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07(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김혜경 사무총장] 핵발전이 없어도 에너지 자립이 가능하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를 겪으며 한국Y운동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노후핵발전소 폐쇄를 이루어 다가올 치명적인 사고를 예방하고, 핵발전과 방사능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알려 시민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탈핵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미래세대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된 사회를 물려주어야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핵발전을 통해 생산하던 대량의 에너지는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진 에너지 자립마을을 탐방하는 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탐방지역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작은 부거란트 주 남부의 귀씽마을, 제2차 세계대전이후 피해로 산업시설이 전무하고 인구의 대부분이 노인이며 가장 가난했던 마을에 시장의 헌신을 통해 재생에너지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에너지비용이 유출되지 않고 지역에 머물게 되고, 에너지기업이 유치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어 세계에서 에너지전환과정을 경험하고자 매년 3만명이 귀씽모델을 찾아온다. 농축산부산물과 폐목재를 활용한 바이오매스, 바이오가스, 펠렛, 태양열을 통해 열과 전기를 생산하고 태양열지역난방시설을 적극 활용하여 석유고갈과 기후변화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농가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얻었다. 다음은 에너지절약을 위한 최적의 에너지이용을 위해 활약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 정부와 에너지컨설팅기업의 협업사례를 보았다. 주 정부 담당부서가 별도 조직 운영되고 있으며 에너지컨설던트가 기관과 기업 그리고 시민에게 연간 3,000건의 현장 컨설팅을 한다. 주된 내용은 에너지 기기 구입 및 관리, 건축 등 소비자가 재생에너지 생산,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최적화)를 하도록 지원한다. 독일에서는 2000년 재생에너지법 제정되고, 2004년 재생에너지법이 개정(재생에너지 생산 시 이윤 4-8% 지원)되면서 폭발적으로 태양광이 보급되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태양광발전소가 세워졌다. 후쿠시마 사고 후 독일정부는 원전정책을 탈핵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재생에너지법을 강화하였는데 주요내용으로 공공건물 옥상에 임대료 없이 태양광설치를 가능하게 하여 2013 현재시민 에너지조합은 888개이다. 지역의 에너지 전환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회적기업인 독일의 징엔 솔라 콤플렉스를 방문하였는데 현재 개인, 기업, 지역에너지회사, 정당 등 1,000명이 주주로 투자, 투자금액은 1억, 최소 4%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주요 프로젝트는 지붕과 벽면, 나대지를 활용한 마을 하천 이용 생태적인 소수력발전소, 풍력발전소, 우드 펠렛 난방과 바이오 에너지 마을을 매년 1개씩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견학한 곳은 세계적 환경도시로 이름난 프라이부르크 시의 보봉 생태마을이었다. 1970년대 반전·반핵운동은 환경보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보봉 생태마을은 병참시설을 생태주거단지로 개조한 신흥주택지인데 1992년 기존주민(SUSI/주지)을 포함하여 전문가와 함께 구성된 보봉포럼과 시의회, 시정부가 협업하여 ‘쇼셜 에콜로지주택지’ 라는 개념하에 주택개발의 프로세스를 개발하였다. 주요내용은 도보와 자전거교통, 대중교통 절대적 우선과 큰 나무 보존 및 주택지 비오톱 보호, 다양한 사회계층이 입주, 녹지로의 우수한 접근성, 저에너지 건축양식과 지역난방이다. 이같이 주택과 사회적 가치가 접목된 생태적으로 건강한 저탄소 도시가 되어 하루 평균 약 6,000명이 찾아오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친환경 저에너지 주택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의 에너지정책과 비교하여 시사점을 찾아보았다. 먼저 시민의 힘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핵발전소 건설을 완공했음에도 국민투표를 통해 여론을 확인하고 가동을 하지 않고 즉시 폐쇄하였다. 독일 또한 후쿠시마 사고이후 선거를 통한 국민의 여론이 작용하여 원전정책에서 탈원전정책으로 전환하여 노후원전 8기를 폐로하고 2022년까지 나머지 9기를 폐로하여 탈핵을 선언하도록 한 국민의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민의 힘만으로 가능한가? 시민의 여론을 집중시키고 선도 할 수 있는 관련정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우선 전기료의 적정화가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값싼 이유는 한전이 독점운영하면서 운영손실분을 정부가 보조하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또 주목할 점은 온실가스를 감소하려는 자발적인 참여가 일어날 수 있는 권한이 시민에게 주어졌고 시민참여를 통해 정책이 입안되는 민관거버넌스로 재생에너지정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생산에 따른 보조금 지원 정책은 개인에게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게 되어 실효성을 담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재생에너지 자립은 지역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았다. 키워드는 “지역순환”이다. 지역에서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거나 자립하고, 개인이나 소규모 재생에너지발전으로 생산하여 지역이 사용하고, 지역일자리를 창출한다. 즉 지역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사고의 전환도 필요하다. 에너지는 반드시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고의 에너지는 에너지가 필요 없는 것임을 볼 수 있었다. 에너지절약과 효율화(최적화)가 더욱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연환경을 잘 보전하면서 이를 충분히 활용하는 생명존중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5-04-16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3)
    <나비처럼 날아서 벌 같이 쏘아버리는> 특유의 전법(戰法)외에 무하마드 알리 선수가 사용하는 또 하나의 전법은 상대선수를 <조롱하기 taunting> 였다. 속사포같이 팔을 쭉쭉 내뻗는 (straight) 횟수만큼이나 알리는 쉴 새 없이 상대 선수를 향하여 무차별 조롱을 퍼붓는다. 그래서 <떠벌이 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4년에 <20세기의 복싱대결>이라 일컬어진 대격전이 알리와 조지 포먼 사이에 펼쳐졌다. 조지 포먼의 주먹은 무쇠 주먹이고 그의 힘은 황소의 힘이었다. 복싱 전문가들마다 조지 포먼이 압도적인 펀치(주먹)의 힘으로 알리를 KO시킬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시합이 시작되면서 알리는 스트레이트 주먹과 떠벌이 조롱의 말을 함께 포먼에게 쉬지 않고 퍼부었다. 포먼은 그 강력한 주먹으로 한 방에 알리를 KO시킬 욕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번번이 그 주먹은 빗나가고 만다. 왜 그럴까? 알 리가 쉴 새 없이 떠벌리는 <조롱의 말>에 화가 머리 끝 까지 오른 포먼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포먼은 알리에게 비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포먼은 알리의 주먹에 쓰러졌다기 보다 알리의 <쉴 새 없이 쏘아대는 조롱의 말 taunting>에 기분이 상하고 감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져서 결국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은 <치명적인 무기>다. 치명적인 ‘살상무기’다. 이유 없이 무차별 조롱을 받으면 그 상처와 후유증은 의외로 심각하다. 성경에도 <조롱하는 사건>이 기록돼 있다. 느헤미야 4:1~3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수산궁으로 부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나서는 느헤미야를 향하여 <조롱의 말>을 퍼붓는다.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돼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유 없이 아주 나쁜 마음으로 나를 향해 조롱을 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이 좋을까? 느헤미야는 사악한 자들의 <조롱의 말>에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담대하게 처신하고 있다. ◎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 그들의 조롱은 결국 그들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었다. ◎ 그들의 조롱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용감히 맞서 싸우라고 다짐하였다. ◎ 낮에는 성벽을 쌓고 밤에는 파수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누가 이유 없이 우리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4-16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에 바란다(2)
    (지난호에 이어) 3. 시벌과 해벌은 권징재판이 아닌 교회 예배 의식 만일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에 옮겨서 시행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양상은 마치 상의는 양복정장을 하고 하의는 한복 바지를 입고 신발은 운동화를 신은 사람과 같이 꼴불견 중에 꼴불견인 헌법이 될 것 같아 심히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그 이유로 해벌은 재판회나 재판국에서 해벌하는 것이 아니고 행정치리회에서 목사는 노회가, 일반 신도는 당회가 결의하여 예배모범에 규정한 의식으로 행정치리회 회장이 회원에게 해벌·공포하는 것이요, 시벌은 재판회(국)에서 판결하여 원·피고에게 선고한 후 회원들에게는 행정치리회장이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0항에 의하여 예배모범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헌법 조문에서 검토해 보자. 현행 권징조례 제31조에 “치리회가 시벌하거나 해벌하는 때는 장로회 예배모범 제16, 17장의 규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함이 옳다”라는 규정에서 여기의 치리회는 권징치리회가 아니고, 행정치리회인 노회와 당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개정위원회는 개정안 제33조(시벌 및 해벌)에서 엉뚱하게 행정치리회인 이 “치리회”를 “재판회(국)”로 개정 초안했으니 또한 기가 막힐 일이다. 해벌할 때에 과거에 재판한 그 재판국은 이미 해산되고 없어졌는데 무슨 방법으로 재소집해서 해벌하란 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재판국을 설치하여 해벌하란 말인가? 말이 도무지 안 된다. 오직 행정치리회가 결의하고 행정치리회장이 예배모범의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다. 당회재판으로 생각해 보자. 재판회는 심리·판결하여 원고와 피고에게 재판회장이 선고하는 것이므로 권징조례에 속하고, 그 판결을 교회에 알리는 공포는 당회장이 예배시간에 교회에 공포하는 것이므로 시벌과 해벌은 권징조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속하는 것이므로 예배모범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법과 세상법이 다르고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이 다른 점이라는 말이다. 4.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와 범위 원래 헌법 개정의 절차는 어떤 개인의 청원이나 제의에 의해서 개정안이 총회에 제안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리회의 헌의(정치 제8장 제1조, 동 제10장 제6조 2항, 6항, 동 제12장 제4조)에 의하여 총회의 결의(정치 제12장 제4조)와 노회의 수의 과정을 통하여(정치 제23장 제1조, 제2조) 총회가 공포 시행하는 것이다. 즉 총회 현장에서 헌법 개정이 긴급하게 요구되는 조문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총대 개인의 제의나 어떤 집단적 개체(장로회, 교역자회 등) 또는 총회 상비부나 위원회, 임원회 등의 제안으로는 헌법 개정안을 총회에 상정할 수 없다. 오직 “당회가 헌법 개정안을 노회에 헌의(혹 노회 회원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고 노회가 그 개정안을 받아 결의하여 총회에 헌의(혹 총회 총대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면 총회가 받아 결의하여 노회 수의 후 공포 시행하는 절차에 의해서만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2012년 제97회 총회에서 “헌법 전면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속 활동해 오다가 제99회 총회에서 명칭을 “헌법 개정위원회”로 변경은 하였지만 그 기능과 역활은 존속시키면서 그 위원회에 헌법 전면 개정안을 제안하도록 위탁하였다. 그러므로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범위)는 모모 교단이 장로교회 헌법의 원조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의 틀과 판을 허물고 세상 법과 같이 삼권분립의 형식으로 개정하여 교회 헌법의 고유한 특성을 훼손한 헌법 개정과 같은 전면 개정이 아니고 현행 헌법의 장과 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법이 정한 헌법 개정 절차 중에 총회에 헌의하기 이전의 하회 치리회가 헌의해야 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총회가 그 절차를 헌법 전면 개정위원회에 위탁한 특별한 비상조치로 보아야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결론 바라기는 헌법개정위원회는 “성경으로부터 이탈한 중세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기치(旗幟)”를 잊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이야말로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의 목표인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헌법에서 빗나간 현행 헌법을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헌법 개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위원회는 기이 초안한 개정안은 접어두고 이제껏 헌법을 개정할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출판한 1922년도 판 헌법에서 빗나가게 개정하므로 인하여 시행할 수 없는 부분(정치 제13장 제4조 등)과 시대적 문화적 변천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바뀌어 시행할 수없는 용어(권징조례 제136조 등) 등의 부문만 찾아내서 개정안을 초안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 놓는 헌법 개정으로 세계 만국 장로교회들이 공히 시행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버금가는 헌법 개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4-16
  • [성공칼럼] 악의 근원
    악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 밝은 생각에서 밝은 감정이 나오고 어두운 생각에서 어두운 감정이 나오듯 거짓과 악은 서로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짝을 이루어야 하듯이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가 서로 짝을 이루어야 한다. 악은 사랑이 없는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진리란 가슴에 분노와 미움과 적개심을 품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 있던 차가 새치기를 해서 사고가 날 뻔했을 때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하면서 상대방 운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서로 논쟁할 때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 등이 사랑과 존중을 잃어버린 자기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차가 새치기를 하는구나. 굉장히 다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겠지... 사고 나지 않았으니 감사하지”하면서 마음에 사랑과 여유를 회복한 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선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유, 생명, 기쁨 등의 본성과 원천이며, 진리는 그 원천에서 나오는 말이며 사상이며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기에 내 생각,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질, 지식, 능력은 선과 자유,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속에 사랑이 없으면 내 옳음과 내 모든 소유는 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할 내 생각에 두려움이 있고, 서운함, 적개심, 내 욕망이 있으면 삶은 망가지게 되며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패망의 근원은 모든 것의 근원인 사랑을 버린데 있는 것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 속의 왕들을 보면 처음에는 백성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왕이 된다. 여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능력이 생겨 나라가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다. 그러나 왕이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사랑을 버리게 되면 왕이라는 자리에 연연하여 지배욕으로 불타오른다. 그러면 서서히 악이 보이면서 폭군으로 변하며 패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내 속에 사랑과 선함 있는지 살피는 것이 악을 막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짝이듯이 더 나아가 사랑 속에는 진리, 옳은 생각,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겉보기에는 밝고 선해 보이지만 그 속에 악한 마음 즉 거짓이 있기에 겉이 화려한 무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에 옳지 않은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리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근원은 거짓과 어둡게 만드는 생각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거짓을 진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을 살다보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잘 될 때, 안 될 때, 좋은 평가를 들을 때, 비난을 들을 때 등등의 상반된 일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사랑과 선을 만드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거짓과 악을 만드는 생각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상반된 것으로 하나는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가? 예를 들어 내 성적이 원하는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는다. 혹은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실직을 했다. 혹은 갑자기 이혼을 했다면 ‘나는 해도 안 돼, 나 같은 것은 살 필요가 없어. 이젠 끝이야’ 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서 사랑과 힘을 잃으며 내 삶이 엉망이 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다시 시도해 보자, 결국 나는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해서 힘과 사랑이 생겨서 내 삶이 살아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악의 근원은 내가 사랑이 생기지 않는 거짓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서 사랑을 더하여 악의 근원을 없애고, 사랑과 진리가 항상 함께 같은 양이 되도록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 내 안에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루어서, 사랑과 진리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4-16
  • [은혜의 말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여호수아 1 : 7~9 )
    오늘 본문말씀은 여호수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님과 이름이 같은 ‘예수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리더십을 지닌 리더였는지 살펴보려합니다. 첫째, 여호수아는 위기의 지도자였습니다. 1장 1절 말씀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부르십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에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악의 순간 최고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여호수아가 독보적인 지도자가 아니고 돕는 베필이라는 겁니다. 1장 1절에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하여 여호수아를 소개할 때 단독적인 스팩이 없습니다. 모세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스스로 잘난 사람이 아니고 융합적이고 어디가든지 섬기는 섬김의 리더십을 지닌 조력자였습니다. 남들을 흥하게 하고 남들이 잘되게 하는 리더십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입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예비되고 겸비되고 준비되고 검증된 지도자라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80이 될 때까지 수십 년을 모세를 도왔던 사람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이 쓰임 받습니다. 전문가들에게 고개 숙이는 이유는 그 한 분야에 오랫동안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모세를 따라다니면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연습과 오랜 단련과 학습을 통해 준비된 지도자가 되어야합니다. 넷째, 여호수아는 능력있는 지도자로 탁월한 분배자였습니다. 이권이 연계되면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소통과 나눔의 달인이었습니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을 겪게 되는데 천차만별의 사람들에게 그 큰 땅을 정확하게 분배하고 나누었으니 소통과 나눔의 달인인 것입니다. 다섯째, 여호수아는 한계를 뛰어넘은 리더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사선을 넘는다는 겁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체력의 한계, 집안의 한계, 성질의 한계, 경제적 한계를 넘어서 강을 건너갔다는 겁니다. 여섯째, 여호수아는 균형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1장 7절 말씀에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균형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저것이 아니면 이것을 하다가 시행착오를 겪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균형이 건강입니다. 오랜 기도와 말씀 속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향해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역사를 만들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의 수고를 통해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형성됩니다. 균형 잡힌 건강한 리더십을 통해 삶의 균형수를 유지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04-16
  •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
    교회회계 두번째 칼럼이다. 오늘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를 설명한다. 매주 교회에서 작성되는 수입?지출 보고서를 어떻게 복식부기로 전환할까? 기업의 회계순환과정(accounting cycle)은 총6단계로 구분된다. 또한 이러한 절차는 교회회계에서도 Excel 프로그램 등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계장부에 표시될 거래를 식별한다. 즉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ㆍ지출을 자산, 부채, 자본(순자산), 수익, 비용으로 구분하고, 이들 5개 항목의 증감에 미친 내용을 식별한다. 자산은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지출결과가 차년도 이후 효익을 미치며 현금, 예금, 토지, 건물, 차량운반구, 비품, 미수금 등이 있다. 부채는 교회가 갚아야 할 채무로 차입금, 미지급금 등이 있다. 자본(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것이다. 수익은 교회 고유목적 및 기타사업을 통해 얻은 대가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이 있다. 비용은 지출결과가 당년도에 미치는 것으로 예배비, 교역자사례비, 찬양대육성비, 교회학교육성비, 선교비, 구제비, 제세공과금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식별된 내용은 분개(journal)를 통해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분개는 T자형태 계정을 만들어, 왼쪽을 차변(Debit), 오른쪽을 대변(Credit)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자산?비용의 증가는 차변에, 부채?자본?수익의 증가는 대변에 표시하고, 감소시에는 그 반대로 표시해야 한다. 예로, 십일조 50만원과 교역자 사례비 100만원이 발생하였다면 수입?지출의 원인과 결과를 다음과 같이 차변과 대변 양쪽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복식부기의 기본원리이다. 셋째, 분개장에 표시된 내용을 총계정원장으로 옮겨 적는 전기(posting)를 한다. 전기는 일자별로 표시되는 분개내용을 계정별(현금, 당좌예금, 건물, 차입금, 사례비, 제세공과 등)로 집계하는 절차로써, Excel 프로그램 사용시 “데이터-필터” 기능을 활용해 쉽게 작성할 수 있다. 넷째, 기말시점에 발생주의 기준에 따라 수정분개를 한다. 발생주의는 현금의 수입?지출과 관계없이, 당년도에 실제로 발생한 수익과 비용,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발생, 이연, 평가항목으로 나누어 표시한다. 또 유형자산(건물, 차량운반구 등)에 대해서도 필요시 감가상각을 하고, 손상차손과 같은 회계처리를 한다. 다섯째,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한다. 재무상태표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표시하여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과 부채를 나타냄은 물론, 일정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선교ㆍ건축ㆍ장학ㆍ퇴직등의 적립금을 표시하여 효율적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사업운영이익을 표시하고, 또 순자산의 변동내역을 나타냄으로 차년도 교회재정의 예산과 결산을 편성ㆍ집행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지막 단계로, 총계정원장에 표시된 각 계정을 마감한다. 이때 수익ㆍ비용은 회계연도가 끝나면 소멸되는 임시항목으로 ‘집합손익’을 통해 0(제로)로 만들고, 자산ㆍ부채ㆍ순자산은 영구계정이므로 ‘차기이월’하는 마감분개를 하여 회계장부를 마감한다. 복식부기 시스템은 현금 수입?지출중심의 단식부기와 비교해 다소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에 파치올리가 처음 복식부기를 만든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마태복음 20:21-22>에 “5달란트 받은 자가 5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 내게 5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5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 하였다.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관리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호는 자금수지계산서와 운영성과표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2015-04-16
  • [시사칼럼] 장로의 죽음
    지난 4월 9일 전 경남기업 회장이자 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성완종 씨(63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한 심경이었으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인생이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말처럼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고 하는 괴물을 만나 좌초하고 만 셈이니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가 새삼스럽습니다. 이번 사건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인이 서산에 있는 한 감리교회의 장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장로는 장로 교회의 꽃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장로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장로는 가히 한국 교회의 꽃이라 할 만합니다. 그만큼 장로의 일거수일투족은 교계와 세상에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납니다. 가뜩이나 개신교가 사회적인 신뢰와 대중적인 존경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번 비사(悲事)가 우리에게 더욱 큰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장로 직제를 만든 이는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요, 장로 교회를 실질적으로 조직한 이는 존 낙스(John Knox, 1514-1572)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장로는 모세 시대부터 등장하는(출 3:16; 레 4:15; 민 11:16; 신 5:23 등) 성경적 개념입니다. 다분히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장로와 달리 원어(原語)로 구약의 ‘자켄’이나 신약의 ‘프레스뷔테로스’는 모두 ‘공경할만한 노인 혹은 연장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본래 성경적 의미의 장로는 백성들 혹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연륜과 지혜와 말씀으로 잘 돌보고 섬기는 직분이라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장로의 정치적 성격과 목회적 성격 양자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고 있을까요? 칼빈과 낙스 시대의 장로는 군주(君主)에 대립하는 시민 대표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대혁명을 기점으로 절대군주체제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정치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기존의 시스템(system)을 고수했고, 그 결과는 여실히 장로교의 몰락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 국제선교통계보고서(IBMR)의 ‘2013년 세계선교통계’에 따르면 전체 기독교 인구 23억 5,500만 명 중 천주교가 12억으로 여전히 최대 교세를 자랑하며, 개신교에서는 영국성공회 9,100만, 침례교 9,000만, 감리교 7,600만 명에 비해 장로교는 1,800만 명으로 전체 기독교인구 대비 0.8%, 전 세계 개신교 인구 중에서도 3.4%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급격히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고(故) 이정석 박사(Vrije Universiteit Ph. D.)는 선교 초창기의 영수(領袖) 제도와 유교의 신분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한국 장로 제도는 급격하게 세속화되었고 이것이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2002.4.10. 기독교개혁신보).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장로 제도와 관련해서 세계사적인 그리고 토착적인 이중의 부담과 한계에 직면해 있는 셈입니다. 더군다나 더욱 심각한 점은, 이것이 비단 장로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일종의 ‘장로교화’되고 있는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장로 본연의 개념과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수임자(受任者)로서 겸손하게 섬기는 장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구도 감히 격동할 수 없는 ‘리워야단(Leviathan)’일지라도(욥 41:10), 주께서는 그 머리를 부수시고(시 74:14) 벌하시며 죽이실 수 있다(사 27:1) 말씀합니다. 회개하는 백성을 괴물처럼 변해버린 현실 앞에 좌초하도록 결코 좌시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4-16
  • [소강석 칼럼] 푸른 버드나무의 꿈
    봄의 꽃들이 피어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강물이 얼어붙던 겨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 사시사철을 하루도 쉼 없이 달리는 삶이기에 겨울과 봄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서재에서 창밖을 본 순간 앙상한 버드나무 가지에서 푸른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보았다. 싹만 나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가 봄바람 결에 흔들렸다. 그 순간 나의 마음도 흔들렸다. 아니, 하나의 공간, 우주의 공간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가녀린 나뭇가지의 흔들림 속에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겨울나무도 생명이 있기에 봄 햇살 아래 새싹을 피운다. 생명은 감출 수 없다. 꿈과 열정은 무엇도 막을 수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속에서 절박한 꿈의 몸부림을 본다. 허공을 향한 생명의 절규를 듣는다. “나, 여기 살아 있어요. 보세요. 마침내 긴긴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 새싹을 피웠잖아요.” 나도 저 푸른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꿈꿀 수 없을까. 꿈이 잠든 시대다. 겨울 버드나무처럼 말이 없다. 버려진 주검처럼 차갑다. 청년 실업과 자살, 사이코패스 범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성적타락, 이념, 지역, 계층갈등, 경제침체 등 암울한 현실 속에 꿈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메마른 겨울 버드나무처럼 보인다. 겉으로 볼 때는 죽은 나무 같다. 차가운 눈보라에 껍질이 벗겨져 나가고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난 보았다. 봄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새싹을.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었고, 꺼져 있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붉은 불덩이가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을. 절망과 상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니다. 그 속에는 분명 생명의 씨앗이 있다. 희망의 노래가 숨겨져 있다. 푸른 버드나무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이슬을 맞으면서도 끝끝내 새싹을 피워 올리지 않는가. 창가로 다가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를 바라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싹을 낸 버드나무…. 그건 춥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었다.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아주 오래된 반가운 벗이 찾아온 것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다. 버드나무가 내 삶을 투사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덧 나는 혼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버드나무야, 살아줘서 고맙다. 네가 겨울을 이기고 살아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거야. 겨울 끝에서 피어나는 너의 절박한 꿈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낼 거야. 봄날을 향해 달려가는 너의 희망과 생명의 질주가 겨울 들판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다시 심장이 뛰게 할 거야. 푸른 버드나무야, 넌 겨울은 봄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편의 시가 되었구나.” 우리의 새로운 삶, 제2막의 인생을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불행한 상황 앞에 절망하지 말고 내 안에 숨겨진 역동적 희망, 꿈의 푸른 에너지를 펌프질해보면 어떨까. 내 안에 죽지 않고 꿈틀거리는 생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푸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봄날 오후의 버드나무처럼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손짓하며 웃을 수 있지 않을까.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04-16
  • [성서연구] 가나안보다 중요한 것(출애굽기 5장 1-3절)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보낼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모세와 아론은 바로 왕에게 단 한 번도 자신들이 가나안에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이들은 가나안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단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광야로 가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이 강조한 것은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고, 이것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세와 아론에게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는 것, 제사를 드리는 것,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이 광야로 사흘 길 쯤 가서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머물던 고센에서 가나안까지는 가장 빠른 길로 가도 열 하룻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쯤 가서 절기를 지키겠다는 것은 광야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광야든, 가나안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는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앙에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부록인 <소요리문답> 제 1문항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며, 그 분이 계심으로 인해 한없이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그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간과합니다. 그리하여 출애굽의 목적에 대해 오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출애굽시킨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유는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였을 뿐,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자유가 목적이 되면 방종으로 흘러 범죄하게 될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마음대로 하여 범죄한 것이 그 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출애굽의 목적을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도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 땅에서 얻은 곡식과 짐승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을 목적으로 여기면 기복적 물신주의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든지, 가나안에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그들의 존재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면 거기가 축복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다면, 거기가 멸망의 장소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가나안처럼 모든 조건이 좋지 못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어도,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든 조건이 풍족해도 하나님을 제대로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 높이고 경배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가난해도, 병들었어도, 어려운 환경에 있어도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도록 힘쓰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그에게는 광야도 가나안이 될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을 높이는 행복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4-16
  • 장로가 장로다워야 항존직이다
    故 성완종 장로(서산감리교회)는 검찰수사를 받고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앞두고 자기가 자주 등산하는 관악산 중턱에서 자살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왜 이름 있는 장로가 자살을 택했을까? 성완종 장로는 초등학교 5년 중퇴해 2조원의 상장기업(경남기업 건설업)을 키운 입지적 인물이다. 가난해서 학업을 포기한 것이 한이 되어 장학재단을 만들어 1만 5천여 명의 가난한 학생들을 공부시킨 선한 일을 해왔다. 부를 이룬 이후 주변 인사들의 권유로 정치계에 뛰어든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2012년 자유선진당 원내대표로 활동했다. 성완종 장로의 자살과 함께 여러 정계에 로비를 한 소위 성완종 리스트가 터지면서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부패공화국임을 알렸다. 돈과 권력의 함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동반자 관계이다. 돈 받은 정치계 주요핵심인사들이 전전긍긍하며 성역 없는 특별 수사단을 구성, 수사에 착수하게 되면 국내 총리를 비롯한 경남도지사, 청화대 전·후 비서실장 등 정계 인사들이 수사대상에 올라 이 나라 정치는 돈으로 얼룩진 부패정국이 된 느낌이 든다. 성완종 장로는 평소 서산감리교회에 막대한 헌금으로 교회당을 짓고 교회에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는 소식이다. 그의 돌아가신 어머님도 권사고 그의 형제들도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이다. 그가 극단적으로 선택하기 몇 일전 그의 담임목사에게 대화를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위로의 기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로가 자살을 하는 경우도 마귀의 선택이고 부활하신 주님과 배치되는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최근 방산산업비리로 일광산업의 이규태 장로도 교회를 자금세탁에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사건이 터졌다하면 교회 장로가 개입 안 된 것이 없을 정도다. 장로라는 항존직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고 그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장로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땅 한국교회의 수많은 장로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수임 받은 거룩한 종이요, 목회자의 동역자로 헌신하는 모범적이어야 되는데 비리에 얼룩진 장로들의 삶이 세속에 물들어 불신자의 입에 오르내리며 전도의 문을 막아버렸다. 그런 오점을 남길 바에야 장로직을 사직하고 다녀야 한다. ‘거룩한 직 장로’ 오늘날 장로들 비리에 관여되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하고 마는 것인가. 미래학자 최윤식 박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앞으로 10년이 골든타임이라고 한다. 서울 장안에만 임직이 없는 목사 1000여 명이 택시기사, 경비원, 노동직에서 일하는 암담한 한국교회가 이 시기를 놓치면 한국교회는 반토막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장로를 세우기 위해 신앙의 연륜 속에 얼마나 기도해 왔는가. 돈이 있다고 명성이 높다고 장로를 세웠다가 낭패를 보는 예가 허다하다. 술에 인박히지 않고 가정을 잘 다르시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들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장로 재교육을 하든지 신임투표를 통해 장로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던지 이제 노회와 당회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노회 장로고시 때 누구나 통과되는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당회에서 5개월이라는 교육을 받지만 당회에 들어오면서 선배 장로, 당회장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언행에 실망을 느낄 때가 있다. 최근 인터넷 신문에서 일한다고 하는 모 교단의 어느 장로는 온갖 폭언과 허위내용의 모욕적인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저질적인 행태에 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까? 사탄의 꾐에 놀아나는 가련한 이 땅의 장로들이 독사의 새끼를 면해야 산다. 장로는 장로다워야 산다. 장로는 새벽재단에서 자기 성찰로 늘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 교인들의 모범이 되기 위해 장로직분이 얼마나 힘든지, 힘들다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정도여야 한다. 일일이 길흉사에 찾아다니는 항존직. 그대 이름은 영적으로 거룩한 성직이지만 골고다 골짜기를 올라 십자가를 지는 힘든 직분임을 까달아야 장로가 장로다워진다는 진리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신이건 장로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역사현장
    2015-04-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