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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샘물의 축복 (이사야 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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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흐름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흐름이 있다. 말이 통해야 행복하고 돈이 통해야 경제가 살고 뜻이 통해야 원팀이 되고 피가 통해야 건강하다. 혈행이 고른 것이 건강이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흘러가는 대세가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고, 시대가 요청하는 흐름이 있다. 백세를 사신 방지일 목사님은 병들어 늙고 녹슬어 죽지 않고 주의 일을 하다가 닳아서 죽으리라 하였다.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주님이 오시기까지 수많은 방해가 있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많은 아이들이 죽는 위기도 있었고, 많은 고비들을 지나며 때가 차매 구원사역을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끊어질 듯 하나 끊어지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위태위태하게 조마조마하게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흘러가는 물을 막으면 물은 기다렸다가 다 채운 후에 흘러 넘어간다. 물은 겸손하게 아래로 내려간다.
역사는 반복된다. 사사시대에는 일곱 번의 사이클이 반복 된다. 축복을 받고, 교만하고, 죄를 짓고, 심판 받고, 회개하고, 회복되고, 다시 또 축복 받고, 범죄하고, 계속 반복된다. 위기의 시대에 그 땅에 14명의 사사가 나타나서 구원역사를 이루었다.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삼손, 미디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기드온! 사도바울의 사역을 보면 사방으로 우겨 싸여도 새털처럼 자유롭게 살았고, 온 이태를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담대하게 거침없이 복음을 전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예루살렘으로 갈 때 누가 막으리요? 누가 끊으리요?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환난과 핍박, 온갖 방해와 공작이 있어도 도도히 흘러간다. 거침없이, 중단 없이 계속 이어져가는 물줄기 같다.
이사야는 패망하고 포로 된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했다. 물이 귀하고 메마른 사막 천지인 이스라엘 땅에서 샘은 축복이다. 사막 지역에서 오아시스는 생명수이다. 물 댄 동산, 잠근 동산은 물이 넉넉하게 풍요로운 것이다. 샘물 같은 은혜는 은혜(카리스)의 단비가 내려와서 카리스마를 이룬다. 은혜의 이른 비 늦은 비가 내려와 큰 못, 저수지를 이룬 것이 은택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은혜를 입은 자가 장땡이다. 성령님은 불처럼 바람처럼 생수처럼 임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왔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이 되고,
강 좌우에 과실나무가 심히 많아지고,
이 물이 바다에 이르니 바다의 물이 되살아났다.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번성하고 고기가 심히 많아졌다(겔47:1~12).
눈물 테라피가 있다. 눈물 총량의 법칙이 있다. 눈물의 기도로 키운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 금식하며 통곡하며 부르짖는 구국기도는 나라를 살린다. 지금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할 때이다. 역사가 어두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을 일으키신다. 날마다 때마다 일마다 주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도우시며 영광의 주께서 풍성케 인도하신다. 영적 전투에서 최후 승리 얻을 때까지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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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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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애] 4월 20일 주일을 ‘장애인주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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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장애인의 날’이 다가온다. 누군가는 이날을 ‘장애철폐의 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 더 익숙한 용어인 ‘장애인의 날’로 지칭하겠다.
‘장애인의 날’은 4월 20일이다. 이날만 되면 서로가 약속이라도 한 듯, 대중매체에서는 장애인과 관련한 기사와 영상을 내보내고, 장애관련기관들은 이와 관련한 행사를 진행한다. 다른 날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고, 매년 비슷한 내용이라 색다른 것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런 행사들이 필요하다. 이런 행사들을 통해 누군가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이고, 또 누군가는 장애인을 대하는 생각과 말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도 어느 때부터 교단차원에서든, 교단차원이 아니든, 개교회가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장애인주일’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장애인주일’을 지키는 교회들을 보면 목사이면서 장애당사자로서 미소가 띈다.
그런데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은 교회력으로 사순절 기간이거나 부활주일과 겹치는 일이 종종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 ‘장애인의 날’은 주일이면서 부활주일이다. 이렇게 되면 대부분의 교회는 장애인주일 보다는 부활주일에 예배 포커스를 맞추게 된다. 물론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 그 어떤 절기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목사인 내가 모를 리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떤 이들과 함께 하셨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한 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주일은 일 년마다 돌아오는 어느 특정한 날이 아니라, 매 주일이 부활주일이 아닌가? 아니,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부활절이 아닌지. 그래서 매일의 삶이 감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2025년 4월 20일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키기보다 장애인주일로 지켜보는 건 어떨까? 교회 여건과 분위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부활주일과 장애인주일을 함께 지키는 건 어떨까? 오전에는 부활주일, 오후에는 장애인주일 이렇게 말고, 말 그대로 함께. 이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한국교회에서는 요원할 일일까? 내가 너무 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일까?
물론 나의 바람이 요원할 수도 있고, 너무 큰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한 번쯤 희망을 가져본다. 이 글을 보고 4월 20일을 부활주일이 아닌 장애인주일로 예배를 드렸다는 교회가 한 곳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렵다면, 4월 어느 한 주일을 ‘장애인주일’로 정하여 교회들이 꼭 지켜주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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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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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칼럼] 지속성장을 위한 플랫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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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교회 공동화 현상의 원인(공간과 기능적 측면)
우리나라 교회 성장은 198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부흥기를 맞이했다. 사회 전반적인 측면에서 교회는 시대를 앞서갔으며 여러 상황이 풍요보다는 결핍의 시대였고 나눔보다는 경쟁 지향적 시대였다. 교회의 환경도 결핍의 충족과 꿈의 도전과 실현에 기도와 간구로 신앙은 큰 기대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와 같은 현상을 교회공간과 기능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본당 위주의 교회로 건축되었다.
지역사회의 유기적 연합이나 문화공간으로서의 교회와 같은 외부적 환경과의 접촉은 거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교회의 기능은 대부분 예배공간, 사무 행정, 소규모 교육실과 식당이 전부였다. 이와 같은 교회의 형태는 2000년대를 맞이하여 더이상 지속성장을 견인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고 성도들의 지적 수준과 욕구에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럽 교회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다. 유럽의 교회는 대부분 본당 위주로 형성되어있다. 예배 드리고 흩어지는 공간이며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와 같은 소통과 나눔의 공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 교회의 기능 분포를 보면 예배공간이 80%, 사무 공간 및 행정 기능이 6%, 기타 교육 기도 공간이 14%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유형은 교회의 지속성장을 기대할 수 없는 형태이다. 결국 교회가 예배처소로서의 기능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지역 주민과의 교회가 소통하거나 지역 근린센터와 같은 기능, 성도 간의 다양한 나눔과 세대간의 연합과 같은 기능은 기대할 수 없다.
공동화의 사회적, 신학적, 이념적, 정치적 이슈를 떠나 기능과 용도와 이용의 측면에서 보면 공동화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교회 역시 1980년대 공간의 분포와 용도는 유럽의 교회와 비슷하다. 그런 유형의 교회들은 이미 성장이 멈춘 교회들이다. 미국의 경우 이런 유형의 교회들을 이미 박물관 교회로 명목상 유적지와같은 교회로 남아있다.
2. 플랫폼 교회의 의미
플랫폼(platform)은 역에서 승객이 열차를 타고 내리기 쉽도록 철로면보다 높여서 설치한 승강장을 의미한다. 이곳은 많은 승객이 열차를 바꿔 타거나 방향에 대해 정보를 얻고 목적지를 정확히 설정하는 곳이기도 하다.
사회적 과정에서 플랫폼은 디지털 공간에서 다양한 행위자들이 네트워크로 상호연결되어 정보를 공유하고 콘텐츠를 생산하는 기반이다. 모든 길은 플랫폼으로 통한다. 초현대 사회에서 성장과 비즈니스 모델로 조직과 공동체, 개인 모두에게 핵심적 가치가 되었다.
플랫폼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교회와 주민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다양한 소통과 정보를 공유하여 상담과 치유, 문화적 거점으로 성장해 나아가는 교회이다. 동시에 성도와 세대간 단절과 왜곡되어진 시선들을 통합하고 방향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유기체이기도 하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교회의 형태는 극심하게 변화되었고 성도가 교회를 인식하는 가치로 상호 조화보다 연결이 잘 안 되어가는 혼란한 시점에 있다.
플랫폼 교회가 단순히 여러 기능을 공유하는 기능적 측면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복음의 새로운 시도로 탈교회화되는 소위 가나안 성도(거꾸로 안나가 성도)를 깨우는 시도가 필요하다.
교회의 시설과 공간은 성도들만의 편협한 사고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더 혁신적 시도를 해야 생존할 수 있고 지속성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교회 교육공간(유치부, 중고등부, 청년부실)을 주일만 사용하고 평일에는 거의 90% 교회와 공동화되어있다. 이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평일에 더 활성화하려는 시도와 전략적 아이디어가 부족한 실정이다.
유치부실은 키즈랜드, 키즈 카페로 평일 지역사회에 개방하면 중고등부실이나 청년부실을 책상만 설치하여 지역사회 청소년, 대학생의 스터디 카페로 바로 전용화될 수 있다. 이동식 주방이나 커피 머신, 인터넷 인프라만 설치하면 교회를 청소년들의 인기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소그룹실들은 특정한 날에 지역사회 주민의 법률, 세무, 건강 등 상담센터로 활용하여 지역 사회와 공유하여 연합될 수 있다. 교회 마당은 마을 장터, 바자회장, 야외 카페테라스와 같은 마을 마당으로 바꿀 수 있다.
지붕층은 스카이라운지, 생태공원, 작은 공연장, 야외 기도 부스와 같은 쾌적하고 감상적인 공간으로 지역 주민이 가보고 싶은 곳으로 변화된다. 소예배실은 지역 예식장, 공연장, 열린음악회 공간을 통해 인기있을 문화센터의 장소로 기능한다.
식당은 본당 다음으로 큰 공간이지만 주일 하루 사용한다. 왜냐하면, 하루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식당을 청소년 탁구장, 바자회장, 문화센터 홀, 실버센터로 바꿀 수 있다. 주방의 배식구에 덧문을 설치하면 주방이 보이지 않게 되어 식당을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형된다. 이를 통해 식당 공간을 평일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다목적 광장으로 바꿀 수 있다.
플랫폼 교회는 기능적 기능 및 용도의 성격을 교회 내부의 관점에서 외부 지역사회의 관점으로 바꾸면 많은 내용을 네트워크 할 수 있다. 유튜브 스튜디오는 다양한 정보를 콘텐츠 하여 소통에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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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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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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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1875-1965)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를 토대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그가 남긴 한 가지 중요한 업적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반공주의자로 살았고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살았다. 이승만의 건국 사상 혹은 건국이념은 반공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사회균등주의 등으로 표현되어 왔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자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었다. 1899년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1905년 초 세례를 받았고 일생동안 기독교 신자로 살았다. 1919년의 만세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수반으로 추대되었을 이때 벌써 기독교 건국론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살았고, 그것은 바로 반공주의의 실현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남한을 통치하면서 반공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함으로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가 지향했던 이른바 기독교 건국론은 용공주의와는 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해방 공간에서 갑자기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유영익 박사가 지적하는 바처럼 그는 청년기부터 제정 러시아에 대한 공로증(恐露症) 혹은 혐로(嫌露)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반러시아 의식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반공사상으로 바뀐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 사상이 처음 표현된 것은 1923년이었다.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던 「태평양 잡지」 1923년 3월호에 “공산당의 당 부당(當不當)”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는데,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이 논설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합당한 점과 부당한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인민평등주의는 조선의 신분제도인 상반(常班)의 철폐와 반상제도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노예제도를 없애는 것으로 보아 이를 합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유재산을 철폐하고 재산을 공유하자거나, 자본가를 없애자는 주장이나,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거나, 종교단체를 혁파하자는 주장이나, 정부나 군사를 없애자는 등 5가지 주장은 현실성 없는 부당한 허위 선전이라고 보았다. 사유재산제도가 불평등을 조장한다고 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노동 의지는 감소될 것이며 결국 모두가 가난하게 되는 피해를 보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때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불리는 소련 공산당 정권이 등장하지 불과 6년이 지난 때였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수많은 지식인들이 거짓된 유토피아 사상에 열광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란 “원래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역해가며 국민을 지배하려는 사상체계”로 판단했고, 이런 이념을 따르는 정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을 피력한 것이 위에서 지적한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논설이다.
이런 글을 발표한 배경에는 공산주의의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는데, 이승만이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1921년 초 상하이에 부임했을 때 당시까지 임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가 한인공산당 중앙위원장인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1873-1935)였다. 함경도 출신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에 가담한 바 있고,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운동 확산하고자 했다. 사실상 그는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반공주의자인 이승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임정 개혁안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격한 논쟁을 벌였던 이동휘는 결국 임정을 탈퇴하였다. 이 무렵 공산주의를 수용하는 한인들이 점점 많아졌다. 사실상 이승만을 탄핵하려는 이들은 이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반감은 심화되었고, 공산주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인식한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 그것이 추구하는 실상을 제시하고 맹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이들을 계몽하러 한 것이다. 반공, 반공주의, 반공사상은 이승만이 끼친 가장 큰 이념적 계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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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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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세대칼럼] 학교생활의 생필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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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생활에 ‘생필품’이란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생활 필수품을 말한다. 우리에게 물, 전기, 쌀, 소금, 설탕, 기름, 돈 등은 생활 필수품이다. 이것이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다. 요즘에 와서 이런 것보다 ‘핸드폰’이 얼마나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지, 많은 사람들은 잘 때도 핸드폰을 손에 꼭 붙들고 살아간다. 스마트폰 없는 인생은 생각할 수도 없는 듯이 말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카피처럼 ‘스마트폰은 휴대폰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은 생필품입니다.’ 이렇게 바뀔지 모르겠다. 실제로 따지고 보면 핸드폰 없이도 살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많이 편리하게 해주지만, 그것 없다고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핸드폰이 얼마나 중요한지, 눈만 뜨면 스마트폰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될 정도이다. 핸드폰은 꼭 필요한 물품은 아니다.
이제 3월이면 학생들이 개학을 한다. 학교 생활하는 데에도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감당하기 위한 필수품은 무엇인가?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성경의 서신서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필수품을 언급한 적이 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이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로마서 12장 9절에서 13절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그러니까 성도들 사이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본문이다. 얼핏 보면 약 12가지 정도의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정리하면 세 가지 정도로 그룹을 나눌 수 있다. 그것은 곧 사랑, 믿음, 그리고 소망이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 직장생활, 학교생활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필품이 없으면 우리가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듯이, 이런 필수적인 삶의 요소가 없으면 우리의 생활은 정상적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먼저, 학교생활의 생필품과 같은 것은 사랑이다. 로마서 12장 9절과 10절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기록한다. 사도 바울은 먼저 사랑할 것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사랑하라’가 아니다. 어떤 사랑을 감당해야 할지를 말하고 있다. 참된 사랑을 말한다.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거짓이 없어야 하는 것 곧 위선적이지 않은 것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악을 미워해야 하고, 선에 속하기를 애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에 속한 행동이 어떤 것인지를 바울은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서로 형제 사랑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는 일, 서로를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일이다. 우리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하는 일은 ‘진실한 사랑’이다. 감추려고 하거나 거짓 사랑은 결국은 드러나게 된다. 그 행 한대로,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바란다. 친형제 사랑하듯 대하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듯이 모두를 진실로 사랑하시기 바란다.
두 번째, 학교생활의 생필품은 믿음이다. 로마서 12장 11절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라고 기록한다. 방학을 맞이하여 각종 수련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렇다면 개학을 앞둔 우리 청소년들이 학교에서도 이 믿음과 은혜를 버리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11절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한다. 믿음은 주를 섬기는 일이다. 주를 섬기는 일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열정을 다해 온 영을 다해 주님을 섬기라’라는 것이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학교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든든히 서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주님을 믿고 오직 그를 신뢰하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활의 필수는 소망이다. 바울은 학교생활에서 힘써야 할 것을 ‘소망’에 집중시킨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현재성’이 있는 신앙이다. ‘오늘, 여기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로 승리하는 그런 살아있는 참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최종 종착점은 여기가 아니다. 죄 많은 이곳, 멸망 받을 이곳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다. 그러면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나? 사도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가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로마서 12장 12절과 13절 말씀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라고 기록한다. 소망을 가진 자는 환란 중에 참고, 기도에 힘쓰고, 이웃 성도를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소망이 있는 삶인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을 보여주시기 바란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손 대접하기를 애쓰시는 모습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3월에 개학하는 모든 다음 세대에게 당부한다. 사도 바울이 소개한 생필품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소유하고 승리하는 학교생활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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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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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말(言)은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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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말에 관한 말이 정말 많다. 그 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속담에는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이 그 사람이다.” 일본 속담에는 “입은 복과 재앙의 근원이다.” 중국 속담에 “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 독일 속담에는 “진리는 짧고 거짓은 길다.” “거짓은 거짓을 낳는다.”가 있다. 플라톤은 “말은 영혼의 그림자다.” 맹자는 “말의 결과는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온다.”고 했다. 명언으로는 “당신의 말이 자녀의 미래가 된다.” “한 사람의 말이 천 사람의 귀에 들린다.” “말을 하는 사람보다 말 못하는 짐승이 나을 때가 있다.” “칼의 상처보다 말의 상처가 더 깊다.”가 있다.
성경의 잠언에는 말에 관한 말씀이 정말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들을 묶어서 정리해보면 1. 하나님은 거짓 입술을 심판하신다. “거짓을 말하는 악인의 혀는 잘릴 것이고, 거짓이 습관이 사람은 벌을 받아 망하게 된다.” 2. 악인과 의인은 말이 다르다. “악인의 입은 독이 가득하고 의인의 혀는 순결한 은과 같다.” 3. 말은 그 열매가 다르다. “비딱한 말은 다툼을 일으키고, 비난의 말은 이간질 하고 선한 말은 평화를 이룬다.” 4. 말이 악한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험담하기를 좋아하고 소문내기를 즐겨하는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 5. 최고의 보배는 지혜로운 입이다. “의인이 입을 열면 지혜가 나오고, 혀를 움직이면 교훈이 쏟아진다.” 잠언은 결론적으로 악인과 의인, 축복과 저주,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렸다고 말한다.
말에 관한 잠언의 중심적인 내용을 축약해서 다시 살펴보면 1.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있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고 악인의 입은 죽이는 독이다.” 2. 다툼을 일으키는 말과 허물을 가리는 말이 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키고 사랑은 허물을 가린다. 3.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이 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고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채찍이 있다.” 4. 건설적인 말과 파괴적인 말이 있다. “지혜로운 자의 입은 지식이 넘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이 넘친다.”
동서고금의 역사와 위인들과 현자들의 말을 살펴보면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증언한다. 1. 하나님은 말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 2. 하나님은 들린 말대로 시행하신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시행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기도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말, 긍정적인 내용으로 기도해야 한다. 3.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고라의 일당들이 모세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평할 때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켜버렸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관은 아름다운 말, 긍정적인 말, 능동적인 말을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살리는 말, 평안케 하는 말, 지혜로운 말, 건설적인 말을 해야 한다. 아름다운 말과 정직한 말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위대한 창조의 능력을 가졌다. 거짓과 선동, 시기와 질투, 갈등과 분열의 말이 넘쳐나는 세상에 아름답고 정직한 입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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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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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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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 관한 상담이 여러 차례 있었다. 내용은 다락방을 떠난 분들이 교회에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대부분 규모가 큰 교회들이었다. 아마도 작은 교회에서 불편하게 주목받기보다는, 익명성을 유지하고 정착하기 평안한 곳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다락방을 떠나 교회로 온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교회 처지에서는 기존 성도들을 생각해 혹시라도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염려도 있다. 물론 교회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단을 떠나 올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온 분들을 환영하는 것에 대해서 이견은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성도들과의 관계에 문제는 없을지 그리고 교회의 방침을 잘 존중할지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락방을 떠난 평신도들이 가장 걱정이다. 각 교회가 문턱을 낮추고 마음을 다해 받아드리면 좋겠다. 혹시라도 다락방에서 왔다는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와 관심이 필요하다. 비록 잘 정착할지 혹은 목회 방침을 잘 수용할지 걱정도 되겠지만, 새 신자 교육을 통해, 그리고 교회 봉사와 직분을 서서히 맡기는 등의 안전장치를 통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다락방을 떠난 분들이 교회로 온다면, ‘받을까 말까’가 아니라 ‘받아드리되 어떻게 받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집을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락방을 떠나 교회로 오는 분들을 따뜻하게 품에 안아야 한다.
다락방을 탈퇴한 목회자들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오랜 기간 목회자로 몸담았던 다락방을 떠난 것도 힘든 결정이었지만,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이다. 목회를 그만두거나 독립교회로 남아있지 않는 한 새로운 소속 교단이 필요한데, 기존 교단의 가입이 쉽지 않다. 과거 소속을 드러내지 않고 신학교육 과정을 다시 밟은 후 기성 교단 목회자가 되거나, 류광수 측과 결별한 개혁 교단으로 다시 가입하기도 한다. 다락방 탈퇴 목회자를 받겠다는 교단들도 있었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해 보인다.
지난날 전도에 대한 열정으로 다락방에서 활동하며 청춘을 바쳤던 속상함과 회한을 누구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류광수의 사치와 다락방 일부 목회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가 노출된 PD수첩 방영 이후, 이들이 받은 상처와 충격이 어땠을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다락방을 떠난 것은 커다란 용기였고, 회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다락방을 떠났거나, 망설임 속에 떠날 계획을 세우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교회가 선제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다락방 탈퇴자가 다른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그리고 다락방에 있을 때의 ‘열심’이 교회와 주님을 위한 ‘헌신’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락방을 떠난 분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다락방을 떠나 교회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정착 과정에서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 들더라도, 혹은 다락방에서 보낸 세월이 속상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겸손과 순종의 마음으로 어려운 시기를 인내하며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교회의 본질은, ‘이단 정죄’를 넘어 ‘피해의 치유와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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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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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특강] 교회법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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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결혼식을 보면 ‘작은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예배 형식이 아예 없고 예배가 있으나 서약식이 없고 심지어 성찬을 행하기도 한다. 결혼식 전에 당회의 동의는 구하지 않으면서 대신 동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교회법은 신자의 혼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한국의 주요 장로교회 헌법에서 혼인과 관련한 법 조항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결혼예식은 성례가 아니다. 성도는 마땅히 주 안에서 결혼해야 하며 특별한 훈계와 적당한 기도로 시행하기 위해 목사나 교역자로 주례하는 것이 옳다. 혼인은 1남 1녀로 하고 성경에 금한 혈족과 친족 범위 안에서는 못한다. 남녀가 각각 상당한 나이에 도달하여야 할지니 부모 혹은 후견자의 동의를 얻는다. 혼인식 거행할 일에 여러 날 전에 작정하여 널리 공포한다.
사실 이 모든 조항은 약 600년 전에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1645년)에서 나왔다. 차이점이 있다면 당시는 결혼식이 있기 3주 전에 회중에게 결혼을 공고하고, 부모는 정당한 이유 없이 자녀의 적법한 혼인을 막을 수 없었다. 결혼 약속 후에는 결혼식을 너무 오래 지연하지 말아야 했고, 결혼식에서는 필요한 말씀을 전한 후에 서약의 단계를 밟을 것을 강조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개혁가 칼빈이 목회한 제네바교회의 <교회법령>(1561년)이다. 전체 173개 조항에서 약 1/3을 차지하는 56개 조항이 결혼에 관한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따라 혼인을 개혁했다. 그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
첫째, 결혼 약속을 엄중하게 다루었다. 결혼 약속에는 아버지의 동의와 쌍방의 자발적 인격적 동의, 적어도 2명 이상의 증인이 필수였다. 충동적으로, 경박함으로, 매수, 유혹에서 한 약속은 취소할 뿐 아니라 책임이 있는 자와 증인을 서는 자 모두 3일 구금의 처벌을 받았다. 조건을 걸고 몰래 한 약속도 무효로 봤다.
둘째, 결혼 약속 이후 결혼식까지 6주간 이상 미뤄지는 것을 금했다. 미뤄지면 치리회에 소환되어 책망을 받았다.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의회 앞에서 강제로 결혼식을 치렀다. 약혼 기간에 당사자는 결혼이 교회에서 기독교적 방식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부부로 살지 못하도록 했고, 만약 이를 거스르면 빵과 물만 먹는 3일 구금에 처하고, 치리회 앞에서 책망을 받았다.
셋째, 교회와 국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특히 교회는 3주 동안 결혼을 공지해서 회중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만약 교인 중에서 합당한 반대가 있으면 혼인은 연기되고 무효가 될 수 있었다.
넷째, 결혼식은 주일 혹은 평일 예배 중에서 택하여 회중이 참석한 가운데 설교 직전에 시행했다. 단, 성찬식이 있는 주일은 피했다. 성찬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다섯째, 결혼 약속이 취소될 수 있는 이유를 규정했다. 당사자 중 한 사람이 순결(동정)이 아님이 밝혀지거나 몸에 치료될 수 없는 병이나 전염병을 갖고 있을 때다. 그런데 결혼 지참금이나 돈, 의복을 이유로는 취소될 수 없었다. 이는 결혼에 부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결혼이 무효가 되는 이유를 다루었다. 쌍방 중 한 사람이 성적 불구를 이유로 한쪽에서 이의가 있고 자백과 조사를 통해 참되다고 판단되면 혼인은 무효가 되었다.
일곱째, 결혼이 취소되는 이유를 규정했다. 성적 부정, 상습적인 유기, 고의가 아닐지라도 10년 이상 유기할 경우 결혼은 취소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도 어떻게 하면 화평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혼인에서 이러한 품위와 질서를 갖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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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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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말씀] 성내는 요나, 아끼시는 하나님 (요나서 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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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환경적인 요인과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쉽게 미워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까지도 아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 얻도록 오래 참으신다. 성경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닌 구원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갔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니느웨를 싫어하였다.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철천지원수국가인 앗수르의 성읍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만 요나는 싫어서 짜증이 났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감정이 부딪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 최강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요 큰 성읍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사흘 길을 걸어야 돌아 볼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니 기가 죽을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에 눌리지 마라. 어린 소년에 불과한 다윗은 덩치가 큰 적국의 장수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위세를 과시할지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를 향한 도전에 “내가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선뜻 나섰다. 하나님의 영광에 민감한 다윗의 모습에 주님은 기뻐하셨다.
사람이 성질을 부려서 되는 일은 없다. 다만 정서상 미숙함을 노출할 따름이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 분을 내어도 하루해가 지나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된다. 분을 내어도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된다.
그러나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하며 성질을 부렸다. 정으로 살지 말고 뜻으로 살아야 되는데 인간적인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 성질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고 병이 생긴다. 하나님은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공적인 자리와 의미,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좋고, 싫고, 나쁜 감정선을 벗어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다.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요나는 심지도 않고, 수고도 아니 하고, 재배도 아니 한 박 넝쿨을 아꼈지만 주님은 큰 성읍, 니느웨에 수많은 생명들을 아끼셨다. 수고도 아니 한 것, 박 넝쿨 이파리 하나 때문에 속상해 하지마라. 고작 하루 동안 억지로 전한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의 왕과 신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수많은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 사랑 운동을 하라. 생명구원의 전도열정을 포기하지마라. 믿거나 말거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고 외치라. 요나는 박 넝쿨 이파리 하나를 가지고 죽내 사내 하였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크신 긍휼을 보여주셨다. 사랑으로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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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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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칼럼] 왜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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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용어가 우리들의 삶에 일상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황량한 벌판이 된다. 그래서 복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일상이 되는 십자가 은혜의 삶이다. 그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금의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못되면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하나 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국민들을 살맛 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그들로 인하여 고통해야 하는가?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대통령이 구속되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를 받는 상황에 국가경쟁력은 곤두박질치고, 경제는 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진 듯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카오스 현상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국가가 무너지고 국민의 삶이 좌불안석이 되어도 그들은 오직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에 가히 혈안이 된 듯한 행태를 보면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아직도 이 나라는 영웅 같은 정치 지도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럼에도 아직은 난세가 아닌가 보다.
교회도 다를 바 없다. 은퇴 후 초교파적으로 매 주일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시끄럽고 분쟁으로 교인들이 아파하는 교회의 공통점 또한 ‘내 잘못 없고 네 잘못’ 뿐이다. 추(醜)함이다. 십자가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하는 교회는 좋은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잘못은 모두 ‘내 탓’이 일상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하여 우리 사회를 함께라는 공동선을 지향했다. 동시에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 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아름다운 자기반성의 아름다운 사회운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행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정의를 외치며 하나님의 공법을 역설하면서 성경을 강론하는데 자기 생각을 채색하여 선포하여 교인들은 둘로 갈라치기 되고 교회는 분쟁이 일어난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데 왜 교회는 자꾸 분쟁으로 카오스현상이 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지고한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 나면 거짓말이 되는 정치지도자의 언행에서는 결코 국태민안의 정치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오늘의 국민들은 야고보의 리더십을 요청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왜 이순신을 회고하고, 김구를 읊조리며, 윤동주를 그리워 하는가? 왜 주기철을 회고하고 손양원을 읊조리며, 조만식을 그리워 하는가? 그들에게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어디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가?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쉽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오늘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인물 풍년에 인재 흉년이라는 아픈 용어가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너나없이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됨을 믿기에 오늘도 엎드림으로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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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