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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얼굴(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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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연상호
출연 : 박정민(임동환), 권해효(임영규), 신현빈(정영희), 한지현(김수진)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착각 혹은 착시가 있다. 바로 예수님의 얼굴이다. 성화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얼굴은 다 가짜다.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르네상스 시대에 자신들의 이상향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나시고 자라셨다. 게다가 그 분은 목수의 일을 하셨다. 그러니 얼굴은 검게 그을렸을 테고 손은 고된 노동으로 거칠었을 것이다. 오죽 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논쟁하던 중 "네가 오십이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냐?"고 했겠는가?
이사야서는 이렇게 예언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
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볼 품이 없으셨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 않으셨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외면 당하셨다. 사람들이 그 분을 외면한 이유는 자신들보다 더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의 신들은 아름답고 우람하다. 로마의 황제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황제를 숭배하고 따랐던 이유는 자신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 분은 욕망하고 따를 외모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올바른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드러내셨다. 위선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이 교묘하게 감추고 있던 마음 속 깊은 욕망을 폭로하셨다. 사람들은 부끄러워 하고 회개하는 대신 폭로자를 제거하려 했다. 진실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 게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 분이 가르친 내용은 본능과 상반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외면 당하셨다.
연상호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얼굴 뒤에 감추고 산다. 사람들은 잘 생긴 얼굴을 추앙하고 권력이 있는 자들을 욕망한다. 자신들이 되고 싶은 바를 그들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 얼굴 너머에 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겉모습이다. 자신들의 욕망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영규의 독백이 흐른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데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아름다운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어." 시각장애인인 영규는 평생 도장을 새겼다. 도장 전각의 장인이 되었다. 그가 입버릇 처럼 말하듯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작품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손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다.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영규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지만 그 조차 자신의 욕망에는 인정 받고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오래전에 실종된 아내 영희는 얼굴이 없다. 40년 만에 아파트 공사장에서 유골로 나타난 영희는 얼굴이 없다. 장례식을 치르지만 영정 사진이 없다. 그녀는 얼굴이 없다. 영희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증언한다. "너무 못 생겼었어." "추했지. 정말 그렇게 생긴 사람이 있었을까?"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희는 못난 존재다. 자신들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다. 적어도 영희보다는 나은 존재라는 자기 만족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영규가 영희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규를 무시했지만 영희는 그를 인정해 주었다. 영규는 영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위에 있다. 영희 앞에서는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영규가 생각할 때에 영희는 자신보다 더 못난 존재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여자였다.
문제가 생겼다. 영희는 진실을 말하는 여자라는 점이다. 자신이 본 것을 감출 수 없는 사람 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랑 한 방에서 바람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어린 영희가 볼 때 분명히 잘못된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했지만 그녀에게 돌아 온 것은 침묵 강요와 아버지의 매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을 나갔다.
집을 나간 후 피복 공장에 작업보조로 취직했다. 공장 사람들은 모두 영희를 우습게 여기고 놀려댔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다 사장이 재단사 여성을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영희는 이 사실을 항의하러 사장 방에 들린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침묵 강요와 해고 협박이었다. 영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사장의 불륜을 폭로한다. 그 대가는? 오히려 성폭행 당한 당사자인 재단사가 영희의 뺨을 때리며 분노를 퍼붓는다. "네가 뭔데? 네 까짓게 뭔데?"
그렇게 영희는 사람들에게서, 공장에서 추방당한다. 추방 당할 뿐 아니라 멸시 받고 제거당 한다. 피해자들이 기분 나빴던 이유는 영희가 진실을 말할 때 자신들보다 영희가 더 돋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 말 하지 못하는데 나보다 못난 영희는 용기있게 진실을 말한다.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나보다 못나야 하는데,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진실을 말한다. 그래서 더 미움받았다. 유일하게 자신이 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남편 영규에게도 그녀는 버림 받는다. 시각 장애인 영규는 분노하며 말한다. "내가 모를 줄 알아? 너가 못 났다는 것을 모를 줄 알아? 알지만 결혼한거야. 그러니 조용히 지내라고. 응?" 영규가 폭발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영희는 나보다 더 못난 존재여야 하고 아무 말 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여야 한다. 그런데 그녀가 진실 앞에서 용기를 가진다. 영규의 분노가 치미는 지점이다. 영화는 욕망의 민낯을 폭로한다. 소위 잘 난 사람들, 돈 있는 사람들, 권력있는 사람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아니 그들을 욕망하는 못 난 사람들의 위선도 말이다. 오로지 영희만이 진실을 드러내고 세상을 바로 보는 존재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예수님이 오버랩되었다. 예수님이 버림 받은 이유는 그들의 욕망에 어긋났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과 기대를 이루고자 했다. 그 욕망과 기대가 허물어지자 모두 버려두고 도망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들에 유로지비를 등장시킨다. 못난 사람, 천대받는 사람,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하게 한 소냐처럼. 백치의 미쉬킨 처럼.
이제 우리의 민낯을 마주할 때다. 번지르한 얼굴 뒤의 진실을 마주할 차례다. 우리의 욕망을 투사한 예수가 아니라 실제의 예수를 마주할 때다. 나의 얼굴은 누구인가? 누구를 드러 내는가? 욕망을 내려놓고 진짜 예수님의 얼굴을 본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 분처럼 진실을 폭로함으로 버림 받을 용기가 있는가? 그 분 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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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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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좀비딸(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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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필감성
출연 : 조정석(이정환), 최유리(이수아), 이정은(김밤순), 조여정(신연화), 윤경호(조동배)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세상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정환은 어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아침밥을 차리고 자고 있는 딸 수아를 깨운다. 수아에게 아침밥을 먹이고 출근을 하려는데 거실 창에 옆집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괴상한 몸짓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고, 급기야 유리창을 깨고 집에 들어오려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텔레비전을 트니 속보가 뜬다. ‘서울에 좀비 바이러스가 출몰해서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상황을 파악한 정환은 딸 수아와 같이 도시를 벗어나기 위한 탈출작전을 감행한다. 그런데 쉽지 않다. 이미 정환의 아파트는 좀비들로 가득하고 그들은 정상인을 물어뜯기 위해 접근해 온다. 방법은 한 가지 뿐, 정환은 수아를 기둥 뒤에 숨어 있게 하고 요리조리 피해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수아에게 가까스로 접근한 정환은 얼른 타라고 하고는 구사일생으로 아파트 촌을 벗어난다. 이제 안심이다. 한 숨 돌리는 순간 옆 좌석에 타고 있는 딸 수아의 표정이 이상하다. 얼굴에 핏줄이 서 있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른다. 큰 일이다. 수아도 좀비에게 물린 것이다.
정환은 우선 갓길에 차를 정차하고 안전벨트로 수아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머리에는 옷을 휘감아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딸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환은 혼동에 사로잡힌다. 딸을 살려두자니 자신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딸을 버리고 죽일수도 없다. 우선 정환은 어머니가 사는 한적한 시골 마을로 좀비딸이 되어버린 수아와 대피를 한다.
어머니 집에 숨어 지내던 정환은 두 가지 소식을 듣게 된다. 우선 국가 계엄령이 내려서 좀비가 된 자들을 모두 사살하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이다. 또한 좀비를 숨겨주거나 신고하지 않는 자들도 처벌을 받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한적한 시골이지만 결국은 들키고 말텐데 정환의 걱정이 커진다. 반면 반가운 소식도 듣는다. 어릴 적 동네 친구인 동배는 약사인데 미국에서 좀비 바이러스를 물리칠 백신을 개발중인데, 자신은 그 제약회사의 주식을 산다고 한다. 정환에게 희소식이다. 어쨌든 백신 개발 때까지만 수아를 감추고 있으면 된다. 좀비가 되어버린 딸 수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존재가 또 있다. 바로 정환의 어머니이자 수아의 할머니 밤순이다. 할머니는 손녀가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도 개의치 않는다. 여전히 할머니에게는 귀여운 내 새끼다. 이어지는 장면들은 정환과 밤순이 수아를 길들여 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그린다. 동물원에서 사자를 사육하는 일을 했던 정환이기에 좀비가 되어있는 수아를 맹수 조련하듯이 길들여 간다. 그런데 이게 제법 성공적으로 먹힌다. 그러던 중
정환은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좀비가 되어가는 사람이 기억력을 가지게 되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정환은 수아의 기억력을 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한다. 우선 수아가 좋아했던 추러스를 사 온다. 하지만 실패. 그런데 할머니가 막창구이를 해 주니 수아가 걸신처럼 먹어댄다. 어릴 적 할머니가 해 준 그 맛을 본능적으로 기억해 낸 것이다.
정환은 수아가 좀비가 되기 전 보아의 노래를 좋아하고 보아의 춤을 따라했던 것이 생각 났다. 그래서일까. 정환은 수아를 의자에 묶어 놓고 그 앞에서 보아의 춤을 시현한다. 보아의 노래를 틀어 놓고 보아의 춤을 춰서 수아의 기억력이 되살아 나게 하려는 시도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나. 보아의 음악에 수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씩 반응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생각지 못한 복병이 등장한다. 정환의 첫사랑 연화다. 연화는 선생님이 되었는데 고향 학교로 전근을 왔다. 마침 정환이 딸과 함께 고향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찾아온다. 정환은 수아를 적극적으로 감추려 하지만, 결국 연화에게 좀비가 된 수아의 존재를 들키게 된다. 연화는 당장 수아를 내쫓으로 한다. 만약 신고하지 않으면 자신이 신고할 것이라 협박한다. 연화가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남편이 좀비로 변했고, 좀비가 된 남편은 자신을 물어 뜯으려 했다. 그 순간 연화는 좀비가 되어 버린 남편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좀비는 인간이 아니기에 없애버려야 한다고 자신을 정당화했다. 그래서 정환의 딸 수아도 사람이 아니라 좀비에 불과하다며 내 쫓던지 없애든지 하라고 몰아붙인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신학적 사유를 하게 되었다. 우선 좀비 바이러스의 출현과 그에 감염된 상황인데,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오버랩되었다. 그렇다. 태초에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벽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아담은 하와를 향해 “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 이라 고백한다. 하지만 죄라는 바이러스가 하와에게 들어왔고, 이내 아담도 동참하게 된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금단의 열매를 먹고 죄가 하와와 아담에게 들어왔다. 그 순간 죄 바이러스는 아담과 하와를 변질시켰고, 그들은 서로를 수치심으로 보게 된다.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하와는 아들들을 낳았다. 하지만 첫째 아들 가인은 둘째이자 동생인 아벨을 질투해서 죽인다. 죄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얼마 후 라멕이라는 자는 오히려 죄를 칭송한다. “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 라멕은 죄에 대해 뻔뻔스럽게 행동하며 자신의 살인을 자랑한다. 그리고 노아의 시대가 되자 죄 바이러스는 온 세상을 휩쓸었다.
하나님은 죄를 다루시기로 하셨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끔 시도하신다. 노아의 홍수 이후 언약의 징표로 무지개를 주시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을 기억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 했다. 하지만 죄 바이러스는 더욱 퍼져나갔고 급기야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의 자리에 도전하려 했다. 이후의 역사는 두 가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선 영화에서 아버지 정환이 좀비딸 수아를 포기하지 않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자신의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반역해도, 그 형상을 스스로 버리고 잊어버려도 그 분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끈질긴 사랑과 인내로 자녀들을 회복시키신다. 집 떠난 탕자가 거지 차람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나가 끌어안고 입맞춤을 한다.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들이 죄 바이러스에 걸려 변해
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회복시키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죄 바이러스에 걸려 갈팡질팡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은혜라는 백신이다. 마침내 독생자가 오셨고, 그분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영원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대속적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단번에 드려진 희생제물이셨다. 이후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것을 ‘주입된 은총’이라 명했다. 우리 외부에서 은혜가 우리 안에 주입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은혜가 우리 안에 작동하여 죄와 맞서 싸운다. 결국은 은혜가 승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회복된다. 죄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를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은혜라는 백신이다. 은혜의 백신이 주입되면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은혜의 사람으로 차츰 변해간다. 이것이 성화다.
영화 좀비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잘 보여준다. 좀비 바이러스에 걸렸지만 딸 됨을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리고 언젠가 백신을 통해 회복되기를 소망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우리도 그렇다.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죄인의 행태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소망이 있다. 이미 은혜의 백신이 우리 안에 주입되었고, 우리 안에서 선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뚝 설 것이다.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자.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하자. 쉽게 포기하지 말고 용납하는 법을 배우자.
러시아의 대문화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면 좋겠다.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장차 예수님의 은혜로 변화될 모습으로 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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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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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오징어게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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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황동혁
출연 : 성기훈(이정재), 프론트맨 황인호(이병헌), 이명기(임시완), 강노을(박규영), 김준희(조
유리), 황준호(위하준), 장금자(강애심),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은 영화를 따라간다. 인기 있는 영화일수록 그 반향은 크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현실을 잘 반영한다. 달리 말하면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감독이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 놓은 어떤 장면, 스토리, 가치관은 즉시 모방 효과를 낳는다는 데 있다. 한 때 조폭 시리즈 영화들이 인기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즈음을 지나면서 청소년들의 입이 거칠어 졌다. 욕설이 난무했다. 우스개소리로 욕을 빼면 말이 안되는 지경이 되었다. 일본 학원 폭력물이 무분별하게 들어오던 시점에 학원 폭력도 더해졌다. 이른바 왕따 현상, 학원 폭력이 훨씬 증가했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여 그 반향이 크면현실은 그 영화를 따라간다.
전 세계를 뒤흔든 오징어 게임이 드디어 대결말을 장식했다. 시즌 1에서 엄청난 글로벌 흥행을 이룬 뒤 시리즈 2와 3을 제작하여 개봉했다. 오징어 게임은 일종의 신드롬을 낳았다. 전 세계 시청률 1위를 찍은 것 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놀이를 따라하고 관련 상품도 메가 히트를 쳤다. 그야말로 신드롬이었다.
오징어 게임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이런 저런 이유로 빚을 진 사람들,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상금에 눈이 멀어 게임장에 들어왔다. 456명의 참가자들, 게임을 해서 최종 승자가 되면 456억의 상금을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첫 게임을 하고 난 뒤 참가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게임에 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설마 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
왔다. 게임에 탈락하면 죽는다. 공포와 전율이 이들을 사로잡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했다. 프론트 맨은 한 가지 탈출구를 제시한다. 참가자들이 투표를 통해 게임의 진행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명이라도 더 게임 정지를 결정하면 현재의 상금을 나눠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충격이다. 게임을 계속 하자는 편이 더 많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심리가 담겨 있다. 우선 내가 어떤 게임이든지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이 깔려 있고, 또 하나 다른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잔혹한 부조리극이다.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후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거대한 부조리다. 이기적 욕망이 싸움을 낳고 전쟁을 낳고 제국을 낳았다. 제국은 이런 인간 심리를 선동한 독재자가 독차지하는 구조다. 대부분은 희생의 제물이 되고 비참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나도 언젠가 제국의 최상위 포식자가 될 것이라는 착각과 내 자녀가 사다리의 맨 윗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해 왔다. 이런 자기 기만과 거대한 착각 속에서 죽고 죽이는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이어져 왔다. 결국 극소수외에 다 죽고 마는 게임인데도 깨닫지를 못한다.
오징어 게임은 작금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신자유주의라는 물결 속에서 일어난 금융자본주의의 욕망을 펼쳐 보인다. 누구든지 게임에서 최후 승자가 되면 슈퍼 리치가 될 수 있다는 신화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 신화의 주인공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대학의 롤모델이 되고 사회의 영웅이 된다. 잘 생각해 보면 전 세계에서 겨우 몇 명 뿐인데, 나도 그 사람이 될 것이라 착각을 한다. 토마 피케티의 잘 정리된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부의 50%이상을 전 세계 인구의 단 1%가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다. 99%의 사람은 이 거대한 게임의 법칙에서 탈락하고 1%의 부자들을 위해 부를 제공하고 있지만 이욕망의 매카니즘은 끝이 나지 않는다. 나도 1%의 마법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더 크기 때문이다.
다행히 감독은 예언자적 인물을 다시 게임판에 넣었다. 성기훈이다. 그는 지난 게임의 최후 승자가 되어 막대한 부를 획득했지만, 그 돈이 누군가의 피의 대가라는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친구가 죽었고, 이런 저런 사연의 사람들이 죽은 대가를 도무지 누릴 수 없었다. 그는 이 게임을 중지시키려 한다. 다시 게임판에 들어간 성기훈은 지속적으로 말한다. “이러다 다 죽습니다” “이제 게임을 멈추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돈을 차지할 것이라 하지만 자신이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기훈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 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 비록 자신이 죽을지라도 이 게임을 멈추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족하다고 여긴다.
성기훈은 예언자의 목소리다. 일찍이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예언자적 상상력의 사람이다. 브루그만은 앗수르, 바벨론, 이집트 제국의 각축장 한 가운데서 외쳤던 예언자 이사야를 소개한다. “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며, 독사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세상 ” 은 예언자가 소망하는 곳이다. 제국에 던지는 폭탄 선언이자 대안 세상에 대한 청사진이다. 맞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생각에서 시작된다. 오징에 게임에서 프론트맨 황인호가 당황해 하는 지점은 성기훈의 선지자적 면이다. 그곳에서 거대한 게임판의 균열이 일어난다.
아울러 성기훈의 진정성에 감동한 소수의 무리들이 대안이다. 비록 자신은 인생에 실패했지만 태어날 아기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소망하며 희생을 각오하는 김준희, 자식 교육에 실패해서 끔찍한 게임판에 들어왔으나 각성한 장금자, 게임진행요원으로 들어왔으나 거대한 구조에 맞서는 강노을 등이다. 성기훈의 예언자적 목소리에 반응한 사람들이다. 역사
는 이런 소수의 각성자들에 의해 진보해왔다. 흑인노예의 인권을 대변했던 윌리엄 윌버포스와 그의 생각에 동의하고 도왔던 ‘클래펌’ 공동체, 존 울먼 목사의 사상에 동의하고 해방 노예들을 북쪽으로 데려다 준 ‘지하철도’ 조직원들, 이런 사람들의 헌신으로 역사는 발전해 왔다.
이제 우리들이 움직일 때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에 일희일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감독이 던진 구조적 문제에 응답할 때다. 칸트가 일찍이 말한 바 “머리 위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우리의 마음에 살아있는 도덕 법칙” 에 응답할 때다. 나 혼자의 욕망에 끌려 사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헌신이다. ‘다 죽을 것이냐? 다 살아남을 것이냐?’ 그것은 나의 각성과 의지에 있다. 오징어 게임을 우리 아이들에게 다시 돌려주자. 해 지면 훌훌 털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동심의 세계를 물려주자.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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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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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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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크리스토퍼 매쿼리
출연 : 톰 크루즈(에단 헌트), 헤일리 앳웰(그레이스), 이사이 모랄레스(가브리엘), 사이먼 페그
(벤지 던), 폼 클레멘티프(패리스)
얼마 전 지인과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일식 전문점이었는데 주방장이 흑백요리사에 출연했던 분이라 한다. 이 집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챗 gpt’가 알려줬다고 한다. 이번 여행의 비행기표, 숙소, 맛집 등을 챗 gpt에게 물어서 예약을 했다고 한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여호수아서를 강의하고 싶은데 요약해서 ppt로 만들어 줘.”라고 명령했더니 순식간에 강
의안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다.
최근 목회자 모임에서 특별 강의를 의뢰했다. 연세대 신대원 교수님이 강의한 제목은 ‘인공지능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을까?’였다. 교수님은 최근 서구 학자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멀잖은 시간 안에 인공지능 자체가 종교를 창시할 수도 있고 종교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 전망하셨다. 영화가 현실이 될까?
톰 크루즈가 제작하고 주인공을 맡은 시리즈 미션 임파서블은 이런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시리즈 첫 편이 1996년에 방영되었고 이번은 8번째로써 약 30년을 이어온 영화다. 7번째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에서 영화는 인공지능 엔티티(Entity)의 존재를 알렸다. 미국 주도로 만든 인공지능 엔티티는 스스로 진화하여 세상의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류를 전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엔티티가 세운 계획은 주요 핵 보유국의 전산망을 해킹하여 거짓으로 핵 미사일을 발사하도록 인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상대 국가가 핵 미사일발사로 인지하여 역시 핵 미사일을 발사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류는 파멸이다.
물론 IMF(Impossible Mission Force)의 최정예 요원인 에단 헌트는 이 계획을 무산시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인다. 전편 데드 레커닝에서 에단 헌트가 배운 것 하나가 있다면, 엔티티를 이기기 위해서는 엔티티처럼 사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인공지능이 유도하는대로 움직였다가는 실패하고 만다. 엔티티는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가브리엘이라는 요원을 쇠
뇌하여 에단 헌트를 제거하려 한다. 가브리엘은 스스로 엔티티의 사도로 부르며 자신이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고 여긴다.
가브리엘을 추격하기 위해 베니스로 잠입했던 에단 헌트는 오히려 사랑하는 여인 일사의 죽음을 목격한다. 에단 헌트가 거짓 정보에 빠져 헤매는 틈을 통해 가브리엘이 일사를 제거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계속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에단 헌트는 잠적한다.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급박하게 진행되는 엔티티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미 정보국
은 에단 헌트를 다시 소환한다. 그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수여한다. 엔티티를 제지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 침몰한 러시아 핵 잠수함 세바스토폴 호의 심장부에 있는 소스 코드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단 헌트는 그레이스, 벤지, 패리스 등과 함께 다시 한 번 불가능한 임무에 헌신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에단 헌트는 자신의 과거와 조우한다. 일례로 세바스토폴 호의 침몰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베링해역의 한 전파 기지에 갔을 때 그 기지를 30년 동안 지키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30여년 전 에단 헌트가 CIA 기지에서 정보를 빼 올 때 중앙통제실을 지키던 윌리엄 던로였다. 그는 그 날 에단 헌트가 빼 간 정보를 지키지 못한 이유로 오
지로 좌천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미안해 하는 요원들에게 윌리암은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저는 이 곳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말 중요한 임무를 도울 수 있게 되었잖아요.”
순간 에단 헌트는 깨닫는다. 자신의 선택과 임무, 또는 자신 때문에 불가피하게 희생되어야했던 사람들조차 거대한 미션에 공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의 선택이 누군가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나의 모든 책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나 환경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훗날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깨달았던 것과 유사하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시몬이라는 구두수선공을 통해 사람은 내일 일에 대한 운명을 미리 아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룬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내가 선을 택하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고 상처가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역시 그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위해서 빌라도라는 총독이 필요했던 것처럼.
어쨌든 영화의 제목처럼 에단 헌트와 그를 돕는 벤지, 그레이스, 패리스 등은 불가능한 미션으로 보이는 일을 차근차금 수행해 간다. 우선 베링해 심해에 침몰한 세바스토폴호의 중앙제어장치에서 소스 코드를 얻어낸 뒤, 루터가 만든 특수 장치에 엔티티를 불러들이는 일이 남았다. 콩코의 정보 저장 장치에 이른 요원들은 가짜 코드를 엔티티에게 흘려 엔티티가 특수 잘
장치로 들어오게 유도한 뒤 제거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의 기회, 찰나와 같은 순간에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하지만 엔티티도 만만치 않다. 엔티티를 콘트롤 할 수 있다고 믿은 가브리엘은 잠복하고 있다가 루터가 만든 소스 입력 장치를 빼앗아 미리 준비해 놓은 경비행기로 달아난다. 에단 헌트는 가브리엘의 비행기를 쫓아가고, 벤지와 그레이스는 루터의 저장 장치를 준
비한다. 한편 엔티티는 거짓 정보를 각국의 전산망에 심어서 핵 미사일 발사 장치를 준비하게 한다. 미국 대통령 참모실에서도 이 정보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한 채 핵 미사일 발사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과연 에단 헌트가 엔티티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에 엔티티가 핵 미사일을 발사하게 할 것인가?
이제 영화의 주요 주제를 생각해 보자. 우선 영화는 오늘날 현실이 된 인공지능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인간은 편리를 위해 인공지능을 개발했다. 챗 GPT 뿐 아니라 각종 생성형 인공지능을 앞 다투어 개발하여 상용화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 새로운 시장에 전력을 다해 경쟁중이다. 이런 시류에 맞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을 실생활에 사용
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이미 인류를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주는 정보와 자료에 의존하고 있으니. 하지만 인공지능이 주는 자료는 기존의 자료를 정리, 요약해서 제공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가끔 거짓 정보나 틀린 정보를 내 놓기도 한다. 이 점을 잘 인지해야 한다. 영화는 인류가 인공지능 같은 시스템에 지나치게 의존
하는 것을 경고한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영화에서 결국 인류를 구하는 것은 에단 헌트다. 주지하듯 에단 헌트 역을 맡은 톰 크루즈는 사이언톨로지 신자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과학종교라 할 수 있다. 우주는 메스트(Mest)로부터 왔고 그것으로부터 물질, 에너지, 공간, 시간이 만들어 졌으며, 인간은 우주영혼 테탄의 도움을 받아 온전한 영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과학종교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에단 헌트가 말하는 대사 중 “신의 뜻에 반하여, 우리는 스스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영화는 철저히 인간 스스로가 인류의 구원자임을 말한다. 엔티티는 전능자로 묘사되며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인류를 장악하고 있다. 에단 헌트는 이에 맞서 싸운다.
우리는 이런 주제를 잘 파악하면서 우리의 구원관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에서 엔티티라 불리는 전능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자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은 영화가 묘사하듯 인류의 파멸을 원하시지 않고 대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신다. 죄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한 결과이며 하나님은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류를 회복시키신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일찍이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주입’(injection)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입되면 우리는 살아난다. 마치 병균에 전염되어 죽어가는 사람이 백신 접종을 통해 회복되듯이 인간은 죄의 전염에서 은혜의 전염으로 다시 소생한다. 인류 역시 마찬가지다.
에단 헌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희생으로 은혜가 주어졌고 인류에게 인젝션되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살리며 사회를 회복하며 세상을 구원한다. 죄의 오염을 해결할 불가능한 미션은 은혜의 전파다. 은혜를 전파하는 요원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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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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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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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17
감독 : 봉준호
출연 : 로버트 패틴슨(미키 반스), 나오미 애키(나샤), 스티븐 연(베르토), 마크 러팔로(케네스 마샬)
Q : 영화를 소개해 주시는 영소목 김양현 목사님 나오셨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A : 네 안녕하세요. 영소목 김양현입니다. 오랜만에 영화관이 활력을 얻고 있습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 때문인데요. 요즈음 가장 뜨거운 영화인 미키 17을 소개하려 합니다.
Q : 미키 17, 저도 꼭 보고 싶은 영화인데요. 사람들의 관심도 많고 또 각자 이야기 거리도 많은 영화더라구요. 사람들마다 할 말이 많던데요.
A : 아무래도 봉준호 감독이 만들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라는 작품으로 2019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으니까요. 한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당연히 이 작품에 세계적 관심이 모여진 것이죠.
Q :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만든 미키 17 , 어떤 영화인가요?
A : 미키 17은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구요. 가까운 미래에 지구가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우주선 프로젝트를 시행해요. 이 프로젝트를 맡은 사령관은 마샬이라는 사람이구요. 마크 러팔로가 연기했는데 이 배우는 우리에게 마블의 헐크를 연기한 배우로 잘 알려져 있죠. 암튼 이 우주선에 의도치 않게 우리의 주인공 미키가 승선하게 되는 것이죠.
Q : 미키가 우주선에 승선한다. 그럼 미키는 우주 조종사인가요?
A : 그건 아니구요. 사실 미키는 친구인 베르토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차렸는데 이 가게가 망하게 되었어요. 문제는 사채를 빌렸다는 점인데 악독 사채업자가 두 사람을 잡아서 협박을 한 거죠. 빚을 제 때 갚지 않으면 지구촌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응징하겠다고. 그래서 두 사람은 지구를 떠나 우주로 도망치려고 이 프로젝트에 지원을 하게 되는데, 미키는 별 재주가 없어서 익스펜더블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어요. 담당자가 세부사항을 잘 읽어보고 지원한 것이냐고 묻자 미키는 상관없다고 해요. 그래서 미키는 바로 승선이 확정되는데 잠시 후 담당자가 미키를 부르더니 이 프로젝트를 설명해 주는데 충격적이었던 거죠.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Q : 충격적인 프로젝트라?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미키가 놀랐을까요?
A : 일종의 복제 프로그램에 지원을 한 것이었어요. 미키의 뇌를 스캔해서 기계에 옮기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복제를 한 것이죠. 그리고 미키는 언제든지 복제를 할 수 있는 것이었구요. 이렇게 한 이유는 이들이 목표로 한 행성에 도착했을 때 그 행성 대기에 바이러스가 있을 수도 있고, 또 위험 물질이 있을 수 있고, 예상치 못한 생물체가 존재할 수도 있잖아요. 미키는 그런 미지의 임무를 수행할 존재였던 거죠. 실제로 미키, 사실은 복제된 미키죠. 미키가 우주선이 운항 중일 때 선체 밖에서 작업을 하는데 이유는 우주 방사선에 얼마나 빨리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함이었어요. 그렇게 미키가 죽으면 기계는 새로운 미키를 복제해 내는 것이죠. 그렇게 미키 1, 미키 2, 미키 3이 등장하는 거에요.
Q : 아 그러면 제목이 미키 17이니까, 이 주인공은 17번째로 복제된 미키인 셈이네요.
A : 맞습니다. 미키 17, 즉 17번째 복제된 미키는 새로운 행성에 내려서 탐사를 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탐사 도중 얼음이 깨져서 밑으로 추락하는데, 거기에 이 행성에 이미 살고 있는 생명체가 있었던 것이죠. 거대한 몸뚱아리를 가진 존재였는데 맘모스와 비슷하게 생긴 것이었어요. 당연히 미키는 잡아 먹힐 줄 알았지만 그 생명체들이 오히려 미키를 구해주게 된 것이죠. 우주선 안에서는 당연히 미키 17이 죽은 줄 알고 미키 18을 복제한 상태이구요. 하지만 미키 17은 구사일생으로 우주선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 것이구요.
Q : 아니 그럼 미키 17과 18 , 두 미키가 공존하게 된 것이잖아요.
A : 맞습니다. 영화의 본격적 스토리는 이 특이한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미키 17과 18, 같은 존재인데 또 다르고, 분명히 복제를 했는데 성향은 전혀 다르고, 또 문제는 미키 17이 나샤라는 요원과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미키 18도 사랑하게 되고, 나샤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래서 혼란과 에피소드가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Q : 할 이야기가 많겠네요. 영화에 대해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겠고, 핵심적인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A : 사실 인간 복제에 대한 기본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거든요. 인간 복제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만약 인간이 복제가 된다면 소위 정신 혹은 영혼도 복제가 되는가? 이런 것은 계속되는 윤리적, 종교적 문제이구요. 일단 봉준호 감독은 몸은 복제될 지라도 영혼이나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다고 영화에서 제기한 것이구요.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를 보면 동일한 세포에서 성장했지만 생각이나 태도가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리고 인간복제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니까 영화에서도 지구가 아닌 우주 공간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행했고요. 기독 적으로 할 이야기가 많은 내용이기도 해요.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과연 인간이 스스로를 복제하는 방식으로 창조할 수 있는가? 인간이 인간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가? 영혼은 복제가 되는가? 이런 논의가 뜨거운 주제이기도 하구요.
Q : 윤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논쟁거리가 많은 영화겠네요. 또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사령관 마샬에 대해서 말들을 많이 하더군요. 특정 정치인을 패러디 한 것 아니냐구요?
A : 이 문제에 대해서는 봉준호 감독이 밝혔는데요. 영화가 2022년에 완성되었고 최근에 개봉한 것이니까, 특정 정치인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라고 했어요. 하지만 공교롭게도 최근 정치적 상황이 이 주인공과 오버랩 된 것이라구요. 미국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을 패러디 했다고 하고, 한국 사람들은 한국 대통령이라고 하고,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 대통령이라 하고, 한 마디로 전 세계적 정치 상황이 안 좋은 것이라 해야 겠죠.
Q : 이 영화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즉 경제적 시각으로 이야기도 많이 하는 것 같던데요?
A : 미키는 어떻게 보면 극한 직업의 노동자라 할 수 있죠. 자영업을 하다 빚더미에 앉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원을 했는데 실험용 소모품 정도로 취급 당하죠. 미키는 고유한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렸으니까요. 미키 1, 2, 3 이런 식으로요.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졌구요.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네 삶을 풍자한 것이라 보여요.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조직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대량해고 등으로 사라지기도 하구요. 인간 존재가 부정당하는 현실인 것이죠. 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사실 미키는 이름이 불려줘요. 미키 반스라는 이름요. 이름이 불려진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 받는 것이죠. 유명한 시인의 경구처럼 ‘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던 것이죠.
Q : 이름을 불러주는 공동체, 중요할 것 같아요.
A :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점입니다. 저는 교회에서 이름을 자주 불렀으면 좋겠다고 늘 말해요. 무슨 무슨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렇게 직분으로 부르는 일이 다반사인데, 직분 대신 이름으로 부르면 좋겠어요. 직분으로 우리가 부르면 교회가 무슨 조직 같이 느껴져요. 하지만 서로 이름을 불러 주면 형제, 자매 같은 공동체가 되거든요. 교회는 그런 곳이니까요.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예수 가족 같은 공동체, 그런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Q : 좋은 제안입니다. 오늘은 최근 화제작 미키 17을 소개했습니다. 영화가 주는 묵직한 메시지들도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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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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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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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리언 로물루스
감독 : 페데 알바레스
출연 : 케일리 스패니(레인 캐러딘), 데이비드 존슨(앤디), 아일린 우, 아치 리노(타일러 해리슨), 스파이크 펀(비요른)
가까운 미래 지구는 황폐되어 더 이상 주거가 불가능하다. 인류는 잭슨이라는 행성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잭슨 행성 역시 무분별한 개발로 환경이 좋지 못하다. 또다시 인류는 이바가라는 지구와 흡사한 행성을 찾아냈고, 소위 부유층은 이바가로 이주했다. 이바가 행성은 잭슨에서 약 65광년 거리다. 즉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도 65년이 걸리는 먼 거리다. 잭슨에서 이바가로 이동하려면 특수 수면장치에 들어가 동면을 해야 한다. 그동안 우주선은 자동항법으로 이동한다.
반면 잭슨은 광산 개발을 위한 광부들과 식량 생산을 위한 노동자들만 남아 있다. 주인공 레인은 잭슨 행성에서 회사가 요구하는 노동조건을 완료했기에 이바가로의 이주를 신청하러 이민국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녀는 특별한 이유없이 거절당한다. 왜 안되냐고 항의하자 잭슨에서의 노동기간을 일방적으로 늘려버렸다. 이제 레인은 죽을 때까지 잭슨에 머물러 살아야 한다. 그녀는 동생 앤디와 함께 숙소로 향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그녀를 아지트로 부른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이바가 이주계획을 설명한다. 물론 불법 이주계획이다. 자신들이 최근 잭슨 행성 대기권 밖에 떠도는 폐 화물선을 찾았는데 아마 거기에 동면장치와 연료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그것만 확보하면 갈 수 있다고 레인에게 동참을 제안한다. 그런데 왜 레인에게 제안을 하는가? 실상은 레인의 동생인 앤디 때문이다. 앤디는 소위 인조인간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로봇이다. 화물선 진입을 위해서는 앤디와 같은 로봇의 프로그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소형 우주선을 타고 몰래 잭슨 행성을 벗어나 우여곡절 끝에 화물선에 도착한다. 화물선과 도킹한 후 앤디가 앞서 화물선의 해치를 열고 일행은 화물선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목적은 동면장치와 연료 확보다. 별 이상 없이 동면장치도 찾고 연료도 찾았다. 이것을 자신들의 우주선으로 옮기면 이바가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연료를 꺼내려 할 때 이상한 인기척을 느낀다.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 이 알 수 없는 정체는 외계 생명체 즉 에이리언이다.
일행이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찾은 버려진 우주선이 화물선이 아니라 특수 목적을 띈 것이었고, 그 목적은 얼마 전 에이리언과의 대 전투 후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체를 수거하여 실험을 하는 것이었다. 실험의 내용은 에이리언의 혈액을 추출하여 인간에게 주입하여 인간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주여행에 적합하지 않은 신체를 가졌으나 에이리언은 우주 여행에 적합한 신체를 가졌기에 인간신체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으로 강화하는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에이리언이 깨어났고 오히려 실험실 내 인간을 다 몰살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알을 키우고 있었다. 다행히 선체에는 앤디와 같은 인조인간 과학 로봇 룩이 있었다. 그는 홀로 에이리언과 맞서 싸우다 최후의 수단으로 선체의 온도를 급격히 내려서 에이리언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냉각시켰다. 그런데 레인의 친구들이 우주선에서 동면장치와 연료를 빼내는 과정에서 우주선을 가동시켰고 온도가 상승하자 에이리언들이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레인과 동료들은 에이리언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활약을 하는 존재는 앤디다. 앤디는 레인과 친구들과 달리 프로그램된 로봇이라 우주선과 접촉하여 선체 구조를 파악하고 게다가 에이리언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까지 습득한다. 앤디가 설계될 때 그의 일차 목적은 레인을 지키는 것이었다. 레인의 아버지가 앤디를 그렇게 프로그래밍했다. 따라서 이 위기에서 앤디는 오로지 자신이 누나라 부르는 레인을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일행이 에이리언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선체에 남아 있던 과학로봇 룩의 칩을 앤디에게 꽂아서 재 프로그래밍해야 한다. 고민하던 레인은 친구들의 설득에 허락을 했고, 앤디의 머리에서 기존의 칩을 제거하고 우주선내에 존재하던 룩의 칩을 주입한다. 다시 깨어난 앤디는 더 이상 앤디가 아니라 이젠 웨이랜드 유타니 회사의 충실한 과학 로봇 룩이다. 룩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우주선과 실험체를 지키는 것에 최적화 프로그램되어 있다. 몸은 앤디이지만 정신은 룩이다. 룩은 레인과 친구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목적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실험체를 지키는 것이다.
돌변한 앤디로 인해 레인은 당황한다. 더 이상 앤디는 자신을 보호해주는 동생같은 로봇이 아니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과학로봇 룩이다. 앤디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그의 머리에 인식되어 있는 칩을 제거하는 것 뿐이다. 영화의 종반부는 레인과 앤디의 갈등, 친구들과 에이리언과의 사투가 중점적으로 펼쳐진다.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친구들이 하나씩 에이리언의 공격으로 죽어 나가고 레인이 홀로 남았을 때, 에이리언들이 레인을 공격하러 올 때 앤디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자신이 보고 있는 레인을 지켜야 할 것인지, 레인을 내버려 두고 회사를 위해 에이리언들을 살려두어야 할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이 지점에서 앤디는 온전한 로봇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 관객들은 지켜보게 된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앤디는 그의 뇌 속에 인식되어 있는 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감독은 앤디가 단순히 칩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처럼 감정과 기억이 그의 뇌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린다. 자신에게 인식된 프로그램과 잔존해 있던 기억과의 갈등에서 혼란을 느끼던 앤디는 마지막에 레인을 지키는 것으로 결정하게 된다.
인간은 뇌의 지배를 온전히 받는 것인지, 아니면 온 몸 전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 잘 모르겠다. 만약 인간의 몸에 영화처럼 어떤 프로그램화 된 칩을 인식한다면 그는 로봇처럼 행동할 것인지, 그가 살아온 삶의 기억과 습득된 감정 등의 영향을 받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영화는 그런 의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최근 로봇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요리를 하는 로봇, 청소를 하는 로봇, 심지어 농구나 축구를 하는 로봇도 개발되어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되면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가 될까? 그는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프로그램이 되었겠지만 과연 그럴까? 아님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에서처럼 인간을 넘어서는 어떤 존재가 될까?
신학적으로도 상당한 질문이 요구된다. 이런 로봇 인간도 인간일까?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존재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의 바벨탑일까? 만약 영화에 등장하는 앤디와 같이 인간과 같은 음식을 먹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기능하는 인조인간이 등장한다면 그는 영혼이 존재할까? 그도 구원의 대상일까? 복제인간이 가능하다면 어떨까? 영혼도 복제가 되는 것인가? 생각이나 가치관도 복제가 되는 것인가?
영화에서 앤디는 극적인 순간에 룩이 아니라 앤디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레인을 지킨다. 신화학자 기어츠의 말을 인용하면,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자 현실을 이끌어가는 매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영화와 같은 현실이 펼쳐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치열하게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대비해야 마땅하다. 과학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신학은 과학에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통해 다양한 질문과 토론의 장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p.s. 그런데 대부분의 영화에서 외계인은 왜 꼭 무시무시한 적으로 묘사될까? 왜 인류를 공격하는 존재일까? 외계인은 왜 잘 생기지 않고 이상한 괴물처럼 묘사될까? 칼 세이건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국은 오래전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빼앗은 전력이 있다. 외래인이었던 우리가 본토인을 몰아내고 이 땅을 차지했다. 그 과정에 무시무시한 무력을 사용했다. 따라서 미국인의 잠재의식 속에는 외래인은 무시무시한 존재이자 침략자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일종의 트라우마다. 따라서 대부분의 외계인 영화에서 침략자요 괴물로 묘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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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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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래디에이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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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에이터 Ⅱ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폴 메스컬(루시우스), 덴젤 워싱턴(마크리누스), 페드로 파스칼(마커스 아카시우스), 코니 닐슨(루실라)
리들리 스콧 감독이 24년만에 귀환했다. 글래디에이터 2편으로 복귀했다.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고, 리들이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전 세계의 영화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적 스케일, 스토리, 연기, 연출 무엇하나 나무랄 것 없이 평단과 팬들의 마음을 설레기에 충분했다. 글래디에이트- 로마 제국 시절 원형경기장에서 싸웠던 검투사들이다.
서기 180년경 로마 제국의 동북부 변방, 최고의 지혜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아우렐리우스가 숲 속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명장 막시무스는 게르만 족과의 혈투를 앞두고 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막시무스는 부하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와 명분을 제시하며 사기를 돋운다. 위대한 로마제국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전쟁 후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자고 독려하고 본인이 앞장 서 돌격한다.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막시무스 장군이 이끄는 군단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다.
황제는 로마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황제의 일인 권력이 가져오는 폐단을 꿰뚫어 보고 로마를 공화정 체제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막시무스가 적임자라는 판단을 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비밀리에 막시무스와 독대하고 자신의 뜻을 피력한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이제는 로마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가족과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간청한다.
한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망이 지나치게 크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당연히 황제 자리를 이어 받으리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난 뒤 비열한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가 공화정 체제로 전환하기 전에 그는 아버지를 몰래 암살하고 권력을 차지한 후 원로원을 해산하려 한다. 물론 눈엣가시인 막시무스를 몰래 처단하라고 명령한다.
영문도 모른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막시무스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고 본능적으로 가족의 위협을 느껴서 집으로 향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아내와 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코모두스의 지시인 것을 직감하지만 막시무스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가족의 무덤에서 오열하다 쓰러져 있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예의 몸이 되어 있었다. 길을 지나던 무역상이 그를 노예로 삼았고 결국 검투사들을 거느린 주인에게 팔렸다.
신분을 속인 채 막시무스는 살기 위해 싸움을 했다. 전쟁터가 아닌 작은 경기장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그의 실력과 남다른 품격에 검투사 주인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막시무스는 원형경기장에서 자신의 원수인 코모두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코모두스는 독이 발린 칼 끝으로 막시무스를 찔렀고, 막시무스는 마지막 일격을 코모두스에게 가한다. 결국 두 사람은 경기장 내에 쓰러진다.
세월이 흘러 북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에서 로마의 거대한 군함들이 견고한 성을 향해 돌격한다. 로마 군단을 이끄는 장군은 아카시우스, 나미비아 군을 이끌고 저항하는 사람은 루시우스, 결국 로마의 화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루시우스는 로마에 전쟁포로로 잡혀간다. 예상했듯이 그는 검투사가 되었고 치열하게 싸우다 검투사계의 대부인 마크리누스의 눈에 뛴다. 마크리누스는 루시우스를 앞세워 돈과 권력을 쥐려 했고, 루시우스는 마크리누스를 통해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카시우스 장군과 로마의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는 로마는 혼란과 격동의 세월이었다. 코모두스이 죽음 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있었고, 내전을 평정한 세베리우스 황제, 그리고 세베리우스 황제의 죽음 후 쌍둥이 아들인 게타와 카라칼라가 통치하지만 두 황제는 탐욕과 육욕에 쌓여 있다. 자극적 검투 대회를 앞세워 향략에 빠져 있다. 이런 로마제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제국을 바로 세우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모든 군대의 존경을 받는 아카시우스다.
글래디에이터 2는 로마의 혼란기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걸었던 세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아카시우스 장군이다. 그는 전 황제의 딸이자 공주였던 루실라와 결혼을 해서 로마 제국을 위해 싸운다. 뛰어난 장군이자 원칙주의자이지만 권력에서 멀어진 상태다. 로마는 권력욕이 강한 쌍둥이 황제와 야비한 원로원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실라와 함께 아카시우스는 파멸로 치닫는 로마 제국을 바로 세우고자 힘쓰는 인물이다. 그는 대의와 명분을 따라 움직인다.
또 한 명의 인물은 마크리누스, 한때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더불어 스페인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지나친 정복욕과 야망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 또한 도덕군자 같은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우렐리우스가 꿈꾼 공화정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갔다. 검투사들을 이끌고 돈과 권력을 사들였다. 원로원들의 정치인들도 매수했다. 곳곳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놓고는 게타와 카리쿨라를 제거하고 자신의 로마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한다.
마지막 루시우스, 실은 공주 루실라와 막시무스 사이에 태어난 신분이었으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에 어머니가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루시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변방에서 자랐고, 로마의 적대국에서 뛰어난 장군으로 성장했다. 운명에 따라 노예 검투사가 되었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로마제국의 황제 후보로 급부상한다. 당연히 마크리누스의 견제대상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장애와 위협을 물리치고 마침내 원형경기장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룬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아니 루시우스의 길을 통해 한 가지 생각해 볼 중요한 주제가 있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루시우스의 길이다. 그는 처음에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카시우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견디며 한 발씩 다가갔다. 하지만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 그는 갈등한다. 단순히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카시우스 역시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랐던 장군이었을 뿐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가 택한 복수는 로마의 황제라는 자리 자체였다. 로마 제국 자체가 그의 복수 대상이었다. 전쟁을 감행해야 하고, 사람을 죽여야 하고, 또한 검투사처럼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 자체에 대한 복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관중들을 향해 소리친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던 것인가? 언제까지 이런 죽고 죽이는 짓을 일삼을 것인가?”
루시우스의 외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과 닮았다. 예수님 역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셨다. 무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으로 저항하셨다. 십자가라는 로마를 상징하는 끔찍한 무대에서 예수께서는 소리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폭력 자체에 대하여 소리치셨고, 죽음 자체에 소리치셨다. 예수께서는 죽음 그 자체, 폭력 그 자체에 대하여 복수하셨다. 르네 지라르의 말을 빌리면 “폭력을 폭로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으셨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당대의 검투시합을 보면서 외친다. 우리의 싸움은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살리는 싸움이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성령의 검을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비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의 심령을 꿰뚫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싸움이다. 자기 희생으로 이 땅에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싸움이다. 곧 비진리를 끝내는 싸움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이고 사람을 살리는 싸움이다. 그것이 진정한 복수요, 우리가 싸워서 승리해야 할 목표다. 이런 싸움에 헌신한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들, 글래디에이터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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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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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폴리 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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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폴리 아 되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조커), 레이디 가가(할리 퀸)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미지와 환상]에서 현대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 사건 pseudo-event 에 휘말려 산다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휴대전화를 통해 각종 미디어를 끊임없이 시청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고, 스포츠를 보고, 개인 컨텐츠들을 본다. 현대인들의 이런 시청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회사나 개인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한다. 미디어 속의 주인공들은 유명인이 되며 셀럽이 된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영웅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가짜 사건일 뿐이다. 이미지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이 가짜를 진짜처럼 여기며 열광한다. 가짜들 이야기를 진짜처럼 여긴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떤 중년 여성 둘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내용으로는 누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실제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 상의 스토리였다.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지 실제 사건인 줄 착각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실제 사건이 아닌 미디어 속의 가짜 사건을 진짜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미디어에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을 소모한다.
토드 필립스가 만든 조커 폴리 아 되는 현대인들의 이런 경향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감독은 전작이자 1편인 조커에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본명은 아서 플렉이지만 그는 조커로 불린다. 조커의 분장을 하고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대신 야유와 조롱을 보낸다. 무대에서 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아서 플렉 역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무능력하며 무기력하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서 플렉이 일약 영웅으로 도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레이 플랭클린 쇼에 나간 아서 플렉은 생방송 중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진행자 머레이 플랭클린을 권총으로 저격한다.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나 당황한 일에 아무도 대처하지 못할 때 아서는 당당하게 방송국을 빠져 나간다. 방송국을 빠져나온 아서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통쾌하다는 몸짓으로 춤을 춘다. 경찰은 그를 좇지만 이내 놓쳐버린다. 아서는 곧 지하철로 들어갔고, 지하철에는 조커 가면을 쓴 군중들이 가득하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발돋움하는 사건이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머레이의 심장을 쏘았다. 살인 사건에 왜 사람들이 반응했는가? 실상 머레이는 성공한 부르조아의 대표다. 소위 잘난체하는 부류다. 아서와 같은 자들을 놀려 먹으며 인기를 누렸던 자다. 사람들은 그런 머레이를 정죄한 아서, 아니 조커에게 열광을 한 것이다. 그 순간 조커는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도덕과 윤리를 뛰어 넘어 사회악을 처단한 영웅이다. 적어도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수많은 자들에게 조커는 영웅이다. 이제 사람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 열광하고 조커라는 가짜 인물에게 환호를 보낸다.
실제로 이런 조커 열풍은 현실세계에도 등장한다. 오늘날 정치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윤리와 도덕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조커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들의 정의를 충족해주는 새로운 영웅을 기대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욕을 대신 해 주고, 내가 휘두르지 못하는 권력을 휘둘러주고,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영웅에 환호한다. 정치는 희화화되고 실제는 가짜가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런 현상을 욕망의 모방이라 불렀다. 욕망은 퍼져 나간다. 급속도로 번져간다. 들풀처럼 욕망은 타들어간다. 너도 나도 욕망의 화신이 되면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비정상적으로 돌변한다.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이 되어 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히틀러 열풍이 그러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임했고, 당시 독일인들은 민족우월주의라는 욕망에 휘말려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남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었다.
그래서일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2편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옥에 갇힌 조커의 등장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제인 ‘폴리 아 되’는 프랑스어로 ‘공유정신병 증세’라는 뜻이다. 아서의 정신병적 자아인 조커가 공유된다는 뜻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변호인은 그가 아서 플렉일 때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조커일 때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분열된 자아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할리 퀸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조커에게 접근한다. 감옥 내 찬양대에 지원하여 조커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다. 외로웠던 아서 플렉,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서 플렉은 이내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아서는 할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할리 퀸을 사랑한 아서 플렉의 마음이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커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할리 퀸에게 한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 사랑 때문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그는 대중들의 영웅인 조커에서 한 여인의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순화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에 있다. 할리 퀸이 사랑한 남자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이다. 할리는 아서 플렉이라는 소시민 코미디언은 관심이 없다. 조커라는 영웅이 필요할 뿐이다. 그가 마약 조커가 아니라면 할리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할리 퀸이 사랑하는 대상은 철저히 조커라는 만들어진 영웅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군중들의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억눌린 자들의 대변인이자 출구가 되어 줄 조커다. 조커를 통해 자신도 할리 퀸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현대인들의 이런 욕망을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놓았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영웅을 사랑하고, 스크린 속의 이미지화 된 영웅들을 추앙한다. 그들은 나의 욕망을 대신 해결해 주는 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가상의 캐릭터를 사랑한다. 가짜 사건에 일희일비하면서.
영화 조커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2천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도 영웅이 필요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영웅, 다윗의 무너진 왕좌를 재건할 영웅, 포로된 삶을 끝내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해 줄 영웅이 필요했다. 이런 욕망들이 메시야 신드롬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줄 대상이 필요했고, 그러한 메시야 상을 만들어 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자일 뿐 아니라, 모세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듯이, 지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을 제공하는 자라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 바로 그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욕망을 멀리하셨다. 오히려 물러가셔서 따로 기도하셨다. 그들에게 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강조하셨다. 그러자 그 많던 군중들이 다 물러갔다. 소수의 제자들만 남았다. 영화식으로 표현하자면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 되었을 때 군중들은 떠나가고 그는 버림받았다. 예수께서도 욕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버림 받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영화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조커인가? 아서 플렉인가? 가짜 인물인가? 진짜 삶인가? 욕망의 투사인가? 십자가인가? 쓸쓸히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처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 용기가 있는가? 나의 욕구를 채워줄 종교가 아니라, 나의 헌신을 바칠 진정한 신앙을 원하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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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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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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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2024)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야쿠쇼 코지(히라야마), 에모토 토키오(타카시), 아리사 나카노(니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렌스 수사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전해준다. 로렌스 수사는 중세 수도원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수도원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에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수사도 있고, 신학 연구만 하는 수사도 있고 로렌스처럼 소위 잡일을 하는 수사도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종일 기도를 하거나 신학을 연구하는 수사는 영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지만, 하루종일 식사 준비하는 사람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로렌스 수사는 이런 경향을 뒤집었다. 그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 일, 감자를 깎는 일, 청소를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즘 말로 하면 일상이 영성이다.
사실 일상의 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 사람들은 종교개혁가들이다. 루터, 칼뱅 등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못지 않게 농사 짓고 물건을 만들고 가정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고 그 일들도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우리 주님도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30년을 목수로 사셨지 않은가?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본격적으로 전파하신 일에 집중하신 것은 3년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무를 자르고 돌을 나르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을 더욱 많이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보다 말 그대로 일상에 더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일상이 영성이다.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내는 것이 소명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들고 야큐쇼 코지가 주연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감독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물, 소시민 히라야마를 내세워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최근 본 영화 중에 이 작품을 최고로 꼽을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은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도쿄 번화가의 뒷골목 사글세 집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고, 세수와 면도를 하고,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선다. 집 마당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 들고, 도쿄 타워를 지나 출근한다. 출근길에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그는 도쿄 시내의 공중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다. 자신이 맡은 화장실 몇 곳을 청소하고 나면, 가까운 산사에 들러 우유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은 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이 루틴을 매일 반복한다. 정말 별 일 없는 하루하루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다르다. 감독의 세심한 연출을 잘 따라가 보자. 히라마야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표정이 다르다. 집을 나설 때 올려다 보는 하늘빛이 매일 다르다. 청소차를 타고 도쿄 타워를 지날 때 날씨가 매일 다르다. 날씨에 따라 그가 선택하는 음악도 매일 다르다. 음악이 매일 다르니 당연히 그의 감정도 다르다. 화장실 청소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의 상태도 매일 다르고, 그가 청소할 때 드나드는 사람들도 다르다. 산사에서 나뭇잎 사이로 찍는 햇살도 매일 다르다. 단골집 식당에 드나드는 손님들도 다르고, 식당 사장의 표정도 다르다. 그가 읽는 책도 달라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조카의 방문은 그의 루틴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감독은 말하고 있다. 새로움은 늘 내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 히라마야처럼 새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늘 같은 일상 같지만 히라야마처럼 음악을 매일 바꾸고, 책을 바꾸고, 매일 바뀌는 빛을 관찰하면 내 내면이, 내 삶이 새로움을 경험한다. 새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이 작은 차이를 발견해 내는 것이 삶의 지혜다. 내공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로렌스 수사는 수도원 부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썼다. 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 감자 깎기, 청소하기는 그를 지루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루한 일상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느낀 것이 그의 영성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영성 일기를 썼다. 그렇게 함으로 일상은 매일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영성 일기 쓰기는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삶의 반복되는 루틴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게 한다. 나의 감정의 변화, 내가 만난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변화를 포착하는 힘을 길러준다.
얼마 전 작고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차렸다. 그가 쓴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주인공 오기 렌의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있다. 오기 렌은 뉴욕시의 한 모퉁이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아침 8시에 출근을 한다. 출근 후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자기가 애정하는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편의점 앞 거리를 찍는 것이다. 매일 그는 한 장씩 사진을 찍는다.
그의 오랜 친구 폴이 편의점을 방문했을 떼 오기 렌은 자신의 사진첩을 친구에게 보여준다. 친구 폴은 사진첩을 대충 넘겨 본다. 왜냐하면 폴이 볼 때 다 똑같은 거리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오기는 폴에게 한 마디 한다. “친구, 내 사진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네. 천천히 집중해서 한 장 한 장 씩 다시 보게나.” 그러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폴은 친구의 사진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본 친구의 사진은 한 장도 똑같은 것이 없다. 매일 아침 거리의 풍경이 모두 다르다. 지나가는 행인이 다르고, 자동차가 다르고, 날씨가 다르다. 간혹 같은 인물이 찍히기도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옷차림이 정말이지 다르다.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려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 거의 매일 만나는 동일한 사람, 동일한 출근 길, 단조로운 일상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폴의 지혜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라는 조언을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오기 렌처럼 우리의 일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의 신비, 작은 차이, 단조롭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하루 하루가 기적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일상이 유지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는 기적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래 전 이렇게 기적을 표현했다. “기적은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 일상을 초월하는 일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기적같은 일, 즉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일을 기대한다. 하지만 사실 기적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우리 생각,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주는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고, 지구는 태양을 정교하게 공전하며 자전하고 있다. 만약 지구의 축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간다. 이것이 기적 아닌가? 달리 말해 우리의 일상이 별 일 없이 유지되는 것, 내가 별 일 없이 먹고 살아가는 것, 이런 일상이 기적 중의 기적 아닌가?
기적은, 새로움은 내가 발견해 내는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히라마야처럼 매일 음악을 바꾸어 보고, 새로운 책을 읽고, 나뭇잎 사이로 비춰지는 햇살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도 오래전 선지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가 3:22-23) 일상이 기적이다. 일상이 소명이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기적의 일상으로 살아내 보자. 히라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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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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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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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감독 : 조너던 글레이저
출연 : 크리스티안 프리델(루돌프 회스), 잔드라 휠러(헤드비그 회스), 이모겐 코게(린나 헨셀)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론을 믿는다. 유대교는 야훼만이 하나님이고 이슬람은 알라만이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초기 교회는 이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동일본질(homoousius)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차등이 없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한 지점은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신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종교다.
따라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으며 교회에 당부했다. “각각 자기 몸을 돌 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다루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찌가 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인 홀로코스트, 그 중심에 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내내 홀로코스트의 참상, 아우수비츠의 비참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보여주고, 페델리코 펠리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회적으로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너던 글레이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다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회드비그 회스, 그리고 자녀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회스의 가족들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청량한 새소리, 강가의 물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단란하고 웃음이 가득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뜻 이 장면은 전쟁의 참상이나 끔찍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인다. 그 어디에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소풍을 끝낸 가족은 귀가하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단란하고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거주하는 크고 화려한 집은 거대한 담벼락이 접해 있다. 그렇다. 그 담벼락 너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거대한 담 뒤에는 매일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밤이 되면 담벼락 너머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간혹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회스 가족이 수영을 즐기고 보트를 타는 강물이 잿빛으로 변한다. 회스 중령은 아이들을 강물에서 나오라 소리치고 노이로제처럼 씻긴다.
부인 회드비그 회스는 대여섯명의 하녀를 두고 있다. 하녀들이 밥도 짓고 아이들도 씻기고 남편의 옷도 다린다. 전투화를 벗어놓기 바쁘게 하인 한 명이 들고 가서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다 둔다. 이 가족은 언제나 정갈하며 깨끗하다. 아이들도 군더더기 하나 없다. 회스 부인은 자기 어머니를 집으로 초청하여 집이며 정원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니?”라며 감탄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그녀의 정원은 각종 꽃들로 가득하며 풀장에서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긴다.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중 이 지상천국 같은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상부에서 회스 중령의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회스 부인은 남편인 회스 중령에게 로비를 해서라도 여기를 사수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이 곳을 어떻게 가꾸었는지 알아요? 황무지 같은 이 곳을 천국의 정원처럼 가꾸었다고요. 아이들도 이 곳에 적응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 지 알잖아요.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혹여나 남편이 전쟁터로 전출을 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이사를 가게 될 까 조바심이 난 회스 부인은 신경질적이 된다. 일을 도와주는 유대인 하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대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 마디 하면 너도 저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르니?”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너무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드러낸다. 벽 하나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가 보여주는 수용소장의 가족은 자신들은 천국에서 지낸다 하지만, 실상 지옥을 만드는 자들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맞다. 그 벽 너머에 지옥이 있다. 소장 루돌프 회스는 그 벽에 난 문을 통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매일 드나든다. 그런데 그 지옥은 천국에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곳이다. 아니, 그 지옥을 통해 자신들의 천국을 유지하고 있다. 회스 가족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그 수용소의 공장에서 조달되고, 가끔 유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자루에 실려 이 집으로 들어온다. 회스 부인은 그 중 모피 코트를 챙긴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립스틱을 꺼내어 자신의 입술에 바른다. 담 너머의 죽어가는 자들이 이 쪽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상황이 그대로 연출된다. 아렌트는 전후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청석에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자신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오열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웃집 아저씨같은 사람이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데 동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누구나 본성에 잔인함이 들어있고 특수한 상황에서 악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칭했다.
동시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지 않은 죄’ 즉 사유하지 않은 죄였다.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불의가 행해지는 상황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죄, 동참한 죄를 선언했다. 악한 일에 단순하게 따른 것도 죄였다. 최소한의 저항,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린 죄, 그 죄가 더 컸다.
회스 가족의 죄가 그러하다. 벽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범죄, 악, 비참한 일에 이 가족은 너무나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기에, 게다가 수용소장의 가족이기에 이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도 걸어잠그고 커튼을 친다. 그 벽 너머의 참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이중성, 외면을 감독은 차분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이 묘사한 장면이 단지 아우슈비츠 뿐일까? 분명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전쟁이 아닐 뿐, 총이나 대포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끔찍한 일이다. 소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불경기라며 힘들어 한다. 최저 생계비에 겨우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맞벌이는 일상이다. 수많은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해 보려는 소망으로 대출하여 구매한 아파트, 인상된 금리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돈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억대가 넘는 비싼 외제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십만원이 훨씬 넘는 호텔의 식당들은 대기줄로 가득하다. 해외 여행자들은 넘치고 여행지의 비싼 호텔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하룻밤에 50만원에서 100만원 하는 호텔들에 방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불경기는 누구에게 해당되는 일인가? 오히려 불경기라는 것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중된다. 루돌프 회스에게는 보이는 벽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은 그대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공동체로 만드셨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나, 너’가 아니라 ‘나-너’, 즉 ‘우리’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나’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오롯이 ‘나’만 잘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자인 ‘너’가 없다면 생산자인 ‘나’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소망이 있다.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의 등장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수용소의 담을 지나 흙더미에 사과를 숨겨 놓는다. 누군가 일하다 그 사과를 발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죄에 동참한 사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사과다. 그 사과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소녀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 회스 가족을 무너뜨리는 작은 사과, 오늘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다. 이기적 욕망을 내려 놓고,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 뜨릴 사과 한 알을 나도 너도 나누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이며 공존하는 길이기에. 한나 아렌트의 경고에 귀 기울이자. 사유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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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