 말이 있다. 새롭게 되어야 할 것은 설교가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다.”
신천지사태를 반성의 계기로 김길구 코로나19의 창궐로 인한 전 지구적 재앙인 팬데믹의 공포가 이어지는 와중에서 신천지란 존재의 등장은 대반전이었습니다. 때가 때인 만큼 이 책과 연관해서 신천지사태가 주는 교훈은 무엇이 있을까요?김현호 신천지 집단의 반사회적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은 이들이 전형적인 ‘종교중독’현상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는 젊은이들이 줄어드는데 신천지 교인 중 절반이 젊은이들로 가치관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로 이단과 사이비들의 표적이 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상담한 전문가들의 의견으로는 ‘역기능 가정’ 출신이 많다는 점과 성격적으로 수동적이고 순진한 ‘외톨이’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교회의 적절한 대응이 필요해 보입니다. 건강한 가정과 건강한 신앙공동체가 유지할 때 신천지 집단과 같은 미혹에 빠지지 않겠지요.김형기 우리 시대에 성공한 사이비 종교인들 대부분은 돈, 종교와 사업 사이의 알고리즘을 기막히게 판독해 외형적인 성공을 일궈내는 종교적 연금술사들입니다. 기존 기독교 CEO형 지도자들이 일궈낸 사적교회는 사이비교회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수의 제자들에게 신앙과 돈, 종교와 재물은 물론 전광훈 목사류의 정치적 결합 등 아주 위험한 야합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기존에 문제가 되고 있는 몇몇 교회의 행태와 신천지 등의 행태는 무엇이 다른지 시민들은 묻고 있습니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새로워져야할 이유입니다.김길구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는 전도관의 박태선성막성전의 유재열통일교 등 이단 사이비종파를 오가며 얻은 노하우를 활용, 신천지를 만들어 사이비화 되는 과정에 있는데 코로나19의 창궐이 계기가 되어 그들의 행적이 표면화 되면서 사회에 경각심과 함께 기존 교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우리의 적폐를 스스로 고치지 못하면 교회가 이단 사이비들의 온상이 되어서 꽈리를 틀게 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항상 새로워져야김현호 종교개혁 때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3만 명에 가까운 신천지 교인들의 철저한 성경공부도 인상적입니다. 주4회 3시간씩 6개월간의 철저한 훈련은 생각해 봐야할 대목입니다. 저자는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지 말고 ‘앎을 추구하는 믿음’을 지향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최종적 목적이지만 믿음은 앎을 추구한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교육을 다시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성경교육이나 신앙교육을 함에 있어 정보전달이 아닌 신앙형성을 위한 교리교육과 함께 현장 실천교육이 병행되도록 했으면 합니다.김형기 지금이 교회갱신의 기대와 요구가 높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정치개혁의 파도가 10년 혹은 세대주기로 밀려온다면 교회개혁의 파도는 세기 혹은 세대 단위로 밀려옵니다.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고 계속해서 자기갱신을 통하여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 변화의 첫걸음은 물론 나로부터의 변화입니다.김길구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문화돌봄’ 코드로 예술과 아름다움의 문제를 풀어본 마토코 후지무라의《컬처 케어》culture care, IVP 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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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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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구의 신발 끈을 묶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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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영화사용법
유대인들은 영화사용법에 능통하다. 영화사 초창기부터 유대인들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사상을 갖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은 틈새를 이용 영화사들을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영화를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할 뿐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세속적인 문화로 여긴 반면 유대인들은 새로운 대중의 오락거리로 등장한 영화들 속에서 일치감치 돈 냄새를 맡았었다. 획기적인 오락거리인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대중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적어도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매체는 영화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는 영화공장으로 불리며 영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미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유대인의 천재성은 영화의 상업성 뒤에 감춰진 지식의 전달력과 설득력과 같은 영화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간파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현대사의 변곡점을 이룬 두 가지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깨달았다.
하나는 러시아혁명으로서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 옆에는 영화의 혁명가로 불렸던 세르게이 미하일 에이젠슈쩨인(Sergei M. Eisenstein)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던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 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었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를 통해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으로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서있는 히틀러 또한 자신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선전하는데 영화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영웅적인 숭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당시의 선전영화들은 ‘히틀러의 연인’이란 별명을 가졌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히틀러를 밀착 수행하며 촬영한 결과였다.
역사적인 이 두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영화로부터 얻은 지혜는 영화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의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루살렘 멸망이후 2천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냉대와 핍박의 세월을 살아 온 유대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발명품은 그들의 말을 온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꿈의 매체 영화였다.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홀로코스트 영화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을 다룬 영화들은 유대인의 핍박받는 역사를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유대인 출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을 실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2차 대전의 실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실재 일어난 일이란 점과 아울러 학살당한 유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전세계인이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쉰들러 리스트>로는 부족한 실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우주의와 이에 따른 인종주의적 행태는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내밀게 만들었다. 2018년 미국 피츠버그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했는가하면, 이탈리아 로마의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가 펴낸 ‘이탈리아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5.6%는 홀로코스트가 실재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로 급증한 수치다.
밀레니얼 세대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더욱 희박하다. 2019년 1월, 세계 언론은 캐나다 젊은층의 62%가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통계를 보도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핍박받은 역사를 대중에게 알려왔던 영화전략에도 새로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이 때 유대인이 택한 영화는 <조조 래빗>이었다. 폴리네시아계 유대인 타이카 와이티티 (Taika Waititi)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92회 아카데미의 현장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끝에 각색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었던 크리스틴 뢰넨스(Christine Leunens)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을 영화화 하는데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아카데미 최고의 영화 후보에도 올랐던 것이다.
<조조 래빗>은 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며 이에 따른 유대인의 비극을 알려왔던 이전의 홀로코스트류의 영화와는 접근방법을 달리 한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 대중의 심리와 문화를 풍자적인 기법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부인하는 시대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배경과 문화 그리고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일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감독은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추종하는 소년단인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열 살 독일소년의 심리를 유머있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빠 없이 엄마와 단 둘이서 생활하는 열 살 소년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 되어 군사훈련을 받지만 토끼를 죽이지 못하는 바람에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오히려 ‘조조 래빗’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고 만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히틀러를 추종하고 있고 소외된 조조 앞에는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가 나타나 위로의 말과 더불어 히틀러가 주장하는 반유대주의 정신을 강화시키곤 한다. 어린 아이에게 군입이 입는 제복을 입고 히틀러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은 히틀러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정신체계의 기틀로 작용한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 ‘하일 히틀러’를 수없이 외치며 거리를 쏘다니는 조조의 모습에는 온전한 지식과 판단에 이르지 못한 결과로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연약한 대중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는 2층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하고 갈등에 휩싸인다. 나치 친위대에 고발할 생각도 하지만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뜻밖에도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협력적인 동거를 택하고 만다. 이 때 나치즘에 흠뻑 빠진 조조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어머니 로지와 유대인 소녀 엘사라는 두 여성이 보여준 애정과 친밀감이다. 이들은 가족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조조를 조금씩 나치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특히 게시타포의 급습 때문에 얼떨결에 조조의 누나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엘사를 보호하려는 조조의 모습에는 유대인과 나치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양심과 상식을 짓누르는 허황된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온전한 사랑은 변화의 핵심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라
영화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몰입한 열 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짐승처럼 꼬리가 있으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고 믿는 주인공 아이의 모습은 과거 히틀러 독재 시대에만 있었던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부조리한 권력과 잘못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와 종교, 경제 가릴 것 없이 인간사회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온갖 거짓을 꾸며내어 희생을 정당화시키곤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희생당하는 유대인의 특수적 상황을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코믹한 풍자를 내세워 거짓말하는 권력을 조롱함으로써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조 래빗>이 어리석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인간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잘 만든 작품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구두끈을 묶는 장면의 반복과 변화를 통한 상징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조조는 자신의 손으로 구두끈도 매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엄마는 아들의 구두끈을 정성스럽게 매어주며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발 끈을 매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잘못된 권력과 거짓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사랑의 끈을 매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부에 조조는 죽은 엄마의 구두끈을 묶어준다. 비밀리에 나치에 저항운동을 해왔던 엄마가 거리의 광장에서 처형당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조조는 뜻밖에도 엄마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풀어진 엄마의 구두끈을 매어준다. 사랑의 환원인 동시에 조조가 엄마의 의지를 깨닫고 성장하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조는 벽장에 숨어 지내던 유대인 소녀 엘사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뜻밖에도 엘사의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녀와 교감하며 함께 세상으로 나갈 만큼 성숙한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또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13:1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교감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신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구두끈을 묶는 손길도 이와 같다. 어리석고 연약한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양식으로 가득 찬 세상이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도록 사랑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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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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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양읽기] 다시 읽는 영웅전, 사울과 다윗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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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영웅 vs 만들어진 영웅
이스라엘 건국의 영웅들의 얘기
역사는 과연 승자의 편일까?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2대왕 다윗. 두 영웅과 중재자인 선지자 사무엘의 일대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한 평전이다.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 된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위에 병적으로 집착한 실패한 왕으로, 다윗은 영원한 별이 되어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기억한다. 저자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사울은 저평가 되었으며, 다윗은 필요 이상으로 고평가되었으니 일그러진 부분은 펴고, 만들어진 거품은 걷어내 원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칫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자. 책장을 몇 장 넘기다 보면 책의 매력에 푹 빠져든다. 그리고 페르소나를 벗은 영웅의 민낯을 통해 오버랩 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 저자소개 ∥저자 곽건용 목사는 현재 미국장로회 소속 LA 소재 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도미 전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향린교회 부목사로 재직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한신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구약성서학을 전공했다. 목회 외에 성서에 대한 학문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책을 집필하여 기독교인들이 성서를 올바르게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하는 것을 중요한 목회의 과제로 삼고 있다.저서로는 《하나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알 수 없는 분》, 《예수와 함께 본 영화》 , 《길은 끝나지 않았다》 등이 있다.
꽃자리 간 / 2019년 / 15,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 유진 피터슨 저 / IVP《성경 속의 심리학》 / 이재현 저/ 장로회 신학대학교출판부《성경으로 배우는 심리학》 / 이나미 저 / 이랑
다시 읽는 영웅전, 사울과 다윗 이야기- ‘평전에 대한 평전’-
▲ ‘사울과 다윗’ 왕위를 위협하는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왕 렘블란드 작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담임목사
두 영웅의 엇갈린 평가“후대의 역사는 사울을 일그러뜨리는 값을 지불하고 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윗을 그렇게 미화하기 위해서는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능가하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췄다고는 볼 수는 없다. 사울은 사울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매력과 약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약점이 부각되었고, 다윗은 매력이 두드러지게 강조되었다.”
신명기와 역대기적 사관김길구 시즌Ⅱ를 시작한 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참고로 시즌Ⅰ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에 대한 얘기를 다뤘다면, Ⅱ는 독자들에게 책의 내용을 알리는데 좀 더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번에 다룰 책은 성경의 두 영웅 사울과 다윗 얘기를 다룬 곽건용 목사님의 《일그러진 영웅 vs 만들어진 영웅》입니다.김현호 이 책은 성경의 역사서에 기록된 사울과 다윗의 얘기를 저자는 역사비평방법론적인 접근이 아닌 문학적인 방법론에 영향을 받아 쓴 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김형기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계시의 책이라고 고백하지만 각 성경마다 저자 고유의 사관이 배어있어요. 성경에 나타난 기사 자체가 아무리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여 기술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평전에 대한 평전’인 셈이군요. 김길구 목사님이 저자의 사관이라고 하셨는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신명기적 역사관과 역대기적 역사관이 있지요. 그 차이가?김현호 신명기 사관은 모세가 죽기 전 요단강 건너편에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율법들을 재정리하면서 이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언약의 사관이라면, 역대기 사관은 고난의 바벨론 포로기 70년을 거친 후에 기록된 역사서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 즉 그의 후손이 영원히 왕이 될 것이고, 설사 잘못하더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는 것과 성전 중심,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의 역사관을 말하지요. 김형기 우리가 역사서를 읽을 때 이런 사관을 알고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블레셋의 침략이 왕정을 재촉김길구 이 얘기는 사사시대의 끝자락에서 제1대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연 사울과 2대 다윗왕의 재위기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 《일그러진 영웅 vs 만들어진 영웅》을 통해서 사울은 저평가 되었고, 다윗은 고평가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기원전 11세기의 팔레스타인으로 내려가 보죠.김현호 성경의 사사로 불리던 영웅들의 200년 사사시대의 통치에 종언을 구한 것은 지중해 쪽에 위치한 블레셋인과의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철기무기로 강력히 무장한 이들의 침략은 이스라엘의 느슨한 12지파동맹의 사사를 중심으로 한 민병대 체제로서는 막기에 역부족이었을 거예요. 참고로 블레셋(Philistine)은 히브리어로 ‘이주자(의 땅)’란 뜻으로 오늘날 ‘팔레스타인’(Palestine)의 어원이 되었습니다.김길구 사가들에 의하면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 온 비슷한 시기에 정착하여 사사시대 대부분을 알력 속에서 때론 싸우고, 때론 공존하면서 살아오다 힘이 커지자 정복의 야욕 들어내면서 이스라엘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도자는 사무엘이었습니다. 김현호 연로한 사무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격해지고, 이에 여호와도 백성들의 원대로 왕정을 허락하지요. 사무엘 역시 자식 농사에 실패한 상황이라 별다른 방도가 없었을 거예요.김형기 이렇게 해서 뽑힌 인물이 사울이에요. 바야흐로 신정정치에서 군주제로의 역사적 전환기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에게는 밖으로는 국방을 튼튼히 해 블레셋인들의 외침을 막아내고 안으로는 사무엘과의 역할분담으로 정국을 빨리 안정시켜 초대 왕으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할 책무가 있었던 거죠.
사무엘과 사울의 알력김길구 사울은 나름 성과를 거두기도 했어요. 영토를 크게 넓히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빼앗기지도 않았지요. 실패한 왕이 된 결정적 요인이 사사이자 제사장이기도 했고, 예언자이기도 했으며, 그를 왕으로 억지로 세운 사무엘과의 불화일까요?김형기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공식적으로는 제사장직무의 남용과 아멜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른바 ‘헤렘’ -진멸하라는 왕을 포로로 살려두고, 전리품 중 일부를 남겨 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노여움을 산 이후 사무엘과 결별하지요. 여호와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명언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 일 후 사무엘은 사울을 지지하기는커녕 다윗을 사울의 대체자로 세우고, 사무엘도 역사에서 멀어집니다.김현호 이 부분에서 저자는 사울에게 동정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 데이비드 건의 말을 인용 ‘사울의 잘못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절차에 관한 것으로 다윗의 잘못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았다’며, 이는 핑계로 그의 낙마는 계산된 것이라고 두둔합니다.김길구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다윗과의 과도한 라이벌 의식으로 사울은 스스로 파멸하고 맙니다. 한때는 대중의 기대주가 몰락해 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김형기 사울은 첫 왕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주변의 도시국가들처럼 왕권이 확고한 것도 아니었고, 각 지파들은 독립성이 강해 왕의 명령을 따르지도 않았으며, 안으로는 사무엘과의 권력분담이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사무엘은 아마 그에게 전쟁의 승리만을 원했는지 모르죠. 재임기간 내내 그는 전쟁터에서 살다 죽어간 불안정한 권력을 가진 비운의 군주에 불과했으니까요. 여기에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요즘 말로 멘붕이 와 정신이 멀쩡한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니까요. 김현호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한 것은 자신의 불행하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끝내는 패전하고 자결로 생을 마무리했으니까요. 그나마 마지막 전투에서 요나단이 곁에 있어준 게 조금의 위로가 되었을까요?
석연치 않은 죽음들김길구 다음은 ‘전쟁의 달인’ 다윗의 얘기로 넘어가보죠. 저자는 과포장된 다윗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왜 사울은 안 되고 다윗은 온갖 악행에도 하나님은 그를 왜 계속 감싸냐?는 거예요.김현호 요즘 말로 하면 팩트 체크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골리앗을 넘어뜨렸던 전설적 영웅이었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으니까. 사울의 음악치료사로서 인연을 맺으면서 정치적 야망도 키웠던 것 같아요. 요나단과의 깊은 우정, 사울의 딸 미갈과 정략결혼도 그렇고‥ 김형기 그런 다윗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습니다. 사울의 의심이 도를 넘어 자신을 죽이려하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적국인 블레셋의 용병으로 망명을 한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려 한 마을주민을 몰살하기도 합니다. 김현호 저자는 정적들, ‘우연인지 필연인지 사울, 요나단, 이스보셋, 아브넬은 모두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었다.’며 조일 베이든의 ‘다윗은 이 모든 죽음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말을 인용 그들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을 분석하고 있습니다.김길구 아쉽지만 시간이 다됐네요. 여기서 더 나가면 스포일러가 되니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모처럼 책과 성경을 대조하면서 B.C 11C로 과거여행을 떠나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읽을 책은 류호진 교수의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출판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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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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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상에 눈높이를 맞춘 교황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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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장르에 있어서 종교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은 교리와 역사(사건) 그리고 인물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어 왔다. 교리는 종교가 주장하는 가치관을 드러내며, 역사는 종교가 현실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인물은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종교영화 속에서 이 세 가지는 균등하게 배분되기 보다는 혼재되기도 하며 영화에 따라서는 강조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기독교영화를 예로 들자면 기독교변증영화의 성격을 갖고 있는 <신은 죽지 않았다>(2014)는 대학 신입생이 무신론자인 철학교수에 맞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교리’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영화다. 반면 애니메이션 <켈스의 비밀>(2009)은 9세기 무렵 수도원에서 제작된 아일랜드의 국보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라는 이름의 성경 제작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다룬 <루터>(2003) 같은 기독교영화들은 ‘역사’와 ‘인물’ 모두에게 초점을 맞춘 ‘역사 속 인물’을 보여주었고 세실 드밀 감독의 예수의 생애를 그린 <왕중왕>(1927)이나 <십계>(1956) 같은 성서영화들은 대개 ‘역사’와 ‘인물’ 그리고 ‘교리’가 함께 스크린에 투영되어 총체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종교영화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제작된 <두 교황>(The Two Popes, 2019)은 철저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가톨릭 영화다. 2005년 교황에 오른 베네딕토 16세와 그의 뒤를 이어 2013년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선출과정과 그들의 만남가운데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모았다. 영화 제작 시점에서 살아있는 전·현직 교황 두 사람의 교황선출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로 제작되어 배우가 현 교황 역을 맡아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크게 화제가 되었다.
앤서니 홉킨스(베네딕토 16세 역)와 조너선 프라이스(프란치스코 교황 역)라는 관록 있는 세계적인 배우들을 내세워 교황 역을 맡긴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독교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을 누가 맡느냐 하는 점은 배우의 평판과 이미지 등을 두루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하듯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또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에서 교황 역을 맡은 배우들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영화가 추구하는 대중적 친밀감 모두에 부응할 수 있는 성공적인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사가 넷플릭스(Netflix)란 사실은 관객의 호응도를 평가하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넷플릭스의 영화들은 대부분 극장개봉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즉 월 사용액을 지불한 넷플릭스 회원들이 TV나 컴퓨터 모니터 혹은 휴대폰으로 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제작비용이나 작품의 수준이 결코 극장상영용 영화들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으며 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연출자나 배우들이 대거 넷플릭스의 영화제작에 나서면서 넷플릭스의 신작영화들 가운데 주요영화들은 극장상영과 인터넷 상영이라는 두 가지 상영방식을 모두 택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인터넷 영화가 과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 상영되는 영화들과 같을 수 없다는 전통을 고수하는 유수의 세계 영화제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을 보다 자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19년 12월 11일에 개봉한 <두 교황>의 공식 관객 수는 27,598명이다. 현 교황이 갖고 있는 대중적 인기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인터넷 서비스의 장점은 이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을 수치로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여주고 싶은 교황’과 ‘보고 싶은 교황’
종교영화의 연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터뜨리는 충격요법이 두 번째다. 두 방법 모두 영화의 흥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이나 기독교 문학작품의 영화화는 관객의 호기심을 떨어뜨릴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경험을 재확인하고 학습하려는 의도를 가진 관객들이 적지 않은 까닭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로마감옥 생활을 묘사한 <바울>(2018)이 27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 관객을 모아서 흥행에 성공했는가 하면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2019)는 무려 3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아 역대 급 기독교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가톨릭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교황>이 개봉되기 한 달 전 로마교황청이 직접 제작에 나선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 교황 : 맨 오브 히스 워드>(2018)가 한국의 극장에 상영되었다. 익히 잘 알려진 현 교황의 행적을 따라가며 교황의 육성이 담긴 메시지를 담은 영화지만 <두 교황> 보다 많은 39,138명의 관객을 모았다.
독일 영화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교황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이 영화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의 재해 현장과 지중해 난민캠프 등 가난과 고통이 있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메시지를 전하는 로드무비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고급 리무진 대신 소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축구를 좋아하고 탱고를 즐기는 서민형의 소박한 교황의 이미지가 영화 속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로마 교황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교황의 모습인 셈이다.
그러나 <두 교황>은 신선한 충격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 점에서 앞의 영화와는 다르다. 즉 세상이 보고 싶은 교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때문에 세계 각국의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일컫는 콘클라베(Conclave)로 시작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성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교황 선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말로만 들어왔을 뿐이다. 영화 또한 실제모습이 아닌 연출인 까닭에 콘클라베 전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관객으로서는 보고 싶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2013년에 있었던 콘클라베는 종신직인 교황이 스스로 사퇴 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새롭게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며, 또한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라는 ‘최초’의 수식어가 여럿 붙어있다. 영화는 이 최초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바로 전 교황이며 새로운 교황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려는 바티칸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황의 회개와 변화
<두 교황>은 전·현직 교황의 미묘한 갈등이 어떻게 창조적인 계승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향한 변화의 발걸음으로 도약하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고글리오(조너선 프라이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직을 사임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6세(앤서니 홉킨스)를 만난다. 베르고글리오는 어떻게든 교황의 사인을 받기 위해 서류를 내밀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오히려 자신의 사임 의사를 밝히며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런 난국이 있나. 내가 승낙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교회에서 은퇴할 수 없고. 당신이 남기로 동의하지 않으면 난 사임할 수 없고.”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이 되기를 권했던 이유는 그가 노쇠한 바람에 교황직을 수행할 만큼의 건강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교회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베르고글리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황의 전통을 강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해왔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 교황들과 다를 바 없지만 사랑과 긍휼이라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지적인 수도단체인 예수회 소속이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겼던 성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것은 현 교황이 과거와 다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예증인 셈이다.
또한 영화에서 두 교황이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이 국민과 교회를 탄압할 때 저항하지 않고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영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거 문제가 된 사건을 흑백장면으로 처리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써가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교황은 무흠한 인물이 아니다. 그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온 과거가 있다. 그러나 교황은 회개했고 이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알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교황 영화는 가톨릭의 홍보용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12억 명의 신자를 둔 가톨릭의 수장이 고백한 회개와 변화를 통해 현대인이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영화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사실은 새해에도 변함이 없음을 기억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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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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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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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경제학자의 제언
신년특집으로 신앙 서적이 아닌 시민교양서를 선정해 보았다. 세계인이 격찬한 에버트 인권상에 빛나는 촛불혁명으로 2017년 탄생한 문재인 정권이 공언한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로움이 집권 4년을 앞둔 지금, 이를 체감하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나아지기는커녕 더디기만 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살림의 경제학자 강소돌 교수는 공정성, 공공성, 생동성이 살아 숨 쉬는 민주사회를 만들 때 비로써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남은 과제로 저자는 엘리트주의, 전문가주의, 시장만능주의, 가부장주의, 중앙집권주의, 국가주의를 극복하여 자율적인 시민적 역량에 기반한 생동성vitality 민주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 저자 강수돌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서 수학 중 돈벌이 경영이 아닌 ‘살림살이 경영’에 관심을 두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의 길에 들어선 후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노사관계로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이후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교수로 있으면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는 《행복한 삶을 위한 인문학》 《나부터 세상을 바꿀 순 없을까》 역서《중독사회》《세계화의 덫》 등이 있다. 파람북, 2019. 14,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을 기독 서적들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개정4판 존 스토트 / IVP / 2006 《교회의 윤리 개혁을 향하여》 문시영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6 《공공신학으로 사는 길》 최경환 지음 / 공공신학으로 가는 길 / 2019 《정의 평화교육시리즈1~3권》 정주진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4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 (출처: 다음카페에서)
생동성 민주주의를 위하여“보통사람들인 우리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위해선 자유민주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 대안을 나는,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 있는, 생동성 vitality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김길구 교수신문이 선정한 2019년도 사자성어는 ‘공명지조(共命之鳥)’였습니다.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새인 공명조가 자신만 살려고 다른 한쪽을 죽이면 결국 같이 죽게 된다는 의미로 작년 한 해 분열된 우리사회를 반영한 것이라 씁쓸했습니다. 올해는 공존공영(共存共榮) 같은 따뜻한 얘기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김형기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한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영육 간에 강건하세요.김현호 국내·외의 여러 요인과 100여일 앞으로 다가선 선거로 꽤나 시끄러운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최근의 이란과 북한 등의 돌발변수도 우려가 됩니다. 이달의 책은 촛불 이후 한국사회의 행방을 모색하는 시민교양서를 선정했습니다.김길구 무례한 기독교란 말들이 회자될 때 교양을 높여 보자는 취지로 이 코너가 기획됐으나, 지금은 기독교의 위기란 말이 일상화된 시기라 교양, 문화 같은 말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 여유가 없어졌어요. 책 표지에는 인권상인 에버트상에 빛나는 촛불혁명과 새로운 정부의 출현에도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인가?’라는 도전적 부제를 달았습니다. 이 책을 적극 추천하신 목사님께 선정이유를 들어보죠.김형기 기대가 실망으로 바꿔서일까요? 개혁피로감이랄까? 허탈감이릴까? 지금 이런 분위기잖아요? 문재인 정권 4년 차에 돌입했고, 총선을 앞둔 이 시점에서 변화가 더딘 이유도 궁금하고, 제목도 눈에 띄죠. 사실 저자도 잘 몰랐고, 책 내용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목만으로도 오늘 모임의 길잡이 역할은 하겠다고 생각했지요.김현호 최근에 시사와 관련하여 언론 등에 발표한 다양한 주제들을 묶어서인지 우리가 아는 친숙한 생활 주변의 사례들이라 생소하지 않고요, 저자 자신이 ‘돈벌이 경영’이 아니라 ‘살림살이 경영’ 자로 소개하듯 서민들의 삶과 관련된 일상의 문제들을 다뤄서 저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들여다보는 계기는 된 것 같아요.김길구 저자는 민주주의가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라고 했을 때 우리는 주인이라기보다는 노예에 더 가깝다며, 촛불혁명은 위대한 성과지만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작에 불구한데 가야할 길은 멀다며 극복해야할 과제들을 제시하고 있어요. 주목할 것은 영혼의 자유 특히 물질에 장악당한 영혼의 자유를 되찾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김형기 그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극복해야 할 과제로는 엘리트주의, 전문가주의, 시장만능주의, 가부장주의, 중앙집권주의, 국가주의입니다. 성서에도 요시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두 사례 다 비슷하게 출발했지만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차이는 국민의 의식화, 조직화, 동원화 과정의 차이였습니다.김현호 저자는 보수우파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돈벌이의 무한자유를 추구하는 자본계급의 이념으로 이는 가짜민주주의라며 그 대안으로 인간과 자연까지 아우르는 시민적 역량을 중시하는 생동적민주주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입니다.
공정성의 가치김길구 저자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고,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의 공정성, 공공성, 생동성으로 나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순서를 따라가 보죠.김형기 우선 저자는 공정성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세목들로 보면 정치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제도화되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상징하듯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공존에 대한 현장의 얘기, 직장 내 왕따문제와 갑질에 속수무책인 직장문화 등 돈에 종속되어버린 시장의 폭력성과 수단화되어버린 노동의 소외문제 등을 다루고 있어요,김현호 기울어진 운동자처럼 불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를 읽다가 문득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를 떠올렸어요.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19세기 노예제 폐지운동에 앞장선 예를 들면서 일(노동)은 고용주와 개인의 계약문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공동의 문제이자 세계의 문제라며, 이를 위하여 생산뿐 아니라 소비적 측면까지 고려한 윤리적 소비와 공정무역fair trade까지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은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노력과 함께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하여 사회행동social action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공공성의 가치김길구 IMF사태 이후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전 지구적 단일시장에 편입되면서 정치, 사회,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이 황폐화 되었어요. 그 결과 직장인 85%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에 시달리고, 최고의 실업률, 최저의 출산율, 최고의 산재, 최저의 행복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김형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을 낳고 이것이 취업 불평등을 낳으며 다시 이것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낳은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결국 생존을 결정하는 건 결국 금수저냐? 흙수저냐? 의 ‘수저의 색깔’인 셈이죠.김현호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더욱 근본적인 문제, 의식의 문제라고 봅니다. ‘인간적 필요와 충분함의 미학을 온 삶의 과정에 녹여내는 진정한 시스템 전환’만이 민주주의와 삶의 질을 고양하니까요..김길구 이런 주장들은 늘 있어 왔고 지금도 있어요. 한 예로 2004년 가나에서 열린 세계개혁교회협의회의 공식 신앙고백문인 아크라 문서에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신앙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규정하였고, 2006년 WCC의 아가페 문서에는 무한 경쟁의 신자유주의 세계질서를 ‘죽음의 경제학’으로 표현하면서 여기에 맞서는 대안으로서 ‘생명의 경제학’을 제안하기도 했지요.김형기 이러한 입장은 신앙적 측면뿐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총체적 복음으로서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림을 인정하고, 우리 사회를 하나님의 선한 통치로 바꾸려는 신앙에 기초한 고백에 기초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생동성의 가치김길구 끝으로 생동성의 가치인데요? 영어로는 vitality 활력이예요. 저자는 이 생동성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김현호 특별히 생동성 민주주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권력과 돈으로부터 벗어난 영혼이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율성에 기반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새로운 세상, 혹은 시스템으로 묘사했는데 너무 추상적인가요?김형기 읽으면서 느낀 것인데 가장 현세적이어야 할 경제학자의 글에서 영혼의 자유, 돈으로부터의 자유, 인간과 생명의 가치 등 기독교의 가치들이 녹아있어서 놀랬어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정작 더 세속화 되어 있지 않은지 되새겨봐야겠네요.김길구 끝으로 강수돌교수의 글중 일부를 옮기는 것으로 오늘의 얘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속물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속물주의는 마음의 습관이기도 하지만, 자본이 만든 제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속물주의에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기보다 당당함을 느끼는 것도 이미 자본(돈벌이 논리)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성인 내면의 본성, 즉 영혼의 자유를 회복하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새 세상을 열려면 이 속물주의와 부단히 투쟁해야 한다. 알콩달콩 소중한 우리네 삶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서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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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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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는 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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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장악한 만화왕국 디즈니
2019년 세계 영화계는 디즈니와 애니메이션이 장악한 한 해로 기억할 것이다. 금년 한 해 동안 디즈니가 전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만 무려 6개나 된다. 3,4월 봄날에는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온 세상의 마블 팬들을 사로잡더니, 여름을 기다리던 5,6월에는 <알라딘>이 실사영화로 돌아왔고, 추억의 팬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4>를 개봉시켰다. 한 여름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만화영화를 실사로 제작한 <라이온 킹>으로 여름방학 특수를 누리고는 올 겨울 <겨울왕국2>로 동심을 낚아채갔다.
이들 영화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만화와 관련 있는 영화란 사실이다.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사(Marvel Entertainment Inc)의 캐릭터를 일반 영화화한 것이고, <토이스토리4>와 <겨울 왕국2>가 전형적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은 과거 애니메이션 작품을 실사 영화한 작품들이다.
만화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코흘리개나 보는 것으로 치부했던 만화는 셀룰로이드 용지에 그려서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었던 시절을 멀찌감치 뒤로하고 이제는 손이 아닌 순수하게 컴퓨터로만 작업하여 실제 보다도 더 사실 같은 화면을 연출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연령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르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금년과 같이 디즈니의 세계 영화계 장악은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다. 1995년 디즈니는 당시 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인 ‘픽사(Pixar)’와 손을 잡고 '토이스토리'를 제작한 후 <니모를 찾아서>(2003)와 <인트레더블>(2004) 등을 연이어 흥행가도에 올려놓았다. 디즈니는 디지털 기술로 현대적 감각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픽사가 필요하다고 판단, 2006년에 무려 72억 달러(약 8조5000억원)에 픽사를 사들였다. 픽사의 슬로건은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로 디즈니의 가족 중심적이며 판타지적인 요소가 픽사의 철학과 결합하며 외연은 급속히 확장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콘텐트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2009년 공상 과학 만화 잡지사로 출발한 ‘마블 엔터네인먼트(Marvel Entertainment)’를 40억 달러에 매입한 것은 할리우드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왜냐하면 마블은 ‘스파이더맨’을 비롯하여 ‘엑스맨’과 ‘아이언맨’ 등 무려 5천여 개의 캐릭터를 보유한 만화시장의 강자였던 까닭이다. 이 캐릭터들은 고스란히 디즈니의 자산이 되었고 10년 전 40억 달러(약 4조 7000억원)의 투자는 오늘날 투자금액의 4.5배가 넘는 182억 달러(약 21조 4000억원)의 매출을 통해 대박이 난 거래였음이 증명되었다.
그밖에도 2012년에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제작한 루카스 필름을 연이어 인수한데 이어서, 2017년에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21세기 폭스사’를 인수하면서 미디어 시장에서 최고의 강자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채널만 돌리면 디즈니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극장에만 가면 디즈니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디즈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것은 디즈니의 세계관에 대한 분석이 시급히 필요함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 고전은 강하다-‘천로역정’
기독교 애니메이션계도 꿈틀거린 한 해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장편 만화영화 한 편만이 개봉되는데 그쳤지만 그 위력은 제법 컸다. 그동안 수입한 영화들의 연이은 흥행부진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었던 ‘CBS의 영화사업부’를 소생시키는 119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 말이다.
로버트 페르난데스 감독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는 기독교고전의 힘을 보여준 애니메이션이었다. 존 번연의 고전 명작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컴퓨터영상합성기술(computer generated imagery)을 통해 세련되고 기품 있게 만들었다. 디즈니의 톡톡 튀고 감각적인 영상미와는 다르게 고전적인 작품의 정취가 잘 묻어나도록 안정감 있는 색채와 캐릭터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천로역정>이 애니메이션 세계에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기독교 소설의 내용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시선의 분산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점은 장점임에 틀림없다. 비교적 단순한 이미지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면서 기독교 고전으로서 관개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단점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시킨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천로역정>은 신세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판타지 장르에 속한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여정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각종 유혹들이 은유로 묘사되고 있지만 초월적 존재와 세계를 묘사되기 때문에 인터넷 게임이 보여주는 판타지적 이미지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썩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신세대들에게 애니메이션을 통해 신앙을 전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기술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메시지를 통해 관객을 ‘납득’시키려 하기 보다는 그림의 감성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신앙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은 공식 극장관람 인원이 296,588 명이라는 기독교 영화사상 최대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기독교 고전의 힘이다. 신앙에 정말 유익이 되는 기독교 고전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기에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시간상의 이유로 책을 접할 수 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은 17세기에 쓰인 명작이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신앙을 성찰하는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왜 고전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최고의 성탄영화를 만나라-‘더 크리스마스’
그렇다면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최고작은 무엇일까? 교회교육용으로 나온 비디오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던 기독교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극장용 크리스마스 영화로 제작된 <더 크리스마스>(The Star, 2017)는 최고의 기독교 애니메이션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성경에 충실하게 풀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한 흥미로운 상상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진일보한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특히 <나니아 연대기>시리즈를 제작한 ‘월든 미디어’와 ‘소니 픽쳐스’의 기독교 브랜드인 ‘어펌 필름’이 손을 잡고 만든 영화란 사실에서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이며 디즈니의 여느 영화 부럽지 않은 색채감과 화면전개에 있어서 역동성을 자랑한다.
방앗간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던 당나귀 보는 왕의 캐러반의 일행이 되어 왕을 자신의 등에 태워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드디어 사고를 위장하여 방앗간을 탈출한 보는 정혼한 사이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발견되어 베들레헴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다. 한편 동방박사 세 사람을 태우고 온 세 마리 낙타는 헤롯왕의 사악한 흉계를 눈치 채지만 헤롯왕은 도사견 두 마리와 함께 킬러를 보내 새롭게 탄생할 왕을 죽일 것을 명령한다. 보와 그의 동물 친구들은 마리아와 탄생할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킬러의 도사견들과의 한판 승부를 펼친다.
<더 크리스마스>의 가치는 동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증언하며 그 분이 참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데 있다. 이것은 마치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거짓 선지자 발람을 깨우쳐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발람이 타고 가는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도록 한 사건에 비견될 수 있다. 성경에 당나귀가 말을 한 사건이 의미가 있듯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만화영화 속에서 말하는 당나귀를 지켜보며 그가 보여주는 성탄절의 깊은 뜻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 둔해지거나 어두워 질 때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서 깨닫게 도와주셨다면, 현대문화 속의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역할이란 바로 발람 앞에서 말하던 당나귀의 모습을 재현시키는데 있다.
당나귀가 말을 하다니? 놀랄 일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모든 상상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인 일들도 모두 묘사할 수 있다.
당나귀가 말을 한다고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우화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화는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장르임에 분명하고 이 어린이들은 만화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즉 기독교 애니메이션은 다른 영화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진정한 삶의 자세를 어린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더 크리스마스>는 주인공 당나귀 보가 만삭의 마리아를 등에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장면을 통해 캐러반의 일행으로 왕을 태우고 싶다는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태운 셈이니 어린 관객들은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깊고 위대한 뜻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또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킬러의 두 마리 도사견이 보의 친구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지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탄생을 다른 동물들과 함께 지켜보며 경배하게 되는 변화의 과정은 기독교 만화영화가 디즈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기독교 애니메이션 속에서 악당은 영원한 악당으로만 남지 않고 변화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변하듯이 말이다. 자칫하면 잊혀질 뻔한 기독교 최고의 성탄 애니메이션 <더 크리스마스>는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느낌을 평생토록 기억하게 만들 만한 작품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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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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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닌, 품어야 할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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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이들을 위한 치유의 메시지
자살률 세계 1위인 우리나라! 모두가 힘들다며 아우성이다. 강단에서도 치유의 메시지가 넘쳐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프다. 그동안 영화 <밀양>과 소설 <오두막>을 소재로 한 「숨어 계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의 출간에 이어 자신이 주례한 장례예배의 설교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곰 씹어본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의 연작을 통하여 상처와 치유의 문제에 천착한 바 있는 저자는 최근작 「가만히 위로하는 마음으로」에서 우리 사회 아픔의 근원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평소 영감 있는 글쓰기 작업을 통하여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저자의 설득력 있는 메시지 는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준다.
◈ 저자소개 ∥이 책의 저자 김영봉은 감리교 신학대학원과 미국 남감리교 대학교의 퍼스킨 신학교,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1992년부터 10년 동안 협성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다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버지니아 주 와싱톤한인교회에서 목회 중이며 목회에 지친 이들을 위한 ‘목회멘토링사역원’을 설립하여 미국과 한국의 교회갱신을 위해 애쓰고 있다.저서로는 「가상칠언 묵상」,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 시리즈 「마태복음2」와 유진피터슨의 「메세지」 신약을 감수한 바 있으며 그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IVP 간 / 2019년10월 / 11,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숨어계신 하나님》 / 김영봉 저 / IVP / 2008《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 김영봉 저 / IVP / 2011《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 김영봉 저 / IVP / 2016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 많은 이들이 고난을 피하는 길로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SBS 드라마에서 차인표의 분노하는 모습〉
저항하라, 그리고 기적과 신비에 눈떠라!“ 삶을 저주로, 일상을 무덤으로 느끼게 만드는 모든 세력에 저항하십시오. 그리고 매일 당신 앞에 펼쳐지는 기적과 신비에 눈뜨십시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아픔의 문제를 극복하고 초월하며 변모시키는 진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아프다김길구 5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아픔과 함께 살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작년 한 해 하루 평균 37.5명이 자살을 하여 OECD 중 수년째 부동의 1위라는 오명을 갖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10대의 자살률이 전년 대비 무려 22.1%가 증가했는데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걱정입니다.김현호 더욱 놀라운 것은 서울대학교 학생의 절반이 현대의 흑사병으로 불리는 마음의 병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김형기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라는 도종환의 시가 생각납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상처이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다 아프다고 봐야지요. 잡을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숨이 차도록 달려온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김길구 문제는 상처가 전환되지 않으면 전이 된다는 데 있어요.김현호 모두가 아프다는 것을 전제로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내면도 함께 보려고 애써보세요. 물론 그 전에 우리 자신의 내면에 꽈리 튼 상처를 마주보는 용기가 있어야겠지요. 김형기 래리 크립이 말했듯 내적치유를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은 ‘믿음의 공동체’에 있는데 오늘의 교회는 더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회복을 통하여 진정한 인격적 사귐을 가져야겠어요. 그러려면 가식의 가면을 벗고 사도바울처럼 ‘꼭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점을 자랑 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김길구 흥미로운 것은 미국사회에서도 한인들의 자살률이 소수민족 중 가장 높다는데요? 최근 연예인 설리와 구하라의 연이은 자살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김현호 문제는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의 경우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고요. 7~80대 자살률도 급증하는 추세입니다. 과거에는 우울증이 중년에나 찾아오는 홍역 정도로 알았는데 이제는 세대와 계층을 초월하여 확산 중으로 주위에서 조울증, 정신분열증, 공황장애 같은 말들을 듣는 것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김형기 ‘터널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지요.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보면 마치 터널 안에서 영영 못 벗어날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드는데, 우울증이 깊어지면 죽음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지요. 우리는 생명을 도구화시켜 결국 모두의 생명을 값싸게 만드는 세상의 풍조에 결연히 맞서 ‘선한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생명은 관계 안에서 존재김길구 다음은 용서에 대하여 말해보죠. 한 통계에 의하면 작년 SNS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혐오’와 ‘분노’였다고 합니다. 인간으로서 용서는 쉬운 일이 아니죠.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지만… 김형기 용서는 내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화해는 상처를 준 상대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용서는 어그러진 관계를 고치는 것이고 화해는 그 관계를 완성하는 일이라고 봐야지요. 그래서 용서는 나의 것이지만, 화해는 우리의 것입니다.김현호 에버레스트 워딩턴 교수는 용서의 다섯 단계를 말했는데 먼저 상처를 생각하고, 상처 입힌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용서의 애타적 선물을 주고, 당신이 용서에 전념하고, 붙잡고 있는 것이다 고 했어요. 우리가 한 용서가 진정성이 있는지 가늠해볼 대목입니다.김형기 본문에서 소개한 캐롤라인 볼로냐 기자가 제시한 잘못된 ‘사과의 기술’ 7가지를 소개하면 도움이 되겠네요. 핑계 대기, 진심이 아닌 건성으로 하기, 메시지나 이메일 등으로 때우기, 미안하다고 하면서 토 달기, 상대방에 책임전가하기, 너무 늦게 혹은 너무 일찍 사과하기, 사과한 즉시 용서받으려고 기대하기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김길구 다음은 불공정한 조건에서 살기입니다. 사회의 양극화나 불공정을 뜻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은 원래 홈경기에서 유독 강한 면모를 보인 스페인 축구의 명문구단 FC바르셀로나 구단의 운동장을 빗댄 표현입니다. 우리사회도 요즘 불공정에 대해서 예민합니다. 혹자는 조국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김형기 강남좌파로 대중적 인기가 많았던 조국 전 장관의 위선에 우리가 실망한 것은 이러한 불공정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사회적 분노는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대해 ‘아프면 환자지 뭐가 청춘이야’라는 유명 연예인의 패러디는 우리 사회의 출발선이 다른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분노와 불안, 그리고 절망의 늪에 대한 항변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불균형이 나아지기는커녕 우리뿐 아니라 지구적으로 더욱 확대, 심화되고 있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김현호 자칫 이 토론도 자기개발서처럼 우리 사회의 구조적 제도적 개선 없이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로만 보면 치부해 버리면 비슷한 딜레마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김길구 이에 대하여 저자는 성서의 희년정신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원죄로 인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태초 에덴동산처럼 평평한 운동장에서 영원한 춤판에 참여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거죠. 김형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저자의 표현대로 미래에 죽고 나서 가는 곳이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 ‘뚫고 들어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현존(現存)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김현호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편만해야 합니다. 밤에 우리나라 땅을 밟은 외국인들이 수많은 십자가의 불빛에 놀라듯이, 예수의 정신이 사회제도 곳곳에 녹아있는지 의문입니다. 도리어 최근의 행태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해 교계가 수구골통화 되고 있어 교회가 변혁의 주체가 아닌 사회발전의 걸림돌이 아닌지 의심스러워요. 그런 행태는 성서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냐? VS 신비냐? 김길구 끝으로 죽음에 대해서는 루게릭병의 고난 속에서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줘 ‘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알려진 미치 앨봄 교수의 “진실은, 당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게 된다” 글로 시작되는데요. 읽어보니 어땠어요.김현호 삶을 ‘풀어야 할 문제’로 보는 사람과 ‘품어야 할 신비’로 보는 사람은 다들 수밖에 없겠지요. 저자의 말대로 신비로 생각하는 사람은 때론 부조리하고 때론 억울한 일을 겪어도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습니다. 김형기 요즘처럼 각박한 사회에서는 이런 사유의 너그러움이 긍정적 삶의 에너지가 되겠네요. 아울러 고대 로마에서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에게 군중들이 환호하며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Momento Mori-’라는 외침은 삶의 절정의 순간에도 겸손함을 잃지 말라는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길구 따듯한 책이었습니다. 읽으면서 다소 힐링이 되셨는지요? 두 분께서 의무감 때문에 책이 주는 즐거움을 잊지는 않았는지 궁금하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분위기를 바꿔서 고려대 강수돌 교수의 〈촛불 이후 한국사회의 행방〉이란 책으로 왜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성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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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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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을 보며 사회의 거울로써 영화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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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사회는 역동적 관계
영화와 사회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관계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고, 사회는 영화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사회와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들이 무려 1천6백 편이 넘지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는 수십 편에 불과하고 그 마저도 기억의 뒤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일쑤라서 모든 영화를 상대로 영화와 사회와의 역동적 관계를 논하는 일은 민망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써의 영화가 현실을 제대로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아닌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처럼 현실을 왜곡시키는 바람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미국 공황기에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상업영화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실직과 빈곤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대저택에 살며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멋진 자동차를 소유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사는 행복에 겨운 부자들의 세상만을 묘사하는데 급급했다. 그래도 사회적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극장을 찾아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그려진 영화를 보며 환상에 잠기곤 했다. 비현실적인 영화는 어려운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만드는 도피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영화들도 적지 않다. 2011년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는 공지영 작가의 원작 소설 <도가니>가 해내지 못한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며 우리 사회 ‘도가니 신드롬’을 몰고 왔었다. 청각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일어난 교장과 교직원들의 성폭력사건을 묘사한 이 영화는 2006년에 광주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2009년 공지영 작가를 통해 소설로 등장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이슈였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회는 달랐다. 대통령과 대법원장 그리고 경찰청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이 앞 다투어 영화를 봤고, 장애인들을 향한 성폭력에 강력 대처하는 법안, 이른바 ‘도가니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영화의 힘이라 말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신드롬의 이유는 정의가 실종된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영화가 해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는 82년생 김지영
이번에는 김도영 감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의 거울로써의 영화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이 작품은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이유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문화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남성네티즌들의 막연한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약 2만 명이 참가한 네이버의 네티즌 영화 평점을 보면 남성 네티즌은 10점 만점에 1.88점으로 거의 테러 수준에 가까운 평점을 주었는가 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성 네티즌 들은 9.47점의 평점을 주는 바람에 남녀 성대결과 같은 구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평점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인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은 남성 네티즌들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 여성 혐오적인 감정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관객들의 가운데 남성(9.54점)의 평점은 여성(9.60점)의 평점과 거의 비슷한 높은 점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지 52년생이나 62년생 여성이라면 ‘다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을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적인 행태들이 82년생 여성에게는 인격과 삶을 훼손하고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었다.
정대현(공유)과 결혼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지영(정유미)은 어린 자식을 돌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다. 명절이면 시댁에 가서 음식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고, 육아와 가사에 올인하느라 자기계발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래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준 옛 직장의 상사가 차린 회사에 취업을 해보려 하지만 애를 맡길 곳이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마는 그에게 찾아 온 것은 정신질환이었다. 영화는 정신에 어려움을 겪는 아내를 위해 휴직을 고려하는 자상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결코 남성혐오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편 대현(공유)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돌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남녀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여성혐오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여성혐오의 출발점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자신의 저서 <여성 그대의 사명은>에서 서구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홀대해왔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은 종처럼 취급당해 왔었다. 즉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보다는 가족이나 남편을 위해 인생을 사는 존재로 전락했었다.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살 권리를 박탈당하고 집에서는 부모나 형제의 그늘에서 살았으며, 결혼을 해서는 이기적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직장에 다니더라도 승진은커녕 여성을 과소평가하는 고용주의 종살이 하는 존재로 취급받아왔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 취급당해 왔다. 투르니에의 말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들의 ‘관음증적으로 훔쳐보는 대상’이 된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우하기 보다는 사고파는 물건을 보는 시각으로 대한 것과 다름없었다. 즉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되었고, 단지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만 표현되는 분위기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셋째, 여성은 매력이나 품위를 제공하는 장식 도구로 취급당함으로써 물건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여성이 사회발전의 주체로서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는 들러리나 기껏해야 광고의 모델처럼 미모를 상품화 시키는 도구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과거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 생산의 중요한 역할은 근육을 쓰는 힘이 여성 보다 우월한 남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사회를 사는 오늘날 생산의 도구는 힘이 아니라 세련된 두뇌와 이를 컴퓨터와 지식에 적용하는 정밀한 능력이다. 즉 여성의 특징이 지식정보화시대에는 더 어울리게 된 것이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진출과 남성의 전유영역에서 조차 여성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남성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성에게 남성의 지위나 역할을 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서 상호조화와 보완을 이루어야 하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곡된 여성관의 근저에는 잘못된 인간관이 내재해 있다. 즉 인간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가 이상적인 인간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 인간 안에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이 함께 내재해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와 상호보완은 한 인격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폴 투르니에 말을 빌리자면 남성은 사물의 세계를 세우는 데 적합하고, 여성은 인격의 세계를 잘 형성한다. 따라서 이 둘은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긴밀히 협력하여, 각각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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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