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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말씀] 성내는 요나, 아끼시는 하나님 (요나서 4:9~11)
    사람들은 환경적인 요인과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쉽게 미워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까지도 아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 얻도록 오래 참으신다. 성경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닌 구원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갔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니느웨를 싫어하였다.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철천지원수국가인 앗수르의 성읍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지만 요나는 싫어서 짜증이 났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감정이 부딪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 최강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요 큰 성읍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사흘 길을 걸어야 돌아 볼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니 기가 죽을 법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규모에 눌리지 마라. 어린 소년에 불과한 다윗은 덩치가 큰 적국의 장수 골리앗 앞에서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위세를 과시할지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를 향한 도전에 “내가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선뜻 나섰다. 하나님의 영광에 민감한 다윗의 모습에 주님은 기뻐하셨다. 사람이 성질을 부려서 되는 일은 없다. 다만 정서상 미숙함을 노출할 따름이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 분을 내어도 하루해가 지나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된다. 분을 내어도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된다. 그러나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하며 성질을 부렸다. 정으로 살지 말고 뜻으로 살아야 되는데 인간적인 사람들에게 이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 성질 때문에 혈압이 올라가고 병이 생긴다. 하나님은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진다.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되지 말고 공적인 자리와 의미, 뜻을 좇아 살아야 한다. 좋고, 싫고, 나쁜 감정선을 벗어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다.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다. 요나는 심지도 않고, 수고도 아니 하고, 재배도 아니 한 박 넝쿨을 아꼈지만 주님은 큰 성읍, 니느웨에 수많은 생명들을 아끼셨다. 수고도 아니 한 것, 박 넝쿨 이파리 하나 때문에 속상해 하지마라. 고작 하루 동안 억지로 전한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의 왕과 신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수많은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 사랑 운동을 하라. 생명구원의 전도열정을 포기하지마라. 믿거나 말거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고 외치라. 요나는 박 넝쿨 이파리 하나를 가지고 죽내 사내 하였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크신 긍휼을 보여주셨다. 사랑으로 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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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1
  • [서임중칼럼] 왜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 뿐인가?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용어가 우리들의 삶에 일상이 되면 우리들의 삶은 황량한 벌판이 된다. 그래서 복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일상이 되는 십자가 은혜의 삶이다. 그것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작금의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못되면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하나 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이 지경이 되도록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국민들을 살맛 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그들로 인하여 고통해야 하는가?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대통령이 구속되어 헌법재판소의 탄핵소추를 받는 상황에 국가경쟁력은 곤두박질치고, 경제는 여름 가뭄에 논바닥 갈라진 듯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카오스 현상이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호언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국가가 무너지고 국민의 삶이 좌불안석이 되어도 그들은 오직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에 가히 혈안이 된 듯한 행태를 보면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아직도 이 나라는 영웅 같은 정치 지도자가 보이지 않으니 그럼에도 아직은 난세가 아닌가 보다. 교회도 다를 바 없다. 은퇴 후 초교파적으로 매 주일 말씀 사역을 다니면서 듣고 보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시끄럽고 분쟁으로 교인들이 아파하는 교회의 공통점 또한 ‘내 잘못 없고 네 잘못’ 뿐이다. 추(醜)함이다. 십자가 은혜와 평강으로 거룩한 동행을 하는 교회는 좋은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잘못은 모두 ‘내 탓’이 일상화된 것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다. 카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카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하여 우리 사회를 함께라는 공동선을 지향했다. 동시에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ς)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 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귀감이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아름다운 자기반성의 아름다운 사회운동이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 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행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정의를 외치며 하나님의 공법을 역설하면서 성경을 강론하는데 자기 생각을 채색하여 선포하여 교인들은 둘로 갈라치기 되고 교회는 분쟁이 일어난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데 왜 교회는 자꾸 분쟁으로 카오스현상이 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인’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지고한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 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도자는 항상 이론과 실제, 그리고 가르치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의 차이로 고민을 하게 된다. 그것은 국민들은 정치 지도자의 행동철학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고 나면 거짓말이 되는 정치지도자의 언행에서는 결코 국태민안의 정치리더십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오늘의 국민들은 야고보의 리더십을 요청한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말이다. 왜 이순신을 회고하고, 김구를 읊조리며, 윤동주를 그리워 하는가? 왜 주기철을 회고하고 손양원을 읊조리며, 조만식을 그리워 하는가? 그들에게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어디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가? 말할 것 없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쉽은 긍휼이었고 겸손이었고 섬김이었다. 오늘의 보통 사람들은 정치에서나 종교에서나 인물 풍년에 인재 흉년이라는 아픈 용어가 사라지기를 소망한다. 너나없이 오늘도 힘든 하루를 살아가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됨을 믿기에 오늘도 엎드림으로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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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성서연구] 차기 지도자는 누구인가
    대통령 탄핵 정국에 있다 보니, 오늘 원고의 제목을 보고 읽게 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정치 평론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원고입니다. 대한민국 교계에, 정치, 경제 등 여러 영역을 위한 차기 지도자들이 많아지길 원합니다. 지도자는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우리 사회에서 <차기>를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은 정치인만은 아닙니다. 차기를 준비하는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차기>를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그 예가 다윗과 바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통치하고 있을 때 이미 차기 지도자로 다윗을 예비하시고,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방의 사도로 복음을 증거할 차기 영적 지도자로 사울이란 청년을 선택하시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는 후일 바울이란 이름으로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세대 지도자>란 말 자체가 암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는 아직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현재는 지도자가 아니지만 내일이란 시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시간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현재 피 나는 자기 훈련을 통하여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훈련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차세대 지도자들이 얼마나 철저한 훈련을 통해 준비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윗은 어린 시절 차기 지도자로 내정된 후 긴 세월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강적과의 맞대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인했고, 민족애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그 어떤 적도 이길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전쟁터에서 리더십과 신앙인의 영적 야성을 터득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왕의 사위로서 궁중의 음모들을 통해서 권력 주변의 악한 현실을 배웠고, 그 현실과 맞서기 위해 어떠한 하나님의 정의가 필요한지를 철저히 배웠습니다. 세례 요한도 그렇습니다. 요한은 능력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얼마나 강력하고 호소력이 있었는지 당시 강퍅한 군인들, 돈 때문에 민족까지 배신한 세리들도 요한 앞에 나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할 정도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우러러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능력의 메시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숨겨진 삼십년> 때문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성장했습니다.(눅 1: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 있으니라) <광야>는 고독한 영적 훈련소입니다. 바울 사도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삼 년을 머물렀으며,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사십 년을 훈련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광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훈련하는 광야에 요한은 삼십 년을 머물렀다고 하겠습니다. 그 삼십 년은 요한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는 헤롯왕의 불의를 정면으로 책망할 수 있는 정의감과 용기를 배웠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도 그렇습니다.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표된 것은 후였지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지도자였습니다. 모세를 수행하면서 리더십ㄴ 훈련을 받았고, 이 외에도 여호수아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받은 더 철저한 훈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여호수아의 훈련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회막이 하나님을 뵈옵는 장소였으며, 여호수아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거기서 철저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기간은 거의 사십 년에 달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 곳곳에서 진정한 차기 지도자들이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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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시사칼럼] 천재론
    천재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 시대에도 천재가 필요할까요? 역사의 주역은 천재입니까, 아니면 범상한 인물들입니까? 오랫동안 제기되었고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천재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사상가들마다 달랐습니다. 대표적인 천재예찬론자라 할 수 있는 철학자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쇼펜하우어를 천재라고 부르면서 “사람은 각자 내면에 ‘생산적인 유일성’ 곧 ‘그의 본질의 핵심’을 지니고 있고, 이 유일성을 의식하면 비범한 사람의 광채가 나지만 게을러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몰락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또한 ‘선악의 저편’에서는 천재를 “생산하든지 출산하는 자”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반면 덴마크 태생으로 실존주의 효시라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니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철학자였습니다. 자신부터 천재를 꿈꾸지 않았으며 세속적 천재보다 신앙적 인물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천재와 사도의 차이점’이란 글에서 천재는 ‘내재(immanance)의 영역’에 머무는 반면 사도는 ‘초월의 영역’(transcendence)에 속했고, 내재의 영역에서는 이성이 절대적이지만 초월의 영역에서는 신앙이 귀하다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천재가 아니라 순교자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천재란 비범합니다. 재능과 기예 면에서 비범하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도 그러합니다. 특히 천재라 불리던 사람들은 보편적인 실존적 불안을 넘어서는 증상을 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죽하면 이런 측면을 천재의 특성으로 꼽을 전도였겠습니까? 1514년 당대의 화가로 추앙받던 알브레히트 뒤러는 ‘멜랑콜리아 1’이라는 작품을 그렸는데, “멜랑콜리아”라는 말 자체가 불안이나 우울이란 의미이니 그런 면들을 천재의 특징으로 여겼다는 당시 풍조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창의적인 상상력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창조는 우울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니체의 말처럼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출산하는 일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창조적 천재들이 우울증을 앓았다는 말이 일견 그럴싸해 보이기도 합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말러, 고갱과 고흐, 헤밍웨이, 마크 트웨인, 로빈 윌리엄스 – 이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종 불안과 우울에 시달렸던 유명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천재들이 시대를 선도하고 문화를 주도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인간의 역사는 얼마나 불안정한 기반 위에 놓여 있겠습니까? 인간 문명이 불안에 기초한다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울한 소식입니까? 그렇다면 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천재에 열광하는 걸까요? 다시 키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재란 ‘자신의 사고를 한 방향으로 활용하거나 모든 것을 소재로 이용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적인 삶을 진지하게 관찰하며 여기저기에서 모범과 자극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자기의 수단으로 짜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162). 천재가 우리와 다른 점은 그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열정과 관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재는 우리가 온갖 곳에 쏟는 관심과 에너지를 자신의 일에 온전히 투자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일”이라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천재라 불리는 존재들은 처음부터 인류애나 역사의 진전 같은 문제에 관심을 쏟았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상한 ‘천재론’이 퍼져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폐허가 된 이 땅을 부강하게 만든 존재는 한 사람의 천재였습니까? 개발도상국에 불과하던 이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요 세계 5대 문화강국이 되게 한 비결은 한 사람의 비범한 천재의 지략과 재능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이념과 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은 천재적인 누군가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십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존재를 만들어내고 그런 존재들에 집착합니까? 일종의 허영심과 자기애 때문이라고 한 사상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면서부터 괴물인 자보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괴물로 만들어진 존재가 더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 땅의 위대하고 찬란하며 아름다운 역사는 한두 사람의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수많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역사의 주관자를 누군가 하나의 존재로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영광의 자리는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를 부정할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은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자취와 행적을 좇아 살아가는 범상한 그리스도인들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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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은혜의말씀] 순종, 자람, 사랑 (누가복음 2:51~52)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유일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어떻게 자라났고 어떻게 사랑스러워져 갔는가, 그야말로 예수님의 골든타임을 살펴보며 교훈을 얻자. 1.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으로 내려가셨다. 요셉이가 어릴 때 아빠 사랑을 담뿍 받은 것이 후반전에 요동치 않는 멘탈갑이 되었다. 복음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중심하고, 나라를 세우는데 쓰임받자. 행복한 가정에서 건강한 자녀가 나온다. 신앙생활은 교회보다 가정에서 부모를 통하여 먼저 배운다. 부모가 신앙의 본을 보이려고 애쓰기보다 은혜의 자리에 데리고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큐티, 가정예배, 새벽기도가 신앙생활의 골든타임이다. 가정예배가 가장 기본이요, 본질이요, 핵심이요, DNA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가정에서부터 배워 거룩을 감당하면 행복, 형통,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 2. 예수님의 모습은 ‘순종하고 받드시는 것’이었다. 순종이 내공있는 실력이다. 순종을 통해서 배워간다. 가정에서 순종이 시작되고, 일상에서 순종은 좋은 성품이 된다. 쓰임 받는 사람의 한 가지 조건은 순종이다. 성품이 안정되고 생활의 자신감이 있을 때 조용한 가운데 순종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도 그러했듯이 순종도 계승되고 전달된다.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미덕은 순종과 충성이다. 충성스런 종은 추수 때의 냉수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주께서 일꾼들을 칭찬하실 때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신다. 3.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 성숙해졌고 철이 들었고 성령충만해졌다는 뜻이다. 성장본능이 있다. 식물은 심어놓으면 자라고, 아기는 태어나면 반드시 자란다. 폭풍성장의 때도 있다. 대나무는 하루에 91cm까지 자랄 수 있다. 물고기는 어항의 크기만큼 자라고, 식물은 화분의 크기만큼만 뿌리를 내린다. 나 자신을 자신의 틀 속에 가두어 두지 말고 꿈이라도 빵실하게! 기도라도 거창하게! 입을 넓게 열라. 세계가 우리 교회의 교구다. 코로나 이후에 영상세계, 유튜브가 되면서 포도원교회는 일만가정, 삼만성도, 십만선교, 백만전파가 실현되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대하고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말고 무한도전 하라. 안될 수 없는 교회 부흥이다. 또한 지혜와 키가 균형있게 자라는 것이 건강이다. 균형이 지혜이고 균형이 안정이다. 4.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일에는 성공하고 사랑에는 실패자가 되지 말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사랑, 절대사랑, 불멸의 사랑이다. 사랑의 개념으로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도 사랑받고 사람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부간에 존경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나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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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자녀에게 변화를 가르치려면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굳어버린 우리의 옛모습에서 탈피하여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변화를 가르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의 자녀에게 변화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해주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야기를 주목해보려 합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세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짐에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게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막4:3-8) 여기에는 네 가지 땅이 나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 땅이 나옵니다. 첫 번째 그룹인 길가 밭, 돌짝 밭, 가시떨기 밭. 이 세 밭의 공통점은 결실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길가 밭은 어떻고, 돌짝 밭은 어떻고, 가시밭은 어떻다고 하면서 이것들을 구별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밭은 밭이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결실이 없습니다. 그럼 왜 없을까요? 이게 중요한 거죠.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이 밭들은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거부하고 원래부터 있던 본래 모습 그대로 사는 거예요. 길가 밭은 길가 밭 그대로 씨앗을 튕겨내는 밭으로 계속 삽니다. “나 길가 밭이야! 야, 씨앗이 어디 떨어져?” 그러면서 씨앗을 튕겨내면 새들이 와서 먹어버리는 거예요. 돌짝 밭은 “나 이 돌 하나도 안 치울 거야. 야! 씨앗 떨어졌어? 살짝 뿌리내리겠지만 너 금방 죽어버릴걸! 아이고, 또 죽었네!” 이러고 계속 사는 거예요. 그렇게 사는 게 맞는 줄 알고 그렇게 계속 자기 속에 있는 돌들을 하나도 안 치워요. 가시떨기 밭은 그 안에 있는 가시떨기가 떨어지는 씨앗마다 기운을 다 잡아먹어서 다 죽여버려요. 그러는데도 그게 잘못된 줄 몰라요. 그렇게 세 밭 모두 아무런 결실이 없는 삶을 반복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 밭처럼 그냥 가만히 그 어떤 변화도 거부하고 살면 변화가 없습니다. 고통도 아픔도 없습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다 죽고 맙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은 고통 없이 사는 길입니다. 아픔도 없고, 아무런 변화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면 결국 아무도 못 살리고 끝납니다. 결국 나도 그렇게 살다가 죽고 맙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길도 있습니다. 바로 좋은 땅입니다. 이 좋은 땅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결실이 30배, 60배, 100배로 점점 커집니다. 즉, 나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 삶의 열매가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너무너무 풍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지으신 걸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좋은 땅이 이렇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갈아엎었기 때문입니다. 길가 밭이었던 땅을 곡괭이로 다 내리찍어서 호미로 갈아엎고 쟁기로 갈아엎어서 흙이 완전히 뒤집어진 땅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뒤집어서 아프고, 눈물 나고, 파헤쳐진 땅은 땅의 입장에서 볼 때는 기분 나쁘죠. “나 멀쩡한 땅인데 왜 나를 이렇게 괴롭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왜 나를 이렇게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어?” 그런데 그렇게 갈아엎어졌더니 그 결과로 그 땅에 떨어지는 씨앗마다 열매를 맺는데 30배, 60배, 100배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그냥 아이들 동화 읽듯이 “그냥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라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게 천국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천국은 어떻게 옵니까? 내가 살던 대로 살고, 만나던 사람 만나고, 내가 좋은 대로만 살면 우리는 여전히 길가 밭이고, 돌짝 밭이고, 가시밭일 뿐입니다. 결국은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 다 튕겨내고, 내 주변 사람 다 메마르게 하고, 내 주변 사람 다 힘들게 해서 결국은 다 죽여버리는 길가 밭, 돌짝 밭. 그게 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모르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면서도 나는 잘 사는 줄 압니다. 그래서 공부 1등 하는 길가 밭 되고 싶어 하고, 사람들에게 인기끄는 유명한 돌짝 밭이 되고 싶어 하고, 남들이 알아주는 존경받는 가시떨기 밭이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돼도 결국에는 다 죽고 다 끝나고 다 망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가는 게 우리는 성공인 줄 알고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기를 원하십니다. “얘들아! 얘들아! 이제는 너 혼자 사는 길가 밭으로 성공하는 그거 포기하면 안 되겠니? 너 혼자 큰 돌덩이 상처 끌어안고 살아서 너한테 다가오는 사람마다 그 상처 때문에 메말라 죽는 거 이제 안 하면 안 되겠니? 이제 세상의 근심과 걱정 때문에 너도 죽고, 남도 죽는 그러한 상처받는 삶을 안 살면 안 되겠니?”라고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거 다 갈아엎고 나면 너 한번은 아프겠지만, 너 이거 불편하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갈아엎어진 너의 마음 가운데 내가 보내주는 너의 가정마다 살아나고, 너의 직장 동료마다 살아나고, 교인마다 살아나는 그러한 새로운 밭 옥토 밭 되면 안 되겠니?”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 새로운 밭이 되어야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새 해가 밝아오는 것입니다. 이 변화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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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3-04
  • [교회건축칼럼] 교회건축과 지속성장
    코로나를 겪으면서 교회는 비대면 예배와 온라인 예배에 익숙해져있다. 이런 변화는 교회성장을 둔 화시키고 성도수 감소로 이어졌다.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기존의 예배위주의 교회 환경을 지역 사회와 공유하거나 소통하는 공간으로 변화시켜야한다. 교회건축시 문화공간으로 계획해야한다. 지역사회가 교회와 유지적으로 연계되어지고 연합되어져야 비대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 지역주민의 사랑방기능으로서의 북카페는 교회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인식시킨다. 특히 키즈방이나 키즈카페등은 엄마와 아이가 교회로 오게할 수 있는 적극적인 건축방향이 필요하다. 교회의 교육공간은 청소년 지역센터로 평일개방하여 스터디 카페로 사용하게하여 교회 공동화를 극복해야한다. 비대면 시기에 청소년 대학생들은 지역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교회의 공간이 이것을 대체하면 성장에도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교회의 주중 활용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내부기능을 극대화하여 경제적 공간을 계획해야한다. 교회특성상 하나의 실이 대수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분리와 통합의 공간설계가 필요하다. 대공간은 가변식 파티션으로 중·소 공간으로 분활 할 수 있고, 다기능의 공간으로 사용될수 있다. 특히 식당은 주일 하루만 사용하는데 식당을 문화센터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게 내부 기능을 대각화 해야한다. 방치되어있는 외부공간을 기능있고, 감성공간으로 계획한다. 외부공간은 내부공간이 가질 수 없는 기능을 소유한다. 야외 카페테라스, 프로그램 주차장, 바자회장, 마을장터, 어린이 키즈랜드, 청소년 체육공간등은 외부공간을 감성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지붕층공간은 스카이라운지, 풋잘장, 실내놀이공간, 야외공연장과 같은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어 지역사희의 명소로 탈바꿈된다. 지역사회와 교회가 공존하며, 소통하는 적극적 공간으로 개방되어질 때 지속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지역사회가 필요한 기능이나 공간, 지역주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의 전략적인 분석과 연구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교회건축이 단순히 공간이 부족해서 진행되는 것 보다 지역사회와 연합되고 소통되어 지는 측면에서 접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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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한교총, “헌법재판소 결정 존중할 것”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김종혁 목사)이 지난 2월 23일 3.1운동 제106주년 기념 예배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는 시국 성명을 발표했다. 한교총은 “한교총은 극단적 보수와 진보를 지지하지 않으며, 이미 적시한 대로 헌법재판소가 법리에 따라 숙고하여 무엇을 결정하든 그 결정을 존중하며 존중할 것"이라며 "모든 교회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되 권한을 가진 이들이 나라와 국민의 유익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기도하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우리는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쪽에 속하더라도 함께 살아야 할 하나의 대한민국이다. 서로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것으로는 평화로운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 서로 용납하며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전하면서 정치인들에게 “분열과 대결을 통해 얻고자 하는 당리당략적 노림수를 내려놓고, 대화와 타협으로 통합된 대한민국을 위해 앞장 서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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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한국인 선교사 2명 강도습격으로 숨져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김창열 선교사(88세)와 이리문 선교사(58세)가 현지 강도의 공격을 받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이들은 예장통합 순서노회가 파송한 선교사로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다. 김 선교사는 은퇴 후 2년 전 마다가스카르로 선교활동을 떠났고, 이 선교사는 작년 합류해 현지인들에게 농업기술과 경제적인 자립을 돕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쳐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파송한 순서노회측은 “선교사님들의 유해가 한국에 오면 노회장을 치를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갑작스런 비보에 노회원들 모두가 놀란 상태”라고 전했다. 순서노회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선교에 더 열을 올리겠다”며 두 선교사의 희생을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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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김의식 목사 재판 기각...파장
    불륜의혹으로 재판을 받던 전 총회장 김의식 목사가 총회재판국으로부터 기각 판결을 받았다. 예장통합 총회 재판국은 지난 2월 11일 김의식 목사 불기소 처분에 대한 재항고 사건을 심리하면서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고 총회헌법에 규정하고 있다”며 “제출된 증거를 살펴보면 무인텔 주차장에서 나오는 장면인 정황 증거만 있지, 결정적 직접적 증거가 될 수 없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또 총회 재판국은 “피의자의 피해 사실이 없어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고, 책벌할 수 있는 법률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제출된 녹취록에서 '관계를 끊겠다', '연락을 안 하겠다'고 한 것은 지속해 왔던 상담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취지였고, '속죄하며 살겠다'고 한 것은 불륜 관계를 진술한 것이 아니라 상담 장소가 부적절해 의심의 여지를 남기고 교단의 명예를 실추한 것에 총회와 성도들에게 속죄하며 살겠다는 취지였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이날 총회 재판국이 기소명령을 결정했다면, 김의식 목사는 영등포노회 재판국에 출석해 불륜 사건에 대한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총회 재판국의 기각 결정으로, 여성 교인과 무인텔에 출입한 김의식 목사를 권징할 수 있는 방법은 사라졌다. 총회 재판국 결정에 앞서 영등포노회 기소위원회도 '증거 불충분'으로 김의식 목사를 불기소 처분한 바 있다. 이번 총회 재판국의 기각 판정에 대한 교단 내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교회개혁신도행동연대와 명성교회평신도연합회는 지난 2월 18일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앞에서 총회 재판국의 결정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근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재판국 해체와 김영걸 총회장 사퇴 촉구 기자회견’이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죽음을 상징하는 상복까지 입은 채 기자회견이 진행하면서 지금이라도 문제를 제대로 치료하고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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