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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래디에이터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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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디에이터 Ⅱ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폴 메스컬(루시우스), 덴젤 워싱턴(마크리누스), 페드로 파스칼(마커스 아카시우스), 코니 닐슨(루실라)
리들리 스콧 감독이 24년만에 귀환했다. 글래디에이터 2편으로 복귀했다. 2000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고, 리들이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전 세계의 영화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적 스케일, 스토리, 연기, 연출 무엇하나 나무랄 것 없이 평단과 팬들의 마음을 설레기에 충분했다. 글래디에이트- 로마 제국 시절 원형경기장에서 싸웠던 검투사들이다.
서기 180년경 로마 제국의 동북부 변방, 최고의 지혜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아우렐리우스가 숲 속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명장 막시무스는 게르만 족과의 혈투를 앞두고 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막시무스는 부하들에게 싸워야 할 이유와 명분을 제시하며 사기를 돋운다. 위대한 로마제국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전쟁 후 사랑하는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자고 독려하고 본인이 앞장 서 돌격한다. 뛰어난 지략과 용맹으로 막시무스 장군이 이끄는 군단은 게르만족을 물리치고 로마의 평화를 가져온다.
황제는 로마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황제의 일인 권력이 가져오는 폐단을 꿰뚫어 보고 로마를 공화정 체제로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 일에 막시무스가 적임자라는 판단을 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비밀리에 막시무스와 독대하고 자신의 뜻을 피력한다. 하지만 막시무스는 정중하게 거절한다. 이제는 로마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고향에서 가족과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간청한다.
한편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코모두스는 야망이 지나치게 크다. 그는 아버지의 사후 당연히 황제 자리를 이어 받으리라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난 뒤 비열한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가 공화정 체제로 전환하기 전에 그는 아버지를 몰래 암살하고 권력을 차지한 후 원로원을 해산하려 한다. 물론 눈엣가시인 막시무스를 몰래 처단하라고 명령한다.
영문도 모른채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막시무스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고 본능적으로 가족의 위협을 느껴서 집으로 향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아내와 아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있었다. 코모두스의 지시인 것을 직감하지만 막시무스는 삶의 의미를 상실했다. 가족의 무덤에서 오열하다 쓰러져 있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노예의 몸이 되어 있었다. 길을 지나던 무역상이 그를 노예로 삼았고 결국 검투사들을 거느린 주인에게 팔렸다.
신분을 속인 채 막시무스는 살기 위해 싸움을 했다. 전쟁터가 아닌 작은 경기장에서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다. 그의 실력과 남다른 품격에 검투사 주인은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직감하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막시무스는 원형경기장에서 자신의 원수인 코모두스와 결전을 벌이게 되고, 코모두스는 독이 발린 칼 끝으로 막시무스를 찔렀고, 막시무스는 마지막 일격을 코모두스에게 가한다. 결국 두 사람은 경기장 내에 쓰러진다.
세월이 흘러 북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에서 로마의 거대한 군함들이 견고한 성을 향해 돌격한다. 로마 군단을 이끄는 장군은 아카시우스, 나미비아 군을 이끌고 저항하는 사람은 루시우스, 결국 로마의 화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은 루시우스는 로마에 전쟁포로로 잡혀간다. 예상했듯이 그는 검투사가 되었고 치열하게 싸우다 검투사계의 대부인 마크리누스의 눈에 뛴다. 마크리누스는 루시우스를 앞세워 돈과 권력을 쥐려 했고, 루시우스는 마크리누스를 통해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아카시우스 장군과 로마의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행되는 로마는 혼란과 격동의 세월이었다. 코모두스이 죽음 후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있었고, 내전을 평정한 세베리우스 황제, 그리고 세베리우스 황제의 죽음 후 쌍둥이 아들인 게타와 카라칼라가 통치하지만 두 황제는 탐욕과 육욕에 쌓여 있다. 자극적 검투 대회를 앞세워 향략에 빠져 있다. 이런 로마제국의 운명을 걱정하며 제국을 바로 세우려는 사람은 다름 아닌 모든 군대의 존경을 받는 아카시우스다.
글래디에이터 2는 로마의 혼란기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걸었던 세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아카시우스 장군이다. 그는 전 황제의 딸이자 공주였던 루실라와 결혼을 해서 로마 제국을 위해 싸운다. 뛰어난 장군이자 원칙주의자이지만 권력에서 멀어진 상태다. 로마는 권력욕이 강한 쌍둥이 황제와 야비한 원로원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실라와 함께 아카시우스는 파멸로 치닫는 로마 제국을 바로 세우고자 힘쓰는 인물이다. 그는 대의와 명분을 따라 움직인다.
또 한 명의 인물은 마크리누스, 한때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더불어 스페인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하지만 지나친 정복욕과 야망 때문에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 또한 도덕군자 같은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우렐리우스가 꿈꾼 공화정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길을 갔다. 검투사들을 이끌고 돈과 권력을 사들였다. 원로원들의 정치인들도 매수했다. 곳곳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놓고는 게타와 카리쿨라를 제거하고 자신의 로마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들을 제거한다.
마지막 루시우스, 실은 공주 루실라와 막시무스 사이에 태어난 신분이었으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에 어머니가 변방으로 보내버렸다. 루시우스는 자신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변방에서 자랐고, 로마의 적대국에서 뛰어난 장군으로 성장했다. 운명에 따라 노예 검투사가 되었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로마제국의 황제 후보로 급부상한다. 당연히 마크리누스의 견제대상이 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모든 장애와 위협을 물리치고 마침내 원형경기장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룬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아니 루시우스의 길을 통해 한 가지 생각해 볼 중요한 주제가 있다. 결국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루시우스의 길이다. 그는 처음에 복수심에 불타 있었다. 자신의 아내와 동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아카시우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견디며 한 발씩 다가갔다. 하지만 진실의 실체를 발견한 그는 갈등한다. 단순히 사람에게 복수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아카시우스 역시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랐던 장군이었을 뿐임을 알게 된다. 결국 그가 택한 복수는 로마의 황제라는 자리 자체였다. 로마 제국 자체가 그의 복수 대상이었다. 전쟁을 감행해야 하고, 사람을 죽여야 하고, 또한 검투사처럼 누군가를 죽여야 내가 살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 자체에 대한 복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원형경기장에서 관중들을 향해 소리친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던 것인가? 언제까지 이런 죽고 죽이는 짓을 일삼을 것인가?”
루시우스의 외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외침과 닮았다. 예수님 역시 로마 제국에 저항하셨다. 무력이나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으로 저항하셨다. 십자가라는 로마를 상징하는 끔찍한 무대에서 예수께서는 소리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폭력 자체에 대하여 소리치셨고, 죽음 자체에 소리치셨다. 예수께서는 죽음 그 자체, 폭력 그 자체에 대하여 복수하셨다. 르네 지라르의 말을 빌리면 “폭력을 폭로하고 폭력의 사슬을 끊으셨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당대의 검투시합을 보면서 외친다. 우리의 싸움은 타인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싸움은 살리는 싸움이다. 진리의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성령의 검을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비진리에 사로잡힌 자들의 심령을 꿰뚫는 싸움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싸움이다. 자기 희생으로 이 땅에 참된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싸움이다. 곧 비진리를 끝내는 싸움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싸움이고 사람을 살리는 싸움이다. 그것이 진정한 복수요, 우리가 싸워서 승리해야 할 목표다. 이런 싸움에 헌신한 그리스도의 참된 군사들, 글래디에이터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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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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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커 폴리 아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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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폴리 아 되
감독 : 토드 필립스
출연 : 호아킨 피닉스(조커), 레이디 가가(할리 퀸)
다니엘 부어스틴은 [이미지와 환상]에서 현대인들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가짜 사건 pseudo-event 에 휘말려 산다고 경고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휴대전화를 통해 각종 미디어를 끊임없이 시청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고, 각종 연예 프로그램들을 보고, 스포츠를 보고, 개인 컨텐츠들을 본다. 현대인들의 이런 시청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회사나 개인은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생산한다. 미디어 속의 주인공들은 유명인이 되며 셀럽이 된다. 그들은 미디어에서 영웅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가짜 사건일 뿐이다. 이미지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이 가짜를 진짜처럼 여기며 열광한다. 가짜들 이야기를 진짜처럼 여긴다. 한 번은 지하철에서 어떤 중년 여성 둘이서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내용으로는 누가 죽은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실제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 상의 스토리였다.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하는지 실제 사건인 줄 착각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실제 사건이 아닌 미디어 속의 가짜 사건을 진짜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미디어에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을 소모한다.
토드 필립스가 만든 조커 폴리 아 되는 현대인들의 이런 경향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감독은 전작이자 1편인 조커에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본명은 아서 플렉이지만 그는 조커로 불린다. 조커의 분장을 하고 스탠딩 코미디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대신 야유와 조롱을 보낸다. 무대에서 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아서 플렉 역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무능력하며 무기력하다. 사람들에게 조롱거리 인생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서 플렉이 일약 영웅으로 도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머레이 플랭클린 쇼에 나간 아서 플렉은 생방송 중 그를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만든 진행자 머레이 플랭클린을 권총으로 저격한다. 이 장면이 생방송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너무나 당황한 일에 아무도 대처하지 못할 때 아서는 당당하게 방송국을 빠져 나간다. 방송국을 빠져나온 아서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통쾌하다는 몸짓으로 춤을 춘다. 경찰은 그를 좇지만 이내 놓쳐버린다. 아서는 곧 지하철로 들어갔고, 지하철에는 조커 가면을 쓴 군중들이 가득하다.
아서 플렉이 조커로 발돋움하는 사건이다. 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머레이의 심장을 쏘았다. 살인 사건에 왜 사람들이 반응했는가? 실상 머레이는 성공한 부르조아의 대표다. 소위 잘난체하는 부류다. 아서와 같은 자들을 놀려 먹으며 인기를 누렸던 자다. 사람들은 그런 머레이를 정죄한 아서, 아니 조커에게 열광을 한 것이다. 그 순간 조커는 니체가 말한 초인이다. 도덕과 윤리를 뛰어 넘어 사회악을 처단한 영웅이다. 적어도 그를 추종하고 따르는 수많은 자들에게 조커는 영웅이다. 이제 사람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 열광하고 조커라는 가짜 인물에게 환호를 보낸다.
실제로 이런 조커 열풍은 현실세계에도 등장한다. 오늘날 정치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정치인에게 윤리와 도덕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조커처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고 그들의 정의를 충족해주는 새로운 영웅을 기대한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욕을 대신 해 주고, 내가 휘두르지 못하는 권력을 휘둘러주고, 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주는 영웅에 환호한다. 정치는 희화화되고 실제는 가짜가 된다.
르네 지라르는 이런 현상을 욕망의 모방이라 불렀다. 욕망은 퍼져 나간다. 급속도로 번져간다. 들풀처럼 욕망은 타들어간다. 너도 나도 욕망의 화신이 되면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비정상적으로 돌변한다. 독일 제3제국의 총통이 되어 온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간 히틀러 열풍이 그러하다. 그는 니체가 말한 초인을 자임했고, 당시 독일인들은 민족우월주의라는 욕망에 휘말려 그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다. 결과는 자명했다. 남도 죽이고 자신들도 죽는 끔찍한 지옥이 연출되었다.
그래서일까?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 폴리 아 되, 조커 2편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옥에 갇힌 조커의 등장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부제인 ‘폴리 아 되’는 프랑스어로 ‘공유정신병 증세’라는 뜻이다. 아서의 정신병적 자아인 조커가 공유된다는 뜻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변호인은 그가 아서 플렉일 때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자아인 조커일 때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서 플렉과 조커는 분열된 자아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할리 퀸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조커에게 접근한다. 감옥 내 찬양대에 지원하여 조커에게 접근하고, 그에게 자신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다. 외로웠던 아서 플렉,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서 플렉은 이내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그녀에게 빠져든다. 아서는 할리를 사랑한다.
문제는 할리 퀸을 사랑한 아서 플렉의 마음이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조커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할리 퀸에게 한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 사이에 갈등한다. 사랑 때문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점차적으로 그는 대중들의 영웅인 조커에서 한 여인의 남자인 아서 플렉으로 순화된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불행은 여기에 있다. 할리 퀸이 사랑한 남자는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이기 때문이다. 할리는 아서 플렉이라는 소시민 코미디언은 관심이 없다. 조커라는 영웅이 필요할 뿐이다. 그가 마약 조커가 아니라면 할리는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다. 할리 퀸이 사랑하는 대상은 철저히 조커라는 만들어진 영웅이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며 군중들의 스폿 라이트를 받으며 세상에 억눌린 자들의 대변인이자 출구가 되어 줄 조커다. 조커를 통해 자신도 할리 퀸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현대인들의 이런 욕망을 영화의 스크린에 펼쳐놓았다. 사람들은 드라마의 영웅을 사랑하고, 스크린 속의 이미지화 된 영웅들을 추앙한다. 그들은 나의 욕망을 대신 해결해 주는 출구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가상의 캐릭터를 사랑한다. 가짜 사건에 일희일비하면서.
영화 조커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생각해 보았다. 2천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도 영웅이 필요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영웅, 다윗의 무너진 왕좌를 재건할 영웅, 포로된 삶을 끝내고 온 세상의 통치자가 되게 해 줄 영웅이 필요했다. 이런 욕망들이 메시야 신드롬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결해 줄 대상이 필요했고, 그러한 메시야 상을 만들어 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자일 뿐 아니라, 모세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었듯이, 지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식을 제공하는 자라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 바로 그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군중들의 욕망을 멀리하셨다. 오히려 물러가셔서 따로 기도하셨다. 그들에게 빵이 아니라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강조하셨다. 그러자 그 많던 군중들이 다 물러갔다. 소수의 제자들만 남았다. 영화식으로 표현하자면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 되었을 때 군중들은 떠나가고 그는 버림받았다. 예수께서도 욕망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욕망을 못 박아야 한다고 하셨을 때 버림 받고 성난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영화는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조커인가? 아서 플렉인가? 가짜 인물인가? 진짜 삶인가? 욕망의 투사인가? 십자가인가? 쓸쓸히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처럼, 가짜가 아니라 진짜 삶을 살 용기가 있는가? 나의 욕구를 채워줄 종교가 아니라, 나의 헌신을 바칠 진정한 신앙을 원하는가? 지금 당신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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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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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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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2024)
감독 : 빔 벤더스
출연 : 야쿠쇼 코지(히라야마), 에모토 토키오(타카시), 아리사 나카노(니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렌스 수사의 책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우리에게 소중한 진리를 전해준다. 로렌스 수사는 중세 수도원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수도원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주로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수도원에는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 수사도 있고, 신학 연구만 하는 수사도 있고 로렌스처럼 소위 잡일을 하는 수사도 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루종일 기도를 하거나 신학을 연구하는 수사는 영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보지만, 하루종일 식사 준비하는 사람은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로렌스 수사는 이런 경향을 뒤집었다. 그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 일, 감자를 깎는 일, 청소를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요즘 말로 하면 일상이 영성이다.
사실 일상의 영성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 사람들은 종교개혁가들이다. 루터, 칼뱅 등은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에 못지 않게 농사 짓고 물건을 만들고 가정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하나님이 소중하게 보시고 그 일들도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우리 주님도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30년을 목수로 사셨지 않은가?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본격적으로 전파하신 일에 집중하신 것은 3년에 불과하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무를 자르고 돌을 나르고 집안을 청소하는 일을 더욱 많이 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도 살아가면서 기도하고 성경 읽는 일보다 말 그대로 일상에 더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 일상이 영성이다. 일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내는 것이 소명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들고 야큐쇼 코지가 주연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의 소중함을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감독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인물, 소시민 히라야마를 내세워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최근 본 영화 중에 이 작품을 최고로 꼽을 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은 새로울 것이 거의 없다. 그는 도쿄 번화가의 뒷골목 사글세 집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고, 세수와 면도를 하고, 유니폼을 입고 집을 나선다. 집 마당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를 뽑아 들고, 도쿄 타워를 지나 출근한다. 출근길에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그는 도쿄 시내의 공중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부다. 자신이 맡은 화장실 몇 곳을 청소하고 나면, 가까운 산사에 들러 우유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퇴근 후 동네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저녁을 먹은 후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 이 루틴을 매일 반복한다. 정말 별 일 없는 하루하루다.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다르다. 감독의 세심한 연출을 잘 따라가 보자. 히라마야가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날 때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표정이 다르다. 집을 나설 때 올려다 보는 하늘빛이 매일 다르다. 청소차를 타고 도쿄 타워를 지날 때 날씨가 매일 다르다. 날씨에 따라 그가 선택하는 음악도 매일 다르다. 음악이 매일 다르니 당연히 그의 감정도 다르다. 화장실 청소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의 상태도 매일 다르고, 그가 청소할 때 드나드는 사람들도 다르다. 산사에서 나뭇잎 사이로 찍는 햇살도 매일 다르다. 단골집 식당에 드나드는 손님들도 다르고, 식당 사장의 표정도 다르다. 그가 읽는 책도 달라진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조카의 방문은 그의 루틴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감독은 말하고 있다. 새로움은 늘 내 주위에 있는 것이라고. 히라마야처럼 새로움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늘 같은 일상 같지만 히라야마처럼 음악을 매일 바꾸고, 책을 바꾸고, 매일 바뀌는 빛을 관찰하면 내 내면이, 내 삶이 새로움을 경험한다. 새로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시작된다. 이 작은 차이를 발견해 내는 것이 삶의 지혜다. 내공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로렌스 수사는 수도원 부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고 썼다. 매일 반복되는 밥 짓기, 감자 깎기, 청소하기는 그를 지루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지루한 일상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느낀 것이 그의 영성의 본질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매일 영성 일기를 썼다. 그렇게 함으로 일상은 매일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영성 일기 쓰기는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삶의 반복되는 루틴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게 한다. 나의 감정의 변화, 내가 만난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변화를 포착하는 힘을 길러준다.
얼마 전 작고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소설가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차렸다. 그가 쓴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에는 주인공 오기 렌의 매일 반복되는 루틴이 있다. 오기 렌은 뉴욕시의 한 모퉁이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는 매일 아침 8시에 출근을 한다. 출근 후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자기가 애정하는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편의점 앞 거리를 찍는 것이다. 매일 그는 한 장씩 사진을 찍는다.
그의 오랜 친구 폴이 편의점을 방문했을 떼 오기 렌은 자신의 사진첩을 친구에게 보여준다. 친구 폴은 사진첩을 대충 넘겨 본다. 왜냐하면 폴이 볼 때 다 똑같은 거리 사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오기는 폴에게 한 마디 한다. “친구, 내 사진은 그렇게 보면 안 된다네. 천천히 집중해서 한 장 한 장 씩 다시 보게나.” 그러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폴은 친구의 사진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다시 본 친구의 사진은 한 장도 똑같은 것이 없다. 매일 아침 거리의 풍경이 모두 다르다. 지나가는 행인이 다르고, 자동차가 다르고, 날씨가 다르다. 간혹 같은 인물이 찍히기도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옷차림이 정말이지 다르다.
폴 오스터 역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려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 거의 매일 만나는 동일한 사람, 동일한 출근 길, 단조로운 일상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폴의 지혜가 필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라는 조언을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오기 렌처럼 우리의 일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의 신비, 작은 차이, 단조롭지 않음을 발견할 것이다. 하루 하루가 기적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사실 일상이 유지되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우리는 기적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래 전 이렇게 기적을 표현했다. “기적은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에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 일상을 초월하는 일을 기적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이 내 삶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기적같은 일, 즉 일상을 뛰어넘는 어떤 일을 기대한다. 하지만 사실 기적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우리 생각,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고. 그렇지 않은가? 우주는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있고, 지구는 태양을 정교하게 공전하며 자전하고 있다. 만약 지구의 축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교하게 조율되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굴러간다. 이것이 기적 아닌가? 달리 말해 우리의 일상이 별 일 없이 유지되는 것, 내가 별 일 없이 먹고 살아가는 것, 이런 일상이 기적 중의 기적 아닌가?
기적은, 새로움은 내가 발견해 내는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히라마야처럼 매일 음악을 바꾸어 보고, 새로운 책을 읽고, 나뭇잎 사이로 비춰지는 햇살의 차이를 발견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도 오래전 선지자처럼 고백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가 3:22-23) 일상이 기적이다. 일상이 소명이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기적의 일상으로 살아내 보자. 히라야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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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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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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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
감독 : 조너던 글레이저
출연 : 크리스티안 프리델(루돌프 회스), 잔드라 휠러(헤드비그 회스), 이모겐 코게(린나 헨셀)
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긴다. 우리가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부분이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론을 믿는다. 유대교는 야훼만이 하나님이고 이슬람은 알라만이 하나님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초기 교회는 이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동일본질(homoousius)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이시다. 차등이 없다. 또한 삼위하나님은 상호내주(perichoresis) 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한 지점은 공동체라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에게 돕는 배필인 하와를 만드셨다.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따라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며 신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종교다.
따라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으며 교회에 당부했다. “각각 자기 몸을 돌 볼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의 신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다루는 영화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찌가 감행한 유대인 대 학살인 홀로코스트, 그 중심에 있는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내내 홀로코스트의 참상, 아우수비츠의 비참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가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보여주고, 페델리코 펠리니의 [인생은 아름다워]가 우회적으로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과 달리 조너던 글레이저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다만 수용소장인 루돌프 회스와 그의 아내 회드비그 회스, 그리고 자녀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영화는 회스의 가족들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청량한 새소리, 강가의 물소리,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단란하고 웃음이 가득한 가족이 등장한다. 언뜻 이 장면은 전쟁의 참상이나 끔찍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보인다. 그 어디에도 전쟁은 보이지 않는다. 소풍을 끝낸 가족은 귀가하여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잠자리에 든다. 지극히 단란하고 평범한 한 가족의 일상이다.
그런데 이 가족이 거주하는 크고 화려한 집은 거대한 담벼락이 접해 있다. 그렇다. 그 담벼락 너머는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다. 거대한 담 뒤에는 매일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밤이 되면 담벼락 너머의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간혹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리고 회스 가족이 수영을 즐기고 보트를 타는 강물이 잿빛으로 변한다. 회스 중령은 아이들을 강물에서 나오라 소리치고 노이로제처럼 씻긴다.
부인 회드비그 회스는 대여섯명의 하녀를 두고 있다. 하녀들이 밥도 짓고 아이들도 씻기고 남편의 옷도 다린다. 전투화를 벗어놓기 바쁘게 하인 한 명이 들고 가서 반짝 반짝 빛이 나게 닦아다 둔다. 이 가족은 언제나 정갈하며 깨끗하다. 아이들도 군더더기 하나 없다. 회스 부인은 자기 어머니를 집으로 초청하여 집이며 정원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여기가 바로 천국이구나. 어쩜 이렇게 좋을 수가 있니?”라며 감탄한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그녀의 정원은 각종 꽃들로 가득하며 풀장에서는 아이들이 수영을 즐긴다. 지상 천국이 따로 없다.
그러던 중 이 지상천국 같은 가정에 균열이 생긴다. 상부에서 회스 중령의 전출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회스 부인은 남편인 회스 중령에게 로비를 해서라도 여기를 사수하라고 다그친다. “내가 이 곳을 어떻게 가꾸었는지 알아요? 황무지 같은 이 곳을 천국의 정원처럼 가꾸었다고요. 아이들도 이 곳에 적응해서 얼마나 행복해 하는 지 알잖아요. 이 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혹여나 남편이 전쟁터로 전출을 가게 되고 자신의 가족도 이사를 가게 될 까 조바심이 난 회스 부인은 신경질적이 된다. 일을 도와주는 유대인 하녀가 작은 실수를 했을 대 그녀는 화를 내며 소리친다. “내가 남편에게 말 한 마디 하면 너도 저 가스실로 간다는 것을 모르니?”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은 너무나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드러낸다. 벽 하나 사이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그가 보여주는 수용소장의 가족은 자신들은 천국에서 지낸다 하지만, 실상 지옥을 만드는 자들임을 감독은 보여준다. 맞다. 그 벽 너머에 지옥이 있다. 소장 루돌프 회스는 그 벽에 난 문을 통해 천국에서 지옥으로 매일 드나든다. 그런데 그 지옥은 천국에 살아간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만들어 낸 곳이다. 아니, 그 지옥을 통해 자신들의 천국을 유지하고 있다. 회스 가족이 사용하는 생필품은 그 수용소의 공장에서 조달되고, 가끔 유대인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가지가 자루에 실려 이 집으로 들어온다. 회스 부인은 그 중 모피 코트를 챙긴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립스틱을 꺼내어 자신의 입술에 바른다. 담 너머의 죽어가는 자들이 이 쪽의 천국을 만들어 낸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상황이 그대로 연출된다. 아렌트는 전후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을 방청석에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자신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죽음의 수용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에서 오열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이웃집 아저씨같은 사람이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 데 동조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깨달았다. 누구나 본성에 잔인함이 들어있고 특수한 상황에서 악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이라 칭했다.
동시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유죄를 선언했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지 않은 죄’ 즉 사유하지 않은 죄였다.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죄, 불의가 행해지는 상황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죄, 동참한 죄를 선언했다. 악한 일에 단순하게 따른 것도 죄였다. 최소한의 저항, 최소한의 양심을 저버린 죄, 그 죄가 더 컸다.
회스 가족의 죄가 그러하다. 벽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범죄, 악, 비참한 일에 이 가족은 너무나 무심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기에, 게다가 수용소장의 가족이기에 이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회스는 문을 걸어잠그고 창문도 걸어잠그고 커튼을 친다. 그 벽 너머의 참상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 이중성, 외면을 감독은 차분하게 그러나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조너던 글레이저 감독이 묘사한 장면이 단지 아우슈비츠 뿐일까? 분명 아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전쟁이 아닐 뿐, 총이나 대포로 무장하지 않았을 뿐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끔찍한 일이다. 소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엘리트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불경기라며 힘들어 한다. 최저 생계비에 겨우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맞벌이는 일상이다. 수많은 청년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을 하지 못한 채 단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다. 집 한 채 마련해 보려는 소망으로 대출하여 구매한 아파트, 인상된 금리로 인해 빚에 허덕이고 있다.
반면 돈이 넘치는 사람들도 있다. 억대가 넘는 비싼 외제 자동차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십만원이 훨씬 넘는 호텔의 식당들은 대기줄로 가득하다. 해외 여행자들은 넘치고 여행지의 비싼 호텔들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하룻밤에 50만원에서 100만원 하는 호텔들에 방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불경기는 누구에게 해당되는 일인가? 오히려 불경기라는 것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빈익빈 부익부가 가중된다. 루돌프 회스에게는 보이는 벽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할 뿐이다. 상황은 그대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공동체로 만드셨다. ‘나’는 ‘너’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나, 너’가 아니라 ‘나-너’, 즉 ‘우리’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나’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너’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오롯이 ‘나’만 잘 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소비자인 ‘너’가 없다면 생산자인 ‘나’가 어찌 유지될 수 있겠는가?
소망이 있다. 글레이저 감독의 영화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의 등장이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수용소의 담을 지나 흙더미에 사과를 숨겨 놓는다. 누군가 일하다 그 사과를 발견해 먹을 수 있도록. 원죄에 동참한 사과가 아니라 구원을 이루는 사과다. 그 사과가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소녀가 한 명이 되고, 두 명이 될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진다. 회스 가족을 무너뜨리는 작은 사과, 오늘 우리가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다. 이기적 욕망을 내려 놓고,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 뜨릴 사과 한 알을 나도 너도 나누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가 인간다워지는 길이며 공존하는 길이기에. 한나 아렌트의 경고에 귀 기울이자. 사유하지 않은 것도 죄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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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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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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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
재개봉/2023.03.01. 장르/액션/코미디 국가/미국 등급/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150분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출연 : 양자경(에블린 왕), 스테파니 수(조이/조부 투파키), 키 호이 콴(웨이먼드 왕)
1. Everything
모든 것이 엉망이다. 삶이 뒤엉켜 버렸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살았다. 세탁 일을 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세탁이 맘에 안 든다며 돈을 내지 않는 손님, 옷감이 상했다며 물어내라는 손님, 이런 저런 일을 다 겪었다. 게다가 지금은 세무서, 이 깐깐한 직원은 온갖 잔소리를 하며 서류를 보완해 내라고 요구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래도 살만했다. 에블린은 가족을 생각하면서 견뎌냈다. 다소 융통성이 없이 착하기만 한 남편, 가끔 속을 뒤집어 놓지만 사랑스런 딸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 준 아버지 때문에 견뎠다. 가족은 그녀에게 희망이었고 삶을 견뎌내는 힘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착하기만 한 줄 알았던 남편이 이혼 소송 장을 내민다. ‘당신하고 더 이상 못 살겠다, 당신은 일 밖에 모른다. 나에게 관심도 없다.’고 같잖은 이유를 들이댄다. 딸은 미국 여자 아이를 데려와서 굳이 가족들에게 소개하겠단다. 자기는 동성애자라고, 여자 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한다. 잘 지켜왔던 세탁소는 세무관련 법적으로 몇 가지 문제가 생겨서 골칫거리다.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첩첩산중이라더니 내 삶이 그렇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 꺼 번에 내려앉다니.
2. Everywhere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려는 시점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무서에 앉아 있던 에블린에게 이상한 모습을 한 남편이 등장한다. 분명 소심한 남편인데 무언가 다르다. 알 수 없는 괴한들이 공격을 가하는데 남편이 다 물리친다. 그리고 에블린은 남편의 손에 이끌려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다른 멀티버스에서 왔고, 엉망이 되어 버린 세상을 구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블린 당신이 그 세계의 희망이라고 한다. 순간 다른 세계의 악당이 등장하는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딸 조이 아닌가? 조이 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조부 타파키라면서 사정없이 에블린을 공격한다.
알고 있던 세상이 모두 달라졌다. 남편 에드먼드가 하라는 대로 엉뚱한 짓들을 하자, 에블린 역시 대단한 능력자로 변신한다. 그녀는 다른 세상에서 굉장한 실력자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조부 타파키를 물리쳐야 한다. 에블린은 이 세상, 저 세상, 다양한 멀티 버스를 오간다. 에블린이 오가는 세상에서는 그녀의 과거가 펼쳐진다. 다른 세상에서 그녀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멋진 영화배우며, 남편 에드먼드 역시 멋진 미남 배우다. 또 다른 세상에서 에블린은 화려한 무술 실력을 발휘하는 여 전사다.
멋진 투사가 된 에드먼드가 에블린에게 말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투사로 생각하겠지. 당신은 항상 긍정적인 내가 나약하다고 생각할 거야. 그런데 말야, 그게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부드러움은 살아남기 위한 내 전략이야. 내 삶에서는 나도 투사야.” 에드먼드의 말에 따라 에블린도 다정하게 싸우는 법을 익힌다. 억척스럽게 투사처럼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님을 배운다.
그렇게 모든 곳을 다니며 삶을 지켜나가는 에블린에게 최강의 빌런이 등장한다. 딸인 줄 알았지만, 그녀는 조부 투파키 – 우주의 최강 빌런이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을 만들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파괴해 나간다. 조부 투파키는 죽어 버리고 싶어서,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싶어서 베이글(블랙홀)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은 사랑 받고 싶었다는 고백이다. 일을 좀 내려놓고 나를 바라봐 주면 안 되냐고 외치는 딸의 투정이다.
3. All at Once
다시 삶이다. 멀티 버스에서 돌아온 에블린의 삶은 바뀌었다.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달라 보인다. 후회와 한숨으로 살아온 자신의 세탁소는 아름다운 곳으로,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남편은 다정한 사람으로, 속 썩이는 딸은 사랑스런 아이로 다가온다. 꿈을 꾼 듯 멀티버스의 경험이 에블린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고 새로워졌다. 달라진 것은 결국 에블린의 내면이다. 그녀는 진짜 투사로 거듭났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장착한 진짜 투사다. 가정을 지켜 온 그녀가 세상을 구한 영웅이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말했다. “삶은 의미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건네주던 동료에게서 그는 진정한 삶을 배웠다. 죽음은 희망의 상실이지만, 희망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때문에 죽음을 이겨냈다.
월터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상상력을 가지자고 역설한다. 현실은 불의와 악이 가득하다. 강대국에 의해 침략당한 채 포로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현실 너머의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다. 그 나라에서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뒹굴며, 독사 굴에 어린 아이가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지 않으며, 대립과 반목은 사라진다. 불화와 오해는 사라지고 사랑만이 존재한다. 그 나라는 나의 상상에서 현존한다. 아니, 믿음은 지금의 현실을 뛰어 넘어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한다. 천국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멀티 버스로 존재한다.
언젠가 그 나라로 충만해 질 때, 모든 것, 모든 곳이 한꺼번에 새롭게 될 것이다. 그 나라를 소망한다.
추신 : 멀티 버스는 존재하는가?
요즘 멀티 버스가 화두다. 영화사들이 앞 다투어 멀티 버스를 소재로 제작하고 있다. 마블은 일찍이 멀티 버스를 자신들의 세계관으로 채택하고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제목이 멀티 버스의 혼란이고, 스파이더맨에서는 다른 지구에서 온 주인공을 소개하고 있다. 로키라는 시리즈에서도 멀티 버스를 오가며 그들이 설정한 타임-라인을 혼란시키는 존재로 그린다.
그럼 멀티 버스(Multi-verse)라는 개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갑자기 튀어나온 용어일까? 그렇지 않다. 콜럼비아 대학의 브라이언 그린은 자신의 저서 멀티 유니버스를 통해 이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힘들지만, 어쨌든 이들 물리 천문학자들이 멀티 버스라는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빅뱅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빅뱅이 일어나 오늘날까지 우주가 서서히 팽창하면서 존재해 왔으나 그 원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론적으로 확증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꺼낸 것이 멀티-유니버스다. 즉 다중우주론이다. 우주는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니라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이야기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확인하고 존재하고 있는 이 우주라는 말이다.
다중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이들은 우선 인플레이션 이론을 가져왔다. 빅뱅 이후 우주 초기에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는데, 현재의 공간을 창출한 폭발 이외에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고, 그 결과로 멀티 버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끈 이론으로 다중우주를 설명하는데, 끈 이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살아가는 4차원 이외에 여분의 차원이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어쨌든 이러한 가설을 영화는 스크린에 녹여 내고 있다. 이들은 멀티 버스를 실재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럼 정말 멀티 버스는 존재할까?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가져오지만, 여전히 확인할 가능성은 없다. 또한 어떤 천문학자들은 말도 안 되는 공상 과학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그럼 신학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멀티버스가 신학적으로 가능할까?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 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메시야가 필요한 것인가? 그들은(만약 있다면) 죄를 지었을까? 아닐까? 복잡한 문제다. 다만, 성경을 읽어갈 때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차원과 다른 영역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존재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계시고 우리는 보이는 영역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존재다.
또한 성경의 인물들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는 것을 환상으로 보았다. 야곱은 하늘과 맞닿은 사다리를 보았고, 다니엘은 하늘 보좌를 보았으며,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셨다. 사도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하나님과 어린 양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천사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멀티버스에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현 시점에서 말할 수 있는 정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유니버스(Universe)의 다른 차원(Dimentions)이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차원에 존재하시며 우리를 지켜보실 것 같다. 일찍이 에드윈 A. 애벗이 쓴 플랫랜드에서 그린 것처럼, 우리보다 높은 차원, 그것을 우리는 영원, 영적 차원이라 부를 수 있겠다. 정리하면 멀티버스라기보다 유니버스의 다른 차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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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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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활 Ri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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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Risen, 2016
드라마 미국 107분 2016.03.17 개봉
감독 : 케빈 레이놀즈
주연 : 조셉 파인즈(클라비우스), 톰 펠튼(루시우스), 클리프 커티스(예슈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기독교의 모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기초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삶에 새기고 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 시대의 감상적 느낌과 달리, 십자가는 고대 사회, 특히 로마 사회에서는 수치 그 자체였다. 주지하듯 십자가형은 로마가 살인이나 무엇보다 로마 제국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 및 수치를 주기 위해 행하던 방식이었다. 예수님만 십자가 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십자가 형은 빈번하게 이뤄졌다. 게르트 타이센 등의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주후 6년 경 갈릴리의 세포리스 지역에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군이 일어났고, 시리아 주둔 로마군이 진격해 와서 반란군을 제압했고, 당시 반란에 가담한 유대인 남자 약 2천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고 한다. 따라서 십자가는 끔찍함이자 저주의 상징이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라 말한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다른 죄수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자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자기 죄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십자가형을 집행한 로마의 백부장의 증언을 기록한다.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마가는 그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고 기록한다.
로마 백부장이 보기에도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다. 자신이 집행하던 그 어떤 죄수와도 달랐음을 그는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십자가 형틀 위에서 자신과 타인을 저주하는 대신 예수님은 용서를 선언하셨다. 그 남다름, 그 위대한 선언에 백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아들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 이 부분이 중요하다. 로마 사람들도 ‘신의 아들’을 숭배했다. 어떤 이는 황제 가이사가 죽지 않았다고 했고, 네로가 부활했다고 믿기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 말했다. 만약 누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면 그는 진정한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통치자로 증명된다. 이것이 로마 사회의 중요한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예수님의 부활을 추적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에서는 제자들이 아닌 제 삼자, 로마의 호민관 클라비우스를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시킨다. 클라비우스는 총독 빌라도의 요청에 따라, 예수가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잠재우라는 명령을 듣고 조사에 나선다. 그는 예수님의 무덤부터 꼼꼼히 조사한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사하고, 이어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들의 비밀 공동체를 추적해 들어간다. 또한 클라우비스는 로마의 관료로써 골고다의 다른 시체들과 무덤들까지 정밀하게 조사한다. 혹시나 시신을 유기하고 거짓말 한 것이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함이다. 클라우비스의 목적은 분명하다.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며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클라우비스의 극적 체험을 다룬다. 제자들을 쫓던 클라우비스는 제자들 사이에 보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라고, 자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놀란다. 적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그들의 사랑에 놀란다. 결국 클라비우스 자신의 세계관이 무너진다. 그가 든 칼 뿐 아니라 그의 가치관 자체가 무장해제 된다. 로마의 정신 PAX ROMANA의 허상을 깨닫는다. 진정한 평화는 자기희생이요 사랑임을 체화해 간다. 그 과정은 영화를 통해 직접 보면 좋을 듯 하다.
영화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예수님의 부활을 꼼꼼하게 추적해 보았느냐고 묻는다. 의심의 터널을 거쳐서 확신의 빛에 이르렀냐고 묻는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님을, 예수님의 부활을 무작정 믿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자기 확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 부조리의 신앙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또한 영화 ‘부활’은 묻는다. 만약 부활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당신은 클라우비스처럼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냐고, 클라우비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랑의 길로 갈 수 있냐고 묻는다. 로마의 장교였던 클라비우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삶이 극적으로 바뀐다. 사도 바울도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는 부활이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고 유대인을 세계 위에 세울 날 이루어질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 전에 누군가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분명히 죽었다고 여겼던 그 분을 만났다.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만남으로 인해 바울은 변화되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부활을 전하고 다녔던 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그가 도리어 십자가와 부활을 자랑하는 사도가 되었다.
오랜 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믿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 [죄와 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한다. 자신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하고 자신의 죄를 숨긴 채 살아가지만, 결국 하숙집 소녀 소냐가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으로 인해 새롭게 태어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엎드렸다. 그의 양심이 살아나고 내면에서 새로운 삶이 살아났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즉시 경찰서로 향하여 자수하고 시베리아 형무소로 가는 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변화되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났다. 살았으나 죽었던 삶에서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시베리아 행을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라스콜은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삶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얼마 후 또 한 명의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 역시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제목을 [부활]로 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소설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대역인 네흘류도프 공작은 복음서를 읽던 중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접한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내면은 부활의 주님에 대한 감격으로 벅차오른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영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할 계획을 세운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자신의 종이 아니라 형제다. 형제 자매가 된 자들에게 네흘류도프 공작은 땅을 상속한다. 분배한다. 왜냐면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형제, 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면의 부활은 외적인 변화로 이어진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경험한다. 클라비우스처럼 칼을 버리고, 사도 바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고, 라스콜니코프처럼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고, 네흘류도프처럼 형제애가 살아난다. 삶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가? 나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가? 그렇다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삶의 열매가 맺어지는가? 부활은 결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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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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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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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The Creator, 2023
개봉 2023.10.03./ 장르 SF/액션/국가 미국/등급 12세이상관람가/러닝타임 133분
감독 : 가렛 에드워즈
출연 : 존 데이비드 워싱턴(죠수아), 젬마 찬(마야), 와타나베 켄(하룬), 매들린 유나 보일스(알피)
멀지 않은 미래, 미국 LA에 핵폭탄이 터졌다.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일은 인공지능 로봇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지고, 국방부는 인공지능 로봇과의 전면전을 선언한다. 무엇보다 인공지능 로봇의 설계자인 니르마타를 찾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다. 이 특별 임무에 죠수아 병장이 투입된다. 죠수아는 니르마타의 근거지로 예상되는 마을에 잠입하고 거기에서 마야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특수 부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야는 생명을 잃는다.
실의에 빠져 있는 죠수아에게 앤드류 대령이 찾아오고 마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마야는 니르마타의 측근이며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킬 가공할 무기인 A. I. 로봇을 개발 중이라고 전한다. 마야를 살리고 싶다면 니르마타를 제거하고 그들이 개발 중인 로봇도 제거하라는 명령을 죠수아는 받아들인다. 죠수아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본거지로 침투하고 거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듣게 된다.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무기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로봇 알피였고, 니르마타가 설계한 로봇 알피는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것을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상징이었다.
가렛 에드워즈의 신작 크리에이터의 내용이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우리에게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크리에이터는 올해의 화두였던 챗 GPT의 연계선상에 있다. 세계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발달과정을 눈여겨보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에 온통 관심이 쏟아진다. 일찍이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던졌던 스카이 넷의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쏟아진다. 이 영화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결합한 형태,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로봇들이 멀잖아 우리 삶에 공존할 가능성이 있다.
영화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로봇은 인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그들은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우선 영화에서 앤드류 대령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인공지능 로봇은 장차 인류를 멸망시킬 대상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생각, 이런 설정을 할까? 일찍이 칼 세이건은 자신의 책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구 문명이 악의에 찬 외계 문명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동족이나 다른 문명권과 잘 어울려 살 줄 아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모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잘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한 문명이 그보다 약간 선진적인 또는 약간 후진적인 문명에게 철저하게 파괴당하는 야만적 상황을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 족의 만남이 그랬고, 코르테스와 아즈텍이 그랬다. 우리는 저들도 우리와 같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외계 문명과의 조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외계인의 성간 함대가 우리 하늘에 나타났을 때 우리가 그들과 잘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칼 세이건의 우려처럼,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상의 적을 선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눈에 낯선 존재들은 잠재적 적으로 규정된다. 비단 외계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다른 제3세계의 사람들을 잠재적 적, 잠재적 악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과도한 방어기제를 발동한다. M. D.전략(미사일 방어체제)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은가? 여전히 흑인들이나 동양인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드워즈의 영화에 등장하는 앤드류 대령과 특수부대원들은 로봇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악의 씨앗 자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죠수아 병장은 중립지대에 있다. 그는 앤듀류 대령의 명령을 따라 로봇들을 파괴하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로봇들과의 조우,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에 전환이 일어난다. 특히 미국이 가공할 무기라 여겼던 로봇 알피와의 조우는 죠수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실제로 알피는 평화의 상징이었고, 알피는 모든 적대적 생각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로봇이었다.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죠수아 병장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접촉이 필요하다. 다른 문명 혹 타인에 대한 대부분의 적대적 생각은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의 우려에서 비롯된다. 만나보면 달라질 수 있다. 가다머의 주장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선이해구조를 가진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가다머는 지평융합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평융합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일어난다. 이슬람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인 ‘인샬라’( In Sha Alla)처럼,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내가 긍정으로 여기면 상대는 긍정으로 다가오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로봇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아닌가?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인가? 호모 마키나인가?
신학자 페트릭 세리는 위고의 말의 빌려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자연은 하나님의 즉각적 창조물이고, 예술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창조하시는 일이다.” 부언하면 자연이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이라면 예술 혹 기술은 인간을 통한 간접 창조물인 셈이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진정한 시인은 자기가 아니고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신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엔토우시아모스’라고 한다. ‘엔 en’은 영어 ‘인 in’, ‘토우 thou’는 ‘테오스 theos’에서 유래했으므로 ‘신 god’이다. 시인이 시를 창조할 때는 ‘신 안의 존재 das – In – dem – Gott – Sein’다.”
이렇게 볼 때 로봇은 신의 영감을 받은 인간의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신의 2차 창조물이자 간접 창조물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신의 창조 자체는 선하므로 신의 2차 창조물인 로봇도 선하다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태도 아닐까? 영화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알피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알피를 이용해 오히려 세계를 통합하려는 앤드류 대령이 문제 아닐까?
또한 우리는 생각해 볼 거리가 있다. 이러한 인공지능 로봇에게 영혼이 존재할까? 물론 현대 뇌과학의 담론은 인간에게조차 영혼이라는 실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단지 뉴런의 현상일 뿐 정신이나 영혼도 화학 작용일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학 전통,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르는 전통에 의하면 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 재료를 창조하셔서 그 재료가 물질을 형성하게 하신다.
“신이 처음 원질료(재료)를 창조했다. 그러한 질료로부터 갖가지 힘에 의해 물(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일체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과 신에 의해 창조된 힘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창조와 형성의 기본적인 구별이 행해진다. 다시 말해, ‘밖에 드러나는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다는 사고방식이 여기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질료 materia와 형상 forma 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따르면 인공지능 로봇, 크리에이터에서의 알피는 질료와 형상을 가진 셈이다. 신의 일차적 창조와 이차적 창조의 산물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부모를 매개로 태어날 때 신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신학은 가르친다. 이런 신학 전통에서 볼 때 실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정신 활동을 할지라도 그들에게 영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로봇은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크리에이터가 보여주는 알피의 창조자 니르마타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영화 크리에이터는 이처럼 우리에게 질문들을 던진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의 등장에 지나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속하기에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인공지능 로봇은 하나님의 직접 창조물인 인간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도 기억하자. 오직 인간만이 영혼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하기에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창조하신 사물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고 지켜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타락한 죄성은 창조세계와 창조물을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변질 시킬 것이기에. 구원받아 회심한 영혼이어야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잘 관리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창조물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물을 관리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잘 기억하는 것 – 이것이 영화 크리에이터가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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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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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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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탄생(내티비티 스토리) 2017,
감독 : 캐서린 하드윅, 주연 : 오스카 아이작(요셉), 케이샤 캐슬 휴즈(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고, 하늘의 자리를 버리고 땅으로 오셨고, 주인이 종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이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와 같이 되시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와 거주하기 위해 그 분이 오신 날이다. 하지만 세상은 이 날을 인간들의 축제로 변질시켰다. 연인들의 날로 바꾸고 선물 꾸러미로 대체했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영화를 통해 성탄의 참된 의미, 본질을 묵상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유대 땅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스토리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시공간적 간극이 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기에 당시의 문화, 분위기,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위대한 탄생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은 정확무오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대의 사회, 문화, 스토리를 이해하는 것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우선 영화는 예수의 모친이 되실 마리아에게 집중한다. 그녀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 친척 엘리자베스를 찾아가는 것,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임신의 사실을 묘사한다. 사실 당대의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오늘날과 같은 익명성의 사회도 아니다. 마리아가 살았던 곳은 작은 마을이었고 온 마을이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집성촌이다.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아는 시대다. 그러한 때에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으니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화는 이러한 마리아의 고뇌, 당시 주변 인물들의 반응, 그녀를 비난하는 것에서 인정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한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고자 했다. 자칫 목숨의 위험까지 있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의 믿음에 있다.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기도 생활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하였다. 만약 마리아가 세상의 기준, 세상의 가치관이 더 강했다면 그녀는 순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순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었다. 불가능한 일이 가능할 수 있음을 믿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역설을 믿었고, 믿음의 조상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믿음으로 믿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또한 마리아와 정혼한 남자 요셉의 혼란도 잘 보여준다.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으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으로서의 고뇌, 분노, 당혹감은 당연하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 쉽게 읽기에 그 행간에 있는 감정, 분위기, 혼란을 간과하기 쉽다. 영화는 친절하게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을 잘 보여준다.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녀를 받아들이기까지의 요셉의 마음 상태를 잘 보여준다.
요셉 또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그의 믿음, 그의 결단, 그의 다짐은 당대의 윤리를 뛰어넘는다. 요셉 역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순종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뜻과 다를 수 있음을,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다를 수 있음을 믿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다. 요셉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요셉의 신실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사람들의 이면, 고뇌, 결단을 볼 수 있어 좋다.
또 하나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게 해 준다. 우리는 그 동안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그린 성화를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보아왔다. 우리가 본 예수님은 긴 머리에 비단 옷을 입고 있는 서양의 잘 생긴 남성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심각한 이미지의 오류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태어난 동양인이셨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친 요셉과 모친 마리아도 중동인이다. 영화 위대한 탄생은 이 점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혈통은 유대인이시다. 유럽인이 아니시다. 로마인이 아니시고 유대인이시며,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시다. 영화를 통해 이러한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
아울러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내방, 헤롯의 반응, 헤롯의 군사들의 만행을 스크린 속에 펼쳐놓는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피난 가는 생생한 현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장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 느낌, 분위기, 위기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 위대한 탄생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저 몇 줄 성경의 기사로 끝나지 않고 대신 긴박하고 극적인 스토리라는 것, 그러하기에 더욱 위대한 스토리이며 우리의 구원 이야기임을 잘 보여준다.
자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의 성육신이라는 주제를 조금 생각해 보면 좋겠다. 영화를 통해 감동을 받을 뿐 아니라, 성육신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자. 서두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성육신은 경이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의 몸을 입으셨다. 자기 부정의 절정이다. 성육신, 즉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한 자기 비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인간으로 오셨는가? 왜 우리와 같아지셨는가?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본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시고 세상을 맡기셨을 때 아담과 하와는 결정적으로 시험에 빠졌다. 사탄의 유혹은 한 가지였다. 이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된다는 유혹이다. 다른 말로 상향성의 욕망이다. 이 욕망은 사람들 사이에 시기심과 질투를 낳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을 낳았다. 바벨탑의 핵심도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수많은 인간들, 왕들은 하나님이 되려고 했다.
성육신은 정확히 이것과 반대다. 인간이 신적 존재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셨다. 상향성이 하니라 하향성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인간의 본성이 상향성을 향하기 때문에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 계셨던 그 분이 낮아지심으로 하향성이 살 길임을 보여주셨다. 그리하여 그 분을 영접함으로 우리는 상향성의 본성을 극복하고 하향성을 배운다. 필립 얀시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향하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향한다.”
따라서 성육신, 즉 성탄의 본질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낮아짐이다. 자기 비움이자 자기 부정이다. 낮은 곳에 임하는 은혜다. 그래서일까? 성탄의 기쁜 소식은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졌다. 성탄을 축하한다면 우리 또한 낮은 곳으로 가야 할 것이다. 소외된 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은 전해져야 한다. 가장 높으신 그 분이 가장 낮아지셨기에 그 분을 영접하는 가장 낮은 자들이 역설적으로 이제 가장 높은 자가 된다. 그래서일까?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사람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 주셨다.”
올해의 성탄은 이 본질을 잘 이해하면 좋겠다. 영화 위대한 탄생을 통해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에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믿음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땅에 예수님의 임재를 증거하며, 우리의 본성인 높아짐을 극복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면 좋겠다. 이 기쁜 소식이 교회당 뿐 아니라 온 세상에 널리 널리 퍼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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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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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펜하이머 -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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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Oppenheimer, 2023
개봉: 2023.08.15./ 장르: 스릴러/드라마 /국가: 미국, 영국/ 등급: 15세이상관람가 / 러닝타임: 180분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주연 : 킬리언 머피(J. 로버트 오펜하이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루이스 스트라우스), 맷 데이먼(레슬리 그로브스), 에밀리 블런트(키티 오펜하이머), 플로렌스 퓨(진 태트록)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명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신들과 인간이 나뉘어 질 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속인 채 인간에게 불을 전해 주었다.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전해 준 불로 문명을 이루었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벌을 받아야 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불을 전수 받아 문명을 이룬 인간들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해 왔다. 따라서 불은 이중적이다.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했으나 파괴하기도 했다.
문명,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한다. 플라스틱의 발견은 인간의 삶을 정말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플라스틱의 남용은 결국 환경재앙을 낳는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했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를 닦거나 공사를 진행할 때 참으로 편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가공할 무기를 만들어 상대를 죽이는 데 사용한다. 다니어마이트의 가공할 힘은 끔찍한 살상을 낳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우선 오펜하이머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끈 책임자다. 오펜하이머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영국, 독일 등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교수로 있었던 1930년대 말은 물리학의 전성기였다.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는 빛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놀라운 발견을 이루었다. 소위 양자물리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다.
당시 화두였던 양자물리학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했다. 과학자들은 점점 더 마이크로 세상을 알게 되었고, 세상은 원자라는 아주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원자는 양성자와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력이라는 힘으로 서로 끌어당기는데 이것이 분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이런 과학적 발견이 한참일 때 하필 유럽은 아니 전 세계는 히틀러가 추동한 전쟁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지원 하에 그 유명한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원자 폭탄을 연구 중이었다.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급했다. 무엇보다 독일 나찌 정권보다 우선적으로 원자 폭탄을 개발해야 했다. 만약 히틀러 정권이 먼저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전 세계의 파멸, 미국의 파멸이다. 이러한 급박함 가운데 군 장성 레슬리 그로브스의 지휘 아래 원자폭탄 완성을 위한 맨하탄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그로브스는 총 책임자로 칼텍의 오펜하이머 교수를 지목했다. 오펜하이머는 막 유럽의 양자물리학을 공부하고 온 뒤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양자물리학의 전도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가담하게 된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뉴멕시코의 로스 알라모스의 목장 지대에 거대한 단지를 만든다. 즉,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물리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 행정요원들과 군인들을 끌어 모은다. 그로브스 장군이 행정적 책임자라면 오펜하이머는 개발 책임자로써 그 임무를 수행한다. 마침내 이 프로젝트는 성공하는데 독일보다 앞서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다. 하지만 원자폭탄 개발 성공과 상관없이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독일을 패망하게 되었다.
어쩌면 쓸모없게 된 원자 폭탄,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 프로젝트에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투자했고 국민들은 그 결과를 기대했다. 트루먼은 여전히 저항중인 일본에 이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자 폭탄은 투하되었고 그 가공할 위력에 일본은 즉각 항복을 선언하고 전쟁은 끝이 난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가강 놀란 사람은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이 개발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였지만 폭탄을 사용했을 때 그 엄청난 위력, 살상, 되돌릴수 없는 재앙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오히려 원자 폭탄 개발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고 이런 끔찍한 무기들의 개발 및 사용을 반대했다. 미국 정부는 오펜하이머의 이런 주장에 당황했고,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으며, 2차 대전 후 새로운 냉전의 시대가 열릴 때 소련의 스파이로 몰아갔다. 오펜하이머는 이후 정부 혹은 루이스 스트라우스와의 지난한 싸움을 해야 했고,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싸워나가야 했다. 영화는 이런 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영웅 전기가 아니다.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영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원자폭탄 개발 후에 겪는 내면적 갈등을 다룬다. 아울러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힘, 핵이라는 위험, 그것이 사용되었을 때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재앙과 환경위기에 대하여 고민하게 한다. 1986년에 일어난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건은 원폭의 끔찍한 재앙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체르노빌의 환경 파괴 및 인간 피폭의 위험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또한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더욱 끔찍한 재앙이었다. 지진과 그로 인한 해일로 인해 후쿠시마 원전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레베카 솔닛은 자신의 책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은 폐허가 될 때 까지 그 위험을 잘 모른다고. 하지만 폐허가 된 상황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깨달아야 한다고. 뉴욕을 강타한 끔찍한 9.11 테러 현장에서 레베카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비행기가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또한 그 재앙이 우리의 가족, 형제, 자매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그래서 폐허 더미에서 우리는 폭주하는 문명의 발전, 기술의 무차별 개발에 대하여 생각하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더 발전된 기술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낫는 것이기에.
오펜하이머의 각성 이후 미국은 달라졌을까? 아니다. 오히려 이어진 냉전 시대에 미국과 소련은 앞 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현재 전 세계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지구를 수십 번 사라지게 할 만한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만약 하나라도 사용이 된다면 불가항력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파생할 것이다. 오래전 칼 세이건은 탄식했다. 로켓 기술로 우주개발에 힘쓰면 좋을 텐데 오히려 핵탄두를 싫어서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려는 일에 사용하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오늘 우리는 칼 세이건보다, 오펜하이머보다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논의해야 마땅하다. 우리의 편리를 위한 기술은 지구를 점점 더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 편리를 위해 만든 자동차, 항공기 등이 내 뿜는 이산화탄소 등으로 지구의 대기는 몸살 중이다. 지나친 육식은 지구온난화를 가중시킨다. 편리한 전기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원전은 핵 폐기물 처리에 곤혹을 겪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들로 인해 바다와 땅, 동식물이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점에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전 지구적 대 전환이 필요하다. 톱다운 방식으로 각국의 리더들은 핵무기 감축 및 원전의 축소, 또한 이동수단의 대 전환을 이루어 내야 마땅하다. 지구는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고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끔찍한 재앙을 물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의 전환, 생활 방식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지구 생태를 향한 신학적 고찰도 필요하다. 생태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 우리는 이 창조물을 보호하고 보존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편리보다는 불편을, 현재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오펜하이머의 뒤늦은 후회가 우리의 것이 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서 결단하고 전환해야 할 것이다. 바로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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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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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새 영화와 옛 영화의 만남을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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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화제의 덕목
서울국제사랑영화제(2023.09.14.~09.19)가 20주년을 맞이했다. 명실공히 아시아 최초의 국제기독교영화제로 출범했지만 서울시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기독교’ 대신 보편적인 용어인‘사랑’을 선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필름포럼’을 인수하여 2개의 상영관을 상시운영할 수 있게 된 것은 장기간 운영이 가능하도록 큰 버팀목을 갖추게 된 일이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20년 동안 한국 기독교 영화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나름 기독교 영화 발전에 공헌해온 것은 분명 한국 기독교사에 기록될 만한 역사적인 일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우리 사회가 문화의 시대로 들어갔을 때 예배당 대신 영화관을 선택한 일 자체가 놀라울 따름인 까닭이다. 특히 세속적인 문화와 영화에 길들여져 신앙 따로 영화 따로 생활했던 기독교인들에게 적어도 신앙과 영화와의 관계를 일치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점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주최 측은 20주년을 맞아 매년 수여하던 ‘기독교 영화인상’을 대신해서 영화제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는 행사를 개막식 무대 위에서 진행하였다.
주최 측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최신 기독교 영화와 너무 오래돼서 구하기 힘든 옛날 기독교 영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영화전문가들이나 조직 없이 한 개인이 외국의 새로운 기독교 영화들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기독교 영화제는 개인의 수고를 덜어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기독교 영화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신앙을 돌아보게 만들며 세속적 문화에 대한 저항과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향한 강한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어떤 유명 설교가도 할 수 없는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20회를 맞아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준비한 개막작 <지저스 레볼루션>(Jesus Revolution, 2023)은 일반 극장에서는 만나볼 수 없는 새로운 기독교 영화다. 금년 봄 미국에서 개봉하여 흥행적인 면과 대중적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만, 국내 어떤 영화사도 이 영화를 수입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배급사는 한국 내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데 따른 수고나 비용을 감수하기보다는 넷플릭스라는 손쉬운 플랫폼을 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손양원 목사의 순교사를 다룬 <사랑의 원자탄>(1977)은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끝내고 관객을 맞이한 옛날 영화다. 강대진 감독의 이 역작은 한국 기독교 영화의 역사를 일으킨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요즘 세대 가운데 이 영화를 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디오 플레이어가 각 가정마다 있었던 199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랑의 원자탄>은 비디오테이프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비디오테이프는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디지털 기기에 적용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하는 일은 현시대에 옛 작품을 경험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영구 보존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히피문화 속의 미국교회를 들여다 보다
흔히 어윈 형제 감독으로 불리우는 존 어윈(Jon Erwin)의 최신작 <지저스 레볼루션>은 우리 시대에 기독교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전수해준 수작이다. 갈보리 교회를 이끌었던 척 스미스 목사의 신학적 평가를 앞세우지 않고 미국 사회와 기성세대가 외면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예수님께로 돌아왔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훈을 얻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히피 문화 속에서 진리를 잃어버린 양들과 이들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갈보리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척 스미스(켈시 그래머) 목사는 히피들에 대한 혐오 대신 그들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히피 출신의 열정적인 전도자인 로니 프리스비(조나단 로미)를 만나 자신의 집에 머무르고 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간단한 친절을 베푼 일이 계기가 되어 한 명 두 명 히피들이 모여들더니 어느새 그들은 갈보리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맨발로 다니고 목욕은 언제 했는지 까마득하고 교육과 결혼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배제한 채 마약을 하고 반전운동에 나선 이들을 당시 교회들이 수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히피들 가운데는 기성세대의 문화에 반기를 들었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영적인 가르침에는 귀를 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10대에 마약을 하며 히피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렉 로리(조엘 코트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현재 하베스트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이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백미는 ‘피레이츠 코브 해변(Pirate's Cove Beach)’에서 히피들이 바닷물에 들어가 세례(침례)를 받는 장면이다. 캘리포니아 해변에서 마약에 심취했던 히피들이 거듭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 숫자만 무려 4,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반문화주의자이며 미국사회의 골칫거리였던 히피들이 거듭나는 이 장면을 시사주간 타임지는 ‘예수 혁명(Jesus Revolution)’이란 타이틀을 붙였다.
강대진 감독의 발견
<사랑의 원자탄>을 만든 강대진 감독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신필름’에서 활동했던 다작의 연출자였다. 같은 ‘신필름’에 소속되어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장호 감독조차도 강대진 감독의 영화는 보았지만 강대진 감독을 만난 기억이 없을 만큼 그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가 한국 기독교 드라마 영화에 새로운 장을 연 <사랑의 원자탄>(1977)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뿌리>(1978)와 <석양의 10번가>(1979) 그리고 <죽으면 살리라>(1982) 등으로 이어진 기독교 영화들을 순식간에 만든 사람임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영화제가 아니라면 강대진 감독의 기독교 영화예술의 세계는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영화제 기간 중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통해 복원된 <사랑의 원자탄>을 감상할 수 있고, 또한 이 영화가 영구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잘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다른 기독교 영화들도 모두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서두를 필요가 있음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사랑의 원자탄>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손양원 목사의 순교자로서의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반 기독교 영화와는 다르게 두 가지의 특징을 담고 있음이 발견된다.
하나는 반공정신에 대한 강하고 함축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점과 다른 하나는 손양원 목사의 아들 동인이를 둘러싼 두 여학생 사이의 묘한 연애 구도가 펼쳐진 점이다. 손양원 목사의 순교를 다룬 영화 속에 반공사상이 들어 있는 것은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해 살해된 데다 손목사 또한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처형된 역사적 사실, 그리고 1970년대 반공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던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손목사의 두 아들을 살해한 안재선을 양자로 삼았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용서와 사랑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분명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반공사상이 쉽게 결합되어 1970년대 첫 기독교 영화로 탄생한 점은 당시의 시대상과도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순교영화에 등장한 멜로 드라마적 요소이다. 영화에서 손목사의 큰 아들 동인은 고등학교 시절 리더십이 뛰어났고 영실과 경혜라는 두 여학생이 그를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손목사 가정에서는 영실이를 아꼈고 이를 질투한 경혜의 보복행위는 손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대한 관객들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박서방>(1960)과 <마부>(1961)등의 한국영화사의 명작을 연출하며 축적된 연출능력과 당시 인기 있었던 멜로 드라마의 요소를 삽입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시도 가운데 벌어진 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대진 감독은 1987년 54세의 나이에 영면한 까닭에 더 이상 그의 기독교 작품에 담긴 정확한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특히 증산도 교주 강일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화평의 길>(1984)을 연출한 사실은 왜 그랬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면 여러 편의 기독교 영화들을 만들 수 없다고 보는 데 갑자기 웬 증산도 영화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이장호 감독은 당시 영화감독들의 사정이 대부분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생활고에 따른 선택이 아니겠냐는 추측을 내리고 있기는 하다.
기독교 역사를 다룬 영화들의 의미
두 영화는 모두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현재의 신앙에 각성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지저스 레볼루션>과 <사랑의 원자탄>이 현시대의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는 교훈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사회적 평판이나 주관적 시각에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맨발로 다니고 마약이나 하는 히피들을 쓸모없는 사람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사람들로 바라보는 시선은 손양원 목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애양원 사역을 바라보는 시각과 일치한다. 세상에서 버려지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 신앙에 바탕을 둔 사랑의 손길에 의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를 깨닫도록 영화는 우리를 돕고 있다.
둘째, 기독교인 혹은 교회에는 관심이 없지만 영적인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영화는 깨닫게 한다. 히피들은 세속적이며 물질만능주의 문화에 반기를 든 반문화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다. 1960년대 기독교를 떠난 히피들이 동양에서 건너온 뉴에이지 전도사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모습 또한 천국을 사모하는 영적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셋째, 현대의 교회는 영적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 곁으로 먼저 다가서야 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척 스미스 목사는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을 넘어서 해변으로 나아가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히피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애양원으로 갔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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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