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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때늦은 후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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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내린 봄비에 새싹이 쏙쏙 자란 것 같은데 벌써 7월이다 앞산 중턱에 어미고라니가 새끼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뛰어놀고 밤새 울어대던 소쩍새 노래는 하늘을 멤 돌고 있다. 7월 초여름 푸르고 신비로운 자연의 변화 누가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과학과 인간의 힘으로 할 수없는 대 자연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분은 바로 전능하신 성령님이시다. 성령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어 온 천하 만물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고 계신 것이다.
이처럼 대자연은 계절을 따라 경이롭고 신비롭기 그지없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는데 작금의 한국 교회는 푸르고 싱싱한 여름이가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온다고 하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다. 머지않아 교인수가 줄어들어 예배당 문을 닫게 된다고 하니 기도 쉬는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이다.
숫자로 보면 동네 다방보다 더 많다던 한국교회 국민 네 명중 한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엄청난 영적 부흥을 일구어 냈던 한국교회가 쇠퇴하여 진다니 가만히 앉아서 볼 수 없는 일이다. 이제 우리 모두 홀연히 일어나 서산마루 지는 해를 바라만 보지 말고 죄악의 어둔 그림자가 이 땅을 삼키기 전에 한국교회를 절망의 늪에서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를 살리고 다시금 부흥의 파도를 탈수 있을까?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보며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 몇 가지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는 순수성을 잃었다! 가난과 헐벗음 굶주림 속에서 절망하던 이 나라가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감격하였던가? 교회에 가면 누구나 소망이 있고 웃음과 행복이 있었다. 성도 간에 격의 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아낌없이 나누며 베풀고 살던 삶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세상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것들을 단호하게 배척하고 내쳐야 했음에도 교회는 세상 유혹에 힘없이 젖어들었다. 그것이 상한 누룩이 되어 교회를 썩고 부패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갖은자와 갖지 못한 자의 괴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의 차이가 없음에도 영적인 눈이 어두워 세상의 명예 권세는 성도의 사이를 벌려 놓았다. 결국 교회는 세속주의에 물들기 시작 했다.
둘째.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겼다! 그 우상은 무엇인가? 바로 돈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배금주의 사상에 젖어 버린 것이다. 한국 교회들이 다 그런 것 아니겠지만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주인 행세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 한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마치 자기 소유인양 목소리 높아지고 군림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 한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돈 없으면 아무리 믿음 좋아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등한시 되었다! 예배 중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수처럼 흘러나와 목마른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어야 함에도 말씀은 뒷전이고 자기자랑 세상 자랑 자녀자랑 코메디 연기로 성도를 웃기려는 인도자가 보이니 참되고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뿐이랴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옆 사람과 인사를 하게하고 예배를 방해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행하니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 될 수 없지 않은가?
넷째. 성도의 생활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다! 교회에서 신실한 믿음의 일꾼이요 봉사 잘하고 열심인 사람이 세상에 나가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구별 할 수없는 세상이 되었다. 회식자리에서 술잔 드는 것은 당연하고 한잔 정도 마시는 것은 가벼운 일? 식사 전 감사기도 않는 것은 예사가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한국교회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진정 부흥을 원한다면 굵은 베옷을 입고 십자가 밑에 엎드려 무릎 꿇고 참회해야 할 것이다! 통회자복하며 입고 있던 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늘나라 백성의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자비의주님 그 손에 들려있는 은총의 촛대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이를 갈며 슬피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때 늦은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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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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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철 목사] 교회에서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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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갤럽이 2014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의 전체 종교 비율은 50%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10년 전인 2004년에 비해 4%가 하락한 수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0대의 종교인구가 68%로 가장 높은 반면, 30대에서 38%, 20대에서는 3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 비율은 전형적인 역삼각형 모델로 한국사회 전체의 종교 미래가 어두울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의 시각을 교회 내 다음세대로 한정해 본다면 더욱 충격적이다. 현재 한국의 중고등부 학생의 복음화율은 3.8%로 선교지에 가까운 참담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 1996년 미국의 ‘Christianity Today’가 ‘소리 없는 출애굽’(Silent Exodus)이라고 말한 현상과 비슷하다. 즉, 미국 내 한인교회 2세대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전후로 70%가 교회를 떠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90%가 교회를 떠났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의 다음세대의 교회 이탈 속도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 말한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되는 일은 머지않은 일이다.
젊은 세대의 탈종교화, 특히 교회의 미래가 될 다음세대의 급격한 교회 이탈은 왜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불신자들에게 너무 안 좋아진 것에서 찾고 싶다. 이는 비종교인에게 종교를 믿지 않는 것과 무관하게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를 물은 결과 ‘개신교’가 10%의 비율로 불교, 천주교 등 주요 종교들 중에서 꼴찌를 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개선을 위해서는 교회의 미래인 다음세대에 전략적인 집중을 해야 하며, 그들을 복음으로 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자 매튜 팍스(Mathew Fox)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전통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성경 안에서 보여 지는 두 가지 은총 중 ‘붉은 은총’(red blessing)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즉, 교회 중심의 신앙을 말하며, 죄와 용서에 집중한 것이다. 물론 붉은 은총이 없는 기독교는 없다. 그러나 매튜 팍스에 의하면 기독교는 또 하나의 은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푸른 은총’(blue blessing)이다. 이 푸른 은총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관심을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더불어 사는 것,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것 등에 대한 관심이다. 오늘의 다음세대가 주목하고 있는 바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물을 짓는데 전념하던 패러다임을 ‘붉은 은총’과 ‘푸른 은총’으로 무장된 다음세대를 길러내는 데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다른 세대가 여호와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삿 2:10). 여호수아가 위대한 믿음의 용장이었지만, 다음세대를 향한 신앙전수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실패의 아픈 기사를 남겨놓으신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부모와 교회가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신앙의 전승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다음세대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다음세대 부흥을 통한 한국 교회의 회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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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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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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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7:17에 이런 말씀이 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탈진 상태에 빠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누구일까? 부모? 아내? 자녀? 형제? 스승? 상담사? 의사? ... 물론 다들 소중한 사람들이고 나름대로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들이다.그러나 성경이 확증하고 있는 바처럼 인간관계에서 〈친구〉만큼 좋은 것은 없다.옛 어른들 말에 「부모 팔아서 친구를 산다」고 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일정하게 성장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부모님보다도 ‘친구’가 더 필요하다. 친구란 “가장 가까운 사이 /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 어떤 어려운 문제(부탁)도 들어주고 도와 줄 수 있는 사이 /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이 / 전쟁터에서 친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이 / 외롭고 힘들 때 만나고 싶고 전화하고 싶고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 / 내게 있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기꺼이 주고 싶은 사이 ... ” 이다.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말씀하신다(사41:8, 대하 20:7, 약2:23, 창18:17). 그러니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도 ‘친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친구)이 필요하신 것이다.이 얼마나 놀라우면서도 기분 좋은 현상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고 ‘나의 벗 나의 친구’ 라고 하시니 지켜보는 우리들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온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후손-믿음의 후손-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롬4:11,12).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래, 너희들도 나의 〈벗〉 이다” 라고 말씀해 주실 가능성이 아주 크다.신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좋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생〉이시고 제자들은 〈학생〉이라는 도식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사이〉로 지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 (요 15:11~15)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요13:1), 보호하시고(요14:18),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다(눅22:32, 요20:19, 21:15). 그리고 여전히 사명을 맡기셨다(요21:15, 행1:8).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에 성부께 제자들을 이 험난한 땅에서 보전(保全)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셨다(요17:15). 그리고 성령께도 제자들을 잘 도와주고 지켜 줄 것을 당부 하셨다(요16:7). 그리고 자기 자신도 친히 제자들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셨다(마28:20).〈친구〉란 이러한 것이다. 끝까지 함께해주고 할 수 있는 바는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다 동원하여 사랑하고 지켜주고 도와주는 사이이다. 이 모든 것을 조금도 귀찮게 여기거나 억지로가 아니고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베풀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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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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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률상식] 위험천만한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의 발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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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비부와 특별위원회, 총회가 위탁하지 않은 사건 처리 못해-정치부 상설화는 소수집단이 꿈꾸는 위헌적 독재정치의 꼼수
기독신문 제2015호(2015.6.24.) p.2에 “총회기구혁신안 나왔다”라는 머리기사의 “정치부 상설화로 헌의안 심의 강화”라는 소제목으로 “정치부에 5-6개의 분야별 상설소위원회를 설치해서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정치부는 이 안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고 총회실행위원회에서 심의하므로 가을의 본 총회에서 이를 내외에 수백 건의 헌의안을 급하게 처리하는 일을 방지하자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 즉 올해와 같은 경우 총회정치부 관련 헌의에 대해 구성된 특위만 27개인데, 이 특위의 임무가 정치부 산하 분과들로 분산되는 것이다. 정치부 내에 설치가 가능한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제1분과위 : 헌법, 규칙적용 유권해석, 제2분과위 : 기구, 제도설치 연구, 제3분과위 : 기구, 제도운영 개선, 제4분과위 : 노회행정 조정, 제5분과위 : 불법, 분쟁 조사처리”라는 기사내용과 “한국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세계교회 교류협력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와 같은 상설위원회는 상비부 산하가 아니라 상설위원회로서 활동하게 한다는 것이다.”라는 기사내용은 경악을 금치 못할 충격적인 대형 사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 이유인즉 “정치부 및 특별위원회의 상설화는 헌법을 무시하고 민주적인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는 일부 소수의 집단적 독재정치를 구상하는 위험천만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헌법을 무시하는 것은 곧 성경을 어기는 행위로서(교회 법률상식 pp.608-612 참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인본주의적 정치체제에 다름 아니다. 1. 치리회와 상비부 정치 제8장제1조(정치의 필요)에 “교회를 치리함에는 명백한 정치와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전14:40). 정당한 사리와 성경 교훈과 사도시대 교회의 행사에 의한즉 교회 치리권은 개인에게 있지 않고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다(행15:6).”라고 하여 치리권은 치리회에만 있도록 한 것이 성경과 교회 헌법이 정한 진리요 법리이다. 그런데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는 성경과 교회 헌법의 근본인 장로회 정치의 대원리를 배격하고 치리회인 총회만 처리할 수 있는 노회가 상정한 모든 안건들을 “정치부 상설화로 …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자는 내용이다.”라고 하였고 “이렇게 되면 … 사실상 특별위원회는 거의 폐지되게 된다(올해에 구성된 27개의 특별위원회와 같은 경우 등).”라고 하였으니, 총회가 처결하는 사안과 특별위원회에 맡겨 처리할 사안들을 정치부가 도맡아 하게하는 위험천만한 비성경적 위헌적 소수집단을 구성하여 정치부가 총회위에 앉아서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교회 헌법은 “치리권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 같은 치리회”에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위원회 심사의 원칙을 무시하고 총회 헌법을 어기며 총회의 위탁도 받지 아니하고 “각 노회에서 상정되는 헌법적 정치적 사안들을 즉시 취급하도록”(정치 제12장 제4조 위반) 할 수 있으며, 정치 제12장 제5조(총회 권한) 제1항에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문답, 정치, 권징조례, 예배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고”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치부가 총회의 위탁도 받지 이니 하고“헌법, 규칙 적용 유권 해석”까지 하게할 수 있으며, 동 제3항에 규정한 헌법 조항을 무시하고 “불법 분쟁조사처리권”을 총회의 위탁 없이 정치부가 시행할 수 있도록 한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혁신위원회의 구상은 장로교 정치의 근본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시행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을 폐기하며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고 정치부가 총회의 옥상옥이 되어 독재정치를 해보겠다는 잠꼬대 같은 발상으로 여겨진다. 이는 총회가 장로회정치를 포기하고 혁신위의 구상대로 헌법을 개정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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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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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인물탐구] 관용의 사람 요셉(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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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관용의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무 죄도 없이 형들에 의해 미디안 상고에게 팔려 애굽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형들에게 미움과 분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려 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판 일로 인해 마음에 불안을 품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은 형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인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야곱이 죽자 마음속에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죽었으므로 요셉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을까하는 염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야곱이 죽기 전에 형들을 용서할 것을 요셉에게 유언하였다고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들을 때에 울며 형들에게 두려워말라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하면서 형들이 자신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하셨다고 위로하였습니다. 요셉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뜻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알았기에 형들의 악행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을 때 어떠한 일도 관용하고 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지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그 아비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을 주셔서 에브라임의 자손 삼 대를 보았습니다. 요셉은 장수의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자녀들에게 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권고하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 곧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임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들을 권고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자신의 유골을 메고 가져가겠다는 약속을 하게했습니다. 요셉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은 이루어졌고, 요셉의 뼈는 세겜에 장사되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애굽의 총리였지만 그 땅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언약하신 축복의 땅인 가나안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고 그 언약 성취에 소망을 둡니다. 요셉이 가졌던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서 구원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주님의 언약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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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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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칼럼] 마지막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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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를 믿는 것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것이 함께 있는 것이다. 주를 믿기는 하지만 그 뜻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이것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주를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믿음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이 둘이 서로 분리되면 심하게 말하면 그 신앙은 사기이며 거짓이며 악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며 상대방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며 상대방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 사랑을 위해 생각이나 노하우나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는 사랑으로 가기 위한 길인 것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없고 진리 없이는 사랑으로 갈 수 없고 사랑을 전할 수도 없으며 사랑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과 진리와 선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서재에 수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책을 구입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썼고 읽고 정리하기 위해 시간과 열정을 지불했다. 이것을 기반으로 칼럼과 책을 쓰고 강의도 했다. 수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책들도 있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얼마나 인격적인 사람인가? 얼마나 선을 행했는가? 사람들에게 내 것을 얼마만큼 주었나를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만 들 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두려움은 더 생기고 마음은 더 좁아지고 이기적이 되는 것을 본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자신이 이루어놓은 그 어떤 능력이나 공적은 사라지는 것이며 내 속에 사랑과 진리와 선의 모습이 영원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사랑하는 일과 선을 행하는 일을 놓지 않으면서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 "네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했어도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보면서 주의 이름으로 목사, 장로를 하고 큰 교회, 큰 부자, 권력자일지라도 사랑과 선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이 모습은 추한 모습이기에 주께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주를 믿는다고 하면 ‘서로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행동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믿음과 선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좋은 말과 달콤한 말을 하면서 실제 행동에는 악과 이기적인 속셈이 있으면 그는 사기꾼이며 악한 자인 것이다. 이런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진리와 사랑의 분리 이것이 사단의 계략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원래 사랑과 선에서 지혜와 진리가 나오고 진리를 통해서 믿음이 생기며 믿음을 통해서 사랑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선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믿으라고 하면 이것은 독재이며 악인 것이다. 독재시대를 상기해 보라. 그들은 좋은 명분을 갖고 믿으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는 사랑과 선이 있지 않았다. 그냥 위협과 강요와 협박이 있었을 뿐이다. 자유를 주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악 중의 악이다. 천국은 주를 믿는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지배욕을 갖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고 상대방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화내는 사람이나 소유욕으로 돈과 권력과 최고의 좋은 것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숨이 막혀서 살 수 없는 곳이다. 으뜸이 아니라 낮은 자가 되는 것, 지배가 아니라 섬기는 것에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만 있으면 여기에는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능력, 무한한 풍요와 무한한 기쁨, 무한한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가 믿는 것이 하나가 되는 곳이 천국인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마지막 때를 예언한 것을 보면 “마지막 때는...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지리라.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다. 진리에서 사랑이 분리되는 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인 것이다. ‘이것이 옳다’ ‘이 말이 진리다.’ ‘이것이 방법이다’....이런 말들은 홍수처럼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진심과 사랑과 선이 없으면 거대한 구멍이 뚫려있는 것과 같다. 요즈음 책들이 얼마나 많으며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 인터넷에 넘치는 것이 지식이며 진리다. 그러나 사랑은, 정직함은,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은 얼마나 있는가? 주를 사랑하고 믿는 것만큼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과 선을 행하는 하나가 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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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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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라 (고전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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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해서 함께 생각 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 사랑이라는 것이 누구든지 자신 있고, 누구든지 불안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모두 사랑 받고 자라고, 사랑에는 도사 같이 살아가지만 가장 실패하고,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게 사랑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심이 되듯이 사랑도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 버리고 사랑의 온도가 약해지니까 많은 사람이 문제와 어려움, 갈등이 생기는데 이것이 사랑의 문제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을 아십니까? 그 분은 이북에 사모님을 두고 오셨습니다. 잠시 피난 온다고 왔는데 휴전선이 막혀서 못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북에 두고 온 아내 때문에 평생을 수절 한 분입니다. 아내와 헤어지고 죽기까지 45년을 홀로 사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청십자의료보험 제도를 처음 만든 분이고 흔히 우리가 장기려 박사님을 사랑의 사도라 하고 많은 의료인들이 존경하는 사랑의 결정체이십니다. 그분이 늘 주장 하는 게 있습니다.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는 아무 말도 하지 말자”입니다.성경은 그 차체가 러브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십계명은 위로는 하나님 사랑, 옆으로 밑으로는 이웃사랑 이게 십계명의 정신입니다. 우리교회에 서울대 법대를 나오시고 불교계에서 아주 촉망 받는 엘리트 스님이 있습니다. 군에서 법사와 스님생활을 하고 스님 부인은 한의원장입니다. 그 부부가 우리교회에 와서 등록을 하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불교계에서도 뛰어나시고, 불교계에서 종자연을 만든 굉장한 엘리트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분이 간증하시길 자기가 아는 한분이 아주 진실하고 그분을 보면 천사이고, 예수님인 듯한데, 한 사람의 진실함, 사랑의 모습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 생각해서 결단하고 모든 걸 청산 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을 소개하기 직전에 고린도전서 12장 31절의 말씀도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요.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네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네 몸을 통째로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에 실패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측은지심입니다. 불쌍히 여기면 용서 못 할 사람이 없습니다.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서 ‘저 사람이 오죽했으면 저럴까!’, ‘저 사람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갈 때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이기는 것은 사랑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사람이 옷을 추스르지만 따뜻한 햇살이 비추면 옷을 훌훌 벗어 던지듯이 사랑으로만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고 사랑으로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만 우리가 주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부자, 사랑의 영향력이 있는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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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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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회계] 복식부기시스템에 기초한 교회자산의 평가와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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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자산(asset)은 예배등의 목적을 위해 장기간 보유하는 경제적 자원이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공동체로서, 지속적인 성장과 사명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수익ㆍ비용에 대한 재정흐름은 물론, 결산시마다 자산가치를 적절히 평가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본 칼럼은 제4회 재무상태표의 작성에 이어, 자산의 평가와 관련된 대손, 감가상각, 공정가치, 손상등의 복식부기 회계처리방법을 설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산은 1년이내에 현금으로 전환되는 유동자산과 이후에 전환되는 비유동자산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자산 중 채권회수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경우, 대손을 추정하여 회수가능액으로 장부에 표시한다. 즉 대여금 1억원중 1천만원의 회수가 어려운 경우 [대손상각비 1천만원/대손충당금 1천만원]을 분개, 전자는 비용, 후자는 해당 대여금에서 차감하는 형식으로 괄호를 표시하여 기록한다. 둘째, 토지와 건설중인 자산을 제외한 모든 유형자산은 상각을 한다. 감가상각(Depreciation)이란 자산의 취득원가에서 잔존가치를 차감한 금액을 내용연수에 걸쳐 체계적인 상각방법에 의해 비용으로 배분하는 과정이다. 상각방법은 정액법, 정률법, 연수합계법, 생산량비례법등이 있으나, 교회의 경우 건축물, 차량운반구, 비품등이 주요 대상이므로 적용이 간단하고 간편한 정액법의 사용도 좋다. 정액법은 매년 상각금액이 동일한 것으로, 취득원가 5억원, 잔존가치 0원, 내용연수 20년의 건축물인 경우 연간 상각액이 2500만원(=(5억원-0원)/20년)이다. 분개는 [감가상각비 2500만원/감가상각누계액 2500만원]으로 전자는 비용, 후자는 자산의 차감항목으로 표시한다. 또 법인세법시행령(제27-29조)은 내용연수에 대해 차량운반구 5년, 건축물 20년으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바 이들의 참조도 바람직하다. 셋째, 교회의 건축물(사택포함), 토지등은 매년 시가가 변동될 수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자산재평가를 실시한다. 재평가금액은 재산세 근거자료로 제공되는 공시지가 또는 국토해양부 아파트실거래 사이트(rt.molit.go.kr) 등을 통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예로 20x1년에 취득원가 5억원의 토지가 20x2년에 4억원으로 하락, 20x3년에 7억원으로 상승한 경우, 20x2년말에 [재평가손실 1억원/토지 1억원]으로 하여 토지를 하락한 가격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시가가 상승한 20x3년에는 재평가손실 1억원을 대변에 기록해 먼저 상계한 후, 재평가이익 2억원을 기타포괄손익항목으로 표시하고, 토지의 현시가인 7억원을 재무상태표 장부가액으로 한다. 넷째, 원가모형을 적용하는 모든 비유동자산은 손상(Impairment) 회계처리를 한다. 즉 자산의 회수가능액이 장부가액보다 현저히 낮은 경우, 감소된 부분을 비용으로 처리하고, 회수가능액을 새로운 장부가액으로 한다. 즉 취득원가가 1억원인 금융자산의 회수가능액이 6천만원으로 하락한 경우, [손상차손 4천만원/손상차손누계액 4천만원]을 분개, 전자는 비용, 후자는 해당자산의 차감항목으로 표시한다. 손상은 국제회계기준(IFRS)의 도입에 따른 신개념이나 유형/무형/투자자산 모두에 적용되는 포괄적인 것으로 가격상승은 고려치 않고, 떨어진 가격이 회복된 경우에만 손상전의 장부금액을 한도로 수익항목인 손상차손환입을 인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상과 같이 자산평가는 교회의 재산가치와 포지션을 정확히 산출하기 위한 과정으로, 자산관리와 예산편성, 장기적 의사결정을 위해 꼭 필요하다. 또한 자산은 부채와 함께 재무상태표에 표시되어, 연도별 비교를 통해 재산가치 변동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교회지도자와 회계담당자는 매주의 수익과 비용을 운영성과표에 기록함은 물론, 결산시점에서 자산과 부채를 집계ㆍ평가하여 최소 1년에 1회 이상 재무상태표를 작성하고, 또 이를 교회 실정에 맞추어 연말 정기공동의회에 보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다음 회는 부채와 순자산의 평가와 구조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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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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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칼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법을 준수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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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기르다 보니 익숙해진 단어 중 하나가 ‘성장통(成長痛)’입니다. 특히 야외활동이 많았던 날이면 어김없이 다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 호소하는 딸들에게 아내는 슬기롭게도 ‘그건 성장통(growing pains) 때문이야’라고 말해주곤 했습니다. 아픈 원인을 제시해 주었을 뿐 아니라, 조금 만 참으면 그 대신 키 큰다는 믿음은 실로 대단한 효능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지금 이 나라가 앓고 있는 여러 가지 병리적(病理的) 현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불과 100여 년 만에 ‘조선(朝鮮)’에서 ‘IoT 강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은 그 대신 일종의 아노미(anomie) 현상을 겪으면서 상식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몰상식(沒常識)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조금만 조심하고 조금만 용인하면 될 층간소음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내 차를 앞질러 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행과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호기심으로 구입한 파라니아(piranha)를 무단 방류하는 행위가 연일 신문지면을 뒤덮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경기도의 한 교회가 표어 중 하나를 ‘상식이 통하는 교회’로 정했겠습니까? 그 자체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하나의 반증(反證)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셨으니, 이제부터라도 성도들은 먼저 상식이 통하는 삶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상식이 통용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둘째,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집단 어느 사회에나 불문율처럼 지켜지는 원칙(principle)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원칙이 파괴되는 경우 사회는 큰 혼돈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쌍방 진지한 합의로 도달한 약속은 으레 지켜지리라 믿는 신뢰가 여기 속합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과정에서 제시하는 공약(公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라는 사실을 일반 대중들이 눈치 채기 시작하는 순간, 이 사회에서 약속을 향한 신뢰는 이미 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1997년 당시 미국을 강타했던 소위 ‘르윈스키(Lewinsky) 스캔들’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를 일종의 ‘가이드 라인(guide line)’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윤리적으로 그 정도의 성적 일탈은 사회에서 허용된다는 일종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공적 기관이나 지도자의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교회가 흔들림이 없다면 그 사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는 교회들이 절실한 세상입니다. 셋째, ‘법을 준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합법성뿐만 아니라 정당성까지도 구비한 법이냐 하는 점입니다. 희대의 현자(賢者) 소크라테스(Socrates)는 죽는 순간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긴 적이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플라톤이 쓴 대화편 ‘파에도(Phaedo)’에 잘 나타나 있는데, 도망치라는 크리토(Crito)의 요청을 거절하고, 갚을 빚을 대신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독배를 들이켰습니다. 인륜과 정의를 올바로 구현하고 있는 법이라면 마땅히 지키고 준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획득하고자 했던 가치가 바로 정당한 법, 정의로운 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다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절차적 정당성이나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법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의 한국 사회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법을 준수하고 수호하는 일입니다. 여전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이른바 ‘코리안 스타일’로 떼를 쓰고 완력을 써야만 일이 해결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적어도 교회들만이라도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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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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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칼럼] 꿈에도 상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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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거제도로 교역자수련회를 간 적이 있다. 오전엔 세미나를 하고 오후엔 유람선을 타고 외도 관광을 하였다. 그런데 외도로 가는 길에 보니 푸른 남해의 바람이 만들어낸 기암절벽이 한 폭의 유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파도와 섬의 도시 거제도, 해금강과 십자동굴, 100미터가 넘는 기암절벽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롭다. 바람의 손자국, 파도의 거친 부딪침이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기암절벽 끝에 서 있는 낙랑장송의 고고한 자태는 심장이 멎을 듯 벅찬 감동을 주었다. 어찌 금강산에 그런 소나무가 없고,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왜 멋진 나무가 없으랴만. 오히려 바다 한 가운데서 거친 파도와 세찬 해풍 속에서도 기어이 기암절벽에 뿌리를 박고 낙랑장송으로 서 있는 자태는 어느 나무도 따라올 수 없는 절박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태로운 절경이며 상처 난 꿈의 조각이었다. 맞다. 아, 꿈에도 상처가 있다. 꿈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만 아니다. 조개의 상처에서 흐르는 눈물이 훗날 값진 진주가 된 것처럼 상처가 나야 꿈이 꽃핀다. 모든 꿈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다. 나에게도 상처가 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아무도 부목사로 불러주는 교회가 없어서 교회 개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말이 개척준비이지 거룩한(?) 백수생활을 한다는 것이 한 가정의 가정으로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시간도 여유가 있고 해서 개척준비의 일환으로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하고 시험을 보았는데 하루 만에 필기와 실기 코스 모두 합격을 하였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운전면허 합격증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자랑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아들을 품에 안고 하는 말이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들아, 너희 아버지가 이제 운전면허를 땄으니 택시운전이라도 해서 너를 굶기지는 않겠구나...” 그 순간 내 자신이 너무나 처량해지고 인생이 서글퍼졌다. 불타는 소명감으로 충만하였던 나에게 아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는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그 말에 오히려 더 자극을 받아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내가 보란 듯이 이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리라, 세상의 차별과 불가능의 벽을 넘어 반드시 꿈의 승리를 보여 주리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반드시 나타내 보이리라.”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돈도 없고 학벌도 없고 후원자도 없는 시골 출신의 내가 개척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묘연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평가와 잣대이지 나의 꿈의 판단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꿈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불가능과 편견을 넘어서 기적 같은 교회 부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상처가 있었기에 자극이 되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달릴 수 있었다. 꿈을 생각하면, 해금강의 기암절벽이 떠오른다. 천년의 바람과 파도가 스치고 간 그 상처가 눈에 선하다. 꿈에는 상처가 있다. 마치 해금강 절벽에 서 있었던 낙랑장송이 바위틈에 피어난 난초들과 더불어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나를 보시오. 수천 년, 수만 년 해풍에 깎이고 다듬어지며 기암절벽을 만들었지 않소. 빛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의 고독을 누가 알아주겠소. 꿈에도 상처가 있다오. 아니, 그 잔인한 상처를 견딘 자만이 위대한 꿈의 조각을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거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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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