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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건축칼럼] 장래증축과 확장성을 고려한 건축 계획
    교회건축이 완성되고 입당 후 약 2~3년 정도가 지나면, 한국교회는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주차장의 부족현상이며 둘째는 교육공간의 부족 현상이다. 주차장의 부족 현상은 현재 주차장법이지방 조례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100㎡마다 당 1대의 주차를 설치하게 되어있다. 가령 1000평 구모의 교회라면 약 1000석 규모가 되는데 이 경우 33대의 법적인 주차대수가 확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현실상 겨우 법적주차대수정도밖에는 설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1대의 주차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약 7.6평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0석 규모교회에 33대의 주차장을 설치하므로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는 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주일예배시 주변이 항상 주차장으로 혼잡스러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차장의 확보는 현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장래성에 대비한 주차장의 계획은 교회부지에서 직선끼리 300M이내에 주차장 부지가 있으면 건축허가가 가능하다. 주차장으로 전용가능한 공간의 확보도 장래성에 주요한 수단이다. 또한 기계식 주차장도 고려해 볼만 하다. 기계식 주차장은 적은 공간에 수납식으로 많은 주차를 수용하므로 공간의 효율성에서는 유리하다. 교회장래성과 확장성에서 고려해야 할 내용 중 부족한 교육공간의 확보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은 한국교회 공간의 분포가 예배홀(본당)위주로 건축되어지기 때문이다. 즉 100평 교회를 건축한다면 본당이 50평을 차지한다. 전체 연면적에서 본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보통 45%에서 50%평을 점유한다. 또 공유시설(계단, 홀, 화장실, 복도)를 제외하면 순수 교육공간의 분포는 17%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처럼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을 극복하기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옥상공간의 활용이다. 옥상공간은 건축법상 바닥 면적에 산입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부족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옥상의 외벽난간을 2.5M정도 설치하고 지붕에 경량식 구조로 덮개를 설치하면 내부실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옥상공간은 야외 청소년 체육 공간 카페, 노천극장, 기도처소 등의 다양한 기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대부분 교회지붕이 경사 지붕구조로 되어 있어서 활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무의미한 교회 형태는 오히려 획일적이 형태만을 양산시킨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작은 짜투리 공감 하나도 아쉬운 여건임을 감안할 때 옥상공간의 활용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시 에는 항시 향후 10년 앞을 보고 장래성을 대비해서 계획해야 한다. 불과 2~3년 후에 다시 증축하거나 리모델링 해야만 하는 교회가 많다. 10년 후를 보고 건축하기위해서는 2~3개 층을 현재 건물에서 증축 가능하게 기둥의 크기나 인프라시설을 여유 있게 고려해서 장래에 증축 시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증축의 방향성은 도심지 교회는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수직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천원교회는 부지가 넓으므로 수령방향으로 증축이 이루어짐을 교려하여 이에 따른 동선과 공간의 배치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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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다음세대칼럼] “문제아”가 아니라 “한 영혼”입니다
    필자는 11년 전부터 위기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업중단 위기의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낸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그만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필자의 센터에서 만난 한 아이의 말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센터장님, 교회는 제가 오면 싫어해요. 제가 문제아 같아서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던 그 아이의 눈빛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주 작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교회는 과연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고 있는가? 아니, 처음부터 환영했는가? ‘위기 청소년’이라는 말은 흔히 비행 청소년과 혼용되곤 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넓다. 협의적 개념으로는 폭력, 강도, 절도, 음주, 흡연, 가출, 약물 남용, 성비행 등 반복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을 말한다. 그러나 광의적 개념은 더 본질적인 위기를 포함한다. 즉, 사회가 부여한 가치관과 충돌하거나, 청소년 자신이 삶의 존엄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오늘날, 위기 청소년의 문제는 더욱 복합적이고 가속화되고 있다. 중독(게임, 도박, 약물), 성 문제, 자해와 우울, 가족 해체, 경제적 빈곤, 정서적 방임, 학교 부적응 등 다양한 위기가 얽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은 무너져 있는 청소년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때로는 조용히 ‘사회적 실종’ 상태로 빠져든다. 최근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촉법소년’ 제도 역시 위기 청소년을 둘러싼 오해와 분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만 10세에서 14세 미만의 소년은 형사책임을 지지 않고 보호처분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본질은, 아직 미성숙한 아이에게 형벌보다 교화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문제는, 교화와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사회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부모의 책임은 강화되지 않았고, 가정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며, 재범 방지를 위한 교육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비난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향하고, 아이들은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난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위기 청소년 곁에 있는가? 현실은 다소 냉소적이다. 많은 교회는 위기 청소년을 환영보다 ‘관리’하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고, 예배 중에 떠들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문신을 한 청소년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 결국, 이들은 조용히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문제아’라는 이름표만 남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 병든 자와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의 공동체, 곧 교회는 가장 연약한 자가 가장 먼저 안식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회복해야 할 때다. 위기 청소년 사역은 선택이 아닌 사명이다. 교회는 이들을 상담하고, 격려하고, 믿어주며, 무엇보다 지지해주는 어른들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실천 가능한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교회 공간을 청소년 쉼터로 열자, 전문 상담가, 지역 연계 멘토링 프로그램을 도입하자, 소그룹, 문화체험, 미술·음악 치유 활동을 운영하자, 그리고 모든 성도가 한마음으로 청소년의 지지자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상처 곁에 함께 있어 줄 수는 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셨다. 오늘날 교회가 잃고 있는 그 ‘한 마리 양’은 위기 청소년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손 내밀지 않는다면, 세상도, 학교도, 가정도 그들을 품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먼저 손 내밀 때,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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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요나 선지자가 교사, 부모들에게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오늘날의 현실과 오버랩되는 장면을 많이 만납니다. 구약의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거부감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던 장면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니느웨라면 당시 가장 악한 도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가장 잔악하고 교만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요나는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차라리 당시 땅 끝으로 여겨지던 다시스로 배를 타고 떠나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요나가 풍랑 속으로 뛰어들게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사흘간 그 속에서 요나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다음 장면이 요나서 3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장면을 만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다가 살아나온 요나의 복음 선포를 들은 니느웨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니느웨 왕은 스스로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하기까지 했습니다. 요나 스스로도 포기했던 니느웨 사람들의 이 놀라운 회개와 변화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니느웨는 어디인가?“ 요나가 그 마음속에서 완전히 배제했던, 혐오했던 지역이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우리도 특정한 지역, 아니면 특정한 부류, 특정한 계층,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안 변해요"라고 하는, "그들은 구제 불능이에요"라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누가 해도 안 돼요." 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거부감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말에 참 험한 말이 많습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면서요. 그럼 누굴 거둘 겁니까? 제가 자녀 때 몰랐는데 부모가 돼 보니까 제일 좋은 부모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속아 주는 부모입니다. 속아 주는 부모가 제일 좋은 부모입니다. 친구는 어떤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입니까? 참아 주는 친구입니다. 견뎌 주는 친구에요. 단점이 보이죠, 못난 게 보이죠. 그런데 그거 하나하나 지적하는 친구들 아무도 안 남아 있어요. 그런데 참아주고 견뎌 주는 친구들만 옆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부부는 어떤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일까요? 져 주는 사람입니다. 져 주는 남편과 아내가 제일 훌륭한 배우자에요. 이러한 성품은 어디서 올까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포용과 긍휼이 결국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를 만든느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저들은 안 돼", "이런 사람은 안 돼", "이런 부류들은 안 돼"라고 외치며 거부하는 우리만의 ‘니느웨’를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은 그 니느웨를 깨어 버리는 분입니다. 부모들이여, 자녀들을 용납하시고 속아 주세요. 성도들끼리는 참아 주세요. 부부는 서로 져 주세요. 우리는 쉽게 "다시는 안 봐! 절대 안 봐!" 하지만 아마 곧 또 보게 될걸요? 모르긴 해도 여러분 평생 보게 될걸요? 가족이니까요. 형제요 이웃이니까요. 그렇다면, 평생 봐야 한다면 우리가 속아주고 참아주고 져 줘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가 누구에게 썼나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썼어요. 디모데라고 하는 사람은 목회자인데 이 목회자의 마음에 너무 많은 미움이 있는 거예요. 목회를 해 보니까 정말 너무 사람에 대한 실망과 미움이 너무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을 선배 목회자인 바울이 달래주면서 "디모데야, 참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한 사람도 포기하지 말고, 한 사람도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끝까지 감싸 안아. 그게 목회야"라고 말하는 책이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여러분, 목회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가정생활도 똑같지 않습니까? 부부생활도 똑같지 않습니까? 사회생활 역시 똑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누구까지는 되고 누구부터는 안 돼"라고 말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선을 긋는 것이고, 그 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 선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교만 아닙니까? 여러분, 그 니느웨는 과연 누가 정한 것입니까? 오늘 니느웨가 뒤집어져 변화되어 하나님을 따르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정하는 그 니느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사람은 여간해서는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천천히 물들어 갑니다. 우리 교사들이 다음세대들을 하나님과 같은 포용력을 가지고 안아줄 때 그들은 천천히 우리의 사랑에 물들어 갈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한 번 더 자녀들을 기대해 주고 그들에게 가능성을 부여하고 믿어줄 때 우리의 자녀들은 그 신뢰에 복된 열매로 보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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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6-29
  • [위드애]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지난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부산에 있는 나를, 서울에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예배 설교자로 초청해주셨다.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사랑(장애인)부를 담당하고 계신다. 서울 근교인 의정부에서 40여 년간 살았지만,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설교 당일에 올라가 헤매지 말자는 마음과 사랑부 성도들과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전인 토요일에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신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사랑부 예배 때에도 설교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망설였다. 나는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사랑부 예배와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설교라니, 그리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과 통화를 하여 몇 가지를 물었다. 일단 사랑부 예배시간을 물었고, 예배에 참석하는 장애유형과 나잇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이 교회에서 오후에 설교를 하는데 사랑부 성도들도 참석여부를 물었다. 나의 물음에 목사님께서 답을 해주셨는데, 사랑부 예배는 장년부 예배시간과 같은 11시며, 자녀들이 사랑부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부모들은 장년부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각자 예배를 드린 후, 부모들이 사랑부 예배실로 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소모임을 잠시 하고 귀가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보니 4시에 있는 오후예배까지 사랑부 성도들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듣고, 부산에서 나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더 있으신지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부 예배 설교를 수락했다. 무명(無名)인 나를 부산에서 서울까지 부르신 것은 장년부에게 장애인식전환교육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를 가진 성도들을 만나 교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 뜻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일 오전, 사랑부 예배시간 전 보다 일찍 도착하여 초청해주신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기도회를 함께하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이날 나의 설교제목은 "약함을 자랑하라"였다. 나를 포함하여 장애를 가진 자들이 열 명 남짓이었는데 예배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후, 한 형제는 나보고 다음 주에 또 올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건 아마 하나남의 자녀라는 것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공통점이 처음 만난 우리의 사이를 허물어준 것 같아서 사랑부 예배에 참석한 것이 내겐 기쁨으로 기억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의정부에서 장애인교회를 7년 섬겼던 경험과 부산에서 3년 사는 동안 여러 장애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들이 이날 참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고, 세상 관심사에서 멀어진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장애를 가진 내가 목사로 부름 받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신체는 갈수록 연약해진다 하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나의 약함을 자랑할 생각이다. 나의 약함을 하나님은 강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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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5-06-29
  • [시사칼럼]희망
    최근에 터진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충돌을 포함해서 도처에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는 환경적 재앙들, 빈발하는 범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와 만연하는 우울증과 불안증세 그리고 늘어만 가는 과잉행동결핍장애와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병리적 현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관적 시각을 가진 이들은 지금 우리가 절망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등장한 “절망사”(絶望死, Deaths of Despair)는 ‘절망사회’의 인상적인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Stewart Deaton)이 제기한 개념인데, 경제를 넘어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양극화와 이로 인한 박탈감과 자괴감과 소외감으로 말미암아 자살이나 약물 및 알콜 중독에 따른 사망이 급증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국가 차원의 절망사 연구가 있었습니다(2022년 6월,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보고서). 이런 지경이라면 우리에게 아니 인류에게 희망이란 존재하는 걸까요? 절망은 현대에 비로소 등장한 신조어가 아닙니다. 고비마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쳤습니다. 중세의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절망이라는 더욱 치명적인 질병을 안겼습니다. 1510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로마를 방문했던 루터는 당시 실상을 목격하고 얼마나 절망했던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란 말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인적·물적피해와 함께 끔찍한 참호전으로 인해 제1차 세계대전을 혹자는 “절망의 전쟁”이라 불렀습니다(존 엘리스, 자크 타르디, 반철진). 75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많은 이들을 그야말로 절대 절망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생존자들과 함께 살아남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이를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이란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더 절망적인 상황이 무수한 성경에는 절망 대신 소망이란 단어가 들꽃처럼 피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희망이란 무엇일까요? 철학자 한병철은 희망이란 세계내부 사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정신의 상태 혹은 영혼의 차원이라 정의합니다(『생각의 음조』(2024), 142). “무엇보다 이 희망은 비록 감옥에 있는 것과 같이 외적 조건이 절망적일지라도 살아갈 힘을 주고 항상 새로이 시도할 힘을 주는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이 감옥에 있을 때 쓴 서신(Briefe an Olga)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감금상태에 있던 바울이 남겼던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빌 1:20)라는 표현과 내용이 상당히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면 희망을 나무 아래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림이라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을 역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희망은 아무런 활동 없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억지로 이뤄내려는 비현실적인 갈망도 아니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를 위해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와 같다.”(『희망의 혁명』(1968)) 희망하면 흔히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와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희망의 철학자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인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라 일컬었는데 ‘걷는 인간, 길 위의 인간, 여행하는 인간’이란 의미로서 희망의 여정을 걸어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하다’는 “현실에 신용을 부여하는,” 즉 “현실에 믿음을 거는, 그럼으로써 현실이 미래의 약속이 되게 하는” 행위입니다(한병철, 139). 그렇지만 현실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상황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희망의 신학자’라 불리는 위르겐 몰트만(1926-2024)이 그랬지요. 17세에 징집되어 제2차 세계대전에 나갔다가 전쟁포로가 되어 3년을 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신용을 줄래야 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누군가 그를 찾아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찾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찾았습니다.” 그를 찾은 존재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이 희망과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를 믿습니까? 부활을 믿습니까? 영생의 약속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세요. 당신에게는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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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소강석 칼럼]평화에 이르는 새 길
    명지대학교 정성철 교수께서 쓰신 ‘국가는 왜 싸우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반도 평화로 가는 길에 대해서 로버트 저비스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국가는 왜 싸우는가, 사회평론 아카데미) 로버트 저비스에 의하면 나선형 모델(Spiral 모델)과 억제 모델(Deterrence 모델)이 있습니다. 나선형 모델은 안보 딜레마에 기초하여 충돌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두 국가가 모두 자국의 안보를 위해 방어적 행동을 취하지만 이는 상대의 안보 불안을 야기 시킨다고 합니다. 결국 두 국가는 위기의 고조를 막지 못한 채 충돌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모델은 유화와 관용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북한 모두 평화를 희망하더라도 오해와 불신으로 상대의 방어적 행위를 공격적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한 경우 남북한은 번갈아 가며 그러한 오해에 따른 대응을 취하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린 채 충돌로 치닫게 되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비극은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갈 때 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억제 모델의 관점에서 평화는 상대의 공격에 맞서 싸울 결연한 의지를 보일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상대의 도발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결국 양측은 대규모 분쟁에 휩싸이고 맙니다. 상대방이 군사적 수단 자체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봉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모델에 따르면 평화는 역설적이게도 싸울 준비를 마치고 결의에 찬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죠. 상대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6.25 전쟁의 발발도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는 오판에 따른결과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이 적극적으로 북한의 공격이 엄청난 피해를 불러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을 때 한반도의 평화가 보장되어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한반도 평화를 지향해 왔습니다. 하지만 상반된 가정에서 기초한 두 입장의 정책제안은 상이하다고 합니다. 나선형 모델에서 국가는 현상 유지를 희망하는 불안한 행위자이지만, 억제 모델에서 상대국은 불만족으로 현상 변경을 노리는 도전적 행위자입니다. 그래서 정성철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오랜 경제 실패와 외교 고립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국가인가? 이라크 전쟁과 후세인 처형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실패 국가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면서 체제 안정이 위협받을 경우 모험적 도발도 감행할 준비가 된 도전 국가인가? 그것도 아니면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외부 세력의 영향을 차단하며 정권 안보에 사활을 건 공격적 행위자로 볼 것인가?” 저자에 의하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우리의 대북 통일정책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북한은 안보 불안에 시달리는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 안보를 추구하는 불만족 국가인가?” 이에 대한 우리 안에서 열린 토론이 합의에 이를 때 저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대북 통일 정책이 가능하다고 예측하고 있습니 다. 다소 전문가적이고 어려운 글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던가를 느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6.25 참전용사들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의 번영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절대로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6.25 참전용사들의 수고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키고 있는 안보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국민 모두가 서로 단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에 이르는 새 길입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우리 교회는 6.25 참전용사 초청행사를 19년째 맞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사들이 거룩한 낙수 효과를 이루며 나비효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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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성서연구]구색만으로는 안 됩니다
    몇 해 전 어려서 자라난 동네에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넓게 여겨졌던 길이 지금은 좁은 뒷골목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창 축구가 유행하고 있었고, 주 상대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재 한국 축구는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축구 열기는 꼬마인 우리에게도 퍼져서 뒷골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찼습니다. 6학년 동호 형이 중심이었고, 나머지는 5학년과 6학년이 섞여 있었습니다. 한번은 뒷골목 축구에 만족할 수 없어서 한참 떨어진 구로초등학교에 갔습니다. 한쪽에서 공을 차고 있노라니까 유니폼을 멋지게 입은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정식 선수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수들은 운동장 가운데서, 우리는 구석의 남은 운동장에서 공을 찼습니다. 그런데 축구팀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더니, 연습 경기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뒷골목에서 공을 찬 우리가 정식 선수들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2대 0으로 이겼습니다. 축구팀 선생님이 어이가 없었는지, 또 오라고 했고, 그 다음 주 토요일에는 다른 학교 축구팀들까지 와서 토너먼트 경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동호 형에게 축구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정도입니다. 구로초등학교 축구팀은 왜 동네 아이들에게 졌을까요? 유니폼에, 축구화를 멋지게 신고, 코치 선생님도 계시고, 포지션별로 선수도 다 있는데, 왜 졌을까요? 그 이유는 진짜 선수다운 선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막아낼 수비 선수가 없고, 골을 넣을 선수가 없습니다. 열한 명이 뛰고 있는데, 모두 있으나 마나입니다. 구색은 갖추었지만, 실력은 없었습니다. 흔히 폼만 잡는다고 하지요. 예레미야 당시의 유다가 그러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쳤고, 지혜로운 자들은 책략을 베풀었고, 선지자들은 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다 갖추었기에, 더 이상의 선지자는 필요 없다고 여기면서, 예레미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18절이 이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당시 유다 백성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타락하여 율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했고, 지혜로운 자들의 책략은 제 눈에 안경이었고, 선지자들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인 양 포장했습니다. 예레미야만이 참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시대에 여호사밧과 아합이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러 가기 전에 선지자들에게 묻던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사백여 명의 선지자가 승리를 예언했습니다. 그때 <미가야>만 패배와 왕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가야의 예언처럼 아합왕은 부상했고, 결국 죽었습니다. 수가 많아도 소용없습니다. 진리가 중요합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짓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면 어리석은 군중은 눈이 어두워서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목회자 중에는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분위기와 성도들이 좋아하는 분위기에 맞추어야 하는지, 목회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해야 하는지를 갈등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목회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행하면, 교회에서 쫓겨나는 경우가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홀로 있더라도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투브 등의 조회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진리인지가 중요합니다. 조회수에 속지 말고, 진리를 분별하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진리 위에 세워지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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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김철봉 목사]한 사람의 선견지명(先見之明)
    훌륭하신 교장 선생님 한 분 때문에 ‘한 사람의 중요성’을 어릴 적부터 나름대로 기억하면서 성장하고 살아온 것은 큰 축복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관례 중 하나가 매주 월요일 아침 전교생 조례가 운동장에서 열리는데 교장 선생님의 훈시(訓示)가 늘 있었다. 6년 동안 방학을 빼면 거의 240여 회 훈시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확실하게 기억하면서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선생님의 훈시는 딱 한 가지 ‘한 사람의 중요성’이다. 프랑스 농촌지역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이 임기를 마치고 전근을 가시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이 재배하여 만든 포도주를 ‘송별선물’로 선생님께 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감사인사를 하면서 포도주병들을 마차에 싣고 마을을 떠났다. 새 임지에 도착하여 짐을 풀어 정리를 한 후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선물로 받아온 포도주병 한 개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냥 맑은 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로 바쁘다보니 실수로 빚어진 일이겠거니 여기고 다른 병을 따보니 역시 맹물이었다. 의아해하면서 선물 받은 나머지 병들을 다 열어보았다. 이런 것을 기적이라 할까? 우연이라 할까? 실제 포도주병은 하나도 없고 모두가 맑은 물 병들이었다. 그 순간 교장 선생님과 가족들의 심경이 어떠하였을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 교장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한 사람쯤 적당히 하거나 속여도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잘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나 한 사람이 나쁜 생각을 가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을!” 그 시절이 근 65년 전이지만 초등학교 때 그 날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지금까지 내 평생의 교훈으로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실로 초등학교 6년 과정에서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늘 감사하고 있다. 6.25 제75주년(1950.6.25.-2025.6.25.)을 맞으면서 나는 특별한 두 인물을 묵상한다. 한사람은 김종오 장군(1921-1966)이다. 역사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0년 6.25전쟁 초기, 국군은 기습남침한 북괴군에 연전연패 하면서 38선을 버리고 한강까지 후퇴하고 있을 때 유일한 승전보가 들려왔다. 춘천지구를 지키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이 9,300명의 병력으로 4배나 많은 3만 7천명 되는 북한2군단(3개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 쾌속연대)의 압도적인 대규모 침공을 막아내고 승리하였다. 북한 2군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그 기세를 몰아 서울을 포위 공략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북한군 최정예 부대였다. 압도적 병력차이, 무기 열세, 짧은 방어선이라는 치명적 단점에도 6사단은 김종오 사단장(당시 대령)의 전투지휘 아래 결국 승리하였다” 무질서하게 맥없이 패퇴하던 다른 사단과 달리 질서, 사명감, 치밀한 전략, 애국심으로 훈련된 6사단은 풍전등화의 우리 조국을 구해낸 일등공신이었다. 역사가는 다시 강조한다. “이 사람마저 졌더라면 미국이 참전하기 전 이미 대한민국은 패망하고 끝났으리라” 훗날 6.25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메튜 리지웨이 장군도 이런 회고를 남긴다. “다른 한국군 부대들도 6사단장 김종오 대령처럼 준비했더라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 한 사람은 손원일 해군 제독이다. 1948.8.15.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손 제독에게 맡겨진 한국해군에는 전투함이 전무하였다.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던 손 제독은 전투함 한 대 만이라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1949, ‘해군전투함 구입 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해군 간부들부터 모금 운동을 펼쳤다. 부인 홍은혜 여사는 장교부인들과 삯바느질까지 하면서 기금마련에 동참하였다. 눈물겨운 우여곡절 과정 끝에 미 해군이 폐기해체하려던 함정 한 척을 깎아서(2만불 요구) 1만 8천불에 구입,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을 생각하여 손제독이 직접 ‘백두산함’이라 이름 지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미 해군에서 이미 그 함정 이름을 ‘Whitehead’로 부르고 있었다니 신기하다.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할 것은 북한은 6.25 남침 전에 미리 북한 「해군육전대 600명」을 무장 수송선에 태워 부산항을 기습침투, 부산을 장악하기 위해 6.25 밤 9시경 부산 앞바다에 도달하였다. 북의 이 계획이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는 어찌 됐을까? 미약한 육군은 모두 38선을 중심으로 배치돼 수도 서울을 방어하고 있었으니 북의 특공대가 남쪽에서 부산·경남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대혼란을 일으켰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비극으로 끝나버릴 수 있었다. 손 제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눈물겹게 장만한 백두산함은 마침 그 시간 남해안을 순찰하던 중 괴상한 정체불명의 선박이 부산항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급거 부산항 쪽으로 항해, 마침내 북의 괴선박을 발견하였고 용감하게 백병전까지 전개하여 마침내 괴선박과 북한해군육전대 600명을 수장시켰다. 손 제독의 혜안으로 마련된 백두산함을 이끌고 부산항을 지켜낸 그 당시 해군 전투지휘관은 최용남 함장과 최영섭 대령(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선친)이다. 최영섭 당시 갑판사관의 전투무용담은 혁혁하였다.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사실은 나라를 구한 6.25의 그 영웅 손원일 해군 제독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토록 아름다운 대한민국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낸 눈물겨운 역사의 뒷면에는 <한 사람의 위대한 헌신과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깊이 주목해야 할 것이다(요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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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5-06-26
  • [은혜의 말씀]신망애
    성도의 삶은 믿음, 소망, 사랑 3가지 면에서 진단해 볼 수 있다. A. 믿음이 없이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 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주를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가 없다. ②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믿음이 없으면 진격을 할 수가 없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쁜 것이다. ③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시작도 할 수 없다.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 동행, 연합, 닮음이 불가능하다. ④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찾을 수 없다. 믿음이 있을 때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사모하고 부르짖는다. ⑤ 믿음이 없이는 상을 받을 수가 없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주님을 믿을 때에 목숨을 다하여 충성할 수 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 믿음이 크도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하셨다. 믿음만큼, 믿음대로, 꿈 꾼 대로, 소원대로, 말한 대로, 심은 대로 되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대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였다. 믿음도 자란다. 믿음에도 알통이 있다. 그러므로 믿음의 근육을 길러서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된다. B. 소망이 없으면 소망이 없으면 인내할 수가 없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루살이 같이 막가파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부활소망이 없으면 성도의 노력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천국 소망을 가지고 나그네 세월에 인내하고, 참고, 견디어 낼 수가 있다. 현재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장차 받을 하늘의 상급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 천국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기다리며 견디어 낸다. 성도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천국 계단을 묵묵히 올라가야 한다. C. 사랑이 없으면 ①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다. ②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③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④ 사랑의 동기가 없으면 아무 말도 하지마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충고도 득이 안 되고 독이 될 뿐이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이 수고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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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5-06-18
  • 특정인 임기를 연장시키려는 꼼수라고....?
    최근 고신총회 유지재단 이사회(이사장 정태진 목사)가 고신언론사 사장 정년을 65세에서 68세로 연장하는 안을 금년 75회 고신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총회 일부에서는 현 최정기 사장의 임기를 연장시키려는 꼼수 아니냐는 지적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총회 규정을 살펴보면 최 사장은 나이연장에도 불구하고 자격이 되지 않는다. 총회규칙 제23조(직원임명) 3항에는 ‘고신 언론사 사장과 고신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은 임기가 3년이며 1차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단 고신언론사 사장의 정년은 65세로 하고 고신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은 68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 사장의 경우 이미 한차례 연임을 했기 때문에 후보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왜 이 시점에 언론사 사장 정년을 늘리는 것이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유지재단 이사장인 정태진 총회장은 “최 사장과 전혀 상관없고, 다른 기관과 연령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총회세계선교회 본부장의 임기가 68세이기 때문에 여기와 맞추기 위해 정년을 연장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당사자인 최 사장도 “그런 소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자격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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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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