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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선교의 야성을 회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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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속 아버지 같은 선교사
금년에도 선교다큐멘터리 영화의 행진은 계속되고 있다. 2009년과 2017년 사이에 국내에서 개봉된 기독교 극영화는 단지 4편에 불과했지만, 같은 시기에 무려 26편의 기독교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되는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16편은 선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들의 선교사역이 스크린 위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개봉한 이성관 감독의 영화 <파파 오랑후탄>(Papa Oranghutan)은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사적인 흐름의 한끝을 잇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파파 오랑후탄>은 말레이지아의 밀림 속 우루깜바 마을의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박철현 선교사의 행적을 여러 모양으로 담은 헌신적인 사랑의 얘기다. 말레이시아어로 ‘파파’는 아버지, ‘오랑’은 사람, ‘후탄’은 정글 숲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어서 합치면 ‘정글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자연의 원시성과 원주민의 인간애이며, 아울러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는 선교사의 신앙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야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현대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야생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한편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릎쓰고 선교현장으로 달려가는 박철현 선교사의 모습에는 초대교회로부터 비롯된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인의 야성적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오직 뜨거운 가슴을 안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마침내 사랑의 고지를 점령하는 신앙의 전사(戰士)의 모습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앞부분은 박철현 선교사의 말레이시아 밀림 속의 선교사역현장의 과거와 현재로 이루어져있고, 뒷부분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박철현 선교사의 고뇌와 다시 선교현장으로 돌아가 죽기를 다짐하는 신앙의 결단이 펼쳐진다.
<파파 오랑후탄>은 지금까지 제작된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모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원시적 이미지나 경제적으로 낙후된 환경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열정과 고통을 드러내며, 결정적으로 믿음 안에서 갖게 되는 희망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 방식이다.
선교현장의 기적을 지켜보다
<파파 오랑후탄>은 기존의 선교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두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는 외형적으로 다큐멘터리 형식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복합 구성 양식을 갖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박철현 선교사의 선교현장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함께 사역하는 현지 목회자의 인터뷰와 교회 개척 상황이 펼쳐지고, 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후 주술적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현지인들의 생활과 예배 모습이 담는 것은 여느 선교다큐멘터리와 유사하다. 그러나 과거 박철현 선교사가 원주민으로 부터 당했던 핍박의 상황과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일은 인터뷰나 내레이션이 아닌 연기자를 통한 재연 드라마로 묘사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속에 재연 드라마를 삽입하는 방식은 영화는 시각적 매체의 특성을 살린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과거의 사실을 보다 깊이 그리고 사실적으로 인식시키는 한편으로 정서적인 면에서 보다 강한 울림을 일으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현재는 과거의 사실이나 현장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연기자와 극본 그리고 드라마 전문 연출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제작비와 시간이 요구되는 까닭에 선교 다큐멘터리 감독이 선뜻 선호하는 제작 방법은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하도록 돕고 있는 점이다. 식인종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부족이 한 사람의 선교사의 헌신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일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지만, 영화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치유과정을 보여주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는 우르깜바 마을에서 박철현 선교사를 가장 핍박했던 까심에게 임한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다. 그는 박선교사를 죽이려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던 사람이지만 폐병에 걸려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박선교사의 기도와 간구를 통해 살아났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함한 까심은 놀랍게도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박철현 선교사와 함께 현지 교회를 개척하고 있다.
또 다른 기적의 사건은 박철현 선교사 자신에게서 일어났다. 한국에서 대장암 말기를 진단받고 병원에 누워있던 그가 선택한 곳은 말레이시아의 밀림 속 이었다. 원주민 곁으로 돌아간 그는 뜻밖에도 이제는 신앙인으로 변한 원주민들의 기도와 보살핌 속에서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와 사랑이 일으키는 상호작용은 선교현장에서 기적을 일상적인 일처럼 만들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사실적 표현을 중심으로 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목격할 수 있는 일은 기독교 신앙전파에 영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가 아닐 수 없다.
가성비 높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나라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메시지를 담아왔다. 교회와 선교회 그리고 아는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제작비는 현지제작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부족하고, 유명 기독교 연예인을 출연시켜 진행하는 내레이션은 재능기부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 상업영화들이 기획사(대형 영화사는 자체 기획과 제작을 함께 맡기도 한다)를 중심으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아 상영 후 얻게 된 이익을 나누는 구조와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기획의 단계부터 흥행에 따른 결과로 이익을 낼 것을 기대하고 제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수익과 상관없이 될 수 있는 한 많은 관객들이 볼 수 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일반 상업영화 제작자들의 희망사항과 다르지 않다. 다만 일반영화 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곧 흥행수익을 뜻하지만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자들에게 많은 관객은 하나님 말씀과 기독교 신앙이 보다 넓게 퍼져나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파파 오랑후탄>은 열악한 제작환경 속에서 빛을 본 다른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들과 같은 제작 이력을 갖고 있다. 한국을 떠나 말레이시아로 향할 때 출발한 제작진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이성관 감독과 주인공 박철현 선교사의 대역을 연기한 배우 염광호 이렇게 두 사람이다. 산 속을 헤치고 강물을 건너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카메라와 삼각대 등의 촬영 장비를 직접 손에 들고 현지 촬영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상업영화 제작자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어려운 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제작진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일이다. 마침 현지에서 단기사역을 하고 있던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백방으로 돕는 바람에 분장과 의상, 섭외 심지어 오디오 담당 스탭을 꾸릴 수 있었다. 현지를 잘 아는 선교사들은 섭외를 맡았고, 대역 연기를 담당할 현지 연기자들을 찾는 일도 현지 선교사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을 위한 과제
<파파 오랑후탄>은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독립영화의 성격을 갖는다. 즉 흥행성 높은 대중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상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한다는 점에서 선교 다큐멘터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관객으로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상을 통한 복음증거의 현장에 함께 하는 것, 즉 기독교 영화를 꾸준히 소비하는 일이다. 기독교 영화가 일반 극장에서 상영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경제논리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즉 소비가 되는 곳에 생산이 있기 마련이다.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기독교인들이 몰리면 극장주들은 자발적으로 이 영화들을 수용할 것이다. 극장은 많은 관객으로부터 나오는 수익에 일차적 관심이 있음을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복음전파라는 기독교인의 책임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 영화를 만드는데만 열정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극장이 추구하는 경제논리를 염두해 두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극장에 달려가는 수고와 기쁨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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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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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삼손, 신앙의 영웅이 가야할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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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기를 뺀 영화 ‘삼손’
<십계>와 <벤허>를 기독교영화의 진수로 여기는 기성세대에게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의 이미지들은 모두 세실 드밀(Cecil B. DeMille)감독의 영화 <삼손과 데릴라>(Samson And Delilah, 1949)로부터 나왔다. 드밀 감독은 근육질을 뽐내는 괴력의 사나이 삼손(빅터 마추어)을 히브리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어기고 이방인 블레셋족의 아름다운 처녀 데릴라(헤디 라마)와 사랑에 빠져 몰락하고 마는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는 미국 개봉 연도 흥행순위 1위를 기록할 만큼 크게 성공했고 그 영향력은 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삼손이 그리는 사랑과 모험을 거대한 화면에 담았으니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서 이루어지는 신분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과 사자를 찢어죽이고 블레셋 사람을 몰살하는 액션장면은 자칫 선정성과 폭력성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이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란 성경의 기본 배경덕분에 윤리적 비판을 면할 수 있었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은 한마디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을 위한 대중영화로서 충실했다는 평을 받아왔다.
세실 드밀 감독의 <삼손과 데릴라>의 힘이 너무 큰 것인지 지금까지 그에 필적할 만한 ‘삼손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교회 교육용으로 나온 DVD나 TV용 드라마로 연출된 작품들이 있었지만 1949년작 <삼손과 데릴라>에 필적할 만한 영화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영화 <삼손>이 2018년 새로운 이미지로 탄생했다. 나름 그 이유가 있다.
최신 영화 <삼손>이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 점은 제목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러난다. 성경이 주목한 인물은 어디까지나 ‘삼손’이지 ‘데릴라’가 아니란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실 드밀 감독 이후 삼손은 항상 데릴라와 짝지은 캐릭터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삼손의 타락과 비극적 인생에 데릴라는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에 언급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삼손이다. 드밀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데릴라를 삼손과 대등한 비중을 부여하며 연출했다. 삼손의 고뇌만큼이나 데릴라의 유혹은 강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나온 삼손 관련 영화들 가운데는 바로 데릴라의 유혹에 연출 역량을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들도 있었다.
브루스 맥도널드 감독의 새로운 영화 <삼손>은 데릴라의 선정적 유혹을 걷어내고 삼손에게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삼손이 놀라운 힘으로 벌이는 살육장면 역시 성경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한도 내에서 폭력이 절제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일반대중이 기대했던 화려하고 스펙터클하며 더 나아가 선정적인 장면은 쏙 빠진 기독교 신앙영화의 본래 모습을 찾으려는 의지를 확고하게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삼손>은 국내개봉을 앞두고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는 <삼손>을 만든 제작사의 면모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삼손>을 제작한 퓨어 플릭스(Pure Flix Entertainment)는 미국에서 기독교영화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기독교영화전문제작사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4년간 개봉된 퓨어 플릭스의 영화만 해도 <신은 죽지 않았다1,2>를 비롯해서 <예수는 역사다>, <신을 믿습니까> 등 이미 네 편에 달한다. 퓨어 플릭스가 미국에서 제작‧배급한 영화 타이틀이 수십편에 이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퓨어 플릭스 영화들은 계속 대한민국에 수입 개봉될 가능성이 높다.
퓨어 플릭스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영화 사역(MOVIE MINISTRY)’에 대한 사명선언문을 붙여놓고 있다.
‘우리의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영화를 창작하는 것입니다(Our passion is to create films that impact our culture for Christ)’
할리우드가 지향하는 세속적이며 상업적인 성공과 달리 기독교 신앙영화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퓨어플릭스의 사명선언문은 <삼손>이 왜 <삼손과 데릴라>와 다른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영화 <삼손>은 삼손과 데릴라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드밀 감독의 영화와는 다르게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 삼손과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고 있던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과 그의 패역한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과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것은 삼손의 정체성을 데릴라와의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의 상상력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내용과 적어도 90% 정도는 일치하고 있다.
영화의 주된 갈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삼손과 우상 다곤(Dagon)을 섬기는 블레셋과의 싸움으로 묘사되며, 그 내면에는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블레셋 왕 발렉이 우상 다곤을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언급을 통해 다곤신이 진정한 신이 아닌 단지 통치의 수단에 불과한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이 영화에는 등장하고 있다. 블레셋의 발렉왕(빌리 제인)은 아들 랄라(잭슨 라스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해. 저들에겐 상징이자 평민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겐 통제의 수단이야. 내가 다곤이고 너도 다곤이 될 수 있어.”
우상숭배를 통해 백성을 통제하는 한편으로 스스로가 우상이 되고자 하는 과거 권력자의 속성을 한순간에 알아챌 수 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또한 삼손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며 삼손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나실인으로 지켜야할 약속을 소홀히 여긴데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나실인이란(민6:1-21) 구별된 자의 의미로 삼손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야 하며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않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이 약속들을 모두 어기는 죄에 빠져들고 말았다.
우리는 흔히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만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일로써 삼손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삼손이 힘도 쓰지 못하고 블레셋에 붙잡혀간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죄의 구렁텅이 속으로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삼손이 긴 머리카락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운 힘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감동되어 있을 때 그 힘이 나타났을 뿐이다. 즉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을 때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사자를 찢어 죽일 수 있었고(삿14:6), 수수께끼를 푼 자들에게 옷을 주기 위해 아스굴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삼십 명을 쳐 죽일 수 있었다(삿14:19). 삼손의 힘의 근원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속 삼손은 말한다. “벌써 두 개를 어겼는데 머리마저 자르면 내 힘이 사라질까봐 두려워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의미
2018년 영화 <삼손>은 예술적이거나 대중적 의미보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영웅의 삶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근본적으로 사사기의 문화적 상황은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취향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이를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21:25)
이 보다 더 사사기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는 구절은 없다.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방 족속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아 도움을 호소하며 울부짖으면 그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이야기는 사사기에서 늘 반복되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원인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와 행동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 잡아주고 인도할 지도자가 부재했던 까닭이다.
예술과 패션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현대인들은 자신의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맞으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하다. 지나친 상대주의는 진리마저도 개인의 판단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즉 하나님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재단해 버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신앙과 전통 그리고 도덕적 규범은 무시당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삼손의 힘이 넘치는 외모에는 눈길을 주지만 그 힘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며 관심조차 없다. 누군가 삼손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도 그것은 개인의 사소한 의견으로 치부해버릴 뿐이다.
영화 <삼손>의 한국어 포스터에는 ‘주여 당신의 힘을 주소서!’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삼손이 힘이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께 간구했던 표현이다. 어벤져스와 같은 만화적 영웅들이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영화들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영웅의 일갈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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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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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새롭게 조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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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달라 마리아' 포스터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시킨 역사와 영화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막달라 마리아-부활 의 증 인 >(Mary Magdalene, 2017)이 개봉예정이다. 영화 <라이언>(Lion, 2016)을 통해 인도출신 입양아가 동생을 찾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미국감독조합상 감독상을 수상한 가스 데이비스 감독이 연출을 맡아 작품에 대한 완성도를 높였다. 거기다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 역에 연기파 배우인 루니 마라, 예수 역에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코모두스 역을 맡아 유명해진 호아킨 피닉스를 등용시켜서 잔뜩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과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의 조합이 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묘사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그러나 무엇보다도 TV가아닌 극장 개봉용으로 제작된 성서영화(Bible Cinema, 기독교신앙의 증진이나 전파로 제작된 영화뿐만 아니라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성경의 내용을 다룬 영화를 통칭하여 부르는 말)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극장에서 개봉된 성서영화들은 모세의 출애굽사건(엑소더스:신들과 왕들, 2014)이나 노아의 홍수 사건(노아, 2014)과 같이 일반대중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사건들을 다루거나, 예수의 극적인 삶을(부활, 2016) 보여준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과거 성서영화의 전통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일로서 무성영화 시대에 할리우드를 주도했던 세신 데 밀(CecilB. DeMille) 감독의 영화들 또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즉 성서영화의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소외되어 있었던 것이다.지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시킨 영화들의 핵심문제는 사실 소외에 있지 않고 왜곡에 있다고 보아야한다. 성경과 다른 모습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이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영화는 잘 못 반영했거나, 교회가 잘못 가르친 내용을 영화는 그대로 실어 날랐다고 볼 수 있다.할리우드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과는 다른 세 가지의 모습으로 비춰졌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등장시킨 잘못을 저질렀다.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나 니코스 카잔차키스 원작을 마틴 스콜세지감독이 영화로 만든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 출신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성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나 ‘죄인’으로 언급된 일은 없다. 누가복음 8장 2절과 마가복음 16장 9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단지 ‘예수님이 일곱 귀신을 쫓아 내준여성’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되게 한결정적 원인은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540~604)의 실언 때문이다. 그는 591년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무명의 죄 많은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하고 동시에 그녀를 창녀로 설교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후 가톨릭은 물론 종교개혁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이르기 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인식하게 되었다. 1969년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이를 철회했다.
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를 베다니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뜨려 부은 여성과(마26:6-7) 동일시하는 것 또한 오류이다. 그레고리우스1세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은 일곱 가지의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이를 참회하기 위해 값비싼 향유옥합을 깨뜨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현재 한국의 개신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에서 조차 향유를 예수님께 드린 여성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장 파격적인 표현으로 예수의 연인 혹은 예수의 부인으로 묘사한 영화들이다.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2006)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 속에서 예수님 우편에 앉아 있는 제자로 해석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와 결혼한 후 낳은 자녀의 후손이 프랑스로 건너가 메로빙거왕조를 이루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쏟아냈었다.기독교 역사와 현대문화 할 것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교회 안팎으로 늘 있어왔지만 성경의 시각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이다.
제자의 위치로 복권시킨 영화<막달라 마리아:부활의 증인>은 성경에언급된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구조로 진행되고 있다.첫째는 막달라 마리아의 생활 배경과 예수님이 미쳤다고 소문이 난 막달라 마리아를 고쳐주는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에 인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는 일반적인 미혼의 여성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이 들린 것(눅8:2)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아버지의 정혼을 거부한 가운데 미친 상태에 놓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에는 일곱 귀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들렸는가에 대한 얘기는 빠져있다. 일곱 귀신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당시 사회 정황으로 봤을 때 딸이 부모의 정혼을 거부하는 일은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로 인식될 가능성은 없지 않다는 점에서 감독의 묘사는 성경의 어휘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혀 근거없는 연출이라고 볼 수는 없다.둘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을 전파하는 예수님 및 열두 제자들과 동행하며 말씀과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다.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던 유일한 여성이 아니라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했고 또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섬기는(눅8:3)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남성 제자들과 대비시키기 시작한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견제하며, 남성 제자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긴다.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혁명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인간의 죄를 구하러 오신 메시아임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막달라 마리아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있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거듭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비록 여성이지만 예수님을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와 달리 진정한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일 것을 예고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셋째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목격자이며 증언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준다. 영화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 본 인물로 막달라 마리아를 등장 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덤 앞을 떠나지 않고 지킨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발견되는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친밀성이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온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된 반면에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단독으로 만난 여성제자로서의 면모는 매우 강조된다. 그것은 주변에 발각될 경우 큰 화를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고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하는 제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를 강조하다 일으킨 실수
복음주의 기독교권에서 성서영화는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곤했다. 하나는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 지를 보았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상상력의 개입여부이다. 성경의 내용을 다루면서 비성경적이거나 반성경적인 묘사나 언급은 아무리 뛰어난 주제의식과 연출력을 보여주더라도 교회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렇다고 성경의 문구를 단지 시각적으로만 펼치는 태도 역시 기독교문화가 지니는 예술적 가치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기독교 영화 제작의 어려움은 여기서 드러난다. 성경과도 부합하면서 이 시대를 사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시각적 연출력을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가스 데이비스 감독의 연출은 마치 한편의 시를 쓰듯 축약과 상징을 쓰는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핵심적인 대사와 장면을 통해 참사랑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고통 앞에 선 인간의 면모를 잘 묘사하고 있다.문제를 삼을 수 있는 것은 유월절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만찬 장면이다. 이 성만찬은 12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한 자리로서(마26:20) 그 인원이 분명히 성경에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성찬식 장면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인원구성을 감독이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태여 막달라 마리아를 성찬식 장면에 집어넣은 것은 결국 한 가지 이유 밖에는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참 제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여성을 바라보는 이 시대의 시각에 달려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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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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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즈니, 내세를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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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코' 포스터
디즈니가 말하는 ‘좋은 죽음’
디즈니가 죽은 자들의 세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자회사인 픽사(Pixar Animation Studio)가 만든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소년 미구엘이 죽음의 세계에서 조상(고조할아버지)을 만나 음악을 금지한 가족의 내력을 파헤치는 낭만적 모험을 그리고 있다. 온 가족이 즐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디즈니의 역사가 다시 한 번 증명되기라도 하듯 <코코>는 죽은 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노래와 춤이 있는 흥겨운 축제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코코>가 묘사하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배경은 멕시코의 ‘망자의 날’(Dia de los Muertos)로부터 가져왔다.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망자의 날’은 매년 10월 31일에서 11월 2일 까지 벌어지는 멕시코의 국민축제의 날로써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그들의 묘소를 방문하는 행사를 벌인다. ‘망자의 날’은 고대 아즈텍문명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톨릭의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식과 결합되어 지금에 이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망자의 날’이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으로 나올 만큼 대중화된 데에는 죽은 자들이 ‘망자의 날’에는 저승으로부터 내려와 자신의 무덤을 방문한다는 생각과 할로윈 데이를 즐기는 대중들의 욕구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는 가톨릭이 지키는 모든 성인 대축일(Sollemnitas Omnium Sanctorum) 전날로 가톨릭의 중요한 기념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며,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할로윈 데이와 ‘망자의 날’이 연계되면서 국가적 축제일로 변화한 것은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신자인 멕시코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묘사한 <코코>의 장점은 죽음을 가족의 사랑과 연계시킴으로써 ‘좋은 죽음’을 생각하게 만드는데 있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지낸 최준식 교수가 언급했듯이 한국에서 죽음은 외면되고 있고 부정적이며 회피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분이며 그것도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드문 형편이다. 놀라운 것은 부활과 천국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조차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는 사실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는 현실에서 <코코>는 가족의 사랑을 연계시키면서 죽음을 삶 가까이 끌어들인다. 특히 가족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어야 저승으로부터 죽은 영혼이 이승으로 내려올 수 있다는 영화의 설정은 가족의 가치가 점점 퇴색해가는 한국의 현실에서 매우 의미있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코코>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멕시코인들의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죽은 조상과 현실 세계의 가족과의 관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결시킴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통해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기억하는 한국의 유교전통과도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들 보는 만화영화 치고는 달리 죽음과 내세를 묘사하는 심도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는 한국에서 27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코>를 의미있게 바라보는 관객이 발견한 것은 ‘좋은 죽음’이다. ‘좋은 죽음’은 살아있을 때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준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 ‘좋은 죽음’일 수 있음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디즈니의 내세관에 딴지를 걸다
가족과의 사랑이란 보편적 주제를 죽음을 통해 언급한 <코코>의 놀라운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보여주는 내세관은 심각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 오락영화인 까닭에 굳이 기독교의 세계관을 대입하는 일이 필요한가라고 물을 수 있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만큼 허구와 진실을 분별하지 않은 채 영화관 밖을 나선다면 영화가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코코>는 기독교의 내세관이 갖고 있는 핵심 사항인 심판과 지옥에 대한 묘사를 회피하고 있다. <코코>가 보여주는 죽음의 세계는 해골 모양을 한 영혼들이 세상에서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다.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를 독살한 음악가조차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존재도 그리고 최소한 인간의 잘못된 행위에 따른 심판도 형벌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히9:27)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심판과 형벌에 따른 지옥에 대한 언급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 보다 즐겁고 화려한 축제만이 있는 곳으로 묘사될 뿐이다.
이 책임을 일차적으로는 영화 제작에게 물을 수 있지만, 아울러 교회에도 그 책임의 일부를 물을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부드러우며 교양이 넘치는 설교는 현대 설교자의 덕목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설교는 오히려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인식시키기 쉬울 뿐이며 전도가 중요한 현대교회의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죽음과 내세에 대해 올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현대인들은 <코코>가 보여주는 내세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1740-1742) 기간 중 신명기 32장 35절을 가지고 엔필드지역에서 행한 설교에서 지옥의 끔찍한 모습을 묘사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함으로써 회개운동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란 제목의 이 설교로 인해 당시 청중들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울부짖으며 회개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옥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가 그리는 지옥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묘사하기 위해 마가복음 9장 44-45절에서 사용된 지옥의 표현을 사용하기를 꺼려하지 않았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위태로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그의 성경적 열심히 낳은 모습이었다.
디즈니의 위력을 경계하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상황이 한창이었던 1959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소련의 흐루시초프 당제1서기장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흐루시초프가 이 초청을 받아들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 측 인사에게 디즈니랜드 관광을 시켜줄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 국무성은 경호상의 문제를 들어 거절했다. 흐루시초프가 미국을 떠나면서 무엇을 가져가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디즈니랜드라고 말할 만큼 그의 마음은 미국 방문 내내 디즈니랜드에 꽂혀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디즈니랜드에 마음을 둔 것은 디즈니의 만화 때문이었다. 레닌에 이은 스탈린의 강권통치 시절 소련은 자국 내에서 자본주의 문화의 상징인 할리우드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켰다. 미국의 어떤 문화들도 소련에 유입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었다. 그런데 단 예외가 한가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디즈니의 만화영화였다. 코흘리개 애들이나 보는 만화에는 미국 자본의주의 이념적 내용이나 색깔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고, 단지 애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반적인 내용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디즈니는 지난 해 12월, 524억 달러(약 57조원)를 들여서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 가운데 하나인 21세기폭스사의 핵심 사업을 인수하는 매머드급 ‘빅딜’을 체결했다. 1996년 ABC 방송을 2백억 달러에 인수한데 이어서 2006년에는 픽사 스튜디오를 그리고 2009년에는 미국의 양대 만화제작사 가운데 하나인 마블을 합병했다. 2012년에 할리우드 최고의 특수효과 제작사인 루카스 필름을 인수한 일은 이미 예상된 바였다. 디즈니가 세상의 문화를 지배할 날이 다가온 듯하다. 만화영화 <코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이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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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