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Home >  문화 >  영화
실시간 영화 기사
-
-
[영화] 누구의 신발 끈을 묶어줄 것인가?
-
-
유대인의 영화사용법
유대인들은 영화사용법에 능통하다. 영화사 초창기부터 유대인들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청교도사상을 갖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영화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은 틈새를 이용 영화사들을 설립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영화를 시간과 돈을 낭비하게 할 뿐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세속적인 문화로 여긴 반면 유대인들은 새로운 대중의 오락거리로 등장한 영화들 속에서 일치감치 돈 냄새를 맡았었다. 획기적인 오락거리인 영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대중들은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적어도 TV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는 매체는 영화가 유일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는 영화공장으로 불리며 영화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미국경제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유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유대인의 천재성은 영화의 상업성 뒤에 감춰진 지식의 전달력과 설득력과 같은 영화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간파한데서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현대사의 변곡점을 이룬 두 가지 큰 사건에 연루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깨달았다.
하나는 러시아혁명으로서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 옆에는 영화의 혁명가로 불렸던 세르게이 미하일 에이젠슈쩨인(Sergei M. Eisenstein)이 있었다.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던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이들 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었던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에이젠슈쩨인의 영화를 통해 레닌의 사회주의 혁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며 공감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2차 세계대전으로 유대인 학살의 중심에 서있는 히틀러 또한 자신의 게르만 민족주의를 선전하는데 영화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히틀러에 대한 영웅적인 숭배를 일으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당시의 선전영화들은 ‘히틀러의 연인’이란 별명을 가졌던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히틀러를 밀착 수행하며 촬영한 결과였다.
역사적인 이 두 사건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영화로부터 얻은 지혜는 영화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최고의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루살렘 멸망이후 2천년 동안 세계를 떠돌며 냉대와 핍박의 세월을 살아 온 유대인들이 민족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발명품은 그들의 말을 온 세상에 들려줄 수 있는 꿈의 매체 영화였다.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홀로코스트 영화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학살의 비극을 다룬 영화들은 유대인의 핍박받는 역사를 가르치는 중요한 교육도구의 역할을 해왔다. 유대인 출신의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유대인 대학살의 현장을 실감 있게 묘사함으로써 2차 대전의 실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실재 일어난 일이란 점과 아울러 학살당한 유대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전세계인이 공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쉰들러 리스트>로는 부족한 실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극우주의와 이에 따른 인종주의적 행태는 반유대주의라는 망령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세상에 내밀게 만들었다. 2018년 미국 피츠버그의 유대교 회당에서는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11명이 사망했는가하면, 이탈리아 로마의 정치사회경제연구소(EURISPES)가 펴낸 ‘이탈리아 2020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 국민의 15.6%는 홀로코스트가 실재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4년 같은 조사(2.7%) 때보다 6배로 급증한 수치다.
밀레니얼 세대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인식은 더욱 희박하다. 2019년 1월, 세계 언론은 캐나다 젊은층의 62%가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통계를 보도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핍박받은 역사를 대중에게 알려왔던 영화전략에도 새로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찾아왔음이 분명하다.
이 때 유대인이 택한 영화는 <조조 래빗>이었다. 폴리네시아계 유대인 타이카 와이티티 (Taika Waititi)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은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4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92회 아카데미의 현장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의 후보에 오른 끝에 각색상을 수상했다. 프랑스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메디치 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었던 크리스틴 뢰넨스(Christine Leunens)의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을 영화화 하는데 성공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아카데미 최고의 영화 후보에도 올랐던 것이다.
<조조 래빗>은 학살의 잔혹성을 보여주며 이에 따른 유대인의 비극을 알려왔던 이전의 홀로코스트류의 영화와는 접근방법을 달리 한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 대중의 심리와 문화를 풍자적인 기법으로 만들었다. 홀로코스트 현장을 부인하는 시대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배경과 문화 그리고 인간심리를 묘사하는 일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감독은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는 2차 대전 중 히틀러를 추종하는 소년단인 히틀러 유겐트(Hitler Jugend)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열 살 독일소년의 심리를 유머있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빠 없이 엄마와 단 둘이서 생활하는 열 살 소년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히틀러 유겐트의 일원이 되어 군사훈련을 받지만 토끼를 죽이지 못하는 바람에 겁쟁이로 낙인찍히고 오히려 ‘조조 래빗’이라 불리며 놀림을 받고 만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는 철저히 히틀러를 추종하고 있고 소외된 조조 앞에는 상상 속 친구인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가 나타나 위로의 말과 더불어 히틀러가 주장하는 반유대주의 정신을 강화시키곤 한다. 어린 아이에게 군입이 입는 제복을 입고 히틀러 부대의 일원이 되었다는 소속감은 히틀러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정신체계의 기틀로 작용한다. 오른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 ‘하일 히틀러’를 수없이 외치며 거리를 쏘다니는 조조의 모습에는 온전한 지식과 판단에 이르지 못한 결과로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연약한 대중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조는 2층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발견하고 갈등에 휩싸인다. 나치 친위대에 고발할 생각도 하지만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뜻밖에도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협력적인 동거를 택하고 만다. 이 때 나치즘에 흠뻑 빠진 조조의 생각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어머니 로지와 유대인 소녀 엘사라는 두 여성이 보여준 애정과 친밀감이다. 이들은 가족 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조조를 조금씩 나치즘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든다. 특히 게시타포의 급습 때문에 얼떨결에 조조의 누나로 신분이 바뀌어버린 엘사를 보호하려는 조조의 모습에는 유대인과 나치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있다. 양심과 상식을 짓누르는 허황된 행동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며 온전한 사랑은 변화의 핵심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라
영화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몰입한 열 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 머리에는 뿔이 나있고 짐승처럼 꼬리가 있으며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고 믿는 주인공 아이의 모습은 과거 히틀러 독재 시대에만 있었던 생각은 아니다. 자신의 부조리한 권력과 잘못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정치와 종교, 경제 가릴 것 없이 인간사회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이를 위해 온갖 거짓을 꾸며내어 희생을 정당화시키곤 했다. 다시 말해서 <조조 래빗>은 나치즘에 희생당하는 유대인의 특수적 상황을 세계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현실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코믹한 풍자를 내세워 거짓말하는 권력을 조롱함으로써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조 래빗>이 어리석음과 사랑이 공존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인간 성장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대단히 잘 만든 작품임을 드러낸다. 그것은 구두끈을 묶는 장면의 반복과 변화를 통한 상징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조조는 자신의 손으로 구두끈도 매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보인다. 엄마는 아들의 구두끈을 정성스럽게 매어주며 사랑을 표현한다. 그렇다. 세상에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신발 끈을 매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누군가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잘못된 권력과 거짓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사랑의 끈을 매어줄 필요가 있다.
영화 후반부에 조조는 죽은 엄마의 구두끈을 묶어준다. 비밀리에 나치에 저항운동을 해왔던 엄마가 거리의 광장에서 처형당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조조는 뜻밖에도 엄마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풀어진 엄마의 구두끈을 매어준다. 사랑의 환원인 동시에 조조가 엄마의 의지를 깨닫고 성장하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또 하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조는 벽장에 숨어 지내던 유대인 소녀 엘사에게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며 그녀를 세상 밖으로 데려가기 위해 뜻밖에도 엘사의 신발 끈을 묶어준다. 그녀와 교감하며 함께 세상으로 나갈 만큼 성숙한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또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요13:14)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섬김의 모본을 보여주신 것뿐만 아니라 교감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신 현실적이며 보편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구두끈을 묶는 손길도 이와 같다. 어리석고 연약한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양식으로 가득 찬 세상이 성장하고 변화될 수 있도록 사랑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
2020-02-25
-
-
[영화] 세상에 눈높이를 맞춘 교황이야기
-
-
종교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장르에 있어서 종교영화로 분류될 수 있는 영화들은 교리와 역사(사건) 그리고 인물 이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어 왔다. 교리는 종교가 주장하는 가치관을 드러내며, 역사는 종교가 현실사회 속에서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인물은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종교영화 속에서 이 세 가지는 균등하게 배분되기 보다는 혼재되기도 하며 영화에 따라서는 강조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기독교영화를 예로 들자면 기독교변증영화의 성격을 갖고 있는 <신은 죽지 않았다>(2014)는 대학 신입생이 무신론자인 철학교수에 맞서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교리’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영화다. 반면 애니메이션 <켈스의 비밀>(2009)은 9세기 무렵 수도원에서 제작된 아일랜드의 국보 ‘켈스의 서(The Book of Kells)’라는 이름의 성경 제작 과정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를 다룬 <루터>(2003) 같은 기독교영화들은 ‘역사’와 ‘인물’ 모두에게 초점을 맞춘 ‘역사 속 인물’을 보여주었고 세실 드밀 감독의 예수의 생애를 그린 <왕중왕>(1927)이나 <십계>(1956) 같은 성서영화들은 대개 ‘역사’와 ‘인물’ 그리고 ‘교리’가 함께 스크린에 투영되어 총체적으로 기독교신앙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종교영화 가운데서 가장 최근에 제작된 <두 교황>(The Two Popes, 2019)은 철저히 인물에 초점을 맞춘 가톨릭 영화다. 2005년 교황에 오른 베네딕토 16세와 그의 뒤를 이어 2013년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선출과정과 그들의 만남가운데서 일어났던 일화들을 모았다. 영화 제작 시점에서 살아있는 전·현직 교황 두 사람의 교황선출 과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냈을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로 제작되어 배우가 현 교황 역을 맡아 밀도 높은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크게 화제가 되었다.
앤서니 홉킨스(베네딕토 16세 역)와 조너선 프라이스(프란치스코 교황 역)라는 관록 있는 세계적인 배우들을 내세워 교황 역을 맡긴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독교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을 누가 맡느냐 하는 점은 배우의 평판과 이미지 등을 두루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택하듯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 또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에서 교황 역을 맡은 배우들은 교황이 가진 권위와 영화가 추구하는 대중적 친밀감 모두에 부응할 수 있는 성공적인 캐스팅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사가 넷플릭스(Netflix)란 사실은 관객의 호응도를 평가하는데 어렵게 만들었다. 넷플릭스의 영화들은 대부분 극장개봉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즉 월 사용액을 지불한 넷플릭스 회원들이 TV나 컴퓨터 모니터 혹은 휴대폰으로 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제작비용이나 작품의 수준이 결코 극장상영용 영화들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으며 현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연출자나 배우들이 대거 넷플릭스의 영화제작에 나서면서 넷플릭스의 신작영화들 가운데 주요영화들은 극장상영과 인터넷 상영이라는 두 가지 상영방식을 모두 택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인터넷 영화가 과연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 상영되는 영화들과 같을 수 없다는 전통을 고수하는 유수의 세계 영화제 관계자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을 보다 자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19년 12월 11일에 개봉한 <두 교황>의 공식 관객 수는 27,598명이다. 현 교황이 갖고 있는 대중적 인기에 비하면 결코 많은 수는 아니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인터넷 서비스의 장점은 이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을 수치로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보여주고 싶은 교황’과 ‘보고 싶은 교황’
종교영화의 연출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라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터뜨리는 충격요법이 두 번째다. 두 방법 모두 영화의 흥행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성경의 내용이나 기독교 문학작품의 영화화는 관객의 호기심을 떨어뜨릴 것 같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앙과 경험을 재확인하고 학습하려는 의도를 가진 관객들이 적지 않은 까닭에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작되고 있다. 사도 바울의 로마감옥 생활을 묘사한 <바울>(2018)이 27만 명이 넘는 기독교인 관객을 모아서 흥행에 성공했는가 하면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2019)는 무려 3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아 역대 급 기독교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가톨릭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두 교황>이 개봉되기 한 달 전 로마교황청이 직접 제작에 나선 다큐멘터리 <프란치스코 교황 : 맨 오브 히스 워드>(2018)가 한국의 극장에 상영되었다. 익히 잘 알려진 현 교황의 행적을 따라가며 교황의 육성이 담긴 메시지를 담은 영화지만 <두 교황> 보다 많은 39,138명의 관객을 모았다.
독일 영화의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교황청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이 영화는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의 재해 현장과 지중해 난민캠프 등 가난과 고통이 있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메시지를 전하는 로드무비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고급 리무진 대신 소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축구를 좋아하고 탱고를 즐기는 서민형의 소박한 교황의 이미지가 영화 속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다. 로마 교황청이 세계에 보여주고 싶은 교황의 모습인 셈이다.
그러나 <두 교황>은 신선한 충격을 관객에게 선사한다는 점에서 앞의 영화와는 다르다. 즉 세상이 보고 싶은 교황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때문에 세계 각국의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일컫는 콘클라베(Conclave)로 시작한다. 빗장을 걸어 잠근 성시스티나 성당 안에서 교황 선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말로만 들어왔을 뿐이다. 영화 또한 실제모습이 아닌 연출인 까닭에 콘클라베 전부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관객으로서는 보고 싶은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2013년에 있었던 콘클라베는 종신직인 교황이 스스로 사퇴 후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새롭게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이며, 또한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라는 ‘최초’의 수식어가 여럿 붙어있다. 영화는 이 최초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 바로 전 교황이며 새로운 교황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려는 바티칸의 의지가 담겨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황의 회개와 변화
<두 교황>은 전·현직 교황의 미묘한 갈등이 어떻게 창조적인 계승으로 이어지며 세계를 향한 변화의 발걸음으로 도약하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고글리오(조너선 프라이스)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직을 사임하기 위해 교황 베네딕토 16세(앤서니 홉킨스)를 만난다. 베르고글리오는 어떻게든 교황의 사인을 받기 위해 서류를 내밀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오히려 자신의 사임 의사를 밝히며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직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이런 난국이 있나. 내가 승낙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교회에서 은퇴할 수 없고. 당신이 남기로 동의하지 않으면 난 사임할 수 없고.”
베네딕토 16세가 베르고글리오에게 교황이 되기를 권했던 이유는 그가 노쇠한 바람에 교황직을 수행할 만큼의 건강을 갖고 있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교회는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베르고글리오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황의 전통을 강화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고수해왔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 교황들과 다를 바 없지만 사랑과 긍휼이라는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지적인 수도단체인 예수회 소속이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를 섬겼던 성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것은 현 교황이 과거와 다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예증인 셈이다.
또한 영화에서 두 교황이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장면이기도 하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이 국민과 교회를 탄압할 때 저항하지 않고 묵인했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영화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과거 문제가 된 사건을 흑백장면으로 처리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써가면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교황은 무흠한 인물이 아니다. 그 역시 실수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온 과거가 있다. 그러나 교황은 회개했고 이를 영화를 통해 온 세상에 알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회개는 변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교황 영화는 가톨릭의 홍보용으로만 볼 일이 아니다. 12억 명의 신자를 둔 가톨릭의 수장이 고백한 회개와 변화를 통해 현대인이 교회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영화가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다는 사실은 새해에도 변함이 없음을 기억할 일이다.
-
2020-01-28
-
-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는 한 해
-
-
세계를 장악한 만화왕국 디즈니
2019년 세계 영화계는 디즈니와 애니메이션이 장악한 한 해로 기억할 것이다. 금년 한 해 동안 디즈니가 전세계적으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영화만 무려 6개나 된다. 3,4월 봄날에는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온 세상의 마블 팬들을 사로잡더니, 여름을 기다리던 5,6월에는 <알라딘>이 실사영화로 돌아왔고, 추억의 팬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4>를 개봉시켰다. 한 여름에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만화영화를 실사로 제작한 <라이온 킹>으로 여름방학 특수를 누리고는 올 겨울 <겨울왕국2>로 동심을 낚아채갔다.
이들 영화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만화와 관련 있는 영화란 사실이다.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마블사(Marvel Entertainment Inc)의 캐릭터를 일반 영화화한 것이고, <토이스토리4>와 <겨울 왕국2>가 전형적인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은 과거 애니메이션 작품을 실사 영화한 작품들이다.
만화의 힘은 얼마나 놀라운가! 코흘리개나 보는 것으로 치부했던 만화는 셀룰로이드 용지에 그려서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었던 시절을 멀찌감치 뒤로하고 이제는 손이 아닌 순수하게 컴퓨터로만 작업하여 실제 보다도 더 사실 같은 화면을 연출하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연령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장르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금년과 같이 디즈니의 세계 영화계 장악은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다. 1995년 디즈니는 당시 애니메이션 전문 스튜디오인 ‘픽사(Pixar)’와 손을 잡고 '토이스토리'를 제작한 후 <니모를 찾아서>(2003)와 <인트레더블>(2004) 등을 연이어 흥행가도에 올려놓았다. 디즈니는 디지털 기술로 현대적 감각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픽사가 필요하다고 판단, 2006년에 무려 72억 달러(약 8조5000억원)에 픽사를 사들였다. 픽사의 슬로건은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불어 넣는다”로 디즈니의 가족 중심적이며 판타지적인 요소가 픽사의 철학과 결합하며 외연은 급속히 확장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콘텐트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2009년 공상 과학 만화 잡지사로 출발한 ‘마블 엔터네인먼트(Marvel Entertainment)’를 40억 달러에 매입한 것은 할리우드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왜냐하면 마블은 ‘스파이더맨’을 비롯하여 ‘엑스맨’과 ‘아이언맨’ 등 무려 5천여 개의 캐릭터를 보유한 만화시장의 강자였던 까닭이다. 이 캐릭터들은 고스란히 디즈니의 자산이 되었고 10년 전 40억 달러(약 4조 7000억원)의 투자는 오늘날 투자금액의 4.5배가 넘는 182억 달러(약 21조 4000억원)의 매출을 통해 대박이 난 거래였음이 증명되었다.
그밖에도 2012년에는 <스타워즈> 시리즈를 제작한 루카스 필름을 연이어 인수한데 이어서, 2017년에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21세기 폭스사’를 인수하면서 미디어 시장에서 최고의 강자로 등극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채널만 돌리면 디즈니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극장에만 가면 디즈니 영화를 골라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디즈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것은 디즈니의 세계관에 대한 분석이 시급히 필요함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독교 고전은 강하다-‘천로역정’
기독교 애니메이션계도 꿈틀거린 한 해였다. 비록 국내에서는 장편 만화영화 한 편만이 개봉되는데 그쳤지만 그 위력은 제법 컸다. 그동안 수입한 영화들의 연이은 흥행부진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었던 ‘CBS의 영화사업부’를 소생시키는 119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니 말이다.
로버트 페르난데스 감독의 <천로역정:천국을 찾아서>는 기독교고전의 힘을 보여준 애니메이션이었다. 존 번연의 고전 명작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컴퓨터영상합성기술(computer generated imagery)을 통해 세련되고 기품 있게 만들었다. 디즈니의 톡톡 튀고 감각적인 영상미와는 다르게 고전적인 작품의 정취가 잘 묻어나도록 안정감 있는 색채와 캐릭터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천로역정>이 애니메이션 세계에 있어서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최고의 기독교 소설의 내용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시선의 분산을 막는 효과가 있다는 점은 장점임에 틀림없다. 비교적 단순한 이미지는 주인공 크리스천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면서 기독교 고전으로서 관개에게 전하는 메시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단점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 시킨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천로역정>은 신세대적 관점에서 보자면 판타지 장르에 속한다. 그리스도인의 인생 여정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각종 유혹들이 은유로 묘사되고 있지만 초월적 존재와 세계를 묘사되기 때문에 인터넷 게임이 보여주는 판타지적 이미지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이라면 마음에 썩 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신세대들에게 애니메이션을 통해 신앙을 전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기술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메시지를 통해 관객을 ‘납득’시키려 하기 보다는 그림의 감성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신앙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은 공식 극장관람 인원이 296,588 명이라는 기독교 영화사상 최대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기독교 고전의 힘이다. 신앙에 정말 유익이 되는 기독교 고전이란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기에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선입견과 시간상의 이유로 책을 접할 수 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애니메이션 <천로역정>은 17세기에 쓰인 명작이 21세기에 와서도 여전히 신앙을 성찰하는데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왜 고전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최고의 성탄영화를 만나라-‘더 크리스마스’
그렇다면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최고작은 무엇일까? 교회교육용으로 나온 비디오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던 기독교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극장용 크리스마스 영화로 제작된 <더 크리스마스>(The Star, 2017)는 최고의 기독교 애니메이션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성경에 충실하게 풀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동물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한 흥미로운 상상력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진일보한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모습을 발견하게 만든다. 특히 <나니아 연대기>시리즈를 제작한 ‘월든 미디어’와 ‘소니 픽쳐스’의 기독교 브랜드인 ‘어펌 필름’이 손을 잡고 만든 영화란 사실에서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이며 디즈니의 여느 영화 부럽지 않은 색채감과 화면전개에 있어서 역동성을 자랑한다.
방앗간에서 연자 맷돌을 돌리던 당나귀 보는 왕의 캐러반의 일행이 되어 왕을 자신의 등에 태워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드디어 사고를 위장하여 방앗간을 탈출한 보는 정혼한 사이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발견되어 베들레헴 여행길에 동행하게 된다. 한편 동방박사 세 사람을 태우고 온 세 마리 낙타는 헤롯왕의 사악한 흉계를 눈치 채지만 헤롯왕은 도사견 두 마리와 함께 킬러를 보내 새롭게 탄생할 왕을 죽일 것을 명령한다. 보와 그의 동물 친구들은 마리아와 탄생할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킬러의 도사견들과의 한판 승부를 펼친다.
<더 크리스마스>의 가치는 동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증언하며 그 분이 참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데 있다. 이것은 마치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거짓 선지자 발람을 깨우쳐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발람이 타고 가는 당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도록 한 사건에 비견될 수 있다. 성경에 당나귀가 말을 한 사건이 의미가 있듯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만화영화 속에서 말하는 당나귀를 지켜보며 그가 보여주는 성탄절의 깊은 뜻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 둔해지거나 어두워 질 때 하나님은 당나귀를 통해서 깨닫게 도와주셨다면, 현대문화 속의 기독교 애니메이션의 역할이란 바로 발람 앞에서 말하던 당나귀의 모습을 재현시키는데 있다.
당나귀가 말을 하다니? 놀랄 일이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모든 상상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초월적인 일들도 모두 묘사할 수 있다.
당나귀가 말을 한다고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우화정도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화는 어린이들이 많이 보는 장르임에 분명하고 이 어린이들은 만화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즉 기독교 애니메이션은 다른 영화들이 가르쳐 주지 못한 진정한 삶의 자세를 어린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더 크리스마스>는 주인공 당나귀 보가 만삭의 마리아를 등에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장면을 통해 캐러반의 일행으로 왕을 태우고 싶다는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왕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를 태운 셈이니 어린 관객들은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깊고 위대한 뜻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또한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킬러의 두 마리 도사견이 보의 친구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지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탄생을 다른 동물들과 함께 지켜보며 경배하게 되는 변화의 과정은 기독교 만화영화가 디즈니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기독교 애니메이션 속에서 악당은 영원한 악당으로만 남지 않고 변화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변하듯이 말이다. 자칫하면 잊혀질 뻔한 기독교 최고의 성탄 애니메이션 <더 크리스마스>는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느낌을 평생토록 기억하게 만들 만한 작품이다. 메리 크리스마스!
-
2019-12-27
-
-
‘82년생 김지영’을 보며 사회의 거울로써 영화를 생각하다
-
-
영화와 사회는 역동적 관계
영화와 사회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역동적인 관계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고, 사회는 영화의 영향을 받아서 변화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영화들이 사회와 역동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들이 무려 1천6백 편이 넘지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는 수십 편에 불과하고 그 마저도 기억의 뒤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 일쑤라서 모든 영화를 상대로 영화와 사회와의 역동적 관계를 논하는 일은 민망하기까지 하다.
때로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로써의 영화가 현실을 제대로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 아닌 오목거울이나 볼록거울처럼 현실을 왜곡시키는 바람에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미국 공황기에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상업영화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실직과 빈곤의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대저택에 살며 화려한 파티를 즐기고 멋진 자동차를 소유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사는 행복에 겨운 부자들의 세상만을 묘사하는데 급급했다. 그래도 사회적 영향력은 적지 않아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극장을 찾아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그려진 영화를 보며 환상에 잠기곤 했다. 비현실적인 영화는 어려운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게 만드는 도피처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한 영화들도 적지 않다. 2011년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는 공지영 작가의 원작 소설 <도가니>가 해내지 못한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며 우리 사회 ‘도가니 신드롬’을 몰고 왔었다. 청각장애아동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일어난 교장과 교직원들의 성폭력사건을 묘사한 이 영화는 2006년에 광주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2009년 공지영 작가를 통해 소설로 등장하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이슈였지 사회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회는 달랐다. 대통령과 대법원장 그리고 경찰청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이 앞 다투어 영화를 봤고, 장애인들을 향한 성폭력에 강력 대처하는 법안, 이른바 ‘도가니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영화의 힘이라 말할 수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신드롬의 이유는 정의가 실종된 한국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영화가 해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는 82년생 김지영
이번에는 김도영 감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사회의 거울로써의 영화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조남주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한 이 작품은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이유는 영화의 내용에 대한 분석과 비판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문화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남성네티즌들의 막연한 여성혐오적인 시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약 2만 명이 참가한 네이버의 네티즌 영화 평점을 보면 남성 네티즌은 10점 만점에 1.88점으로 거의 테러 수준에 가까운 평점을 주었는가 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여성 네티즌 들은 9.47점의 평점을 주는 바람에 남녀 성대결과 같은 구도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평점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극과 극의 대조를 보인 이유는 영화를 보지 않은 남성 네티즌들이 평소 가지고 있었던 여성 혐오적인 감정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를 본 관객들의 가운데 남성(9.54점)의 평점은 여성(9.60점)의 평점과 거의 비슷한 높은 점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지 52년생이나 62년생 여성이라면 ‘다 그런가 보다’ 하며 넘어갔을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적인 행태들이 82년생 여성에게는 인격과 삶을 훼손하고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었다.
정대현(공유)과 결혼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지영(정유미)은 어린 자식을 돌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다. 명절이면 시댁에 가서 음식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고, 육아와 가사에 올인하느라 자기계발은 꿈도 꾸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래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준 옛 직장의 상사가 차린 회사에 취업을 해보려 하지만 애를 맡길 곳이 없어서 결국 포기하고 마는 그에게 찾아 온 것은 정신질환이었다. 영화는 정신에 어려움을 겪는 아내를 위해 휴직을 고려하는 자상한 남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가 결코 남성혐오적인 메시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편 대현(공유)의 아내에 대한 사랑과 돌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 남녀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여성혐오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여성혐오의 출발점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데 있다. 기독교 심리학자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자신의 저서 <여성 그대의 사명은>에서 서구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홀대해왔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현대 이전의 사회에서 여성은 종처럼 취급당해 왔었다. 즉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보다는 가족이나 남편을 위해 인생을 사는 존재로 전락했었다. 독립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살 권리를 박탈당하고 집에서는 부모나 형제의 그늘에서 살았으며, 결혼을 해서는 이기적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직장에 다니더라도 승진은커녕 여성을 과소평가하는 고용주의 종살이 하는 존재로 취급받아왔다.
둘째,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 취급당해 왔다. 투르니에의 말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들의 ‘관음증적으로 훔쳐보는 대상’이 된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우하기 보다는 사고파는 물건을 보는 시각으로 대한 것과 다름없었다. 즉 여성은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전락되었고, 단지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만 표현되는 분위기 속에 살아왔던 것이다.
셋째, 여성은 매력이나 품위를 제공하는 장식 도구로 취급당함으로써 물건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여성이 사회발전의 주체로서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고 남성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는 들러리나 기껏해야 광고의 모델처럼 미모를 상품화 시키는 도구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과거 농경사회나 산업사회에서 생산의 중요한 역할은 근육을 쓰는 힘이 여성 보다 우월한 남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식정보화사회를 사는 오늘날 생산의 도구는 힘이 아니라 세련된 두뇌와 이를 컴퓨터와 지식에 적용하는 정밀한 능력이다. 즉 여성의 특징이 지식정보화시대에는 더 어울리게 된 것이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적 진출과 남성의 전유영역에서 조차 여성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남성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성에게 남성의 지위나 역할을 강탈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분야에서 상호조화와 보완을 이루어야 하는 사회문화적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곡된 여성관의 근저에는 잘못된 인간관이 내재해 있다. 즉 인간 안에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가 이상적인 인간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 인간 안에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이 함께 내재해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조화와 상호보완은 한 인격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폴 투르니에 말을 빌리자면 남성은 사물의 세계를 세우는 데 적합하고, 여성은 인격의 세계를 잘 형성한다. 따라서 이 둘은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긴밀히 협력하여, 각각 자신의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조화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
2019-11-25
-
-
[영화] 기계문명에 종속 될 미래를 위해 돌아온 경고
-
-
할리우드 SF 액션영화의 화려한 복귀
할리우드 최고의 SF 액션 영화를 한편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터미네이터2>(1991)를 위해 엄지를 치켜 들 것이다. 비록 기계인간을 향해 쏜 것이긴 하지만 총기난사와 같은 어린 청소년들이 보기에 다소 과격한 폭력장면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스토리나 배우들의 연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추격 장면과 무엇보다도 슈퍼컴퓨터를 사용한 특수효과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오락영화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연출자는 관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명확히 알고 있다. 적절한 공포와 유머를 섞을 줄도 알고 공상과학 영화라고 하지만 줄거리는 나름 그럴듯한 개연성도 갖추고 있다. 최첨단 촬영 기술에 능숙한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타이타닉>(1997)과 <아바타>(2009)를 통해 세계 흥행시장을 휘어잡을 수 있었던 것도 <터미네이터1,2>를 연출하면서 쌓아두었던 내공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소환되어 오는 것은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는 컴퓨터가 나타나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사회가 탄생할지 모른다는 어두운 설정이 꽤나 일리 있어 보이는 까닭이다. 과학자들은 컴퓨터는 단지 제공된 프로그램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원리를 내세워 인간과 기계와의 전쟁은 단지 허구적인 상상력에 불가하다고 말하지만, 이세돌 9단을 물리친 알파고의 위력을 실감한 우리로서는 적어도 창조적인 사고능력을 갖추진 못하더라도 빅데이터를 가지고 끝없이 정보를 확장시키고 반복된 적용을 통해 인간을 농락할 만한 괴물이 제작될 가능성을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하고 있다.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는 지금까지 ‘터미네이터’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영화 가운데 <터미네이터1,2>를 직속으로 잇는 작품이다. 2015년도에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5번째 영화 <터미네이터: 제네시스>가 개봉하는 바람에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6>로 불릴 만도 하지만 제작진이나 감독, 그리고 ‘터미네이터’의 골수팬들은 이 영화야말로 <터미네이터1,2>를 잇는 연속작으로 참다운 3부작을 완성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2편의 연출을 맡아 <터미네이터>를 최고의 SF 액션영화로 만든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직접 제작을 맡아 <터미네이터> 본래의 흐름과 맥을 이을 뿐만 아니라, 1,2편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물론 그동안 스크린에서 뜸했던 린다 해밀턴까지도 컴백함으로써 그후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악에 대항하는 신구(新舊)의 연합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2:심판의 날>로부터 27년의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을 진행시키지만 근본 이야기의 구조는 매우 유사하다. <터미네이터2>가 미래 반군의 지도자가 될 어린 존 코너를 제거하기 위해 기계들을 조종하는 스카이넷이 액체금속으로 만든 T-1000(로버트 패트릭)을 과거로 보내지만, 미래의 인간 지도자 존 코너 또한 새롭게 프로그램 된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을 과거로 보내 어린 자신과 어머니 사라 코너(린다 해밀톤)를 보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 파멸을 위해 프로그램된 T-1000은 자신 보다 성능이 다소 뒤떨어진 T-800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게 된다.
미래로부터 온 터미네이터의 존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존 코너의 어머니 사라 코너의 등장은 다시 한번 여전사의 역할을 그녀에게 부여하기도 하지만 악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중심에 서게 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인간과 선하게 프로그램화된 기계, 남성과 여성, 노인과 젊은이 등 다양한 모습의 존재들은 서로 다른 차이를 넘어 미래 인간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T-1000과의 싸움이 나서게 된다.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에서 미래 인류의 생존을 위해 보호받아야 하는 인물은 존 코너에서 대니 라모스(나탈리아 레이즈)로 바뀌었다.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는 대니의 입장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는 위치에서 이번에는 대니를 위한 싸움에 나선다. 대니를 죽이기 위해 더욱 진화된 액체금속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는 T-1000을 대신하고, 전편에서 T-800이 했던 역할은 슈퍼 솔져인 그레이스(맥켄지 대이비스)가 맡는다. 즉 미래의 인간을 구원할 지도자를 제거하려는 인공지능 세력과 어떻게든 이를 막아보려는 인간과 또 다른 기계인간 여전사 연합의 대돌이 각종 액션을 동반하며 펼쳐지고 있다.
‘터미네이터’는 성경에서 아이디어를 빌렸는가?
제임스 카메룬의 <터미네이터>는 항상 미국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로부터 극단의 평가를 받곤 했다. 한쪽에서는 화려한 액션으로 위장한 폭력장면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는가 하면, 다를 한편에서는 기독교의 종말론에 입각한 메시아사상을 최첨단 문명을 누리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것이 아니냐는 우호적인 시선도 있었다. <터미네이터1,2>의 진정한 후속편인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도 마찬가지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메시아 탄생의 역사적 사건을 구조적으로 모방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편의 경우 미래세계에서 인간 구원을 위해 싸우게 되는 존 코너의 아버지는 어머니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미래에서 온 카일 리스(마이클 분)다. 그로 인해 사라는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처럼 매우 신비스러운 임신을 하게 된다. 스카이넷이 보낸 사이보그 T101은 사라 코너와 이름이 같은 동명의 사람들은 모두 죽이는 한편, 2편에서 T-1000은 어린 코너를 살해하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동방박사로부터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대왕은 그 때를 기준으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는(마2:16) 성경내용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꿈속에서 위험을 알려준 덕분으로 아기 예수와 모친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마2:13). <터미네이터1>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래의 인간 지도자를 잉태한 사라 코너는 살해위험을 피해 멕시코로 떠나간다. 사라 코너에게 인간이 멸절당할 운명으로부터 구원할 지도자가 자신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리는 카일 리스의 행동이나 사라 코너를 보호하기 위해 나타난 T-800과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의 그레이스는 마치 예수의 탄생을 알렸던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다.
여주인공의 이름이 사라인 것도 흥미롭다. 주인공 사라 코너의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열국의 어머니’란 뜻을 가진 사라(Sarah, 창17:16)와 같다. 그녀가 신비스럽게 잉태한 아들의 이름은 존(John)인데 이 이름 역시 엘리사벳과 제사장 사가랴 사이에서 천사의 예언 과정을 통해 태어난 세례 요한의 이름과 같다. <터미네이터:다크 페이트>에 등장해서 대니를 보호하는 슈퍼 솔저 ‘그레이스’는 서구의 기독교인에게는 흔한 이름이지만 ‘은혜’를 뜻하는 ‘Grace(그레이스)’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여기저기를 베껴서 조합하고 상업 영화의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서 허구적인 상상력을 덧입힌 통속적인 영화일 뿐이다. 노인이 된 사라 코너가 다시 한 번 총을 들고 싸우고 미래의 희망으로 또 다른 인물 대니가 등장하는 것은 아무리 우격다짐으로 집어넣는 다고 하지만 성경의 맥락과는 전혀 맞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는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이 현대 영화제작자들에게 문화콘텐츠의 원천으로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십계>와 <삼손과 데릴라>를 만들었던 세실 드밀 감독은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누구든 성경 20쪽 만 읽을 수 있다면 영화 한 편을 만들 수 있다”
성경은 세상과 인간의 처음과 끝에 대해서 말하는 유일한 책이다. 기독교인에게 성경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이지만,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는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꼭 들춰봐야 하는 참고서와 같다. <터미네이터>의 기본 골격은 세상의 종말과 구원의 메시아 존재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참고했을 뿐이다. 놀라운 컴퓨터 그래픽과 좋은 기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할리우드는 단지 돈을 벌고 감독의 영광을 위한 가장 세속화된 성지임을 증명하는 듯하여 안타까울 뿐이다.
-
2019-10-28
-
-
[영화] 비극이 사랑을 만나 희극이 된 영화
-
-
차승원표 희비극
차승원표 코미디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추석연휴가 끝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기억되는 한국영화로 꼽힐만한 가치가 있다. 도박과 범죄조직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급의 영화들이 추석 극장가를 압도하며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밀어내는 듯한 형국을 보였지만 관객들은 마음 한구석에 진한 감동의 메시지를 간직하며 두고두고 얘기할 거리가 풍성한 이 영화를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극적인 향신료가 들어간 이국적인 음식에 한번은 손이 갈 수 있지만 연거푸 찾기 쉽지 않은 이치와 같다. 대신 잘 익은 김치만 있다면 늘 먹는 반찬에 그 밥이라 할지라도 결코 질리지 않는 집밥의 맛에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비유할 수 있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애인을 둔 가족드라마의 장르를 반복하면서도 <럭키>(2016)를 만든 이계벽 감독의 스타일로 색다르게 변형시킨 착한 영화다. 지적 장애를 앓고 있는 아빠와 어른스러운 어린 딸의 동행은 <아이 엠 샘>(2001)에서 이미 그 감동의 깊이를 확인했고, 백혈병과 같은 불치병을 앓고 있지만 어른 뺨치는 똑똑함과 의젓함은 <열두 살 샘>(2012)이나 우리나라 영화 <두근두근 내 인생>(2014)의 아역주인공들을 보는 듯하다. 출생의 비밀을 안은 채 아빠와 대면하는 어린 소녀라든가 화재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소방관들의 희생적인 모습, 깡패 같지 않은 깡패들의 희화된 이미지 등 <힘을 내요, 미스터리>에는 어디선가 본 것 같고 익숙한 장면들이 퍼즐처럼 하나의 그림을 위해 맞춰져 있다.
익숙하지만 다른 영화의 매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한 장르 영화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것은 차승원이 있기 때문이며, 그가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일어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서 인명을 구하는 소방관 역할을 맡아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설정이 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 때문이다.
첫째, <힘을 내요, 미스터리>가 차승원표 영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라의 달밤>(2001)으로 출발하여 <광복절 특사>(2002)를 거쳐 <선생 김봉두>(2003)와 <이장과 군수>(2007)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뛰어난 외모와는 정반대로 망가지는 연기를 통해 웃음을 선사했던 차승원은 이 영화 안에서도 사회적 기대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키가 크고 잘생긴데다 근육질의 몸으로 칼국수집의 주방을 장악한 그의 첫 등장은 그를 보기 위해 줄을 선 여고생들의 행렬처럼 관객의 기대감을 한껏 부풀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여지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외모의 힘을 내팽개쳤고, 어눌한 목소리로 손님에게 “밀가루 몸에 안 좋아, 살쪄. 보리밥 먹어!”라고 말하는 순간 관객들은 주인공이 망가지는 차승원표 영화를 보러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의 지체장애인 연기는 그와 유사한 영화들이 이미 보여주듯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연계되어 세속에 찌든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물론이다. 어린 딸 샛별(엄채영)이의 과자를 빼앗아 먹으려는 치기어린 행동과 자신의 피를 모두 주고서라도 샛별이를 살리려는 마음이 한 인물로부터 나오는 점은 이 영화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처럼 희비극(tragicomedy)의 구조를 갖고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끌어들인 점은 코미디 장르의 특성을 넘어서서 감동의 드라마로 발전시키는 원동력 역할을 한다. 특히 지체장애를 갖고 있는 주인공 철수(차승원)의 행동을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들뿐만 아니라 그가 지체장애를 갖게 된 이유가 다름 아닌 참사 현장의 소방관으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희생적인 구조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시킨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개성은 살아있게 된다.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대구지하철 참사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비극적 참사를 날 것으로 내놓기 보다는 잘 보듬어서 더 이상 상처가 성나는 일이 없도록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48명의 부상자라는 비극의 역사를 분노나 허망한 마음이 아닌 사랑과 희생 그리고 은혜를 갚는 현실의 기억으로 소환시킨 것은 이 영화를 기독교적 가치로 해석되게 하는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사고의 트라우마로 인해 지하철 계단 조차 내려가지 못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딸을 위해서 과감하게 지하도로 뛰어들 수 있는 용기는 사랑의 힘이 치유를 위한 첫 걸음일 수 있음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 스틸컷
우리에게는 ‘착한 영화’가 필요하다
기독교영화의 세계에서 ‘착한 영화’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착한 영화’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를 따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마음을 가진 율법교사의 질문인 ‘내 이웃이 누구인가?’(눅10:29)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구해주는 사마리아 인의 행동은 위기에 처한 영화 속 두 주인공의 상황과 겹쳐진다. 백혈병에 걸려 골수이식이 아니면 살아날 가능성이 희박한 샛별이를 위해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철수를 비롯하여 대구일대를 주름잡는 조폭들까지 나서는 선한 행동은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를 보여준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의 경우 철수는 그 자신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돌봄이 필요한 강도만난 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했지만, 유독가스 흡입의 여파로 뇌기능을 일부 잃게 되어 이제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그의 처지는 바뀌었다. 그러나 과거의 선행은 현재의 보상이 되어 돌아온다. 그가 화재현장에서 구한 사람들은 이제 그를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째, ‘착한 영화’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를 기독교영화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 제작사나 마케팅을 담당하는 홍보사 그 어느 곳도 이 영화를 기독교영화로 홍보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 눈에는 그저 휴머니티가 물씬 풍기는 감동적인 드라마 정도로 여길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따른 분석이 가능한 것처럼 성경적 가치관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긍정적 변화의 결과를 갖게 된 다는 사실은 세속적인 영화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라는 성경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철수와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나마 시집간 딸이 지하철 화재로 죽은 까닭에 한과 울분을 안고 살아왔던 철수의 장모(김혜옥)는 사위와 화해하게 된다. 철수와 샛별 주위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폭력 여고생과 대구 조폭들은 샛별이를 위한 골수이식에 동참하기 위해 헌혈을 자처할 만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킨다. 샛별이와 함께 투병중인 어린이들은 다음 번 생일까지 살기를 소망하며 생일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죽음을 하찮게 다루는 일반 영화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우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성경적으로 합당한 내용들이다.
이 영화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인에게는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형성하게 하며, 비기독교인에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별종이 아니라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식시킴으로써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셋째, <힘을 내요, 미스터리>는 현대인들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기독교 영화제작가 필요로 하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착한 영화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모두 기독교 영화라는 타이틀이 걸릴 경우 관객은 그리스도인으로 한정되는 경향이 짙다. 제작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다큐멘터리의 경우 기독교인 관객이 많이 오지 않더라도 집행된 제작비를 건지거나 많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대중성을 갖춘 드라마 형식으로 기독교 영화를 제작할 경우 감독이나 제작자 모두 많은 부담을 않게 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제한되어 있는데다 그 관객마저도 극장에 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을 내요, 미스터리> 같은 착한 영화의 경우 성경적 가치관을 내포함으로써 기독교 문화 안에서 수용될 수 있음과 동시에 비기독교인들 까지도 관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까닭에 성경적 가치관의 전파가 용이하고 무엇보다 제작비를 회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힘을 내요, 미스터리>와 같은 착한 영화는 한마디로 교회와 세상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기독교 영화라 말할 수 없지만 기독교 영화가 세상에 뿌리내리고 친밀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복음이 자라는 토양을 구성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기독교와 교회 소리만 들려도 도망가는 세상 사람들을 향한 영화의 선교적 역할을 우리는 <힘을 내요, 미스터리> 같은 ‘착한 영화’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2019-09-23
-
-
[영화] 세종은 없고 불교만 남은 영화 ‘나랏말싸미’
-
-
역사왜곡의 정점을 찍다
지난해 개봉된 범죄드라마 <마약왕>(2018)에 대해서 한 영화평론가는 ‘캐비아로 알탕을 끓인 영화’라는 혹평을 내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송강호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의 이름에 걸 맞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론가와 일반관객들 모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 같은 신랄한 비평의 칼날은 조철현 감독의 신작 <나랏말싸미>로 옮겨가도 무방할 듯싶다. 이 영화 역시 우연찮게도 깐느 그랑프리 수상작인 <기생충>의 주연을 맡은 송강호를 내세웠고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이자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인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역사라는 귀하고 풍성한 재료를 가지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영화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캐비아로 알탕을 끓였다’는 말은 알탕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혀 다른 성격의 음식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캐비아(caviar)는 푸아그라와 트러플(송로버섯)과 더불어 3대 진미중 하나로 꼽힌다. 캐비아의 품질과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철갑상어로부터 얻은 원재료를 손질하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저장방법에 있다. 신선한 캐비아는 0~7℃ 정도에서 저장해야 하는데, 조금만 온도가 올라가도 품질이 급속히 떨어지게 된다. 캐비아를 알탕이 되도록 끓여먹는 일은 맛과 풍미를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시키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초등학생조차도 잘 아는 한글창제역사에 대한 왜곡의 정점은 한글을 만든 이가 세종대왕이 아닌 승려 신미(信眉·1403~1480)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세종 당시 산스크리트어나 티벳어 등 불교경전과 관련된 다양한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진 신미가 뜻글자 대신 말글자를 만들려는 세종의 의지를 실현시킨 인물로 영화는 그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같은 영화의 주장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학계에서는 이미 사라졌지만 불교대중들의 입소문으로 떠돌던 신미의 한글창제 개입설은 2013년 5월 조선 세종태학원 총재인 강상원 박사의 ‘신미 대사와 훈민정음 창제 학술 강연회’를 통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신미의 저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가 훈민정음 창제 시기(1443년)보다 8년 앞서서 한글과 한자로 출간된 사실이 있음을 주장하며 신미가 한글창제 실제적 주역이었을 밝힌바 있다. 또한 영화의 원작 시비를 일으킨 박해진의 『훈민정음의 길 - 혜각존자 신미 평전』이 2014년 출판되어 세종의 한글창제 역사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역사학계와 국문학계의 입장은 세종의 한글창제설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 ‘원각선종석보’는 명확한 증거를 통해 2016년에 위작임이(2016.05.03, 뉴시스) 밝혀졌다. 무엇보다도 훈민정음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는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처음으로 만드셨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1443년(계해·세종25) 12월 30일자에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고 기록함으로써 세종의 한글창제설에 의심을 가질만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을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세종의 한글창제설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당시 상황에서 승려가 한글을 만들었을 경우 혹시라도 한글 보급이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세종과 신미의 타협에 의해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거짓 발표되었다는 가설을 통해 개연성을 확보하려 함을 알 수 있다.
<나랏말싸미>의 역사왜곡은 의문점을 낳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일을 갖고 있는 글자인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한글의 역사를 굳이 훼손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호기심과 상상력의 결과인가, 아니면 노이즈 마켓팅을 통한 흥행에 욕심이 난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감독은 영화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믿고 있을 수도 있다.
신미와 감독의 하나 된 세계관
한글창제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놓고 볼 때 영화는 세종이 아닌 신미의 편에 서있다. 통치자로서 왕의 최종결정권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한글을 만든 결정적 역할은 승려신분인 신미가 주도하고 있다. 유교를 중심 이념으로 삼고 불교를 폄훼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왕의 신념에 승려 신미가 거부하지 않고 참여한 이유를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조선 땅에 불국토(佛國土), 즉 부처가 있는 나라를 이루려는 승려의 야망이 조선사회를 다시 고려시대처럼 불교의 나라로 돌이키고 싶은 것이다. 백성들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한글이 만들어질 경우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조선의 백성들은 부처의 말씀을 쉽게 들을 수 있고 조선은 다시 불교가 왕성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영화는 신미역을 맡은 박해일의 입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겉은 같으나 속은 전혀 다른 생각이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즉 한글창제라는 한민족 역사의 중심에 불교를 놓고 한글창제의 본래 뜻 속에는 불국토라는 불교의 이상이 있음을 만인에게 공표하고 싶은 감독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신미가 한글을 통해 불국토를 이루고 싶은 염원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루려는 의지는 영화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첫째는 한글창제 이야기의 갈등 구조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종과 유학자들이 아닌 유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관계로 몰아가고 있는 점이다. 유교는 가해자로서 신분의 억압을 통해 한자를 배우지 않으면 편지하나 쓸 수 없는 사회를 만들었지만 새로운 말글자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대신 불교는 피해자로서 개와 같은 취급을 받지만 한글을 만들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유교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무능력한 반면 불교는 민간에서 신앙되는 현실에 기반하며 아울러 창조력을 발휘한다.
둘째는 세종의 친불교적 행보를 영화는 매우 의미 있게 다루고 있다. 조정대신들은 궁궐에 승려들이 드나드는 것을 경계하지만 세종은 이를 무시해버린다. 세종이 유자(儒者)나 불자(佛者) 모두 조선의 백성임을 언표하는 대목은 과연 배불숭유(排佛崇儒)를 통치의 근간으로 삼는 당시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결정적인 것은 세종의 부인인 소현왕후의 49제를 승려들이 주관하는 가운데 궁궐에서 지내는 장면이다. 불상 앞에 놓인 왕후의 위패를 향해 세종은 엎드려 절한다. 해석의 여지를 남겨둘 수는 있지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처럼 세종이 ‘불교덕후’가 되는 순간이다.
셋째는 한글창제에 불교 사상이 관여된 사실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영화 초반부에서 말글자의 원리가 팔만대장경 안에 있음을 언급하는 한편 세종이 직접 썼다는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문의 글자 수를 일부러 108자로 맞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108은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가지수를 뜻한다.
결국 영화는 정사(正史)와는 다르게 세종과 한글창제의 역사의 숨은 사실로 신미와 불교가 깊이 내재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영화 제작의 목적은 신미가 한글창제에 개입한 목적과 같지 않을까? 영화를 통한 불국토의 달성. 감독은 신미가 한글창제의 중심에 있음을 믿고 있고 그 믿은 바를 영화를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한글에 관심이 있는 이유
유교와 불교가 한민족 역사에 끼친 영향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정 종교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자신의 종교가 민족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알았을 때 큰 자긍심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역사 스스로의 입을 통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조작된 역사를 통해 이득을 위하려는 행동은 그것이 상상력이 개입된 예술이라는 이름을 빌리더라도 비난과 조롱을 받기 쉽다.
<나랏말싸미>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스타일로 덧입혀진 불교영화다. 겉으로는 역사물의 장르를 취했지만 메시지는 결국 불교가 한글창제의 중심임을 선포하며 대중들에게 불교의 가치를 전파시키고 있다.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불교의 사상과 문화를 담은 영화를 제작한 일에 대해서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연루된 가장 기초적인 문화인 언어와 연관된 일이라면 다르다. 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종이 만들면 어떻고 신미가 만들면 어떠냐고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화기부터 지금까지 한글은 복음에 가장 적합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념 가운데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랑받아 왔기 때문이다.
1882년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 목사는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선생 등과 함께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요한 복음젼셔’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1887년에는 드디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서’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불교가 1965년이 돼서야 팔만대장경의 한글화 작업을 시작한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의 한글사랑은 뜻 깊다.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신분에 관계없이 문자를 애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한글의 정신은 곧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요3:16) 일면 닮은 점이 있다. 선교의 방법으로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교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일은 한글에 담긴 세종대왕의 뜻이 갖는 인간 사랑의 의미이며, 한국에서 기독교가 부흥발전하게 된 결정적 이유 또한 한글에 있다는 사실이다.
-
2019-07-30
-
-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대중에게 전하는 법
-
-
대중성을 갖춘 영화사회학의 출현
봉준호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봉준호 감독의 이 간단한 약력 안에는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키워드가 담겨 있다. 그것은 ‘사회’와 ‘영화’다. 대부분의 영화감독이 사회현실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나 ‘사회와 영화’라는 범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봉준호 감독만큼 세밀하게 사회를 관찰하면서 영화 안에서 압축적이고 은유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감독은 매우 드물다. 거기다 그의 영화들은 관객들이 보고 싶지 않은 사회현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찾는다는 점에서 대중성도 갖추고 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괴물>(2006)은 미국과의 미묘한 정치적 문제와 더불어 환경오염의 위험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었다. 미군이 한강에 버린 독극물에 의한 결과가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영화 첫 장면에 제시함으로써 환경오염의 해악성을 알리면서 동시에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의 존재를 있는 것인 양 정보를 왜곡하고 위험을 확대재생산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935만 명을 동원한 <설국열차>(2013)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변동을 설명하는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새로운 빙하기를 맞이한 인류의 미래가 오직 기차 안의 승객들에게 달려있다는 가정 하에 기차의 앞쪽칸과 제일 뒷 칸인 꼬리칸에 탄 승객들과의 대결을 영화는 흥미 있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계층이 고착화되어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앞쪽칸 쪽으로는 갈 수 없을 것 같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옥자>(2017)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슈퍼돼지를 생산하고 친환경기업인양 감추려는 다국적 거대 기업의 숨은 진실을 파헤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돈만을 추구하는 거대기업의 음모를 밝혀냄으로써 유전자조작식품의 위험성을 간과한 채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대중친화적인 영화로 인식되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은유적 묘사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감각적이고 사실적으로 와 닿게 만드는 감독의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일 봉감독이 다룬 주제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면 아무리 잘 만든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는 어디서든 터지는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봉감독의 유머는 극적 긴장을 해소하는 역할과 더불어 부정적 사회현실을 객관화시키는 작용도 한다. 유머를 통해 실현되는 풍자와 해학은 오히려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셋째는 가족이다. 가족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봉준호 감독이 제시한 부정적 사회현실에 맞서는 우군이다. 특히 아버지의 희생과 자녀의 생존을 통한 가족의 존속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대중성을 갖게 만든 숨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빈부격차의 한국사회를 그리다
<기생충>은 빈부격차가 큰 한국사회의 현실을 봉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은유적이고 압축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반지하에서 가족 전원이 백수로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화려한 주택에서 살고 있는 박사장(이선균)집의 고액과외 선생으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대학도 못간 기우가 학력위조를 통해 최상류층 집안의 선생이 되는데서 오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기택이네 가족이 생존을 위해 피자박스를 접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가족드라마와 다르지 않다. 박사장 집 지하에 숨어 지내며 살아가는 가정부 국문광(이정은)의 남편 근세(박명훈)의 발견과 기택네 집안과의 갈등은 다분히 서스펜스 스릴러를 방불케 하고, 결과적으로 박사장과 기택과의 충돌은 빈부격차에서 오는 사회현실을 묘사한 사회심리 혹은 사회비판 드라마로 읽힐 수 있다.
<기생충>은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최상의 이층 주택이라는 공간의 배열을 통해 한국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빈부격차에서 오는 갈등과 공존을 압축적이며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제목이 주는 혐오적인 어감과 달리 부잣집에서 붙어 사는 지하와 반지하 가족들의 비현실적인 실상은 자본주의 사회 현실에 대한 은유인 동시에 압축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박사장이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기택에게서 ‘지하철을 타다 보면 나는 냄새’가 난다며 기택의 가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대목은 향기가 아닌 ‘냄새’가 ‘주거 공간’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속한 신분과 계층을 대변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봉감독의 사회를 보는 눈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알 수 있다.
지난해 4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60만으로 1년 전보다 3.6% 증가했다. 그러나 근로활동을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의 소득이 증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상위 20%의 소득 5 분위 가구는 932만 4000원으로 10.4% 증가한 반면, 하위 20%의 소득 1 분위 가구는 123만 8000원으로 오히려 17.7% 줄어들었다. 이 수치는 통계가 잡힌 이래로 사상 최대폭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잘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잘살게 되지만 못 사는 사람은 점점 더 힘들어지는 현실을 통계는 숫자로 표시하고 <기생충>은 시각적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봉준호 장르의 한계
봉준호 장르의 영화들은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기 보다는 계속되는 위협과 위험의 현실을 인식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곤 한다. <살인의 추억>(2003)의 연쇄살인범은 잡히지 않았고 <괴물>은 한강 어디에선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험이 제거된 온전한 평안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즉 온전하고 이상적인 상태를 제시하기 보다는 끝에 희망의 단초를 제시하는 정도다. 영화감독에게 사회문제의 해결점까지 제시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찰리 채플린의 경우에도 영화 <모던 타임즈>(1936)를 통해서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봉준호 감독 또한 마찬가지다. <설국열차>에서 투쟁 끝에 전복된 기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어린이들이었다. <괴물>에서 송강호는 자신의 딸과 같이 있던 고아를 아들처럼 여기며 밥상을 마주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기생충>에서 아들은 부잣집을 매입하고 아버지를 지하로부터 구하는 상상으로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가 제시한 본질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막연하나마 희망적인 미래를 그리게 만든다.
예수님이 <기생충>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를 그린 영화를 만드는 연출가로 나선다면 어떠했을까? 찰리 채플린이나 봉준호 감독처럼 막연하게 희망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제시하셨을까? 우리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관원’과 ‘세리장 삭개오’라는 두 인물의 비교를 통해 기독교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에서 그려내지 못한 다른 길과 다른 차원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적인 변화가 가져오는 외적인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부자 관원은 누가복음 18장에 언급된 표면적인 사실로 보더라도 퍽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는 철저한 율법주의자처럼 계명을 모두 지켰고(21절) 거기다 부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도덕적인 사람이었고 외형적으로나마 훌륭한 신앙인이었으며 거기다 성경은 그가 ‘큰 부자’(23절)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은 있었다. 자신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전시키는(22절) 일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문제를 물으러 왔지만 재물의 문제에 막혀 심히 근심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페이지인 누가복음 19장에는 또 다른 부자 관리인 삭개오가 등장한다. 이번에도 성경은 그가 세리장이면서 아울러 부자라고(2절) 언급하고 있다. 그는 부자관원과 달리 말만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고(4절) 예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행동파였다. 그는 주변인들의 수근거림에도(7절) 개의치 않았으며 예수님이 얘기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뿐만 아니라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8절) 폭탄발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9절) 영적인 응답을 하셨다.
봉준호감독이 영화를 통해 제시한 갈등과 격렬한 싸움 그리고 죽음으로 귀결된 빈부격차의 문제는 근심하며 돌아 간 부자관원의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을 올릴 수밖에 없다. 봉감독은 돈의 문제가 성경이 지적한대로 영적인 문제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내적인 변화 없이는 해결될 수 없으며 어떠한 물리적인 싸움도 빈부격차를 일으키는 돈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없다. 정답은 하나님 나라에 있다(사11:6-9).
-
2019-06-26
-
-
[영화] 죽음으로 살아나는 신앙-영화 ‘교회 오빠’
-
-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켜보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화여대의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죽음의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하나는 ‘외면’이다. 죽음을 바로 응대하지 못한 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태도가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을 지적한다. 죽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은 자신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도 되는 듯 머릿속에서 죽음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죽음과 연관된 어떤 것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는 ‘부정’이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어디서나 쉽게 발견된다. 은행에서 대기표를 뽑을 때 44번이 나오면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에서 4자가 F로 둔갑하는 일은 낯설지 않다.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아라비아 숫자 4가 얼마나 홀대를 받아왔던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지만 혹시라도 집안에 부정 타는 일이 생길까봐 상가 집에 같다오면 집 앞에 소금을 뿌리는 일은 옛 사람들의 풍습이기 조차 했다.
셋째는 ‘혐오’다. 화장장이나 추모공원 등과 같은 죽음과 연관된 시설을 우리 사회에서는 혐오시설로 분류한다.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일은 애를 받는 산부인과의 존재처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결코 곁에 두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기고 이를 싫어한다. 객관적이거나 과학적 지식과 상관없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호경 감독의 영화 <교회 오빠> 는 최준식 교수가 얘기한 한국의 죽음의 태도를 모두 불식시킨다. 주인공은 죽음과 고통 앞에서 부정도 외면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기독교 신앙인이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분명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다름을 이 영화는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 2017년 12월 22일 ‘KBS 스페셜 앎’ 2부작으로 방영된 동명의 프로그램을 재촬영·편집하여 극장용 영화로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서른일곱 나이에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은 남편 이관희 집사와 림프종 4기 진단을 받은 아내 오은희 집사의 투병장면이 신앙 안에서 펼쳐지고 있다.
구약의 욥기의 진행 과정을 따라 영화는 욥과 주인공 이관희 집사의 신앙적 면모를 비교해 가면서 흥미로운 연출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욥과 같은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했을 때 신앙인이 보이는 반응과 또한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우리가 기대하는 반응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묘사하며 죽음 앞에 선 신앙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믿음의 선한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6:12)
<교회 오빠>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기암의 고난 가운데서도 승리하는 믿음의 싸움이며, 이를 통해 많은 관객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증인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오빠>를 봐야하는 이유
<교회 오빠>는 개봉 일주일을 맞았을 때 다음 사이트에서 일간 영화 검색어 순위 3위에 오르기도 했다. 1위 <알라딘>과 2위 <악인전>에 이은 순위다.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교회 오빠> 다음 순서로 밀려나 있다. 관객 수도 3만 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의 관객을 모은 외화 <어벤져스:엔드 게임>이 1천3백5십3만 명을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너무 왜소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개봉 첫날 <어벤져스:엔드 게임>은 전국 2760개의 스크린에서 1만2545회 상영되었다. 하루에 1만 2545회가 상영되었다는 말은 한 번 상영에 10사람만 봐도 10만 2천 명이 훌쩍 넘는다는 뜻이 된다. 첫날 상영점유율은 80.9%, 좌석점유율은 85%로 역대급이다. <교회 오빠>는 상영하는 극장 보다 상영되지 않은 극장이 훨씬 많다. 극장에 걸리더라도 하루에 고작 1회 내지 2회가 전부다. 상영시간도 아침 첫 회 아니면 늦은 시간을 배정 받아 단단히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교회 오빠>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극장에서 외면당하는 독립예술영화의 설움을 고스란히 받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지만 지금까지 기독교영화가 한국 영화계에서 받아왔던 기대와 실망을 교차시킨다면 꼭 서럽게 생각할 만한 일도 아니다.
개봉 5일 만에 달성한 3만 관객이란 숫자는 서울의 대형 교회 출석 교인 수보다도 적다. 기독교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실무자들은 항상 기대감을 갖고 출발한다. 한국의 기독교인의 10%만 볼 수 있다면 1백만 관객을 모을 수 있다고. 이런 얘기를 예전에 했다면 영화가 가진 작품성이나 예술성 혹은 오락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신앙영화는 재미가 없더라도 보러가란 말이냐는 타박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오빠> 만큼은 이에 대한 변명을 적극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로서 <교회 오빠>의 작품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말기암 환자의 투병생활과 부부애 그리고 신앙을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다루는 영화의 정서적 접근은 결코 신파적이 아니다. 눈물을 짜내기 위해 억지스런 연출 보다는 인생의 희노애락 가운데 다가오는 죽음을 신앙의 자연스러움 안에서 표현하고 있다. 만일 이호경 감독이 대중의 충격적인 시선을 한 몸에 받길 원했다면 암환자가 겪는 고통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고, 죽음으로 끝을 맺는 환자 보다는 신앙의 기적으로 회복되는 주인공을 택했을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근본적으로 소재주의를 택한다.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특이한 인물과 사건을 쫓아다니는 특성이 다큐멘터리에는 있다. 부부가 함께 암투병을 해야 하고 죽음 앞에서도 신앙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기독교 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회 오빠>는 분명 다큐멘터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는 ‘생각하는 영화’로서의 장점이 있는 반면 드라마는 생각하는 순간 망해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는 관객이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계속 자극적인 장면을 쏟아내야 한다. <교회 오빠>는 다큐멘터리로서 충분히 죽음에 맞서는 신앙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영화가 구약의 욥기를 따라 진행되며 중요한 욥기의 성경구절이 화면에 자막으로 나타날 때 마다 관객들은 그동안 신앙생활 가운데 배운 욥과 성경의 지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영화를 위한 변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난 후 관객들은 마치 한편의 잘 만든 드라마를 본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흔히 다큐멘터리에서 나타나는 카메라 앞에 서는 주인공들은 일반인으로서의 어색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상황에 잘 녹아들고 있다. 이것은 ‘편집의 예술’이 <교회 오빠>에는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인공은 연기를 하고 있지 않으며(만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연기를 하려든다면 그것은 다큐멘터리의 본래적 성격을 잃어버리는 일이 되고 만다) 죽음의 상황은 연출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 일어난 현실일 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이관희 집사는 이제 다른 영화에 다른 배역을 맡아 출연할 수 있는 드라마의 배우와는 다르다. 그는 오직 한 편의 영화에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영화계를 은퇴한 셈이 되고 말았다.
감동이란 말은 영화의 오락성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대중의 가치를 말한다. 대중영화가 오락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감동은 즐거움을 포함하여 다양한 감정을 분출시키는 가운데 일상의 기대감을 넘어서는 경험을 넘어설 때 쓰는 말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자신의 생일에 느닷없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주는 동료들에게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대통령이 비를 맞으며 전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활주로에서 기다리는 장면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평범한 집사의 마지막 시간은 감동적이다.
기독교영화가 재미없고 작품성이 떨어져서 보지 않는다는 얘기는 이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는 제대로 된 기독교영화가 없다는 애기는 이제 할 필요가 없다. 부산국제영화제나 칸영화제만큼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도 올해로 16회를 맞은 기독교영화제인 ‘국제 사랑 영화제’도 여전히 활동 중에 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영화가 문화계를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르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맛집에 찾아가기 위해 돈과 시간을 써 본 적이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영화관을 수소문 해볼 일이다. 훌륭한 설교 말씀을 찾아 유튜브를 뒤적여 본일 있다면 <교회 오빠>를 찾아 볼 일이다. 신앙의 감동은 25년 평론을 해온 기독교영화의 전문가가 보장해드릴 수 있다.
-
2019-05-27
-
-
[영화] 예술이 신앙의 가치를 위협할 때
-
-
난해하거나 인간적이거나
1970, 80년대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 <택시 드라이버>(1976)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각본을 써서 우리에게도 친숙한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감독이 개성 넘치는 자신만의 영화를 들고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2천 년대에 들어와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자신의 개성을 살린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는 못했었다. 공포영화에서 범죄와 스릴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도 못했고, 한 두 작품을 제외하고는 평론가들로부터 별다른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의 특기는 종교적 감각을 활용한 부조리한 인간의 세계를 심미적인 감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논란을 일으켰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시나리오를 집필하면서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꿈꾸는 듯한 환상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기 원하는 욕망과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운명가운데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가톨릭을 포함하여 세계 교회들이 이 영화를 성토했고 상영반대 시위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의 최신작 <퍼스트 리폼드>(First Reformed)는 예수가 아닌 목사라는 성직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부조리한 인간의 욕망을 들추면서 어쩌면 그가 제일 잘 만들 수 있는 내용을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만든 자기 고유의 영화라 할 수 있다.
교회비판의 외형 속에 담긴 내면의 부조리
군목 출신으로 자신의 아들을 이라크 전쟁에서 잃어버린 에른스트 톨러 목사(에단 호크)는 250년 역사를 지닌 시골의 작은 교회 ‘퍼스트 리폼드 처치’의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화란의 개혁교단 출신의 이민자들이 세운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지만 지금은 가끔씩 관광객들이 들려가고 주일이면 열 명도 채 안 되는 교인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박물관식 교회가 되고 말았다. 대신 이 교회를 발판으로 인근 도시에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건축되어 ‘퍼스트 리폼드 처치’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외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조용한 시골교회의 목사 톨러는 여성신도인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자신의 남편을 상담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그의 삶은 조용히 그러나 심각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메리의 남편 마이클은 극렬한 환경주의자로 상담을 진행하던 중에 숲 속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톨러 목사는 메리를 위로하며 그녀에게 남다른 느낌을 받고 아울러 신비적인 경험조차 하게 된다.
툴러 목사는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큰 기부를 한 에너지개발 업체 대표인 교회 성도로부터 환경주의자의 장례식에 성가대원 일부가 참석하고 노래한 것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모종의 결심을 하게 된다. 톨러 목사는 리폼드 처치의 설립 250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마이클의 유품으로 나온 자살폭탄용 조끼를 입고 퍼스트 리폼드 처치에 들어가려던 중 메리가 있음을 알고 당황해 한다. 그러나 그는 토끼 울타리 용으로 사용했던 철조망을 몸에 감은 채 세제를 먹고 고통을 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길이 고난을 지고 가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실행에 옮기려던 중 그를 찾아 온 메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단지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에게 이러한 줄거리 요약은 별 의미가 없다. <퍼스트 리폼드>는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관객을 설득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감독의 독특한 이미지 구성 방법에 의존하여 뭔가 부조리한 현실세계와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인간의 심리를 영상이미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즉 보면 알 수 있지만 말로 설명해서 이해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한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 단어는 ‘부조리’에 있다.
부조리를 읽다
영화 <퍼스트 리폼드>를 교회나 기독교신앙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관객이 본다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목사의 테러미수 정도로 읽혀질 수 있다.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채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성직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는 자연파괴를 통해 돈을 번다고 믿는 에너지 기업이 후원하는 대형교회의 행사에 불만을 품고는 교회 행사에서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래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곰곰이 따져보는 관객이라면 두 가지의 비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첫째는 환경파괴에 무관심한 현대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며, 다른 하나는 기업화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영화를 통해 충분히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아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전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즉 자살한 교회의 성도가 옛날 작은 교회에 출석한 환경운동가인 반면에 대형 교회를 건축하는데 기여한 성도는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에너지 기업의 대표란 점 말고는 구체적인 상황은 나타나 있지 않다. 에너지 기업의 대표가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으며 그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교회 또한 환경훼손에 무관심하거나 반성경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 않다. 어쩌면 (이것은 필자가 현대교회에 너무 익숙한 탓일 수도 있으지 모르지만)영화는 단지 외형적 규모가 클 뿐이지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한 부자교인들도 다니는 보통의 평범한 교회의 모습만을 비출 뿐이다.
오히려 작은 리폼드 처치로부터 성장한 대형교회의 흑인 목사는 백인 툴러 목사를 청빙한 장본인이이며 동시에 그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가 행사를 마친 후에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을 제안하는 사려 깊은 목회자로 등장한다.
우리는 이 영화가 철저히 툴러 목사 개인의 삶과 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영화 제목은 ‘퍼스트 리폼드’이지만 내용은 어디까지나 교회가 아닌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툴러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일기는 쓰지만 은혜를 구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말 적막하고 어쩌면 수도원적 생활이 어울릴 것 같은 시골의 목사관에서 매일 일기를 쓰는 툴러 목사의 삶은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최적의 환경일 수 있다. 시끌벅적 시장 같이 시끄럽지 않으며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주변 환경에 대한 불만이나 부족함이 있다면 얼마든지 개선하기 위한 시도도 가능하다. 비록 큰 교회의 지원을 받지만 그는 250년 된 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주님으로부터의 목회적 소명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아울러 그는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아내와는 이혼한 상태에서 알코올 중독증세도 보이는 등 성직자로서 불안한 문제를 갖고 있다. 기도로 못한 이야기를 일기에 적는 다고 하지만 그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자신의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외부의 문제에 대한 공격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순교로 착각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자신이 비판한 부조리한 세상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툴러 목사를 이해하는 방법은 폴 슈레이더 감독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를 떠올리는 일이다.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으며 문명화된 도시사회의 인간소외를 잘 그렸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핵심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영웅화된 이미지로 그려나갈 때 생기는 또 다른 부조리한 모습에 있다.
트레비스는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밤에만 운전하는 뉴욕의 택시 운전사다. 부패한 도시 뉴욕을 청산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어린 여성을 성매매하는 포주들을 권총으로 쏴 죽인다.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심판자 역할을 자처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부조리를 발생시킬 뿐이다.
툴러 목사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인정하지 못한’(딤후3:5) 인물을 대표한다. 겉으로는 환경을 생각하고 자본주의에 물든 기업형 교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경건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는 데는 실패했다. 성직자로서 극렬한 환경주의자인 마이클에게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가 계획했던 자살폭탄조끼를 입고 마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툴러 목사는 자신과 주변의 교회, 그리고 성도들을 폭탄으로 제거되어야 할 부조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멸망하고 말 것인가? 부조리한 세상을 구원할 존재를 영화는 놀랍게도 마이클의 미망인 메리로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리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와 같은 이름이며, 툴러 목사가 급히 자살폭탄 조끼를 벗어던졌던 이유도 메리가 교회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다. 메리와 그녀의 복중에 있는 아이는 툴러 목사로부터 보호받음으로써 결과론적으로 퍼스트 리폼드 교회에 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다. 감독의 가톨릭 신앙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이 같은 해석은 부조리한 세상의 왜곡된 구원의 모습이다.
툴러 목사는 멸망과 구원에 대한 인식을 환경주의자가 아닌 성경으로부터 얻어야 했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메리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경험이었다.
-
2019-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