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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와 사랑 사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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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독교영화의 탄생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은 디지털 세대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기독교영화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비싼 관람료와 극장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 대신에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면 어디서든 공짜로 볼 수 있는 영화가 우선 선택을 받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동안 기독교영화란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형 성서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진 기독교인을 놀라게 하는 일인 동시에 문화의 변화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한국기독교영화계에 가히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만한 일이란 점에서 주목받기에 합당하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콜링>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첫째는 영화를 상영하는 플랫폼(platform)으로 일반 극장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택했다는 것과 둘째는 젊은 기독교인들의 일상적인 삶과 고민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변화는 물씬 느껴진다.
플랫폼의 변화는 디지털 시대가 한창 진행 중인 현시점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다.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플랫폼을 선택하느냐가 성패를 가늠한다할 만큼 핵심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콜링>은 일반 영화관이나 DVD가 아닌 유튜브를 선택했다. 즉 영화라는 문화콘텐츠를 전달하는 플랫폼에는 영화관과 TV와 같은 전통적인 상영방식을 비롯하여 이제는 과거 유물이 된 VCR과 우리나라에서는 적극적인 호응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DVD가 있다. 또한 최근 각광받고 있는 IPTV나 인터넷을 통하여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VOD 등도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성격을 지닌다.
과거 영화의 경우 플랫폼은 원 소스 멀티 유즈(one-source multi-use) 시스템 안에서 이해되곤 했다. 즉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도 그것이 극장뿐만 아니라 DVD와 영화전문 케이블 TV 그리고 컴퓨터 게임과 책으로 까지 연계되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활용될 가치가 높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플랫폼은 스마트폰과 연계되어 정보콘텐츠를 디지털세계 안에서 전달받을 수 있는 시스템 환경을 말한다. 쉽게 말자하면 아마존이나 구글, 페이스북 등이 플랫폼에 해당한다.
유튜브나 인터넷 VOD는 가장 성장세가 빠른 영화의 플랫폼들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밝힌 지난 해 한국인들의 영화관람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2018년 극장을 찾은 관객의 수는 총 2억1,649만 명으로 1인당 영화관람 편수는 4.18회에 해당한다. 이것은 세계최고 수준의 영화관람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한국의 영화의 나라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수치는 2017의 2억 1,987만 명 보다 약 3백만 명 이상 줄어든 수치이기도 하다. 그러면 한국의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극장을 찾는 관객 수는 줄어들었지만 극장입장권 판매액은 오히려 늘어났다. 이유는 극장관람료가 올랐기 때문이다. 평일 일반 영화를 관람비가 1만원이고 3D나 4D를 주말에 보려면 2만원을 줘야하는 현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약한 학생들의 입장을 줄어들게 만든 주요한 원인이지만 전체관람료 수익은 증대시킨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관람료에 부담을 느낀 한국의 젊은층들이 대신 찾아간 곳은 넷플릭스(Netflix)를 볼 수 있는 인터넷 VOD시장이었다. 흔히 말하는 디지털 온라인시장의 규모는 극장관람료 수입이 감소한 것과는 다르게 상승세에 있다. 2017년 4,362억 원이었던 온라인 영화시장은 2018년 4,739억 원으로 8.6% 증가했다.
이것은 영화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극장만이 아니며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복음과 기독교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세계와 유튜브 세상에 발을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함을 시사 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람 감독의 영화 <콜링>이 유튜브를 놀이공원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는 매우 적절한 문화선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 삶을 코믹하고 성경적으로 풀다
<콜링>이 이전의 기독교영화들과 다른 두 번째 면모는 작품의 내적인 표현방식에서 나타난다. 주제는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름심과 응답을 다루고 있지만 묘사하는 방식은 매우 현대적이며 새롭다.
중고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재민(임재민)은 어느 날 자동차를 보러 온 시연(김시연)을 만나면서 새로운 사랑을 꿈꾼다. 예전에 좋아했지만 오랫동안 보지 못하는 동안 시연은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재민은 정직한 기독교인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재미는 선교사로의 부르심과 옛 사랑에 대한 성취 사이의 갈등 속에서 전개된다. 재민은 시연과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시연이를 따라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만일 시연과 다른 인생을 산다면 그것은 선교사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매우 감정적인 판단을 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교회에서 나름 진지한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울러 연애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를 영화는 갈등의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영화는 정답도 제시한다. 선교는 선교이고 사랑은 사랑이지 선교를 사랑과 혼합시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혼잡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관객에게 제시한다. 교회를 다니는 신실한 청년들의 고민 가운데 하나인 부르심 혹은 소명, 아니면 비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철저히 현실적인 언어로 영화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감독의 영화관이라 볼 수 있는 재미의 추구는 기독교영화도 디지털 세대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연은 묵직하고 진지하지만 주변 상황을 만들어가는 조연은 매우 코믹하다. 재민이 정직한 중고차딜러로서 방송을 타고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을 무렵 그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감독은 매우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장은 재민에게 아메리카노 커피 투 샷을 건네주면서 격려하지만 재민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한다.
사장: “왜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거야.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어? 최실장이 괴롭혀?
재민: “아닙니다.”
사장: “그럼 뭐야, 아메리카노가 맛이 없어?
재민: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차 파는 일을 하는 게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 “임실장, 정신차려 자네가 대한민국 중고차 딜러 중에서 최고야. 자네가 웬만한 딜러 다섯 명 여섯 명 보다 훨씬 많이 팔고 있어.
재민: “저는 이제 선교를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 “그걸 왜 니가 해?
재민: “하나님께서 저를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
사장: “하, 하나님은 너를 중고차 딜러로 부르셨어!”
영화 연출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심오하고 중요한 얘기를 코믹하게 묘사하는 일이다. 신중하고 중차대한 일을 무거운 톤으로 연출하기란 어렵지 않다. 공포영화는 무섭게 만들고 멜로드라마는 달콤하게 묘사하듯 기독교영화라면 신앙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에서 기품있고 은혜가 넘치는 느낌이 나도록 표현하면 될 것이란 생각을 영화는 뒤집는다. <콜링>은 결정적 순간에 코믹한 발상을 숨기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디지털 세대가 좋아하는 쿨한 방식인 셈이다. 슬프다고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고 잘됐다고 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것은 너무 고전적이다. 인터넷 세대에게 진짜 멋진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대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한창 잘나가고 있을 때 사표를 쓰고 하나님의 소명임을 언급하며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일은 얼마나 훌륭한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그러나 이를 진지하게 묘사했다면 관객은 곧 부담을 느끼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라면 선교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생각해야 하지만 자신에게 적용했을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 까닭이다. 이 때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을 통한 코믹한 연출은 선교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가볍게 선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의식을 전환시킨다. 유머는 두려움의 해독제란 사실을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디지털 세대에게 유튜브로 다가가는 코믹한 기독교영화 <콜링>. 중요한 신앙의 주제를 이 시대의 언어로 풀어나가는 모습은 분명 미래 기독교영화의 전망을 밝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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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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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독교인은 코미디영화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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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와 경건한 신앙
영화로도 만들어진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중세의 가톨릭이 웃음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제시된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윌리엄 수사와 그의 조수 아드조가 등장한다. 죽은 수도사들마다 손가락과 혀에서 검은 잉크의 흔적을 발견한 윌리엄 수사는 그들이 모두 독살되었고 모종의 책과 연계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수도원에서 결코 읽으면 안 되는 금서로 밝혀진 책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 제2권이었다. 이 책은 인간을 웃게 만드는 희극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호르헤 수도사는 경건한 수도생활에 웃음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웃음은 두려움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악마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호르헤 수사는 신앙의 본질이라 여긴다. 즉 두려움이 없다면 신앙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만큼 두려움을 없애는 웃음은 신앙에서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호르헤는 응징의 차원에서 남몰래 시학 제2권을 읽는 수도사들이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는 습관을 이용 책 귀퉁이마다 독을 발라놓았었다. 그는 독살의 장본인으로 밝혀지자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시학 2권을 씹어 먹으며 죽음을 맞이한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어두운 문화적 분위기를 현대인에게 잘 전해준다. 웃음과 핏기를 잃어버리고 신앙이란 이름아래 무겁고 창백한 그림자가 수도원 안팎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수도원의 타락과 수도회와 교황간의 갈등과 같은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행간 사이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움베르토 에코가 소재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다만 지금 현존하는 시학 제1권 6장에는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서 관해서 논의해보자.”라는 언급이 나온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먼저 쓰고 나중에 희극을 썼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바로 이 점에 착안 <장미의 이름>의 끝 장면처럼 시학 제2권이 사라진 연유를 중세 수도원의 엄숙한 분위기를 배경 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해답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기독교문화는 웃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적어도 기독교 영화의 분야에서 웃음을 통해 관객에게 즐거움과 메시지를 주는 코미디 장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지난 몇 년간 한국기독교영화의 주류로 자리 잡은 선교다큐멘터리 영화나 가뭄에 콩 나듯 등장한 드라마 장르에서 웃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신앙의 역사와 정체성 그리고 선교적 소명 등 매우 중요한 교회의 이슈를 다루었지만 웃음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마치 기독교영화를 보면서 웃는 일은 불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한 듯 진중한 자세만이 요구될 뿐이었다.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본질을 잘 살린 대중영화다. 설 연휴에는 온 가족이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영화를 선택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개봉시점도 매우 잘 선택했다. 거기다 맞대응할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극한직업>은 불과 개봉 15일 만에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었다.
영화는 마약범죄조직을 감시·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5명의 마약반 형사들이 작전상 치킨집을 인수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 코미디의 주요 장면을 구성한다. 치킨장사는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까닭에 수사에 집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형사(진선규)가 개발한 ‘수원 왕갈비맛 통닭’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치킨집은 맛집으로 소문나게 되고 형사라는 본업은 오간데 없이 치킨 장사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극한직업>은 코미디의 종합선물세트다. 이병헌 감독 특유의 상대방을 비꼬는 언어감각이 살아있는 스크루볼 코미디(screwball comedy)의 형식이 주효하지만, 범인검거 현장에서 드러난 형사들의 과장되고 어설픈 행동들은 찰리 채플린이 했던 것처럼 슬랩스틱 코미디(slapstick comedy)의 연장선을 잇고 있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녀 형사의 애정표현은 이 영화가 나름 로맨틱 코미디(romantic comedy)도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기독교 관점에서 <극한직업>은 왜 기독교 영화 제작자들이 코미디영화 제작을 꺼려하는지를 깨닫게 도와주기도 한다. 대중이 좋아하는 웃음유발의 특징들을 선뜻 수용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극한직업>에서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요소의 핵심에는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에서 ‘권위의 붕괴’란 선하든 악하든 한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존재가 사회적 기대와는 다르게 행동하며, 그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같거나 그 보다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영화에서 마약반 형사들은 강력범을 잡은 경찰에 대한 이미지와 기대감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비록 위장전술이긴 하지만 형사들이 치킨집 종업원으로 변신하며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경찰에 대한 기대가 무너질 때 웃음이 유발되는 ‘권위의 붕괴’를 보여준다.
“180도 기름에 대이고 칼에 베이고 얼마나 쓰라린 줄 알아? 아파. 지금 현재도 굉장히 쓰라린 상태야.”
마형사는 마약범을 잡다 몸을 다친 것이 아니라 닭을 튀기다 얻은 상처에 대한 얘기를 한다. 그의 얼굴은 닭을 잡을 때의 표정이 아닌 범인을 잡을 때의 비장함이 묻어난다. 범인이 아닌 닭을 잡는데 온 힘을 다 쏟는 형사의 모습에서 권위는 전복되고 만다.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 운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며 고반장(류승룡)은 반원들에게 크게 한마디 한다. “정신 안차릴래. 우리가 지금 닭장사하는 거야? 야 그럼 이 참에 사표 쓰고 닭집을 차리던가!” 마약반의 책임자로서 이 같은 말에는 권위가 살아있음을 관객은 느낀다. 그러나 전화벨이 울리자 그의 말은 곧 변해버린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 인가 통닭인가, 네 수원왕갈비 통닭입니다.” 급 반전된 반장의 말과 억양에서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가 가져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다.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한직업>에 등장하는 마약조직의 보스인 이무배(신하균)나 테드창(오정세)이 잔인하고 포악한 범죄자의 모습만을 갖고 있지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와 연예인 뺨치는 스타일로 등장한다. 심지어 헤어밴드와 노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온 것은 악당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는 악당들도 코믹 연기를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권위를 버릴 것인가?
‘권위의 붕괴’는 곧 잘 조롱이나 폄하 혹은 풍자로 읽혀지다. 지배자의 권위를 앞세우며 독재 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 대통령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금지되었었다. 민주화를 지향하던 한 대통령은 자신을 코미디의 소재로 삼아도 좋다는 언급을 공식적으로 할 만큼 한국사회는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권위의 붕괴’로 얻는 것도 있다. 바로 대중적 친밀함이다. 그것은 새로운 소통방식이며 또 다른 리더십이기도 하다. 국민을 보호하는 역할로서 경찰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존재이지만 경찰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치킨집은 일상 그 자체다.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면서 퇴직 후 선택하는 1순위 직장이기도한 치킨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숙한 이웃으로 인식된다.
<극한직업>에서 마약반 형사들이 치킨집에 몰두할 때 관객들은 권위의 붕괴에서 오는 웃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그것으로만 끝났다면 결코 천만 흥행을 달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권위는 내려놓았지만 역할은 살아있었다. 결국 형사들은 악당들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역할에 충실한 주인공들을 보며 관객들은 웃음과 더불어 도덕적 만족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세상이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교회를 우습게 여긴다는 뜻에서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을 주는 의미에서 권위를 되찾고 싶다면 권위 자체에 몰두하기 보다는 교회의 역할을 바로 세울 일이다. 소금의 권위를 쫓기 보다는 본래의 맛을 내는 역할(마5:13)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이미 코미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기꺼이 허용한 사람이다. 왜 일까?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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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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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죄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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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함 부모를 고소한 12살 아들
레바논 빈민가에서 생활하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자신의 출생일도 모른 채 일곱 식구와 살고 있다.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있지만 여동생 사하르(세드라 이잠)와 함께 길거리에서 주스도 팔고 상점에서 배달 일을 도우며 집안생계를 돕고 있다. 자인의 부모는 어린 아들이 약국을 돌며 사온 약품에서 항정신성 약물을 물에 녹이고는 옷가지에 묻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몰래 넘기는 일을 할 뿐 정상적인 가족생계는 자인이 모두 떠맡고 있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를 돌보는 일 조차 한 살 터울 오빠인 자인의 몫이다. 이쯤 되면 관객들은 이 집안이 단순히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는 무책임한 부모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레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주인공 자인은 부모가 여동생을 상인에게 돈을 받고 시집보낸 것에 대해 분노하고 집을 나와 거리를 떠돌기 시작한다.
일찍이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초 런던 슬럼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를 통해 소매치기 범죄 집단에 끌려가는 바람에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아 소년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일이 있었다.
그 이후 빈곤의 상황에 처한 어린 아이와 그를 둘러싼 사악한 어른들의 풍경은 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대개 주인공 어린이가 처한 심각한 일탈과 위기의 상황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어린이를 이용해 먹은 악당에 대한 죄과를 드러내어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의 편에서 심판하도록 마음을 부추기는 한편 어린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의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어린이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보여주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영화 <가버나움>은 다르다. 자식을 낳을 줄만 알았지 키울 줄 모르는 무책임한 부모와 어떤 돌봄도 없이 거리에서 자란 어린이의 삶 속에서 우리는 되풀이 되는 죄와 어리석음을 발견하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대중영화에서 자식을 거리로 내몰며 앵벌이에 가까운 노동과 범죄행위를 부추기는 경우 그 부모는 대개 진짜 부모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친부모라면 돈 때문에 자기 자식을 팔아넘기고 거리의 부랑아로 살도록 만들기는 보다는 빈곤의 현실을 안타가워하며 어떻게든 자식을 정상적으로 교육시키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부모는 자식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방관을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는데 이용하는 무책임한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부모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서 자인은 부모를 법정에 고소한다. 왜 부모를 고소하는지 묻는 판사를 향해 자인은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들어본 일이 없는 말을 남긴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그들이니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납득되는 순간이다.
책망 받은 도시 가버나움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영화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의 내용이나 가치관을 명확히 드러내기 보다는 오히려 성경이 비판하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예수님의 공생애 주요 사역지였던 갈릴리 인근의 ‘가버나움’이란 도시에 대한 예수님의 언행을 알고 보았을 때 비로소 영화를 통해서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등 다섯 제자를 부르셨고(마4:13,18-22 9:9), 백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 그리고 네 사람이 메고 온 반신불수 병자 등에게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마8:5,14, 9:1, 요6:55-59). 마태복음은 ‘본 동네’(his own town, 마9:1)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버나움이 그 누구의 장소도 아닌 ‘예수님의 동네’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고 가장 많은 이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목격된 도시인만큼 ‘예수님의 동네’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뜻밖에도 가버나움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스런 질책을 받은 도시였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0-24)
영화 <가버나움>은 가장 기적을 많이 목격한 도시가 책망의 대상으로 변한 상황을 현대적인 은유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적은 생명성이다. 집을 나간 자인은 거리를 떠돌다 이디오피아 출신의 불법 체류 여성 라힐(요다노스 쉬페로우)의 돌봄을 받지만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자인은 라힐이 사라진 집에서 라힐의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버리고 만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가장 재미있게 느낄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12살 집을 나간 어린이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젖먹이 요나를 돌보는 모습은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존엄과 가치가 인간성 안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명으로 충만할 기적의 아이는 더 이상 어른들의 이기심과 무책임한 사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그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만다. 자인은 자신의 부모가 여동생을 결혼이란 명목으로 팔아넘겼듯이 아이의 아빠라고 추정되는 남자에게 젖먹이를 돈 받고 넘겨버리고 만다. 이 저주스런 행동의 결말은 법정에 서는 일이다. 자인은 시집간 여동생이 임신 끝에 죽은 사실을 알고 남편이 되는 남자를 칼로 찌르는 바람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아동학대가 위법이란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부모를 고소하는데 이른다. 나딘 라바키 감독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레바논의 현실이 성경의 ‘가버나움’과 다를 바 없음을 그렇게 묘사했다.
‘가버나움’을 보고 무엇을 할 것인가?
어린 아이가 처한 빈곤과 불의의 현실을 담은 영화를 만든 감독 가운데는 유난히 여성 감독이 많다. <가버나움>의 나딘 라바키 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빈곤한 현실 속에서 체스우승을 꿈꾸는 어린이를 묘사한 <체스의 여왕>(2016, Queen of Katwe)의 미라 네어(Mira Nair) 감독 또한 여성 감독이다. 이 두 여성 감독은 여성 특유의 모성애를 발휘하여 사회의 약자인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성 높은 영화를 만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상업영화의 세계에서 매우 선정성 높은 묘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면들이 순화되어 있는 것은 여성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영화 <가버나움>을 본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첫째는 회개에 대한 촉구다. 성경의 가버나움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보고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였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가버나움의 대중들에게 납득되고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가르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둘째는 가버나움을 향한 구원사역에 대한 의지를 갖도록 촉구 받는 일이다. 영화에서 우리가 본 장면들은 모두 사실이다. 아니 현실은 이 보다 더 참혹할 수 있다.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장면들이 대거 들어있는 이러한 영화들이 기독교인 관객에게 갖는 의미는 오직 한 가지다. 가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는 교도소를 방문한 가톨릭 수녀들이 보여주는 위로의 찬양이 있고, 이슬람 사람들이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감독은 자인에게 종교가 위로가 되지 못한 현실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는 어느 곳에서도 삶의 위로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말씀과 행동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영화를 본 우리에게 남은 생각거리는 한기지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가버나움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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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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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마의 어둠을 밝힌 순교자를 마음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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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오래된 성서영화의 발견
영화 <바울>(Paul, Apostle of Christ, 2018)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 10월 31일 국내 개봉을 시작한 이후 12월 4일 현재 233,863명의 유료 관객을 동원하여 전통적인 형식의 성서영화(Bible Cinema)로서는 보기 드물게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추정 제작비가 5백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로서 과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서사적 특징을 배제한 가운데 이룬 성과로 의미가 매우 깊다. 한국 영화계의 비수기인 11월을 택해 개봉하는 바람에 대형 상업영화로부터 상영관을 뺐기지 않을 가능성을 높인 것도 흥행에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상영관수가 적은데다 여전히 한국극장가의 고질적인 병폐인 징검다리 식 개봉(1회, 3회, 5회 상영과 같이 띄엄띄엄 상영시간을 배정하는 것)에도 불고하고 이룬 성과여서 차후 한국의 기독교영화 관객의 기호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
지금까지 제작된 성서영화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영화로써 세실 드 밀 감독의 <왕중왕>(1927)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까지 영화사 초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영화를 대표해왔다. 둘째는 예수 외에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을 다룬 영화로써 <십계>(1956)나 금년에 새롭게 제작 개봉된 <삼손>(2018)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셋째가 매우 흥미로운 성서영화의 부류인데 예수시대 혹은 초대교회를 배경으로 삼은 기독교영화들이 있다. <벤허>(1959, 2016)나 <부활>(2016)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 영화들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닌 가공의 인물들이다. <벤허>의 주인공은 유대인 귀족이었다가 노예로 전락한 유다 벤허이고, <부활>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던 로마의 군인이다. 이 두 인물의 경우 예수님 시대에 살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인물로서 성서영화가 단지 성경의 내용을 영상화하는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 외연이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세 번째 부류의 성서영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거나 제한된 노출을 시도하면서도 주인공의 인생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서 예수를 등장시킴으로써 전통적 성서영화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영화 <바울>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특징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사도 바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회심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신앙 가운데서 순교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한다. 영화에서 이 부분은 바울의 회상 장면으로 처리되고 있으다. 즉 주인공은 바울이지만 바울을 주인공으로 만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란 점에서 성서영화가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흥미로운 사실은 바울이 갇힌 로마 감옥의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란 인물의 등장이다. 그는 물론 성경에 나오지 않는 인물이지만 이 영화가 역동적으로 진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충실한 로마 군인 출신으로 처음에는 바울을 학대하며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도 바울과 그의 편지를 적어 나르는 누가와의 만남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관객은 갈래스 교도소장의 등장으로 인해 긴장감과 더불어 마침내 신앙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상상력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재미를 부여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난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다
앤드류 아이엇(Andrew Hyatt) 감독의 영화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현실과 회고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표현하는 일은 성서 영화에서는 흔한 일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잔혹한 죽음이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매우 특별하다. 특히 복수가 스크린에 가득 찬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에서 힘으로 응징하지 않고 용서와 사랑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일은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다.
서기 67년 로마는 예수를 믿는 추종자들이 로마의 불을 질렀다는 소문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거리에서 화형을 당하거나 몰래 숨어 살아야 하는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다. 신실한 믿음을 지닌 브리스길라(조앤 월리)와 아굴라(존 린치)는 예수 믿는 공동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지만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로마를 탈출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고 만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사도 바울(제임스 펄크너)의 의견을 구하고 그의 편지를 기대하고 있다.
이 때 의사 누가(제임스 카비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에 숨어 지내는 그리스도인과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사이를 왕래하며 서로의 뜻을 전달하는 한편으로 바울의 신앙여정에 대한 구술을 받아 적음으로 인해 ‘사도행전’이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관객은 목격할 수 있다.
영화가 제공하는 세 가지 미덕
영화 <바울>에서 관객이 지켜 본 가장 큰 미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고난 받는 로마 그리스도인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바울의 ‘성경적 방식’이며, 둘째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식이고, 셋째는 누가의 의료행위에 나타난 신앙과 지성의 통합적 이해 방식이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관객들은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인간 촛대’의 순교현장을 접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Tacitus, 56?~120?)는 14년에서 68년 사이의 로마 역사를 다룬 〈연대기>(Annals〉)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연대기> 속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의 순교 장면 가운데는 십자가의 처형뿐만 아니라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겨 죽기도하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해가 진 후 로마의 거리 곳곳 마다 화형에 처해져서 히브리서 11장 후반부에 나오는 믿음을 지키는 신앙인이 겪었을 시련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로마의 골목 곳곳 마다 나무에 매달려 산 채로 화형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고난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로마의 어둠을 밝힌 것은 그리스도인들 이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사실이며 또한 진실된 신앙의 결과였다. 가로등이 없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촛대’라는 순교방식을 통해 거리의 어둠을 밝혔고, 사랑과 봉사를 통해 부패하고 잔인한 로마인의 마음에서 어둠을 내쫓았다.
로마에 대한 복수와 저항의 의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솟구쳐 올랐을 때 영화 속 사도 바울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누가에게 전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율법에 미쳐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과거가 있었고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사랑으로 변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누가에게 구술한 바울의 회상장면은 사도 바울을 생애를 연대기로 처리한 과거의 영화와 달리 매우 생동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빛낸 공로는 누가가 바울이 갇힌 교도소 소장의 병든 딸을 고치는 장면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로마의 제3군단 사령관 출신으로 마멀틴 감옥의 소장으로 부임한 모리셔스 갈래스(올리비에 마르티네즈)는 제3자의 입장에서 바울과 누가를 지켜보는 사람이다. 바울이 결코 로마에 불을 지를 사람이 아니며 누가 또한 참된 신앙인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병든 딸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에게 기적을 행해줄 것을 바라지만 바울은 누가를 존경받는 의사로 갈래스 교도소장에게 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던 시절에 병 고침의 기적은 어쩌면 로마인의 마음을 순식간에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그 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의사 누가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감독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교도소장의 딸이 병중에서 회복되는 장면과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의 구경꺼리가 되기 위해 순교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정면을 교차 편집함으로써 신앙이 일으키는 기적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즉 인간 촛대로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어둠을 밝혔듯이, 또 다른 순교자들의 믿음으로 인해 로마의 어린 아이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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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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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북한을 다룬 영화들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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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화해의 시대에 영화 속 북한을 보다
남과 북의 대통령이 벌써 두 번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간의 핵협상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남북은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비무장화를 진행 중에 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있는 화기와 초소를 모두 철수하고 나면 다음 달 중에는 민간인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가 제작된 지 꼭 18년 만의 일이다. 남북의 군인들이 만나서 초코파이를 나누어 먹고 닭싸움을 하는 장면은 진짜 현실이 될 것인가!
지금까지 북한을 다룬 영화의 원형적 요소는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이영진 영화평론가가 말한 대로 ‘역사의 비극을 불러와 희극으로 치장하고, 결국엔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하며 현재의 비극을 환기하는 플롯’의 반복이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우정을 쌓아가던 남북의 네 명의 젊은 군인들이 등장하고, 제대를 앞두고 인사차 찾아간 북한 초소에 갑자기 들이닥친 북한군 간부로 인해 이 우정 어린 상황이 총격전으로 이어지며, 조사 중 주인공은 자살로 끝을 맺는 줄거리는 역사의 비극이 회상되고 다시 비극으로 마무리 짓는 구조를 보여준다. 그러나 남북화해 무드가 한창인 오늘날 우리가 북한을 다룬 영화들에서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비극의 중간에 자리한 익살과 유머 그리고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를 필두로 중간 중간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사와 주인공의 익살스런 연기는 긴장감으로 일관된 상황을 이완시키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만일 이 영화를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는데 치중한 추리물로 갔었더라면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공동경비구역 JSA>의 포장방법은 휴머니즘인데 인간미의 결정적 요소는 분노나 복수에 있지 않고 웃음과 울음에 있는 까닭이다. 주인공 이병헌이 지뢰를 밟았을 때 이를 북한군 오경필이 제거해주는 상황은 웃음과 울음이 교차되는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온 인류를 웃기는 한편 내적으로 울렸던 찰리 채플린의 휴머니즘이 주는 희비극의 가치를 재현한 것이다. 웃음만이 줄 수 있는 가벼움을 극복하면서도 울음이 던져주는 무거운 상황을 이 영화는 아슬아슬하게 교차시킴으로서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맞아 젊은이들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감각적 성향과 의미를 추구하는 기성세대의 성향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남북의 갈등에서 부패와의 전쟁으로
지난 해 까지만 해도 남북의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은 계속됐고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공격에 대한 의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영화는 달랐다. 반공을 앞세운 영화가 나올법한 상황이지만 한국영화는 북한 내부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아울러 남북 간의 협력모드를 전개시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영화 <공조>와 <브아이피> 그리고 <공작>이 있다.
김성훈 감독의 <공조>는 위조지폐 동판을 훔쳐서 남한으로 잠적한 북한의 전직 특수부대 장교 차기성(김주혁)을 잡기 위해 남한에 온 북한 형사 림철령(현빈)과 그의 파트너가 되어 북한이 감추고 있는 수사의 진실을 캐내려는 남한의 어리바리한 형사 강진태(유해진)가 벌이는 공조수사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남북 갈등이 아닌 공조 수사를 통한 남북의 믿음을 강조한다. 상대방의 비밀을 알아내고 감시하기 위해 서로의 휴대폰에 도청장치를 심어놓고 심지어 남한사정을 잘 모르는 림철영에게 수사관의 명패인양 성폭력전과자에게 채우는 전자발찌를 채우는 불신의 상황은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코미디적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잃어버린 남북의 상황에 대한 은유로도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코미디와 액션 장르를 오가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 한 점은 불신의 관계가 어떻게 믿음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남한 형사의 집에서 가족들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림철령은 남쪽 파트너에 대한 이해와 믿음의 높이를 쌓아간다. 마치 평양냉면이 남북의 공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예측이라도 한 듯 함께 숙식을 같이 하는 가운데 신뢰가 형성이 되고 마침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의 백미는 북한 요원으로 잘 생긴 현빈을 기용하고 남한 수사관으로 개성 있는 유해진을 앞세운 점이다. 이 같은 캐릭터의 반전을 이룬 영화를 즐기게 된 것은 분명 남한이 북한에 대해 갖는 높은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박훈정 감독의 <브이아이피>(V,I.P.) 또한 남북의 갈등이 아닌 부패한 북한 권력자를 향한 정의를 묻고 국제관계의 복잡한 속내를 드러낸 새로운 유형의 북한관련 영화다.
북한 권력자의 외아들 김광일(이종석)을 기획탈북 시켜서 북한의 중국내 비밀계좌정보를 얻고자하는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이 한 축을 이루고 있고,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김광일이 한국과 홍콩에서 저지른 여성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남한 경찰 채이도(김명민)와 북한 보안성 요원 리대범(박희순)의 집요한 추적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면서 암흑가의 정서와 액션을 화면 가득 담고 있다. 이 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두 축이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며 갈등을 양산해내는 가운데 전개된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은 남북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남한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긴 영화다. 1990년대 활동했던 대북 공작원 흑금성의 간첩사건 실화를 다룬 이 영화는 남북경협에 대한 북한의 관심과 호의를 드러내는 한편으로 정권교체를 막기 위해 북한에 도발을 요청하는 남한 정부의 어이없는 행동을 폭로하고 있다. 이것은 반공영화나 부패한 북한 정권을 문제를 소재로 삼는 지금까지의 영화는 장르를 달리하는 일이다. 그동안 숨겨 온 대북공작의 비화를 서슴없이 드러낼 만큼 남한은 선이고 북한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어 이상 영화에는 통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북한 주민이 아닌 권력을 문제 삼다
<공조>나 <브아이피>를 본 관객들은 영화의 이야기를 형성하는 여러 구조들 사이에서 뜻밖에도 공통된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모든 북한 문제의 핵심은 권력 중심부의 문제란 사실이다. “북한이 나쁘다 혹은 북한이 문제다” 라고 말 할 때 ‘북한’이란 핵미사일을 개발하고 세계를 위협하는 북한의 핵심 권력집단을 의미할 뿐 북한 주민 대부분은 이와 관계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브아이피>에서 봤듯이 일반 주민들은 권력집단의 희생자이거나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둘째, 남북은 공통의 목표 안에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리대범(박희순)의 원래 소속은 35호실 해외사업팀이다. 북한의 35호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으로 리대범은 간첩교육을 받고 공작원 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김광일 사건을 조사하다 함경북도 비료공장으로 좌천된 이후 남한에 와서 채이도 경감과 협력하는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까칠하게 대하지만 중요한 정보들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남북의 문제에는 항상 미국이 깊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대부분 한국의 공권력은 미국 정보요원 앞에서 무기력하며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정상회담에 달려있음이 자명한 현실에서 영화는 솔직함을 잃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 환상을 담아내며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을 발현하는 도구이다. 남북이 힘을 합쳐 악당을 물리치고 공동의 선을 위해 남북이 손을 잡는 영화 속 장면은 비록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간절히 원하는 미래의 모습일 수 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사2:4) 장면은 얼마든지 영화에 등장해도 좋다. SF영화가 보여주듯 영화는 미래를 내다보는 기능이 있지 아니한가? 영화를 통해서라도 좋은 꿈을 계속 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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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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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처 입은 자의 치유자를 목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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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서 신앙인 감독으로의 변신
추상미 감독의 예술 인생을 논할 때 뗄 수 없는 사람은 1970년대와 80년대 중반까지 충무로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그의 아버지 추송웅(1941~1985)이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를 통해 원숭이가 바라본 인간세상의 부조리를 낱낱이 고발하는 연극은 대학가의 큰 화제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원작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를 각색하여 올린 무대에서 추송웅은 원숭이 분장을 하며 특유의 익살스런 표정과 연기를 통해 예술에 허기진 한국의 청년들을 사로잡았었다. 실제로 이 모노드라마는 1977년 8월 20일, 객석이 130석도 안되는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첫 무대에 올라간 이래로 무려 482회나 지속된 공연을 통해 15만 2천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사상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무대 역사를 갖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연기와 연출 그리고 기획의 다채로운 재능은 고스란히 딸 추상미에게 이어졌다. 아버지 추송웅이 <빨간 피터의 고백>에서 기획, 제작, 연출, 미술, 연기 등 1인 5역을 해낸 것처럼 딸 추상미 또한 기획과 연기 그리고 연출에 직접 나서는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아버지의 유전자를 작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추상미의 예술 인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을 향한 시선은 방향을 바꿔 북녘 땅 하늘 아래서 고통 받는 어린 아이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나타났다는 북한의 ‘꽃제비들’. 국가의 돌봄은커녕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무거나 주워 먹다가 죽어버린 꽃제비들의 모습을 TV에서 본 추상미는 자신의 신앙과 예술이 가야할 방향을 깨닫기 시작했다. 깨달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신앙의 깊이가 더해지면 하나의 또렷한 실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남북 청년 모임인 ‘모자이크 공동체’를 이끌며 탈북청년들과 주일 오후 마다 예배를 드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아버지로 물려받은 예술 유전자를 작동시키는 새로운 동력으로 신앙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유명 배우가 신앙을 갖게 된 뒤 사회를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아무도 몰랐던 그 아이들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2018)은 전형적인 다큐멘터리 형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소재주의를 택하여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갑자기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고 깊은 감정의 우물로부터 눈물을 솟구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고 관련자를 인터뷰하며 마침내 과거의 사진을 들춰내는 등의 일련의 작업은 일반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따랐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하나있다면 감독은 연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사건의 관찰자이며 또한 참여자로 등장한다. 즉 사건을 소개하고 편집하여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겪었던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행위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관객을 위한 영화인 동시에 자신을 위한 영화가 되도록 만들었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1천5백 명에 이르는 전쟁고아들이 북한으로부터 소련을 거쳐 동유럽 폴란드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몸과 마음에 전쟁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은 채 폴란드 바르샤바 외곽의 프와코비치에 도착한 아이들은 학교를 겸한 수용시설에서 1959년 북한으로 송환될 때까지 세상이 알지 못했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추상미 감독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시작과 더불어 핵심이 무엇인지를 압축해서 전해주었다.
“영화에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이 등장해요. 코모로프스키 전 대통령은 2013월 10월 방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국과의 인연을 이야기합니다. 북한 전쟁고아의 교사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어머니였고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해요. 폴란드 교사들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살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답니다. 정이 많이 들었대요.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폴란드를 떠난 뒤에도 편지를 보내 왔답니다. 그런데 폴란드 교사들도 아픔이 있었어요. 북한 고아들 나이 즈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거든요. 교사 중엔 전쟁고아도 있었고요.”(국민일보 2018.3.31)
결혼 후 아기를 낳고 키우며 산후우울증도 겪었고 엄마로서의 삶을 사는 감독의 시선은 북한의 전쟁고아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뜻밖에도 관심의 시선을 전쟁고아가 아닌 이들을 돌보았던 폴란드 선생님에게로 향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몰랐던 역사의 슬픈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비극과 슬픔을 위로했던 역사적 존재들을 스크린에 등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영화가 추구해야할 가치를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까닭이다.
고통과 비극의 문제 많은 과거 역사를 들추는 일은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통해 인간의 만행과 죄성을 낱낱이 드러내어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극 가운데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삶의 희망을 전해주는 존재를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 있어서 인간의 관심은 빛 보다는 어둠의 과거를 들춰내는데 눈길이 더 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내레이션을 통해 직접 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담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희망과 위로가 따뜻하게 빛을 비춰주고 있는 까닭이다.
영화의 두 가지 미덕-치유와 통일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아름다운 것은 두 가지의 현실을 성경적 이해 가운데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상처 입은 자가 어떻게 또 다른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남북의 두 여자가 동행하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에 적잖은 울림을 준다.
영화는 무엇보다도 한국의 전쟁고아들(북한이 보내온 아이들이지만 영화는 당시 전선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있었던 점을 생각하여 남한의 아이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을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에게 초점을 맞춘다. 지금 생존해 있는 전쟁고아들이 있다면 그들을 인터뷰했겠지만 그들의 행적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단지 떠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본 폴란드 선생님들만이 남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감독이 관객을 대신해서 제기한 가장 큰 질문은 생생한 답변으로 돌아온다. 왜 기생충을 한가득 몸속에 지닌 채 전쟁의 상흔으로 뒤범벅이 된 동양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을까? 아이들에게 원장님, 선생님이란 호칭 대신 엄마와 아빠로 부르게 하며 먹이고 가르치며 사랑으로 돌보는 폴란드 선생님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의 책 제목이기도 한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에게서 찾을 수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죄악의 상처로부터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자신이 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깊이 상처 입은 사람들임을 숨기지 않는다. 북한의 전쟁고아들이 도착하기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폴란드 사람들은 히틀러의 잔혹한 살육으로부터 몸과 마음에 큰 흉터를 갖게 되었었다. 그 깊은 상처들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왜곡되지 않고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리라.
또 한가지 영화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뒤쫓는 여정에 추감독 혼자가 아닌 탈북소녀이자 배우를 꿈꾸는 이송을 동행시킨 사실에 우리는 이 영화의 미덕을 얘기할 수 있다. 차마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송은 영화를 통해 내면의 상처에 조금씩 새살이 돋는 것을 느낀다. 남한으로 넘어 오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이 있었는지를 관객들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속에 희망이 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통일에 대한 발걸음 바빠진 오늘날 남북이 갖고 있는 서로에 대한 상처가 분노와 적개심으로 드러나지 않고 이해와 용납을 발전하기 위해서는 상처 입은 자의 치유가 필요함을 말이다. 탈북자들의 역할이 주목받는 시대가 곧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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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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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파트와 살인 목격자의 침묵을 통한 한국사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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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스릴러물의 역동적 구조
일상생활에 대한 예리한 시각을 가진 조규장 감독이 <그날의 분위기>(2015)와 같은 로맨스장르에서 이번에는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첫 장편영화인 <낙타는 말했다>(2008)를 통해 사회적 성공과는 거리 먼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세밀하게 담았다면 이번에는 한국사회의 집단 이기주의와 보신주의(保身主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아내와 어린 딸을 둔 평범한 직장인 상훈(이성민)은 새벽에 살려달라는 비명소리를 듣고 다가간 아파트 창문 너머로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범죄현장의 목격자로서 경찰에 신고하면 될 것 같은 단순한 일은 그만 살인자와 눈이 마주치게 되면서 어렵게 꼬이기 시작한다. 살인자와 목격자가 서로 자신의 존재를 노출하게 된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영화는 이때 살인자 보다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심리를 전개시킨다. 정의로운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살인자의 표적이 되어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인가. 상훈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단순 범죄물이 범죄 심리극으로서 발전하는 과정에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주체가 겪는 갈등의 성격에 달려있다. 일반적으로 범죄물은 범인과 수사관 그리고 피해자 혹은 피해관계자라는 삼각구도 속에서 진행된다. 수사를 담당하는 형사의 입장이라면 수사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을 전개시켜서 심리적 갈등을 조장하게 된다. 승진에 목을 걸고 있거나 집안의 어려움이 있는 수사관이 범죄자 혹은 범죄자와 연관된 사람들과 모종의 거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갈등이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범죄자의 입장이라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 겪었던 개인적 고통이나 인격모독을 당한 일,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 등의 과거사를 전개시키면서 범죄자의 심리적 갈등을 표출시킨다.
범죄 피해자를 사건의 주체로 등장시키는 경우는 가해자의 밀도 있는 관계를 조명시키면서 피해자가 되기까지의 과거사가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 피해자는 죽음을 통해 가해자와의 갈등을 해소시키면서 문제를 마무리 하곤 한다.
그런데 목격자가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게 될 경우 영화는 철저히 다층적인 심리극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자신과 가족이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범죄자나 수사관과의 관계를 저울질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때 범죄 목격자가 흔히 겪는 심리적 갈등은 거래관계 대상자와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경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 못하는 이유는 경찰이 자신과 가족을 지켜준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에서도 오직 한사람의 수사관(김상호)을 제외한 다른 경찰들은 엉뚱한 수사를 하고 있거나 심지어 범죄자의 공격을 받기도 한다. 범죄자의 암묵적인 거래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범죄자가 자신의 신분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며, 범죄자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일이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목격자>의 주인공 상훈이 택한 것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이나 범죄자 모두를 불신한 상태에서 스스로 가족을 지키는 쪽이었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개인의 신념은 사회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더욱 강해지는 법이다.
아파트는 어쩌다 이기적인 공간이 되었을까?
범죄현장 목격자의 심리를 다룬 <목격자>가 관객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이유는 범죄현장이 한국인의 생활공간인 아파트 단지 한복판이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늘 사람이 다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살인마가 잔인하게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영화 속 설정은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관객들 사이에서는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아파트는 흔히 단절된 공간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관심도 없다. 이사 온 날 떡을 돌리는 풍속이 사라진지 오래고 앞집의 사정이란 다만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 엘리베이터나 복도 게시판에 공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쪽지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이웃이 직접 작성하기 보다는 인테리어 업체에서 붙이는 경우가 이제는 태반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소통이 결여되고 이웃공동체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생활공간인 아파트가 한국인의 가장 일반화된 생활공간이란 사실이다. 2017년 11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60.6%인 1038만호에 이른다. 가히 아파트는 한국의 대표하는 주거공간인 셈이다.
일상적인 삶의 중심이자 가족의 거처 공간인 아파트는 성냥갑 혹은 닭장으로 비유되는 독특한 건축구조와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즉 산장이나 바다 한가운데 있는 보트에서 살인사건을 다룰 경우 일상의 공간과는 유리되어 있는 까닭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현실감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일어난 범죄일 경우 현실감은 살아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파트가 범죄를 일으키는 환경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도무지 자기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지독한 개인주의가 팽배해있고, 조금이라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영화 <목격자>는 살인범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함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관객을 더욱 흥분시키는 이유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가족의 안전을 걱정하기 보다는 아파트값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부녀회장의 행동 때문이었다.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TV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것이 걱정스럽고 경찰의 탐문수사에 협조를 거부하는 주민들의 행동 속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지독한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값을 올려 받기 위해서 부동산중개소와 주민들이 담합을 하는 현실에서 사람의 목숨 보다 중요한 것이 아파트 집값인 것이다.
침묵과 응징
범죄에 침묵했을 때 오히려 범죄자에 쫒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는 영화 <목격자>의 이야기는 이미 사회심리학에서 연구한 내용을 답습하고 있다. 흔히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 불리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은 집단이 속해 있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책임감이 분산되는 바람에 일에 개입하기 보다는 상관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해설해주고 있다. 즉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으로 방관상태에 머무르고 만다는 얘기다.
영화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방관자들을 응징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폭우가 쏟아지며 아파트 인근에 있는 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토사가 아파트 앞으로 밀려오는 장면은 감독이 이웃의 고통에 대해 방관자로 사는 현대인들을 향해 내던지는 일종의 경고장 같은 것이다. 이미 영화 전반부에 주인공을 통해 아파트 축대가 산사태로 무너질 것이 언급되었지만 부녀회장은 집값 외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인공과 범인과의 격투가 벌어진 아파트 뒷산이 연쇄살인범이 사체를 묻어 놓은 장소임이 드러나는 일이다. 아파트로 밀려오는 흙더미 속에 유골들이 드러나는 일은 마치 방관자들을 향해 침묵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군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루어진다.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맞아서 거의 죽은 상태로 버려진 피해자를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방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마리아인은 참된 이웃이 누구인지를 나타낸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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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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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최고의 기독교 변증은 용서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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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변증 영화의 전성기
최근 미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기독교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간증이 아닌 변증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를 둘러싼 세속적 사회는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고 기독교영화는 이에 대해서 논리적이며 또한 신앙적으로 방어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즉 기독교 변증영화는 현 시대의 교회를 향한 무신론적이며 세속적인 사회의 공격적 태도를 보여주는 한편으로, 그래도
<신은 죽지 않았다1,2>(2014, 2016)와 <예수는 역사다>(2017)는 기독교변증 영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영화들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1편에서 대학 신입생 조쉬 휘튼(쉐인 하퍼)은 무신론 교수의 철학수업시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교수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면서도 또한 지성적인 대응을 함으로써 서구 대학세계에 만연한 무신론적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고, 한편으로 대학캠퍼스에서 크리스천 대학생들이 순교자적 신앙을 요구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학 강의실에서 모든 권력을 소유한 무신론 교수와 이제 갓 들어온 크리스천 신입생의 대결 구도는 오늘날 기독교가 서구 지성인 사회에서 처해 있는 어려운 형국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에 다름 아니었다.
<신은 죽지 않았다> 2편은 공교육 현장에서 기독교신앙이 처한 위기와 위협적인 상황을 매우 밀도 높게 보여주었다. 공립학교 역사수업시간에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 예수의 사상이 영향을 주었는지를 묻는 학생의 질문에 크리스천 역사교사 그레이스(멜리사 조앤 하트)는 예수가 역사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기독교 믿음의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실성을 근거로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를 스마트폰으로 녹음한 학생이 공교육의 현장에서 특정 종교를 선전한다는 이유를 들어 학교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크리스천 교사는 실직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통해 영화는 기독교신앙과 공교육과의 갈등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영화 <예수는 역사다>는 언론계에 만연한 무신론적이며 비기독교적 정서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무신론자이며 미국 중부 최대 일간신문인 시카고 트리뷴지의 인정받는 기자 리 스트로벨(마이클 보겔)은 자신의 아내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는 것을 지켜보며 불만을 품게 된다. 객관적 사실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기자생활에 익숙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내가 믿는 기독교는 비합리적이며 미신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구시대적 유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스트로벨 기자는 특종을 내겠다는 직업정신과 교회에 빼앗긴 아내를 되찾겠다는 사적인 감정이 결합된 가운데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위해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혀내는 일에 착수한다.
세상이 교회에 바라는 것은?
다시 <신은 죽지 않았다> 시리즈의 차례가 돌아왔다. 마이클 메이슨 감독의 최신작 <신은 죽지 않았다3:어둠 속의 빛>(God's Not Dead: A Light in Darkness, 2018)은 반기독교적인 미국사회의 정서에 대해 충실한 신앙적 답변을 보여주며 기독교 변증영화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다. <신은 죽지 않았다1,2>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데이브 목사(데이비드 A. R. 화이트)는 대학 캠퍼스 안에 위치한 150년 전통의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담임목사로 등장한다. 전편에서와 달리 이번 영화에서 데이브 목사는 심각한 고난과 갈등에 직면하고 만다.
무신론 분위기가 팽배한 대학의 학생들은 예배당이 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갖고 퇴출되기를 강하게 희망한다. 더군다나 교회에 불만을 가진 대학생 아담 리처드슨(마이크 매닝)은 우발적이긴 하지만 교회에 벽돌을 집어 던져버리는 바람에 지하실에 있던 가스파이프가 터지고 이를 알지 못한 채 지하실에서 전등을 켜던 데이브 목사의 절친 주드(벤자민 오치엥) 목사는 가스 폭발로 인해 사망에 이르는 가슴 아픈 사건을 맞이하고 만다. 불타버린 교회를 바라보는 대학생들은 이 기회에 교회가 대학에서 떠나기를 바라지만 데이브 목사와 크리스천 학생들은 어떻게든 교회를 지키기 위해 격앙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는 사회적 갈등이 있다면 이를 법정에서 푸는 일반적인 미국사회의 풍속으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교회에 불을 냈는지 알지 못한 채 데이브 목사와 학교 당국 그리고 학생들 간의 대결은 사뭇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한다. 데이브 목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인 자신의 동생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는지 신앙적 갈등 또한 겪게 된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갈등을 푸는 방법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교회와 학생 그리고 학교당국과의 대치 국면을 해결하는 방안은 교회를 내쫓으려는 학생들 머리 위로 천둥벼락이 내리기를 기도하는데 있지 않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렇다고 타락한 학교당국의 처사에 낙담만 하는 것으로 끝내지도 않는다.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방안은 캠퍼스 내 교회가 있다면 학생들이 교회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학생들을 위한 교회의 존재목적을 다시 한 번 정립하는 일이다.
무신론자는 기독교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신론자들이 원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무신론자로 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 즉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가치관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교회에 벽돌을 던진 리처드슨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데이브 목사의 휴대폰에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리처드슨이 기대했던 것은 데이브 목사를 통해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모습이 실현되는 것이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친구가 죽고 예배당이 불타 버린 현실에서도 과연 목사는 문제 많은 자신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예배당이 세속적인 사회에서 그 가치를 존중받을 수는 없음을 영화는 은연중 보여준다. 교회의 가치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교회가 세상과 똑 같이 자신의 이권만을 주장하고 전도의 대상인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무시해 버린다면 교회의 본래 역할을 감당하기란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이다.
데이브 목사는 불타버린 예배당을 포기하는 대신 대학 당국의 지원을 받아 외곽에 새로운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지원 약속을 받는다. 예배당이 있던 자리에는 학생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학생회관이 들어서게 되고 그 안에 학생들의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센터 설립 또한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학생들과 대학당국의 요구에 교회가 무릎 꿇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이 원하고 필요에 응답하며 한 발짝 물러서는 모습은 오히려 학생들을 감동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 왜냐하면 세상이 교회에 원하는 것은 자신들처럼 스스로의 주장과 이익을 싸우고 상대방을 뭉개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과는 뭔가 다른 행동을 원하는 기대감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현장에서는 세상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교회는 궁극적인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변증적 성격을 지닌 이 영화가 제시하는 메시지는 세상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역설에 있다. 현대의 크리스천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서 그를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대어주고, 고소당해서 속옷을 빼앗길 때 겉옷까지도 내어주고,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강요받을 때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해주는 일(마5:39-41)을 요구받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 위하여 기도할 것(마5:44)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일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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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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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할리우드의 공룡사랑에 감춰진 인간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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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는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할리우드 영화는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의 결합물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들이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부터 영화는 돈과 컴퓨터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의 경연장이 되었다. 요즘 한창 제작 붐을 타고 있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같은 SF액션물의 경우 평균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어간다. 높은 제작비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천정부지로 오른 스타들의 몸값도 크게 한몫 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최신작 <스카이 스크래퍼>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은 6,450만 달러(한화 약 720억 원)의 출연료를 받아 화제가 되었지만, 이내 <아이언맨>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어벤저스3> 출연료로 1억 달러(약 1,120억 원)를 받은 것이 밝혀지면서 2위로 물러나야 했다. <어벤저스3>의 총예산은 약 3억 4000만 달러로 할리우드가 스타에 지불하는 비용만큼이나 엄청난 돈을 실제작비에 쓰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제작비가 많이 든 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마이 웨이>(2011)로 3백억 원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타와 더불어 컴퓨터 그래픽은 할리우드의 제작비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에 다름 아니다.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대형 스타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추정 제작비만 약 1억7천만 달러에 달한다. 고생물학자들의 조언에 따라 제작된 공룡뿐만 아니라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탄생한 가상의 공룡들은 모두 컴퓨터 그래픽이 탄생시킨 값비싼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공룡의 피부조직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묘사되는 영상을 만드는 일과 공룡 특유의 움직임을 재현하기 위해 들이는 인건비와 시스템사용 비용은 할리우드가 대형 영화를 제작하는데 감수해야할 내역인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강점은 또 있다. 최신 과학 정보들을 재빠르게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할리우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매우 민감하다. 즉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상력이 최신 과학정보를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의 개연성은 당장 실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는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작용을 한다. 아무리 멋진 화면을 전개시키더라도 그저 허무맹랑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야기 전개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관객을 설득할 만한 논리구조를 갖지 못한 저급한 영화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점에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전편에 이어서 유전자 합성을 통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Indominus rex)와 벨로시랩터(Velociraptor)의 유전자를 재교배하여 탄생한 인도랩터(Indorapto)라는 새로운 종을 보여주며 관객 설득에 나서고 있다. 전편인 <쥬라기 월드>(2015)에서 인도미누스 렉스는 가장 거대한 공룡으로 알려진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를 기본으로 갖가지 공룡들의 장점을 결합시켜 만든 무서운 공룡으로 탄생했었는데, 후속편에서는 여기에 가장 잔혹하고 교활한 공룡인 벨로시렙터의 유전자를 결합시켜서 더욱 공격적인 공룡을 만들어냈다.
특정 유전자 조작을 통해 상품성 있는 공룡을 만드는 일이 관객에게 그럴 듯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현시대의 유전자공학 기술의 발전을 재빨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2013년 미국의 생화학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가 발견하여 유전공학의 혁명으로 불리우며 세상을 놀라게 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CRISPR/Cas9)’는 <쥬라기 월드>에서 보여준 유전자 조작을 통한 보다 강력한 공룡을 만들 수 있는 과학적 개연성으로 작용한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특정 유전자만을 정밀하게 조준해서 편집함으로써 유전병이나 난치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의료기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한 얼음에 오랜 시간 갇혀있었던 매머드 (mammoth)의 온전한 사체를 가지고 멸종된 매머드를 복원시키는 일을 진행하는데 이 유전자가위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한마디로 현재 상용화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벌레에 강하면서도 맛도 좋고 빛깔도 좋은 과일품종을 개량하는 일로부터 크고 맛있고 빨리 성장하는 돼지(영화 ‘옥자’에 나오는 유전자 변형 돼지처럼)를 생산해 내는 일 등에 손쉽게 적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최첨단 기술이다. 그런 까닭에 공룡의 유전자를 편집하여 새로운 공룡을 만든다는 <쥬라기 월드>의 설정은 공룡의 피를 빨아 먹은 채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공룡의 유전자를 채득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에서 제시된 설정보다 훨씬 개연성이 높은 편이다.
인간복제의 문제를 감추는 방법
할리우드 영화가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메시지를 다루는 방법은 이름 하여 ‘소매치기 수법(The method of pickpockets)’이다. 관객들이 관심을 둘 만한 사항을 부각시키면서 은근슬쩍 관객의 저항이 따를 만한 메시지를 슬쩍 집어넣는 방식을 말한다. 소매치기가 지하철에 탄 승객의 안쪽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몰래 빼내려할 때 그는 절대 혼자 행동하는 법이 없다. 바람잡이를 동원하여 승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순간 다른 쪽에 있던 동료 소매치기가 지갑을 터는 방식이다. 정말 중요한 것으로부터 생각을 빼앗아 다른 것에 시선을 모으도록 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매치기는 자신의 임무를 완성한 채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지갑을 털린 사람의 후회는 이미 때가 늦을 수밖에 없다.
<쥬라기 월드:폴른 킹덤>은 ‘인간 복제’라는 사회의 안주머니에 깊이 들어가 있는 지갑이 털려도 관객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게 만드는 바람에 비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비껴간 영화다.
이 영화에서 소매치기 수법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의 탐욕을 부각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보호 차원에서 공룡의 생명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사나운 공룡들에 대한 책임은 모두 돈에 눈이 먼 자본가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돈에 대한 탐욕은 보다 사나운 공룡을 만들어 전투에 참가시키려는 군사용 공룡제작에까지 눈을 돌리게 만든다. 관객들의 마음에 세상에서 사라져야할 대상은 공룡이 아니라 돈이 된다면 생태계가 파괴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집요하게 공룡에 몰입하는 탐욕에 물든 자본가들인 셈이다.
또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애완동물을 아끼듯 공룡에 대한 애정을 부각시킴으로서 인간복제의 위험성에 눈을 감고 만다. <쥬라기 월드>를 만든 투자자의 손녀는 공룡복제기술로 탄생한 복제인간 소녀 메이지(이사벨라 서먼)다. 영화에서는 어린 나이에 죽은 손녀딸이 복제된 인간임을 직접 공표하기 보다는 그녀를 키운 보모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사실과 그녀의 젊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비춰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복제인간 메이지는 자신과 같이 유전자 기술을 통해 탄생한 공룡들을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난동을 부리는 사나운 공룡들을 가스로 죽이려는 순간에 메이지는 그 공룡들을 인간세계에 풀어 놓았다. “다 살아있는 생명이잖아요.” 그녀의 멘트는 생명의 귀중함을 뜻하는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리지만 그로 인해 복제생명체도 생명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인간의 탐욕에 따라 이미 모든 것을 저질로 놓고서는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제기하려면 유전자복제와 변형이 가져올 수 있는 비윤리적인 문제부터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
기술보다 중요한 세계관
제니퍼 다우드나는 그녀의 동료 새뮤얼 스턴버그와 함께 쓴 책 <크리스퍼가 온다:진화를 지배하는 놀라운 힘, 크리스퍼 유전자가위>에서 유전자 편집기술인 ‘크리스퍼 유전자가위’가 가져올 희망적인 미래를 낙관하기 보다는 두려운 미래를 생각하며 의료윤리 혹은 기술윤리의 측면을 반드시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생각한 대로 유전자를 갖고 있는 생명체라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퍼 유전가위 기술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드는 신체부위만을 조합하여 가장 이상적인 자신 만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맞춤형 태아를 출산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가 시도했던 우생학적 인간 실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는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생명나무의 실과’(창3:3-5)에 도전하고 있음을 감추고 있다. 기술의 혁신적인 진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세계관이다. 어떠한 세계관을 갖느냐에 따라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은 인간 사회의 현실화된 재앙의 예고편일 수도 있고, 잠깐의 즐거움을 주는 여흥으로 남을 수도 있다. 영화의 태도는 애매하다. 말콤 박사를 통해 유전자 변형 기술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도 복제기술이야말로 앞으로 할리우드가 애용해야 할 영화의 소재이자 다가오는 현실임을 긍정하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변형기술을 통한 인간조작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그리스도인 태도가 더욱 더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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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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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아버지를 용서하니 찬양이 됩니다 -어윈 형제 감독의 ‘아이 캔 온리 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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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음악을 하나로 엮다
인기 높은 가수의 명곡을 영화 제목으로 사용하며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는 일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라비앙 로즈>(2007)는 프랑스의 샹송 가수 에디트 삐아프(Edith Piaf)가 당신 신인이었던 이탈리아의 배우 이브 몽탕과 사랑에 빠져있을 때 불렀던 노래 ‘장미빛 인생(la vie en rose)’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곡은 불과 15분 만에 만들어져서 에디트 삐아프의 열정 넘치는 노래의 이유가 사랑에 있음을 엿보게 한다. 영화 <라밤바>(La Bamba, 1988) 또한 18세 나이로 요절한 가수 리치 발렌스(Ritchie Valens)의 명곡 ‘라밤바’를 제목으로 삼아 가수의 짧은 삶과 사랑을 묘사했다. 한국 영화 <사의 찬미>(1991)는 일제 강점기 하에서 한국 최초 여성 성악가로 활약한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의 사랑을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윤심덕의 애절한 노래인 ‘사의 찬미’를 제목으로 사용한 영화다.
이번에는 기독교 신앙을 노래하는 가수의 차례다. 미국의 유명 크리스천 록 밴드인 ‘머시미(MercyMe)’의 리드 보컬인 바트 밀라드(Bart Millard)의 삶과 신앙을 다룬 영화 <아이 캔 온리 이매진>(I can only imagine, 2018)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다소 낯선 노래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1999년 ‘워십 프로젝트(The Worship Project)’ 앨범에 처음 수록된 이후로 머시미의 다양한 음반을 통해 거듭 발매되면서 2003년과 2004년에는 기독교 계통의 방송뿐만 아니라 ‘Top 40’같은 일반 방송의 인기 차트에서도 오랜 기간 수위를 기록하면서 미국에서는 라디오를 켜면 이 노래가 나온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많이 방송을 탄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음반으로는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는 250만장의 음반 판매기록을 달성하면서 2002년에는 기독교 최고의 음악상이라 할 수 있는 ‘도브 어워드(Dove Award)’의 ‘올해의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을 노래한 바트 밀라드의 숨은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미국 크리스천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난 3월 16일 미국에서 첫 개봉 당시부터 박스 오피스 3위에 올라 첫 주에만 1천7백만 달러의 수익을 기록함으로써 7백만 달러로 추정되는 제작비를 불과 한주 만에 회수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6월 첫째 주말까지의 총수익이 8천 3백만 달러를 넘어섬으로써 기독교영화 사상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이후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영화로 남게 되었다.
크리스천 가수의 찬양곡에 얽힌 사연을 영화화 한 만큼 제작 또한 기독교영화의 단골 출연 배우가 세운 ‘케빈 다우니스 프로덕션(Kevin Downes Production)이 맡았다. 내용에서부터 감독 및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크리스천에 의한 크리스천을 위한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케빈 다우니스는 우리나라에는 DVD로만 출시됐지만 미국 크리스천들에게 훌륭한 평가를 받은 영화 <우드론>(Woodlawn, 2015)이나 <커레이져스:용기와 구원>(Courageous, 2011)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중견 배우이다.
그러나 유명 크리스천 가수의 노래제목이 영화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단지 노래가 유명세를 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래에 담긴 사연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신앙적 감동과 결합되어 있을 때 기독교 관객을 극장으로 모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은 신앙과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기독교 영화의 순수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의 구원
이 영화는 바트 밀라드의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의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는 바트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버지의 폭력이 일으키는 갈등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찬양사역자로서 성공하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에 있음을 보여준다.
바트의 아버지 아서(데니스 퀘이드)는 아내와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잦다.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이유만으로 권위적이며 자신의 뜻대로 가족을 움직이려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폭력을 행사한다. 바트의 어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게 되고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된 바트는 오갈 데 없는 상황 가운데서 아버지와의 불편한 동거가운데 성장하게 된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자녀들이 받게 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 이미 프로이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진행해왔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부정적 자아나 부정적 대인관계의 경향을 보일 수 있으며, 결혼 후 낳은 자녀에 대해서 심지어 자신이 과거 아버지에게 당한 것과 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흔히 말하는 폭력의 대물림 현상을 빚기도 한다. 특히 역사가들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자란 사람이 인류 역사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예로 히틀러와 스탈린을 들기도 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세무공무원이었지만 술꾼에다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며 흉폭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는 구두 제화공 출신으로 중산층 가정을 이루었지만 술에 취하면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는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술주정뱅이였던 그는 스탈린이 열한 살 때 남과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비록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지만 폭력적인 아버지의 독재에 대한 반감을 가지며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신앙적 가치는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바트가 어떻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데 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기 전 바트를 교회가 주관하는 캠프에 맡기고 그곳에서 바트는 청소년 목회자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배우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 가운데서 불태우면서 그의 영혼은 하나님 손에 붙들린바 된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부재 혹은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어린 학생들이 받게 될 부정적 영향을 신앙교육이 어떻게 바로잡아주며 건강한 성장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당장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린 청소년시기에 예수님의 사랑의 끝자락을 조금이라도 만지게 돕는 일은 장래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까닭이다. 마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슬그머니 옷 가에 손을 댔을 때 일어나는 놀라운 결과(눅8:43-44)처럼 말이다.
노래보다 용서가 먼저다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의 가장 흥미 있는 요소는 찬양사역자로서의 음악적 성공이 바트의 재능이나 기술의 향상을 통해 이루어지기 보다는 아버지와의 내적 갈등이 해결되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바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 본 유명 프로듀서인 브리켈(트레이스 애드킨스)로부터 자신이 노래가 가진 결정적인 문제점을 지적받는다.
브리켈:가끔 자넨 무대 위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애. 흉내 내는 거지. 그럼 믿음이 안 생겨. 근데 가끔은 진짜가 보여. 근데 그게 나타나면 (자네는) 겁을 먹는데 그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지. 그래서 자넨 알다가도 모르겠네. 하나 묻지 자네는 뭘 피해 도망가는 건가?
바트:아버지요. 저를...
브리켈:때리셨군. 그런 속내는 못 감춰.
바트:그걸 안고서 감내하며 살아야 해요. 언제까지나
브리켈:그럼 그걸 곡으로 써. 도망치는 건 관두고. 그 고통을 영감으로 승화시키라구. 그럼 사람들이 믿어줄 뭔가가 탄생하겠지. 헌데 그러려면 두려움에 맞서야 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상처와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을 향한 영감있는 노래를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바트는 췌장암에 걸려 죽어 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는 찬양사역자의 길을 가는 아들을 응원한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밴드에 복귀하는 버스 안에서 순식간에 써내려간 찬양이 바로 ‘아이 캔 온리 이매진’이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파를 탄 노래는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한 후 창작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어렵다면 사람들과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는 일은 없는지 주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실현시켜보자. 하나님을 향한 위대한 인생이라는 명곡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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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