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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부활을 이상하게 보는 현대 사상
    작품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 작품을 ‘아름답다’고 할 때, 작품 속에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미의 대이론’입니다. 작품 속에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미의 객관적인 속성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좋고, 아름답고, 훌륭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상자는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는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상자가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칸트의 이론에서는 작품 자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에게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이 아닌, 보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 감정에 따라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일까요? 관객의 주관적 감정일까요? 절대표현주의는 두 가지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이에 따르면 작품에도 객관적인 속성이 있고, 보는 감상자에게도 주관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여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작품, 즉 본문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분석하는 문법적 이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문을 적은 저자의 상황과 시대, 정신세계 등을 포함한 본문의 맥락과 이면의 뜻, 의미 등을 분석하는 심리·정서적 이해입니다. 문법적 이해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분석하는 객관적 이해력이고, 심리·정서적 이해는 본문 이면의 의미를 분석하는 주관적 이해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바른 이해는 본문을 문법적으로만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상태와 환경에 따라 심리·정서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문법과 심리·정서 즉, 객관과 주관을 함께 사용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상호 소통하여 이해할 때,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것, 기적을 베푸신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신화인지 구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세계관과 현대 21세기 세계관이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이냐 아니냐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문법적 해석을 이해하고 사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문법적 이해와 더불어 부활에 대한 심리·정서적 이해가 함께 상호작용하여, 객관과 주관이 상호작용하여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025년 4월,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의미를 이해하고 나 자신의 주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세대에게 복음의 전승, 언약의 전승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부활을 사실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 단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모른채 의미만 파악하는 것도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객관적 사실과 함께 그 사실 너머의 의미를 알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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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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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박정곤 목사]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복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만이 아니라 아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신 영광까지를 의미한다. 이 부활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이고, 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것이며, 생명으로 생명을 낳은 복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한국 교회는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에만 부활을 기념한다. 개혁주의는 지키지도 않는 사순절은 잘 지키면서 성령강림주일은 잘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 교회가 교리와 교의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로 시작되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은 죽음을 인지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에서 싹이 튼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부활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혹 피 묻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기 때문 아닐까? 부활은 좋으나 십자가는 싫고, 생명은 좋으나 피 흘리기는 싫어한다. 죽어야 영생을 얻고, 죽어야 부활 할 수 있는데, 죽기를 싫어한다. 목숨을 내 놓아야 영원히 살 수 있는데, 영원을 포기하고 지금 사는 것을 선택한다. 과거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순교의 자리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교자의 후예들은 이제 순교를 거부한다. 순교자의 후예로만 살고 싶어 하고 순교자가 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러다보니 한국 교회에는 더 이상 부활의 기적이 나타나지 않고, 부활의 은혜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이 죽어 가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자기 교회 일에만 바쁘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교회는 생존하려고만 한다. 공산주의가 교회를 공격하는데,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 신자들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다. 주체사상이 신앙을 흔들어 놓는데, 교회는 우리 교인만 아니면 된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과 역사의 진행을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시어 세계 복음화의 선두에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그 때와 그 시는 알지 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나라는 이미 망했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종북 세력은 득세하고, 오랜 세월 그들이 탄탄하게 쌓아 놓은 옹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옹벽을 부수고자 많은 국민들이 나라의 법치를 세우고 죽은 나라를 살리려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많은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사, 장로, 신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다. 다음 세대에 신앙의 자유와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과 교회를 남겨주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나라를 물려줘야 하는데, 혼자만 살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외친다. 누군가는 죽어 씨앗이 되어야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부활이 있을 텐데, 아무도 씨앗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시대의 현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올해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는데, 내가 속한 대한민국은 침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이 있는 것은, 부활의 시작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대한민국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복음으로 다시 덮으실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광복이후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목숨 바쳐 지켜 냈던 자유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해야 법정에서 이기고, 법의 권위와 정의는 이미 죽었고, 행정부는 마비되었고, 입법부는 차라리 해체하는 것이 대한민국에 더 유익할 것이라 생각하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대한민국이 죽어가고 있다. 자유는 사라지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형의 독재자가 나라를 삼키려고 한다. 자유대한민국의 뿌리인 선거관리위원회는 불신을 넘어 해체해야 한다는 국민의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판사들(헌법재판소 대법원 고등법원 지방법원)의 판결이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별로 없다. 더 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고 나라가 죽음 앞에 절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 나라를 다시금 부활시키어 새롭게 휘두르시는 주님의 검으로 사용하실 것이다. 나라의 상황은 최악으로 가지만 부활은 죽음에서 시작되기에 다시금 조국 대한민국의 부활을 소망하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보다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한국 교회가 되어 순교자의 후손이 아니라 순교자로 하나님 나라에 이름을 새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교회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부활의 능력과 영광, 새생명의 감격이 넘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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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4-11
  • [교회법 특강] 교회법과 장례
    교회법은 장례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까? 대부분 한국장로교회 헌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시나 찬송을 부르고 합당한 성경을 낭독하며 설교를 하고, 특별히 비참한 일을 당한 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며 저희의 슬픔이 변하여 영원한 유익이 되게 하며, 위로를 받도록 해야 한다. 또 유족들을 위로하는 데 힘쓰고 신앙이 없이 생활하다가 별세한 자에 대한 소망은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첫째, 장례에서 먼저 생각할 점은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읽고 설교를 통해 슬픔을 당한 이들이 위로와 은혜를 받게 하는 일이다. 성도에게 죽음이 복된 것이고 또 고인이 장수하여 치르는 호상이라 할지라도 장례식은 유족에게 애도와 위로의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신앙이 없이 생활하다가 별세한 자에 대한 소망은 언급하지 않아야 한다. 고인의 지난 삶이나 죽음에 관해 판단하는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된다. 자살했으니 지옥에 갔다고 섣불리 말해서도 안 되지만 거꾸로 성도는 자살해도 천국 갈 수 있다는 말도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셋째, 고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의 관습이나 미신이 들어오는 것을 피해야 한다.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지침의 원형인 <웨스트민스터예배지침>(16456)이 이에 대해 잘 지적했다: “누가 이 세상을 떠나면 시신은 장례식 날 집에서 매장지까지 규율에 따라 옮겨가고 즉시 묻을 것이다. 시체 앞에 무릎을 꿇거나 그 옆에 서서 시신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미신적이며, 찬송이나 기도, 성경을 봉독하는 것도 불필요하게 남용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난 사람의 친구나 친척들과 함께 말씀을 상고하고 위로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목사가 참석하였으면, 그런 경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자주 찾아 그들의 상처를 씻고 그들이 맡겨진 의무를 잘 이행하도록 인도한다.” 이런 규정은 모두 미신적인 관습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었다. 과거 교회에서 시신 앞에서 죽은 자의 영혼 안식을 위하는 기도를 하고 소위 거룩한 물과 함께 축성된 땅에 매장하는 일이 있았다. 장례식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보다는 죽은 자를 칭송함으로 사람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죽음의 엄숙함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선포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통해 이 모든 미신이 개혁되었다. 고인을 위해 기도하거나 고인의 무덤이나 관 앞에 촛불을 켜거나 향을 피우거나 배례하는 행동은 경계해야 할 세상 관습이다. 입관 시에 고인의 부장품을 넣지 않는 것이 좋으며 고인이 사용하는 찬송가나 성경 등 유품은 잘 보관하고 고인을 추모함이 좋다. 화장의 경우 화장을 한 후 분골은 납골당이나 기타 적당한 장소에 안치하면 되나 이 경우는 가급적이면 가족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 넷째, 장례식 때 기도와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 역사에서 많은 토의가 있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6일 동안 토의했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기도는 원칙적으로 출생 이후 지금까지 고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드리는 감사의 기도와 유족을 위로하는 간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설교는 주일설교에 부담이 가지 않는 범위에서 준비하도록 했고, 특별히 부자와 가난한 신자를 구별해서 부자를 위해 설교를 남용하지 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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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특강
    2025-04-11
  • [은혜의말씀] 여김의 축복 (야고보서 1:1~8)
    삶이 힘든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이 동시다발적으로, 복합적이고 다중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속되는 시험이 더욱 어렵다. 인생이 힘든 것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을 만큼 문제가 혼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결과가 나와도 감정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불편한 일이다. 야고보 사도가 대단한 것은 예수님의 친동생이면서도 자기를 소개할 때 예수님의 종이라고 스스로를 일컬을 만큼 겸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의외로 기도를 강조하는 말씀들이다. 그가 얼마나 기도에 힘썼는지 별명이 낙타 무릎이었다.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약 1:6). 두 마음을 버리고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된다(약 1:8). 욕심을 버리고 기도해야 응답받는다(약1:15). 그러므로 의심, 두심, 욕심은 버리고 힘써 기도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니님께서 지혜를 주신다. 기도가 행함이고, 기도가 사역이며 기도가 역사를 일으킨다. 간절히 부르짖음으로 마음이 새로워지고, 신의 한수를 둘 수 있게 된다. 약1:2에서 말하는 ‘형제들’은 예수 안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좋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이 시험에 든다는 것이다. 또 시험이 들 되, 여러 가지로, 컬러풀하게, 시리즈로 시험이 든다는 것이다. 사람이 계속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우울해지고 대인기피증, 공황장애가 온다. 그러나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한다. “온전히”는 대충대충, 얼렁뚱땅, 건성건성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올인 하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 드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인격을 연단해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다. “연단”이란 단어 뜻이 천 번 맞은 것이 연이고, 만 번 맞은 것이 단이다. 수없는 담금질을 겪어야 정금 같은 믿음이 나온다. 문제가 생기고 시험당하는 것이 반가운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을까? 사도바울의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이다. 동안을 가지려면 동심을 가지면 된다. 부름 받고 쓰임 받고 사랑받는, 일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이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기쁘게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크리스천의 역설적인 태도가 축복이 된다. 여김의 축복이 있다. 분명히 골치 아프고 복합적인 문제인데도 온전히 기쁘게 여기면 쓴물이 단물 되고, 문젯거리가 간증거리가 된다. 불안한 현실이지만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보면 주께서 역사하신다. 사건보다 해석이다. 해석의 힘이 바로 믿음이다. 팩트보다 해석능력이 중요하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 간 상황에서도 선명한 뜻을 정했던 다니엘,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생생한 꿈을 꾸었던 요셉을 보라. 꿈꾼 대로 뜻한 대로 형통하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모든 고통에는 뜻이 있고, 여러 가지 시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는 과정이니 감사함으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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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5-04-11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지난 달 21일부터 영남권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형 산불은 경북은 8일, 경남은 10일 만에 주불이 모두 진화됐을 정도로 큰 피해를 남겼다. 산불 영향구역은 총 48,239ha이고, 총 75명의 인명피해 중 사망자는 30명, 중상자는 9명, 경상 36명(3월 30일 현재)이 발생했다. 경북지역에서만 주택 3,369채가 전소됐고, 4,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교회의 피해도 큰 것으로 조사됐다. 경북지역에서만 영덕 석동교회(박경원 목사)와 청송 목계교회(이상춘 목사), 어천교회(한영식 목사) 등 영남권 다수의 교회들이 대형 산불로 예배당과 사택이 전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와 구호단체가 구호활동을 펼쳤지만, 더 많은 후원과 기도가 필요하다. 체육관이나 학교에서 대피한 이재민들은 급하게 몸만 빠져나왔기 때문에 생필품이 부족한 상태다. 다행히 교계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한국교회봉사단(대표단장 김태영 목사)과 구세군이 구호활동을 초기부터 시작했고, 피해를 입은 각 지역 기독교연합회 중심으로 구호 및 봉사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교단들도 총회차원에서 모금운동에 나서고 있으며, 대형교회도 이번 산불 피해 고통에 동참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교회가 구호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문제는 피해 복구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과거 국가적 재난 상황에 항상 힘을 모아왔다. 서해안 원유유출 피해복구에 1만 교회로부터 120여 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방제 작업 및 자원봉사활동에 동참했었고, 집중호우 피해지역, 강릉산불 피해 복구 지원 등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항상 앞장서서 기금 마련과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한 가지 제안 드리고 싶은 것은 금번 부활절연합예배는 대형 산불로 고통받고 있는 이재민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어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금번 부활절 헌금은 이재민과 피해지역 복구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함께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처럼 의미 있는 부활절연합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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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5-04-11
  • 이제는 통합이다
    헌법재판소가 4월 4일 오전 11시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열고 국회의 탄핵소추를 재판관 8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인용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122일, 12월 14일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지 111일 만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사회는 양분되어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됐다. 한국교회도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의 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니,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분열과 혼란을 극복하고 치유해야 하는 일은 이제 한국교회의 몫이 되었고, ‘국민 통합’을 이끄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이후의 한국교회는 철저하게 화평케 하는 자의 복된 책임을 감당해야하고 화목케 하는 직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교회가 사회적 갈등의 진원지가 되거나 대립을 부추기고 혼란을 야기하는 일에 가담하거나 선동 당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금번 2025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에서는 ‘국민 대통합을 위한 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성명에는 최근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한국교회가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서 분열을 넘어 하나 됨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담게 될 전망이다. 끝 모르는 갈등과 격화되는 분열적 주장들, 그리고 망국적 거짓 선동과 편 가르기는 속히 멈춰야 하고,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앞장서 대화와 타협, 협력과 상생의 길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특히 헌재의 탄핵 판결 이후 예상되는 혼란과 갈등의 격화를 우려하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교회가 분열과 갈등의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선교 140주년을 맞이하는 2025년. 부활절 연합예배를 통해 한국교회가 다시 하나 돼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이 땅의 분열과 다툼을 멈추게 하고 이해와 화합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될 것을 소망한다.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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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부활절연합예배를 회개의 기회로 삼길...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2004년 4월 11일 서울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옥한흠 목사는 ‘한국 교회여 다시 일어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다. 그 때 옥한흠 목사는 교회의 세속화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목회자로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회개했다. 더불어 한국 교회에 회개를 요청하며 목회자와 성도가 달라져 다시 본질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부활절 예배를 연합으로 드리는 것은 한국 교회의 좋은 전통 중 하나이다. 공교회를 지향하는 한국 교회가 1년에 한 번이라도 함께 예배드리며 한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은 ‘연합과 화평’을 강조하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드려지는 헌금은 대부분 이웃을 위해 사용해 이웃 사랑이라는 교회의 사명도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2025년 4월에도 어김없이 부산에서 부활절연합예배가 드려진다. 정치와 관련해 세상에 기독교가 짓밟히고 있는 이 시점에 열리는 연합예배라 이 예배를 통해 우리의 본질을 돌아보며 아울러, 21년 전 서울에 울려 퍼졌던 기독교 자성의 메시지들이 흘러나오기를 바란다. 연합하라는 성경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러 갈래로 쪼개진 교계의 모습, 단상에서 말씀이 아닌 거친 용어들이 서슴지 않고 나오는 현실 등에 대해 가슴을 치는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디, 10년 후 2025년 부활절연합예배를 돌아볼 때, 그 때 부산 교계가 하나가 되어 회개한 후 삶이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기 바라며 한 달 남짓 남은 기간 동안 예배를 위해 주최측은 고민하며 기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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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1
  • [성서연구] 가버나움에 오시다
    어렸을 때 부르던 어린이 찬송가 중에 갈릴리를 소재로 한 찬송이 있었습니다. 가사 일부가 생각납니다. <갈릴리야 갈릴리야 너의 이름 아름답다 소리 높여 노래하자 아름다운 갈릴리> 어린 동심에 갈릴리 마을들로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에 신이 났었습니다. 갈릴리에는 익숙한 여러 지역이 있습니다. 나사렛, 막달라, 벳새다 등입니다. 그중에서 으뜸의 자리는 나사렛과 함께 가버나움이 다툴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이고,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시 직전에 이사하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하신 것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4장 13절에서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라고 했고, 마태복음 9장 1절은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본 동네>라고 할 정도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동네였습니다. 지금도 가버나움에 가면 <예수님의 도시, Tte Town of Jesus>라는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의 중심지였습니다. 로마군인이 주둔할 정도로 요충지였고(로마군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고친 기사 참조), 세관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물동량이 많았습니다.(세리 마태를 부르신 곳)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두로와 시돈으로 이어주는 요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신 이후에 그곳은 <위로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가버나움이란 <나훔의 마을>이란 뜻인데, 구약의 나훔 선지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나훔이 위로이므로, 위로의 마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버나움의 위로는 거짓이었습니다. 경제활동을 잘 하는 사람, 세관에 근무하는 사람, 로마 군인, 성공한 일부 사람에게는 권력과 돈이 위로였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짓 위로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딸의 죽음 앞에서 울어야 했고, 백부장도 사랑하는 종의 중풍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의 성취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습니다. 가버나움이 진정으로 위로의 마을이 된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로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참 위로였습니다. 본래 성부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아들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위로를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가버나움에는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 걸린 백부장의 하인, 지붕을 뜯고 달아내려진 중풍병자, 열병으로 고생하던 베드로의 장모,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것과 진배없던 세리 레위를 불러 제자를 삼으셨는데, 그가 바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놀라운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54~59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9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다렸고, 환영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40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자마자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8장 41절입니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자기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가버나움은 오늘 우리 삶의 터전을 상징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도 예수님께서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가버나움에도 예수님으로 인한 이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가 욕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가버나움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한 가버나움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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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1
  • [소강석칼럼] 빛의 연대기
    저에게는 오래된 꿈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 민족의 빛과 소금이 되고 희망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십수 년 전, 죽전 신도시에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건축하고 부흥의 최정점을 맞았을 때 저는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실체와 전략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개교회 성장을 넘어서 공교회를 세우는 공적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계속해서 개교회 성장 지상주의로 갔다면 지금쯤 더 큰 예배당을 짓고 숫자적으로 더 큰 성장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교회와 건강한 사회를 지키는 영전, 사상전, 문화전의 최전선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슬람 스쿠크, 동성애 차별금지법, 종교인 과세 등 한국교회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반기독교 법안이 올라올 때마다 정계와 교계의 깨어있는 소수의 분들과 함께 대처하고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한 개인이나 개교회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장합동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한국 교계의 분열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대정부, 대사회를 향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원 리더십, 원 메시지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계속 분열하면서 각자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그 꿈은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한국교회 연합기관이 하나 된다면 ‘빛의 연대기’라는 창작 칸타타를 제작하여 공연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한국교회 연합기관은 하나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소망을 담아 공연을 준비하였습니다. 우상과 미신, 가난과 차별로 가득했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해준 푸른 눈의 선교사들,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빛을 지켰던 믿음의 선진들의 고난과 희생, 폐허 위에서 조국 근대화와 부흥을 이뤄낸 한국교회의 눈물의 기도와 부흥의 대서사, 그리고 뼈아픈 분열과 상처... 다시, 연합과 부흥을 꿈꾸는 희망의 대서사시가 빛의 선율처럼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음악의 힘은 위대합니다. 남아공의 만델라가 종신 징역살이를 하고 있을 때, 1988년에 영국에서 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성악가 80명이 모여서 만델라의 석방을 기원하는 음악회를 하였을 때, 그 음악회의 영향으로 그 이듬해 봄에 만델라가 석방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유창한 연설이나 은쟁반에 담긴 옥구슬 같은 말이라 할지라도 언어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무조건 하나를 만듭니다. 영국 황실에서 음악회를 하면 여야를 다 초청합니다. 그래서 영국 의회는 극한으로 가다가도 음악 안에서 하모니를 이룬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얼마나 극한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습니까? 한국기독교 선교 140주년 기념 칸타타 ‘빛의 연대기’가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사랑과 용서, 화해의 하모니가 되고 희망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교총 주관으로 4월 23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릴 예정인데, 한국교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정관계의 주요 지도자와 기자들을 초청하여 다시 한번 사랑과 빛의 하모니를 이루는 감동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시적으로 표현한 서정적 해설과 더불어 장엄한 연주와 감동의 노래로 빛의 대서사시를 연출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격동의 역사, 감동의 기록, 눈물의 시가 담겨 있는 ‘빛의 연대기’가 분열과 갈등으로 상처 입고 신음하고 있는 한국 교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빛의 파동을 일으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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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1
  • [시사칼럼] 평화의 나라를 꿈꾸며
    벌써 한 세대 이전이 되어버린 1985년에 이런 가사를 가진 노래가 나왔습니다. “사랑 없는 마음에 사랑을 주러 왔던 너 너의 작은 가슴 그러나 큰 마음, 정이 없는 마음에 몸 바쳐 쓰러진 너 너의 작은 손으로 그러나 큰 슬픔, 내가 헤매어 찾던 나라 맑은 햇빛과 나무와 풀과 꽃들이 있는 나라 그리고 사랑과 평화가 있는 나라 그러나 그곳은 갈 수 없는 낙원 네가 가 버린 갈 수 없는 나라”(‘갈 수 없는 나라’ 중에서). 조해일이 쓴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작중 가수이자 주인공인 배수빈이 작품 속에서 부른 노래의 가사 일부를 바꾸고 해바라기라는 팀이 곡을 붙여서 발표한 노래라고 합니다. 소설은 1970년대 급격한 산업화를 거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는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을 그렸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주인공은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말이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나는 완전히 절망할 순 없었다. 무언가 우리에게 구원의 여지가 있다고 믿고 싶었다. 무언가 우리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평화의 나라를 꿈꿉니다.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팀으로 불리던 비틀즈(The Beatles)의 리더였고 그룹 해체 후에는 독자적인 활동들을 펼쳐갔던 존 레넌(John Lennon, 1940-1980)은 1971년 의미심장한 노래 하나를 발표합니다. ‘이매진’이었습니다. 후반부에 이런 노랫말이 등장합니다. “Imagine all the people Livin’ life in peace,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마 나를 몽상가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그가 모든 이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소망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광신도였던 한 남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때, 타임지는 “When the Music Died(음악이 죽은 날).”이라 썼지만 혹자는 “The Dream is Over(꿈은 끝났다).”라고 했지요. 그는 과연 좌절하고 만 몽상가였을까요?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바로 이 순간 우리 사는 이 세상에 기이한 몽상가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상한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도처에 널린 모습을 목격합니다. 우리도 꿈을 꿉니다. 결코 헛되지 않을 꿈을 말입니다.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를 향한 꿈입니다. 우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온 세상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에 관한 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부질없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결코 망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사랑하고 부르려고 하는 나도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함께 꿈꾸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노래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래도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세상도 우리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리고 영원한 완전히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이사야는 몇 차례나 평화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처음 노래에는 살상용 무기를 평화의 농기구로 바꿔달라는 염원이 담겼습니다(사 2:4). 그리고는 이리와 어린양이 표범과 어린염소가 송아지와 사자가 곰과 암소가 그리고 아이들이 함께 어우러진 나라를 꿈꿨습니다(사 11:6-9).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첫 번째 노래에 담긴 꿈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는 앗수르의 발흥으로 무참하게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평화의 왕’(사 9:6)을 예언하고 ‘고난의 종’(사 42, 49, 50, 53장)을 노래하며 마침내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사 65, 66장)을 선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의 반복은 평화의 나라를 향한 이사야의 ‘꺾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언젠가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도래하리라, 우리 사는 날 동안 그렇지 못해도 그날이 오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꿈을 꿉니다. 부디 주 안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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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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