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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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감독 : 조너던 글레이저 출연 : 크리스티안 프리델(루돌프 회스), 잔드라 휠러(헤드비그 회스), 이모겐 코게(린나 헨셀)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론을 믿는다. 유대교는 야훼만이 하나님이고 이슬람은 알라만이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초기 교회는 이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동일본질(homoousius)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차등이 없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한 지점은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신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종교다. 따라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으며 교회에 당부했다. “각각 자기 몸을 돌 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다루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찌가 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인 홀로코스트, 그 중심에 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내내 홀로코스트의 참상, 아우수비츠의 비참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보여주고, 페델리코 펠리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회적으로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너던 글레이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다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회드비그 회스, 그리고 자녀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회스의 가족들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청량한 새소리, 강가의 물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단란하고 웃음이 가득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뜻 이 장면은 전쟁의 참상이나 끔찍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인다. 그 어디에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소풍을 끝낸 가족은 귀가하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단란하고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거주하는 크고 화려한 집은 거대한 담벼락이 접해 있다. 그렇다. 그 담벼락 너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거대한 담 뒤에는 매일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밤이 되면 담벼락 너머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간혹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회스 가족이 수영을 즐기고 보트를 타는 강물이 잿빛으로 변한다. 회스 중령은 아이들을 강물에서 나오라 소리치고 노이로제처럼 씻긴다. 부인 회드비그 회스는 대여섯명의 하녀를 두고 있다. 하녀들이 밥도 짓고 아이들도 씻기고 남편의 옷도 다린다. 전투화를 벗어놓기 바쁘게 하인 한 명이 들고 가서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다 둔다. 이 가족은 언제나 정갈하며 깨끗하다. 아이들도 군더더기 하나 없다. 회스 부인은 자기 어머니를 집으로 초청하여 집이며 정원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니?”라며 감탄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그녀의 정원은 각종 꽃들로 가득하며 풀장에서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긴다.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중 이 지상천국 같은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상부에서 회스 중령의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회스 부인은 남편인 회스 중령에게 로비를 해서라도 여기를 사수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이 곳을 어떻게 가꾸었는지 알아요? 황무지 같은 이 곳을 천국의 정원처럼 가꾸었다고요. 아이들도 이 곳에 적응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 지 알잖아요.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혹여나 남편이 전쟁터로 전출을 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이사를 가게 될 까 조바심이 난 회스 부인은 신경질적이 된다. 일을 도와주는 유대인 하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대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 마디 하면 너도 저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르니?”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너무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드러낸다. 벽 하나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가 보여주는 수용소장의 가족은 자신들은 천국에서 지낸다 하지만, 실상 지옥을 만드는 자들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맞다. 그 벽 너머에 지옥이 있다. 소장 루돌프 회스는 그 벽에 난 문을 통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매일 드나든다. 그런데 그 지옥은 천국에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곳이다. 아니, 그 지옥을 통해 자신들의 천국을 유지하고 있다. 회스 가족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그 수용소의 공장에서 조달되고, 가끔 유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자루에 실려 이 집으로 들어온다. 회스 부인은 그 중 모피 코트를 챙긴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립스틱을 꺼내어 자신의 입술에 바른다. 담 너머의 죽어가는 자들이 이 쪽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상황이 그대로 연출된다. 아렌트는 전후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청석에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자신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오열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웃집 아저씨같은 사람이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데 동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누구나 본성에 잔인함이 들어있고 특수한 상황에서 악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칭했다. 동시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지 않은 죄’ 즉 사유하지 않은 죄였다.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불의가 행해지는 상황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죄, 동참한 죄를 선언했다. 악한 일에 단순하게 따른 것도 죄였다. 최소한의 저항,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린 죄, 그 죄가 더 컸다. 회스 가족의 죄가 그러하다. 벽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범죄, 악, 비참한 일에 이 가족은 너무나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기에, 게다가 수용소장의 가족이기에 이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도 걸어잠그고 커튼을 친다. 그 벽 너머의 참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이중성, 외면을 감독은 차분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이 묘사한 장면이 단지 아우슈비츠 뿐일까? 분명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전쟁이 아닐 뿐, 총이나 대포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끔찍한 일이다. 소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불경기라며 힘들어 한다. 최저 생계비에 겨우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맞벌이는 일상이다. 수많은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해 보려는 소망으로 대출하여 구매한 아파트, 인상된 금리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돈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억대가 넘는 비싼 외제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십만원이 훨씬 넘는 호텔의 식당들은 대기줄로 가득하다. 해외 여행자들은 넘치고 여행지의 비싼 호텔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하룻밤에 50만원에서 100만원 하는 호텔들에 방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불경기는 누구에게 해당되는 일인가? 오히려 불경기라는 것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중된다. 루돌프 회스에게는 보이는 벽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은 그대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공동체로 만드셨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나, 너’가 아니라 ‘나-너’, 즉 ‘우리’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나’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오롯이 ‘나’만 잘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자인 ‘너’가 없다면 생산자인 ‘나’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소망이 있다.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의 등장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수용소의 담을 지나 흙더미에 사과를 숨겨 놓는다. 누군가 일하다 그 사과를 발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죄에 동참한 사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사과다. 그 사과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소녀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 회스 가족을 무너뜨리는 작은 사과, 오늘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다. 이기적 욕망을 내려 놓고,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 뜨릴 사과 한 알을 나도 너도 나누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이며 공존하는 길이기에. 한나 아렌트의 경고에 귀 기울이자. 사유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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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기독교인문학] 붓다는 자신을 신이라 하지 않았다
    정성민의 인간 붓다와 신 예수 - 기독교 시각으로 본 초기 불교 가르침 -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인도에서 신학과 철학, 비교종교 등을 두루 섭렵한 저자가 2년 전 출간한 방대한 걸작 〈예수와 석가의 대화: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본 석가모니〉에 이어 올 1월 노작 《인간 붓다와 신 예수》를 펴내 주목을 받고 있다. 저자는 인도의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하여 창시한 동양을 대표하는 불교는 당시 인도의 힌두교의 신, 우주적인 영의로서의 브라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립 해탈의 길을 연 무신론적 종교개혁으로 호응을 받았으나 그의 이상적이며 완벽한 도덕주의는 사후에 진행된 붓다의 신격화 작업과 자력에서 타력신앙의 유신론적 경향을 띠며 변화하는 과정들을 추적한다. 붓다는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는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원조요, 현대 철학과 교육의 원형으로 현대 무신론의 진정한 시조라는 것이다. ◇ 저자소개 ∥ 정성민 현재 미국 그레이스미션대학교 비교종교학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드류대학교 신학석사, 동 대학과 대학원에서 철학 석‧박사(종교철학), 인도 마드라스대학교에서 철학박사 과정(비교종교)을 수료한 후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와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와 호서대학교 신학대학원 초청 강사, 인도 마드라스신학대학교 방문 교수를 역임하였다. ◇ 저서∥《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와 《예수와 석가의 대화》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예수와 석가의 대화 -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본 석가모니》 / 정성민 지음 / CLC / 2022 《붓다와 희생양 - 르네자라르와 불교문화의 기원》 / 정일권 지음 / SFC / 2013 기독교인문학 〈52〉 붓다는 자신을 신이라 하지 않았다 -기독교 시각에서 본 불교 이야기-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 “붓다의 세계관은 신(神)을 전면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반기독교적 입장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신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는 영혼의 존재를 믿고, 각 영혼이 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믿는다. 더 나아가 죽음은 개인적 삶의 끝이 아니라 사후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다.” 비교종교학의 고전이 될 책 김길구 1월에 두란노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얼마 전 한 스님의 초청으로 절을 찾은 적이 있는데, 스님의 말씀이 성탄절과 석탄일에 서로 축하의 현수막도 걸어주며 교류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데 개신교 목사님과는 왠지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묻던 기억이 납니다. ‘참된 앎과 믿음을 위하여’란 부제처럼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사상의 뿌리를 알고 소통하는 것은 서로에게 믿음의 근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김현호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은 이 책이 ‘비교종교학의 고전’이 될 것이라는 감수평을 남겼습니다. 2022년에 《예수와 석가의 대화》라는 582쪽의 대작으로 주목을 끌더니, 이번에는 300쪽이 채 안 되는 분량의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낯선 불교에 관한 흥미진진한 얘기는 감수평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타종교와의 합리적인 대화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기대도 갖게 됩니다. 붓다는 누구인가? 류지원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 정리부터 해야겠어요. 붓다는 원래 ‘깨달은 자’란 산스크리어 붓다(佛陀)의 음역으로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를 뜻합니다. 그의 일대기는 잘 아시니까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로 네팔 남부 인도 국경 근처인 히말라야산 기슭에 있는 작은 나라 사카국의 왕자였는데 고달픈 인생의 문제, 곧 생로병사와 정신적인 고통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29세에 출가, 수행 6년 만에 깨달음을 얻고 불교를 창시하여 그의 사상을 널리 포교하다 향년 80세로 열반한 동양 최고의 종교지도자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설파한 근본 가르침은 지금처럼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초월적 성격의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성향을 배척한 초기 불교를 중심으로, 붓다는 순수한 인간이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철학자요, 유신론을 거부한 무신론적 철학자요,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브라만교의 부패와 신과 윤회를 앞세워 동물 희생 제사와 고행을 강조하는 종교의 부정적 행태에 분노한 혁신적인 종교개혁자였으며, ‘신’의 존재나 ‘우주’ 그리고 ‘사후세계’ 같은 문제에는 별로 관심 없이 인간이 지닌 고통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데 고민했던 현세적인 종교지도자로 도덕적이며, 거룩한 생활을 실천한 불교의 창시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류지원 붓다의 이러한 측면을 고려하여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의 ‘불교는 붓다를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거절함으로써 불교의 종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다소 역설적인 불교의 독특한 종교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핵심교리 톺아보기 김현호 붓다의 깨달음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涅槃) 즉 인생사의 모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편안함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길을 사성제(四聖諦)로 요약하였는데요 현세에서의 삶은 곧 고통이라고 보는 고제(苦諦), 괴로움의 원인은 끝없는 애집(愛執)에 있다는 집제(集諦), 모든 욕망을 벗어나서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의 경지를 이상이라고 풀이하는 멸제(滅諦), 그리고 번뇌와 업을 끊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도제(道諦)라고 합니다. 류지원 사성제가 붓다의 우주와 인생의 원리라면 삼법인은 세 가지 진리의 진리로 모든 존재는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고, 인간 내면에 있다고 믿어지는 자아, 곧 영혼이 없으며,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 집착을 버린 자는 정신적 고통에서 해탈하여 평안함을 누린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입니다. 김현호 이러한 원리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팔정도가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 여덟 가지의 올바른 길로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 그리고 올바른 생활과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과 올바른 집중으로 수행을 위하여 붓다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삶으로 실천하며 명상을 통해 열반에 이를 수 있는 특별한 지식 즉 명지를 깨우치는 측면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김길구 불교에서 중시하는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명지를 얻는 것으로, 바로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正思惟)하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수행자는 붓다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를 동의해야 하는데, 그 핵심교리가 불교의 연기론에 바탕을 둔 무아론 입니다. 만물은 인연에 의하여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므로 이를 통제하는 신의 존재나 그 안에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영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붓다의 세계관은 무신론, 무아론 그리고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내세관에 뿌리를 둡니다. 기독교와의 대화 류지원 시간이 없어 불교의 변천사는 생략해야겠어요. 축약해서 그 역사를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면 불교의 토대가 된 인도의 전통 힌두교 신앙이 정(正)이라면, 붓다가 시작한 브라만교의 허구와 부당성에 반기를 든 이상적이며 혁신적인 종교개혁을 반(反)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사후부터 진행된 이상과 현세적인 측면을 가미하여 민중들의 요구를 절충한 좀 더 세련된 종교?가 오늘의 불교가 합(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김현호 저자는 사상적으로 예수와 붓다의 닮은 점을 몇 가지로 얘기합니다. 마음 속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이 땅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삶이다. 예수와 붓다가 지향하는 삶은 무욕과 무소유다 예수와 붓다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쳤고, 몸소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류지원 그렇다면 예수와 붓다의 대화 가능성은 있을까요? 저자는 이를 일축합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와 소승불교의 교리적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대화가 되려면 예수와 붓다가 신적인 차원이어야 하는데 그 전제부터 틀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초기 붓다와 사후 후대의 신격화된 붓다의 사상과도 상호 모순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같은 논리로 교리적 대화 역시 예수를 보통사람으로 전락시킨다는 이유에서죠. 그러므로 종교 간의 대화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로 서로의 입장과 사상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밖에 없는 지구상에서 서로 존중하며 공존하는 것이 곧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김현호 이 책 말미에 가면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타종교와 무신론자와의 소통방법, 그리고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과제 등을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김길구 서구사회는 물론 미국에서 조차 쇠퇴를 거듭, 기독교가 위기감을 느끼는 가운데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추세입니다. 사람과의 무한 경쟁에 이어 AI와도 같은 기계와도 싸워야 하는 극심한 경쟁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은 명상, 요가, 탬플스테이 등 안식을 찾고 ‘멍때리기’가 유행합니다. 과연 기독교가 이 시대의 참된 안식을 줄 수 있을지 반문해 봅니다. 다음 호에는 일본문화기행 편으로 저명한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길을 따라》란 가이드 북을 내신 권요섭 목사와 함께 그의 문학과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 문화
    • 기독교인문학
    2024-06-14
  • 삶이 부유해지는 단순한 재정 원리
    출판사 : 진인터랩 저자 : 밥 로티치(Bob Lotich) 원서 : Simple Money, Rich Life ( 2022. 4 미국 출간) 번역 : 조계진 ISBN : 979-11-981955-9-3 분류 : 기독교 > 신앙 생활 > 리더십/직장 생활/재물론 페이지 수 : 336p 형태 및 크기 : 신국판 단행본 153 x 225 x 18mm, 530g 출간일(출고일) : 2024. 6. 5 가격 : 16,000원 돈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는 삶이 부유해지는 변화를 위한 21일 재정 훈련. 돈에 대한 기존의 프레임을 바꾸고 재정 구조를 새롭게 설계해 준다. 마이너스 재정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큰 소망을 성취한 경험적 재정 원리.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단순함, 삶에 그대로 적용 가능한 실천적 지혜가 가득 담겨있다. 삶이 부유해지는 ‘단순한 재정원리’는 저자가 재정 인생의 바닥에서 하나님이 존재를 깨닫고 나서 성경의 원리대로 돈을 저축하고 벌고, 기부하고 즐기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과정이 생생하게 담긴 ‘돈’에 대한 교훈과 통찰을 주는 책이다. 책은 돈에 관한 기본적인 활동, 즉 수입과 저축을 극대화하는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나눔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려준다. 또한, 돈 관리가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는 과정이라고 알려 준다. 저축하기, 돈 벌기, 기부하기, 즐기기의 총 4부로 구성되어 있고 각 파트가 끝나면 요약과 실천 지침이 있는데, 총 21개의 실천 지침이 21일간의 여정을 이끌어 준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재정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을 강요하는 정보를 구별하기 힘들다. 재정적으로 성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내더라도 너무 힘들거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저자는 재정으로 인한 어려움의 낭떠러지에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눈에 보이는 상황, 자신의 재능, 정보와 노력으로 해결하려 했고 그동안 재정에 하나님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재정의 바닥에서 일어나 100만 달러를 기부하는 목표를 성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자신의 재정 관리 블로그, 팟캐스트에 올리면서 지금까지 전 세계의 약 5,000만 명 이상에게 영감을 주어 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재정 원리는 단순하다. 그러나 저자가 15년간 스스로 실천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정립한 원리이기 때문에 삶이 부유해지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다. 많은 독자들이 저자와 함께하는 21일 간의 재정 훈련 실천을 통해 선순환의 변화가 시작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돈에 속박된 종의 삶이 아니라 돈을 지배하는 주인으로서의 부유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한다. 저자 밥 로티치는 높은 성과를 이끌어 온 재정 코치이자 개인 금융 공인 교육자 (CEPF®)로, 개인 재정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20인에 선정되었다. 수상 경력에 빛나는 그의 웹사이트 SeedTime.com과 팟캐스트는 5천만 명 이상의 독자, 청취자, 학생들과 시대를 초월한 지혜와 실용적인 전략을 공유해 왔다. 베스트셀러인 'Simple Money, Rich Life'는 IFCFH(Institute For Christian Financial Health)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포브스(Forbes), 포커스 온 더 패밀리(Focus on the Family), 야후 파이낸스(Yahoo Finance), 빌리프넷(Beliefnet), 타임(Time) 등에 소개된 바 있다.
    • 문화
    • 도서
    2024-06-13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재개봉/2023.03.01. 장르/액션/코미디 국가/미국 등급/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150분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 양자경(에블린 왕), 스테파니 수(조이/조부 투파키), 키 호이 콴(웨이먼드 왕) 1. Everything 모든 것이 엉망이다. 삶이 뒤엉켜 버렸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았다. 세탁 일을 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세탁이 맘에 안 든다며 돈을 내지 않는 손님, 옷감이 상했다며 물어내라는 손님, 이런 저런 일을 다 겪었다. 게다가 지금은 세무서, 이 깐깐한 직원은 온갖 잔소리를 하며 서류를 보완해 내라고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살만했다. 에블린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다소 융통성이 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 가끔 속을 뒤집어 놓지만 사랑스런 딸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아버지 때문에 견뎠다. 가족은 그녀에게 희망이었고 삶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남편이 이혼 소송 장을 내민다. ‘당신하고 더 이상 못 살겠다, 당신은 일 밖에 모른다. 나에게 관심도 없다.’고 같잖은 이유를 들이댄다. 딸은 미국 여자 아이를 데려와서 굳이 가족들에게 소개하겠단다. 자기는 동성애자라고, 여자 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한다. 잘 지켜왔던 세탁소는 세무관련 법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골칫거리다.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내 삶이 그렇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 꺼 번에 내려앉다니. 2. Everywhere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려는 시점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무서에 앉아 있던 에블린에게 이상한 모습을 한 남편이 등장한다. 분명 소심한 남편인데 무언가 다르다.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공격을 가하는데 남편이 다 물리친다. 그리고 에블린은 남편의 손에 이끌려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멀티버스에서 왔고,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블린 당신이 그 세계의 희망이라고 한다. 순간 다른 세계의 악당이 등장하는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딸 조이 아닌가? 조이 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조부 타파키라면서 사정없이 에블린을 공격한다. 알고 있던 세상이 모두 달라졌다. 남편 에드먼드가 하라는 대로 엉뚱한 짓들을 하자, 에블린 역시 대단한 능력자로 변신한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굉장한 실력자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조부 타파키를 물리쳐야 한다. 에블린은 이 세상, 저 세상, 다양한 멀티 버스를 오간다. 에블린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그녀의 과거가 펼쳐진다. 다른 세상에서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멋진 영화배우며, 남편 에드먼드 역시 멋진 미남 배우다. 또 다른 세상에서 에블린은 화려한 무술 실력을 발휘하는 여 전사다. 멋진 투사가 된 에드먼드가 에블린에게 말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생각하겠지. 당신은 항상 긍정적인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야, 그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부드러움은 살아남기 위한 내 전략이야. 내 삶에서는 나도 투사야.” 에드먼드의 말에 따라 에블린도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다. 억척스럽게 투사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렇게 모든 곳을 다니며 삶을 지켜나가는 에블린에게 최강의 빌런이 등장한다. 딸인 줄 알았지만, 그녀는 조부 투파키 &#8211; 우주의 최강 빌런이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파괴해 나간다. 조부 투파키는 죽어 버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서 베이글(블랙홀)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은 사랑 받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일을 좀 내려놓고 나를 바라봐 주면 안 되냐고 외치는 딸의 투정이다. 3. All at Once 다시 삶이다. 멀티 버스에서 돌아온 에블린의 삶은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 보인다. 후회와 한숨으로 살아온 자신의 세탁소는 아름다운 곳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남편은 다정한 사람으로, 속 썩이는 딸은 사랑스런 아이로 다가온다. 꿈을 꾼 듯 멀티버스의 경험이 에블린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워졌다. 달라진 것은 결국 에블린의 내면이다. 그녀는 진짜 투사로 거듭났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장착한 진짜 투사다. 가정을 지켜 온 그녀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말했다. “삶은 의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건네주던 동료에게서 그는 진정한 삶을 배웠다. 죽음은 희망의 상실이지만,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때문에 죽음을 이겨냈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자고 역설한다. 현실은 불의와 악이 가득하다.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한 채 포로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현실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 나라에서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굴며, 독사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으며, 대립과 반목은 사라진다. 불화와 오해는 사라지고 사랑만이 존재한다. 그 나라는 나의 상상에서 현존한다. 아니, 믿음은 지금의 현실을 뛰어 넘어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한다. 천국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멀티 버스로 존재한다. 언젠가 그 나라로 충만해 질 때, 모든 것, 모든 곳이 한꺼번에 새롭게 될 것이다. 그 나라를 소망한다. 추신 : 멀티 버스는 존재하는가? 요즘 멀티 버스가 화두다. 영화사들이 앞 다투어 멀티 버스를 소재로 제작하고 있다. 마블은 일찍이 멀티 버스를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제목이 멀티 버스의 혼란이고, 스파이더맨에서는 다른 지구에서 온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다. 로키라는 시리즈에서도 멀티 버스를 오가며 그들이 설정한 타임-라인을 혼란시키는 존재로 그린다. 그럼 멀티 버스(Multi-verse)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용어일까? 그렇지 않다. 콜럼비아 대학의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의 저서 멀티 유니버스를 통해 이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이들 물리 천문학자들이 멀티 버스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빅뱅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빅뱅이 일어나 오늘날까지 우주가 서서히 팽창하면서 존재해 왔으나 그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론적으로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꺼낸 것이 멀티-유니버스다. 즉 다중우주론이다. 우주는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이야기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확인하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라는 말이다. 다중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우선 인플레이션 이론을 가져왔다. 빅뱅 이후 우주 초기에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는데, 현재의 공간을 창출한 폭발 이외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로 멀티 버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끈 이론으로 다중우주를 설명하는데, 끈 이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이외에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러한 가설을 영화는 스크린에 녹여 내고 있다. 이들은 멀티 버스를 실재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럼 정말 멀티 버스는 존재할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가져오지만, 여전히 확인할 가능성은 없다. 또한 어떤 천문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공상 과학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럼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멀티버스가 신학적으로 가능할까?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메시야가 필요한 것인가? 그들은(만약 있다면) 죄를 지었을까?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다만, 성경을 읽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과 다른 영역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계시고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존재다. 또한 성경의 인물들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야곱은 하늘과 맞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다니엘은 하늘 보좌를 보았으며,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멀티버스에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니버스(Universe)의 다른 차원(Dimentions)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실 것 같다. 일찍이 에드윈 A. 애벗이 쓴 플랫랜드에서 그린 것처럼, 우리보다 높은 차원, 그것을 우리는 영원, 영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정리하면 멀티버스라기보다 유니버스의 다른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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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기독교인문학] 작은교회에 보내는 위로와 연대
    이재학 지음 《우리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지 묻는다》 이 책은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교회의 전성기가 저물고 교회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이때, 교회의 본질에 충실한 작지만 강한 교회를 표방하며 혁신적인 목회사역으로 작은교회의 롤모델이 된 하늘땅교회 이재학 목사의 육필 수기로 그의 성공비결은 말씀이 실제가 되는 건강한 교회론에 기반한 교회에 있다. 부름받은 공동체, 세움받은 공동체, 보냄받은 공동체의 3부로 구성된 본서에는 개척부터 현재까지의 목회 노하우가 240쪽에 빼곡이 수록되어 있다. 삶의 감동을 전하는 유쾌한 ‘소풍목회’, 하늘땅교회의 뼈대가 된 교회본질 목회와 공동체목회 이야기, 성도 100명이 되면 교회를 분리 개척시키고, 300명의 사역자를 훈련시켜 41개의 교회를 개척한 작은교회연구소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이제 한국교회의 희망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 저자소개 ∥ 이재학 저자는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를 졸업하고,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선교와 문화학교를 전공했다. 건강한 교회, 바른신학을 추구하는 목회자이자 개혁현장에 신학을 다시 써 가는 실천신학자이다. 오산에서 하늘땅교회를 개척하고 기존의 틀을 깬 혁신적인 목회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실험적 목회를 바탕으로 교회의 위기 시기에 교회가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가 목회자를 세우는 작은교회연구소를 설립, 작은교회의 멘토로서 목회에서의 경험을 나누며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다. ◇ 저서∥《큐틴즈》공저, 《베스트 다니엘서》, 《심방설교 핵심파일》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교회, 다시 봄》 유재춘 지음 / 세움북스 / 2023 《하나님의 나그네 된 교회들에게》 김승환, 강영안 / 비아토르 / 2023 《센터처치》 팀 켈러 / 두란노 / 2016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 하는가》 제임스 K. A. 스미스 / 도서출판 100 / 2023 기독교인문학 〈52〉 작은교회에 보내는 위로와 연대 - 삶의 감동을 전하는 유쾌한‘소풍목회’이야기 - 교회의 사명 “교회의 사명은 사해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처럼 주께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교회는 기꺼이 축복을 유통하는 삶, 축복의 통로로 존재한다. 교회는 흘려보내는 존재다. 생명이 생명이 되도록 흘려보내는 주님의 사역이 선교다.” 하늘땅교회 이야기 김길구 한목협의 통계에 따르면 그동안 꾸준히 감소세를 이어 오던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2017년 기준으로 2023년 현재 15.0%인 275만명이 감소한 771만명으로 나타났고, 미래학자인 미래목회전략연구소의 최윤식 박사에 의하면 2050년이면 한국 기독교인 수는 400만으로 줄 것이라는 충격적 예측도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가 더욱 심각해 지고 있는 이때 올 1월 출간된 ≪우리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지 묻는다≫의 저자이신 이재학 목사님을 모시고 개척교회 체험담을 중심으로 건강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재학 경기도의 작지만 젊은 도시 오산에서 개척한 지 20여년 된 ‘하늘땅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재학 목사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현호 몇 가지 더 소개 드리면 목사님은 종손으로 치악산 절을 다녀 태어났다 하여 공양하는 불교 집안에서 자랐답니다. 부친을 따라 소를 돌보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좋아해서 문학도를 꿈꾸는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지금은 교회목회와 더불어 작은교회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면서 작은교회의 멘토로 활동 중이며 글쓰기와 강연 등으로 매우 바쁘신 분인데 내부해 주셨습니다. 개척 교회를 세우다 류지원 목회 얘기로 들어가 보지요. 목사님의 교회 이름이 재밌어요. ‘하늘땅교회’? 이재학 이름을 대면 교회의 위치가 지평선 끝에 하늘과 맞닿아 있는 곳인지 물어보곤 해요. 그런 공간적 개념보다는 ‘땅에서도 하늘을 지금, 여기서, 나부터 품고 살자’는 의미입니다. 김현호 개척교회를 하기 전에 교회론에 천착하셨는데 그 이유는? 이재학 선교와 문화학과를 공부할 때 학위논문의 주제가 교회론이었습니다. 김길구 책의 구성이 칼 바르트의 교회론의 부름받은 공동체, 세움받은 공동체, 보냄받은 공동체의 삼중구조로 되어 있군요? 이재학 내용은 전문가들의 신학적 서술한 것이 아니고 교회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서로 꿈꾸는 교회가 다르더라도 교회의 본질과 씨름하며, 거기에 맞는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여,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하늘땅교회’의 속 사도행전의 여정 말입니다. 소풍목회 류지원 1부 중 흥미로운 대목은 ‘목회는 소풍이다’는 대목입니다. 목사님이 말하는 소풍목회는 어떤 것이죠? 이재학 저는 늘 감동이 메마른 이 세대에 삶의 감동을 이야기로 전해주는 목회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날마다 성도들과 함께 나그네처럼 소풍을 떠나는 자유로운 목회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가 바쁜 성도들을 다그치지 않아서 좋고, 나 또한 사색하고 글을 쓰고 읽는 것이 사역의 일부고, 여기저기 목회이야기를 나눠 달라는 곳에 설교하고, 교회를 다시 세워야 할 곳에 강의하거나 부흥회를 인도하느라 바쁘기도 해서죠. 그러나 소풍의 목적지는 항상 천국을 향해야지요. 땅에서 하늘을 품고 살아가는 소풍을 지금, 여기서, 나부터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닐까요? 본질 목회와 공동체 목회 김현호 목회에 있어서 목사님이 강조하시는 본질 목회와 공동체 목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이재학 목회에 있어 교회론의 주요 뼈대는 중 하나는 본질 목회입니다. 교회의 기원이 무엇인지를 되새겨 보는 거예요. 가령 예수의 삶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을 보았던 초대교회는 다른 것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예수 신앙, 예수 정신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첫 교회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저희는 적어도 본질 목회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고 예수의 신앙,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목회 이재학 그리고 또 하나는 공동체 목회입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com+munus 즉 ‘함께’라는 com과 ‘선물’이라는 munus의 합성어로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어 주는 의미를 담고 있죠. 지체로서 한 몸을 이뤄가는 공동체 목회를 뜻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 하나가 공동체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목회는 생명의 예수 이야기, 신앙 이야기를 가까운 가족부터 지역으로, 자녀들에게 계승하여 나누는 데 있습니다. 건물이 아니라 우리가 배우고 나누었던 삶의 감동을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서사가 있는 교회, 희노애락의 사소한 것이라도 서로가 공감하고 공존, 공생하는 교회 말이죠. 작은교회연구소 김길구 목사님의 사역 중에 2009년에 작은교회연구소 설립이 인상적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가 목회자를 세운다는 표어가 가슴에 와 닿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역을 소개해 주시죠? 이재학 오래 전부터 저는 하나의 사명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이죠. 그런데 교회는 혼자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모든교회가 서로 손을 맞잡고 세워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여기 저기 강의하고 돌아오면 우리교회에서 훈련을 받고 싶다는 분들이 생기고 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공동목회를 표방하며 동역자로 세워 주2회 정도 설교와 구역을 맡깁니다. 자신감이 들 때까지 하지요. 이러다 보면 우리교세보다 많은 인원과 재정이 들지만 성도들이 이해해 주시고, 동역자들은 자신의 목회처럼 훈련하다 독립하게 됩니다. 그동안 300명 이상이 참여하고 41개 개척교회가 세워졌지요. 이런 사례들이 알려지자 동남아를 비롯 일본 사역자들의 교류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현재는 초교파적으로 스무 분이 모여서 교회론을 연구하고 나눔을 통해 서로 연합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현호 이들이 훈련을 마치고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연구소 회원들이 십시일반 인테리어 공사를 지원하고 필요한 성구와 장비, 비품들을 마련하는 등 뜨거운 연대의식을 자랑합니다. 귀한 사역이지요. 류지원 ‘하늘땅교회’는 성도가 100명 이상이 되며 매번 교회를 분리 개척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재학 제가 개척할 당시는 교회세습, 대형교회의 비리 등 한국교회의 변질을 목격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성도가 100명 이상이 되면 분리 개척시킵니다. 건물에 돈을 투자하거나 건물 관리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죠. 그렇다고 건물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김길구 시간이 없어 주마간산식으로 훑어보다 말았네요. 목사님의 조근조근한 목소리에 작지만 강한 혁신적인 목회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오는 5월15일은 석탄일입니다. 이웃종교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와 감수자가 대단한 분입니다. 정성민 교수가 짓고, 김영한 교수가 감수한 두란도 출판사의 최신작 《인간 붓다와 神 예수》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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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9
  • [영화] 부활 Risen
    부활 Risen, 2016 드라마 미국 107분 2016.03.17 개봉 감독 : 케빈 레이놀즈 주연 : 조셉 파인즈(클라비우스), 톰 펠튼(루시우스), 클리프 커티스(예슈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모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기초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에 새기고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감상적 느낌과 달리, 십자가는 고대 사회, 특히 로마 사회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 십자가형은 로마가 살인이나 무엇보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 및 수치를 주기 위해 행하던 방식이었다. 예수님만 십자가 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십자가 형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게르트 타이센 등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6년 경 갈릴리의 세포리스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군이 일어났고, 시리아 주둔 로마군이 진격해 와서 반란군을 제압했고, 당시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남자 약 2천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끔찍함이자 저주의 상징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다른 죄수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의 백부장의 증언을 기록한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마가는 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백부장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자신이 집행하던 그 어떤 죄수와도 달랐음을 그는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 위에서 자신과 타인을 저주하는 대신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셨다. 그 남다름, 그 위대한 선언에 백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로마 사람들도 ‘신의 아들’을 숭배했다. 어떤 이는 황제 가이사가 죽지 않았다고 했고, 네로가 부활했다고 믿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 말했다. 만약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진정한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통치자로 증명된다. 이것이 로마 사회의 중요한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추적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제 삼자,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를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시킨다. 클라비우스는 총독 빌라도의 요청에 따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라는 명령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부터 꼼꼼히 조사한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사하고, 이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비밀 공동체를 추적해 들어간다. 또한 클라우비스는 로마의 관료로써 골고다의 다른 시체들과 무덤들까지 정밀하게 조사한다. 혹시나 시신을 유기하고 거짓말 한 것이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클라우비스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우비스의 극적 체험을 다룬다. 제자들을 쫓던 클라우비스는 제자들 사이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놀란다.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그들의 사랑에 놀란다. 결국 클라비우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진다. 그가 든 칼 뿐 아니라 그의 가치관 자체가 무장해제 된다. 로마의 정신 PAX ROMANA의 허상을 깨닫는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희생이요 사랑임을 체화해 간다. 그 과정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면 좋을 듯 하다. 영화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꼼꼼하게 추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의심의 터널을 거쳐서 확신의 빛에 이르렀냐고 묻는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부조리의 신앙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또한 영화 ‘부활’은 묻는다. 만약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당신은 클라우비스처럼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냐고, 클라우비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랑의 길로 갈 수 있냐고 묻는다. 로마의 장교였던 클라비우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삶이 극적으로 바뀐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유대인을 세계 위에 세울 날 이루어질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 전에 누군가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분명히 죽었다고 여겼던 그 분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부활을 전하고 다녔던 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가 도리어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사도가 되었다. 오랜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죄와 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 자신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살아가지만, 결국 하숙집 소녀 소냐가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엎드렸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내면에서 새로운 삶이 살아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경찰서로 향하여 자수하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났다. 살았으나 죽었던 삶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시베리아 행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라스콜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삶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을 [부활]로 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소설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대역인 네흘류도프 공작은 복음서를 읽던 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내면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형제다. 형제 자매가 된 자들에게 네흘류도프 공작은 땅을 상속한다. 분배한다. 왜냐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부활은 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클라비우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고, 라스콜니코프처럼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네흘류도프처럼 형제애가 살아난다. 삶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가?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삶의 열매가 맺어지는가? 부활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
    • 문화
    • 영화
    2024-03-25
  • [기독교인문학]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화는 가능한가?
    제임스 K.A. 스미스의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 - 데리다, 리오타르, 푸코를 교회로 데려오기 - 20세기 후반부터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예술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일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한동안 맹위를 떨치다 요즘은 조금 잦아들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영향력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려 우리 삶의 일부로 일상화된 느낌이다. 저자는 포스트모던적 근대성 비판에서 일종의 동료의식을 가지고 기존의 질서와 토대를 해체해 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삼인방의 핵심논제(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데리다, 메타내러티브는 모두 사라졌는가?-리오타르, 권력/지식/훈육 –푸코)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소개, 분석하고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딱딱한 주제를 매 장 서두에 소주제에 맞는 영화를 선정하여 해설함으로써 이해를 높이고 있다. ◇ 저자소개 ∥ 제임스 K. A. 스미스 James K. A. Smith 캐나다 출신으로 워털루대학교와 엠마우스성경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학문연구소(철학 석사)와 빌라노바대학교(철학박사)에서 수학했다. 현대프랑스 사상을 연구하고 아우구스에서 칼뱅, 에드워즈와 카이퍼에 이르는 신학적 문화 비평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그는 철학, 신학, 윤리학, 미학, 과학, 정치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학계와 사회와 교회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통해 이 분야의 선구적 사상가로 평가를 받는 등 대중 지식인이자 문화 비평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저서∥《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라》, 《왕을 기다리며》, 《습관이 영성이다》 등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철학한다는 것》 표정훈, 강영안 / 홍성사 / 2021 《현대사상입문》 지바 마사이 / 아르테 / 2022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 갈라파고스 / 2010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해》 스탠리 그렌치 / WPA / 2010 기독교인문학 〈50〉 포스트모더니즘과의 대화는 가능한가? - 열린대화와 비판적 전유 -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 주목 “그리스도인이 근대성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서 동맹을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비판은 교회가 인간 번영에 대한 성경의 비전과 일치하지 않는 근대성과 공모해 온 방식을 깨닫도록 돕는 치료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가올 왕국을 갈망하는 고대의 하나님 백성이 되는 방법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김길구 저번 호에 다룬 R.C. 스프로울의 ≪서양철학 이야기≫는 사상가들의 이름만 나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죄송하기도 하고 아쉬웠는데, 다행히 이 논의를 이어갈 책이 눈에 띄어 급하게 선정했습니다. 작년 8월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와 도서출판 100이 우정의 연대를 통하여 새롭게 재번역하여 출간된 ‘데리다, 리오타르, 푸코를 교회로 데려오기’란 부제가 붙어있는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입니다. 김현호 이 책은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서는 2009년에 살림출판사에 의해서 소개되었으나 최근 탄탄한 인문학적 훈련과 사유를 겸비한 종교개혁자 에라스무스의 전통을 이어 인문학과 신학 양자 간의 자유로운 대화와 비판적 전유를 목표로 한 에라스무스 총서 중에 하나로 최근 기획 출간된 책입니다. 류지원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적 그리스도교 및 정통의 역사와 양립될 수 없다는 선입견을 가진 복음주의 교인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적 분석을 통하여 그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근대성과 탈근대성 사이에는 상당한 영속성이 있지만 탈근대성과 포스트모던니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 책은 그 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김길구 우선 용어의 정의부터 얘기해 보죠? 우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은 계몽주의 이후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철학의 흐름이요, 문화적 현상을 말합니다. 주로 1960년대부터 1990년대의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축이 된 현대사상을 말해요. ‘포스트’라는 접두어에는 ‘후기’나 ‘탈’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연속의 의미와 단절의 의미가 같이 있어요. 류지원 현재 두 가지 맥락에서 사용된다고 보면 됩니다. 하나는 새로운 예술 사조를 지칭하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사유를 비판하면서 여기에 맞선 개념으로 등장한 사상적 흐름을 말해요. 이 둘은 모두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갈래도 많고 너무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김현호 저자는 이 책에서 탈근대성은 문화현상의 집합을 가리키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의 철학적 흐름을 가리키는 용어로 구분해서 쓰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들 김현호 제가 맡은 철학자는 2장에 나오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핵심적 명제를 남긴 데리다 입니다. 데리다는 텍스트를 작성한 저자의 정체성과 의도는 그 텍스트의 해석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나아가 그 텍스트 속에는 어떤 식이든지 불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해체이론’을 펼쳤습니다. 텍스트 독해에 있어서 작가의 전기적 사실과 작품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 등, 텍스트 외부를 일체 고려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텍스트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텍스트가 지닌 모순, 다의성 등을 드러내어 하나의 의미로 독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텍스트의 한계를 드러내고, 텍스트에 편입하지 않은 타자성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텍스트의 해석과 연결되는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은 모든 것이 다 텍스트라는 말로, 이 말은 모든 것이 책이라거나 우리가 거대한 모든 것을 에워싼 책 안에 살고 있다 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은 경험하려면 모두가 다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경텍스트 너머에 있는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을 확신할 수 없으므로 성경 중심성을 강조하는 교회의 입장과 다르며, 따라서 교회는 그 텍스트를 통한 성경의 내적 역사에 치중해야 합니다. 류지원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란 책에서 근대이성이 기반하고 있는 ‘큰 이야기’(거대담론)의 효과가 상실됐음을 선언했는데요. 그의 핵심 명제 ‘메타내러티브를 불신하라’는 것의 참 의미는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자유, 구원, 계급, 진리 같은 큰 이야기를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산업사회에서는 한 가지의 진리, 한 가지의 이념에 기반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고 유효하지도 않다는 주장 때문입니다. 근대이성이 구축한 서양철학은 그 큰 이야기 속에 보편성과 절대진리를 표방함으로써 이성 그 자체에 내재하는 폭력성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념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 종교의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을 우리는 자주 보았기 때문이죠. 이에 반해 저자는 서사와 내러티브를 구분하면서 기독교를 보편적 이성으로 입증 가능한 진리와 사상의 체계로 간주하는 근대적 기독교 이해에 반대하여 기독교의 계시는 본질상 서사라며 계시가 이야기의 형태로 주어진 것은 신앙의 핵심적 과제가 진리에 대한 입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 속에 참여하여 세상을 향해 복음의 이야기를 살려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던 교회는 성경의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이야기 하는 교회일 뿐 아니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스토리텔링은 우리가 이야기를 살아냄으로서 뒷받침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정한 예배는 구도자에게 다가가는 것과 성도를 세우는 것입니다. 김길구 푸코가 말한 ‘권력은 지식이다’라는 주장은 근대사회의 기반에는 그물망처럼 촘촘한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지식체계라는 거예요. 국가는 법률이나 규칙 등 외부의 제도뿐만 아니라 훈련으로 형성된 도덕과 윤리로도 국민을 지배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율적으로 그것이 좋은 일이므로, 혹은 도덕적임으로 자연스레 행동한다지만 그것도 훈련을 통해 학습된 새로운 지배형태라는 것입니다. 마치 정상인이지만 정신병원에서 길들여지는 과정과 권위주의에 맞서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내용을 다룬 영화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처럼 이러한 담론을 생산하고, 통제하고, 선택하고, 조직화하고 배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규율의 내면화’와 보이지 않은 권력을 통하여 자율적인 순종을 강요하는 체계에 숙련됨으로써 권력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이때 지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그리스도인은 훈육을 통한 통제와 형성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의 부정적인 측면인 억압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소비문화의 훈육에는 거부하고, 성경적인 대안, 전통적인 교회의 훈육방법인 영성훈련과 봉사활동 등은 활용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대안문화를 실천하는 제자도의 삶을 살려면 성화의 연습을 통해 훈육되어야 합니다. 훈육을 통한 형성이 구조적으로 선함을 인식하고 기도와 금식, 묵상, 검약, 단순한 삶의 영적 훈련 전통을 회복하고 몸의 의례를 통하여 영혼을 빗어내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합니다 김길구 이머징교회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마무리인데 아쉽습니다.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서 ≪서양철학이야기≫, ≪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 하는가?≫란 책을 통하여 철학과 신앙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봤습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둘러보고 사유하는 힘을 길러보았습니다.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3월은 사순절 기간이라 경건한 삶을 실천한 열여덟 분의 일대기를 다룬 이정후 교수님의 ≪기독교 영성이야기≫란 책을 선정했습니다. 신앙과지성사가 10년전에 발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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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영화] 크리에이터
    크리에이터 The Creator, 2023 개봉 2023.10.03./ 장르 SF/액션/국가 미국/등급 12세이상관람가/러닝타임 133분 감독 : 가렛 에드워즈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죠수아), 젬마 찬(마야), 와타나베 켄(하룬), 매들린 유나 보일스(알피) 멀지 않은 미래, 미국 LA에 핵폭탄이 터졌다.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국방부는 인공지능 로봇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 무엇보다 인공지능 로봇의 설계자인 니르마타를 찾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 특별 임무에 죠수아 병장이 투입된다. 죠수아는 니르마타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마을에 잠입하고 거기에서 마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특수 부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야는 생명을 잃는다. 실의에 빠져 있는 죠수아에게 앤드류 대령이 찾아오고 마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야는 니르마타의 측근이며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가공할 무기인 A. I.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전한다. 마야를 살리고 싶다면 니르마타를 제거하고 그들이 개발 중인 로봇도 제거하라는 명령을 죠수아는 받아들인다. 죠수아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본거지로 침투하고 거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듣게 된다.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무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로봇 알피였고, 니르마타가 설계한 로봇 알피는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것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상징이었다. 가렛 에드워즈의 신작 크리에이터의 내용이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크리에이터는 올해의 화두였던 챗 GPT의 연계선상에 있다. 세계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발달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에 온통 관심이 쏟아진다. 일찍이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던졌던 스카이 넷의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이 영화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한 형태,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멀잖아 우리 삶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로봇은 인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그들은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우선 영화에서 앤드류 대령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장차 인류를 멸망시킬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 이런 설정을 할까? 일찍이 칼 세이건은 자신의 책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이 그랬고, 코르테스와 아즈텍이 그랬다.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성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칼 세이건의 우려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상의 적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눈에 낯선 존재들은 잠재적 적으로 규정된다. 비단 외계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제3세계의 사람들을 잠재적 적, 잠재적 악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과도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M. D.전략(미사일 방어체제)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은가? 여전히 흑인들이나 동양인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앤드류 대령과 특수부대원들은 로봇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악의 씨앗 자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죠수아 병장은 중립지대에 있다. 그는 앤듀류 대령의 명령을 따라 로봇들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로봇들과의 조우,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에 전환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 가공할 무기라 여겼던 로봇 알피와의 조우는 죠수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알피는 평화의 상징이었고, 알피는 모든 적대적 생각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로봇이었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죠수아 병장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접촉이 필요하다. 다른 문명 혹 타인에 대한 대부분의 적대적 생각은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우려에서 비롯된다. 만나보면 달라질 수 있다. 가다머의 주장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선이해구조를 가진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다머는 지평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평융합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슬람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인 ‘인샬라’( In Sha Alla)처럼,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내가 긍정으로 여기면 상대는 긍정으로 다가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로봇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아닌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인가? 호모 마키나인가? 신학자 페트릭 세리는 위고의 말의 빌려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즉각적 창조물이고, 예술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창조하시는 일이다.” 부언하면 자연이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이라면 예술 혹 기술은 인간을 통한 간접 창조물인 셈이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진정한 시인은 자기가 아니고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엔토우시아모스’라고 한다. ‘엔 en’은 영어 ‘인 in’, ‘토우 thou’는 ‘테오스 theos’에서 유래했으므로 ‘신 god’이다. 시인이 시를 창조할 때는 ‘신 안의 존재 das – In – dem – Gott – Sein’다.” 이렇게 볼 때 로봇은 신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신의 2차 창조물이자 간접 창조물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신의 창조 자체는 선하므로 신의 2차 창조물인 로봇도 선하다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 아닐까?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알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알피를 이용해 오히려 세계를 통합하려는 앤드류 대령이 문제 아닐까? 또한 우리는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 로봇에게 영혼이 존재할까? 물론 현대 뇌과학의 담론은 인간에게조차 영혼이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뉴런의 현상일 뿐 정신이나 영혼도 화학 작용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 전통,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는 전통에 의하면 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재료를 창조하셔서 그 재료가 물질을 형성하게 하신다. “신이 처음 원질료(재료)를 창조했다. 그러한 질료로부터 갖가지 힘에 의해 물(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과 신에 의해 창조된 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창조와 형성의 기본적인 구별이 행해진다. 다시 말해, ‘밖에 드러나는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여기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질료 materia와 형상 forma 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따르면 인공지능 로봇, 크리에이터에서의 알피는 질료와 형상을 가진 셈이다. 신의 일차적 창조와 이차적 창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부모를 매개로 태어날 때 신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신학은 가르친다. 이런 신학 전통에서 볼 때 실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정신 활동을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로봇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알피의 창조자 니르마타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우리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에 지나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속하기에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로봇은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인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기억하자. 오직 인간만이 영혼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하기에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창조하신 사물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타락한 죄성은 창조세계와 창조물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변질 시킬 것이기에. 구원받아 회심한 영혼이어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잘 관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관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잘 기억하는 것 – 이것이 영화 크리에이터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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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2
  • [기독교인문학] 세상을 보는 틀, 철학
    R.C 스프로울의 《서양철학 이야기》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가벼움이 판치는 철학이 홀대받는 이 시대에 고대의 철학자부터 현대의 다윈과 프로이트에 이르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을 평신도들이 알기 쉽도록 안내하는 서양철학 입문서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대부분의 사상을 진지한 검증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발자취를 함께 걷다 보면 우리의 사고와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뒤돌아 보게 된다. 현대철학의 신들은 ‘기독교의 살아있는 신을 철학적으로 분해해서 태어난 단순한 부산물’이라는 에티엔 질송을 지지하며, 칸트와 아퀴나스의 손을 들어 주고 있다. ◇ 저자소개 ∥ R.C. 스프로울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끈 저명한 신학자로 딱딱하게 들리는 성경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낙스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오랫동안 플로리다주 세인트 앤드루 채플에서 말씀을 전했다. 평생을 각종 강의와 콘퍼런스, 방송과 저술 활동으로 교회를 섬겼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로 선정되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기독교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했다. ◇ 저서∥《모든 사람을 위한 신학》와 《구원》, 《성령》 등 90여권이 있다.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강교수의 철학이야기》 강영안 지음 / IVF / 2001 《철학한다는 것》 표정훈, 강영안 / 홍성사 / 2021 《현대사상입문》 지바 마사이 / 아르테 / 2022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 갈라파고스 / 2010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주현성 / 더좋은책 / 2013 기독교인문학 〈44〉 세상을 보는 틀, 철학 - 사상의 흐름을 검증하고 분별해야 - 현대 철학의 정의 “에티엔 질송은 현대 철학의 신들을‘기독교의 살아있는 신을 철학적으로 분해해서 태어난 단순한 부산물’이다.’” 철학에 얽힌 이야기 김길구 오늘은 「생명의 말씀사」가 2002년에 첫판을 낸 이후 21년 만에 개정판을 낸 《R.C. 스프로울의 서양철학 이야기》입니다. 개혁주의 대표 신학자가 꿰뚫어 본, 우리 세계를 형성한 사상의 본질이란 수식어가 제호 위에 있습니다. 이 책과 함께 2001년도 출간된 근대 철학자 9명을 조명한 강영안교수의 《강교수의 철학이야기》도 함께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20년이 넘은 오래된 책이지만 국내에서 두 책의 초판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왔던 책입니다. 김현호 서두에 있는 1959년 여름방학 때의 아르바이트 경험담이 인상적이었어요. 이과를 전공하는 친구들은 쉽게 괜찮은 일자리를 잘도 얻는데 철학전공자인 그가 겨우 얻은 직장은 한 병원의 관리원으로 최저 시급의 비숙련 노동자였어요. 하루는 주차장을 청소하던 중 같은 일을 하는 50대의 청소부를 만나서 통성명을 하다 자신이 철학을 전공한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며, 철학자들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더라는 거예요. 그 질문들이 예사롭지 않아 알아보니 그는 독일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철학교수로 있다가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당에 붙잡혀 해직된 후 ‘위험한’ 사상을 가진 반체제 인사로 찍혀 아내와 아들은 처형되고 자신과 딸은 간신히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는 거예요. 왜 강단에 서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와 그의 가족은 히틀러의 사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예견했고 그들 역시 나의 철학이 그들의 체제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취한 조치로 우리 가족의 삶이 송두리째 망가져서 다시는 강단을 포기하고 딸만을 위하여 살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더라는 거예요. 류지원 책을 읽으면서 철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 예로 초대교회 시대에는 신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고대 헬라철학을 활용하여 교리의 뼈대 세우는데 공헌한 예라든지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 윤리를 정교하게 이론화하는데 도움을 줘 안셀무스는 논리학,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활용하여 이 시기를 신학대전을 집필 중세철학과 신학의 거두가 된 예 같이 지금도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고대 그리스 사상 김길구 책속으로 들어가 보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를 ‘축의 시대’라고 했어요. 이 시기에 멀리 떨어져 교류도 없던 지역에서 미래의 철학자와 종교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들이 나와 사람들의 관심을 신화에서 자연으로 돌리고, 자연과 도덕의 보편성을 추구하기 시작해 그때부터 인간은 '이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로 바꿔가기 시작했는데, 야스퍼스는 이러한 변화를 '정신화'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비로소 정신적 존재로 변화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시대의 대표적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호 서양의 모든 철학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플라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믿음을 ‘관념’ 즉 이데아 사상을 통해 변화하는 현실과는 다른 영원불변성을 구현해 냄으로써 현실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류지원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철학자라는 호칭을 받는 인물로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의 신 이해는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에 영향을 주나 윌 듀란트는 이에 대해 그의 신은 ‘군림은 하되 통치하지 않는 왕’이라는 비아냥을 주기도 했습니다. 근대의 철학가들 김길구 중세는 서양이 그리스도교로 통일된 시기입니다. 고대와 중세, 중세와 근세의 시대구분은 서로마와 동로마제국의 멸망을 기준으로 나누는데 이 시기에 활동한 철학자는 이 책의 별명을 제목을 따라 은총의 박사 아우구스티누스와 천사 박사인 토마스 아퀴나스인데요, 뒤에 다루기로 하고요, 근대의 철학자부터 해보죠. 본문에는 데카르트부터 프리드리히 니체까지 7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류지원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된 철학은 플라톤에 이르러 보편이란 실재론을 만들고 진리를 이성으로 이해하고 신과 이성이 하나로 보던 관점이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유명론이 힘을 얻으면서 신학과 철학이 분리되는 시기가 근대입니다.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철학,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성이 근대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모색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론과 실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론으로 갈라집니다. 김현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란 말로 유명한 근대합리론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의 철학적 의미를 최초로 포착한 철학자들로 전통적인 종교와 도덕을 유지하면서 전혀 새로운 과학. 새로운 과학적 삶의 태도를 확립하려 했다면, 국가 안에서 인간의 행복을 추구한 홉스와 이성을 확고히 믿으면서 신 없이 신 안에 사는 삶을 찾으려 했던 스피노자는 전통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에 따라 삶과 세계를 해석하려 했던 혁신적인 철학자로 분류됩니다. 합리론과 경험론 김길구 베이컨이 경험론의 길을 열자 그 길 위로 존 로크가 경험철학을 들고 나타나고 버클리에서 흄으로 이어지며 경험론이 완성됩니다. 혁명적인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는 직관(경험) 없는 개념(이성)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며,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하여 철학사의 거목으로 우뚝 서고 그가 그려놓은 그림에 헤겔이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원리를 집어넣어 독일관념론이라는 근대철학이 완성됩니다. 김현호 헤겔이 칸트의 이원론을 변증법을 통하여 극복하려 했다면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였고, 덴마크의 골칫덩어리 키르케고르는 한 개인의 실존이 더 중요하다고 외칩니다. 여기서 실존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개인적 인간이 아닌 어떤 상황 속에 놓인 ‘나’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결정해야 하는 동적인 나입니다. 이런 양자택일적 상황을 실존적 상황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실존이 철저히 개별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로 주체적 삶을 표현합니다. 류지원 단독자란 개념은 당시의 부패한 기성교회의 반발에 묻혔으나 두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되살아나 마르크스의 사상에 견줄만한 철학은 실존주의 밖에 없을 정도로 맹위를 떨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에 영향을 받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유럽의 모든 지적 전통에 반기를 듭니다. 비겁자와 노예의 도덕인 기독교의 도덕을 부셔야 한다며, 신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도덕을 가지고 권력의 의지를 불태우는 초인을 불러냅니다. 그런 그의 사상은 망치를 든 철학자란 별명과 함께 실존철학의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로 이어지고 현재까지 데리다 푸코 등에게 영향을 미쳐 프랑스 현대철학을 지탱하고 있어요. 김길구 오랜만에 고등학교 윤리시간이 생각납니다. 계획은 현대철학,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도까지 다뤄볼까 했는데, 결론도 못내리고… 주마간산식으로 훑어만 봤는데도 책의 2/3도 못했습니다. 지면도 지면이지만 그 어려운 철학의 2,500여년의 여정을 비전문가가 불가 2시간 만에 끝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리 김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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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영화]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감독 : 캐서린 하드윅, 주연 : 오스카 아이작(요셉), 케이샤 캐슬 휴즈(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땅으로 오셨고, 주인이 종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이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와 거주하기 위해 그 분이 오신 날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날을 인간들의 축제로 변질시켰다. 연인들의 날로 바꾸고 선물 꾸러미로 대체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영화를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 본질을 묵상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유대 땅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스토리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시공간적 간극이 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기에 당시의 문화, 분위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위대한 탄생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정확무오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대의 사회, 문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우선 영화는 예수의 모친이 되실 마리아에게 집중한다. 그녀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 친척 엘리자베스를 찾아가는 것,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임신의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 당대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익명성의 사회도 아니다. 마리아가 살았던 곳은 작은 마을이었고 온 마을이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아는 시대다. 그러한 때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으니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이러한 마리아의 고뇌, 당시 주변 인물들의 반응, 그녀를 비난하는 것에서 인정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한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자 했다. 자칫 목숨의 위험까지 있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믿음에 있다.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기도 생활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하였다. 만약 마리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가치관이 더 강했다면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순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믿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역설을 믿었고, 믿음의 조상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 요셉의 혼란도 잘 보여준다.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고뇌, 분노, 당혹감은 당연하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쉽게 읽기에 그 행간에 있는 감정, 분위기, 혼란을 간과하기 쉽다. 영화는 친절하게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잘 보여준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요셉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준다. 요셉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의 믿음, 그의 결단, 그의 다짐은 당대의 윤리를 뛰어넘는다. 요셉 역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뜻과 다를 수 있음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다를 수 있음을 믿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요셉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면, 고뇌, 결단을 볼 수 있어 좋다. 또 하나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동안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그린 성화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왔다. 우리가 본 예수님은 긴 머리에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서양의 잘 생긴 남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난 동양인이셨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도 중동인이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이 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혈통은 유대인이시다. 유럽인이 아니시다. 로마인이 아니시고 유대인이시며,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시다.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내방, 헤롯의 반응, 헤롯의 군사들의 만행을 스크린 속에 펼쳐놓는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장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느낌, 분위기, 위기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 위대한 탄생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저 몇 줄 성경의 기사로 끝나지 않고 대신 긴박하고 극적인 스토리라는 것, 그러하기에 더욱 위대한 스토리이며 우리의 구원 이야기임을 잘 보여준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조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성육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육신은 경이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의 몸을 입으셨다. 자기 부정의 절정이다. 성육신, 즉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한 자기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인간으로 오셨는가? 왜 우리와 같아지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시고 세상을 맡기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결정적으로 시험에 빠졌다. 사탄의 유혹은 한 가지였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이다. 다른 말로 상향성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를 낳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을 낳았다. 바벨탑의 핵심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수많은 인간들, 왕들은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 성육신은 정확히 이것과 반대다.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셨다. 상향성이 하니라 하향성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인간의 본성이 상향성을 향하기 때문에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그 분이 낮아지심으로 하향성이 살 길임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그 분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상향성의 본성을 극복하고 하향성을 배운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향하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향한다.” 따라서 성육신, 즉 성탄의 본질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낮아짐이다. 자기 비움이자 자기 부정이다.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다. 그래서일까? 성탄의 기쁜 소식은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다. 성탄을 축하한다면 우리 또한 낮은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한다. 가장 높으신 그 분이 가장 낮아지셨기에 그 분을 영접하는 가장 낮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이제 가장 높은 자가 된다. 그래서일까?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 올해의 성탄은 이 본질을 잘 이해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을 통해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예수님의 임재를 증거하며, 우리의 본성인 높아짐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면 좋겠다. 이 기쁜 소식이 교회당 뿐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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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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