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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신대복음병원 파수꾼으로 자청한 고신 교단 목사, 장로 인사들
    12월 2일 그렇게도 오랜 세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만나 교제해 왔던 고신 교단 내 핵심 인사 가운데 유독 이분들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는 고신인이라 할 수도 없는 터주대감이 과연 누구일까? 근 3~5년동안 만남이 거의 없었던 고신 은퇴장로 박재환 장로, 신주복 장로를 만났다. 고신대복음병원에 대한 의료기계도입. (풀박스등)과 관련 병원 부도 직전 까지간 배후인물로 속칭 "복음병원 바로 세우기 운동"에 깊이 개입한 인사 가운데 약방 감초처럼 활동한 인사에는 본부장 정주채 목사를 비롯하여 이성구 목사. 안영복 목사, 장로 261명이 복음병원 바로 세우기 운동 본부가 1999년 8월 23일 부산 사직동교회에서 이 운동에 지지하는 많은 교단 인사 261명이 모여 결의했다. 대회를 열고 복음병원이 “의료행위를 통한 이웃 사랑과 의술을 통한 복음 전파”라는 설립 취지에 충실한 병원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는 것과 함께 힘써 기도할 것을 다짐했다. 복음병원의 아킬레스 혁심을 촉구한 이날 참석자들은 “경영진단 결과 이후와 처리 과정에서 보여 준 총회 임원회와 총회장의 처리 방식이 매우 유감스럽다”라고 지적하며 “제49회 총회를 통해 그로 인해 야기되는 모든 혼란과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입장을 밝혀 주목을 끌었다. 25년이 지난 오늘날에 병원 운영이 그렇게 안심할 처지가 못되는 것으로 매우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 병원에 근무하는 관계자들의 마음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중론이다. 그 당시 병원 부도 직전에 도왔던 교단 교회와 장로들의 눈물 겨운 사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당시 김민남 관선 이사장이 병원을 서울 명성 교회와 동서대학 측에 넘기려고 시도하다가 교단의 뜻있는 인사들이 나서서 이를 막았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다. 황창기 고신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 김재도 원장 재직 시에 은행권 어음이 돌아와 부도 직전에 놓여 타 교단 장로 기업가(이성만 장로 은성교회 원로)에 밤중에 아파트로 찾아가서 사정과 애원을 하는 덕에 거액의 어음부도를 막아 주었다는 팩트가 있었고 고 이중한 병원장이 의료기 풀 벅스 도입과 관련 20억의 고가 장비를 무려 배나 부풀어 40억에 견적을 막아 내고 21억으로 파격적으로 가격 조정을 시도한 배후 인물이 바로 오늘 오찬을 한 박재환 장로와 신주복 장로가 함께 숨은 비화를 재차 상기 시켰다. 박재환 장로의 과거 그때에 상황을 소상히 나눈 지나간 역사의 현장 이야기를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이고 숨은 배후 인사 포도원교회를 개척하다싶이 한 조모 장로가 내어 놓은 돈 10억원 거액 얽힌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박재환 장로는 필자와 같은 경남 고성 출신이며 부산고교를 나와 부산 대학 과정을 밟은 교단 엘리트이다. 여든 중반에 살면서 지금도 과거 그때 그 사건의 기억력과 상상력에는 놀라울 정도로 해박하고 두뇌 회전이 빨라 향후 100세도 거뜬할 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주복 장로 하면 고신 전국장로회연합회 회장을 역임과 동시에 부산 서면교회 개척 설립에 공이 지대 하여 부산 교계에 초교파 부산장로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할렐루야 장로’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칠십 후반기에 접어든 신장로는 서교회를 거쳐 따로 개척한 교회에서도 헌신하다가 또다시 사직동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우여곡절(뒤얽혀 복잡하여진 사연을 겪은)의 사나이 다운 믿음의 동지이다. 오늘 오찬을 하면서 과거 이 두 분이 한 분은 크리스챤 신문 부산지사장이고 다른 한 분은 기독교연합신문 부산지사장으로서 같은 교계 언론인 멤버들이다. 한때 고 김광일 장로 변호사 출신 교회인 부산중앙교회를 매입한 교계인사 사건에 교계 언론사들이 도왔다는 것에 감사하는 뜻에서 러시아 여행 경비 일천만원을 지원한 덕으로 하여 부산기독교언론인협회 회원들이 러시아 소련 땅을 밟아 여행하였던 옛 추억을 서로 간직하여 친목의 화제로 꽃을 피웠던 오찬 시간을 모처럼 갖게 되었다. 이날 나눈 대화에서 공통 분모는 고신대 복음병원은 수많은 고신 교단 목사, 장로, 평신도들이 함께 새벽기도 때도 중보기도하는 분들이 많아 지금도 건재하며 생동하는 복음병원을 직.간접으로 헤치는 분들은 거의 하늘나라에 갔다는 공감을 같이 했다. 고신대복음병원 안에 고신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직원이 거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교단 직영병원 타이틀을 벗어날 수도 없는 영원한 교단 소속 의료 복음 기관임에 자타가 공감하고 인정하는 영원한 종합 상급 병원임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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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23
  • [목회자칼럼] 과정 지향 결과 지상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수많은 회의와 기도 후에 선택한 최고의 결정이 5년이 지난 후 최악의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고, 별로 심사숙고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급작스럽게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5년이 지난 후 최고의 유익을 주는 경우가 있다. 경험과 지혜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예측할 수는 있으나 꼭 그것이 그렇게 예측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을 진행에 있어서 발생하는 네 가지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1)과정도 결과도 나쁘다. 2)과정은 좋은데 결과는 나쁘다. 3)과정은 나쁜데 결과는 좋다. 4)과정도 결과도 좋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4번이기를 바라지만 매사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과정의 수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결과는 조금 부족해도 과정이 온전한 것과 결과와 과정이 온전한 것을 선택하고 싶다. 결과는 좋은데 과정이 좋지 못하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수취와 능욕과 함께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고, 선함이 사라지면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결코 자신과 타인에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 그래서 동일한 결과를 얻는다면 과정의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싶다. 어떻게 하겠는가? 최선을 다해 과정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의 부족과 하늘의 도움이 없어 모두가 원하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최고의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한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가 전심전력하고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고 협력한 결과 98해운대성령대집회를 은혜 가운데 잘 감당했다.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말들이 더 많다. 좋은 이야기와 격려 그리고 힘이 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에 한국교회의 대중소형 집회들이 선하고 아름다운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집회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성령의 파도 즉 부흥, 회집 인원 수 보다는 회집 교회수의 참여도 증진,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의 공유, 미래교회의 리더십 발굴과 협력이 일어나기를 소원했다. 열매와 바람의 여세를 몰아 성령대집회 시작의 이유였던, 다음세대의 부흥과 비전을 위한 2025 청소년 월드캠프에 가일 층 박차를 가하였다. 진행되는 과정이 아름다웠다. 이달 초까지 6000여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등록을 했다. 다음세대 사역자들이 모이고 함께 협력했다. 98해운대성령대집회를 통해 모인 재정이 월드캠프의 예산으로 제법 지원되었다. 청소년들의 숙소가 될 호텔과 리조트와 기숙사와 연수원도 확보가 되었다. 프로그램과 행사 장소인 벡스코와 40여명이 넘는 강사진도 순조롭게 준비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변수가 발생했다. 국회를 통해 지원을 요청한 국고 예산후원이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국회에서 심의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졌고, 과정의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예산과 관련된 국회의원과 관련 인사들과 공무원들을 정말 많이 만나 조언을 듣고, 협력을 구하였고, 소속 소위도 통과했기에, 어느 정도 아니 거의 국고 예산지원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한 순간에 모든 수고의 과정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월드캠프 준비위원회는 절망, 포기하지 않고 다시 과정의 최선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향해 달음질하고 있다. 부족한 예산을 한 달 안에 준비해야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또는 “결과는 모르겠고 과정에 최선을 다했으면 만족 한다.”는 명제는 우리가 원하는 문장이 아니다.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일사각오의 사명의식으로 우리 앞에 놓인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그래서 과정지향 결과지상의 열매를 거두고 싶다. 다짐하고 결단한다. 가장 아름다운 최선의 과정과 가장 완벽한 최고의 결과를 거두기 위해 고지를 향해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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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목회자칼럼
    2024-12-23
  • [송길원 목사] 가족의 경계와 새로운 패러다임: 2024년 한국 가족 이슈를 중심으로
    2024년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라는 주제가 논의의 중심에 섰던 해였다. 비혼 출산, 동성혼 논쟁, 초혼 연령의 상승 등 전통의 가족 개념에 도전하는 현상이 주목받았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고령화, 가족 다양성의 확대라는 과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배우 정우성과 모델 문가비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양육하겠다고 발표한 사건은 비혼 출산에 대한 논란을 촉발했다. 한국에서 비혼 출산 비율은 5% 미만으로, 여전히 전통의 가족 구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OECD 평균 비혼 출산율 41.9%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인식은 분명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비혼 출산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지원 체계와 법 제도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치권이 논의 중인 연대관계등록제와 동거혼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도입이 전통 가족의 해체를 가속화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진전일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10월 27일,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연합예배는 동성혼 합법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보여준 상징이었다. 동성 커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 이후, 전통가족 개념을 옹호하는 기독교계의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동성혼을 둘러싼 논의는 단지 법적 권리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정의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형태의 결합이 사회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신학의 질문을 제기한다. 동시에 동성 커플과 그 자녀의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전통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균형점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2023년 남성의 초혼 연령은 34.0세, 여성은 31.5세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이는 사회 경제 요인과 개인의 결혼관 변화로 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결혼과 출산의 지연으로 이어져 저출산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저출산’을 ‘저출생’이란 용어를 바꾸며 책임 소재를 재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용어 변경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한국 사회는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줄이고, 결혼하지 않아도 안정된 양육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 다문화 가정과 한부모 가정의 증가는 가족 형태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2024년 정부는 한부모 가정 지원 정책을 강화하며 이들의 안정된 생활을 도모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확대는 한국 사회의 문화 다양성을 촉진하지만, 동시에 언어와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추가 지원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2024년의 가족 이슈들은 기존의 전통 가족 모델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혼, 동성혼, 한부모, 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는 이제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다가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가족 본질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정을 가정되게 하라’는 메시지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통 가치를 지키는 한편, 새로운 가족 모델을 포용하는 방안까지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은 단순히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 안정과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핵심이다. 2024년 한국 사회는 가족의 정의와 경계가 확장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그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가족 모델을 구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될 것이다. 벌써 2025년을 기다리며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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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12-23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부산에서의 첫 성탄절 예배
    부산에서 첫 성탄절 혹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때는 언제였을까? 부산에 선교사가 도래한 이후 성탄절을 기념했겠지만 처음부터 한국인들이 성탄절을 알거나 이를 기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행사를 거행한 것은 『해은일록 海隱日錄』을 남긴 민건호(閔建鎬)에 의하면, 1884년 12월 25일(음력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아 ‘야소 생일’이라고도 불린 이날 휴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이 부산에서 성탄에 대한 첫 기록이다. 1891년 9월에는 북장로교의 베어드가, 10월에는 호주선교사 제2진 5명이 내부하게 되는데 이들이 부산에 온 이후 성탄절을 지키고 성탄절 날에는 선교사들이 모여 성탄 파티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한국인과 같이 성탄행사를 거행한 것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 한국인들이 함게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념한 첫 기록은 부산진교회가 성탄절을 지킨 1900년 12월 25일이었다. 이날 성탄 예배에는 성인 60명, 아동 57명 등 117명이 참석했는데, 예배 공간이 협소하여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예배당 바깥에 앉아 예배드렸다고 한다. 이 때의 회집은 1900년 중 가장 많이 모인 예배였다고 한다. 1900년 11월 일 주일에는 남자15명, 여자 48명 등 63명이 회집했고, 12월 16일에는 50명, 12월 23일에는 64명이 참석했으나 12월 25일에는 117며잉 모였으니 평소의 두배가 회집한 것이다. 이때의 성탄 예배는 왕길지 목사 부임 이후 첫 번째 맞는 성탄절이었다. 이날 예배에 대해서 왕길지 목사는 자신의 일기에서 자세한 기록을 남겨주고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당시 부산진교회 성탄 예배와 축하 성도들의 잔치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일기를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오늘은 무척 즐거운 날이었다. 아침에는 많은 선물에 특히 우리 아이들이 감격해 했다. 선교관은 (한국과 영국의) 국기와 중국식 등불, 초록 잎들로 장식되었다. 아침 일찍 날씨가 어떤지 보려고 나갔더니, 놀랍게도 우리의 한국식 교회 건물 위에 태극기 두 개가 나부끼고 있었고, 선교관 앞뜰에는 막대에 달린 초롱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예배 시간은 열시 반이었다. 이날 아침에 모인 성도들을 다 수용할 만큼 예배당 크기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날씨가 매우 따뜻하여 거의 여름 날씨 같아 감사했다. 그래서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마루에도 앉힐 수 있었다. 여자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교회 안에 앉고, 바깥쪽에는 남자 아이들이 앉았다. 몇몇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은 빨강, 파랑, 초록, 자홍색 비단옷으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된 옷을 입었고, 심지어 청년들 중 몇 명은 긴 자홍색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왔다. 연로한 어른들 다수는, 크게 가난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 흰 비단옷을 입고 왔다. 모두가 가장 멋진 정장과 드레스를 입고 예배에 참석했다. 그 모습은 장관이기도 했지만, 또한 우리 교인들이 성탄절을 ‘그리스도의 탄신일’이라고 부르며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예배는 짧고 멋지고 긴장감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회중의 찬송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어른들은 비록 모르는 성탄 찬송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곡을 함께 불렀고, 남녀 아이들이 다 즐거워했다. 예배 후, 주일학교에 개근한 아이들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큰 아이들은 최근에 번역된 한글 신약전서를 받았다. 우리 돈 원가로는 1실링에 불과한 책이지만, 한국 사람들은 지금 너무 가난해서 그들에게는 이 성경이 호주에서 열 배나 비싼 책과 맞먹는 가치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석판과 색종이로 감싼 석필을 받고 매우 기뻐했다. 그 후 선교사 부인들이 교인들 각 사람에게 땅콩, 일본 사탕, 일본 과자 두 개, 오렌지 한 개가 든 종이 봉지 모양의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출석한 사람 모두가 그런 선물 봉지를 하나씩 받았고, 몇몇 사람에게 오후에 몸이 약하거나 아파서 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선물봉지를 들려 보냈다. 분배된 종이 봉지는 전부 160개였다. 모임 시작 때 계수한 인원은 여자 아이가 30명, 남자 아이가 27명, 여자가 48명, 남자가 12명이었는데, 그런 차이가 난 것은 어머니나 큰누나가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이 계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자 선교관 앞과 교회 앞마당에 등불을 밝혔다. 남자 아이들이 마당에 모여 교사들과 장년들 몇 사람의 지도에 따라 등불 아래서 여러 가지 게임을 즐겼다. 그 등불이 교인들에게 기독교인의 명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오늘은 우리가 매우 잘 어울렸던 날, 교인들 각자가 행복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보여준 날이다. 과연 저 옛날 베들레헴 들판에서 선포되었던 천사들의 노래가 여기서도 성취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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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4-12-23
  • [은혜의 말씀] 내가 사는 날에(열왕기하 20:16~21)
    우리의 인생은 단답형이 아니고 복합방정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보면 다사다난, 희로애락, 돌발 변수, 우환질고, 흥망성쇠가 교차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있다. 한판승이 아니라 9회 말 투아웃 쓰리볼 부터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왕들은 다윗, 히스기야, 여호사밧, 요시야이다. 하나같이 공과가 있고 빛과 어두움이 있다. 그 중에서도 히스기야 왕은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승을 거두었고, 죽을병이 걸렸을 때는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해외로부터 축하사절단이 왔을 때는 가진 것을 다 보여주며 자랑했고, 결국 자식 농사는 실패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 우주전, 공중전 다 겪은 셈이다. 히스기야 왕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축복 같은 저주가 있고 저주 같은 축복이 있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 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히스기야 왕은 다윗 이후 300년 만에 나타난 경건한 왕이었다.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산당을 제거하였고 주상을 깨트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 왕을 이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다시 세우고 우상 숭배를 위해 제단을 쌓았다. 여호와의 성전 앞에 해와 달을 섬기는 단을 세웠다. 모세 이후 여호수아, 엘리야 이후 엘리사, 다윗 이후 솔로몬, 바울과 디모데처럼, 신앙생활은 다음 주자로의 계승이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자수성가가 있고 각자도생이 있다. 아버지가 훌륭하다고 자식이 자동으로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와 그 아들 므낫세를 보면 그러하다. 자식 걱정을 너무 하는 것도 소용없고 부질없는 것이다. 주께 맡겨야 된다. 하나님께서 무서운 적을 다 물리쳐 주시고, 죽을병에서 건져서 살려주시니, 히스기야가 그만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물창고를 보여주고 자랑을 하였다. 인생은 호사다마다. 큰 축복 뒤에 큰 시험이 오게 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히스기야에 왕에게 경고하였다. 자랑한 모든 것이 바벨론의 침략에 다 빼앗기게 되어 하나도 남지 않고, 자손 중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때에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 진데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라고 대답하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연한을 인정하니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우리의 사는 날, 유통기한은 짧다. 메뚜기도 한 철,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우리의 연한이 무한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에 자랑하지 말고 은혜에 보답하라. 우리는 항상 오늘 하루를 천년같이, 그리고 내일이 없는 듯이 살아가야 한다.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고, 다가올 미래를 미리 걱정하며 불안해 할 것이 없다. 돌발변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고군분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잠시 교만했다면 얼른 회개, 바로 회개하라. 그리고 회개로 비워낸 그 자리를 성령의 은혜로 가득 채우라. 히스기야처럼 잠시 우쭐해도 얼른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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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24-12-10
  • [서임중칼럼] Do you Believe?
    항공기나 배는 나침반이 있어 좌표를 정하고 나아가듯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삶의 좌표를 정하고 나아간다. 그럼에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보면 기상예보와는 다른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고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는 경험하는 자의 몫이다. 나에게도 바람과 풍랑이 밀려와 내 삶이 곤두박질할 것 같은 힘든 시간이 흐르는 때가 있었다.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나의 삶을 헤집고 나의 사역을 송두리째 흐트러트리려는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절박한 마음은 걸레처럼 짓이겨진 상황에서도 말씀이 나침반이 되어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어느 날이었다. 우연하게도 영화 한 편을 관람했다. <Do You Believe?> 120분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얼굴을 감싸고 숨을 몰아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일어섰다. 나의 오늘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 내용은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침반이 되었다. 살아가노라면 항상 ‘Why?’라는 질문을 한다. 너나없이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연속이다. ‘Do You Believe?’의 내용도 그랬다. ‘매튜’목사는 우연히 길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 남자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는다”라고 대답을 하는데 그 남자는 다시 한마디 던진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매튜’목사는 다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삶의 좌표를 잃은 열두 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가 엮어지는 삶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믿음 생활을 잘하면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모욕을 당하고, 좌절과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갈등하면서 Why? 라고 질문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 점차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되고, 행동하는 믿음의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의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물처럼 흘러 젖어 들고 작은 나무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면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은 우리 인생 여정에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한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요셉을 통하여, 다윗을 통하여, 바울 사도를 통하여 Why에 대한 답을 믿음 있는 사람이라면 깨닫고 실천하면서 살아 가지만 막상 내 삶의 여정에 Why? 라는 상황에 부딪히면 십자가 사랑의 은혜를 놓치기 쉽다. 결국 믿음의 눈을 열고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의 작품 전부를 보게 되면서 너나없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영화가 마무리되면서 OST가 흐르는 가운데 화면을 채우는 글은 눈을 뜨게 하고 귀를 열게 하고 마음을 추스르게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전해진다. <인간은 이 세상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닥에서 노는 아이 같고 기껏해야 벽걸이 한쪽 면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그 한쪽은 때로는 지저분하고 색이나 디자인이 영 어색해 보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바닥에서 일어나 벽걸이 뒷면도 보게 될 것인데 그때는 주님의 놀라운 작품 전체가 확실히 보일 것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십자가도 그때 확실히 볼 것입니다. 그 거대한 벽걸이 뒷면에서 독특한 실 한 줄이 눈에 뛸 것입니다. 디자인도 색도 특이한데 그 한 가닥이 각 사람의 삶입니다. 이 실이 가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한 가닥이라도 빠지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그분의 큰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Do You Believe?> 나는 온갖 희비의 삶 중심에서 나름 혜안(慧眼)과 영안(靈眼)과 심안(心眼)을 열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는 줄 알았는데 멈추어 돌아보면 어린아이처럼 내 삶의 좁은 방바닥 같은 영역에서 놀면서 기껏해야 내가 바라보는 벽걸이 한쪽을 보면서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벽걸이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데 나는 ‘Do You Believe?’에 진실로 ‘아멘' 할 수 있는가? 만감이 교차하였다. 대형 교회 당회장의 현실이 행복지수보다는 불편 지수가 높아져 가면서 한쪽 벽걸이만 보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나 자신이 싫어지면서 벽걸이 너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앞뒤 계산 없이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작품의 앞면만 아니라 뒷면까지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영역을 보다 가까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Do You Believe?’를 물었다. 하나같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한쪽 벽걸이를 보면서 그 작품의 전부를 다 본 듯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본다. 이런 사람들은 내 생각이 기준이 되어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공동체를 카오스 현상으로 만들어간다. 예컨대 교회 생활에서 새벽기도, 헌금, 주초문제 등은 특징이지 본질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믿음의 척도에 기준이 되어 버렸고, 섬김의 본질인 직분이 자신도 모르게 계급개념으로 둔갑하여 직무수행의 더 본질적인 상대방을 존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가 아름다움이 연주되지 못하고 추한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추함은(醜) 술병을 들고 가면을 쓰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헛소리하는 것을 뜻한다. 답지 못한 행태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자괴감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나 벽걸이 뒷면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뜬 사람은 뒤엉켜 있는 듯한 각양각색의 수많은 실들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그 가운데 한 줄임을 자각하면서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Do You Believe?’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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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성서연구] 우리가 전한 복음
    모든 목사님이 강단에 섭니다. 한 주간에도 많은 설교를 합니다. 한국교회 목사님처럼 많이 설교하는 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많은 부담을 느꼈습니다. 저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설교를 많이 하는데, 과연 그 설교는 어떤 설교일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가너희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했는데,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누가 <당신이 이런 내용을 전했다고 하던데 맞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렇소. 내가 전한 복음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전했습니다. 사울표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자신이 전한 말씀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다른 분에게 가서 배우세요>라든가, <저도 제가 전하는 말씀이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답니다>라는 등의 흔들리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확신 가운데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청중들에게 강력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강단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까요? 매우 다양한 주제의 설교가 선포됩니다. 가정생활, 경제생활, 인간관계, 욕망을 다스리는 법, 세상에서의 성취와 그 관리, 은밀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법, 성도의 올바른 정치관, 세계관, 통일에 대한 성도의 마음, 차별금지법 등에 대한 대응책 등, 다양한 주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제들이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들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설교일까요? 아니면 옷에 장식품을 붙이는 것과 같을까요? 죽을 사람을 살게 하려면 입은 옷도 다 벗게 하고, 수술대에 눕혀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입은 옷에 장식품만 붙여주면 그가 살까요? 이런 의미에서 설교가 좀 더 본질에 접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부터인가 강단에서 성도들을 보면서 혹시 이 예배가 생애 마지막 예배가 될 성도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사에게도 마지막 설교일 수 있겠지요. 마지막이라면 부수적인 주변 주제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창작한 게 아닙니다. 15장 3절에서 그는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라고 했습니다. 받은 것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1장 11~1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15장 3~4절은 이렇습니다.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성경이 뒷받침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이 모두 함께 읽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반박에 대해 성경으로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사와 성도 모두가 구원의 복음에 집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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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시사칼럼] 독 안의 게인가 새끼거북이 될 것인가
    지난 2007년 이맘 때(12월 7일)에 충남 앞바다에서 선박 간 충돌로 인해 한국역사 상 최악의 기름유출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쏟아진 기름 물량만 12,547킬로리터, 환산하면 1,200만 리터 넘는 양이 하필이면 청정해역 안으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거대한 기름띠가 바다를 포위했고, 넘실대는 시커먼 파도가 해안으로 돌진했으며, 해변은 모래와 미역 대신 온통 기름덩어리로 뒤엉켜버리고 말았습니다. 보거나 맡아도 괴로운 현장이었으나, 무엇보다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재앙(연합통신)이 일어난 태안 해양생태계의 80%가 타격을 입었는데 생명력이 강하기로 소문 난 불가사리마저 폐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해외언론들이 앞다투어 보도하는 가운데 완전한 회복에 수십 년이 걸릴 거라는 예측이 난무했고, 사건 및 후속 대응 현장을 취재하던 국내언론사마저(이를테면 한겨레 등) 무조건 10년 이상은 필요하리라 보았습니다. 그만큼 상황은 긴박했고 엄중했으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건 직후 시군 당국은 즉각 비상재해와 재난지역을 선포했고 공무원과 군인들이 투입되면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 인파가 만리포로 향하는 도로를 가득 메우는 수준으로 늘어나 물경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하는 대동단결의 역사가 펼쳐졌던 것입니다. 당시 섬기던 교회에서도 청년들이 휴가까지 얻어가면서 각자 기름을 닦을 헝겊과 컵라면 등 먹을거리를 챙겨서 결연한 출정식(?)을 치른 후 서해안으로 향하는 교회 차량에 탑승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교회 어른들이 박수를 쳐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자 해안의 풍경이 바꼈습니다. 검은 기름 띠대신 사람들이 걸친 흰 우의가 해안선을 따라 거대한 하얀 띠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적인 사랑의 띠 앞에서 재앙은 무력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기름포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일이 바위와 해변의 기름을 손수 닦아내기 시작했지요.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와 육지가 제빛을 찾았고 괴사했던 해초류가 살아났고 떠났던 물고기들이 돌아왔습니다. 회복은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이 놀라운 역사를 담은 22만건의 기록물은 2022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언젠가 “독 안의 게”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참게는 털이 있고 발톱이 날카로워서 아무리 깊은 독 속에 집어넣어도 다시 기어나온답니다. 그러나 예닐곱마리릉 한꺼번에 넣으면 그러지를 못한다지요. 한 마리가 위로 올라가려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같이 떨어지기 때문이랍니다. 반면에 새끼바다거북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네요. 어미 거북은 알을 날기 위해 뭍으로 나와 깊이 50, 넓이 20센티미터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500-1,000개의 알을 낳는데, 부화한 새끼들은 사전에 훈련이라도 받은듯 서로 힘을 합해서 구덩이를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이 천정에 있는 모래를 파고, 가운데 녀석들은 벽을 허물고, 아래에 있는 녀석들은 떨어지는 모래를 다져서 발판 삼아 올라옵니다. 학자들이 실험해 본 결과, 알이 하나면 탈출 확률 25%, 둘일 때 60%, 알이 네 개 이상이면 100%였다고 합니다. 경험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새끼들이 본능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위기를 극복한 천연적인 사례입니다. 위기 속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방버둥쳐도 소용이 없거늘, 하물며 다른 이들의 발목을 붙잡으면 다같이 패망함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큰 위기라도 서로 힘을 합치면 상생의 길이 있음을 태안에 모인 사람들과 바닷가에 모인 새끼거북들이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구성원들은 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교회구성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가겠습니까? 온통 캄캄한 절망의 띠가 휘감을지라도 모두 함께 사랑의 띠를 두른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구덩이에 빠졌던 예레미야를 에벳멜렉이 구출했던 것처럼 특별히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되게 하신 성령의 줄을 영차영차 함께 당긴다면 어떤 함정이라도 거뜬하게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결코 독 안에 든 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손도손 올라가는 바다거북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겐 국난극복의 디엔에이(DNA)가 있다 했습니다. 같이 협력해서 무너진 경제를 일으킵시다. 추락한 국격을 회복합시다. 꺼져가는 민주주의를 다시 살립시다. 기울어가는 교회을 떠받칩시다.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다 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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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은혜의말씀] 시대의 우울을 거절하라(야고보서 5:17~18)
    현실의 한복판에서 신앙인도 시험이 들고 우울증이 올 수가 있다. 신앙인이 양심에 가책을 더 받기 쉽고, 거룩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천국을 소망하지만 골치 아프고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갈등구조에 빠지고 상처받기가 쉽다. 머리 둘 곳이 없고 정신이 분열 될 듯하고 만정이 떨어지고 살아갈 여망을 잃어버릴 때가 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되지만 세상을 보고,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시험에 들고 우울해진다. 팔랑귀가 되어 입술의 30초가 가슴에 30년이 된다. 말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지고 급 우울이 올 수 있다. 세상은 변화무쌍하며 돌발변수가 많다. 현재 대한민국은 1인 가구가 40% 가까이 되며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다. 사람들이 대인관계를 두려워하고 기계인 휴대폰을 가지고 SNS, 유튜브를 편안해 하다 보니 점점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 패배감, 열등감, 낭패감, 수치감, 죄책감이 만성이 되어 대한민국은 집단 패닉 상태이다. 무기력, 무반응, 무대책, 무관심, 무계획 상태로 빠져 들어간다. 코로나 이후에 생태계에 많은 변화가 왔고 저출생, 지방소멸이 몰고 온 축소사회, 개인주의사회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 표현들이 사람들의 마음마저 의기소침하게 위축시켰다. 사춘기의 공포와 7포 시대에 빠진 청년들의 입시전쟁, 취업전쟁, 사랑과 전쟁을 통해서 사회부적응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갱년기 장애가 오고 정치, 경제 현장에서 극심한 분열과 갈등으로 인한 분노조절 장애가 왔다. 정글과 같은 사회의 무한경쟁 시대에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조차 이론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로 인한 공황장애와 정신분열이 오고 있다. 신앙인도 우울증을 겪는다. 그러나 엘리야와 같이 기도하기 때문에 더 빨리 낫는다. 베드로처럼 엎어지고 자빠져도 얼른 회개하면 된다. 가롯 유다처럼 똥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 해결된다. 유튜브를 보면 알고리즘 추천 영상들이 먼저 나오는데, 그것은 이전에 무엇을 검색하고 봤는지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삶에도 다 연결된 알고리즘이 있고 말이 씨가 된다. 그러니 신앙생활에서도 원(망)불(평)교(만)하지 말고 용(서)감사하라. 사울왕은 악령에 의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에 다윗이 연주한 수금으로 인하여 뮤직테라피(음악치료)가 되었다. 그러나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불신하며 반역하며 신접한 여자에게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다윗은 훨씬 더 악조건이 많았지만 현실을 원불교하지 않고, 시를 적고 노래하며 춤추며 맡은 양을 지극 정성으로 케어하고(텃밭테라피) 하나님 앞에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고백하며 표현했기 때문에 건강하였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보통의 사람으로,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보낸 문자 하나에 까무러치는 연약하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루만지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일으켜 주셨고, 그가 간절히 기도한대로 응답하셨다. 모든 눈물과 고통, 시대가 주는 우울감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 멋지게 힘차게 살아가자. 마음 문을 열고 소그룹에 나아가서 함께 어울리고 말씀과 기도를 나눌 때 풍성해지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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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9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와 함께 연합예배의 장으로(2)
    우리는 지난 호에 다음세대와 함께 연합예배 현장으로 나와 함께 예배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교회연합운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 98해운대성령대집회는 부산성시화운동본부의 주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단체가 행사를 할 때마다 강조하는 게 있습니다. 부산 교회 연합운동을 할 때마다 세 가지 다짐을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외에는 스타를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을 많이 내는 교회도 담임 목사님 이름 한 줄도 행사에 넣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형 교회도 담임 목사님 마이크 한 번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규모가 크고 어마어마한 기여를 하신 분도 자리에 세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만 남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산에서 교회연합행사가 되는 겁니다. 저도 98해운대성령대집회 현장에서 성도분들과 함께 4시간 동안 땡볕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정말 좋습니다. 누구도 따로 높이지 않고, 누구도 스타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찬양받으시는 자리가 되도록 마음을 모아서 준비하고 진행하기 때문에 모두가 한 맘으로 예배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벤트가 아닌 운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한 번 모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연합행사를 계속 성장시키고 키워가서 빌드업을 하는 거예요. 이것을 위해서 지난 8월에 청년 코스타를 부산에서 3년째 했습니다. 청년들이 너무 좋아했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부 담당목사님이 저한테 “목사님! 부산에 우리가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지 모릅니다. 부산에 있다는 게 너무 좋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서울에서 기차 타고 오고, 비행기 타고 오는 그런 행사를 우리는 출퇴근을 했습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게다가 내년 1월에는 청소년 월드캠프를 부산 벡스코에서 엽니다. 여기도 1만 명이 모일 겁니다. 어마어마한 행사입니다. 이 행사들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98해운대성령대집회를 위해서 한 주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한 교회들이 많이 있고, 24시간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일주일 내내 홀리위크라고 해서 부산 시내 곳곳의 교회에서 모여서 찬양 집회를 모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계속 운동을 만들어가고, 운동을 만들어서 교회가 체질이 바뀌는 그리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부산 교회가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 교회를 넘어서 공교회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이후로 각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위기입니다. 그래서 다들 “우리 교회 챙겨야 해! 우리 교회 잘 돼야 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회만! 우리 교회만!” 생각하고 다른 교회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교회는 살고 어떤 교회는 위기를 만나는 쏠림현상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타이타닉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배가 한쪽으로 쏠리는 쏠림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쏠리면 다 같이 죽는 겁니다. 당장 내 교회에 새 가족들이 오시고, 다음세대가 잘 되고... 물론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좋아할 일이 아닌 겁니다. 만약 다른 교회는 다 어려운데 우리 교회만 잘 되면, 그렇게 해서 우리 주변 교회가 다 죽으면 결국 모든 교회가 함께 죽는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생길까요? 교회들이 자기 교회 살리는 일에만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만 살자고 하면 결국 모두 다 못 살아남습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아야 다 사는 겁니다. 부산성시화운동본부는 위의 세 가지 다짐을 가지고 교회연합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다짐은 우리 각 교회가 다음세대 사역을 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각 교회의 교역자나 교사가 예수님보다 더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아이들과 학생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 행사가 한 두 개로 끝나서는 안 되고 계속적으로 이어져서 운동이 되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신앙 성장을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도 함께 살리는 공동체로서의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이 시대를 살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지체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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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세대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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