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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3년 된 부산진교회와 117년 전에 개척한 대연교회가 공동예배를 드리다
    부산 교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 하는 부산진교회(담임 신충우 목사)는 133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부산진교회가 117년 전 1907년 11월 13일 부산 남구 대연교회를 개척했는데, 이 두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린 바 있다. 3년 전 2022년 11월 13일(주일) 대연교회에서 동구 좌천동 부산진교회까지 무려 4키로 걸어서 1차로 연합예배를, 2회는 2023년 11월 5일(주일) 대연교회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서 남녀노소 영유아까지 유모차에 태워서 1시간 30분동안 걸어서 연합 예배를 드렸고. 3회는 지난 2024년 11월 10일(주일) 부산진교회 교우들이 대연교회를 심방 형식으로 연합 합동 예배를 은혜롭게 드려 양 교회 교우들이 서로 감격과 감동으로 믿음의 선조들을 기리며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 시간 걸어 교회를 갔던 믿음의 선배들을 따라 행해졌던 기념행사는 교우들 모두에게 예배의 간절함과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기회였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4절) 지난 11월 17일 대연교회에서 예장통합 부산노회장로회 정기총회가 개최됐다. 이날 설교를 위해 강단에 선 대연교회 담임 전승만 목사는 연합예배를 드렸던 영상을 보여주며 ‘사도 바울의 손수건’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대연교회 교우 중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낸 세 아이를 둔 어머니의 사연을 전했다. 어머니가 암에 걸려 세 아이들을 두고 하늘 나라로 먼저 가게 되었는데, 교회가 이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고 오빠, 삼촌이 되어 대연교회 교우들이 서로 맡아 양육하였다. 어머니의 장례 예배에서 여기 저기 애곡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마치 바울의 눈물의 젖은 손수건 마냥 함께 울어야만 했던 하늘의 기적과 같은 소식을 전함으로서 감동 받아 장내가 숙연하게 되었다.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터로 끌려간 북한 병사들의 어머니들이 애통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귓전에 울려야만 한 이웃 나라 전쟁의 아픔을 들려주어 장로들 모두가 감격스런 은혜의 도가니로 가슴에 눈물의 손수건을 닦아야 했다. 필자가 여든이 넘도록 무수히 설교를 들어 왔지만 이날처럼 감격과 감동이 넘치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 같은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부산진교회 신충우목사와 대연교회 전승만 목사는 50대 초반 부산노회를 이끌 훌륭한 목회자로 전망이 밝은 차세대 지도자로 우뚝 서기에 충분한 목회자들임에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 대연교회에서 고 배준기 장로 노회장을 비롯하여 김봉희 장로 원로(세계국제와이즈멘클럽 총재 역임)과 정경식 원로장로(부산노회원로장로회 회장 역임)과 박희두 원로장로(부산YMCA 이사장 역임)과 김병표 장로(부산노회장로회 회장 역임)과 제71회기 부산노회장로회 회장으로 취임한 박남을 장로(부산지역기독실업인연합회 회장 역임) 등 유능한 인재가 대연교회에서 나왔다. 그동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가슴 아픈 사연도 두 교회가 경험하는 가운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전승만 목사는 말하고 있다. 대연교회는 특히 못골 동네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로서 교회 벽을 허물었다. 좋은 소문이 동네 사방에 퍼져 매 주일마다 교우들이 등록하는 미래지향적이고 부흥하는 교회로 우뚝 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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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24-11-29
  • [임창호 목사] 엘리트 탈북청년들을 위한 선교전략이 시급하다
    통일부가 보도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6월 현재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34,183 명이다. 2023년 한 해 동안 196명,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105명이 추가로 입국되었다. 코로나 사태 직전이던 2019년에 1,047 명이던 것이, 코로나가 발생하자 조중국경이 폐쇄되면서 2020년에 229명으로 급격하게 줄더니, 2021년 63명, 2022년 67명까지 감소하다가 코로나사태가 진정되면서 2023년도에 196명으로 늘어났다. 전년도에 대비 약 3배 가깝게 증가된 수치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조중 국경지역은 여전히 폐쇄되어 있고, 중국 내 탈북자들 입지는 악화일로에 있다. 최첨단 IT기술을 동원한 중국공안의 탈북자 색출과 검거는 고도화 되었다. 붙잡힌 탈북자들은 현장에서 즉시 구속되고 대부분 강제북송된다. 중국정부는 한국정부의 탈북자 강제북송 금지 요청이나, 유엔인권위의 경고 따위에는 눈 하나 꿈쩍도 안한다. 백약이 무효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제3국으로 탈출하는 이전의 루트는 사실상 막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탈북행렬은 무슨 영문인가?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2023년 196명 가운데 90여명이 북한내 엘리트 간부와 그 자녀들, 장마당 신흥 돈주들, 북한정권 보위부 고급 간부들, 외교관들, 북한인민군 장성급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배를 구입하여 서해와 동해를 통해 탈북하거나, 해외공관에서 제3국으로 조용히 잠입하여 탈출하거나, 러시아 출장 중 모스크바 유엔사무소로 직접 진입하여 망명 입국하는 경우도 있다. 전에 없었던 북한 내 사회지도급 엘리트 인사들이 새로운 루트를 통해 대거 탈북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만난 30대 초반 탈북청년도 평양 명문대학 출신에 부모가 둘 다 북한 고위직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북한 노동당 내 고급정보를 다루는 연구원으로 일하다 한국의 발전상과 선진된 모습을 확인하고 자유를 찾아 용기를 내어 탈북한 케이스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북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다양한 외부루트를 통해 이미 한국이 북한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선진화된 나라라는 정보를 익히 알고 있으며, 기회만 닿으면 북한을 탈출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전에 없던 북한의 엘리트 청년 탈북민들이 한국에 밀려올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거나, 삶의 고통을 피하여 오는 자들이 아니다. 자유와 미래를 향한 또 다른 비전을 품은 새로운 세대들이다. 한국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북한선교를 주사역의 장으로 갖고 있는 선교단체들은, 증가하고 있는 북한 젊은 엘리트 탈북민들을 효과 있게 선교하여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게 할 수 있는 고도화 전략을 세워야만 한다. 이들은 북한 내부 엘리트층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중요한 자원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전공과 관심분야를 살펴 장려하고 계발시켜 미래 북한 복음화의 일꾼들로 쓰임받을 수 있게 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이들도 품어야 한다. 시급하고 진지하게 구체적인 전략을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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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1-29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공산주의’ 라는 이름의 유령
    20세기 최대의 사건 한 가지를 들라면 단연코 ‘공산주의의 대두와 소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로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쇠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지만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 렌닌주의를 따르는 공산정권을 탄생 시킨 후 지난 100년 동안 공산주의는 창궐하여 한때는 세계의 3분지1을 점령하여 세상을 뒤흔들었다. 전제군주국이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한 이후 렌닌은 주변 국가들과 공산 동맹을 맺고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창설했는데, 우즈베케스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15개국이 소련이란 이름하에 편입된다. 1924년 렌닌이 사망한 이후 집권한 스탈린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일인독제 체제를 강화하였고, 인근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슬라바키아, 폴란드, 항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도 공산화된다. 이런 공산화의 물결 속에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천두슈(陳獨秀), 리다자오(李大釗) 등은 1921년 공산당을 창당하고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1949년 중공(中共)이라고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소련이 국제공산당조직인 코민테른을 통해 조직적으로 중국에 공신혁명을 수출한 결과였다. 러시아와 중국이 공산화되자,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북한, 에티오피아, 쿠바 등이 잇따라 공산화된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과 중남미로 전파된 것이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게릴라 활동 끝에 1959년 1월 미주대륙 최초로 공산정권이 수립된다. 이렇게 공산주의는 전 대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공산주의의 쇠퇴의 시작이 된다. 이보다 앞서 1989년 1월 헝가리 공산당은 복수정당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공산당의 권력 독점 조항을 폐기하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해 11월 9일에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데, 이는 동유럽과 중유럽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시작이 되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서기장이 축출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 시작된 체코슬라바키아의 민주화 혁명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2월 22일에는 38년간 유지되었던 루마니아의 1인 독제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의해 무너졌고, 그날 체포된 차우셰스쿠 대통령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12월 25일 성탄절에 처형되었다.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년 남짓 후인 1991년 12월 26일, 7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소련연방은 붕괴되었다. 그 전날인 12월 25일 소련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다. 공산주의 종주국이 붕괴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대부분의 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는 사라졌고, 현재는 쿠바, 베트남, 라오스, 중국, 북한 등 5개 국가만이 헌법에 명문화하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2009년 헌법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으나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삼대 세습 일인독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으므로 유사(類似)마르크스렌닌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무엇을 남겼는가? 공(共) 산(産)의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를 이루었는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었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우리 시대 역사가 보여주었다.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량학살, 숙청, 처형, 비밀경찰, 공포정치, 가난과 굶주림뿐이었다. 폴란드 출신의 철학자 레제크 콜라콥스키는, “사회주의는 공산당 1당 독재로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은 물론 인간의 마음과 역사, 인간관계까지 국유화한 것으로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악마”라고 지적했다. 볼셰비키혁명 80주년을 앞둔 1997년 11월, 스테펀 쿠루투아 교수 등 프랑스학자 11명이 공동 저술한 <공산주의의 흑서>라는 책에서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참혹한 살육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약 1억 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소련 2천만, 중국 6천5백만, 베트남 1백만, 캄보디아 2백만, 동유럽 1백만, 남미 15만, 아프리카 1백70만, 아프카니스탄 1백50만, 북한 3백만 이상, 국제공산주의기구 및 비집권 공산당에 의한 희생자 수만 명으로 산정했다. 공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스승인 포이엘바하는 “인간은 그가 먹는 것 바로 그것이다. Der Mensch ist, was er ißt.”라고 말했는데, 인간은 물질이라는 유물론적 인간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미국 카터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레젠스키는, 1988년 8월 공산주의의 종말에 대한 ‘대실패’(The Great Failure: the Birth and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ury)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공산주의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광기’라고 썼다. 그런데 그 철 지난 광기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철부지 여대생이 “공산주의가 좋아요”라고 외치고 있고, 어설픈 지식인은 그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변호하고 있다. 문화 막시즘 또한 우리 곁에 버젓이 둥지를 틀고 있다. 역사가 외면한 공산주의 유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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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11-2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와 함께 연합예배의 장으로
    9.8 해운대 성령대집회가 은혜중에 잘 끝났습니다. 저희 교회는 이날 다음세대들까지 모두 함께 이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받고 다음세대들이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자리, 연합예배의 장에는 다음세대들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제까지 우리 부산에서 열렸던 대형 집회들이 있습니다. 2007년도에 ‘부산대부흥 Awakening2007’이라는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무려 20만 명이 모였어요. 이 행사를 하고 그해 10월에 빌리그래함의 아들인 플랭크린 그래함이 부산에 옵니다. 그래서 BFGF라고 하는 부산 그래함 페스티벌에 무려 33만 명이 모였습니다. 부산 아시아드 운동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서 부산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10년 전, 2014년도에 해운대 백사장에서 ‘부산 525 회개의 날’로 모였습니다. 그날 10만 명이 모였고,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참석하신 모든 목사님들, 장로님들, 성도님들이 함께 그 비를 4시간 동안 그대로 맞으면서 함께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2015년도에 전수조사를 합니다. 과연 부산의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는가? 조사했더니 1,829개 교회가 있고 교인 수는 40만 5천 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가 됐습니다. 그 숫자는 부산 인구의 11%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거룩한 운동을 벌이면서 그전에 약 8~9%였던 부산의 기독교 인구는 11%까지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면서 우리 부산의 성도들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 대형 집회가 한 번의 집회가 아니라 그 집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는구나! 부산에 있는 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마음을 모으는 일들이 이처럼 중요하구나! 게다가 이 일이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 이 일을 바라보는 사람들, 교회 밖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일이구나.’ 또한 이러한 성도들의 경험은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믿는 일을 정말 악세사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여기고 그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저렇게 진심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구나!’라는 걸 직접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해운대는 본래 역사적으로 신앙이 태동하던 자리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시대 때부터 순사들의 눈을 피해 모여서 기도하던 장소입니다. 그리고 6.25 동란 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기도할 자리가 없었습니다. 교회마다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나온 곳이 해운대였습니다. 해운대 백사장에 모여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이 나라와 이 땅을 살려주세요. 잃어버린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세요.” 기도하던 자리가 바로 해운대입니다. 지난 9월 8일 우리가 그 기도의 자리에서 다시 10만 명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해운대에 이날 우리가 모인 이유는 이것이 연합 기도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산에 있는 1,800개 교회가 참여했는데 타지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대구에서, 구미에서, 진주에서, 포항에서, 서울에서, 제주에서 모였습니다. 우리가 대형 운동장에서 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모이면 많이 모여도 우리만의 잔치가 됩니다. 밖에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해운대 백사장은 주말에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날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의 예배를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끼리가 아니라 믿지 않는 모든 사람 앞에서 마음껏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이런 기회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이 바다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이 하늘의 주인이 하나님이고, 이 부산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다!” 라고 선포했습니다. 특히 이 자리에 참석한 다음세대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을 발견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우리 가정이 믿는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무려 12만명의 사람들이 해운대 백사장에서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차츰 아이들은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자리가 있으면 우리의 다음세대와 함께 나오십시오. 아이들에게 미래를 보여줍시다. 하나님 나라를 보여줍시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믿음을 이어갈 내일의 주인공들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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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11-08
  • [다음세대칼럼] 청소년들에게 하는 성교육, 스킨쉽 기준 어디까지
    크리스찬 연애와 성에대한 상담과 강의를 많이 하면서 질문 1위가 ‘스킵쉽 어디까지’이다. 대략 10년전 까지 1위 였던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를 어떻게 알 수 있나요?’를 넘어선 1위 질문 ‘스킨쉽 기준 어디까지’를 정리했다. 죠이스 허기트(Joyce Huggett)는 3가지 질문으로 점검하라고 한다. 이것은 안전한가? 이것은 책임 있는 사랑인가? 이것은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가? ① 성교(Genital intercourse), ② 오랄 섹스(Oral sex), ③ 상호 수음(Mutual masturbation), ④ 심한 페팅(Heavy petting), ⑤ 페팅(Petting), ⑥ 오랜 입맞춤(Prolonged kissing)은 금지하였다. 스킨쉽 허용 법위는 ⑦ 가벼운 입맞춤(Kissing), ⑧ 꼭 껴안기(Cuddling), ⑨ 포옹(Embracing), ⑩ 손잡기(Holding hands)이다. 하지만 한국적인 문화와 30년 넘게 상담한 결과 제가 권하는 기준은 ‘손잡기’,‘가벼운 팔장끼기’정도로만 하고 나머지 모든 스킨쉽은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포옹’, ‘키스’, ‘깊은 팔장끼기’는 회색 영역이다. 하지만 평소에 이성 부모조차 ‘허그’를 잘하지 않으며 ‘키스’도 하지 않는 한국문화에서는 이 회색 스킨쉽은 밀폐된 공간에서는 특히 성적인 흥분을 느끼게 하고 자극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금지된 성관계까지 가게 하기 금지이다. 이 2가지 스킨쉽만이 안전한 이유는 ① 헤어져도 상대방에게 미안하지 않음, ② 공공 장소에서도 (덕을 끼는 면)가능, ③ 친밀성 유지에는 충분, ④ 나중에 후회(서로) 될 일이 없음, ⑤ 다른 나의 배우자와 지금 교제한 사람의 다른 배우자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음, ⑥ 예배나 사명이나 공부에 방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모든 스킨쉽 기준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분명이 드러난 3가지 기준도 있다. ① 성관계 안 된다. 성경에는 부부의 제도 외에 성관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혼전 순결을 잃은 것이 드러나면 창녀와 같이 처리했다. (신 22:15) 그 처녀의 부모가 성문 앞의 광장으로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자기 딸이 처녀였다는 증거 (첫날밤에 깔고 잔 핏자국이 묻은 천을 처녀의 부모가 보관하였다.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월경하면서 사용한 천을 처녀의 부모가 임신하지 않은 딸의 증거품으로 보관)를 내놓아야 한다. (신 22:20) 그러나 남자의 말이 사실이어서 그 여자의 부모가 딸이 처녀였음을 입증하지 못하면 (신 22:21) 그 여자를 자기 아버지 집의 대문 앞에 끌어다 놓고 그 마을의 주민들이 돌로 쳐 죽여야 한다. 그 여자는 자기 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몸가짐이 창녀와 같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반드시 처녀와만 결혼하고 본인도 순결을 지키라고 했다(레 21:7, 9,13,14; 겔 44:22). ② 벗으면 안 된다. 음행의 그림자(벗기거나 나체를 보는 것 포함)도 관여 말 것을 지침한다. (마 5:28)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남자는 여자의 하체를 여자는 남자의 하체를 보는 것은 부끄러운 일(결국 성관계, 성유희로 간다. 서로를 수단으로 여긴다)이다(레 20:17; 창 9:22). ③ 수치심을 주면 안 된다. 인격을 모독하는 스킨쉽은 모두 사랑이 아니다(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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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칼럼
    2024-11-08
  • [신앙교육나침반] 세대통합을 위한 첫 걸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120세의 노련한 리더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민족 전체를 향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절절히 외쳤습니다. 그의 외침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그는 타락한 세상속에서 믿음의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내적 차원인 ‘마음’을 두고 싸우는 부모세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귀 교회의 부모세대는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고 종교생활하는 ‘교인’이 대부분입니까? 하나님을 마음 다해 뜨겁게 사랑하여 일상을 교회로 세우는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교인’만 가득한 교회는 자녀세대에게 생명이 없는 율법을 가르칩니다. 교인만 가득한 교회는 자녀세대에게 율법을 잘 가르치기 위해, 모두 교사가 됩니다. 그리고 무지하고 부족한 자녀세대를 교육하기 위해 부모세대로부터 철저히 분리합니다. 생명이 없는 율법은 자녀세대의 삶에 그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녀세대를 정죄시하고 아프게 만들어서, 불안하고 방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자녀’가 가득한 교회는 자녀세대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하나님 자녀가 가득한 교회는 자녀세대에게 생명의 복음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모두 영적인 목자가 되어 그들과 늘 함께합니다. 부모세대는 자녀세대와 함께하는 자리에서, 자녀세대의 영혼을 사랑으로 부둥켜안고 함께 예배하며, 함께 복음을 경험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생명의 복음은 자녀세대의 삶을 일으켜세우는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자녀세대를 빛의 자녀로 세웁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교회(ἐκκλησία)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부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신분, 성별, 연령을 초월하여 하나로 연합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 몸’입니다. 여러 다른 세대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를 ‘너’로 보지 않고, ‘나’로 보게 되는 곳이 바로 교회만의 본질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세상은 세대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세대를 분리하고 의도적으로 단절시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반대입니다. 교회는 세대 간의 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 더욱 세대를 통합하고, 하나로 모인 자리에서 강력한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오면 세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온 세대의 허그(HUG)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6세기 개혁교회는 교회의 이러한 본질을 회복하는 세대통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유아, 어린이, 청소년, 장년, 노년이 모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세우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매 주일, 복음을 ‘함께’ 듣고, ‘함께’ 은혜 받으며, ‘함께’ 결단하였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면, 자연스럽게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간의 신앙전수가 활발해집니다. 기독교교육학자인 존 웨스터호프3세는 신앙 전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온 세대가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복음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복음을 받고, 함께 복음을 경험하는 시간 속에서, 자녀세대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느 공동체에 속해있는지에 대한 정체성과 강력한 소속감을 얻게 됩니다. 온 세대가 함께하는 예배와 프로그램은 세대와 계층과 문화를 뛰어넘고,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하나 되는 신비와 기쁨을 공유하는 시간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예배와 프로그램을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마련한다면, 자녀세대들은 교회와 한 가족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세대들은 ‘함께함’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교육부서의 학생’이 아닌, ‘교회의 참된 성도, 참된 지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유아, 아동,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모든 세대가 복음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복음의 온기로 인하여 치료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온 땅에 퍼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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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성서연구] 오직 은혜뿐입니다
    무엇을 드러내려 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락교회 목사가 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이 영락교회가 6.25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2일에 창립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다니전도교회였으나, 영락교회로 개명했습니다. 지역이 영락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영락교회 하면 한경직 목사님이 떠오를 정도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은 거의 한 몸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한 몸>이라 하지 않고, <거의 한 몸>이라고 표현한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락교회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였습니다. 6.25가 발발한 날은 주일인데, 그날 주보를 보면 장년 출석이 4천 명을 넘었습니다. 그 후 80년대 중반에 와서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전력을 다하셨습니다. 전국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군목 제도를 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셨고, 영락교회는 1,004군데의 군인 교회 중에서 건축비 전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 반액 부담으로 300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600여 교회 이상이 영락교회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교육 선교에도 힘을 쓰셔서 1938년에 자진 폐교한 숭실대학교를 1954년에 영락교회에서 재건했고, 또 보성여중고를 재건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대광초등학교, 대광중학교,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영락고등학교, 영락의료과학고등학교를 세웠습니다. 현재 영락교회는 총 8개의 학교를 운영 중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긍휼과 사랑 사역에도 힘쓰셔서 신의주에서부터 시작하신 고아를 위한 보린원을 비롯하여 중증장애인 시설인 애니아의 집, 모자원 등 현재 총 15개의 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락교회 목사로서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들은 이것들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들이 영락교회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이 완전히 한 몸이 아니라, <거의 한 몸>이라고 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거의>라고 한 이유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님 사이에 거리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거리감은 성도들은 이상의 일들을 자랑스러워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드러내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겸손이었습니다.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락교회 성도들은 한경직 목사님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여기에 영락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어려운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제가 영락교회에 부임한 후에 성도들이 주문한 것은 <한경직 목사님처럼!>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가지 요구였습니다. 하나는 한경직 목사님처럼 많은 사역을 하라는 것과 동시에 한경직 목사님처럼 겸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역은 드러내는 쪽입니다. 겸손은 숨기는 쪽입니다. 두 가지는 물과 기름 같습니다. 저는 무능해서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조용히 있는 것뿐입니다. 뭘 하겠다고 나대지 않는 것입니다. 조용히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시편 131편 1절에서 감동받았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조용히 있으면 부수적 효과가 있는데, 그것은 겸손과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려고 노력하는 게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성도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랑으로 기도하는 것,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랑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제게만 필요한 것일까요?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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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소강석칼럼] 아쉽지만 마음은 함께 합니다
    제가 탈진을 하여 링거를 맞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부산 세계로교회를 섬기시는 손현보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이러다가 한국교회가 큰 일을 당할 것 같습니다. 10월 27일 종교개혁주일 오전 11시에 광화문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 연합예배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누워 있는 채로 말했습니다. “그렇게 긴박한 상황인가요? 아직은 그 정도의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목사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해야지요. 제가 주일날 예배를 포기하면서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일 오후에는 제가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일간지 기자들과 함께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자라고 배운 신학교, 교회와 역사관을 방문하기 위해 미국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교회를 위한 염려와 걱정은 같았고 의견이 동일했습니다. 그 분도 단순하고 저도 단순하게 쉽게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사실 말이 그렇지 주일 낮 예배를 포기하고 광화문으로 모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일 오전에 광화문에서 모인다는 것은 다른 집회와 괜한 혼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런 복잡한 계산보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의를 한 것이죠. 저의 몸은 많이 지쳐서 계속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전에서 오후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자단과 순례하는 일정을 조정하기 위하여 담당 목사에게 날짜를 조정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각도로 노력해봤지만, 기자단의 출장 날짜와 선교사들의 출신 신학교 총장과 교수, 역사관 예약 등의 변경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펜젤러 선교사의 후손도 어렵게 시간을 마련했다고 해서, 이를 어찌할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손현보 목사님께서 저에게 공동대회장을 맡아 달라는 간절한 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일을 놓고 제 주변에 있는 동역자들과 의논을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참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제 이름만은 넣는게 좋지 않느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한 동역자들이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 동기와 목표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회성 집회로는 대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으니 기도회 후에도 있을 일을 감당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적지 않는 재정적 부담도 있을거구요. 더구나 참석 못하면서 이름을 올리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날짜가 안 맞아서 출국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담임목사님을 대신해서 희망하는 성도들과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여당이나 야당에서도 차별금지법이나 동성애법이 발의된 게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차분하게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저에게도 어떤 직책을 맡으면 재정적 부담이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저는 잠들어도 10.27, 일어나도 10.27 생각뿐이었습니다. “집회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든지 간에 순수한 진의가 잘 전해져야 할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손현보 목사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집회 시간이 오후로 변경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를 못하게 되었지만요. 물론 한 번의 큰 기도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반기독교의 흐름과 공격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장수는 앞서서 전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선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죠. 어쨌든 큰 기도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각은 다 똑같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전략적으로 계속해서 반기독교 악법을 막아내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도 정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집회나 기도회를 통해서도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회를 우려하고 너무 비판을 하는 분들도 자제해야 합니다. 칭찬은 못할망정 비판을 하는 것은 그 또한 한국교회를 갈라치기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마음을 전하면서 기도회가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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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시사칼럼] 세대와 복음
    점차 “알파세대(alpha generation)”라는 표현을 쓰는 빈도가 늘어갑니다. 사실 그 동안 많이 썼던 “엠지세대(MZ)”라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15세부터 45세까지(1980년~2010년) 연령대를 망라하기 때문입니다. 10년 터울만 해도 세대차가 엄청난데 무려 30년 간격이 있지 않습니까? 1995년을 전후해서 2010년까지를 지세대(Gen-Z, 젠지)라 하고, 그 다음부터 현재까지 출생자를 알파세대라 부릅니다. 앞선 세대와도 가장 뚜렷하게 구별되는 알파세대의 특징은 바로 ‘인공지능(AI-generation)’입니다. 이들은 나면서부터 ‘지니’ 같은 인공지능 목소리에 익숙하고, 숙제를 챗·GPT로 능수능란하게 해냅니다. 스마트폰 하나를 들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며 활동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알파의 복음입니다. ‘알파 예수의 복음’입니다. 앞서 언급한 “지·세대(Z-generation)”는 새 천년 전후로 태어나 자란 세대로, 현재 10대 후반부터 20대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1996~2009). 이 시대를 지나며 다들 아이폰(2007.6.29), 페이스북(2004), 유튜브(2005), 트위터(2006), 인스타그램(2010)의 탄생을 지켜보았지만, 지·세대는 이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기존 세대와 다릅니다. 이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ABCD로 정의해 보았습니다. 먼저 에이(A)는 ‘무신론적’ 성향을 상징합니다(Atheistic). 비(B)는 ‘큰(Big), 총명한(Bright), 뛰어난(Brilliant)’를 가리킵니다. 씨(C)는 ‘크루(Crew)’의, 마지막 디(D)는 ‘디지털(Digital)’의 앞 글자에 해당합니다. 이들을 가리켜 새로운 인류라는 뜻의 이름을 부여하기도 합니다(포노·사피엔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신인류에게도 A·I(인공지능)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있는데, 바로 Am·I(스스로 있는 자) 곧 ‘여호와의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3040세대”를 생각합니다. 1980년에서 1995년생까지를 보통 “엠(M)세대”라 하는데, 새천년(밀레니움, Millenium)을 맞이한다 하여 ‘밀레니얼 세대’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엑스(X)세대”(X-generation)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엑스 다음 철자인 “와이(Y)세대”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연령대를 고려하면 “3040세대”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이들은 이미 사회의 주축입니다. 교회에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닌 숫자가 상당한데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교회를 이탈하고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소위 ‘가나안 성도’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40대요, ‘플로팅 크리스챤’(부평초 신자, floating christian)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세대가 30대입니다(코로나 이후 3명 중 1명이 교회를 떠났다고 함, 목회데이터연구소, 2023).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의 복음’입니다! 1980년대 인텔이 개인용 컴퓨터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으면서 ‘80286’이란 번호를 붙였고, ‘286컴퓨터’라 불리기 시작하더니 ‘386’, ‘486’, ‘586’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는데, 수강신청을 컴퓨터로 입력해야 해서 소동이 일었고, ‘채팅’이 등장했으며, 밤새 온라인게임을 하느라 수업 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주역들을 5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생이라 해서 586세대라 부릅니다. 최근 2차 베이비붐세대(1964-1973) 은퇴가 시작되었지만 이들을 요즘 에이(A)세대, 뉴-시니어, 욜드(Young Old), 오팔(OPAL; Old People with Active Lives) 등 다양하게 부릅니다. 숫자도 비중도 막강하기 때문입니다(인구의 30%). 게다가 교회에서는 복음전파와 복음교육의 주력 세대입니다(핵심 일꾼의 30%). 이들은 민주화와 학생운동과 사회단체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집단입니다. ‘웨비(WAVY)’라고도 하는데, 재력을 갖추고(Wealthy) 활동적이면서(Active) 추구하던 가치를 단단하게 다지고(Value) 젊음을 놓치지 않으려는(Youth) 신인류라는 의미입니다. 충분히 역량이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희생과 헌신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올해 드디어 한국은 노령 인구 일천 만 시대를 맞았고, 65세 이상 비율이 19%를 넘어서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70대 인구((631만 9천)가 20대 인구(619만 7천)를 추월했습니다. 바야흐로 ‘시니어 시대’입니다! 밝은 면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가정에서는 육아 피로에, 교회에서는 봉사 피로에 시달립니다. 섭섭함과 우울함이 찾아옵니다. 고립감과 무력감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끝이 아닙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았습니다. 헤겔은 유명한 <법철학강의>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Die Eule der Minerva beginnt erst mit der einbrechenden Dämmerung ihren Flug)”는 말을 남겼는데, 우리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복음의 독수리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정채봉이 들려주는 동화 속 어른 독수리가 말합니다.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나이가 들수록 상처는 많아지고 깊어집니다. 그럴수록 더욱 절실한 것이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구원의 복음입니다. 시니어는 시니어가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날개를 활짝 펴고 벌써 날개를 접어버린 이들에게 찾아가서 복음의 비밀을 전하는 시니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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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08
  • [은혜의말씀] 믿음의 정상(베드로후서 1:5~7)
    등산은 산꼭대기,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다. 신앙생활에도 유치찬란한 수준이 있고 믿음의 정상이 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정상에서 그의 믿음을 검증받았다. 정상에 오른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무한도전, 한계초월, 지극정성, 지사충성, 일사각오, 일편단심, 오매불망, 꿈에도 소원,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전을 거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일에 지치면 지고, 일에 미치면 이긴다는 말도 있다.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일상이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베드로후서 1장에는 신의 성품이 나오는데, 신의 한수가 있듯이 신이 내린 성품도 있다.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변화무쌍하며 때로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의 성질도, 마음 밭을 잘 가꾸면 신의 성품을 닮아서 성품의 최정상에 도달할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도 어렵다. 성자는 처음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야생마가 천방지축 날뛰다가 임자를 만나 연단이 되면 천리마, 준마가 된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개구쟁이가 철이 들면 다정다감한 호인이 될 수 있다. 모나고 까칠한 성질이 예수를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섬세하고 원만하고 따뜻한 카리스마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말이 되어 툭 튀어 나오고, 말이 씨가 되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품이 되고, 성품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 사람의 인품, 인상, 건강, 관계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것이 성질이다. 이혼도 성격차이로 하는 것이다. 신의 성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여러 단계가 있다. 똥물에도 파도가 있다. 사람마다 성품의 결이 다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① 믿음에 힘을 써야 된다. ② 믿음의 덕을 힘써야 된다. ③ 덕에 지식을 힘써야 된다. ④ 지식에 절제를 힘써야 된다. ⑤ 절제에 인내를 힘써야 된다. ⑥ 인내에 경건을 힘써야 된다. ⑦ 경건에 형제 우애를 힘써야 된다. ⑧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해야 된다. 이런 여덟 단계를 올라서면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벧후1:8 이런 것이 있는 사람은 흡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 벧후1: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벧후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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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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