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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활동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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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모 교회 성도 30명이 몽골에서 선교활동 후 돌아오는 과정에서 성도 한명이 비행기에서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 사망한 A 성도는 지난 12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이륙한 몽골항공 여객기에서 침을 흘리며 의식을 잃었다. 당시 항공기를 타고 있던 의사 2명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호전되지 못했고, 결국 비행기 착륙 후 급히 이송된 부산 사상구의 한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A성도는 비행기 탑승할 때까지만 해도 신체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해당 교회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름철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교회가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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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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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신천지 문화행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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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신천지가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청년들을 미혹하고 있다. 최근 JTBC는 보도를 통해 “신천지가 청년 포교를 위해 청년 문화공연, 동아리 박람회, 강연 등 2030 세대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행사를 기획 및 진행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지자체 예산 5천만 원 정도가 투입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행사로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 내용은 하나다. 1부 체험 - 2부 강연 - 3부 상담 - 상담 후 지속적 연락을 통해 청년들을 미혹하고 있다. 특히 상담을 가장해 행사 참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관계가 쌓이고 안정되면 신천지라고 밝히는 식의 포교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행사로 위장해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신천지 문화행사는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상담소(소장 탁지일 교수)도 “서면에서 신천지 위장 문화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있다면 주의와 경계를 부탁드린다”며 “신천지라는 이름을 숨기고 플리마켓, 심리검사, 만들기 체험, 전시 등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신천지 활동에 조심해 달라”는 당부 문자를 교계에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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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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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우 교수]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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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성경본문은 아마도 창세기 2장이나 에베소서 5장이다. 요즘처럼 이혼과 비혼이 비정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 시대에는 교회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고 에베소서 5장은 가부장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에베소서 외에 부부 관계를 묘사하는 특별한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7장 3-4절이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부부관계를 이 성경구절에 호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위 본문은 분명 그리스도인 부부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가르침이다. 이 말씀에서 “의무”는 “빚”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은 “빚을 갚으라”는 의미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실상 서로에게 빚진 자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에게 진 빚을 평생 갚으며 살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부부의 채무관계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끝난다. 과연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빚”을 졌다는 것일까? 빚에 해당하는 내용을 4절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몸”이다. 그렇다면 부부가 서로에게 “몸”을 빚졌다는 말인가? 바울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 왜냐하면 부부는 둘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때문이다.(창 2:24)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즉 부부관계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한 몸”을 이루는 관계로 본다. 그것은 부부관계의 “한 몸”을 단순히 정신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 따르면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관계의 “한 몸”이란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하나가 아니라, 서로의 육체까지도 하나라는 의미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와 남편이 각자 자기 몸을 결코 자신만의 것인 양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여기서 바울은 확실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권리의 동등성보다는 의무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가르치는 부부관계란 결코 권리의 상호성이 아닌, 의무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부부관계에서 서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면 다툼과 불화는 불가피하고 이혼의 위기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의무를 고려하면 일어날 갈등도 다툼도 사라진다. 그래서 바울은 부부관계란 의무의 상호성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강조한다. 부부가 되기 전에는 각자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부부가 되면 둘이 한 몸, 즉 하나의 새로운 공동 인격체로 거듭난다.
따라서 남편의 잘못은 곧 아내의 잘못이고 아내의 실수도 남편의 실수다. 함께 권리를 나누고 의무와 책임 역시 함께 져야 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결코 각기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부부는 한 몸, 즉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따라서 남편이 자신만의 권리를 아내에게 주장한다거나 반대로 아내가 자신만의 남편에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아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아내 역시 비록 남편이 부족할지라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절대 복종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친 남편과 아내의 관계다. 창세기와 에베소서,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친 부부관계는 어떤 상충도 모순도 없다.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한 몸”으로 서로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채무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외적인 극단의 경우 외에는 이혼할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부부 사이도 성추행이 성립 가능하다’는 해괴망측한 세상 법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 불가능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인 “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를 영적인 의미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거룩’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만 해당하는 요구가 아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육체적인 거룩을 매우 강조하다. 간음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등의 명령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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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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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특강]요한 아 라스코(1499-1560)와 교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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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의 역사에서 꼭 다루어야 할 인물이 있다. 폴란드 출생의 종교개혁가 요한 아 라스코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아 라스코는 약 20년 동안 북부 유럽의 제네바로 불린 독일의 엠던과 영국 런던, 프랑크푸르트, 마지막에는 폴란드에서 목사로서 활동했다. 특별히 그가 작성한 교회법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 라스코는 1499년 폴란드 귀족 집안에서 출생했다. 대주교인 삼촌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등에서 교육을 받았고 1521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524년 스위스 바젤에서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여러 종교개혁가를 만나면서 회심하고,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찾아 고향 폴란드를 떠나게 된다(1538년).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독일 북서 지방의 도시 엠덴에서 첫 사역(1540-1550)을 했다. 둘째 사역(1550-1553)은 영국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런던은 유럽 대륙에 일어난 종교박해로 인해 피난민들이 많이 모였다. 영국 국왕이 피난민 교회설립을 허락하고 장소도 제공했다. 바로 이 피난민 교회들(네덜란드어, 불어 등의 교회)의 감독으로 아 라스코가 봉사하게 되었다. 여기서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행한다(출판은 1555년).
아 라스코가 작성하여 시행한 교회법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4대 공적 사역인, 설교, 성례 시행, 구제, 권징을 공적으로 신실하게 시행했다.
이를 위해 로마천주교회의 교직제도와 달리 목사와 장로와 집사, 감독 직분을 제시했다. 직분을 교회에 항존(恒存)하는 기능을 따라서 구분하고, 직분자는 고유한 의무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했다. 매달 첫 월요일에 모이는 모든 직분자 모임인 제직회를 신설했다.
둘째, 교인이 직분자 선출과 권징(특히 출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아 라스코의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선출에서 교인의 참여가 가장 극대화된 교회였다. 교회 앞에 선출 광고를 하고 직분의 의무와 자격에 대해 설교를 들은 후 교인들은 한 주간 동안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었고, 선출 당일에 치리회가 그 후보 중에서 2배수를 선정하면 교인들이 그들 중에서 직접 선출할 뿐 아니라, 심지어 후보가 아닌 사람도 선출할 수 있었다. 또 어떤 교인을 출교할 시에는 반드시 회중의 동의를 구하도록 했다.
셋째, 정부와 상관없는 장로들의 회인 독자적인 치리회를 도입해서 권징이 나타나도록 했다. 성도의 삶을 살피고 위로와 격려, 권면하는 일을 했다. 권징은 사적으로 공적으로 권면의 절차를 거치게 했고, 출교와 해벌 시 공적 예식문을 사용했다. 이는 교리의 순수성과 성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치리회 회원은 3개월마다 형제로서 서로 권면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다. 또 교회를 시찰하는 활동도 했다. 매주 월요일 목사들의 모임에서 목사 후보생 시험과 특정 주제로 세미나도 가졌다. 이 모임은 나중에 노회로 발전한다.
넷째, 특히 교회의 공적 사역인 말씀을 강조했다. 설교 외에 교리문답을 작성하여 가르칠 뿐 아니라, 특히 매주 하루(화요일 혹은 목요일) 온 교인이 회집하여 소위 ‘예언’이라 불리는 설교 토론을 하였다. 지난주일 설교를 두고 질의와 응답,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이는 교리에서 오해를 바로잡고 극단주의자를 물리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다섯째, 공적 예식을 강조하여 일치와 교육의 효과를 이루었다. 혼인은 주일예배 일부로서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었다. 장례는 시신을 교회당으로 옮긴 후 공적 예식을 거행했다. 죽음에 대해 교훈하고 권면했고, 축도와 헌금으로 마쳤다. 환자 심방도 예식문을 사용하여 위로할 뿐 아니라 교훈을 주는 계기로 삼았다.
여섯째, 성경적인 성찬을 시행했다. 당시 무릎 꿇고 받는 성찬에서 식탁으로 나와 둘러앉아서 함께 받는 성찬의 방식으로 개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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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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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제발 좀 쉬었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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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기원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창조론을 믿는다. 믿음의 시작은 창조론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야만 성경의 모든 것이 해석이 된다. 우리가 믿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따라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솜씨다. 따라서 천지만물과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쉬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쉬셨다. 능력이 부족하시거나 피곤하시거나 게을러서 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쉼의 시간이 가장 필요한 인간을 위해 먼저 쉬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루는 반드시 쉬라고 법을 제정하시고 명령하시고 자연의 법칙과 질서까지도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니까 피조물인 사람이 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고, 자연의 질서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법을 지키고, 명령에 순종하고, 질서를 따를 때 가장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피조물인 일반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법칙과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두가 다 생사를 걸고 일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좀 편히 살만하면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을 병원비로 다 사용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은 제발 죽음의 질병과 마지막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좀 쉬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곳에 쉼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낮에 일하면 밥에는 잠을 자야 한다. 1시간을 공부하면 10분은 쉬어야 한다. 음악에서의 쉼표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에게도 하프타임이 있다. 직장인들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휴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쉬는 것 즉 호흡하는 것이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다. “숨을 쉰다.”에서 ‘숨’과 ‘쉰다’는 것을 합하여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면 ‘쉼’이다. 다시 말하면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에도 들숨이 날숨이 있다. 살기 위해 호흡하는 중간 중간에도 쉬는 것이다. 해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려면 호흡을 들이키고 참아야 한다. 여기에서 참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호흡이 필요할 때 물 밖으로 고개를 내 밀고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숨을 쉬는 쉼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다. 따라서 쉬지 않는 것은 탐욕이고 교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쉬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설교를 했을까? 그런데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목회자로서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설교를 하는 목회자 자신은 전혀 쉬지 못하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보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역과 스트레스에 지쳐 번 아웃되는 목회자들, 원치 않는 문제들로 인해 목회의 현장을 떠나는 목회자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너무나 일상적인 일들로 말미암아 강제로 목회의 현장에서 하차하는 목회자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사라지는 목회자들을 본다. 간절하게 소망한다.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무거운 짐을 제발 좀 내려놓고 살기 위해서 숨을 쉬자. 쉼의 시간을 가지자. 왜 사명 대신에 짐을 지려고 하는가. 짐은 결과지상이요 사명은 과정지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의 과정에서 감당하는 받은 달란트 만큼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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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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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6.25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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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남한지역의 북한군은 독안의 쥐가 되었다. 퇴각하는 인민군은 오합지졸이 되었고, 이때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손양원 목사도 이때 순교자가 된다. 인민군들은 7월 27일 여수로 들어왔고, 손양원 목사는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들에게 잡혔다.그날 설교할 설교원고까지 썼으나 그날 설교할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이라는 설교는 선포하지 못한 설교문으로 남아있다. 두 주간 동안 고초를 당하신 그는 9월 28일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는 미평의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들이 고립되고 보급로가 차단되자 양민을 학살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면 공격을 통한 총반격에 비해 전투기간을 3분지1로 단축하고, 아군 14만 명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9월 27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것이다. 9월 28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5천분의 1의 성공률을 성취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군 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세기의 도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우연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55년간의 군생활 중에서 6.25동란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술회했다.
여섯째, 흥남 탈출은 기적이었고 기적의 항해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1일에는 동부에서, 10월 9일에는 서부에서 38선을 넘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11월 21일에는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정리하면, 동해안으로는 청진(淸津)까지, 중부 전선에서는 혜산진(惠山鎭)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고, 서부에서는 선천(宣川)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10월 19일 중공군이 개입하여 10월 25일 총공세가 개시되자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함경도 개마고원 부근의 장전호에서 고립된 유엔군은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후퇴한다.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주민들은 피난을 서둘러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찬 흥남부두’에는 짐 보따리와 가족,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인산인해였다. 이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 흥남철수 작전인데, 이 작전 지휘관이 제10군단장 알먼드(Edward Almond) 소장이었다. 1950년 12월 11-24일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약10만5천 명의 군병력과 피난민 10만 명, 전투장비와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었다.
흥남에서 마지막으로 북한 피난민을 싣고 나온 배가 미국 국적의 길이 196m, 폭 20m에 불과한 7천 6백톤급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였습니다. 미군 대령이 이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에게 이 화물선에 태울 수 있는 여유 정원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12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배에 1만4천 명이 탑승했다. 아기와 어린아이가 4천 명이었고 부상자는 17명이었다. 12월 22일 밤 9시 30분부터 승선하기 시작하여 23일 낮 11시 10분에 승선이 완료되어 승선시간이 13시간 40분이었다. 이보다 더한 콩나물시루는 없었을 것이다. 라루 선장은 이 광경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같았다”라고 썼다. 23일 오후 흥남부두를 출발했는데, 중공군 보병부대가 6km앞까지 진출했을 때였다. 적군이 설치한 4천 개의 기뢰를 피해 영하 20-4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폭설을 견디며 24일 낮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미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다시 거제도로 향했다. 기적의 항해였다. 의사도 약도 없었고 음식도 없어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추위에 굶주리고 화장실조차 이용하기 어려웠으나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3일간 800km를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항해 중 다섯 아이가 태어났다. 피난민들이 완전히 하선한 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이 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신자들이 탐승했고 교회 단위로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사례가 후일 ‘순장로교회’를 형성한 함경남도 함주 덕천교회 이계실(李桂實, 1889-1971) 목사를 주축으로 5개 처 교회 성도 130여 명이었다. 이들은 거제도에서 같이 생활하던 중 서울에 안착하였고 순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함흥을 탈출한 이들은 공산주의의 핍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해상탈출은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탈출이자 지고한 인도주의 정신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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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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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교회외관의 새로운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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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의 외관은 불신자가 교회를 선택하는 일차적 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특히 아파트 지역의 경우 그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외관 형태는 너무 획일화되어 있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가령 예를 들면 교회의 외관을 특징 짖는 건축의 형태요소가 몇 가지 요소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뾰족탑, 경사지붕, 스테인그래스, 창문, 종탑의 획일적 모양 붉은 벽돌의 외장 등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건축양식도 중세시대적 양식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현대사회가 급속히 변화되고 미래사회를 전자시대 사이버시대, 유비쿼터스시대를 지칭하는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시대와 더불어 변화되는 모습으로서의 형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소위 과거지향적 형태언어는 이 시대성과는 대치되는 것이며 교회가 이 시대를 선도하고 변화시키고 치유하고 미래지향적인 시대적 사명을 건축의 한정된 언어는 대변하지 못 하는 것이다. 어떤교회는 종탑이 오히려 본당보다 더 크다거나 4층 규모이나 7층에 해당되는 과대한 용적으로 건축되는 등의 왜곡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외관의 상징적 언어가 크기나 힘의 현현에서 비롯된 상징체계이다보니 인간적인 스케일에서 벗어나 있다. 과대한 형태와 드높은 종탑은 오히려 도시환경에 장애로 작용되며 주변과 조화롭지 못한 도시 경관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상은 성경적이지도 못하다.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당연히 교회의 형태는 예수님의 사랑이 발현되는 형태언어라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이 담지되어있는 교회형태와 외관은 인간적인 척도에서 비롯된 단아하고 소박한 형태일 것이다. 위에서지적한 교회의 외관은 권위지상주의적인 형태이다. 예수님의가르치심과 반대되는 형태이다. 또한 교회는 미래지향적이며 세속을 초월한 거룩성을 지향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견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회가 이 시대의 중심에서 다양한 영역과의 경계에서 열려있고 개방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가치관을 구조화하는 형태의 표현이 되야 한다. 건축의 외장소재도 벽돌이나 돌과같이 획일적이고 진부한 소재의 반복적 나열이 아니라 첨단적이고 하이테크하면서도 다양한 소재를 조화롭게 적용하므로써 교회가 다른영역의 건축물보다도 더 앞서가는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중세교회들이 압도적 스케일로 성스러움을 표현했다면 현대는 주변이웃과 세상고 유기적으로 연합되어지는 소통과 공유의 교회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성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그것은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것이 거룩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알수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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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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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 칼럼]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 교회의 미래를 세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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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작은 교회 목회자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고등부가 한 명도 없어요. 예배당에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것은 결코 한 교회의 문제가 아니다. 주일학교 폐쇄, 청년층 이탈, 가정에서의 신앙 전수 약화…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길은 있다. 몇 해 전, 서울의 한 교회는 ‘토요 드림스쿨’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 성경 공부와 음악·미술·코딩 같은 재능 수업을 함께 진행했더니, 지역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오지 않던 가정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몇몇 부모는 아이를 따라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 부산의 한 중형 교회는 ‘세대 통합 예배’를 도입했다. 어른 예배 속에 어린이와 청소년이 함께 찬양하고, 설교 중에 세대별 적용 시간을 두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신앙을 보고 배우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세대 교육은 이렇게 ‘함께하는 사명’이다. 성경은 신앙 교육의 1차 책임을 가정에 둔다(신 6:6-9). 그러나 교회는 가정이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공동체적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성경적 세계관 교육으로 아이들이 세상 속에서도 말씀으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둘째, 진로와 소명 교육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게 하고, 삶의 자리에서 사명을 실천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문화 감수성 교육이다. 미디어와 SNS의 홍수 속에서 분별력을 키우고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교육해야 한다. 이를 위한 실천 방안도 어렵지 않다. 먼저, 하루 10분 가정예배 회복과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하는 세대 통합 사역이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와 다음세대를 연결하는 멘토링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학교와 지역 기관과 손잡는 지역사회 연계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세대를 잃는 것은 곧 교회의 미래를 잃는 것이다. “한 아이를 세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 온 교회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심는 믿음의 씨앗이 내일 교회의 숲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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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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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자극보다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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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음세대들의 삶을 보면 예전보다 많이 충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서 학교폭력에 연루되기도 하고 각종 사건 사고의 가해자, 피해자로 엮이는 사건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자녀들을 감정적 존재가 아니라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 키울 수 있을까요? 이것을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자극과 반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자극들을 받게 되지요. 우리는 보통 자극이라는 말을 들으면, ‘전기 자극’, ‘열 받게 함’, ‘화남’ 그런 것들을 떠올립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자극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하루’라고 하는 자극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시나요? 기지개를 펴면서 “아이고, 죽겠다!” 하면서 반응하지는 않는지요. 아침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핸드폰을 툭 치면서 “일어나기 싫다, 아 짜증나!” 하면서 일어나지는 않는지요. 이처럼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가 자극과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같이 주시는 하루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많은 자극들에 대한 우리의 매순간의 반응이 우리의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이 우리의 인격을 만들고, 그 인격이 우리의 운명을 만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찾아오는 여러 가지 말과 행동, 또 압박들에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갈까요? 본성대로 할 수도 있고, 기질대로 할 수도 있고, 성질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혜롭게 조절해야 되겠지요.
자극과 반응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빅터 프랭클’이라고 하는 유태인이며, 오스트리아의 의사였던 분이 해 준 것인데요. 이분은 오직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그리고 폴란드에 있던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주 비인간적인 삶을 살게 되지요. 이러한 삶은 분명 그가 원했던 자극이 아니었어요. 그는 최고 엘리트의 자리에서 하루 아침에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곳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사람들이 똑같은 자극에도 완전히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주어졌던 건 하루에 빵 하나와 물 한 컵뿐이었어요. 그는 거기서 매일 동일하게 주어지는 빵 하나와 물 한 컵의 자극을 어떻게 사용하며 반응하는가가 그 사람의 하루를 만들고, 또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배가 고프니까 바로 먹고 마셔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조금씩 천천히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것을 금방 먹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와중에도 자기의 빵과 물을 남겨서 자기 옆에서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돕기도 하였다는 것이지요. 비록 빵 하나, 물 한 잔이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반응이 이렇게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그때 한 가지를 결정합니다. “나는 이런 처참한 자극에도 비인간성을 선택하지 않겠다. 나는 인간다움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그 얼마 안 되는 한 컵의 물을 나눠요. 나눠서 조금은 마시고, 또 조금은 세수도 하고, 조금은 면도도 하였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누가 봐도 달라 보이는 거예요. 이 사람은 누가 봐도 이분은 특별해 보이고, 이 사람은 의지할 수 있어 보이고, 자기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이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그 깨달음 가운데 아주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라.” 자극이 찾아왔을 때 곧바로 반응하지 말고, 그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라는 아주 유며안 말입니다. 이 ‘공간’이라는 것이 뭘 의미할까요? 이것이 우리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삶에 찾아오는 똑같은 자극에 내가 과연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반응할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묵상해 내고 이 묵상을 통해 더 나은 사고의 과정을 통해 더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우리는 그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을 때 우리의 반응은 이전과는 전혀 새롭게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자극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반응을 하나님을 향한 선한 믿음의 반응으로 바꿔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인생이 아무리 새로워지려고 해도 우리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찾아오는 부정적인 자극에 스스로 옳게 반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임재하실 때 비로소 우리 삶에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하신 긍휼과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변함없는 사랑이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자극에 대해 긍정적이고 은혜로 반응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하심을 구하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자극보다 반응입니다. 현실보다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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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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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장애인은 도움만을 받는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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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하여 여기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들은 타인들로부터 도움만을 받으며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장애인은 비장애인들에 비해 조금 더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건 맞다. 그러나 오롯이 도움만을 받으며 살아가지 않는다. 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들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 이 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보면 인식이 전환될 것이다.
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첫 번째는 지하철 역사마다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각 지하철 역사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것은 장애인들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얻어낸 결과물이다. 지금 그 엘리베이터는 누가 이용하고 있는가? 장애인들의 힘겨운 투쟁으로 얻어냈기에 장애인들만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장애인들 보다 비장애인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오히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려고 줄을 서고 있다 보면 기분 좋지 못한 소리를 듣거나, 끼어드는 사람들로 인하여 다음 차례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촌극을 자주 경험한다.
두 번째는 장애인활동지원제도이다. ‘장애인활동지원제도’는 말 그대로 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목적은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그 가족의 부담을 줄임으로써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제도는 장애인의 일상생활과 사회활동 참여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이다. 지원 서비스 항목으로는 개인위생, 식사보조, 이동지원, 가사활동, 사회활동 참여가 있다. 이 제도는 단순히 장애인을 도와주는 개념을 넘어,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제도로 많은 장애인들이 이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본인도 올 6월부터 이 제도를 이용하여 서비스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가 과연 장애인들만 도움을 받는 제도일까? 아니다. 이 제도는 비장애인들에게도 도움을 준다.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바로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사회통합을 이루도록 지원을 해줄 일자리가 발생되는 도움을 준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제도로 인하여 일자리를 얻고 그에 따른 급여를 얻는다. 물론 그 급여를 활동지원제도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활동지원사에게 직접 지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애인들의 자립생활과 사회통합을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가 누군가에게는 일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여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두 가지 예시는 모두 장애인들이 많은 이들에게 이동의 편리함과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보였다. 이 두 예시는 어디까지나 큰 예시들이다. 그러나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장애인이 교회에 도움을 준 일은 없을까? 왜 없겠는가, 있다. 휠체어를 타는 성도로 인하여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교회들이 있다. 물론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교회를 칭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교회에 휠체어를 타거나, 거동에 불편한 성도가 없었다면 엘리베이터 설치를 할 생각을 했을까?
이처럼 장애인이라고 해서 도움만 받고 살아가지 않는다. 크든 작든, 눈에 띄든 띄지 않는 장애인 개개인의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을 도움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많다. 필요한 것은 ‘장애인들은 도움만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라는 편견을 깨고,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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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