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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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글래디에이터 Ⅱ
    글래디에이터 Ⅱ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폴 메스컬(루시우스), 덴젤 워싱턴(마크리누스), 페드로 파스칼(마커스 아카시우스), 코니 닐슨(루실라) 리들리 스콧 감독이 24년만에 귀환했다. 글래디에이터 2편으로 복귀했다.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고, 리들이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전 세계의 영화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적 스케일, 스토리, 연기, 연출 무엇하나 나무랄 것 없이 평단과 팬들의 마음을 설레기에 충분했다. 글래디에이트- 로마 제국 시절 원형경기장에서 싸웠던 검투사들이다. 서기 180년경 로마 제국의 동북부 변방, 최고의 지혜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아우렐리우스가 숲 속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명장 막시무스는 게르만 족과의 혈투를 앞두고 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막시무스는 부하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와 명분을 제시하며 사기를 돋운다. 위대한 로마제국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전쟁 후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자고 독려하고 본인이 앞장 서 돌격한다.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막시무스 장군이 이끄는 군단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다. 황제는 로마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황제의 일인 권력이 가져오는 폐단을 꿰뚫어 보고 로마를 공화정 체제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막시무스가 적임자라는 판단을 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비밀리에 막시무스와 독대하고 자신의 뜻을 피력한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이제는 로마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가족과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간청한다. 한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망이 지나치게 크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당연히 황제 자리를 이어 받으리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난 뒤 비열한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가 공화정 체제로 전환하기 전에 그는 아버지를 몰래 암살하고 권력을 차지한 후 원로원을 해산하려 한다. 물론 눈엣가시인 막시무스를 몰래 처단하라고 명령한다. 영문도 모른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막시무스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고 본능적으로 가족의 위협을 느껴서 집으로 향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아내와 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코모두스의 지시인 것을 직감하지만 막시무스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가족의 무덤에서 오열하다 쓰러져 있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예의 몸이 되어 있었다. 길을 지나던 무역상이 그를 노예로 삼았고 결국 검투사들을 거느린 주인에게 팔렸다. 신분을 속인 채 막시무스는 살기 위해 싸움을 했다. 전쟁터가 아닌 작은 경기장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그의 실력과 남다른 품격에 검투사 주인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막시무스는 원형경기장에서 자신의 원수인 코모두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코모두스는 독이 발린 칼 끝으로 막시무스를 찔렀고, 막시무스는 마지막 일격을 코모두스에게 가한다. 결국 두 사람은 경기장 내에 쓰러진다. 세월이 흘러 북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에서 로마의 거대한 군함들이 견고한 성을 향해 돌격한다. 로마 군단을 이끄는 장군은 아카시우스, 나미비아 군을 이끌고 저항하는 사람은 루시우스, 결국 로마의 화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루시우스는 로마에 전쟁포로로 잡혀간다. 예상했듯이 그는 검투사가 되었고 치열하게 싸우다 검투사계의 대부인 마크리누스의 눈에 뛴다. 마크리누스는 루시우스를 앞세워 돈과 권력을 쥐려 했고, 루시우스는 마크리누스를 통해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카시우스 장군과 로마의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는 로마는 혼란과 격동의 세월이었다. 코모두스이 죽음 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있었고, 내전을 평정한 세베리우스 황제, 그리고 세베리우스 황제의 죽음 후 쌍둥이 아들인 게타와 카라칼라가 통치하지만 두 황제는 탐욕과 육욕에 쌓여 있다. 자극적 검투 대회를 앞세워 향략에 빠져 있다. 이런 로마제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제국을 바로 세우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모든 군대의 존경을 받는 아카시우스다. 글래디에이터 2는 로마의 혼란기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걸었던 세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아카시우스 장군이다. 그는 전 황제의 딸이자 공주였던 루실라와 결혼을 해서 로마 제국을 위해 싸운다. 뛰어난 장군이자 원칙주의자이지만 권력에서 멀어진 상태다. 로마는 권력욕이 강한 쌍둥이 황제와 야비한 원로원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실라와 함께 아카시우스는 파멸로 치닫는 로마 제국을 바로 세우고자 힘쓰는 인물이다. 그는 대의와 명분을 따라 움직인다. 또 한 명의 인물은 마크리누스, 한때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더불어 스페인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지나친 정복욕과 야망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 또한 도덕군자 같은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우렐리우스가 꿈꾼 공화정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갔다. 검투사들을 이끌고 돈과 권력을 사들였다. 원로원들의 정치인들도 매수했다. 곳곳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놓고는 게타와 카리쿨라를 제거하고 자신의 로마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한다. 마지막 루시우스, 실은 공주 루실라와 막시무스 사이에 태어난 신분이었으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에 어머니가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루시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변방에서 자랐고, 로마의 적대국에서 뛰어난 장군으로 성장했다. 운명에 따라 노예 검투사가 되었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로마제국의 황제 후보로 급부상한다. 당연히 마크리누스의 견제대상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장애와 위협을 물리치고 마침내 원형경기장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룬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아니 루시우스의 길을 통해 한 가지 생각해 볼 중요한 주제가 있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루시우스의 길이다. 그는 처음에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카시우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견디며 한 발씩 다가갔다. 하지만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 그는 갈등한다. 단순히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카시우스 역시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랐던 장군이었을 뿐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가 택한 복수는 로마의 황제라는 자리 자체였다. 로마 제국 자체가 그의 복수 대상이었다. 전쟁을 감행해야 하고, 사람을 죽여야 하고, 또한 검투사처럼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 자체에 대한 복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관중들을 향해 소리친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던 것인가? 언제까지 이런 죽고 죽이는 짓을 일삼을 것인가?” 루시우스의 외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과 닮았다. 예수님 역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셨다. 무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으로 저항하셨다. 십자가라는 로마를 상징하는 끔찍한 무대에서 예수께서는 소리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폭력 자체에 대하여 소리치셨고, 죽음 자체에 소리치셨다. 예수께서는 죽음 그 자체, 폭력 그 자체에 대하여 복수하셨다. 르네 지라르의 말을 빌리면 “폭력을 폭로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으셨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당대의 검투시합을 보면서 외친다. 우리의 싸움은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살리는 싸움이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성령의 검을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비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의 심령을 꿰뚫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싸움이다. 자기 희생으로 이 땅에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싸움이다. 곧 비진리를 끝내는 싸움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이고 사람을 살리는 싸움이다. 그것이 진정한 복수요, 우리가 싸워서 승리해야 할 목표다. 이런 싸움에 헌신한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들, 글래디에이터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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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기독교인문학] 왜곡된 ‘여성상’ 벗고 자존감 갖기
    강호숙 · 박유미 <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 > 최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보듯 우리 사회 곳곳에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오는 편견과 차별이 여전한 가운데 우리 교회 여성들은 기독교적 가부장제로 2중고를 겪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여성신학자들인 저자들은 이 책에서 교회에서 잠잠하라,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 뒤에 길들어져 ‘성경적 여성상’에 가스라이팅 되고 있는 여성들에게 성경의 다양한 여성상들을 소개하며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를 버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딸로서 복음적 자존감 갖기를 제안한다. 이를 위하여 여성의 성경읽기와 홀로서기를 추천한다. 교회를 떠나려고 망설이는 후배 여성들에게 보내는 여성다움, 자유, 성, 페미니즘 등 13개 주제 26통의 편지가 수록되어있다. ◇ 저자소개 ∥ □ 강호숙 보수교단의 차별적이며 종속적인 여성관에 문제의식을 느껴, 2040기독여성을 생각하면서 성경적 페미니즘과 남녀 파트너십, 그리고 생태 실천신학과 젠더 교회법 모색을 위해 연구하고 있다. 총신대 신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여성안수 추진 공동행동 대표로 헌신 중이다. ◇ 저서∥ 《여성이 만난 하나님》, 《성경적 페미니즘과 여성의 리더십》, 역서로는 《세상은 미로》, 공저로는 《생태 위기와 기독교》, 《살롬 페미니즘》 등이 있다. □ 박유미 구약과 여성과 다양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거쳐 총신대 일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안양대학교 구약학 겸임교수와 비블리스성경인문학연구소 소장과 기독교반성폭력센터 공동대표를 겸하고 있다. ◇ 저서∥ 《이스라엘의 어머니 드보라》,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 《오늘 다시 만나는 구약여성》, 공저로는 《성폭력 성경 한국교회》, 《혐오를 부르는 이름, 차별》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레이첼 헬드 에반스 / 비아토르 / 2020 《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송인규 외 / IVP / 2018 《현대사회의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존 스토트 / IVP / 2012 《교회 밖 인문학 수업 HERSTORY》 구미정 / 옥당 / 2019 기독교인문학 〈56〉 왜곡된 ‘여성상’ 벗고 자존감 갖기 - 남녀 파트너십으로 건강한 교회만들기 - 건강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 “성경적 페미니즘이 교회의 가부장적 신앙체계를 흔들며 관습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도전과 저항은 오히려 평등하고 건강한 공동체로 교회가 거듭날 수 있는 자극제가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 복음의 실현과 사회적 책임을 위한 남·녀 파트너십을 모색하는 등대가 될 것이라 봅니다.” 보수교단의 여성신학자 김길구 오늘은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를 버리고 복음적 자존감 갖기’란 다소 불편해 보이는 부제가 붙은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는 책을 가지고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두 분의 저자는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여성신학자들 입니다. 김현호 강호숙 박사는 총신대 신대원출신으로 성경적 페미니즘과 남녀 파트너십, 그리고 생태 실천신학 등을 연구하며 총신대 신대원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고 지금은 복음주의 교회연합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요, 박유미 박사는 이화여대와 총신대 대학원을 거쳐 일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안양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비블로스성경인문학연구소장과 기독교반성폭력센터 공동대표로 여성운동에 열심입니다. 류지원 두 분 다 보수적인 교단에 몸담고 있으면서 당면 현안인 여성들의 목회자 안수 허용 문제 등 여성들의 권리신장을 위하여 애쓰고 계신 분들이죠. 교회, 기울어진 운동장 김길구 ‘대단한 언니’들이 쓴 이 책은 처음에 제본이 잘못된 줄 알았어요. 가로 13㎝에 세로 19㎝의 300쪽 되는 작은 책인데 막상 책장을 넘기니 책 전체의 본문 내용이 15°가량 기울어지게 편집되어 있어 파본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야 여성들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말하려는 저자의 의도된 편집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죠. 류지원 저도 읽기 불편했어요. 책을 삐딱하게 보려니 잡기도 불편하고, 일부러 그런 거라면‥ ‘삐딱한’(?) 여성들의 ‘삐딱한’ 내용의 페미니즘 책일 거라는 남성들의 선입견을 패러디한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김현호 저도 처음 보는 방식이라 궁금해서 서울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여성들이 교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13개의 소주제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한 주제에 두 저자가 각각 답하는 편지체의 글이라, 독자들이 잃다가 누가 쓴 글인지 헷갈리지 않도록 구분한 편집실 아이디어였다고 해 웃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저도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보고 있지 않은지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 김길구 이 책 표지의 제목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 밑에 –성경적 여성상의 허구를 버리고 복음적 자존감 갖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요. 실제 ‘성경적 여성상’이 존재하느냐는 문제부터 다뤄 보지요. 김현호 본문에도 레이첼 헬드 에반스가 쓴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을 소개하고 있는 데 4년 전에 번역 출판되었지요. 그 책에는 복음주의는 종교적 모국어라고 말할 정도의 기독교계 대학을 나온 자유분망한 저자가 성경적 여성으로 살기를 작정하고 성경이 하라는 대로 ‘성경적 여성의 십계명’과 매월 ‘실천 덕목 12가지의 지침’을 만들어 이를 몸소 실천해 보는 체험기로 남편을 주인이라 부르고, 집안일에 충성하며 온유하고 정숙된 성품으로 교회에서는 나대지 않고, 잠잠히 순종하며 겪었던 좌충우돌 체험기입니다. 류지원 1년간의 체험을 마치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믿음의 여인이 되는 데는 ‘획일화된 공식이 없다’는 거예요. 성경적 진리는 역할 규정을 따지는 게 아니라 자신과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인격적 태도’에 있는 것으로, 교회지도자들은 엄격한 역할 목록으로 제한하려 들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가 명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여성이야 말로 ‘성경적 여성상’ 이라는 거예요. 성경 다시보기 김길구 이 책에는 다양한 주제 - 비혼, 비출산, 엄마됨, 성인지 감수성, 평등, 성(性) 등을 다루고 있는데, 옷차림의 예를 들자면, 한 크리스천 패션디자이너가 신문에 ‘크리스천 여성의 5가지 옷차림의 원칙’을 발표했는데 여성은 교회에서 단정한 옷차림(딤전 2:9-10), 내면의 아름다움(벧전3:2-5), 성별에 맞는 옷차림(신22-5), 분별력 있는 옷차림(잠11:22), 능력과 존귀로 옷을 입어야(잠31:25) 한다고 주장을 반박한 대목이 재미있어요. 류지원 그래요. 성경을 취사선택 했다는 거죠. 단정한 옷차림을 언급하려면 딤전 2:9-10뿐 아니라 8-10도 함께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 단락은 예배시 질서유지를 위한 권고로 남성들은 잦은 분노와 다툼 대신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는 권고와 9-10절의 말씀인 여성들이 예배하러 올 때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교회 공동체에 위화감을 주워서는 안 된다는 부분도 같이 다뤄야 한다는 거예요. 김현호 이렇게 5가지 주장을 일일이 성경을 대조하며 본래의 의미를 추적하여 예배를 평화롭고 은혜롭게 드리기 위하여 적절한 태도와 질서와 복장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새겨들을 부분이 많아요. 김길구 여성의 목사안수 허용을 거부하는 것은 고전 14:34 때문이겠죠.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뿐이다.’이에 대한 반박으로 ‘이 말씀은 바울시대에도 여자들이 예언하고 방언에 가담하여 계시 방편의 전달자로 역할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해요. 현재는 계시가 완성되어 더는 예언과 방언이 필요 없는 시기로, 남녀평등과 여성인권이 중요시 되는 이때 여성 리더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페미니즘에 대하여 김길구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녀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가 채식을 선택하면서 겪는 심리적, 사회적 변화와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다루는데, 영혜의 선택을 둘러싼 가족과 사회의 반응에서 가부장적 통제와 억압이 조금 과장되기는 하지만, 여성의 신체와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의 주제 《너는 주의 완전한 딸이라》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현호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는 200년 전으로 거슬러 가나 1960년대 후반에 와서야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화 되면서 1970년대에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정착하는 과정에 있으나, 유리천장 같은 유교적 가부장제의 편견과 차별이 상존하는 가운데, 우리 교계의 현실은 기독교 가부장제까지 더해졌는데 이를 해소하려는 의지가 없어요. 이 문제는 젊은이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대책이 시급해요. 류지원 성경적 페미니즘은 스티븐 트레이시의 상보적 평등론과 도날드 블로쉬의 평등적 상보론이 대표적인데, 이 둘을 종합한 존 스토트의 평등-상보적 종합론도 있어요. 성경해석자의 한계와 편견을 인정하고 타인의 성경해석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길구 끝으로 ‘젠더’(gender)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전설적 여성운동가로 전 미국 연방대법관에 오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이 생각납니다. ‘여성에게 특혜를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성의 목을 밟고 있는 발을 치워 달라는 말입니다.’ 다음 호에는 이색적인 주제입니다. 뉴욕식물원 가드너 이상희씨의 식물과 영성이야기 ≪정원에서 길을 물었다≫를 가지고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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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영화]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폴리 아 되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조커), 레이디 가가(할리 퀸)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미지와 환상]에서 현대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 사건 pseudo-event 에 휘말려 산다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휴대전화를 통해 각종 미디어를 끊임없이 시청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고, 스포츠를 보고, 개인 컨텐츠들을 본다. 현대인들의 이런 시청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회사나 개인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한다. 미디어 속의 주인공들은 유명인이 되며 셀럽이 된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영웅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가짜 사건일 뿐이다. 이미지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이 가짜를 진짜처럼 여기며 열광한다. 가짜들 이야기를 진짜처럼 여긴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떤 중년 여성 둘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내용으로는 누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실제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 상의 스토리였다.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지 실제 사건인 줄 착각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실제 사건이 아닌 미디어 속의 가짜 사건을 진짜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미디어에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을 소모한다. 토드 필립스가 만든 조커 폴리 아 되는 현대인들의 이런 경향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감독은 전작이자 1편인 조커에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본명은 아서 플렉이지만 그는 조커로 불린다. 조커의 분장을 하고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대신 야유와 조롱을 보낸다. 무대에서 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아서 플렉 역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무능력하며 무기력하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서 플렉이 일약 영웅으로 도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레이 플랭클린 쇼에 나간 아서 플렉은 생방송 중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진행자 머레이 플랭클린을 권총으로 저격한다.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나 당황한 일에 아무도 대처하지 못할 때 아서는 당당하게 방송국을 빠져 나간다. 방송국을 빠져나온 아서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통쾌하다는 몸짓으로 춤을 춘다. 경찰은 그를 좇지만 이내 놓쳐버린다. 아서는 곧 지하철로 들어갔고, 지하철에는 조커 가면을 쓴 군중들이 가득하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발돋움하는 사건이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머레이의 심장을 쏘았다. 살인 사건에 왜 사람들이 반응했는가? 실상 머레이는 성공한 부르조아의 대표다. 소위 잘난체하는 부류다. 아서와 같은 자들을 놀려 먹으며 인기를 누렸던 자다. 사람들은 그런 머레이를 정죄한 아서, 아니 조커에게 열광을 한 것이다. 그 순간 조커는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도덕과 윤리를 뛰어 넘어 사회악을 처단한 영웅이다. 적어도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수많은 자들에게 조커는 영웅이다. 이제 사람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 열광하고 조커라는 가짜 인물에게 환호를 보낸다. 실제로 이런 조커 열풍은 현실세계에도 등장한다. 오늘날 정치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윤리와 도덕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조커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들의 정의를 충족해주는 새로운 영웅을 기대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욕을 대신 해 주고, 내가 휘두르지 못하는 권력을 휘둘러주고,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영웅에 환호한다. 정치는 희화화되고 실제는 가짜가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런 현상을 욕망의 모방이라 불렀다. 욕망은 퍼져 나간다. 급속도로 번져간다. 들풀처럼 욕망은 타들어간다. 너도 나도 욕망의 화신이 되면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비정상적으로 돌변한다.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이 되어 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히틀러 열풍이 그러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임했고, 당시 독일인들은 민족우월주의라는 욕망에 휘말려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남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었다. 그래서일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2편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옥에 갇힌 조커의 등장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제인 ‘폴리 아 되’는 프랑스어로 ‘공유정신병 증세’라는 뜻이다. 아서의 정신병적 자아인 조커가 공유된다는 뜻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변호인은 그가 아서 플렉일 때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조커일 때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분열된 자아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할리 퀸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조커에게 접근한다. 감옥 내 찬양대에 지원하여 조커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다. 외로웠던 아서 플렉,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서 플렉은 이내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아서는 할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할리 퀸을 사랑한 아서 플렉의 마음이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커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할리 퀸에게 한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 사랑 때문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그는 대중들의 영웅인 조커에서 한 여인의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순화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에 있다. 할리 퀸이 사랑한 남자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이다. 할리는 아서 플렉이라는 소시민 코미디언은 관심이 없다. 조커라는 영웅이 필요할 뿐이다. 그가 마약 조커가 아니라면 할리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할리 퀸이 사랑하는 대상은 철저히 조커라는 만들어진 영웅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군중들의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억눌린 자들의 대변인이자 출구가 되어 줄 조커다. 조커를 통해 자신도 할리 퀸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현대인들의 이런 욕망을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놓았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영웅을 사랑하고, 스크린 속의 이미지화 된 영웅들을 추앙한다. 그들은 나의 욕망을 대신 해결해 주는 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가상의 캐릭터를 사랑한다. 가짜 사건에 일희일비하면서. 영화 조커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2천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도 영웅이 필요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영웅, 다윗의 무너진 왕좌를 재건할 영웅, 포로된 삶을 끝내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해 줄 영웅이 필요했다. 이런 욕망들이 메시야 신드롬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줄 대상이 필요했고, 그러한 메시야 상을 만들어 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자일 뿐 아니라, 모세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듯이, 지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을 제공하는 자라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 바로 그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욕망을 멀리하셨다. 오히려 물러가셔서 따로 기도하셨다. 그들에게 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강조하셨다. 그러자 그 많던 군중들이 다 물러갔다. 소수의 제자들만 남았다. 영화식으로 표현하자면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 되었을 때 군중들은 떠나가고 그는 버림받았다. 예수께서도 욕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버림 받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영화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조커인가? 아서 플렉인가? 가짜 인물인가? 진짜 삶인가? 욕망의 투사인가? 십자가인가? 쓸쓸히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처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 용기가 있는가? 나의 욕구를 채워줄 종교가 아니라, 나의 헌신을 바칠 진정한 신앙을 원하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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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18
  • [기독교인문학] 이 시대의 멘토가 쓴 신앙고백록
    김기석의 <고백의 언어들> 문학적 깊이와 삶의 열정을 겸비한 목회자이자 문학평론가, 시, 문학,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글쓰기로 지금까지 40여권의 저서와 10여권의 번역서를 낸 저자가 43년의 목회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캐나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교의 초청으로 진행한 다섯 번의 강의를 이 책에 담았다.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이란 부제처럼 목회자의 깊은 신학적 통찰과 올곧은 삶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깊은 묵상과 폭넓은 사유의 울림은 멘토를 잃고 위기에 처한 한국기독교에 각성과 함께 위로를 준다. 370여 쪽에 각주만 해도 100여 개에 달하는 이 고백록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그의 방대한 지식에 대한 경탄과 함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이야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 저자소개 ∥ 김기석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청파교회 전도사, 이화여대 교목, 청파교회 부목사를 거쳐 1997년부터 2024년 4월까지 27년간 청파교회를 담임했으며, 지난 4월, 43년간의 목회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한 후 신간을 준비 중이다. 방송을 비롯한 여러 매체, 온라인 설교 등을 통하여 대중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 저서∥ 말씀 등불 밟히고 《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일상 순례자》, 《사랑의 느림에 기대어》, 《김기석 목사의 청년편지》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삶이 메시지다》 김기석 / 포이에마 / 2010 《흔들리며 걷는 길》 김기석 / 포이에마 / 2014 《오래 된 새 길》 김기석 / 포이에마 / 2012 기독교인문학 〈55〉 이 시대의 멘토가 쓴 신앙고백록 - 숙성된 묵상과 사유의 열매 - 인생의 곤경이 다가올 때 “하나님은 늘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으로 말랑말랑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이 새로운 인식의 문이 되기도 합니다. 시련과 고통까지도 자기 삶으로 품어 안을 때 삶이 무르익기 시작합니다.” 43년 목회자의 고별메시지 김길구 저자의 책은 전에 다뤄본 적이 있었죠. 유럽의 교회, 수도원, 미술관들을 순례한 기행문 《흔들리며 걷는 길》인데요. 확인해 보니 벌써 10년 전이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는 느낌이 드네요. 마지막 사역지인 청파교회의 27년 목회를 올 4월 마무리하고 은퇴하셨지요. 독자들은 자유로운 가운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더 좋은 글들을 기대하는 눈치예요. 저자는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현호 독서와 글쓰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잖아요. 좋은 글감은 많은 독서와 깊은 사고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요즘도 새벽 3시부터 저녁까지 6시간 정도 독서를 한다니 한 달에 6권 정도 읽는 셈이죠. 물론 책의 난이도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곧 신간도 준비 중이고요. 류지원 이 책은 작년 여름, 캐나다의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의 초청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란 주제의 5일간의 벤쿠버 강연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인데요, 그동안 저자의 목회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의 신학과 목회를 정리한 고별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김길구 이 책이 43년 동안 사역한 노목사님의 고별메시지이니 저자에 대한 얘기를 좀 더 해보죠. 이 책의 출판에 대하여 기독교계는 물론 연합뉴스, TV조선을 비롯한 많은 매체에 보도되어 교계 원로가 사라진 이 시대에 그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김현호 그동안 기독교 목회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하고는 결이 다른 목사님의 캐릭터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직주의와 강퍅한 교리주의자가 아닌 탈권위적이고, 포용적이며, 부드러운 인격자, 낮은 곳을 지향하되 폭력적이지 않고, 지적이되 따뜻한 그런 이미지가 있지요. 글이나 표정에서… 류지원 이 강좌를 주최한 벤쿠버기독교세계관 대학원의 최종원교수는 서평에서 저자를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상가로 ‘진실하고 신실하고자 달음질해 온 고독한 구도자의 삶과 신앙이 문학의 언어로 고백 되어 우리 앞에 다가왔다’고 격찬한 대목이 와닿았습니다. 인간이라는 수수께끼 김길구 첫 장에서 저자는 우주선 보이저 1호가 해왕성 궤도 밖에서 찍은 칼 세이건이 명명한 ‘창백한 푸른점’에 불과한 지구를 언급하면서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을 대비시키며, 창조의 신비와 인간의 한계, 불안과 방황이 상수인 삶과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하는 인간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라고 합니다. 김현호 교목시절 물리 선생님과 나눈 얘기를 소개하는데, 그 선생님이 대학생 시절 1년 동안 공부하니 ‘세상에 설명 못 할 물리적 현상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졸업할 즈음에는 ‘내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일화와 함께 43년간의 목회자 생활을 마무리하는 저자에게 “누가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슬쩍 보았을 뿐이라며, 이 말은 겸양의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고백이라”고 하면서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자기 확신에 찬 설교자를 경계’ 하라고 했는데 음미해 볼 대목입니다. 김길구 이 장에서 ‘모호함’ambiguity과 흔들림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는데 확고한 믿음을 강조하는 풍토에서 부정적 의미가 담긴 ‘분명하지 않다’, ‘흐릿하다’는 뜻이 담긴 이 단어를 굳이 쓰는 이유는 무엇이죠? 류지원 욥기의 예에서 보듯 인생은 모호하기 그지없지 않나요? 저자는 오규원의 시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인식이라는 게 모호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유의 여백이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며, 의심하게나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도종환의 시도 있잖아요. ‘흔들리며 피는 꽃’처럼, 흔들림은 경직된 것이 아닌 유연한 것으로 어쩌면 회복의 탄력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안에서 태어나다 김길구 이 장은 고난과 낯선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럴 때 내가 의지하고 있던 세계가 흔들립니다. 이러한 고난에 직면하여 신 앞에 단독자로 섰을 때, 신앙인은 자기 속으로 누군가를 끌어들여서 없애버리려 하지 말고, 낯선 세계에 직면하여 끊임없이 결단하며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류지원 전설적인 희곡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를 언급하는 부분이 재미있어요.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 권태를 이기려고 쓸데없는 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무대 한켠에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아무 생각도 없이 ‘우리 심심한데 저기 목이나 매 볼까?’ 하고 있는데, 살려달라는 외침에 놀라서 보니 연극 1막에 잠시 등장했던 포조였어요. 처음에는 우리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한 외침이니 우리가 안 해도 누군가 살려 주겠지 라고 생각하다가, 방금 이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이라고 무시하다 생각해 보니 그 자리에는 자기들뿐임을 깨닫고는 ‘싫건 좋건 그 인류가 우리들이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되어 보자는 말이야’ 라는 대목에서 저자는 인간의 삶의 무의미성과 고통하는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인간상이 작가 베케트가 기다리던 ‘고도’ - 그 희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작가는 이 각본과 기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다 김현호 호렙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 고통받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며 그래서 내가 개입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네가 나의 손발이 되어 주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자신을 개정개역본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 소개하여 존재론적 의미로 해석되게 번역되었다며, ‘나는 나다’라는 원래의 의미는 ‘나는 나이고자 하는 나다’란 뜻을 내포한 관계론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분으로, 사건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거예요. 나의 인생 나의 하나님 류지원 하이데거가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죽음이라는 실제적인 상황에서 삶에 관해 성찰하게 됩니다. 하이데거가 이런 상황을 들기 위해 ‘하기누스의 우화’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생명을 가진 존재인 ‘쿠라’는 그 말뜻이 ‘근심’, ‘불안’이다. 인생은 살아있는 동안 늘 근심과 불안의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예시를 들고 있다. 김현호 현대 사회는 이런 불안의 상황이 가중되고 있는 것도 현실이지요. 나희덕 시인의 ‘기능주의자’의 시에서 보듯이 욕망의 전장에서 패배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내면의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나만이 살아남기 위한 남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기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은 국제적인 재난이기도 하고 결국 인간이 욕망을 자제하지 않고 소비와 경제발전에 매몰된 사고와 많은 상업적 기업들과 무분별한 개인소비성향으로 인한 결과물이 되돌아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김길구 오늘 다룬 《고백의 언어》들 류의 책들은 소개하기가 참 까다로워요. 소주제들도 많고, 문장 하나하나에 문학적 표현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동서를 아우르는 고전류의 참고도서들의 인용문이 많아 전체적인 맥락을 이어가며 한 주제로 요약하기가 쉽지 않아 주마간산, 수박 겉핥기식의 맥락 없는 단편적 소개로 이 책의 매력과 감동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계절에 우리의 신앙을 한 단계 높여줄 거장의 고백록에 흠뻑 빠져보시죠.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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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이상규 교수, 신간 ‘6.25 전쟁기 부산지방 기독교’ 출간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고신대 명예교수)의 신간 <6.25 전쟁기 부산지방 기독교>(한국교회와역사연구소)가 출간됐다. 이 책은 6.25 전쟁 70주년을 기념해 전쟁기 부산지방 기독교, 혹은 부산지방 교계의 상황이 어떠했던가를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쓴 글을 엮은 것이다. 특히 본지에 게재된 50여 회 연재한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휴전하기까지 3년 1개월 2일, 곧 1,129일 동안 계속되었고, 부산은 마지막 피난지였다. 전쟁 발발 직전 부산시 인구는 47만 명에 불과했으나 부산 인구는 급증했고 1.4 후퇴이후 84만여 명으로, 후에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수도는 대전으로(6. 27), 대구로(7. 16)로 이전하였고,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부산이 임시수도가 된다. 부산은 마지막 피난지였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의 피난처’였다. 임시 수도이자 피난 도시 부산은 혼란과 무질서, 고통과 아픔, 좌절과 절망의 도시였고 치열한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전쟁터였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기독교와 기독교 구호기관, 혹은 선교사들은 어떻게 피난민들을 돕고 구호활동을 전개했을까요? 이 책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전쟁의 발발과 피난지 부산의 상황, 피난민들의 부산 이주와 교회 설립(1장), 부산에서 전개된 기도운동과 구국운동(2장), 밥 피얼스와 빌리 그래함의 부산 방문과 전도집회, 부산에 온 첫 유대인 군목의 활동(3장), 그리고 전쟁기 부상당한 자와 피난민들을 위한 부산에서의 의료기관의 설립과 활동(4장), 피난민들을 돕고 구호 활동을 전개했던 선교사들(5장)과 구호 단체(6장), 그리고 전쟁기 피난지에서 계속된 신학교육(7장) 등에 대해 소개하고, 전쟁, 그리고 6.25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8장)를 정리했다. 저자 이상규 교수는 “이 책은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고 불충분하고 또 누락된 주제나 인물들도 적지 않다. 특히 전쟁기 외원단체나 구호기관, 피난민을 위해 일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기 부산에서의 기독교의 현실과 기여, 구호와 봉사 등 기독교회의 활동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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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3
  •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퍼펙트 데이즈(2024)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야쿠쇼 코지(히라야마), 에모토 토키오(타카시), 아리사 나카노(니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렌스 수사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전해준다. 로렌스 수사는 중세 수도원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수도원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에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수사도 있고, 신학 연구만 하는 수사도 있고 로렌스처럼 소위 잡일을 하는 수사도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종일 기도를 하거나 신학을 연구하는 수사는 영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지만, 하루종일 식사 준비하는 사람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로렌스 수사는 이런 경향을 뒤집었다. 그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 일, 감자를 깎는 일, 청소를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즘 말로 하면 일상이 영성이다. 사실 일상의 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 사람들은 종교개혁가들이다. 루터, 칼뱅 등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못지 않게 농사 짓고 물건을 만들고 가정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고 그 일들도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우리 주님도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30년을 목수로 사셨지 않은가?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본격적으로 전파하신 일에 집중하신 것은 3년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무를 자르고 돌을 나르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을 더욱 많이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보다 말 그대로 일상에 더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일상이 영성이다.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내는 것이 소명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들고 야큐쇼 코지가 주연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감독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물, 소시민 히라야마를 내세워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최근 본 영화 중에 이 작품을 최고로 꼽을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은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도쿄 번화가의 뒷골목 사글세 집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고, 세수와 면도를 하고,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선다. 집 마당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 들고, 도쿄 타워를 지나 출근한다. 출근길에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그는 도쿄 시내의 공중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다. 자신이 맡은 화장실 몇 곳을 청소하고 나면, 가까운 산사에 들러 우유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은 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이 루틴을 매일 반복한다. 정말 별 일 없는 하루하루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다르다. 감독의 세심한 연출을 잘 따라가 보자. 히라마야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표정이 다르다. 집을 나설 때 올려다 보는 하늘빛이 매일 다르다. 청소차를 타고 도쿄 타워를 지날 때 날씨가 매일 다르다. 날씨에 따라 그가 선택하는 음악도 매일 다르다. 음악이 매일 다르니 당연히 그의 감정도 다르다. 화장실 청소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의 상태도 매일 다르고, 그가 청소할 때 드나드는 사람들도 다르다. 산사에서 나뭇잎 사이로 찍는 햇살도 매일 다르다. 단골집 식당에 드나드는 손님들도 다르고, 식당 사장의 표정도 다르다. 그가 읽는 책도 달라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조카의 방문은 그의 루틴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감독은 말하고 있다. 새로움은 늘 내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 히라마야처럼 새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늘 같은 일상 같지만 히라야마처럼 음악을 매일 바꾸고, 책을 바꾸고, 매일 바뀌는 빛을 관찰하면 내 내면이, 내 삶이 새로움을 경험한다. 새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이 작은 차이를 발견해 내는 것이 삶의 지혜다. 내공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로렌스 수사는 수도원 부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썼다. 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 감자 깎기, 청소하기는 그를 지루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루한 일상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느낀 것이 그의 영성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영성 일기를 썼다. 그렇게 함으로 일상은 매일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영성 일기 쓰기는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삶의 반복되는 루틴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게 한다. 나의 감정의 변화, 내가 만난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변화를 포착하는 힘을 길러준다. 얼마 전 작고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차렸다. 그가 쓴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주인공 오기 렌의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있다. 오기 렌은 뉴욕시의 한 모퉁이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아침 8시에 출근을 한다. 출근 후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자기가 애정하는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편의점 앞 거리를 찍는 것이다. 매일 그는 한 장씩 사진을 찍는다. 그의 오랜 친구 폴이 편의점을 방문했을 떼 오기 렌은 자신의 사진첩을 친구에게 보여준다. 친구 폴은 사진첩을 대충 넘겨 본다. 왜냐하면 폴이 볼 때 다 똑같은 거리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오기는 폴에게 한 마디 한다. “친구, 내 사진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네. 천천히 집중해서 한 장 한 장 씩 다시 보게나.” 그러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폴은 친구의 사진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본 친구의 사진은 한 장도 똑같은 것이 없다. 매일 아침 거리의 풍경이 모두 다르다. 지나가는 행인이 다르고, 자동차가 다르고, 날씨가 다르다. 간혹 같은 인물이 찍히기도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옷차림이 정말이지 다르다.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려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 거의 매일 만나는 동일한 사람, 동일한 출근 길, 단조로운 일상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폴의 지혜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라는 조언을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오기 렌처럼 우리의 일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의 신비, 작은 차이, 단조롭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하루 하루가 기적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일상이 유지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는 기적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래 전 이렇게 기적을 표현했다. “기적은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 일상을 초월하는 일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기적같은 일, 즉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일을 기대한다. 하지만 사실 기적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우리 생각,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주는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고, 지구는 태양을 정교하게 공전하며 자전하고 있다. 만약 지구의 축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간다. 이것이 기적 아닌가? 달리 말해 우리의 일상이 별 일 없이 유지되는 것, 내가 별 일 없이 먹고 살아가는 것, 이런 일상이 기적 중의 기적 아닌가? 기적은, 새로움은 내가 발견해 내는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히라마야처럼 매일 음악을 바꾸어 보고, 새로운 책을 읽고, 나뭇잎 사이로 비춰지는 햇살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도 오래전 선지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가 3:22-23) 일상이 기적이다. 일상이 소명이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기적의 일상으로 살아내 보자. 히라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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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6
  • [기독교인문학] 미우라 문학은 ‘전도 문학’
    권요섭의 《미우라 아야코의 길 따라》 - 아사히카와 문학기행 가이드 북 - 폭우와 폭염이 교차하는 휴가철이다. 배낭 매고 일상을 벗어나 해외여행을 하고픈 이들에게 일본의 아사히카와 문학기행을 권하는 일본 선교사 권요섭 목사는 <빙점>의 저자 미우라 아야코의 광팬이다. 60년 전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1천만엔 현상공모에 <빙점>이 당선되면서 일약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녀의 작품들이 인간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로 복음의 진수를 잘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로 보고, 미우라 아야코의 문학과 사상을 독서회 등을 통하여 대중에게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열심인 저자는 지난 4월 160여쪽의 《미우라 아야코의 길 따라》라는 문학기행 안내서를 출간했다.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를 중심으로 그녀의 생애와 작품의 소개, 문학과 사상, 그리고 홋카이도 근처 관광지 지도 등을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 저자소개 ∥ 권요섭 전북대와 총신신대원에서 공부하고 2001년 일본선교사로 파송되어 도쿄에 게이센(恵泉)그리스도교회 고다이라(小平)채플을 개척하여 목회중이다. 2012년부터 미우라문학에 심취하여 2016년부터 연구를 시작해 2022년 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미우라 아야코 선교문학의 비평적 고찰-미우라 아야코 독서회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했다. 현재 일본 미우라아야코독서회 운영위원과 한국담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저서∥ 역서로 모리시타 다쓰에의『「빙점」 해동』(세움북스)과 하세가와 요시미쓰의 『드라마틱한 하나님』(아이프렌드)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빙점》 / 미우라 아야코 / 범우사 / 《속, 빙점》 / 미우라 아야코 / 범우사 / 《양치는 언덕/ 미우라 아야코》 / 설우사 / 《길은 여기에》 미우라 아야코 / 문지사 / 미우라 문학은 ‘전도 문학’ - 일본여행, 관광을 넘어 문학기행으로 - 미우라 아야코 문학 - 복음의 진수를 보여줘 “나는 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13년의 투병 생활 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진정 살리는 길,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 즉 복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쓰고 있는 것이다” -《고독의 옆에는》‘나는 왜 쓰고 있는가 중에서 - 기독교문학의 고전 김길구 여름 휴가철을 맞이하여 해외여행을 계획하신 분들이 많을 텐데, 엔저의 영향 등으로 일본이 인기랍니다. 한·일간의 해빙 무드도 있어 많은 한국인들이 이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오늘은 지난 5월 일본의 인기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길 따라》를 출간하신 권요섭 선교사님을 모시고 일본 문학기행의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 손님으로 독서지도자이시며 지난 6월 《낚시하는 거미》를 출간하신 동화작가 김정희 선생님도 함께 하셨습니다. 김현호 목사님 소개를 짧게 하면 2001년 일본 선교사로 파송되어 도쿄의 게이센 그리스도교회 고다이라채플을 개척하여 목회 중이십니다. 2012년부터 미우라 문학에 빠져 2016년부터 연구를 시작해 2022년에 William Carey International University에서 <미우라 아야코 선교문학의 비평적 고찰-미우라 아야코 독서회를 중심으로>로 박사학위(Ph.D)를 취득한 미우라 아야코의 전문가이십니다. 현재 일본 미우라아야코독서회 운영위원과 한국담당으로 양국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계시고, 지금 번역 중인 《빙점》을 하반기에 마칠 예정이래요. 김길구 제가 어렸을 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기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함께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은 홋카이도의 눈보라가 휘날리는 혹한의 눈 덮인 풍경과 함께 일본에 대한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기억이 새로운데 목사님께서는 60년도 더 된 오늘, 우리에게 왜 미우라 아야코인지 말씀해 주시죠? 권요섭 좋은 글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지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중에 하나가 ‘빙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로 일본에 와서 언어공부를 마치고 교회 개척 후 중고서점에서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을 접한 후 그녀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학위논문도 목회 사역에도 큰 영향을 끼친 나의 인생 책이 된 셈이죠. 김정희 아야코를 흘러간 작가라고 치부해선 안 돼요. 1964년도에 아사히 신문사 공모에서 1위로 당선된 이래 소설과 영화는 물론 일본 TV드라마의 단골메뉴로 1966년부터 2006년 동안 무려 8편이 제작되었을 정도로 마니아 층이 두터운 일본의 국민 드라마가 되었고, 이웃인 우리나라에서도 영화 2편(1967, 1981), 드라마로 2편(1990, 2004)이 제작될 정도로 인기는 여전합니다.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문학성 못지않게 ‘전도 문학’의 백미로 국경을 넘어 깊은 감동을 주니까요. 미우라 아야코에 대하여 권요섭 우선 그녀의 생애를 간략히 말씀드리면 1922년생인데 청소년기는 책을 좋아한 문학소녀기를 지낸 뒤 1940년도에 보통고등소학교의 정식교사가 됩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패망을 계기로 그동안 신봉하여 가르쳤던 군국주의 교육의 잘못을 깨닫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1946년 자진 퇴직하는데 사직을 결심하게 된 것은 ‘교과서 먹칠 사건’ 때문입니다. 승전국 미군들에 의해 교과서에 실린 군국주의적 내용들은 먹물로 지우라는 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르는 학생들은 먹을 갈고 교사는 먹으로 지울 부분을 지시하면서 ‘뭐가 바른지도 모르고 가르쳐 온 것’에 대한 자괴감에 고민하다 7년간의 교사직을 끝으로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김현호 학교를 그만둔 아야코는 방황하게 되죠. 허무주의에 빠져 두 남자와 약혼하고, 한 남자의 약혼 예물이 오던 날 뇌빈혈로 쓰러지고, 얼마 안 돼 결핵으로 13년 간의 긴 요양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기간동안 그의 소꿉친구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고 1952년 병상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애인인 소꿉친구가 34세에 죽음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미우라 미쓰요가 나타나 헌신적인 사랑으로 병세가 호전되자 그와 결혼식을 올린 뒤 잡화상을 운영하며 글쓰기에 몰두합니다. 1963년 공모공고를 보고 응모를 결심, 다음 해 총 731편의 소설이 경쟁한 아사히신문의 천만엔 현상공모에 당당히 당선, 작가로 데뷔 후 1999년 소천할 때까지 35년간 100여점의 작품을 집필하고 여러 작품이 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제작되어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김길구 앞에서 13년간의 요양생활을 경험했던 병약한 아야코는 이후에도 폐렴, 직장암, 파킨슨병 등 각종 병을 달고 살아 여러 질환으로 고생하다 1999년 10월12일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미우라 아야코 문학의 특징 권요섭 전쟁 기간에 군국주의 교사로 살았던 아야코는 패전 후 반전주의자가 됩니다. 그녀의 자전 소설 《돌맹이의 노래》, 《길은 여기에》를 통하여 자신의 전쟁 체험을 기술하면서 군국주의의 철저한 사상·언론 통제를 비판했으며, 그 비판을 소설화 한 것이 마지막 장편소설 《총구》였는데, 전쟁을 일으킨 일본에 대한 비판과 피해자와 국가에 대한 사죄, 그리고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하며 집필한 소설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생전에 “한국이나 중국에 가게 된다면 저는 그 나라를 발바닥으로 밟고 걸어갈 수 없고,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실제로 그녀는 그의 집을 방문하는 한국과 중국의 방문객에게 먼저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난 후에 용무를 보는 진정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 데뷔작이 인생작이 되다 김정희 《빙점》은 미우라 아야코가 42세에 아사히신문에 당선되어 세상에 나왔는데 그녀가 폐결핵으로 13년의 투병 생활을 거치고 나온 삶의 숨결이 묻어나온 첫 소설 데뷔작이 고전이 되었습니다. 줄거리를 요약해 드리면 병원장 게이조의 아내 나쓰에는 젊은 의사와의 감미로운 죄의 유혹으로 인해 어린 딸이 유괴되고 결국엔 죽지요. 남편 게이조는 아내에 대한 배신감에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위선으로 유괴범의 아이를 입양합니다. 그러나 “웬만한 일은 노력하면 할 수 있지. 그러나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네”처럼 내부의 갈등으로 계속 힘들어 합니다. 한편 나쓰에는 입양한 아이를 요코라고 이름 짓고 정성을 다해 키웁니다. 그러나 요코가 살인범의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고, 남편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요코에 대한 애증이 뒤섞이어 갈등합니다. 나쓰에는 학예회에 흰옷 대신 빨간 옷을 입혀 요코를 보내고, 하나님의 준비된 계획일까요? 요코의 빨간 옷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나쓰에의 은근한 괴롭힘은 계속되고, 요코는 자신에게 범죄자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되어 괴로워하다, 결국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살을 시도하는데, 그러나 범죄자의 자식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혀지며 나쓰에와 게이조는 죄책감에 절규하고. 게이조는 요코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요코가 살아날 거라는 희망을 암시하면서… 김길구 이 소설의 첫 문장 ‘바람 한 점 없다’에서 바람은 절대자(하나님)의 숨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표방하며 썼다고 하고요, 제목인 ‘빙점’의 의미는 잉크가 얼 정도의 추운 방에서 ‘마음이 얼어서’ 자살을 시도하는 주인공 요코를 연상하면서 지은 제목이라고 하더군요. 아사히카와 문학기행-도보코스 권요섭 미우라아야코기념관을 시작으로 빙점에 등장하는 장소와 미우라 부부와 관련된 곳을 걸어서 탐방하는 하루 코스를 소개해 드립니다. ①미우라아야코기념문학관⇨②가구라소학교⇨③아사히카와적십자병원⇨④도키와공원⇨⑤도립아사히카와히가시고등학교⇨⑥다이세이소학교 터⇨⑦로쿠조교회⇨⑧카페 지로루⇨⑨아사히카와역⇨⑩빙점다리⇨⑪빙점거리⇨⑫외국수종견본림으로 2~3박이 추가하면 인근에 있는 홋카이도의 빼어난 관광코스 등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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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6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감독 : 조너던 글레이저 출연 : 크리스티안 프리델(루돌프 회스), 잔드라 휠러(헤드비그 회스), 이모겐 코게(린나 헨셀)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론을 믿는다. 유대교는 야훼만이 하나님이고 이슬람은 알라만이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초기 교회는 이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동일본질(homoousius)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차등이 없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한 지점은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신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종교다. 따라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으며 교회에 당부했다. “각각 자기 몸을 돌 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다루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찌가 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인 홀로코스트, 그 중심에 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내내 홀로코스트의 참상, 아우수비츠의 비참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보여주고, 페델리코 펠리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회적으로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너던 글레이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다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회드비그 회스, 그리고 자녀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회스의 가족들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청량한 새소리, 강가의 물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단란하고 웃음이 가득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뜻 이 장면은 전쟁의 참상이나 끔찍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인다. 그 어디에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소풍을 끝낸 가족은 귀가하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단란하고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거주하는 크고 화려한 집은 거대한 담벼락이 접해 있다. 그렇다. 그 담벼락 너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거대한 담 뒤에는 매일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밤이 되면 담벼락 너머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간혹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회스 가족이 수영을 즐기고 보트를 타는 강물이 잿빛으로 변한다. 회스 중령은 아이들을 강물에서 나오라 소리치고 노이로제처럼 씻긴다. 부인 회드비그 회스는 대여섯명의 하녀를 두고 있다. 하녀들이 밥도 짓고 아이들도 씻기고 남편의 옷도 다린다. 전투화를 벗어놓기 바쁘게 하인 한 명이 들고 가서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다 둔다. 이 가족은 언제나 정갈하며 깨끗하다. 아이들도 군더더기 하나 없다. 회스 부인은 자기 어머니를 집으로 초청하여 집이며 정원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니?”라며 감탄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그녀의 정원은 각종 꽃들로 가득하며 풀장에서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긴다.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중 이 지상천국 같은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상부에서 회스 중령의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회스 부인은 남편인 회스 중령에게 로비를 해서라도 여기를 사수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이 곳을 어떻게 가꾸었는지 알아요? 황무지 같은 이 곳을 천국의 정원처럼 가꾸었다고요. 아이들도 이 곳에 적응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 지 알잖아요.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혹여나 남편이 전쟁터로 전출을 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이사를 가게 될 까 조바심이 난 회스 부인은 신경질적이 된다. 일을 도와주는 유대인 하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대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 마디 하면 너도 저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르니?”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너무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드러낸다. 벽 하나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가 보여주는 수용소장의 가족은 자신들은 천국에서 지낸다 하지만, 실상 지옥을 만드는 자들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맞다. 그 벽 너머에 지옥이 있다. 소장 루돌프 회스는 그 벽에 난 문을 통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매일 드나든다. 그런데 그 지옥은 천국에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곳이다. 아니, 그 지옥을 통해 자신들의 천국을 유지하고 있다. 회스 가족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그 수용소의 공장에서 조달되고, 가끔 유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자루에 실려 이 집으로 들어온다. 회스 부인은 그 중 모피 코트를 챙긴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립스틱을 꺼내어 자신의 입술에 바른다. 담 너머의 죽어가는 자들이 이 쪽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상황이 그대로 연출된다. 아렌트는 전후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청석에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자신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오열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웃집 아저씨같은 사람이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데 동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누구나 본성에 잔인함이 들어있고 특수한 상황에서 악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칭했다. 동시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지 않은 죄’ 즉 사유하지 않은 죄였다.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불의가 행해지는 상황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죄, 동참한 죄를 선언했다. 악한 일에 단순하게 따른 것도 죄였다. 최소한의 저항,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린 죄, 그 죄가 더 컸다. 회스 가족의 죄가 그러하다. 벽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범죄, 악, 비참한 일에 이 가족은 너무나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기에, 게다가 수용소장의 가족이기에 이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도 걸어잠그고 커튼을 친다. 그 벽 너머의 참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이중성, 외면을 감독은 차분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이 묘사한 장면이 단지 아우슈비츠 뿐일까? 분명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전쟁이 아닐 뿐, 총이나 대포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끔찍한 일이다. 소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불경기라며 힘들어 한다. 최저 생계비에 겨우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맞벌이는 일상이다. 수많은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해 보려는 소망으로 대출하여 구매한 아파트, 인상된 금리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돈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억대가 넘는 비싼 외제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십만원이 훨씬 넘는 호텔의 식당들은 대기줄로 가득하다. 해외 여행자들은 넘치고 여행지의 비싼 호텔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하룻밤에 50만원에서 100만원 하는 호텔들에 방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불경기는 누구에게 해당되는 일인가? 오히려 불경기라는 것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중된다. 루돌프 회스에게는 보이는 벽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은 그대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공동체로 만드셨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나, 너’가 아니라 ‘나-너’, 즉 ‘우리’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나’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오롯이 ‘나’만 잘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자인 ‘너’가 없다면 생산자인 ‘나’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소망이 있다.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의 등장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수용소의 담을 지나 흙더미에 사과를 숨겨 놓는다. 누군가 일하다 그 사과를 발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죄에 동참한 사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사과다. 그 사과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소녀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 회스 가족을 무너뜨리는 작은 사과, 오늘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다. 이기적 욕망을 내려 놓고,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 뜨릴 사과 한 알을 나도 너도 나누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이며 공존하는 길이기에. 한나 아렌트의 경고에 귀 기울이자. 사유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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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기독교인문학] 붓다는 자신을 신이라 하지 않았다
    정성민의 인간 붓다와 신 예수 - 기독교 시각으로 본 초기 불교 가르침 -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인도에서 신학과 철학, 비교종교 등을 두루 섭렵한 저자가 2년 전 출간한 방대한 걸작 〈예수와 석가의 대화: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본 석가모니〉에 이어 올 1월 노작 《인간 붓다와 신 예수》를 펴내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하여 창시한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당시 인도의 힌두교의 신, 우주적인 영의로서의 브라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립 해탈의 길을 연 무신론적 종교개혁으로 호응을 받았으나 그의 이상적이며 완벽한 도덕주의는 사후에 진행된 붓다의 신격화 작업과 자력에서 타력신앙의 유신론적 경향을 띠며 변화하는 과정들을 추적한다. 붓다는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원조요, 현대 철학과 교육의 원형으로 현대 무신론의 진정한 시조라는 것이다. ◇ 저자소개 ∥ 정성민 현재 미국 그레이스미션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석사, 동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 석‧박사(종교철학), 인도 마드라스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비교종교)을 수료한 후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와 호서대학교 신학대학원 초청 강사, 인도 마드라스신학대학교 방문 교수를 역임하였다. ◇ 저서∥《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와 《예수와 석가의 대화》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예수와 석가의 대화 -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본 석가모니》 / 정성민 지음 / CLC / 2022 《붓다와 희생양 - 르네자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 정일권 지음 / SFC / 2013 기독교인문학 〈52〉 붓다는 자신을 신이라 하지 않았다 -기독교 시각에서 본 불교 이야기-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 “붓다의 세계관은 신(神)을 전면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반기독교적 입장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각 영혼이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죽음은 개인적 삶의 끝이 아니라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비교종교학의 고전이 될 책 김길구 1월에 두란노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얼마 전 한 스님의 초청으로 절을 찾은 적이 있는데, 스님의 말씀이 성탄절과 석탄일에 서로 축하의 현수막도 걸어주며 교류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데 개신교 목사님과는 왠지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묻던 기억이 납니다. ‘참된 앎과 믿음을 위하여’란 부제처럼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사상의 뿌리를 알고 소통하는 것은 서로에게 믿음의 근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김현호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은 이 책이 ‘비교종교학의 고전’이 될 것이라는 감수평을 남겼습니다. 2022년에 《예수와 석가의 대화》라는 582쪽의 대작으로 주목을 끌더니, 이번에는 30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의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낯선 불교에 관한 흥미진진한 얘기는 감수평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타종교와의 합리적인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기대도 갖게 됩니다. 붓다는 누구인가? 류지원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 정리부터 해야겠어요. 붓다는 원래 ‘깨달은 자’란 산스크리어 붓다(佛陀)의 음역으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뜻합니다. 그의 일대기는 잘 아시니까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로 네팔 남부 인도 국경 근처인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작은 나라 사카국의 왕자였는데 고달픈 인생의 문제, 곧 생로병사와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29세에 출가, 수행 6년 만에 깨달음을 얻고 불교를 창시하여 그의 사상을 널리 포교하다 향년 80세로 열반한 동양 최고의 종교지도자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설파한 근본 가르침은 지금처럼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초월적 성격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성향을 배척한 초기 불교를 중심으로, 붓다는 순수한 인간이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철학자요, 유신론을 거부한 무신론적 철학자요,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브라만교의 부패와 신과 윤회를 앞세워 동물 희생 제사와 고행을 강조하는 종교의 부정적 행태에 분노한 혁신적인 종교개혁자였으며, ‘신’의 존재나 ‘우주’ 그리고 ‘사후세계’ 같은 문제에는 별로 관심 없이 인간이 지닌 고통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데 고민했던 현세적인 종교지도자로 도덕적이며, 거룩한 생활을 실천한 불교의 창시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류지원 붓다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의 ‘불교는 붓다를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불교의 종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다소 역설적인 불교의 독특한 종교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교리 톺아보기 김현호 붓다의 깨달음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涅槃) 즉 인생사의 모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편안함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길을 사성제(四聖諦)로 요약하였는데요 현세에서의 삶은 곧 고통이라고 보는 고제(苦諦), 괴로움의 원인은 끝없는 애집(愛執)에 있다는 집제(集諦), 모든 욕망을 벗어나서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를 이상이라고 풀이하는 멸제(滅諦), 그리고 번뇌와 업을 끊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도제(道諦)라고 합니다. 류지원 사성제가 붓다의 우주와 인생의 원리라면 삼법인은 세 가지 진리의 진리로 모든 존재는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고, 인간 내면에 있다고 믿어지는 자아, 곧 영혼이 없으며,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집착을 버린 자는 정신적 고통에서 해탈하여 평안함을 누린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김현호 이러한 원리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팔정도가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로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 그리고 올바른 생활과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과 올바른 집중으로 수행을 위하여 붓다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삶으로 실천하며 명상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는 특별한 지식 즉 명지를 깨우치는 측면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김길구 불교에서 중시하는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명지를 얻는 것으로, 바로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正思惟)하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행자는 붓다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를 동의해야 하는데, 그 핵심교리가 불교의 연기론에 바탕을 둔 무아론 입니다. 만물은 인연에 의하여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이를 통제하는 신의 존재나 그 안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영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붓다의 세계관은 무신론, 무아론 그리고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내세관에 뿌리를 둡니다. 기독교와의 대화 류지원 시간이 없어 불교의 변천사는 생략해야겠어요. 축약해서 그 역사를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면 불교의 토대가 된 인도의 전통 힌두교 신앙이 정(正)이라면, 붓다가 시작한 브라만교의 허구와 부당성에 반기를 든 이상적이며 혁신적인 종교개혁을 반(反)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사후부터 진행된 이상과 현세적인 측면을 가미하여 민중들의 요구를 절충한 좀 더 세련된 종교?가 오늘의 불교가 합(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김현호 저자는 사상적으로 예수와 붓다의 닮은 점을 몇 가지로 얘기합니다. 마음 속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 땅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삶이다. 예수와 붓다가 지향하는 삶은 무욕과 무소유다 예수와 붓다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쳤고, 몸소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류지원 그렇다면 예수와 붓다의 대화 가능성은 있을까요? 저자는 이를 일축합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소승불교의 교리적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대화가 되려면 예수와 붓다가 신적인 차원이어야 하는데 그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초기 붓다와 사후 후대의 신격화된 붓다의 사상과도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같은 논리로 교리적 대화 역시 예수를 보통사람으로 전락시킨다는 이유에서죠.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서로의 입장과 사상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밖에 없는 지구상에서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것이 곧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김현호 이 책 말미에 가면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타종교와 무신론자와의 소통방법,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과제 등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길구 서구사회는 물론 미국에서 조차 쇠퇴를 거듭, 기독교가 위기감을 느끼는 가운데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추세입니다. 사람과의 무한 경쟁에 이어 AI와도 같은 기계와도 싸워야 하는 극심한 경쟁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은 명상, 요가, 탬플스테이 등 안식을 찾고 ‘멍때리기’가 유행합니다. 과연 기독교가 이 시대의 참된 안식을 줄 수 있을지 반문해 봅니다. 다음 호에는 일본문화기행 편으로 저명한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길을 따라》란 가이드 북을 내신 권요섭 목사와 함께 그의 문학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4-06-14
  • 삶이 부유해지는 단순한 재정 원리
    출판사 : 진인터랩 저자 : 밥 로티치(Bob Lotich) 원서 : Simple Money, Rich Life ( 2022. 4 미국 출간) 번역 : 조계진 ISBN : 979-11-981955-9-3 분류 : 기독교 > 신앙 생활 > 리더십/직장 생활/재물론 페이지 수 : 336p 형태 및 크기 : 신국판 단행본 153 x 225 x 18mm, 530g 출간일(출고일) : 2024. 6. 5 가격 : 16,000원 돈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삶이 부유해지는 변화를 위한 21일 재정 훈련. 돈에 대한 기존의 프레임을 바꾸고 재정 구조를 새롭게 설계해 준다. 마이너스 재정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큰 소망을 성취한 경험적 재정 원리.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단순함, 삶에 그대로 적용 가능한 실천적 지혜가 가득 담겨있다. 삶이 부유해지는 ‘단순한 재정원리’는 저자가 재정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이 존재를 깨닫고 나서 성경의 원리대로 돈을 저축하고 벌고, 기부하고 즐기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과정이 생생하게 담긴 ‘돈’에 대한 교훈과 통찰을 주는 책이다. 책은 돈에 관한 기본적인 활동, 즉 수입과 저축을 극대화하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나눔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려준다. 또한, 돈 관리가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는 과정이라고 알려 준다. 저축하기, 돈 벌기, 기부하기, 즐기기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파트가 끝나면 요약과 실천 지침이 있는데, 총 21개의 실천 지침이 21일간의 여정을 이끌어 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재정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을 강요하는 정보를 구별하기 힘들다. 재정적으로 성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내더라도 너무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저자는 재정으로 인한 어려움의 낭떠러지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눈에 보이는 상황, 자신의 재능, 정보와 노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그동안 재정에 하나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재정의 바닥에서 일어나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목표를 성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자신의 재정 관리 블로그, 팟캐스트에 올리면서 지금까지 전 세계의 약 5,000만 명 이상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재정 원리는 단순하다. 그러나 저자가 15년간 스스로 실천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정립한 원리이기 때문에 삶이 부유해지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 많은 독자들이 저자와 함께하는 21일 간의 재정 훈련 실천을 통해 선순환의 변화가 시작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돈에 속박된 종의 삶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주인으로서의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저자 밥 로티치는 높은 성과를 이끌어 온 재정 코치이자 개인 금융 공인 교육자 (CEPF®)로, 개인 재정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20인에 선정되었다. 수상 경력에 빛나는 그의 웹사이트 SeedTime.com과 팟캐스트는 5천만 명 이상의 독자, 청취자, 학생들과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실용적인 전략을 공유해 왔다. 베스트셀러인 'Simple Money, Rich Life'는 IFCFH(Institute For Christian Financial Health)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포브스(Forbes),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 야후 파이낸스(Yahoo Finance), 빌리프넷(Beliefnet), 타임(Time) 등에 소개된 바 있다.
    • 문화
    • 도서
    2024-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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