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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미조직교회가 교육목사 청빙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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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목사는 부목사가 아니니 미조직교회도 청빙 가능-부목사는 당회 결의로 교육목사는 공동의회 결의로 청빙
합동 교단산하의 노회 중 어떤 노회는 지교회의 교육목사 청빙을 허락하는가하면 어떤 노회는 “미조직교회가 교육목사 청빙은 불가하다.”고 하므로 혼란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에 관하여 교회 정치의 변천과 법리를 정리함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교회 헌법 정치의 변천 장로교 최초의 헌법인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4장(목사)에는 목사의 칭호가 없고 三. (목사의 직무)에 ① 지교회 목사 ② 신학교나 대학교 교사 ③ 선교사 ④ 종교 신문, 서적에 관한 직무를 위한 기관목사 등으로만 구분하여 목사의 직무와 목사의 칭호를 겸하여 규정하였다. 그 후 1930년도 판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4장에 三을 三조(목사의 직무)로 하고 ⑤ 종교 지도자 ⑥ 신학 졸업 후 임직조건 등 2항을 추가하였고 四조(목사 칭호)를 신설하여 ① 위임목사 ② 임시목사 ③ 동사목사 ④ 원로목사 ⑤ 공로목사 ⑥ 무임목사 ⑦ 전도목사 ⑧ 지방목사 ⑨ 선교사 등을 두고 교육목사는 없었는데 1966년도 판 헌법에 목사의 칭호를 변경하면서 교육목사를 추가하여 ① 위임목사 ② 임시목사 ③ 부목사 ④ 원로목사 ⑤ 무임목사 ⑥ 전도목사 ⑦ 교단기관목사 ⑧ 종군목사 ⑨ 교육목사 ⑩ 선교사 ⑪ 은퇴목사 등으로 현재 헌법에 이르고 있다. 2. 부목사와 교육목사의 구분 부목사는 정치 제4장 제3조 3항에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 “계속 시무”를 언급하는 것은 임시목사의 시무기간이 1년간(동 2항 참조)이므로 계속시무 허락을 받아야 하고, 교육목사는 시무기간 규정이 없으므로 전도목사, 기관목사 등과 같이 계속시무 청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목사인데 미조직교회에서는 보좌할 위임목사가 없으므로 청빙할 수가 없으나 교육목사는 미조직교회에도 교육해야할 교인들이 있으므로 마땅히 청빙할 수 있음이 법리이다. 그런데 교육목사는 동 제9(교육목사)항에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라고 규정하여 노회의 허락을 받아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라고만 하였고, 어디에서 청빙하며 어디에서 가르친다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하여 동 제3조 5항에서 선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으니 “목사가 노회나 지교회나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에서 청빙을 받으면 교육하는 일로 시무할 수 있다.”라는 규정이다. 즉 교육목사는 ① 노회의 교육기관이나 ② 지교회에서나 ③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 등에서 청빙 청원을 하고 청빙하는 교회와 청빙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하는 일을 시무하는 목사라는 말인데 지교회에서 청빙한다함은 지교회의 공동의회의 결의로 당회장이 청빙한다(교회정치해설 p.146 참조)는 의미이고, 교육기관은 해 기관의 이사회의 결의로 기관장이 청빙하는 것이 법리이다. 여기에서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를 대학교 교수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 보이는데 여기 “교수하는 목사”에서 “교수하는”은 명사로서의 대학교 교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므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교수하는) 목사”로 이해해야 한다. 3. 결론 교육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가 아니요 교회 또는 교회에 관계 되는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인데 교회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조직교회나 미조직교회나 중단할 수 없는 중요하고 필수적인 교육 사항이므로 교육목사는 조직교회뿐만 아니라 미조직교회에서도 청빙하는 것이 당연한 법리이다. 즉 부목사는 미조직교회에 보좌할 위임목사가 없으므로 청빙할 수 없으나 교육목사는 조직교회에만 교육해야 할 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조직교회도 교육해야 할 교인이 있으므로 청빙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육목사를 청빙할 수 없는 지교회는 교육전도사로 대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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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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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주를 시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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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시작은 두려움이며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원시시대에 두려움 때문에 귀신을 숭배하게 되고, 갑자기 호랑이나 곰 때문에 죽을 뻔 했다면 두려움 속에서 호랑이와 곰의 형상을 만들어서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영웅을 보면 그 영웅이 늘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이라 생각하여 그 영웅의 동상을 만들어 숭배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도 돈과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욕심으로 귀신과 해와 달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만나게 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며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가 참 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진리이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마음으로 믿어져야 한다. 마음으로 믿어지기 위해서는 진리는 이해에 속한 것이기에 자유를 갖고 이해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가 주이신 것을 간절한 원함을 갖고 말씀을 묵상하며 찾고 찾으면 어느 날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내 속의 주인이 주님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주인이 된다는 말은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나 돈 때문에 두려움이나 서운함, 미움, 적개심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지 않게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주를 받아들인 다음에는 주를 시인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주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행동으로 삶을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결심은 다 한다. 그러나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에서 보면 귀신도 예수가 구원자인 것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모습은 거짓과 악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시인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이해는 했으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짓과 악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를 볼 때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말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며, 선을 행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사랑이며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진리가 겉으로 드러날 때는 사랑의 행동으로, 선함으로, 밝음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진할 기회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자. 이 때 이 기회를 내가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고, 거짓과 악을 눈감아 주면서 돈을 받아야 하고, 나는 이익을 보지만 누군가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이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이 주를 시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면 주를 시인하지 않는 것, 즉 부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시인할 것이요.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너를 부끄러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주를 시인하라는 말은 사랑과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먼 후일 죽어서 저 세상 갔을 때 처음 가는 영의 세계라 두려움과 막막함에 처해 있을 때 주 예수께서 찾아오셔서 “이제 안심하라. 내가 바로 네가 주로 믿고 사랑했던 예수다. 내가 바로 이곳의 왕이다.”라고 하시면서 나를 받아주시고 알아주시면 얼마나 안심이 되고 감격스러울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삶을 살면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서 사랑과 선을 선택하고 행하면서 주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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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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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염려, 나라, 족함(마태복음6: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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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재물관, 물질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이 땅에 쌓아두지 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마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한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자들아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한다. 한날의 괴로움도 그날로 족하다.’(6장19~34말씀) 오늘 말씀 제목을 ‘염려, 나라, 족함’이라고 한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한 것은 필수종목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동묘지나 조용하지, 어느 집이든 근심 없고, 어떤 몸에 병균이 없고, 어떤 사업장에 고민거리가 없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안한 것은 필수불가결한 당연한 현상이지만은 그러나 그렇다고 불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불안거리, 염려거리가 바뀌는 겁니다. 매일 내 돈, 내 문제, 내 가정, 내 자식을 걱정하던 사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천국을 대망하면서 시온의 대로를 걸어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때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뼈가 녹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신앙이 천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가지치기를 해야 되며 시선을 처리를 다시 해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거짓된 것, 헛된 것, 부질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헛되고 허무한데 굴복해선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고 하시며 세월을 아끼고 술 취하지 말고 세상에 중독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5장17~18말씀)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우선순위를 찾아서 먼저 구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후서12장 9절 말씀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병든 것도 감사, 아픈 것도 감사, 이 모든 강력한 감사가 삶의 환경이나 내면의 세계를 바꿔 놓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자는 이렇게 달라야 합니다. 핵심가치를 붙들고 영적통찰력으로 우선순위를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성경중심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행해 나가는 나그네 인생이고 본향은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 시민권자로서 멤버십카드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인배 같은 그런 신앙을 걷어치우시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하며 신앙을 다시금 업그레이드 시키십시오. 그래서 주님 마음에 쏙 들고 주님 눈에 확 띄는, 정곡을 찌르고 심금을 울리는 기도가 다이어트 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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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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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칼럼]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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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황실의 찰스 왕세자. 그의 아버지 필립 공(公)은 아내와 아들의 그늘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 찰스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아들의 일생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철저히 조종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찰스에 대한 첫 번째 교육 목표는 엄격한 장교 출신인 자신처럼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94년 피플지(誌)는 필립 공을 빈정거리기 잘하는 엄격한 규율가라고 묘사한 일이 있다. 지적(知的)이었지만 예민하고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례하게 들리는 농담을 툭툭 던지는 안 좋은 기교도 지녔다고 한다. 1957년 만 아홉 살이던 찰스는 고든스턴 공립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스파르타식을 고집한 군 출신 아버지는 귀족학교 이튼스쿨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섬세하고 수줍음 잘 타는 소년이었다. 필립은 학교생활에 어려워하는 아들 찰스를 겁쟁이라고 불렀고 마흔 여덟이 될 때까지 찰스의 아이디어에 경멸을 쏟아 부었다. 이런 조롱이 찰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찰스는 아버지를 항상 영웅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대로 사는 것에 늘 바동거려야만 했던 것이다. 찰스는 생일잔치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의 정신적 학대에 어린 시절 내내 복종해야 했다. 필립은 마음으로도 찰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버킹검 궁전에 있는 필립의 방에는 아들 찰스 대신 딸 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편애 속에 자랐다. 아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보다 하인을 통해 전갈을 보내는 등 권위적인 방식으로 일관했다. 찰스는 천성적으로 마초맨(남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압력과 경멸을 받을 때 찰스는 친구들에게 “내 갈 길을 가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2세는 자식을 돌볼 시간이 없는 여왕이었고 금욕주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키스를 하거나 꼭 껴안기보다는 의무를 강조했다. 어린 시절 찰스는 하루 동안 30분 정도밖에 어머니를 볼 수 없었고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져야 했다. 찰스는 전기에서 사랑스런 포옹과 키스를 갈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 여왕은 그렇지 못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심리학자, 아동학자, 교육학자들이 자녀양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양은 지구를 덮고도 남을 분량이다. 하지만 그 책을 요약하면 딱 한 문장이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 성경이 말하는 ‘노엽게’의 의미는 ‘아이들을 괴롭게 말라. 화나게 하지 말라. 흥분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이 노여움이 사회악이 되고 범죄가 된다. 역기능 자녀가 출생하는 환경이 된다. 때문에 바른 부모교육은 이 작고 작은 노여움을 정복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가장 큰 자녀의 분노는 부부 불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싸웠다. 이유도 없이 서로는 서로의 감정들을 고함으로 표현했다. 등교할 때마다 골목길을 나올 때 이웃 어른들께 인사를 하며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항상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만 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모습들은 이렇게 움츠려 들었고 지금도 어른들 앞에서라면 마치 죄인처럼 떳떳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다.” -한 젊은이의 일기 중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많은 일들 중에 가장 큰 노여움은 부부불화다. 자녀들은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볼 때, 이내 안정감을 잃는다. 삶의 의욕이 꺾인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심지어 자살충동도 느낀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학습 환경은 부모환경이라 부른다. 부모의 불화는 원초적인 심리 감정이라 불리는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순간, 이글거리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마음에 불을 지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반대로 부부의 화목한 모습은 자녀의 삶에 에너지가 된다. 매사에 자신감을 심는다. 의욕을 갖게 한다. 꿈에 부푼다. 긍정의 에너지는 나야말로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아빠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자녀들에게 그 선물을 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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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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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네팔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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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우연히 네팔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향 9개를 발견합니다. 2년 전 tvN에서 방영되었던 ‘나인(nine)’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 때 배경으로 등장했던 마을이 포카라(Pokara)였습니다. 마을 뒤편으로 등장하는 ‘인간이 오르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산’이라 불리는 ‘마차푸차레(Machapuchre)’의 압도적인 위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그 지역 일대를 지난 4월 25일, 진도 7.7의 강진이 덮쳤습니다. 최초에 보도되었던 수십 명의 사상자 수는 현재 사망 5,057명, 부상 10,915명으로 불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웅크리고들 있는 오지(奧地)가 많기 때문에 전체적인 피해는 가늠할 길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는 이번 지진으로 인한 복구비용이 5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인구 3,000만 명에 1인당 GDP 700달러의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중한 재해(災害)입니다. 이미 긴급구조단을 현지에 파견한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국제사회의 돕는 손길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번 네팔 지진도 천재(天災)에 인재(人災)가 겹쳤다고들 합니다. 지진 발생 불과 1주일 전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전세계 지질학자를 비롯한 과학자 50명이 모여 1934년에 이 나라를 강타했던 지진이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덮칠 가능성을 경고했다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번 지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기사도 떴습니다. 그런데 대비는커녕 이처럼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논조입니다. “지진을 그냥 천재(天災)라고 말하고 하늘 탓만 할 수는 없다. 미 캘리포니아에서라면 주민 100만 명에 10~30명이 숨질 때 같은 지진으로 네팔에선 1,000명이 숨진다. 파키스탄, 인도, 이란, 중국이라면 10,000명이 숨지게 된다. 지진피해가 인재(人災)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지질조사국 한 과학자의 논평입니다. T. S. 엘리어트의 말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봅니다(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지난 28일에는 세월호 선장 등 승무원 15명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열렸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믿고 질서정연하게 대기하던 어린 학생 등 304명이 끔찍한 고통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재판장의 말에 유족뿐만 아니라 방청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났어도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고 여전히 차가운 바다 밑에 수장(水葬)되어 있습니다. 네팔 지진 사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재난입니다. 그렇다면 작년 이맘 때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어떻습니까? 인구 5,000만 명에 1인당 GDP 28,738달러를 자랑하는 OECD 가입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이 사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네팔은 힌두교도가 전체 인구의 80%를 넘습니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에는 33,333개의 신들이 나오는데, 오늘날 힌두교의 신들 숫자는 3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klaiein meta klaionton)”고 말씀합니다(롬 12:15). 주한네팔인협회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네팔인의 수는 약 29,000명이며 이들 중 대부분이 근로자들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고향 소식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네팔로 돌아가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지변에 어쩌면 인재까지 겹쳐진 재난 속에서 슬퍼하는 네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울고 또한 기도하는 일은 그저 아름다운 미담이나 휴머니즘(humanism)의 발로(發露)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주어진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물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마음으로 부둥켜안고 처절하게 눈물 흘리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들의 슬픔에다가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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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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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임중 칼럼]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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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오관을 통하여 일상생활을 한다. 오관(五官)이란 시각(視覺), 청각(聽覺), 미각(味覺), 후각(嗅覺), 촉각(觸覺)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시각(視覺)은 더욱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신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님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세계적인 인물로 선정된 분이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보다 모든 면면에 뛰어난 대한민국이 낳은 거목(巨木)이시다. 그분은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한 가지 더 볼 수 있는 은총을 늘 감사하는 분이시다. 그것이 무엇인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다른 곳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대화를 하면서 마음 중심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 그 말이 진심과 건성이라는 것,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다. 목사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 또한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약점이 된 것이 보이는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저기 불편스러운 일들이 주님의 교회 안을 어지럽히게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진정 신령한 은혜의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니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생활이 일상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어 교회가 행복하고 평안했다. 사람은 두 종류의 눈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하나는 영의 눈이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는 세상의 것을 보고 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를 본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올바르게 보는 것(正觀), 조용하게 보는 것(靜觀), 대강 보는 것(槪觀), 꿰뚫어 보는 것(洞觀), 전체를 훑어보는 것(通觀), 크게 보는 것(大觀),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直觀), 외모를 보는 것(外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달관(達觀)이라 한다. 그뿐 아니다. 주관(主觀), 객관(客觀), 참관(參觀), 비관(悲觀), 낙관(樂觀), 방관(傍觀) 등, 이와 같은 숙어를 말하자면 끝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면서 살아가는가? 무엇을 보기 위해 교회에 왔는가? 무엇을 보면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가? 무엇을 보아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무엇을 보면서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많은 가족과 재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분가(分家)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고 롯은 보기에 좋은 요단지역 소알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선택했다. 결과는 보이는 곳은 멸망이었고 보이지 않았던 곳은 축복이었다. 중요한 것은 롯의 눈에는 요단 지역, 소알까지 물이 넉넉한 것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역사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역사의 들러리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에도 부흥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교회 부흥의 들러리가 있다. 가문에도 가문의 번영에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가문의 번영에 들러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사울왕과 다윗이 본 골리앗은 달랐다. 육신의 눈으로 본 사울왕은 골리앗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본 소년 다윗은 골리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허수아비와 같이 보였고 그렇기에 그를 향해 물맷돌 다섯 개와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12명의 정탐꾼의 사건도 같은 의미를 시사한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던 가룟유다, 고라, 발람, 웃시야, 아합, 가인, 데마 같은 사람들의 결과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승자 같았으나 실패와 영원한 저주의 대명사들이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늘 사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노란넥타이를 메고 강단에서 이 칼라 어떻습니까? 물으면 “믿음색깔 황금색이네요.” 라고 대부분 대답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고많은 칼라 가운데 왜 하필 똥색입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색깔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냐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감사의 눈으로 가능성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부정적, 비판적, 절망적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와트는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증기 기관차를 발명했다. 프랭클린은 번개 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명했다. 로댕은 화강암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했다. 월트 디즈니는 쥐를 보고 미키 마우스를 창안했다. 청교도들은 바다의 풍랑을 보고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신다. “네가 보는 것을 내가 네게 주리라.(창1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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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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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두둑한 5월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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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한 봄 날씨가 기분 좋은 5월이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월 5일 어린이 날, 5월 8일 어버이날, 5월 15일 스승의 날, 5월 21일 부부의 날이 있다. 1일 근로자의 날에는 대부분의 학교들이 휴교하며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황금연휴를 맞아 가족 간의 화합을 독려하고 있다.
각종 기념일이 가득한 5월은 지갑은 얇아지지만 마음은 두둑해지는 한 달이다. 기념일이 많아 가계 지출이 증가한다. 또 황금연휴로 여행을 떠나는 가족들도 많아 지출은 증가한다. 그러나 서로간의 관심과 마음을 표현하는 따뜻함으로 웃음 짓게 하는 5월이다.
교회들도 분주하다.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주일로 보내고 간혹 청년주일, 부부주일도 기념해 지키는 교회들도 있다. 교회 교육기관들은 행사에 맞춰 선물을 준비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이런 기념일을 통해서 가족을 돌아보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어 감사하다.
지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네팔을 보면서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다시금 깨닫는다. 늘 곁에 있어 무관심했던 가족들에게 기념일을 맞아 낯 뜨거운 말 한마디, 오글거리는 애정표현을 해보자. 지갑은 얇아져도 우리의 마음은 두둑해지는 5월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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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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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국법을 무시한 고려학원과 총회운영위 이래도 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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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오후 2시 대구 성동교회당에서 모인 고신 총회 운영위원회에서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고려학원 이사회에서 보내온 (이사장 강영안 장로)인준 요청을 중요안건으로 통과 시켰다. 이 자리에서 증경총회장 윤희구 목사가 제시한 이사장 시무교회(두레교회)에서 개척한 주님의보배교회 이명 절차에 따른 문제와 12월 26일까지 이시원 이사 법적인 등록된 이사 사임건에 대해 집중 논의가 되었다. 교회 이명 절차는 이명하여 온 교회에서 3년을 경과한 후 다시 공동의회 투표로 시무를 결정되는 총회 법규를 무시하고, 해당 노회장이 두레교회 장로라는 발언으로 통과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 이시원 이사 법적임기를 놓고 총회에서 처음이사 될 때 쓴 확약서(2015년 4월 16일까지 사임한다는 내용)가 법적 효력을 가지며 대법원 판례까지 언급한 고려학원 감사의 발언, 조용히 넘어가자는 총회 임원들의 노력도 인준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대한민국 법원 행정처 등기 정보 중앙관리소의 등기기록(등기번호 00025, 2015년 4월 21일 현재)에 의하면 엄연히 이시원 이사는 2011년 12월 17일 취임하여 2015년 12월 26일까지 임기로 교육부와 대한민국 법원 등기난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다.
그래서 교육부 회신에 의해서 재단사무국장이 이시원 이사를 이사장 투표하는 4월 17일 오전 출석하시라고 전화를 한 사실이 있다. 재단사무국장은 교육부 공문 회신에 의해 이시원 이사가 12월 26일까지 이사기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모 이사도 교육부 사학담당 사무관한테 직접 찾아가 (임기가 12월 26일까지)맞다는 확인까지 받고 온 사실은 왜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대법원 판례를 운운했지만, 대법원 판례는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사임의사를 표한 것이고, 이시원 이사의 경우 타의적 확약서를 쓴 경우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른 것이다. 누군가 이사 중에 이사장 투표 무효확인 가처분을 한다고 할 경우 어느 쪽에 손을 덜어 줄 것인지 자명한 해답이 나올 것이다. 법원에 이사 등록도 안 된 4명의 신규 이사들이 이사장 선출의 법률적 권한 행사를 한 것을 놓고, 또 대법원 운운할 수 있을까? 이시원 이사는 그렇다고 치자. 법원 등기 안된 이사의 법률 권한 행사는 여지없는 불법 행위라는 것은 법을 잘 모르는 관계자들도 알 수 있는 기본 상식이다. 사회국법과 사립학교와의 문고리 역할을 담당하는 교육부에서 이사 승인은 행정적 이사자격이 있다는 요식 행위이지 먼저 법원 등기부터 해 놓은 후 이사장 선출을 하는 것이 법 절차다.
총회운영위가 인준해도 이번 총회 석상에서 크게 논란이 될 전망이다. 과거 김정일 이사는 총회확약서를 쓰고도 3개월 더 이사직을 수행했는데도 이시원 이사만 그만 두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 과거 전례를 살펴봐도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총회 운영위 초반에도 “분명 교육부에 진정이나 사회법에 문제제기가 있을 것”이라며 운영위가 적절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 덮어 버리고 말았다.
법률적 법인 이사는 사회 법 절차(국법)가 우선하기 때문에 드리는 충고다.
시한폭탄이 남아 있는 한 가처분한 분이 이사장 되는 것이 대명천지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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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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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총 차기 상임회장 어디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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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총 정기총회가 6월 4일 시온성교회에서 개최된다. 하지만 차기 목사 상임회장을 맡을 인물이 없어 현 집행부가 고심중이다. 이번에는 침례교단 차례로 영안침례교회 박정근 목사에게 의사를 물어봤지만 뜻이 없고, 기하성 이건재 목사도 교단 총회 서기직을 염두에 두고 있어 힘들다는 의사를 비추고 있다. 또 백석교단 부산영락교회 윤성진 목사도 부기총 상임회장직을 고사하고 있어 선임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차기 대표회장이 되는 이성구 목사는 “5월 중에 어떻게 해서든 찾아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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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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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성 기사를 쓸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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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A 인터넷 언론에 ‘증경회장의 수준이 이래서야’라는 사설이 보도됐다.
고신 두 증경총회장이 고려학원 이사장 선거에 개입되어 실력행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과 관련 두 증경총회장 중 한명으로 지목된 창원한빛교회 윤희구 목사가 총회 운영위원회에 나와 이 보도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을 했다. 윤 목사는 “원래 발언을 할 생각이 아니었다. 내가 발언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있을려고 했다. 그런데 A 인터넷 언론에 나와 이용호 목사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여기에 대한 해명은 해야 겠다는 생각에 발언을 결심했다”고 배경설명을 한 뒤 “고려학원 이사장 선출에 관련해 이용호 목사와 통화를 한 사실이 없다. 또 고려학원 이사나 이해관계자들에게도 전화나 부탁을 한 사실이 전혀 없음을 알려 드린다”고 말했다. 윤 목사는 “강영안 장로와 경합한 양재한 장로가 우리 교회다. 그리고 이용호 목사는 박 장로의 처외삼촌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실도 아닌 추측성 보도를 할 수 있느냐”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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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