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1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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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
    먼저 제21대 이재명 대통령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축하의 말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선거가 어느때보다 분열된 모습을 보여왔고, 이로 인해 새 대통령은 국민통합이라는 큰 과제를 감당해야 한다는 걱정이 앞선다. 우리나라는 지난 6개월간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으로 정치 리더십이 가져온 국정 불안정과 사회적 분열을 겪어 왔다. 대외적으로 안보 위협과 국제질서 재편,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국가 신뢰가 흔들리고, 대내적으로는 리더십 부재와 불필요한 소모적 갈등으로 민생의 어려움이 누적되었다. 새로 선출된 대통령은 국정 안정은 물론, 국민통합이라는 큰 과제를 안고, 국민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책무를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대통령은 지난 시대의 잘못을 거울삼아 지지해 준 국민뿐 아니라, 지지하지 않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으로서 이념적 간극을 좁히고, 민생과 경제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국민의 삶이 보다 나아지도록 하는데 국정의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감사한 것은 대통령도 취임사를 통해 국민을 주인으로 여기고 ‘국민 주권 정부’라는 별칭을 세울 만큼, 새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를 대통합하는 머슴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이 잘 지켜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국제정세도 요동치고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수년째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지역 전쟁 상황도 심각한 수준이다. 국가간 전쟁과 갈등은 계속될 예정이며, 어느때보다 자주국방의 기반 위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내 상황도 쉽지 않다. 저출산 문제를 비롯해 기후 재난 대응, 교육과 의료, 문화 등 다양한 현안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 등은 한국교회와 시민사회가 함께 극복해 가야 할 요소들이 많다. 종교와 시민단체들도 국정 동반자로 인식하면서 함께 우리 사회의 치유와 회복, 통합을 위해 협력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후보시절 우리사회 약하고 소외되고 갇힌 자들을 돌아보기 위해 품었던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이제 지도자의 자리에서, 약속했던 바와 같이 초심을 지키며 재임 기간 내내 열어가 주기를 기대한다. 다시 한 번 제21대 대통령 취임을 축하드린다. 임기를 마칠 때 온 국민의 이해와 지지 속에 전례 없는 감동을 남길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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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5-06-30
  • 전광훈, “부산이 제일 멍청한 지역”
    전광훈 씨가 지난 23일 ‘부산/경남 자유마을대회’에서 부산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전 씨는 “대한민국은 반드시 북한 연방제로 넘어가게 돼 있다. 이걸 제일 모르는 사람이 부산 여러분”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부산은 6·25를 안 겪어봐서 그렇다. 부산 사람들은 당해봐야 한다”며 “이번에 연방제로 넘어가 김정은한테 시달려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말해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지역 모 교계 인사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발언”이라며 “누가 멍청한지 모르겠다”고 일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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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5-06-30
  • 부적절한 영상 송출 사고 잇따라
    최근 새벽시간 교회 유튜브 방송 중 부적절한 영상이 송출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지난 18일 온누리교회(이재훈 목사)는 새벽예배 유튜브 방송 중 북한 인공기 영상이 송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교회측은 당일 홈페이지에 “인공기 영상은 28분 56초부터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나왔다. 이 영상은 약 22초간 송출되다가 정상화면으로 전환됐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내수동교회(박지웅 목사)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측은 “새벽예배 시작 직전 교회 유튜브 방송이 외부 해킹으로 인해 약 50초간 부적절한 영상이 노출되는 사고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현재 두 교회는 유튜브 방송을 중지하면서 사고 원인에 대해 조사 중에 있으며, 재발방지를 위해 대응책 마련을 준비중이다. 한편, 이번 사건이 북한 해킹조직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북한 인공기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북한 해킹조직이 의심을 받고 있다. 만약 북한의 소행이 사실이라면, 한국교회의 보안 시스템 점검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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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25-06-30
  • [교회법특강 8] 주일학교는 왜 있을까?
    주일학교(교회학교)는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조직되었다. 교회 성장과 신앙 전수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저출산 등으로 인해 주일학교가 쇠퇴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교단과 교회마다 여러 방식을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일학교에 대해 교회법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까? 주일학교는 조선예수교장로교회 헌법(1934년)에 언급된다. <예배모범>(7장 주일학교)에 실려 있다. 주일학교는 어떤 순서(절차)로 모이며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교장과 교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나온다. 우선, 주일학교에서 적용하는 절차는 기도, 찬송, 신경, 교회의 요리(要理)와 헌법 등을 공부하고 전도사업을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다. 둘째, 주일학교로 인해 주일 공예배에 출석하는 것과 또한 부모가 직접 자녀 교훈하는 책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셋째, 항상 당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넷째, 주일학교 교장은 교사 선발, 학생들의 공부와 경건한 자세에 전체 책임을 맡는다. 다섯째, 주일학교교사는 자 성경을 연구하며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직 믿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권면하고 심방하며, 특별히 아프거나 사고가 있을 때 심방해서 하나님의 복을 빌어야 한다. 근데 이렇게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며, 신경과 요리, 헌법을 공부하며, 전도사업을 위해 헌금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일까?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지만, 특별히 입교(入敎, 공적 신앙고백)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역시 1934년 헌법 <예배모범>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교회 교우에게서 출생한 자녀로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는 교회의 권고와 치리 하에 있고 이들에게 문자를 가르치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요리문답을 독습하게 하며, 기도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며, 성년이 된 다음에는 출생하면서부터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 참여를 청원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와 특권임을 기억케 할지니라”(예배모범. 10장: 입교(入敎)예식) 이로 볼 때 주일학교(교회학교)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즉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가 주일학교에서 교육을 잘 받아서 성년이 된 다음 입교를 통해 “교회의 교우 된 것을 알게 하고 개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도록”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영지에 속한 교회들은 <교회법>을 작성했다(1563년). 그런데 그 <교회법> 목차를 보면 주목할 점이 있다: 설교가 제일 먼저 나오고, 둘째로 세례, 셋째 요리문답(要理問答), 넷째 성찬, 다섯째 권징, 여섯째로 구제/기도 등의 순서가 나온다. 이 순서를 잘 보면 <교회법>의 목적은 말씀이 온 회중에게 전해지고 가르쳐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일 먼저 설교가 나온다. 그런데 설교가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언약의 표인 세례가 나온다. 이를 위해 주일학교에서 요리문답으로 교육한다. 그리고 입교를 통해 성찬에 참여하게 한다. 여기서도 주일학교(교회학교) 교육의 목적이 분명히 나온다. 즉, 주일학교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것을 배우고, 또 성경과 신경과 요리문답, 헌법을 공부해서 마침내 입교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교인된 것을 알고,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교회법>은 직분과 치리회의 질서를 넘어, 신앙교육을 위한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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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법특강
    2025-06-29
  • [목회자칼럼]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이제 곧 여름사역이 시작된다. 성경학교와 수련회와 단기선교와 아웃리치의 현장들이다. 성경학교와 수련회는 신앙훈련과 체험이 중심이고, 단기선교와 아웃리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상들에게 접근해서 지원하는 활동이 중심이다. 예외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름사역의 봉사자들 대부분은 삶의 여유와 은혜의 고백과 은사의 달란트를 가진 자들이 감사와 사명과 의무라는 신앙의 관점에서 자원하고 헌신한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봉사자들은 동행자가 아니라 시혜자의 관점에서 대상자들에게 접근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도적 사역과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실질적으로 시혜자적 위치와 능력, 헌신자적 마음과 신체를 가진 자들이 봉사자가 되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중심적 행동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현지의 상황과 일체화 되지 못하는 문제를 파생할 뿐만 아니라 차라리 지원, 봉사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풀러신학교 총장이었던 리차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진리의 수호라는 미명하에 타 종교와 일반사회공동체에 자행한 기독교의 비예의적인 일들을 비판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라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시대와 지역과 공동체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신념 있는 시민교양’이란, 성경의 진리를 주장하면서도 무례하게 행하지 않고, 다른 신앙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충돌하지 말고, 정중하고 친절한 관용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반인들이 가지지 아니한 ‘비일상적인 정중함’으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양과 예절을 말하는 것이다. 타 종교와 사회공동체에 기독교적 교양과 예의를 가지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를 포기하거나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구원의 역사에 선하다고 말하는 다원주의적 성향이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수준의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진리에 대한 용인이 아니다. 주객이 전도된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과 우월의식, 종교암흑기였던 중세시대의 진리독점과 권력탐욕이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포위하고 박해하였을 때 자행된 잔인함과 거만함의 치욕스런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와 민족 간의 전쟁, 지역과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 개인과 개인의 혐오 그 기저에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종교적 지배성, 우월성,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가 시행하는 여름사역의 현장에도 십자군 전쟁의 교만함과 중세시대의 잔인함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단기선교 현장에서 믿음과 신앙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실천하는 땅 밟기-타종교의 전당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건물에 십자가를 그리고, 봉헌함에 전도지를 삽입하는 행위-는 타종교와 타종교인에 대한 무례와 교만이다. 교회 마당에서 타종교인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교회 건물에 부적을 그리고, 헌금함에 탱화나 코란을 넣는다고 생각해보라. 또 아웃리치 현장에서 시행되는 도시교회 프로그램의 강제적 주입, 맘몬주의와 번영신학의 자랑, 지역의식과 토속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폄하하는 정복주의적 우월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무례함과 거만함이다. 종교를 포괄적 의미로 정의하면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통해 학습되고 축척되어진 문화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가 문화보다 우위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종교가 문화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오히려 하위개념을 가지고 있다. 일반인들이 보면 종교는 단지 한 부류의 집단들이 그들 안에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문화현상일 뿐이다. 또 문화에는 하급문화, 상급문화가 없다. 다름의 문화가 있을 뿐이다. 일반인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불친절하고, 거만하고 차별하고, 폄하하고, 혐오하는 자들을 향해 무례한 자들이라고 낙인찍는데, 하물며 절대적 사랑과 주도적 희생과 순교적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비성경적 무례함을 가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모든 사역자들이 다 ‘신념 있는 시민교양’을 가짐으로 이번 여름사역의 현장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로 넘쳐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적 예절과 교양을 가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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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이상규교수의역사탐색]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
    6.25전쟁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었다. 3년1개월 2일, 곧 1,129일 간의 전쟁은 민족적 시련이자 국가적 재난이었다. 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건물, 도로, 철도, 교량, 항만 시설 등 국가 기간산업은 파괴되었다. 주택, 교육·의료시설, 종교시설, 문화재도 파괴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인명 피해였다. 한국군 62만 명, 유엔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국군 100만 명 등 군인 270만여 명과 민간인 250만여 명(남한 99만968명, 북한 150만)이 죽거나 다쳤고, 남편을 잃은 과부는 30만 명, 이들에게 딸린 자녀들은 약 51만7천 명에 달했다. 10만 명의 고아가 생겨났고, 이산가족은 1천만 명에 달했다.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은 “이 나라를 복구하는 데 최소한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국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대국으로 우뚝섰다. 기적이었다. 6.25는 처음부터 불리한 전쟁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비안정적인 상태였다. 해방 후 좌우익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1948년 4월 3일에는 제주도 4.3사건이 일어나고, 그해 10월 20일에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게릴라전을 포함한 정치적 대립으로 약 10만 명이 희생자가 생겨났다. 1950년 5월 30일에는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나고 총선이 실시되었는데, 전체 의석 210석 중에서 이승만의 집권 세력은 겨우 30여 석을 얻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126명이 당선되었다. 정치적 불안정의 반영이었다. 군사적으로 남한은 열세였다. 북한군 병력은 201,050명이었으나 남한은 그 절반인 103,827명에 불과했고, 북한의 항공기는 226대였으나 우리는 22대, 북한의 함정은 110척이었으나 우리는 겨우 36척에 불과했다. 북한의 화포는 2,492문에 달했으나 우리는 절반인 1,051문뿐이었다. 북한은 242대의 전차가 있었으나 우리에게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절대적인 열세였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전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은 대거 교체되어 지휘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2사단장 유준홍 준장이 의정부 7사단장으로, 1연대장 김종오 대령이 원주 6사단장으로, 16연대장 이성가 대령이 강릉 8사단장으로, 국방부 1국장 이종찬 대령이 서울수도사단장으로, 8사단장 이형근 준장이 대전 2사단장으로, 7사단장 이준식 소장이 육사교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사단 소속이었던 2연대가 춘천 6사단으로 예속되어 병력이 서울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던 중 전쟁을 맞았다. 의정부 7사단의 예비연대인 25연대도 부대이동명령을 받고 온양에서 출발하여 목적지인 의정부에 도착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다. 전쟁 준비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도선에서 먼 후방에서 게릴라소탕전을 벌이고 있어서 남침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더 심각한 현실은 농활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병들은 주말에 대대적인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국외적으로 볼 때, 남한은 무방비 상태였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군을 시작하여 1949년 6월 말에는 군사고문단 495명 외에는 완전히 철수했다. 그해 8월에는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그해 10월에는 중국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김일성 정권에 힘을 부여하였고, 한반도에서 패권을 노리는 미국과 소련의 대결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했다. 국제적으로나 국외 사정으로 볼 때도 불리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6.25는 패배가 예견된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을 일곱가지만 지적해 두고자 한다. 첫째, 미국의 신속한 참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미조리 주에 있는 사저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런데 북한군의 남침 보고를 받고 이틀 후인 6월 27일 성명을 발표하고 참전과 파병을 결정했다. 그때에는 애치슨 라인이 유효했고, 한미 간에 방위조약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은 참전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참전 결정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 공군의 한국전에 대한 작전 명령을 허락했고, 이틀 후 미육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허락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1주일도 않되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공군과 육군을 한반도에 파견하였고, 전쟁기간 중 파견된 미군은 40만 명이 넘었다. 트루먼의 신속히 결정 배후에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간절한 호소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공산당이 지배하게 되면 5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찬들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호소가 트루먼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 지도부의 김두봉과 홍명희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이 소련 문서에서 드러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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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6-29
  • [교회건축칼럼] 장래증축과 확장성을 고려한 건축 계획
    교회건축이 완성되고 입당 후 약 2~3년 정도가 지나면, 한국교회는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주차장의 부족현상이며 둘째는 교육공간의 부족 현상이다. 주차장의 부족 현상은 현재 주차장법이지방 조례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100㎡마다 당 1대의 주차를 설치하게 되어있다. 가령 1000평 구모의 교회라면 약 1000석 규모가 되는데 이 경우 33대의 법적인 주차대수가 확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현실상 겨우 법적주차대수정도밖에는 설치 할 수 없다. 왜냐하면 1대의 주차장을 설치하기 위해서 약 7.6평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000석 규모교회에 33대의 주차장을 설치하므로 현실적으로는 맞지 않는 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주일예배시 주변이 항상 주차장으로 혼잡스러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주차장의 확보는 현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장래성에 대비한 주차장의 계획은 교회부지에서 직선끼리 300M이내에 주차장 부지가 있으면 건축허가가 가능하다. 주차장으로 전용가능한 공간의 확보도 장래성에 주요한 수단이다. 또한 기계식 주차장도 고려해 볼만 하다. 기계식 주차장은 적은 공간에 수납식으로 많은 주차를 수용하므로 공간의 효율성에서는 유리하다. 교회장래성과 확장성에서 고려해야 할 내용 중 부족한 교육공간의 확보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은 한국교회 공간의 분포가 예배홀(본당)위주로 건축되어지기 때문이다. 즉 100평 교회를 건축한다면 본당이 50평을 차지한다. 전체 연면적에서 본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보통 45%에서 50%평을 점유한다. 또 공유시설(계단, 홀, 화장실, 복도)를 제외하면 순수 교육공간의 분포는 17%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처럼 교육공간의 절대부족 현상을 극복하기위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옥상공간의 활용이다. 옥상공간은 건축법상 바닥 면적에 산입되지 않으므로 교회에서 부족한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 옥상의 외벽난간을 2.5M정도 설치하고 지붕에 경량식 구조로 덮개를 설치하면 내부실로 사용할 수 있다. 또 옥상공간은 야외 청소년 체육 공간 카페, 노천극장, 기도처소 등의 다양한 기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대부분 교회지붕이 경사 지붕구조로 되어 있어서 활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무의미한 교회 형태는 오히려 획일적이 형태만을 양산시킨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국교회 현실에서 작은 짜투리 공감 하나도 아쉬운 여건임을 감안할 때 옥상공간의 활용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회 건축시 에는 항시 향후 10년 앞을 보고 장래성을 대비해서 계획해야 한다. 불과 2~3년 후에 다시 증축하거나 리모델링 해야만 하는 교회가 많다. 10년 후를 보고 건축하기위해서는 2~3개 층을 현재 건물에서 증축 가능하게 기둥의 크기나 인프라시설을 여유 있게 고려해서 장래에 증축 시에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증축의 방향성은 도심지 교회는 부지가 협소한 관계로 수직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천원교회는 부지가 넓으므로 수령방향으로 증축이 이루어짐을 교려하여 이에 따른 동선과 공간의 배치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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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건축칼럼
    2025-06-29
  • [다음세대칼럼] “문제아”가 아니라 “한 영혼”입니다
    필자는 11년 전부터 위기 청소년 사역을 하고 있다. 가출 청소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학업중단 위기의 학생들을 학교로 돌려보낸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그만둔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 며칠 전, 필자의 센터에서 만난 한 아이의 말이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센터장님, 교회는 제가 오면 싫어해요. 제가 문제아 같아서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던 그 아이의 눈빛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주 작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교회는 과연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고 있는가? 아니, 처음부터 환영했는가? ‘위기 청소년’이라는 말은 흔히 비행 청소년과 혼용되곤 하지만, 그 의미는 훨씬 더 깊고 넓다. 협의적 개념으로는 폭력, 강도, 절도, 음주, 흡연, 가출, 약물 남용, 성비행 등 반복적으로 비행을 저지르는 청소년을 말한다. 그러나 광의적 개념은 더 본질적인 위기를 포함한다. 즉, 사회가 부여한 가치관과 충돌하거나, 청소년 자신이 삶의 존엄과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상태에 있는 이들을 말한다. 오늘날, 위기 청소년의 문제는 더욱 복합적이고 가속화되고 있다. 중독(게임, 도박, 약물), 성 문제, 자해와 우울, 가족 해체, 경제적 빈곤, 정서적 방임, 학교 부적응 등 다양한 위기가 얽혀 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은 무너져 있는 청소년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때로는 조용히 ‘사회적 실종’ 상태로 빠져든다. 최근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인 ‘촉법소년’ 제도 역시 위기 청소년을 둘러싼 오해와 분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만 10세에서 14세 미만의 소년은 형사책임을 지지 않고 보호처분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들은 이를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제도의 본질은, 아직 미성숙한 아이에게 형벌보다 교화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문제는, 교화와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사회 시스템이 없다는 데 있다. 부모의 책임은 강화되지 않았고, 가정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며, 재범 방지를 위한 교육도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비난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향하고, 아이들은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난다. 이쯤에서 다시 물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위기 청소년 곁에 있는가? 현실은 다소 냉소적이다. 많은 교회는 위기 청소년을 환영보다 ‘관리’하거나 ‘배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배 시간에 늦게 오고, 예배 중에 떠들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문신을 한 청소년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 결국, 이들은 조용히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문제아’라는 이름표만 남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 병든 자와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 (마가복음 2:17) 예수님의 공동체, 곧 교회는 가장 연약한 자가 가장 먼저 안식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회복해야 할 때다. 위기 청소년 사역은 선택이 아닌 사명이다. 교회는 이들을 상담하고, 격려하고, 믿어주며, 무엇보다 지지해주는 어른들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실천 가능한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 교회 공간을 청소년 쉼터로 열자, 전문 상담가, 지역 연계 멘토링 프로그램을 도입하자, 소그룹, 문화체험, 미술·음악 치유 활동을 운영하자, 그리고 모든 성도가 한마음으로 청소년의 지지자가 되는 문화를 만들어가자, 우리는 그들의 상처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상처 곁에 함께 있어 줄 수는 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셨다. 오늘날 교회가 잃고 있는 그 ‘한 마리 양’은 위기 청소년들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손 내밀지 않는다면, 세상도, 학교도, 가정도 그들을 품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먼저 손 내밀 때,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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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29
  • [분홍목사의다음세대이야기] 요나 선지자가 교사, 부모들에게
    우리는 성경을 읽다가 오늘날의 현실과 오버랩되는 장면을 많이 만납니다. 구약의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고 거부감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쳤던 장면도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니느웨라면 당시 가장 악한 도시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가장 잔악하고 교만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요나는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느니 차라리 당시 땅 끝으로 여겨지던 다시스로 배를 타고 떠나겠다고 결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요나가 풍랑 속으로 뛰어들게 하시고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사흘간 그 속에서 요나의 속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 다음 장면이 요나서 3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는 장면을 만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다가 살아나온 요나의 복음 선포를 들은 니느웨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니느웨 왕은 스스로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하기까지 했습니다. 요나 스스로도 포기했던 니느웨 사람들의 이 놀라운 회개와 변화는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니느웨는 어디인가?“ 요나가 그 마음속에서 완전히 배제했던, 혐오했던 지역이 니느웨입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우리도 특정한 지역, 아니면 특정한 부류, 특정한 계층,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안 변해요"라고 하는, "그들은 구제 불능이에요"라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아니라 누가 해도 안 돼요." 라는 부정적인 감정과 거부감 말입니다. 여러분, 한국말에 참 험한 말이 많습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다"라면서요. 그럼 누굴 거둘 겁니까? 제가 자녀 때 몰랐는데 부모가 돼 보니까 제일 좋은 부모가 누군지 알게 되었습니다. 속아 주는 부모입니다. 속아 주는 부모가 제일 좋은 부모입니다. 친구는 어떤 친구가 제일 좋은 친구입니까? 참아 주는 친구입니다. 견뎌 주는 친구에요. 단점이 보이죠, 못난 게 보이죠. 그런데 그거 하나하나 지적하는 친구들 아무도 안 남아 있어요. 그런데 참아주고 견뎌 주는 친구들만 옆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부부는 어떤 사람이 제일 좋은 사람일까요? 져 주는 사람입니다. 져 주는 남편과 아내가 제일 훌륭한 배우자에요. 이러한 성품은 어디서 올까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포용과 긍휼이 결국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배우자를 만든느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저들은 안 돼", "이런 사람은 안 돼", "이런 부류들은 안 돼"라고 외치며 거부하는 우리만의 ‘니느웨’를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나님은 그 니느웨를 깨어 버리는 분입니다. 부모들이여, 자녀들을 용납하시고 속아 주세요. 성도들끼리는 참아 주세요. 부부는 서로 져 주세요. 우리는 쉽게 "다시는 안 봐! 절대 안 봐!" 하지만 아마 곧 또 보게 될걸요? 모르긴 해도 여러분 평생 보게 될걸요? 가족이니까요. 형제요 이웃이니까요. 그렇다면, 평생 봐야 한다면 우리가 속아주고 참아주고 져 줘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아멘"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에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누가 누구에게 썼나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썼어요. 디모데라고 하는 사람은 목회자인데 이 목회자의 마음에 너무 많은 미움이 있는 거예요. 목회를 해 보니까 정말 너무 사람에 대한 실망과 미움이 너무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을 선배 목회자인 바울이 달래주면서 "디모데야, 참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한 사람도 포기하지 말고, 한 사람도 안 된다고 말하지 말고, 끝까지 감싸 안아. 그게 목회야"라고 말하는 책이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여러분, 목회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가정생활도 똑같지 않습니까? 부부생활도 똑같지 않습니까? 사회생활 역시 똑같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누구까지는 되고 누구부터는 안 돼"라고 말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선을 긋는 것이고, 그 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 선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교만 아닙니까? 여러분, 그 니느웨는 과연 누가 정한 것입니까? 오늘 니느웨가 뒤집어져 변화되어 하나님을 따르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우리가 판단하고 우리가 정하는 그 니느웨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사람은 여간해서는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천천히 물들어 갑니다. 우리 교사들이 다음세대들을 하나님과 같은 포용력을 가지고 안아줄 때 그들은 천천히 우리의 사랑에 물들어 갈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합니다. 부모들이 한 번 더 자녀들을 기대해 주고 그들에게 가능성을 부여하고 믿어줄 때 우리의 자녀들은 그 신뢰에 복된 열매로 보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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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6-29
  • [위드애] 연약한 자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지난 4월, 장애인의 달을 맞아 부산에 있는 나를, 서울에 어느 교회에서 주일 오후예배 설교자로 초청해주셨다.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사랑(장애인)부를 담당하고 계신다. 서울 근교인 의정부에서 40여 년간 살았지만, 거의 돌아다니지 않았기에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그래서 설교 당일에 올라가 헤매지 말자는 마음과 사랑부 성도들과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 전인 토요일에 올라가기로 결정하고 초청해주신 목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랬더니, 목사님께서 사랑부 예배 때에도 설교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다. 순간, 망설였다. 나는 나를 초청해주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사랑부 예배와 설교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궁금해서 참여할 생각이었는데 설교라니, 그리고 나 보다 더 심한 장애로 불편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님과 통화를 하여 몇 가지를 물었다. 일단 사랑부 예배시간을 물었고, 예배에 참석하는 장애유형과 나잇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이 교회에서 오후에 설교를 하는데 사랑부 성도들도 참석여부를 물었다. 나의 물음에 목사님께서 답을 해주셨는데, 사랑부 예배는 장년부 예배시간과 같은 11시며, 자녀들이 사랑부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부모들은 장년부 예배를 드린다. 그렇게 각자 예배를 드린 후, 부모들이 사랑부 예배실로 와서 점심을 함께 먹고, 소모임을 잠시 하고 귀가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다보니 4시에 있는 오후예배까지 사랑부 성도들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듣고, 부산에서 나를 서울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더 있으신지 잠시 기도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사랑부 예배 설교를 수락했다. 무명(無名)인 나를 부산에서 서울까지 부르신 것은 장년부에게 장애인식전환교육도 중요하지만,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를 가진 성도들을 만나 교재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 뜻에 더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주일 오전, 사랑부 예배시간 전 보다 일찍 도착하여 초청해주신 목사님과 담소를 나누고 기도회를 함께하고 성도들 앞에서 설교를 했다. 이날 나의 설교제목은 "약함을 자랑하라"였다. 나를 포함하여 장애를 가진 자들이 열 명 남짓이었는데 예배드리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후, 한 형제는 나보고 다음 주에 또 올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건 아마 하나남의 자녀라는 것과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공통점이 처음 만난 우리의 사이를 허물어준 것 같아서 사랑부 예배에 참석한 것이 내겐 기쁨으로 기억된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의정부에서 장애인교회를 7년 섬겼던 경험과 부산에서 3년 사는 동안 여러 장애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들이 이날 참으로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고, 세상 관심사에서 멀어진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이고 장애를 가진 내가 목사로 부름 받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신체는 갈수록 연약해진다 하여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나의 약함을 자랑할 생각이다. 나의 약함을 하나님은 강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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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드애(with 愛)
    202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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