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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예수의 영성은 예언자의 영성
    차준희교수의 《열두 예언자의 영성》 -정의, 긍휼, 신실에 대한 치유 메시지- 구약학자인 차준희 한세대학교 교수의 역작이다. 「목회와 신학」에 12회에 걸쳐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 12명의 소예언자들에 관한 글을 모아 2014년에 출간했다. 서로 다른 배경과 메시지의 다영성이 현재 6쇄를 거듭하며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비결이다. 저자는 출간한 그 해에 일어난 세월호 사태를 빗대 한국교회의 침몰을 논하며, 정의와 긍휼, 신실의 회복을 통하여 치유의 해법을 찾고 있다. 교인들의 외면으로 오래전에 우리의 강대상에서 쫓겨난 예언자들의 거친 숨소리를 저자는 현대의 감성에 맞게 되살렸다. ‘상식이 예배보다 우선이다’(호세아), ‘성령을 받으면 목소리가 아니라 지갑이 열린다’(요엘), ‘무능이 전능을 이긴다.’(스가랴) 등 제목부터 이채로워 눈길을 끈다. ◇ 저자소개 차 준 희∥ 서울신학대학교, 연세대학교 대학원, 독일 본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는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7년에는 한국구약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교회 강단을 섬기며, 목회자들의 구약설교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새물결플러스 간 / 2019. 2. / 1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예언자들》 아브라함 J 해셀 / 삼인 / 2004 《예언자적 상상력》 월터 브루그만 / 복 있는 사람 / 2015 (개정판)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김근주 / 한국성서유니온 / 2015. 《키워드로 읽는 예언서》 성기문 / 세움북스 / 2015 예언자 영성=예수의 영성 “예수는 구약의 핵심으로 예언자의 영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영성은 다름 아닌 예언자의 영성이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영성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김길구 오늘은 차춘희 교수의 《열두예언자의 영성》 입니다. 보궐선거를 앞두고 LH공사 직원의 내부정보를 이용한 부동산투기가 여권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집권 내내 부동산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여권으로서는 큰 위기를 맞아 철옹성 같던 콘크리트 지지가 흔들릴 지경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박영규 우리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불평등의 문제로 야단입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이 작년에 발표한 2019년도 불평등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수퍼리치 2,153명 46억명보다 더 부유하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더욱 부의 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지요. 김현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의 수평이동이 일상화된 요즘도 대형교회들은 그동안 의 교회성장론을 바탕으로 더욱 대형화되고 작은교회들은 유지가 어려워 문을 닫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잖아요. 김길구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계에서 이러한 사회부정의의 문제를 얘기하는 분들이 별로 없어요. 오늘 열두예언자의 영성은 구약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회정의의 문제와 약자의 돌봄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박영규 예언자들의 높은 도덕성과 윤리성이 변방 중동의 종교를 세계의 종교로 발돋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구약 예언자 정신의 실종에서 찾고 있어요. 김현호 히브리 예언자의 사회정의는 서양문명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의 이성과 철학, 로마의 법과 질서와 함께 3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독교적 정의의 정신이 우리사회 저변까지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사회정의가 서구의 3대 주류 이뤄 김길구 원래 이 책의 편집이 월간지의 연재 형식이어서 서론 없이 열두 명의 독립된 얘기들로 구성되었어요. 다행히 유튜브에 서론격인 강의도 있어 참조하시면 좋겠네요. 그럼 예언자는 누구죠? 김현호 히브리의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만을 점치는 점장이나 마술사와는 다르죠. 미래의 예언도 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지금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의 ‘예’자가 과거 한자로 미리 예(豫)를 썼는데, 요즘은 ‘미리’라는 의미도 포함된 ‘맡길’ 예(預)를 쓰고 있더군요. 역할에 있어서도 제사장은 토라 즉 말씀을 가르치고 제사를 집례하는 일을 주로 하는데,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대신 기도해 주는 중보자의 일은 제사장이 아닌 예언자의 몫입니다. 물론 사회비판은 기본이고요. 박영규 책을 흥미롭게 봤는데요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단지 확성기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각기 다른 기질과 성격과 개성들도 함께 사용하신 것 같아요. 같은 듯 조금씩 결이 다른 그들만의 색깔이 성서를 더욱 다양하고 풍요롭게 한다고 느꼈습니다. 예수, 히브리 예언자 전통따라 김길구 저자의 주장은 예수의 영성은 예언자의 영성이니 그를 따르는 우리도 예수처럼 예언자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까요? 박영규 그 논리의 출발점은 대표적인 성구인 마 23:23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 말씀에 언급된 정의, 긍휼, 믿음이 구약 예언자들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김현호 아시다시피 이러한 예언자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난 것 곳이 ‘정의’는 아모스, ‘긍휼’은 호세아, ‘믿음’은 이사야서들인데, 예수도 이러한 구약신앙의 핵심 사상인 예언자들의 전통을 따라 압축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봐요. 현재 위기의 한국교회를 구하는 길은 예수처럼 예언자 정신을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김길구 그러면 지면관계상 다할 수 는 없겠고 12인 12색 중 세 분의 본문 속으로 들어가 책의 매력에 빠져봅시다. 박영규 순서대로 호세아는 문서예언자 중에 유일한 분단시대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입니다. BC 8세기 대제국 앗시리아의 부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시기에 활동했어요. 신실하지 못한 믿음과 하나님과 바알신을 겸하여 섬긴 혼합주의를 부부관계의 불륜인 간음행위로 질타합니다. 김현호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는 것이 핵심 메시지입니다. 소제목이 ‘상식이 예배보다 우선이다’로 단 것은 교인들은 이중생활, 예배 당 밖의 일상에서 인간도리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행동과 처신으로 신뢰를 회복하라는 이 메시지는 요즘 신뢰를 잃어 교계에 싸늘한 시민들의 시선 앞에서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하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박영규 아모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 국제적 문제로 떠오른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과거 광주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경찰의 차단벽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수녀의 사진이 전 세계인에게 큰 울림을 주었죠. 부정의 앞에 저항하지 않고 그 이익을 누린 자들을 비판한 아모스의 소제목이 “공동체 의식이 없는 자들의 예배는 하나님과 무관하다”였는데, 우리가 분개하는 LH사태나 부동산 폭등 사태 등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나?를 자문하게 됩니다. 김현호 아모스가 활약한 시대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잘 나가던 때였어요.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곪아가고 있었지요. 양극화가 심화 되고 약자들의 삶은 사회적 불의와 도덕적 타락으로 피폐해가기만 했어요. 게다가 예배도 변질되어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을 섬기는 예배로 전락하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그 유명한 말씀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물같이, 공의(체다카)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혹은 공공의식 없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나요? 김길구 하나님의 영이 특별한 이들에게만 독점되지 않고 중재자 없이 이스라엘 백성 모든 사람에게 물처럼 부어질 날을 노래한 요엘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하나님 영의 민주화‘라고 했어요. 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근대를 연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만인제사장설’을 너머 이미 오래전에 ‘만인예언자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성령공동체 안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소외도 없다는 선언은 교회 안에서 직분이 계급이 된 지 이미 오래고, 그 어느 곳보다도 돈이 위세를 떨치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현실과 너무 다르죠. 문제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는 안 보여요. 이미 체질화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언자의 영성으로 거듭나 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음 호에는 하나님의 선은 어떻게 인간 공동체에 구현되는가를 생각해 보는 두란노 刊 《선, 정의, 법》의 저자 천종호 판사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1-03-26
  • 최현범,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라]
    최현범 지음 / 도서출판 대장간 펴냄 부산중앙교회 최현범 목사가 연구한 것들을 상아탑 안에서만 논하기보다, 목회현장에서 접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그 복음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가를 설교와 교육 그리고 목회전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은 어떤 신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최현범 목사는 서울대학교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서울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도르트문트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겼고, 보쿰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기독윤리로 신학박사(Th.D.)학위를 취득한 뒤, 故 옥한흠 목사의 추천으로 부산중앙교회에 부임하여 현재까지 목양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라], [믿음으로 세상을 도전하라], [믿음의 터를 견고히 하라]가 있다.
    • 문화
    • 도서
    2021-03-12
  • [기독교인문학] 코로나 시대,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요?
    C. S. 루이스 《신자의 자리로》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20세기 교회를 움직인 100권의 책에 3권이나 선정된 저명한 작가 C. S. 루이스의 작품 중 믿음의 실천과 관련된 글들을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편저자는 하퍼원 출판사 편집장인 마이클 G. 모들린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이 책 《신자의 자리로》는 루이스의 책과 에세이와 편지와 강연 등 폭넓은 저작에서, 어떻게 믿을 것인가만 아니라 어떻게 믿음을 잘 실천한 것인가와 관계되는 부분을 엄선하여 모은 것이다” 인용한 작품은 《순전한 기독교》, 《영광의 무게》, 《피고석의 하나님》, 《세상의 마지막 밤》, 《기독교적 숙고》 등이다. 그리스도인 살아가면서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그의 해박한 지식과 번쩍이는 재치로 풀어준다. 그가 왜 20C 최고의 변증가인지를 엿볼 수 있는 실용지침서. ◇ 저자소개 C. S. 루이스∥영국의 옥스포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중세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며 소설, 평론, 동화 등을 썼다. 지성적이며 논리적인 신학자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순전한 기독교》, 등이 있으며, 전세계 1억 부 이상을 판매한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 《나니아 연대기》 등이 있다. 두란노 간 / 2020. 11.18. / 11,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기도의 자리로》 / C. S, 루이스 / 두란노 《루이스의 서재》 제임스 스튜어트벨 / 홍성사 / 코로나 시대, 집에서도 나는 신자인가요? 기독교란? “기독교는 그저 자연적 삶을 새로운 삶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소재를 초자연적 목적을 위해 활용하는 새로운 질서다.” 김길구 그동안 수고하셨던 경주의 김형기 목사님이 개인사정으로 그만 두시고, 산정현교회 장로인 박영규 모라복지관 관장께서 함께합니다. 대학 졸업 후 장기려 박사님의 부름을 받고 청십자병원의 근무를 시작으로 현재 사회복지법인 청십자 이사장을 겸임하고 계신 청십자맨 입니다. 부산대 대학원(기술사업정책학 박사)을 졸업했습니다. 박영규 평소 이 코너의 팬이었는데,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좋은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현호 부산광역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으로 사회복지운동에 헌신하셨는데 이 코너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옥스퍼드의 명사, 루이스에 대하여 김길구 김대표께서 루이스의 광팬이신 모양인지 얼마 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이어 또 추천을 하셨어요? 루이스의 매력이 어디에 있나요? 김현호 케임브리지 교수이자. 옥스퍼드의 명사인 루이스는 두 세대가 지난 지금까지도 기독교 신앙의 탁월한 길벗이자 위기의 시대에 저희들에게 멘토 역할을 톡톡히 해주죠. 빛나는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인문학의 지평을 한껏 넓힐 수 있어 제가 존경하는 작가입니다. 박영규 C. S. 루이스하면 떠오르는 것은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세계의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나니아연대기》를 떠올리실 겁니다. 판타지 소설 J.R.톨킨의 《반지의 제왕》, 《호빗》과 더불어 판타지 동화 나니아연대기는 우리 안방 TV에서 자주 재방영하는 영화이기도 한데, 상상력과 유머,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간결하고 품위 있는 아름다운 문장은 동화작가와 종교사상가로서의 그를 유감없이 보여 준다는 평입니다. 20C 교회를 움직인 명저 100선에 《순전한기독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같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김길구 작년에 우리나라에도 《루이스와 톨킨의 판타지문학클럽》이란 책이 번역돼서 나왔어요. 영국판타지문학의 황금기를 이끈 두 거인이 포함된 「잉클리스클럽」의 얘기인데, 멤버들이 쟁쟁해요. 작가들인 이들은 서로의 글쓰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문학클럽이었는데, 루이스는 이 모임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합니다. 일종의 관계전도라고 할까요? 여담이지만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고 할까? 여기에 큰 영향을 준 이가 가톨릭 신자인 《반지의 제왕》 톨킨인데 소통이 너무 나갔나요? 나중에 나니아연대기가 출간되자 톨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루이스가 표절했다며 둘의 관계가 틀어지기도 해요. 박영규 재미있는 것은 톨킨의 판타지는 은유가 많아 나니아연대기 처럼 기독교적 메시지를 들어내지 않는데 비해 루이스는 노골적으로 들어내죠. 이 점을 톨킨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아마 나니아연대기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서 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순전한 기독교〉〈영광의 무게〉〈피고석의 하나님〉 김현호 너무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그럼 본분으로 들어가 볼까요? 책의 성격이 그의 명저 중 엑기스만 뽑아 놓은 북 다이제스트 형식이라 작가 특유의 재치와 유머을 곁들인 모든 글들이 좋기는 한데, 주제도 광범위해 요약해서 정리하기가 어려웠어요. 김길구 책 선정을 한 뒤 저도 후회를 했어요. 글들은 다 좋은데 어떻게 마무리할까?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발췌한 글 중에 복수로 인용된 글이 〈순전한 기독교〉 3편, 〈영광의 무게〉 4편, 〈피고석의 하나님〉 4편이더군요. 우선 이 세 권을 한 분이 한 작품씩 간략히 소개해 주시고, 발췌본 중 은혜로웠던 대목들을 추려보면 어떨까요? 비 표준어 입니다만, 엑기스 중에 엑기스라고 해야 하나요? 김현호 루이스를 20C 가장 영향력 있는 변증가로 만든 작품이라면 단연 《순전한 기독교》라고 해야겠지요. 이 책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BBC 라디오에서 전한 메시지 시리즈물을 1952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책입니다. 당시 미국과 영국 기독교의 주된 적은 ‘현대성의 결여’ 였는데 옥스퍼드의 학감으로 설득력 있게 기독교가 더 합리적임을 주장함으로써 많은 지성인들을 돌아오게 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입니다. 박영규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류되어 수감된 닉슨의 특별보좌관이었던 찰스 콜슨의 마음을 돌이키게 한 책으로 알려졌지요. 《영광의 무게》는 조사해 보니 1941년 6월 8일에 세인트메리 교회에서 행한 설교로 교부들의 글에 비견된다는 찬사를 받은 설교의 백미로 이 설교문 외에 8편의 설교와 강연을 묶은 책입니다. 김길구 제목부터 도발적입니다. 《피고석의 하나님》 이 책은 신학적, 윤리적 주제 48편의 에세이 중의 한편을 책 제목으로 했는데. 고대의 피고인이 재판을 받으려면 우리가 재판장에게 가듯 하나님이나 신께 갔는데 지금은 거꾸로 인간이 재판장이 되어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버린 현대인들을 향한 ‘지적 공략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잠언들 김길구 엮은이가 인용한 루이스의 고백처럼 들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여정이며, 나와 가장 가깝기에 내 부족한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입을 사람들이 곧 정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주로 쓰실 교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김현호 이 책 첫 꼭지에서 신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 혹은 선행 때문일까?에 대해 루이스는 이 질문은 가위의 어느 쪽 날이 더 요긴하냐 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어서 그분을 믿으면 선행은 반드시 따른다고 말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빌립보서 말씀으로 양쪽을 묶어 매조집니다. 박영규 C.S.루이스는 하나님의 통치안에 있는 모든 질서를 성속으로 구분짓는 것을 무척 경계합니다. 영어단어 스피리추얼 (Spiritual)을 독일어 단어 가이스트리히(geistlich)처럼 좁은 의미의 “영적”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것을 기독교의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베토벤 같은 작곡가의 일도 파출부의 일도 정확히 똑같은 조건에서만 영적이라는 것이지요. 주께 하듯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재미있는 표현도 사용하는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고 수탉은 울어야 한다.’ 소명에 분업은 있지만 더 영적인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길구 용서에 대하여, ‘우리가 믿거니와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지만 그 용서에는 남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우리도 용서한다는 전제가 달려있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 까먹고 싶어하는 것. 김현호 제2차 세계대전에 출전했던 경험을 가진 루이스는 종교와 전쟁은 유사점이 많다고 지적합니다. 늘 긴장 속의 현장이지만 그곳에서도 인생살이가 존재하는 일상이므로 24시간 군사연습만 할 수 없듯이 24시간 종교적인 일에만 몰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목숨을 버릴만한 의무는 되지만 삶의 목적으로 삼을 정도는 아니며 사람이 조국을 위해 죽을 수는 있으나 배타적 의미로 조국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국가나 정당이나 이념을 위해 한시적으로 헌신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소유인 자신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행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박영규 ‘진정한 용서란 모든 정상이 참작되고도 변명의 여지없이 남아있는 죄를 그 속의 모든 섬뜩함과 더러움과 비열함과 악의까지 똑바로 응시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와 온전히 화해한다는 뜻’ 김현호 재밌는 주제가 있어요. ‘아직 사랑하지 않는데도 사랑하듯 행동하면 위선인가? 자연스런 호감이나 정이 있으면 상대를 사랑하기가 더 쉬워지지요. 그래서 평소에 정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지만 호감 자체가 사랑은 아니지요. 루이스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쓰느라 시간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랑하듯 행동하라. 마치 사랑하듯 행동하면 금새 사랑하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싫어하는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사람이 더 싫어 지지만 친절하게 대하면 어느새 그가 덜 싫어진다는 일반적 법칙을 따라 선과 악은 둘 다 복리로 불어나는 법이니 선과 악 둘 다 날마다 내가 내리는 결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언해 주네요. 김길구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 호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 위기는 예언자 영성이 없어서라며, 이를 회복하려면 예언자의 영성을 수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약학자 차준희 교수의 뜨거운 외침, 《열두 예언자의 영성》 새물결플러스 刊 입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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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영화]한국계 미국 이주민의 삶에서 묻어나는 가족애와 기독교 신앙
    재미교포 감독이 딸에게 들려주는 자전적 이야기 당신은 사랑하는 딸에게 지나간 가족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 소설 <뿌리>(Roots)처럼 연대기적 서술방식으로 아프리카 땅에 거주하던 먼 조상에서 시작해서 노예 시절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가족사를 소상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며 영화로 제작한다면 시리즈물이 될 수밖에 없다. 많은 출연 인원이 필요하고 시대극에 따르는 분장과 세트 등 준비할 것도 많고 무엇보다도 제작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소설이건 영화건 긴 호흡이 필요한 콘텐츠 대하기를 버거워하는 Z세대인 딸아이가 긴 시간 동안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을지도 의문이다. 재미교포인 정이삭 감독은 영리했다. 자신이 살아온 미국 이민자로서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그는 한 시대로 시간을 압축하는 대신에 많은 이야기와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물들을 집어넣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깊이 있는 이야기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이야기를 하든 미국 이민자로서 가족을 향한 사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짜임새를 갖췄다. 따라서 115분의 상영시간은 물 흐르듯 어느새 흘러가고 딸 아이의 가슴 속에는 한국인 이민역사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듣고 보았을 법한 이야기가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영화는 1980년대 미국의 시골이라 할 수 있는 아칸소로 이주해 온 재미교포 가정의 이사하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트레일러에 이삿짐을 가득 싣고 도착한 새로운 보금자리는 평원 위에 세워진 멋진 저택이 아니라 언제든 트럭이 끌고 갈 수 있는 이동주택, 즉 바퀴 달린 집이었다. 도시에서 쓴맛을 본 미국 이민자의 어려운 선택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미국적이며 또한 고단한 한국인 이민자의 삶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도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 농장을 일구며 성공을 꿈꾸는 제이콥(스티븐 연)은 아내 모니카(한예리)와 병아리감별사로 일을 하며 어린 남매를 키우고 있다. 병아리 똥구멍을 통해 암수를 구별하는 병아리감별사는 전문기술이 없는 한국인들이 미국이나 호주로 이민을 떠날 때 선택하는 인기직종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인의 눈썰미가 병아리 감별에 특화되어 있다는 소문은 진실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 우리의 이민역사에 기록된 일이었다. <미나리>는 주인공 가족이 일구는 땅 이야기와 어린 남매를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 온 할머니 순자(윤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이 가족이 겪는 갈등과 사랑을 말하고 있다. 즉 땅과 할머니는 영화적 재미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황해질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압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미국 땅에서 자라나는 한국의 미나리 넓은 땅은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서 갖는 첫인상이다. 손바닥만 한 땅이라고 말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의 너른 땅에 마음껏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는 제이콥에게 닥친 시련은 물(농업용수)을 구하는 문제였다. 그는 미국 농부들이 흔히 하는 수맥 찾기(Dowsing) 방법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쓰는 한국인’답게 직접 우물을 파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만다. 물이 마른 땅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마련이다. 영화의 미학적 표현에서 물(水)은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까닭에 불(火)과 더불어 갈등의 원인인 동시에 해결의 원초적이 방법이기 하다. 성경은 요한복음 4장에서 물질적인 물이 어떻게 영생의 의미로 치환되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깊이 박히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영화예술 속에서도 거듭 반복되는 미학적 표현이다.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는 뇌졸중으로 인해 불편한 몸을 거두지 못하는 바람에 창고에 불을 내고 만다. 제이콥의 야망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가족을 위해서 미국의 촌에까지 와서 농장을 한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도시에서 살 때 같은 동포인 한인에게 받았던 상처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면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내 모니카(한예리)와의 갈등이 내재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렵게 농사짓고 한인 상점에 판로를 개척하는 등의 노력이 잿더미가 되고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의 미학에서 불은 잘못된 것을 태우며 새롭게 만드는 정화(淨化)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경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사6:6-7) 제이콥의 욕심은 불로 인해 사라지고 이제 가족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삶이 망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진정 가족을 위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하는 일이다. 미나리는 원더풀! “미나리는 얼마나 좋은 건데. 미나리는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까 누구든지 다 뽑아먹을 수 있어.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다 뽑아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미나리는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국에도 넣어 먹고. 미나리는 아플 때는 약도 되고. 미나리는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할머니 순자가 딸의 가족을 위해 갖고 온 것은 고춧가루와 멸치만은 아니었다.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개울가에 심었다. 순자는 미나리가 자라나는 것을 보고 어린 손자 데이빗(엘런 김)에게 미나리에 대한 얘기를 들려준다. 당연히 미나리는 미국의 이민자로 살아가는 한인 주인공 가족을 상징한다. 더 나아가서는 미국 사회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한국의 이민자들을 뜻할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본 미국 교포들이 웃고 울며 동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농장에 물이 마르고 창고가 불타버리는 바람에 수확한 농산물이 못쓰게 되어도 물가에 심은 미나리는 쑥쑥 자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콥은 미나리가 풍성히 자라난 광경을 바라보며 아들의 손에 쥐어준다. “혼자서도 잘 자라네. 데이빗, 할머니가 좋은 자리를 찾으셨어. 맛있겠다!” 미나리를 통한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사랑과 한국인의 기질이 손자에게 전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상업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장면에서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창고가 불타고 농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에서 할머니가 남긴 미나리를 팔아 주인공 가족이 이민 생활에서 성공했다는 얘기로 결말을 짓기를 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가 왜 왜 78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비롯하여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미나리를 팔아 부자가 되는 일은 한국의 한 특정인에게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보편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미나리에 담긴 가족(할머니)의 사랑과 민족적 특이성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일은 이민자들의 사회인 미국에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모름지기 상을 받으려는 영화는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가 내재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민자의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미나리>는 기독교인 감독이 만들고 기독교인이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를 가진 일반영화다. 해석에 따라서는 기독교의 가치가 은연중 표현된 영화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선교를 목적을 두고 만든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러 모양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하지만 신앙의 감동을 주는 인물이나, 불신앙자가 신앙인이 되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는 일반적인 기독교 영화와는 다른 까닭이다. 아내 모니카는 집에서 찬송가를 들으며 생활하고 아들이 잠들기 전 기도를 가르치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등장한다. 남편 제이콥은 그다지 신앙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가족을 따라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의 성의를 보인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인 평가를 내릴 때 흥미있게 작용하는 인물은 영화의 앞부분으로부터 끝날 때까지 제이콥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미국인 폴이다. 그는 제이콥과 그의 땅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방언을 하며, 할머니가 뇌졸중을 쓰러진 이후에는 제이콥의 집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주일이면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는 바람에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의 조롱을 받는 장면도 있다.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해석의 초점은 이민자들이 겪는 신앙생활의 현실을 이해하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에 맞추는 일이다. 병아리 감별을 하면서 모니카는 먼저 온 한인으로부터 여기에 온 사람들은 한인교회가 없는 작은 동네로 온 것이라고 이야기를 듣는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은 한국 이민자들의 현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앞에 두고 미지의 땅에서 불안한 삶을 살아갈 때 신앙은 폴과 같은 신비적인 신앙의 면모를 가진 사람을 거절하기 어렵다. 2005년도 조사에 따르면 재미 한국인의 70%는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원래 한국에서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민을 간 경우도 많지만, 미국의 한인교회의 사회적 역할 때문에 적지 않은 이민자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도 한다. 이것조차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은혜일 수 있다. 한국에서 건너 간 미국 이민자들의 낯설고 고단한 삶과 신앙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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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영화] 그리스도인 가정의 폭력과 내밀한 상처의 공개
    보고싶지 않은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 이승원 감독의 독립영화 <세자매>를 보면 대한민국이 영화를 잘 만드는 나라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세 자매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개성있는 여성 연기자들을 보유하고 있고, 저예산의 독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6일 만에 5만 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을 만큼 다양한 영화를 소비하는 훌륭한 관객들도 있다. 코로나의 어려움 가운데서 일군 성과라서 그 가치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스케일이 큰 대형상업영화가 아닌 소소한 일상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며 삶의 성찰에 이르게 하는 작은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고 상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점은 높이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영화가 오락적 가치만을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세자매>는 가족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폭력 아래서 성장한 성인이 겪어야 하는 트라우마가 일상생활 가운데 묘사되는 영화라서 끝까지 앉아서 보는 일 자체가 감독이나 배우의 뛰어난 역량 없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고통의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지 않는다면 관객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으로 가득 찬 영화를 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는 수고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영화 <세 자매>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각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세 여성에 대한 개별적 이야기의 조합으로 보이지만, 결말에 가서 문제의 근원이 된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공통된 과거의 기억을 복원한다는 점에서 관객이 끝까지 볼 수밖에 없는 영리한 구성방식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은 세 자매가 각각 겪는 현실을 통해 나타난다. 첫째 희숙(김선영)은 고스족 차림의 기괴한 스타일에 몰입한 채 자신을 무시하고 반항적인 태도를 지닌 딸아이와 살고 있다. 남편은 가끔씩 나타나 돈만 뜯어 가는 채권자 같은 존재로서 영화에는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할 뿐이다. 암진단을 받았지만 자기의 잘못인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채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갈 뿐이다. 둘째 미연(문소리)은 교수 남편을 두고 있고 본인은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겉으로는 가장 번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이지만 남편이 같은 교회, 그것도 본인이 지휘하는 성가대 솔리스트인 여대생과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뒤로는 더욱 자신의 속마음과 감정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단속하느라 심한 내적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셋째, 미옥(장윤주)은 대학로 연극 작가로 활동하며 재혼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지만 집필 작업이나 가정일 모두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술에 찌들어 살고 있다. 주변 사람들과 걸핏하면 시비가 붙고 아내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는 삶을 술에 의지해서 살아갈 뿐이다. 이 세 자매가 보여주는 일상은 관객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인물과 사건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따라가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진짜 해서도 안 되고 당해서도 안 되는 부정적 경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지켜보는 절묘한 타이밍 영화 <세자매>와 정인이 사건이 교차하게 된 시점은 참으로 절묘하다.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이를 가혹하게 학대해 숨지게 한 사건을 관객들은 기억하면서 영화를 봐야 했으니 말이다. 특히 정인이의 양부모가 모두 기독교인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개신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노골화되고 있는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관 밖의 현실과 영화 속 장면들이 허구가 아닌 사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유명 기독교 대학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양부의 직업 또한 기독교방송국 직원인데다 정인이의 조부와 외조부 모두가 교회 목사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기독교인이 일으킨 반사회적 행동에 세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랑을 말하는 기독교인이 남도 아닌 자식에게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는 사회적 분노가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확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세 자매는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위해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마을에 들어선다.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옛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고통받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어머니를 때리고 밖에서 바람피워 데려온 큰 언니와 막내 남동생에 대한 매질이 유난히 심했던 아버지는 지금 교회의 장로가 되어 있었다. 영화는 과거의 전형적인 가부장주의적인 문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기독교인 가정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영화에서 교회와 기독교 신앙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 또한 부조리함을 나타냄으로써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폄훼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어린 시절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내복 바람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동네 가게로 피신하고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에게 경찰에 신고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술 마시던 남자 손님으로부터 ‘아저씨가 쭈주바 사줄테니 그거 먹고 아버지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라’는 말을 들은 게 전부였다. 자녀에 대한 아버지의 학대가 용인되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미래는 눈곱만치도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이 성장 후에도 고통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는 현실을 세밀히 묘사한 점과 그것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사과와 용서 없이는 치유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낸 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도록 나타나지 않던 막내아들은 끝 장면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존재를 크게 부각시키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버지의 생일잔치 때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의 곪은 상처가 결국 터지고 마는 것이다. 목사님이 초청되고 좋은 음식이 배열된 잔치 자리에서 막내아들은 아버지가 앉아 있는 식탁 위로 오줌을 싸는 바람에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이쯤 되면 장로인 아버지는 문제의 심각성도 깨닫고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법도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목사를 초청한 자리에서 자식에게 망신당하고 체면이 구겼다는 당황한 표정만이 역력할 뿐이다. 이제 이 영화의 명대사이자 성경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평가할 만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이어진다. 첫째 희숙의 골칫거리 딸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 “왜 어른들은 사과할 줄 모르는 거에요! 사과하세요!” <세자매>는 기독교 영화가 될 뻔했다 어떤 영화들은 순간의 묘사만 잘했더라면 기독교 명작으로 남을 뻔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세자매>가 그렇다. 마지막 결정적 장면에서 성경적 관점이 드러난다면 이전의 모든 장면들은 새롭게 해석되는 가운데 기독교 영화라는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다. <세자매>에서 장로인 아버지는 사과하라는 외손녀의 말을 듣고 세 딸과 막내아들 앞에서 그동안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배움이 적고 신앙이 모자라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선물인 자식들을 때린 것에 대해 눈물로 회개했다면 이 영화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담임목사가 지켜보고 있는 자리에서 생일잔치가 난장판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체면이 구겼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면 너무 교화적이란 평가를 받았을까? 어차피 <세자매>를 끌고 가는 힘의 중심에는 둘째 미연(문소리)이 있으며 영화는 미연의 신앙생활을 세밀히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로서의 사회적인 생활에서부터 가정 일상사에서도 신앙의 권위를 결코 잃지 않는 모습은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하는 자녀에게 훈계하는 모습은 신앙의 권위를 내세운 폭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밥상머리에서 신앙교육을 시키는 가정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 십일조 봉투를 챙기며 남편이 받은 특강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꼭 남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여자로 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과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보다는 조용히 압박을 주어 일을 해결하려는 모습은 냉정한 태도일 뿐 위선적이라 말하기 어렵다. 다만 철야 기도회 자리에서 남편과 바람 핀 성가대원을 이불을 씌우고 발로 지긋이 밟는 행위는 부드러운 언행과 불일치를 이루며 이중적이란 평가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인의 이중적 행태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이라는 전제가 깔린다면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자매>는 둘째 미연의 집들이 예배 상황과 아버지의 생일축하연을 영화의 앞과 뒤에 배치함으로써 기독교인이지만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둘째 딸에게서도 학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난장판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생일파티에서 참고 참았던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쏟아내던 둘째 미연에게 셋째 미옥은 “언니 눈에서 아버지가 보인다”고 말한 것은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신앙인의 이중적인 태도가 자식에게까지 되물림 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남편의 내연녀를 대하는 미연의 모습은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보았을 때 결국 이 영화의 주제가 성경적 가치를 품고 있는 가의 여부가 이 영화의 성경적 가치를 판단하는데 핵심이 될 수 있다. 장로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용서를 비는 대신 유리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피를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에 가까운 행동일 수 있다. <세자매>는 단편적이나마 신앙인의 가정과 교회의 모습을 조명한다. 기독교 신앙인과 교회의 허물을 보여주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사실이 또한 그러하니 말이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방법은 달라야 한다. 단지 세 자매의 연대와 끈끈한 가족애가 문제해결 방법이 될수는 없다. 그것은 전형적인 휴머니즘 가족 드라마의 결말일 뿐이다. 기독교 영화의 상징적 특징은 완벽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사랑 안에서 회개와 용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아버지가 세 자매에게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가족의 연합을 도모했다면 우리는 훌륭한 기독교 영화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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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기독교인문학] 인체로 본 유기체로서의 교회
    폴 브랜드, 필립얀시 《몸이라는 선물》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의와 한몸의 의미- 이 책은 지난 30여 년간 사랑받았던 저명한 의사 폴 브랜드와 필립얀시가 쓴 Fearfully and Wounderfully Made(심히 기묘하게 지음받은)와 속편 In His Image(그의 형상을 따라) 두 권의 내용을 압축 합본하고, 그동안 발전한 의학과 과학의 정보를 반영하여 ‘몸이라는 선물’ 제목으로 재 단장한 책이다. 2003년에 타계한 폴 브랜드 박사의 생전의 육성 녹음분을 토대로 함께 만들었다. 시편 139편 13~14절의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는 말씀과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라는 관점에서 우리 몸의 영적 의미를 찾고 있다. 저자와 함께 인체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다 보면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산다는 일상의 경의로움에 압도하게 된다. ◇저자소개 폴 브랜드∥1914~2003년 인도에서 선교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영국에서 의학을 전공한 뒤 인도와 미국을 오가며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했다. 특히 혁신적인 한센병 치료술로 수 많은 환자들에게 새 삶을 열어주고, 재활로 사회로의 복귀를 도왔다. 《Clinical Mechanics of the Hand》(손의 임상역학)이라는 책은 지금도 손수술 분야의 고전으로 불린다. 이책 외에 필립 얀 시와 함깨 한 작품으로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 《하나님의 영원한 잔치》 등이 있다. 필립 얀시∥ 1949~ 휘튼칼리지와 시카고대학교에서 영어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에 천착해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셨습니까?》,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등 우리에게는 친숙한 저명한 작가이다. 두란노 간 / 2020. 12.16. / 23,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 폴 브랜드 / 비아토르 《그들이 나를 살렸네》 필립얀시 / 포이에마 기독교인문학 〈18〉 인체로 본 유기체로서의 교회 ▌좌담: 김길구 전 부산YMCA 사무총장, 김현호 기쁨의집 대표, 김형기 팔복교회 목사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그릇 “내 환자들은 단지 힘줄과 근육과 모낭과 신경세포와 피부세포의 총합이 아니다. 아무리 외형이 일그러지고 몸에 상처를 입었어도 저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품은 그릇이다. 신앙에 말을, 말에 신앙을 입히다 김길구 읽는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두권을 합권한 책이라서 그런지 430여쪽의 두꺼운 책인데 다행히 글이 커서 시원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팀 켈러의 《죽음에 관하여》로 번역상을 받은 바 있는 전문 번역가 윤종석씨의 작품입니다. 그럼 이 책의 특징에 대해서 말해볼까요? 저자가 둘인데‥ 김현호 우선 나이 35살이나 차이가 나요. 그리고 이 책은 한센병의 권위자인 폴 브랜드 박사 사후에 출간되었어요. 의학인과 작가의 만남, 그렇게 보면 특이한 조합이네요. 김형기 그리고 한번 출간되었던 두 권의 책을 합본 형식으로 묶고, 그동안의 의학적 발전을 반영하여 내용의 일부를 수정 · 보완하고 책의 제목도 바꾸어 출간했으니 흔한 일은 아니네요. 저명한 언론인 필립 얀시가 이 책에 얼마나 애착을 갖고 있는지 알 것 같아요. 김길구 책도 그렇지만 필립 얀시가 느끼는 폴 브랜브 박사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한 것 같아요. 서문에 적힌 그의 표현이 이래요. 하나님께서 ‘너는 최악의 교회들을 여럿 보았으니 이제 내가 최선의 모습을 하나 보여주마’라고 ‘떠미신 것 같았다’는 표현과 둘의 작업을 빗대 필립 얀시가 폴 브랜드 박사의 ‘신앙에 말을 입혀 준 대신, 폴 브랜드는 필립 얀시의 말에 신앙을 입혀’주었다는 표현을 보면 요즘 말로 하면 둘의 ‘캐미’가 솔솔해요. 사람들로 인해 실망으로 믿음에 회의가 들때 제대로 된 멘토를 만난거예요. 김현호 인도선교사의 아들로 정형욋과 박사인 폴 브랜드는 한센병 전문가였고 감각을 잃은 신경세포로 인해 몸의 통각을 잃은 이들을 위해 선구적인 연구로 한센병뿐 아니라 당뇨병 환자들의 다리 절단을 막은 탁월한 치료법 개발로 해마다 수만 명의 환자들을 구한 명의이지요. 이 공로로 영국의 훈장도 받았습니다. 김형기 이 책의 구성도 이러한 폴 박사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몸에 새겨진 복음의 경이로움과 한 몸의 의미를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라는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어요. 인체에 대한 신비로운 ‘깨알지식’과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신앙적 단상이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를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 예로 손바닥으로 귀를 댔을 때 들려오는 소리가 무엇인지 모를 때와 이 책을 통해 우리 머릿속 모세혈관에서 혈구가 흐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난 뒤의 우리 몸에 대한 이해와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요? 「콰시모도」 콤플렉스 김길구 본문에 콰시모도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는데 달라진 얼굴로 달라진 삶이랄까? 1967년 영국 두 의사가 살인, 매매춘, 강간 등 중죄를 지은 재소자 11,000명을 상대로 한 연구결과를 인용했는데 몸의 기형이 정서적 고통을 낳아 범죄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김형기 콰시모도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으로 재소자 중 얼굴이 기형인 사람과 그렇치 않은 사람을 비교해 봤더니 기형인 사람이 60%를 차지하여 범죄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는 통계입니다. 이를 근거로 두 연구자는 재소자들의 성형을 제안하기도 했지요. 김현호 우리나라가 외모에 대한 관심이 유독 높은데,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있는 우리가 외모의 아름다움을 선으로, 외모의 추함을 곧 악과 동일시하지는 않는지 성찰해 봐야겠네요. 이 책은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이 우리의 신체적 자아상에 가려 있지 않은지를 묻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데도 이 땅에 사셨는데, 그 경험 덕분에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지 않을까요? 한 몸이라는 선물 김길구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무수한 혈관과 신경세포를 통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인체가 어떻게 하나의 유기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김현호 몸이 전체를 위해 어떻게 수많은 세포를 연합시키는지를 의학계에서는 ‘생체의 향상성’으로 설명하는데. 월터 캐논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몸이란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태를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세포는 끊임없이 요구사항을 알리고 몸은 일일이 반응해서 건강한 내부환경을 유지한다는 것이죠. 김형기 인체의 소속감도 이중으로 이루어지죠. 각 세포는 뇌의 지시를 따를 뿐 아니라 체내에 있는 다른 모든 세포와도 결속되어 있듯이 영적인 몸도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몸에 소속되어 있을뿐 아니라 그 몸이 우리를 다른 다양한 세포와 결속시키듯이 “범사에 그에게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로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저자들의 ‘작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한센병이 무서운 것은 병균이 신체 부위를 파먹는 세균처럼 퍼져서가 아니라 딱 한 종류의 신경세포만을 공격하여 통증을 못느끼게 해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설명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김현호 저자는 시종일관 인간의 몸에는 매혹적인 신비가 있다는 것, 피부의 복원력, 뼈의 힘과 구조, 근육의 역학적 귲형을 볼 때 몸의 각 기능이 저마다 쓰임새에 맞게 신비하게 빚어졌다는 생명에 대한 환희와 감탄입니다. 김형기 우리 몸에서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다양한 세포 가운데 전체 몸을 닮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영적인 몸인 교회도 실망스럽게 그럴 듯 하지 않은 인체의 세포만큼이나 잡다한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공동체든 연합의 기초는 유사성이 아닌 다양성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역시 사랑이지요. 다름에서 오는 깊음과 풍성함을 이루는 것은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 곧 사랑입니다. ‘통증’이라는 선물 김길구 지면 관계상 다 다룰 수는 없고 후반부로 들어가죠. 제5부 고통이 들려주는 고마운 신호들의 부제가 –통증이라는 선물인데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선물이라? 무슨 사연일까요. 김형기 폴 브랜드 일화 중에 하나인데요. 영국에 출장을 가서 여러 지방을 돌며 업무를 본 뒤 런던에 도착하여 숙소인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 양말을 벗는데 갑자기 발뒤꿈치에 감각이 없더랍니다. 직업이 한센병 환우들과 함께하는 일인지라 혹시나 하고 감염여부를 확인하러 핀으로 복숭아뼈 아래를 찔러 보았더니 아무런 감각이 없어 더 깊이 찔러보니 피는 나는데 감각이 없더랍니다. 감염된 것이 확신한 그는 잠 한숨 못자고 뜬눈으로 날을 지새우며 절망하다 아침에 핀으로 확인하니 통증으로 아파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답니다. 통증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장 헌신적으로 우리의 건강을 지켜 주는 감각인 셈이죠. 김현호 이 책에서 두 사람은 갈라지고 찟기고 상한 이 시대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 몸의 지체들이라면 고난과 빈곤으로 한센병 환우들처럼 연약하고 이들을 품고 치유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그 모델은 나사렛 출신 예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빛과 소금으로서 폴 브랜드 박사처럼 시대의 치유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김길구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신비로운 인체여행을 통해 우리 몸의 영적 의미를 되새겨 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호는 C.S루이스의 전작 중에서 엄선한 《신자의 자리로》를 읽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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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문학
    2021-01-20
  • 이광천 장로 '대표기도 이렇게 해봅시다' 출간
    CBS의 <1분 묵상>의 저자, 이광천 장로가 오랜만에 내놓은 『대표기도 이렇게 해봅시다』는 한국교회 대표기도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대표기도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거쳐 총회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CBS 기독교방송 PD로 활동하면서 기도집 『함께 드리는 기도』, 『새벽의 기도』 등을 펴낸 이광천 장로는 “교회의 강단에서 주일마다 올려지는 기도가 과감히 교회의 담장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대표기도문을 집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1부 <기도,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대표기도에 대한 말씀을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대표기도를 잘할 수 있을까’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2부와 3부에서는 <교회 절기 및 특별예배> 그리고 <52주 주일예배>에서 실제로 적용해 볼 수 있는 모범적인 대표기도문을 실었다. 또한 4부에서는 여러교회 장로님과 권사님들의 실제 대표기도문을 수록하여 현장감을 더하고 있다. 모두가 아는 대로 기도란 어려운 일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듵도 예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었다. 특히 시무장로가 주일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는 일은 신앙생활 중에서 매우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저자 이광천 장로는 1970년 5월 CBS 방송 PD로 입사, 이후 CBS 제작부장, 편성부국장, CBS 청주방송 본부장, 중앙국 심의실장, CBS 부산방송 본부장, CBS 중앙국 비전21세기 국장을 역임하고 정년 퇴임했다. 학력은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정외과, 동아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총회신학교를 수학했다. 문단 활동은 1983년 ≪월간문학≫에 수필 「너의 이름은 풀꽃」으로 등단하여 수필집 『바람에 날아간 소리』, 중편소설 『새들은 울기 시작했다』, 수필집 『여기 한 길이 있다』, 산문집 『내 삶을 빛내는 지혜의 샘』, 『이광천의 교회사 집필 이야기』, 기도집 『함께 드리는 기도』, 방송 에세이 『나의 인생 나의 노래 라디오 PD 이야기』 등을 출간하였다. 교회사는 『CBS 50년사』 『서울 온무리교회 100년사』 『서울 남현교회 50년사』 『큰은혜교회 50년사』 『부산 은성교회 50년사』 『봉화 제일교회 100년사』 『울산 대흥교회 50년사』 등 17개 교회의 교회사를 집필하였다. 최근에는 창과현에서 전자책 『내 삶을 빛내는 행복잠언 3000』(1권~7권), 『매일 드리는 기도 365일』(1~2)권을 발행하였다. 서울 경천교회 장로(예장통합), 수필문학회 이사, 장로문인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 문화
    • 도서
    2021-01-11
  • [영화] 갈릴리 혼인풍습에 담긴 예수 재림의 메시지
    CBS CINEMA가 보낸 위로의 선물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영화계가 고사 위기 직전까지 갔던 2020년도에도 기독교영화계는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김상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 그 증거>는 지난 12월 말 현재 2만9천3백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다. 일반 영화의 극장 관객 수가 20년 전으로 후퇴한 상황 속에서도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3만 명 가까운 스코어를 기록한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로 인해 예배당 출입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은 부활신앙을 조명했던 이 영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을 촉발시켰다고 보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던 카타콤(catacomb)의 생생한 영상은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삶이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전해지면서 큰 도전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 배급도 하는 ‘CBS CINEMA’의 역할이 컸던 한 해였다. 6월에는 미국의 유명 CCM 밴드인 ‘머시미(Mercy Me)’ 리드 보컬 바트 밀라드 (Bart Millard)의 인생과 노래를 보여준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재개봉한 데 이어서 11월에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감동을 주는 가족영화 <아이 빌리브>를 극장에 걸었고,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의 의미를 가르친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의 극장상영에도 성공했다. 비록 수입영화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란 점에서 2020년 기독교영화계가 암흑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 가운데서도 브랜트 밀러 주니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Before the Wrath, 2020)을 유튜브를 통해 일정 기간 무료로 공개한 일은 기독교 문화선교의 시대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관까지 직접 찾아가기 쉽지 않은 코로나19의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수입하거나 제작하는 입장에서 돈이 들어간 영화를 무료공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를 돈을 버는 통로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역자 정신은 하나님 말씀이 필요하고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실한 시기에 기독교 영화를 과감히 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특히 웹2.0의 시대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도 현대의 문화 흐름에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웹2.0의 정신은 참여, 공유, 개방에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만이 붙잡고 내놓지 않는다면 쌍방형 소통의 가치가 중요한 디지털 문화에 어울린다고 볼 수 없다. 아울러 무료공개의 시점이 크리스마스 전후 기간이란 점도 매우 의미가 있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가 ‘고요한 밤’이 되어버린 성탄절에 맞추어 문화선교단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을 제공한 까닭이다. 2020년 11월 26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극장에서 1만3천 명이 넘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전방위적인 사역이 필요한 시기임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풍습에 담긴 그리스도 재림 다큐멘터리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해와 각성을 촉진 시킨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1:11)는 성경의 말씀처럼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재림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였고, 그 이후로부터도 여전히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중요한 축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인의 신앙에서 재림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시한부 종말론과 같은 이단의 교설만이 재림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1992년 다미선교회는 그해 10월 28일에 휴거(携擧) 현상이 나타나고 1999년에는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여 파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이단이 퍼뜨린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회에 끼친 그 후유증은 대단히 심각했다. 교회에서 종말론에 대한 설교는 자취를 감췄다. 기독교인은 분명 세상의 종말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하지만 성경의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종말에 대한 설교를 듣기 어려운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영화 <가나의 혼인잔치:언약>은 종말에 나타날 현상으로 예수님의 재림과 휴거에 대한 이해를 성경에 나타난 갈릴리지방의 혼인풍습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지금까지의 관심으로부터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접근과 해석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으로부터 착안하여 갈릴리지방에서 있었던 독특한 혼인풍습 속에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의 실마리를 심어놓았다고 얘기한다. 즉 예수님께서 왜 세상에 다시 오시는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휴거와 재림의 때에 대한 비밀 등을 이해하려면 갈릴리지방에서 행해진 혼인풍습을 먼저 아는 것이 우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된 갈릴리 혼인풍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미 초림하셨던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왜 재림하시는지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부분이다. 갈릴리의 혼인풍습은 신랑과 신부 사이의 결혼에 대한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영화는 이를 드라마 형식으로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신부의 마을 어귀에서 증인들이 보는 앞에 혼인 서약서를 읽고 선포하는 일이며, 신랑이 주는 포도주를 신부가 받을 때 비로소 결혼에 대한 신부의 승낙이 이루어지는 일 등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갈릴리의 결혼 풍습이었다. 특히 약혼과 결혼 사이에 적지 않은 시간의 간격이 있으며 약혼기간 동안 신랑은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준비한다는 사실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14:2) 하는 말씀이 상응하는 대목이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에 대해서 아는 것과 같이 영화는 신랑이 약혼을 끝내고 신부를 데리러 오는 날의 결정이 오직 신랑의 아버지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신랑의 아버지가 아들 신랑에게 신부를 데려올 때가 되었음을 얘기하면 신랑은 곧장 나팔을 들고 밖으로 나가 마을 전체를 깨운다. 즉 결혼식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날 새벽이나 자정에 시작되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는 성경 말씀은 정확히 갈릴리의 혼인풍습과 일치한다. 셋째는 휴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갈릴리 결혼 풍습에 있음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신랑이 나팔을 불어 동네를 깨우면 친구와 하객들 가운데 준비된 자들만이 일어나 마을을 빙빙돌며 신부의 집에 들어갈 채비를 하게 된다. 신부와 또한 준비된 들러리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오고 신랑은 신부와 드디어 재회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신부는 그저 신랑을 따라서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가 내려놓은 가마에 올라타 들린 채로 신랑의 집으로 가게 된다. 갈릴리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신부가 공중에 들려 아버지 집에 간다고 표현함을 영화는 밝히고 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는 말씀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장면이 갈릴릴 결혼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새해에 가장 먼저 볼 영화 미국에서 성경적 시각으로 영화를 평가하는 사이트 ‘Dove.org’는 이 영화를 목회자와 교사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꼭 봐야 할 영화로 추천했다.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이 영화를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기독교 영화를 촌각을 다투며 시급히 볼 것을 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가나의 혼인잔치:언약>라면 서둘러 봐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 재림에 대해서 이토록 설득력 있는 해석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는 가운데서 신부 된 기독교인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함을 배우는 일 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신앙교육은 단순히 정보의 축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신앙적인 행동에 이르도록 만든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의 비유’(마25:1-13)에서처럼 슬기로운 자들로 살아가도록 영화는 관객의 마음을 부추긴다. 혹시 종말과 재림에 대해 가르치기를 두려워하는 교회 설교자나 교사가 있다면 이 영화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비록 고고학자의 발굴 장면에서 사실성이 좀 떨어지고 예산의 한계 때문에 유명 배우를 캐스팅하지는 못했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모든 부족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느슨해졌던 믿음의 끈을 단단히 매고 새해를 시작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첫 번째로 봐야 하는 영화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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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7
  • [기독교인문학]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성취되어야…
    김형석의 《기독교,(아직)희망이 있는가?》 - 한국교회의 희망찾기 - 올해로 100수를 누리고 있는 노철학자는 한국의 기독교가 처한 오늘의 위기사항을 잘 극복하여 100년 후에도 희망을 주는 기독교가 되기 위한 해법을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진단에 의하면 지금의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한데서 찾는다. 그 원인으로 성직자의 권위주의와 교회주의, 그리고 교권주의를 극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기독교는 진리와 사랑의 종교이니 이성의 합리성으로 교리주의나 맹목적인 신앙을 극복하고 사랑의 실천을 통한 정서적 윤리성을 강조한다. 60~70년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국민을 위로한 바 있는 노철학자는 한국교회가 사랑의 회복을 통하여 회의에 빠져 동력 을 잃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며 희망을 얘기한다. ◇저자소개 김형석∥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났으니 꿈의 100수를 누리고 인간의 한계수명에 도전하고 있는 저자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시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의 연구교수를 역임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은 노철학자이다. 60~70년대 철학에세이로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기억되고 있는 저자는 《백년을 살다보니》로 장수시대의 롤모델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기독교 관련 저술과 강연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서는 《고독이라는 병》, 《영혼과 사랑의 대화》, 《예수》,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등 여러 권이 있다. 두란노 간 / 2020. 10.14. / 12,000원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우리는 교회인가?》 배덕만 지음/대장간 발행 《행동하는 기독교》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IVP 《왜 교회일까?》 김기승 지음/샘솟는기쁨 기독교인문학 〈21〉 하나나나라는 기독교보다 더 넓은 세계에서 성취되어야… 기독교, 진리와 사랑의 종교 “기독교는 처음부터 진리와 사랑의 종교로 출발했다. 진리는 이성의 합리성을, 사랑은 정서적 윤리성을 포함한다.” 김길구 이번 호는 송년특집입니다. 올 한해는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여파로 국내외가 직면한 전방위적인 위기와 대선을 앞둔 국내의 극심한 분열 상황 등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소회가 어떠신지?. 김현호 교회절기를 보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대림절 기간인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교회를 못가는 지금의 현실이 말해주듯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한 해였습니다. 김형기 우리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도, 가서도 안 되는 새로운 기준, 뉴노멀(New normal)을 강요당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뉴노멀의 시대, 스스로 달라져야 김길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제목이 자극적인데요.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저자는 왜 ‘(아직)’이란 표현을 하였을까요? 긍정보다는 부정에 방점을 두지 않았나 생각하는데요? 김현호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저자는 ‘종교인, 크리스천이 더 많아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양심적인 지성인이 더 늘기를 원하는가?’를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단언하며, 우리나라의 초창기 기독교는 그렇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100년 후에도 희망이 되는 기독교를 위하여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백수를 앞둔 노교수는 지금이 위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형기 저는 위기임에는 분명한데 여러 면에서 볼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합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이 위기를 잘 극복하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봐요. 일부 매스컴에 나타난 부정적 이미지는 극히 일부이고 그래도 우리교계의 다수는 아직 건강하다고 믿고 싶어요. 이 책의 지향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김길구 우리나라 기독교의 약진은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짧은 기간동안 최대 종교로 부상했습니다. 이 시점이 불과 얼마 되지 않은데 벌써 위기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민족은 외래종교를 잘 받아들이는 심성이 있는 것 같아요. 김현호 불교, 유교, 조선말기, 천도교 등 민족종교가 잠시 등장하더니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지요. 이것도 다른 나라에는 흔한 큰 종교전쟁이나 갈등 없이…그 밑바탕에는 무속신앙이 자리잡고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김형기 주로 정치적 고려에 의하여 전략적으로 어느 종교든지 상황에 따라 잘 받아들였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버리기도 잘할 수 있다는 뜻이니 현재에 자만해 내부 갱신을 소홀히 하면 안 되겠지요? 기독교의 세상화가 아닌 세상의 그리스도화로 김길구 노철학자는 기독교가 교회에 머물면서 그들만의 교회의 의식이나 제도에 갇혀서 교회주의와 교리주의에 빠진다면 안식일 논쟁처럼 복음의 역동성을 잃어버린다고 우려하면서 복음의 인간성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김형기 제도화된 교회는 어느 정도 질서를 위한 제도나 교리를 필요로 하지요. 그렇지 않을 경우 부작용이 더 크겠죠. 그렇다고 교회와 교리란 말 뒤에 주의가 붙어서는 안 되지요. 본말이 뒤바뀌니까요. 본래의 의미를 되찾자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어요. 김현호 저자는 철학자답게 세속화가 아닌 ‘인간화’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교회주의를 걱정하는 것은 교회를 떠나자는 뜻이 아닌 교회의 존재 목적을 높여서 세계와 인류에 희망을 주자는 의미로 쓰고 있어요. 김길구 기독교의 사회참여 및 역사참여를 주장하면서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속화’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어요. 적절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김형기 예수는 세례요한이 속했던 탈사회, 탈현실종교운동을 주장한 에세네파운동을 반대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그들과 함께 머물지도 않았지요. 최근의 극단적인 종교의 정치 관여는 그런 의미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김현호 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근본정신은 인간애와 인간 목적관 - 즉 인간이 정치나 경제적 목적에 이용되는 수단이 아닌 – 에 근거하여 인권을 존중하며, 생명과 개성 및 인격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적 경제관의 중견층이 부의 양극화 막아 김길구 본문 내용 중에 영국과 프랑스 혁명의 예를 들고 있어요. 부의 양극화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는 이때 한 번쯤 생각해 봐야할 주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또 하나는 우리사회의 첨예화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시각도 눈길을 끄는데? 김현호 교수님의 시각은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한 나무에서 자란 두 줄기와 같고, 한국의 진보는 좌익적인 뿌리에 기반을 든 반면 보수는 우파에서 성장하여 근본적으로 밑동과 뿌리가 다른 연유에서 찾았는데요, 제 생각에는 해방 이후 국제역학관계에 따른 이해관계와 한국전쟁, 그리고 친일청산 등 더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있어 단순화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흑백논리와 자기절대화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방식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한 열린사회로 나아야 한다는 원로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형기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의 예를 드셨는데 저자는 둘 다 역사가들이 위대한 혁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지만 영국은 프랑스에 비해 더 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런 비극을 극복할 수 있었던데 반해 프랑스의 경우는 결과적으로 개인의 차원에서 너무 비참한 혁명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들을 가른 요인 중에 하나가 프랑스는 기득권과 피지배층의 양극화가 심했던 반면, 영국은 중산층과 두터운 중견층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사이의 완충 역할을 했는데 감리교 등의 종교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죠. 우리도 건전한 크리스천 중견층들이 많아져 섬김과 나눔으로 극한의 대립을 극복하는 완충 역할을 하여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이겨내야 합니다. 김길구 이 책을 읽으면서 시종드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자랑하는 교회의 위대한 유산, 이를테면 당시에 소외됐던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는 작은이들과 어린이와 여성, 심지어 오네시모처럼 노예들과 천민 백정과 함께 떡을 떼던 아름다운 유산을 현재 우리교회가 지금 이 순간에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는가? 교회개혁의 불씨인 교권주의에 대응하여 평신도운동이 개교회에서 만개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지요. 기존의 기득권을 내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 또 하나의 기득권들이 교회의 울타리에서 교권주의와 교회주의로 그들만의 천국을 유지하려든다면 그야말로 ‘복음’의 역동성은 사라지고 노철학가의 우려처럼 100년 후의 기독교 존속은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 의문이 듭니다. 김형기 교회가 인간 중심이 되면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본래 사명을 다하기 어려워집니다. 우리 기독교가 100년 후에도 여전히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기독교는 교회보다 더 큰 틀에서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야 합니다. 김현호 김형석교수는 참된 크리스천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합리성, 진실성, 개방성 등이죠. 기독교가 인류에게 영원히 희망이 될 수 있는 길은 ‘사랑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열린사회로 김길구 “하늘나라의 현관에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들어선다. 그리고 정의의 현관을 통해 들어서는 곳은 사랑의 집이다”는 대목이 가슴에 와닿네요. 여러분이 선택한 글은? 김현호 저는 이 대목을 뽑았어요. “어떤 명목으로도 인간이 행복해질 권리와 자유를 향한 노력이 제약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노력하는 역사적 사명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게 본다면 크리스천은 진보와 보수의 벽을 넘어 하늘나라를 꿈꾸는 열린사회로 나아가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김형기 “양심과 신앙이 충돌을 일으킨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기준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신앙이 인간애를 통해 양심과 도덕을 더 높일 수 있다면 신앙은 현대사회에서도 희망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다.” 김길구 장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백신의 보급과 치료제의 개발로 끝이 보이는 듯하던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세계가 격찬했던 K-방역이 한계를 보이며 3단계 발령을 눈앞에 둔 어려운 시점입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올 한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감사합니다. 【 정리 : 김길구 】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0-12-28
  • [영화] 방사능의 미래를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 과학자
    위인전을 다루는 영화의 방식 어느 사회에서나 위인전은 두 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교육적 성격을 고려하여 사회의 모범이 되고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무흠한 인물을 위인전에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전기작가는 편집과정에서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업적 위주로 기술한 결과 문제는 없고 위대함만을 부각하여 인물을 재창조하는 셈이다. 위인전의 또 하나의 특징은 위인전을 펴낸 사회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반공이 사회의 중요한 구호로 등장할 때는 6.25의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한국에서 펴낸 세계의 위인전집에 올랐는가 하면, 수출증대에 나라의 모든 것을 걸었을 때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아동을 위한 위인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화도 위인을 다루는 방식이 책과 다르지 않다. 21세기에 퀴리 부인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면 과학의 가치와 여성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육적이며 시대적인 상황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영화로서 관객을 모아야 하고 책과 경쟁해야 하는 구도가 명확해지면 영화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장르(genre)의 특성을 갖는 일이다. 장르란 일종의 영화의 분류법으로 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에 따라 영화들을 묶어 영화의 특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역사적 위인들의 생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이해되며 주인공이 경험하는 사건을 다루는 가운데 인물의 성격을 조명하는 방식을 취하곤 한다. 이 과정에서 장르영화는 ‘반복과 변형’이라는 특유의 전개방식을 보여준다. 즉 관객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위인에 대한 내용을 영화는 ‘반복’한다. 이것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순신 장군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임진왜란의 용맹스럽고 왜군을 물리치는 호쾌한 승전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상업영화는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있는 것만을 묘사하는 영화는 새로울 게 없다는 판정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장르 영화는 ‘변형’이라는 전개방식을 따른다. ‘변형’은 관객이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다룸으로써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방식이다. 관객은 뻔할 것 같은 영화로부터 새롭게 기대감을 갖게 되며 앞으로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을 머금은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링컨>(2012)은 장르영화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위대한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에 대한 관객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스크린에 반복하여 펼치지만 똑같지는 않다. 스필버그는 링컨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어떤 야망도 갖고 있지 않은 고결한 위인이라는 동화책에 나올 법한 이미지는 여지없이 깨뜨린다. 링컨은 의회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시키는 수정헌법 13조가 통과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반대편인 남부연합 대표들이 워싱턴에 들어오는 여정을 지연시키고, 심지어 자신의 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생각인 야당 의원에게 관직을 제공하는 댓가로 찬성표를 얻어낸다. 다시 말하면 술수를 부리고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셈이다. 분명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형’된 링컨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폐지와 같은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링컨의 행동이었음을 관객들은 깨달으며 링컨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극장을 나서게 되는 것이다. 책으로는 알지 못했던 마리 퀴리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또 다른 위인 ‘마리 퀴리(Marie Skłodowska-Curie)’는 어떨까? 흔히 ‘퀴리 부인’으로 우리의 귀에 익숙하고 라듐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여성 과학자가 우리가 기억하는 위인전의 내용이지만, 그녀가 남성 중심의 학계에서 여성으로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으로 남자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란 출신의 여성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 감독의 <마리 퀴리>(Radioactive, 2019)는 위인전이 미처 언급하지 못한 퀴리 부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고 있는 영화를 연출함으로써 ‘반복과 변형’의 장르적 특성을 영화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위인전에서는 알지 못했던 퀴리 부인의 이미지는 세 가지의 ‘변형’을 이루며 관객의 예측을 넘나든다. 첫째는 자신의 일에 관한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임을 영화는 제시했다. 마리 퀴리(로자먼드 파이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혈기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당황스럽다. 남성 중심의 위원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앉아 있어야만 우리가 상상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남성들과 거침없이 맞붙는 투지는 위인전에서는 결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시절임을 감안 한다면 혈기를 부리는 여성 과학자의 탄생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도 얼마간의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마리 퀴리는 연구실과 연구결과물을 독점하던 남성들에 대해 늘 경계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1903년 자신의 연구 동료이자 남편인 피에르 퀴리(샘 라일리)와 공동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직접 스웨덴에 가서 상을 받지 못하고 수상소감 또한 말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녀는 몹시 분노한다. 둘째는 우리가 아는 마리 퀴리가 있기까지 남편 피에르 퀴리의 역할을 새롭게 인식시킨 것도 영화가 제시한 새로운 점이었다. 연구실에서 쫓겨난 마리를 위해 새로운 연구실을 마련해주며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운 피에르가 없었다면 과연 퀴리 부인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사랑의 동반자로서 결혼하고 늘 마리 옆에서 함께했던 남편 피에르의 존재는 마리의 내면세계에 안정감과 사랑에 대한 충족을 가져옴으로써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남편 피에르가 마차에 치여 죽은 후 마리 퀴리가 남편의 동료이자 연구원이었던 남성과 자신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일이었다. 퀴리 부인의 어린 두 아이가 아빠 대신 낯선 남자와 침대에 함께 있는 엄마를 열린 문 사이로 지켜보는 장면은 정숙한 퀴리 부인의 이미지만을 갖고 있었던 관객의 예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유부남 연구원과 밀회를 즐겼지만 이내 그 아내로부터 욕을 들어야만 이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결국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개방적인 성의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이 또한 마리 퀴리의 거침없는 성격과 성에 대한 주체적인 행동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이 죽은 후 사랑이 필요했다는 마담 퀴리의 고백은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해서 솔직하고 담대한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감독은 마리 퀴리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인이라기 보다는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 묘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찍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 성적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밧세바와 같은 유부녀와 정을 통했던 인간의 죄성과 연약함의 결과일 뿐이다. 다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51:1)라며 회개의 기도를 한 반면 마리 퀴리는 기독교인이 아니란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차이는 영원이라는 간격을 벌릴 수 있지만 말이다. 신앙없는 과학의 미래 영화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되지 못한 과학자의 삶과 연구결과물이 가져올 허무함과 비극을 제시한다. 마리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죽은 후 정신적 혼란을 경험하며 그렇게도 강하게 자신을 떠받치고 있던 과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도 보였다. 마리 퀴리는 죽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영매를 찾아 나선다. 남편의 손에 이끌리어 갔던 심령술 모임에서 영매는 베토벤의 혼령을 자신의 몸속으로 불러내어 피아노 연주를 했었다. 죽은 남편의 영혼을 불러내어 대화하려는 마리 퀴리의 행동은 결국 남편에 대한 진한 사랑과 더불어 아무리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라도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얼마든지 사이비 심령술에도 빠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병원 복도에서 이동 침대 위에서 지나간 자신의 삶을 떠올리는 동일한 장면으로 시작과 끝을 맺는다. 다만 끝맺음 부분에서 마리 퀴리는 자신의 방사능 연구가 가져올 미래의 방사능 유출과 관련된 비극적 사건의 예시를 함께 떠올린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와 1961년 네바다 사막에서의 공개된 핵실험,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마리 퀴리 사후에 벌어진 핵과 방사능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녀의 위대한 연구와 발견이 가져다 준 비극의 열매였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은 8만 명을 즉사시켰고, 방사선 피폭과 관련된 질병과 부상으로 14만 명이 이후에 죽었다. 인구 35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 가운데 22만 명이 사라진 것이다. 네바다 사막의 핵실험장은 구경꾼을 불러 모으는 관광상품이 되었고,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 사람이 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미국의 일간지 USA 투데이는 보도했다.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연구업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부릅니다. 방사능”. 이 영화의 원제목은 ‘방사능(Radioactive)’이다. 열정있는 과학자가 발견한 이 수고의 결과는 인류를 구원했는가? 아니면 파멸로 이끌고 있는가? 마리 퀴리는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과학을 볼 때마다 물가에 뛰어노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심정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과학자들에게는 다윗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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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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