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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목사 칼럼]고립(孤立)을 잘하면 고립(高立)이 된다.
    장재열 님이 쓴 『리커넥트- 누구나 한 번은 혼자가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생은 한 번쯤은 혼자가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고립의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고립된 상태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자에 의하면 노년과 중년을 제외하고도 사회적 고립에 처해 있는 청년만 54만 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립자들은 갈수록 늘어갈 추세라고 합니다. 고립무원의 상태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쓸쓸한 삶이겠습니까? 그토록 꿈이 많던 아이가 청년이 되면 은둔형 고립 상태가 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아니 은둔형 외톨이가 아닌 또 다른 차원의 고립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여러 사례를 들며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혼자가 되고 고립 상태가 된다고 하는데요. 저는 이 글을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생동감이 넘친다 하더라도 어쩌면 사각지대에서 고립 상태로 존재하는 분들이 있을 거야. 올 한 해는 사각지대에 성도들을 더 잘 돌봐야 하겠구나.” 그런데 저자는 결론 부분에서 고립(孤立)을 잘하면 오히려 고립(高立)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봤다는 것입니다. 창의적 고독, 창조적 고립을 긍정적으로 축적하고 생산적으로 농축을 하다보면 어느새 고립(高立), 즉 오너러블 스탠딩(Honorable Standing)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성경에도 보면 고립, 아니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야베스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고립을 하나님과 함께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축적했을 때 그들은 고립, 오너러블 스탠딩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고도가 다른 삶을 산 것이죠. 저도 누구보다 고립과 고독을 많이 겪어본 사람입니다. 광주신학교를 다닐 때의 고립, 특별히 5.18 광주민주화항쟁 속에서 거의 완벽한 고립무원 상태를 경험했죠. 백암교회 시절의 고립…. 아니,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고 이곳저곳에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립 상태에 들어가죠. 그런데 그 고립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맞을 때 저만의 글이 나오고 저만의 설교를 준비하고 저만의 시를 쓰곤 합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와 신년축복성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성경을 더 새롭게 보고 깊이 보고 넓게 보면서 성경신학과 교의신학의 틀 안에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발견하고, 그 내러티브를 스토리로 창작하여 말씀을 전한다는 게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고립이나 고독의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그럴 때 부족하지만 오너 러블 스탠딩을 하며 참으로 격조가 있으면서도 새로운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삶이 윤택하고 모든 것이 풍요하다 할지라도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혼자가 되고 고립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립(孤立)이 고립(高立)이 되게 하고 오너러블 스탠딩이 되게 하고 오너러블맨과 우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올해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어쩔 수 없이 고립과 같은 상태를 맞는다 할지라도, 그 고립을 창조적이고 생산적 고립으로 맞으셔서 정말 고립(高立), 고도가 다른 차원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사무엘 베케트가 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서는 고도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고립을 맞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립을 경험할 때 어느새 우리는 고립(高立)의 상태가 되며 고도 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2026년 새해에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아니 작년과도 차원이 다른 고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신년소원헌금 봉투에 기록한 5가지 기도제목, 그리고 받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차원 높은 고도의 고립(高立)과 고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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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교회법특강]칼빈의 제네바교회법령(1561년)과 시찰
    교회에는 여러 단계를 따른 회의가 있다. 곧 당회, 노회, 총회이다. 교회는 이 회의들로 말미암아 관리된다. 특별히 노회가 하는 일 중 하나는 구역을 나누어 ‘시찰’회를 조직하고 ‘시찰’위원을 두어 관내 교회를 ‘시찰’(視察)하는 것이다. 교회 <교회정치>에서 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노회의 시찰 기능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시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없어도 되는 것일까? 있어야 한다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일까? 성경의 원리로 돌아간 16세기 종교개혁은 이신칭의 복음을 통해 교리 개혁을 이루었다. 나아가 중세교회를 거치면서 변질된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개혁가 루터가 가장 먼저 교회시찰을 회복했다. 그런데 개혁가 칼빈은 교회시찰을 어떻게 했을까? 칼빈(1509-1564) 역시 자신이 목회하는 스위스 제네바교회에 시찰을 도입했다. 1561년 교회법령을 개정하면서 “제네바에 속한 교구와 목사 시찰에 관한 질서”(Orde sur la visitation des Ministres et paroisses dependantes de Geneve) 이름으로 실었다(31-38). 시찰규정은 크게 둘로 나눈다. 하나는 시찰의 목표를, 다른 하나는 시찰 방법을 다루었다. 시찰을 하는 목표는 제네바 전체 교회의 몸, 도시와 시골 교구에서 선한 질서와 교리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시찰위원으로 시의회에서 2명을 선출하고 목사회에서 2명을 선출했다. 시찰위원은 1년에 한 차례 교구 시찰 임무를 맡았다. 선한 질서와 교리의 통일성을 위한 시찰임무를 위해 다음 다섯 가지 질문으로 정리했다. 시찰 대상은 무엇보다 목사였다. 첫째, 목사들이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는가? 둘째, 목사들이 설교를 통해 교회를 세웠는지, 혹은 모호하고 쓸데없는 문제를 다루고 혹은 적절하지 않고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셋째, 교인들을 공예배에 참석하도록 권면해서 예배를 기뻐하고 여기서 유익을 얻어 보다 더 기독교적 방식으로 살게 하는지, 또 목사직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서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배우도록 하고 있는가? 넷째, 목사들이 설교뿐 아니라 환자 심방에서, 또 곤경에 처한 자들을 권면하고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일을 막고 있지 않는가? 다섯째, 목사가 좋은 본을 보여주며 진리 안에서 영예롭게 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경거망동한 처사로 가족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지, 회중과 화평하게 생활하고 있는가? 시찰의 방법도 규정했다. 시찰을 위해 파송된 목사는 먼저 설교를 하고 이어서 회중을 권면했다. 목사의 교리와 생활, 목사의 가르치는 열심과 방법에 대해 교구 장로와 집사에게 물었다. 시찰 위원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목사회에 보고해서 해당 목사가 권면을 받거나 책벌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시찰은 법적인 조사가 아니며 재판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시찰은 재판과정을 막을 수 없으며, 목사도 정부에 대한 순종 의무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시민 생활이나 법률과 관계해서 또는 범죄행위에 책임지는 것에서 목사는 일반 시민과 같았다. 시찰은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예방하고 도구였다. 특별히 목사가 부패하고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규정과 달리 실제는 약간 달랐다. 우선 시찰이 매년이 아니라 격년마다 이루어졌다. 본래 목사 2명이 선출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1명만 임명되었다. 목사가 주일을 세 번씩이나 빠질 수가 없었다. 목사 시찰 위원은 주로 도시 교회 목사가 맡았기에 시찰은 시골 교구 목사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이로써 도시 목사와 시골 목사 사이에 갈등이 깊어져 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회시찰은 당시 제네바 교회는 물론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중요한 유산을 등한시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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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전영헌 목사]새해, 다시 교문 앞에 서며(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
    새해가 밝았다. 학교는 아직 조용하지만,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이 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느덧 열아홉 해가 되었다. 매해 새해가 되면 마음속에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부름받은 사람인가.” 미션스쿨에서 교목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화려하지도, 늘 환영받는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매년 새 학기마다 다시 이 자리로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교목의 가장 큰 보람은 시간을 견뎌낸 아이들의 변화에서 온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 때, 아이들은 기독교를 거리낌 없이 “개독”이라 불렀다. 그 말에는 상처와 불신, 그리고 종교에 대한 깊은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열여덟 해가 흘렀다. 설득보다 동행으로, 논쟁보다 일상으로 아이들을 만났다. 찾아가지 않아도 매일 마주치는 만남, 아침 인사, 복도에서의 짧은 농담, 힘든 날 말없이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쌓이며 아이들의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독”이라는 말 대신 “기독”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변화는 교육의 성과라기보다 삶으로 스며든 복음의 흔적이었다. 교목의 사역은 예배당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담실에서, 교실 뒤편에서, 운동장 벤치 위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삶 속에 있다. 함께 울고, 함께 버티며,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곁에 있어 주는 시간이 쌓인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조금씩 달라진다. 포기하려 했던 아이가 다시 살아갈 이유를 붙들고, 관계 속에서 무너졌던 아이가 다시 사람을 믿어 보려는 용기를 낸다. 그 변화는 교목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사명 확인의 순간이다. 아이들의 변화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한 학생과의 신뢰가 부모와의 대화로 확장되고, 학교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이 가정의 분위기를 바꾸는 장면을 만난다. 그때 교목은 비로소 깨닫는다. 미션스쿨의 사역은 학교 담장을 넘어 가정의 복음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또 하나의 감사는 같은 미션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동료 교사 공동체와의 연합이다. 교육이라는 치열한 현장 속에서도 신앙을 이유로 고립되지 않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은 새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큰 힘이다. 그러나 이 사역에는 늘 그늘도 함께한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교사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다. 그 안에서 교목은 존재감이 적으면 “미션의 기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존재감이 커지면 “선교보다 일을 많이 해서 인기 끈다”는 오해를 받는다. 필요할 때는 찾지만, 견해가 다르면 돌아서며 “정치적이다”라는 말로 선을 긋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교목은 자연스럽게 고립감을 느낀다. 어느 날은 교사라는 기준으로 평가받고, 어느 날은 목사라는 기준으로 재단된다. 이중의 잣대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관리자의 성향에 따라 건학이념은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한다. 사시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관리자들에 의해 미션의 방향성이 외면되기도 한다. 결국 하루를 마치고 돌아서면 혼자다. 그러나 새해의 문턱에서 나는 다시 고백한다. 이 외로움마저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로 부르신 이유 안에 있음을. 올해도 새로운 아이들을 만난다. 다시 이름을 외우고, 다시 관계를 시작하고, 다시 복음을 삶으로 건네야 할 시간이다. 부디 이 새해에 지역의 미션스쿨에서 사역하는 교목들이 지치지 않도록 지역교회들이 함께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미션스쿨의 교목은 교회와 학교 사이를 잇는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 다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새해에는 더 많은 연대와 격려가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새해, 나는 다시 교문 앞에 선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시작하실 일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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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시사칼럼]훌륭한 사람이 그립다
    지난 11월 25일 이순재 배우가 돌아가셨습니다(1934-2025). 현역 최고령 배우로 많은 사람의 존경과 신망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었기에 연예계 종사자들 뿐만 아니라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많은 국민들이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배우도 결코 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천상 배우를 자처했지만 50대 정계에 입문하여 민정당 소속으로 한 차례 낙선한 후 민자당 소속으로 마침내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당 부대변인까지 역임한 이력도 가졌습니다. 수년 전에는 뜬금없는 갑질 논란에 휩싸여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작년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개소리>로 깜짝 대상을 받으며 마지막으로 극적인 반전을 선사했는데,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될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수상 소감을 남기셨습니다. “평생 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일세를 풍미했던 대배우의 마지막 대사같았던, 시청자들에게 남긴 깊은 감사의 인사는 그간 존재했던 그 모든 오점을 다 지워버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 들자마자 우리는 소중한 또 한 분을 잃었습니다. 안성기 배우입니다(1950-2016). 아역으로 출발해서 이순재 선배와 데뷔 연도가 거의 같은 점도 놀랍지만(1957, 1956년), 전쟁둥이로 태어나 평생 남긴 작품들을 보면 – 만추(198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고래사냥(1984), 겨울나그네(1986), 칠수와 만수(1988), 남부군(1990), 투캅스(1993), 태백산맥(1994),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 그야말로 격동과 청춘의 한국 현대사 그 자체라 새삼 감탄과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입니다. 특히 박중훈 배우와 함께 열연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마지막 격투 장면은 헐리우드는 물론 전세계에서 수없이 오마주(hommage)되며 오늘날 한국영화 세계화의 초석을 낳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영화력(映畫力)’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단 한 번의 구설수도 없이 또한 오직 영화 한 길만을 팠던 모습도, “광고 많이 찍으면 체한다”며 한 브랜드(커피)와만 38년을 지켰던 의리도 멋졌습니다. 갑질도 교만도 고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동료들은 물론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을 살갑게 챙겼다는 후일담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 모든 정황을 한 마디로 정리라도 하듯 누군가의 한 마디가 또한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사람 자체가 훌륭한 분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지만 최근 정치계는 여당 인사들마저 각종 논란에 휩싸이면서 여간 어수선한 모습이 아닙니다. 계엄 정국에서 맹활약하는 바람에 국정원 출신으로 일약 집권 여당의 원내대표가 된 의원에 대해 최근 경향신문은 ‘특권 의식 끝판왕, 9가지 의혹 총정리’라는 기사를 게재했습니다(2025. 12. 29). 물론 ‘의혹’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른바 정치개혁을 주도해야 마땅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왜 그렇게 많은 ‘의혹’이 따라다니는지 국민들은 답답해 합니다. 정치인치고는 비교적 청아한 이미지를 구축해 오던 여당의 한 여성의원은 지난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으로 있으면서 받았던(사무국장 수령) 금품수수가 문제가 되어 스스로 탈당하였으나 결국 제명 처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판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전격 발탁된 국민의힘 3선 의원 출신의 경제통을 자처하던 여성의원에게서 드러나버린 작태들은 달리 거론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돌아보면 곳곳에 우러러볼 만한 분들이 그래도 많이 있는데, 도대체 우리 정치판에는 왜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없는 걸까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말 자체가 ‘누워서 침뱉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술하는 사람들이야 괴짜들의 일탈이라 치부하는 측면이라도 있겠지만, 정치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정치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냐며 체념하는 측면이라도 있겠지만, 누구보다도 선한 양심과 정직한 행실과 성결한 생활을 보여주어야 할 기독교계가 만일 일탈의 행렬에 합류한다면 어떤 변명이 통하겠습니까? 더구나 목사를 비롯한 지도자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 교계에서 그간 혁혁한 명성을 쌓아왔던 한 원로목사에 대한 논란이 불거져 대단히 유감입니다. 유독 성화를 강조하며 많은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분이기에, 공공연하게 번영신학을 추종하고 힘의 기독교를 과시했던 그런 인물들의 행태를 보면서 가졌던 마음과 차원을 달리하는 서글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안성기 배우와 친형제나 다름없던 박중훈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고인이 화를 안 내는 분인데, 골프를 칠 때면 승부욕 때문인지 예민하시기에 고언을 한 적이 있다. 몇 개월 지나 다시 만났는데, 갑자기 지갑에서 종이를 꺼내 보시더라. <1. 골프가 안 돼도 화내지 말 것, 2. 골프 칠 때 예민하지 말 것.> 얼마나 많이 보셨는지 구깃구깃해졌더라, 안성기라는 사람은 이걸로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습니다. 다만 반성과 노력이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내가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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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위드애]더 늦기 전에, 우리 교회에 ‘장애 인식’의 빛을 밝히자
    2025년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보내고, 2026년 새해를 맞이했다. 2026년에도 각 가정과 일터와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기를. 2025년에는 총 여섯 번 지면을 통해 ‘교회와 장애’에 대한 글을 썼다. 올 해도 이 지면을 통해 ‘교회와 장애’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몇 교회가 이 지면에 쓰여 있는 글을 보았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써 온 글 안에는 공통적으로 ‘교회 내 장애인식개선’에 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내포되도록 썼었다. 올 해로 3년 째 쓰게 되는 데, 지난 2년 동안 이 글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인을 향한 시선과 생각이 얼마나 전환되었는지 궁금하다. 장애인을 향한 시선과 생각에 변화가 왜 중요할까? 첫째, 장애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기독교인 가운데 장애인이 몇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비장애인들도 여러 이유로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경우가 잦다. 그렇다면, 교회를 떠나는 장애인들은 더 많지 않을까? 물론 장애인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도 있다. 감사한 일이고, 더 많아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떠나는 이유가 뭘까? 교회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예배시간에는 엄숙함을 강조한다. 물질을 많이 소유한 자, 좋은 직업을 가진 자, 헌금을 많이 내는 자, 모든 예배에 참석하는 자, 교회에 봉사하는 자 등등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오길 바리고, 정착하길 바란다. 왜 그런가? 교회 건물을 키워야 하니까. 이런 환경에서 장애인들은 어떻게 비춰질까?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고, 물질도 적어 헌금을 기대하기는커녕, 보태줘야 할 것 같고, 모든 예배에 참석하라고 하면 교회에서 이들을 위해 환경을 고쳐야 할 것 같고... 교회에 바람과는 반대인 속성을 지닌 것이 장애인이라 생각해서 장애인은 사랑부(장애인부)라는 외딴 섬에 모아놓는 것은 아닌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 둘째, 장애인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 때문이다. 즉 장애인식에 대한 부족함 때문이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 질병이 아니기에 장애인에게 발급되어지는 복지카드에는 ‘유효기한이 제한 없음’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장애를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질병으로 장애를 갖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장애가 질병은 아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병을 갖고 있길래...”, “얼른 낫기를 기도할게요” 라고 말한다. 여전히 장애를 질병이 계속되어지는 상태로 보기도 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장애에서 해방되는 줄 알고 있다. 그리고 교회 내 어르신들은 장애인들을 보면 “쯧쯧쯧쯧” 하며 혀를 차신다. 그리고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이신다. “이쁜 사람이 어쩌다가”, “잘 생긴 사람이 어쩌다”, “젊은 사람이 어쩌다”.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장애인 당사자 뿐 아니라, 가족이 옆에 있다면 가족에게도 큰 상처를 안겨 준다. 공감을 해주고 응원을 해줘도 힘들어 하는 장애인에게 이런 말들은 큰 상처가 된다. 또 말은 이렇게 하지 않지만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장애를 갖고 있다고 무조건 도와주고 배려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장애인으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그래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나이가 들어서든,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든 누구나 장애를 겪게 된다. 그러니 더 많은 장애인들이 교회를 떠나기 전에 장애인식개선교육을 하기를 바란다. 작년에는 한 교회에서만 불러주셨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은 교회에서 장애인식개선강사로 불러주기를 바란다(연락처 010-475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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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6-01-09
  • [은혜의말씀]2026 이륙하라
    어느새 2026년 새해가 밝았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내 인생만 고달프고 우리 집구석만 어렵고,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침묵하신다고 생각하는가? 잠시 세상에 살다 가는 나그네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시다. 사람은 때로 오판을 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은 끝이 없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도 한치의 틀림 없이 정확무오하다.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삼중축복을 주신다고 하였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지치지 않는 열정을 누리게 된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순간에도 힘차게 날갯짓하며 오히려 맞바람과 골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오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고 나만 힘드냐고 불평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시간의 주관자 되시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엘리야도 그 일생을 보면 실상은 매우 어려웠다. 선지자를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악한 왕 아합의 때에, 도무지 농사가 안되는 오랜 가뭄까지 힘겨웠던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다. 아슬아슬 조마조마 위태위태한 시대에 사역을 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불로 응답을 해주셨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라 일컫는 대표적인 선지자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 다사다난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며 때로는 벼랑 끝, 절벽 끝에 선 듯 한계점을 느끼게 되지만, 바로 그때 건너가라. 한계를 뛰어넘어 도약하라. 임계점을 훌쩍 넘어가면 된다. 성령의 불을 받아 식어버린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시동을 걸고 탄력을 받아 독수리의 날개 침 같이 힘있게 날아오르면 된다. 해마다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철새들을 보라. 서울-부산 거리 정도는 쉬지도 않고 날아간다고 한다. 바람을 타고 V자 대형을 유지하며 온 힘을 다해 날아간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힘껏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야 한다. 바람이 불어야 연이 떠오르듯이 무슨 일을 만나도 자빠진 김에 쉬어가고 문제를 디딤돌 삼아서 벌떡 일어서면 된다. 성령의 불을 받아 이열치열 힘을 내면 된다. 저온에서 증식하는 암처럼 사탄마귀가 틈타도록 가슴이 식어버리면 안 된다. 엔진이 식고 시동이 꺼지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한번 휘청거리면 회복하기가 힘들고 한번 큰 상처를 받으면 가슴이 식어버린다. 가슴의 불꽃이 사그라들기 전에 은혜 위에 은혜를 구하며 몸부림쳐야 한다. 성령의 은혜로 가슴에 불꽃이 일어나고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탄력을 받아 더욱 달려가야 한다. 잠자는 영성을 깨우고 야성을 깨워라. 살다 보면 무사안일, 편의주의에 빠지기 쉽고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뛰어들어라. 소극적인 것이 비극적이라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감동케 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차원이 다른 역대급 사역을 펼치라.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 당장 눈앞의 일에만 파묻혀 죽네 사네 하지 말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날아오르라. 자빠진 김에 쉬어가고 힘든 만큼 도약하는 2026년, 이륙해서 고공비행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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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다음세대칼럼]두 교회, 다음 세대는 어떤 교회를 기억할 것인가?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로 본 교회의 선택 오늘날 교회는 수적으로 많지만, 다음세대가 체감하는 교회의 모습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어떤 교회는 여전히 생명력 있게 성장하며 다음 세대를 품는 반면, 어떤 교회는 존재하지만,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달란트 비유’는 이러한 교회의 현실을 두 종류의 교회로 분명하게 나눈다. 생산적인 교회와 비생산적인 교회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을 통해 자신의 승천 이후 교회의 시대를 바라보신다. 그리고 종들에게 맡긴 달란트는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맡기신 사명과 기회, 책임을 의미한다. 다음 세대가 떠나는 교회, 비생산적인 교회 비생산적인 교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교회는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는다. 이는 다음세대의 언어로 말하면 변화를 두려워하고, 시도를 거부하며, 실패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회다. 첫째, 사명을 멈춘 교회다. 복음 전도와 다음세대 양육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교회는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의 삶과 동떨어진다. 둘째, 변명으로 가득 찬 교회다. “요즘 애들이 문제다”, “시대가 변했다”라는 말은 결국 교회의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일 수 있다. 셋째, 에너지를 소모하는 교회다. 내부 갈등, 말다툼, 형식적 논쟁에 에너지를 쏟는 교회는 다음 세대를 위한 상상력과 투자 여력을 잃는다. 넷째, 불신앙의 교회다. 하나님보다 실패를 더 두려워하는 교회는 새로운 세대를 향한 도전을 시작하지 못한다. 다섯째, 현상 유지에 머무는 교회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 그대로 하자”는 태도는 빠르게 변화하는 다음 세대의 삶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교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다음 세대에게 매력 없는 공동체, 머물 이유 없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쉽다.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 생산적인 교회 반면 예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생산적인 교회는 결과보다 태도, 규모보다 방향을 중시한다. 첫째, 작은 일에 충성하는 교회다. 다음 세대 한 사람, 한 영혼을 향한 꾸준한 관심과 돌봄을 소중히 여긴다. 둘째, 기회를 즉시 붙드는 교회다. 변화의 신호를 위기가 아닌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셋째, 보이지 않아도 충성하는 교회다.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사명을 감당한다. 넷째, 보상을 계산하지 않는 교회다. 숫자나 성과가 아닌,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다음 세대 사역을 지속한다. 다섯째,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교회다. 다음 세대 사역은 단기간의 성과가 아니라 긴 호흡의 믿음이 필요함을 아는 교회다. 여섯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교회다. 이는 교회의 성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기쁨에 동참하는 영광스러운 초대다. 올해에는 우리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달란트 비유의 결론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교회가 건물이나 프로그램보다 사람을 남기기를 원하신다. 특히 오늘의 교회는 다음세대를 향해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다음 세대는 말보다 삶으로 증명되는 신앙, 형식보다 진짜 관계, 규모보다 진정성 있는 공동체를 기억한다. 생산적인 교회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세대를 향한 책임을 감당한다. 마태복음 25장의 메시지는 오늘의 교회에 도전한다. 다음 세대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통해 실망하게 할 것인가, 착하고 충성된 교회, 그리고 다음 세대를 살리는 교회가 되어 마침내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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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하나님께 맡기는 2026 자녀교육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대한민국의 학부모로 산다는 것은 늘 ‘불안’이라는 그림자를 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않을까, 지금 이 선택이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부모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항상 성경은 우리에게 놀라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 ‘맡김(Trust)’입니다. 이 ‘맡김’의 원리가 자녀교육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 자녀 인생의 ‘진짜 주인’이십니다 많은 부모님이 자녀의 인생을 자신이 설계하고 완공해야 할 ‘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경영하려 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부모는 경영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를 잠시 위탁받아 기르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부모들이 사회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모든 과정 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듯, 우리 아이의 성격, 재능, 심지어 우리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자녀를 내 소유로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하면 평안이 찾아옵니다. 우리 아이 인생의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할 때, 부모는 비로소 아이를 내 기준에 맞추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아이를 통해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관찰자’이자 ‘조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이의 미래라는 무거운 짐을 부모의 연약한 어깨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옮겨 드리는 것이 자녀교육의 첫걸음입니다. 2. ‘맡김’은 방관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신뢰’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하면, 어떤 분들은 “그럼 부모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뜻인가요?”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방관’과 ‘맡김’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맡김은 부모의 책임을 회피하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땀흘려 일하지만 그 결과물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맡기듯, 부모는 아이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따뜻한 밥을 해 먹이며, 기도의 무릎을 꿇는 성실함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내 뜻대로 바뀌지 않을 때,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때 분노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맡김’의 실천입니다. “나는 뿌리고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부모의 불안한 강요는 아이의 영혼을 숨 막히게 하지만, 부모의 신뢰 섞인 기도는 아이의 영혼을 춤추게 합니다. 부모의 성실함과 하나님의 지혜가 만날 때, 자녀의 인생에는 부모의 계산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경영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3. 부모와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한 팀’이 되게 합니다 세상의 자녀교육은 부모와 자녀를 ‘감독과 선수’ 혹은 ‘관리자와 노동자’의 관계로 만듭니다. 성과를 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수직적이고 긴장된 관계입니다. 그러나 자녀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면, 부모와 자녀는 하나님이라는 거대한 경영자 아래 있는 ‘동역자’이자 ‘한 팀’이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일 때, 자녀는 부모의 권위가 아니라 부모 뒤에 계신 하나님의 권위를 배우게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자녀 또한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한국 부모의 열정과 자녀의 가능성이 ‘하나님께 맡김’이라는 영적인 원리 안에서 결합될 때, 가정은 전쟁터가 아니라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부모는 아이를 다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동반자가 됩니다. 이러한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자녀는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며, 비로소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올 한 해 아이의 학원 스케줄을 짜기 전 먼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잠언 16장 3절의 말씀을 소리 내어 선포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아이의 학업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 아이의 성품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 아이의 진로와 만남의 복을 주님께 맡깁니다.” 걱정은 하나님께 맡기고, 부모인 우리는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축복하는 일에 집중합시다. 우리가 주님께 맡겨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완벽한 방법으로 우리 아이의 인생을 경영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그 깊은 평안과 행복이 2026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의 삶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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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교회건축칼럼]시대성의 반영과 굴절로서 교회건축
    과거 풍요와 기술적 혁신의 아이콘이였던 뉴턴적 세계관의 기계론적 사고와 인과관계의 원리는 20세기를 지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로서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겨져왔던 과학적 이론들은 이러한 이론과 반대되는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 동안만 잠정적인 진리로 인정받고 있다. 이것을 ‘잠정적 진리’라 하는데 지금까지 인간이 발명하거나 개발하여 온 모든 이론이나 법칙들은 이 잠정적 진리에 속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그것을 넘어서는 법칙이 존재할 가능성이 이미 예견되고 있다. 양자물리학도 기존의 과학진리체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있다. 현대교회건축도 지금까지 정형의 공간만을 추구해왔다. 정형의 공간이란 지구중력에 순응하는 안정적형태를 뜻한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복잡성의 시대속에 살고있다. 소위 기계론적사고처럼 인과관계로만 우리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나비날개이론처럼 서울에서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내일 뉴욕에 거대한 폭풍우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찌보면 전혀 비현실적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후학자 로렌츠는 기상을 결정짓는 습도, 바람의 방향, 온도등의 인자를 프로그래밍하여 슈퍼컴퓨터에 입력했는데 이 인자의 작은 원인의 결과값이 쓰나미나 허리케인같은 폭팔적 변화로 귀결되어짐을 발견했다. 입력과 출력의 정형식 시스템에 의한 구조가 인과관계를 벗어난 사실을 발견하고 그는 이것을 나비이론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인간이성에 의한 인과응보의 사유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예측불허의 복잡성을 동반한다. 강남은 왜 아파트값이 전국에서 제일 비싼가 이것은 단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띤다. 그것은 교육여건, 문화인프라, 교통, 정보의 편리성, 쇼핑과 같은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교회건축은 시대성의 반영이 이루어져야되며 동시에 시대성의 굴절(파동이 매질의 경계에서 속도차이로 인해 방향을 바꾸는 형상)로서 이루어져야된다. 시대적 고립자, 지극히 열악한 환경과 소외된 사람들, 치유가 절실히 필요한사람, 중독자, 노숙자, 이념적 갈등과 같이 굴절되어버린 것에 대해 방향을 전환시켜야하는 소명에 건축이 어떤 기여를 할까. 건축과 공간에서 정형적 패러다임을 비정형패러다임으로의 변환장치가 대두되어지고있다. 건축의 사고에서 이것을 해체주의적 경향이라 불린다. 교회가 꼭 정형화되고 안정적조형을 구축해야만 교회답다는 생각을 한다면 교회는 그이상의 메세지를 낼 수 없고 시대의 복잡성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뉴욕한인장로교회는 리모델링건축으로 완성되었는데 교회형태는 정형의틀을 제거하는 작업으로 표현되었다. 또 2000년 교회는 로마의 상징적 교회가 되었는데 외부의 형태는 비정형적 구조체의 중첩에 의해 건축되어졌다. 2000년 교회는 국제공모로 진행되었는데 제출된 4개의 응모만이 전부 정형을 거부하고 기계론적 사유를 배척하는 비정형적 교회형태로 제안되었다. 우리에게 또다른 교회건축의 패러다임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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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목회자칼럼]웃음과 미소로 행복을
    잘 웃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자주 웃어야 한다. 웃으면 면역기능이 높아지고, 심장박동수가 2배로 늘어나며, 폐 속의 나쁜 공기가 신선한 공기로 빨리 바뀐다. 또 암과 세균을 처리하는 NK세포, 감마 인터페론, T세포, B세포 등이 증가한다. 스트레스는 면역체계를 무너뜨리지만, 웃음은 면역 체계를 증강시킨다. 웃음은 내장활동도 활성화시킨다. 배꼽 빠지게 웃는 웃음은 소화기능 향상과 무익한 균을 죽이는 치료 수단이 된다. 10분 동안 배꼽을 잡고 웃으면 30분 동안 힘차게 노를 젓는 것과 같은 내면의 운동효과가 있다. 슈바이처는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 하나가 있다. 그 약국에 만병통치약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했다. 우리 몸은 최고의 명약을 가지고 있다. 미국 루이빌 대학의 클리포드컨 교수는 “일부러 웃는 웃음도 자연스러운 웃음과 똑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얼굴 근육과 내면의 주름이 펴지기에 10분을 크게 웃으면 2시간의 잠이 보상으로 주 어진다. 노먼 커즌즈는 “웃음은 유효기간이 없는 약이며 깊숙한 내면의 마사지”라고 했다. 버드란트 러셀이 ‘웃음은 세상의 약국에서 구할 수 없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웃음은 전적으로 감성적인 뇌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건강한 뇌와 몸을 가진 사람은 많이 웃는다. 뇌에 웃음회로가 있기 때문이다. 웃음은 15개의 안면 근육과 몸속에 있는 650개의 근육 가운데 203개를 움직이는 최고의 뇌 운동이다. 뇌는 우스운 소리만 들어도 웃을 준비를 한다. 인간의 뇌에는 모르핀에 버금가는 진통제, 마취제, 흥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엔도르핀이다. 이들은 상호 분자구조나 효과적인 면에서 거의 유사하다. 통증과 아픔을 견디게 하는 엔도르핀이 웃을 때 가장 많이 생성된다. 5분간 웃을 때 5백만 원 상당의 엔도르핀이 나온다. 박장대소를 하거나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으면 통증이 찾아온다. 그런데 그 아픔은 결코 기분 나쁜 통증이 아니다. 아주 기분이 좋은 통증이며 매일 맛보고 싶은 통증이다. 실컷 웃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물이 날 만큼 웃고 나면 아픔, 걱정, 슬픔이 사라진다. 삶의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마음의 상태가 달라진 것이다. 분노의 기저인 공포 좌절 절망 공포 고뇌는 암의 발생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웃음의 기저인 긍정 의욕, 희망, 환희 감격 애정은 치유, 건강, 활력을 증진시킨다. 노먼 커즌즈에 의하면, 지구상에 의학적으로 증명된 질병은 26가지다. 우리들이 가진 인체에는 이러한 질병들에 대한 자연치유적인 메카니즘이 있다. 이 메카니즘이 가장 활력적으로 작용할 때가 바로 웃을 때라는 것이다. ‘일소일소 일노일로, 소문만복래’처럼 행복의 기준 중에 하나가 웃음이다. “웃음이 넘친다”라는 말은 곧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웃음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람은 평생 50만 번 이상 웃는다. 하루 동안 성인은 8번, 어린이는 400번 정도 웃는다. 성인이 될수록 웃음은 줄어들고 행복은 감소한다. 웃음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구상 에서 유일하게 무리를 지어 웃는 동물이다. 나의 웃음이 타인을, 타인의 웃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1988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이차크 프리트 박사는 우리 몸속에 있는 웃음보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웃음과 함께 유익한 호르몬 21가지를 방출한다. 따라서 웃음은 행복을 만드는 최고의 명약이며,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최고의 화장품이다. 힘차게 웃으면서 하 루를 시작하면 활기차고 행복한 하루가 펼쳐진다. 행복하기에 웃은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행복해지는 것이다. 웃음이 행복의 명약이라면 미소는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2026년, 힘든 세상에서 웃음으로 건강하고 미소로 행복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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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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