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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일상의 영웅 (열왕기상 17:1~7)
    일상의 기적,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기적과, 축복과, 대박을 좋아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종합비타민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매일 만나를 주시는 그저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는, 무슨 보약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삼시세끼 밥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엘리야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아주 소박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엘리야의 도피과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피난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3~4} 하십니다. 날이 가물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먹을 게 없으니 시냇가에 숨기고 거기서 강물을 먹게 하다가 까마귀를 시켜서 음식을 공수해줍니다. 가을 추수를 하고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아니라 남은 자들, 나그네와 들짐승을 위해 남겨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작은 것으로 연명하게 하셨습니다. 8절부터 보면 사르밧 과부 집에서 얹혀서 삽니다. 과부 집에 가서 기름 한 병 남고 밀가루 조금 남은 그 집에 빌붙어 연명을 하고, 그러다가 엘리야가 부름 받았을 때는 무너진 재단을 수축하는 하찮은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무릎 꿇었을 때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중간에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인으로 인해 공황장애가 일어나듯이 큰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물 한 병과 떡 하나를 가지고 엘리야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실망하고 낙심에 빠져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엘리야가 마지막 죽었을 때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을 타고 산채로 데려가십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뒤에 이 땅에 남는 엘리야의 유산이라고는 겉옷하나가 달랑 남았습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것은 헌옷가지하나뿐입니다. 겨자씨운동, 큰 숲 운동이라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게 겨자씨인데 설탕알갱이 정도로 작고, 우리나라에는 담배씨앗이 있습니다. 담배씨앗이 겨자씨하고 비슷합니다. 눈에 보일락 말락 아주미세한 씨앗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묘목을 거쳐서 그게 큰 나무가 되고 많이 자라면 3.8㎜까지 자랍니다. 그게 모여졌을 때 숲이 되고 이게 모여 큰 숲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달란트비유의 핵심은 작은 일에 어떻게 대하느냐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일을 맡기시는 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대박을, 큰 것을, 센 것을 원하고 오늘날 성도들이 헛된 욕심이 많아서, 한판뒤집기를 노려 생활은 대충하고 축복은 크게 받기를 원하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수퍼맨 같은 위대한 종을 만드시는 게 아니고 생활현장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승리하는 일상의 영웅을 주문하신다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때그때 아침마다 새 힘을 주시고 하루하루 승리하게 하시는 일상의 리더, 일상의 인도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설은 끝나고 기본으로,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자’ 우리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 계시지를 않습니다. 다시 힘든 세상으로 어려운 일터로 내려가셨듯이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사랑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 생활의 달인이 되어야합니다. 일상에 승리하기 위해서 오늘도 은혜 받고,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힘을 얻어 하루를 감당하고, 하루가 모여 세월이 되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일상의 승리자, 생활현장에서 승리하는 사소한 것에서 진검 승부가 나타나는 생활의 달인, 일상의 삶 속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고, 작은 것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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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교회회계]복식부기 시스템 도입을 통한 교회회계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할까?
    섬기는 교회에서 5년째 회계업무를 맡고 있다. 또 대학에서 10년이 훨씬 넘게 학생들에게 회계학을 가르치고 있다. 회계(會計,accounting)란 무엇일까? 또 이 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한 회계의 역할은 무엇일까? 돈의 흐름을 파악, 결산?보고를 한다는 점에서는 교회회계든 기업회계든 큰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업에서 사용하는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교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3년 11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즉 199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회계기준’이 단식?복식부기 구분 없이, 수입?지출의 발생이 차년도에 영향을 미치면 경상수지, 그렇지 않으면 자본수지로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개정안은 예결산총액이 10억원 이상인 교회를 대상으로 복식부기를 도입,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권면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본 칼럼은 총12회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단식부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교회회계를 복식부기 시스템으로 전환할 경우, 필요한 여러 문제와 해결방법들을 실무적 관점에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단식부기는 현금주의 개념에 따라 수입?지출을 자금수지계산서에 기록하고, 편성된 예산이 잘 집행되어졌는가를 주로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입?지출의 발생 원인은 물론, 미래 교회 자산?부채 관리에 미치는 내용을 표시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복식부기는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음이 기업회계를 통해 이미 검증되었다. 첫째, 수입?지출 중 차기이후에 미치는 영향이 자산ㆍ부채로 집계되어 교회의 재무상태를 명확히 함은 물론, 연도별 비교를 통해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재산관리와 예산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선교, 건축, 장학, 퇴직금 등 특수목적의 기금을 재무상태표에 표시하여 회계 투명성을 높이고, 내부통제제도 효과를 증가시킨다. 셋째, 발생주의 원리에 따른 신용거래, 손상차손, 감가상각, 공정가치 평가 등의 회계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넷째, 자금수지계산서 잔액과 재무상태표 차기이월의 일치를 확인, 회계처리 검증가능성을 높이고 재무제표간의 관련성을 높일 수 있다. 교회회계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church)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달리 이윤동기도 없고, 개인에 의한 소유나 지분청구권도 없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그에 사용되는 재산이나 헌금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정의한다면,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는 이를 맡은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해 효율적으로 재산관리가 이루어지고 또 보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교회마다 필요한 내부통제제도를 확립하고,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가 이루어지도록 협조되어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2013년에 만든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을 기초로 복식부기 시스템을 설명해 갈 것이다. 또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Microsoft사의 Excel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할 수 있는 매뉴얼을 제시할 수 있도록 검토해 갈 예정이다. 위 회계기준은 우리나라 회계 제정기관인 한국회계기준원이 발표한 ‘비영리조직 회계기준’을 수정하여 만든 것으로, 교단을 넘어 앞으로 교회회계의 방향을 제시해 가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규모에 따른 비용부담도 크게 관계가 없으므로 개척교회로 특별히 열악한 상황에 있지 않는 한, 많은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가 관심을 갖고 동참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음호는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의 구체적인 기본원리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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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시사칼럼] 지도자론 소고(小考)
    우루과이 남서부에 헤랄드 아코스타(Gerald Acosta) 씨는 정초부터 운이 나빴습니다. 5일 아침에 출근했다가 신분증 기간 만료로 작업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게다가 날씨까지 왜 이렇게 찌는지, 할 수 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아무도 차를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낡은 관용차가 한 대 섰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비어 있는 뒷자석에 탄 아코스타 씨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조수석에 유명한 루시아 상원의원이, 그리고 운전석에는 그녀의 남편 호세 무히카(Jose Mujica) 씨가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루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올 해 2월 말로 임기를 마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독재에 저항하다 14년을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던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 관저(官邸)를 노숙인 쉼터로 내놓고 해안에 있는 대통령 별장도 팔아버렸습니다. 그 날 아코스타 씨를 태워주었던 관용차 역시 20년 째 몰고 있는 자기소유 차량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거주하던 수도 외곽 낡은 주택에서 손수 운전하며 출퇴근했던 이 소박한 대통령은 월급의 2/3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서, 재임 기간 동안 연평균 성장률 5%, 국민소득 16,000 달러에 국가 부패지수 21위 등 모두 남미 최고를 기록하며 취임 시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과 국민들의 존경 속에서 퇴임했습니다. 같은 달 중순, 미국의 민간 우주항공업체 스페이스X와 해양대기국(NOAA)은 디스커버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여타 위성과 달리 지구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인 160만 km 지점에서 ‘블루 마블(Blue Marble)’이라 불리는 지구 전체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성에는 ‘고어의 위성(Gore Sat)’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1998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Al Gore)가 재임 당시 “아름다운 지구 전체의 모습을 담아 24시간 내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시작했던 프로젝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시에도 수익성 문제로 인기가 없었고, 이후 부시(G. W. Busch) 정부에서는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아예 백지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7년 만에 쏘아 올린 이 위성은 인기나 당리당략을 초월한 한 정치인의 혜안(慧眼)이 결국 옳았음을 증거합니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은 총리후보자 검증 문제로 온 사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 어언 15년째, 그러나 공직후보자들의 수준은 발전은커녕 퇴보한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울 정도입니다. 도입 초기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던 ‘위장전입’은 정치적 면죄부를 받은 지 오래입니다. 부동산투기나 병역기피는 진부적인 정치적 상투어 정도로 희석되었습니다. 대의(代議)의 주체인 국민들의 의사보다 당론(黨論)이 우선하는 현상도 한결같습니다. 아, 우리는 언제쯤 “삶에는 가격이 없다”며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쯤이면 개인적인 영욕(榮辱)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아니라 국가의 대계(大計)와 민족의 미래(未來)와 자유와 정의와 환경과 같은 지순(至純)한 가치들을 위해 매진하는 지도자를 목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동전 한 닢도(마 17:27) 옷 한 벌도(요 19:23) 소유하지 않은 담백함과, 하나님 나라의 큰 뜻을 위해 희생하는 참지도자의 전형(典型)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사모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회의 지도자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산다면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까닭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지만(행 20:34; 고전 9:12; 살후 3:8), 결국 소박하면서 대의를 위해 사는 그 모습이 아시아와 유럽을 바꾸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그런 지도자 하나쯤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입니까 아니면 소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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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소강석 칼럼] 연해주를 울린 아리아
    최근에 연해주를 방문하였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가 아니던가.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발원지요 최초로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다.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여 맨 먼저 최재형 선생이 처형당한 곳을 찾았다. 최재형, 그는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배고픈 환경을 극복하고 연해주의 드림을 꿈꾸며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배고프고 허기져서 항구에서 쓰러졌다. 바로 그 쓰러진 꼬마를 러시아의 한 선장 부부가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는다. 그런데 최재형은 천재였다. 러시아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잘하는지 자라서 러시아 군의 통역관이 된다. 그는 천재일 뿐만 아니라 민족애와 조국애가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그래서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면 자기가 러시아 군에 팔아주겠다고 고무시켰으며 약속대로 군납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이익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모든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고 무기를 사서 독립군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을 결집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본이 독립군들이 어떻게 넉넉하게 활동을 하는가, 의아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뒤에 최재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가 최재형을 새벽에 잡아다가 우수리스크에 있는 소베스가야 언덕으로 끌고 가서 처참하게 처형을 하였다. 나는 먼저 최재형이 처형당한 언덕을 찾아갔다. 바로 그 옆에는 우수리스키 감옥이 있었다. 그 감옥에는 한 독립군이 잡혀서 갇혔다고 한다. 그 언덕은 건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념비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흰 눈이 쌓인 언덕이었다. 기억을 하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만 알고 있지 아무런 글자 하나 새겨지지 않았다. 나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기념비를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언덕에 서서 생각해 봤다. “과연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누가 얼마나 최재형선생을 알고 있는가. 더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최재형선생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얼룩진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고난과 수치의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만이 강하고 미래가 보장되는데 과연 우리는 지난 날 민족의 수치와 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박물관 동판에는“망각은 포로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는가. 안내를 하는 선교사에게 그가 처형당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날 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상상해 보았다. 일본 헌병이 최재형 선생을 얼마나 짐승처럼 두들겨패고 어쩌면 개머리판으로 온 몸과 머리까지 내리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총살을 시켰을 것이다. 그때 최재형선생의 생각과 내뱉었던 말을 상상해 보았다. 특별히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니 나는 목사로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하나님, 노비로 태어났던 몸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마흔까지 일하다가 이렇게 죽게 된 것도 영광일 뿐입니다. 그리고 조선인이여, 광복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수치와 비극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야 광복의 영광을 길이길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 때 마치 최재형 선생의 음성이 광복의 아리아처럼 소베스가야 언덕을 메아리치는 듯 했다. 연해주를 메아리친 아리아가 한반도를 울리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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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성서연구] 뜰 안과 뜰 밖(요 18:15-2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논할 때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 로마 총독인 빌라도, 백성의 장로들과 기타 지도급 인사들은 가장 책임이 많아 보입니다. 가룟 유다도 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죄가 무겁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중에서도 빌라도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했노라고 발뺌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별 생각 없이 소리 질렀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에는 십자가 사건에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소리를 지른 일도 없고 단지 구경만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어떨까요? 아홉 명의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도망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명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두 명중 한 명은 베드로요, 다른 한 명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익명의 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잠시 후 베드로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그 둘은 일찍 도망한 아홉 명에 비하면 훌륭한 제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평소에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결심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뜰 안에까지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청문회라도 열린다면 베드로는 그래도 제일 나아 보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 안에까지 갔으니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들 보다는 낫지....>라고 자부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런 상대적 만족감에 도취되어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맛에 삽니다.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습니다만, 다른 복음서는 이 장면을 다루면서 마지막에 닭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베드로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람의 통곡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감만큼이나 큰 자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즐기던 상대적 우수성이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뜰 밖의 아홉 제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아홉 제자보다 더 간사하고 악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뜰 안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뜰 안과 뜰 밖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뜰 안에 있었다고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정인들을 거명하기도 하고, 특정 교회를 들먹거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자신은 무죄임을 은근히 주장하는 것 같아 보기 민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본문의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이라고 추측을 해 보지만, 그런 추측은 무익합니다. 차라리 익명의 그 한 제자가 우리 자신이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자신도 상대적 만족감에 심취해 왔으며, 교만했으며, 실제로는 조금도 나을 게 없었음을 자인합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다른 이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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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이라니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은 말도 안돼 지금이라도 고쳐 ‘코엑스역’이라고 해야 오는 3월 28일 개통되는 서울지하철 9호선 2단계 구간 929정거장 명칭이 ‘봉은사역’으로 확정되어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이유는 서울시가 929정거장에서 매우 가깝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코엑스 대신 더 먼 곳에 있는 특정 종교시설 이름으로 역명을 정했기 때문이다. 봉은사역이 들어서는 곳은 왕복 12차로 도로가 나 있는 코엑스 사거리다. 코엑스 사거리는 코엑스와 바로 연결되어 있고 봉은사는 120미터 떨어져 있다. 서울시의 역명제정기준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고 해당 지역과 관련성이 뚜렷하고 지역 실정에 부합하는 명칭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른다고 하면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당연히 ‘코엑스역’이라고 칭해야 한다. 코엑스는 연 평균 5천만 명이 드나들고 국제적 회의와 박람회 등이 연간 3천건 넘게 열리는 주요 시설이 아닌가. 그런데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을 ‘코엑스역’이라고 하지 않고 일개 절간 이름으로 ‘봉은사역’이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어쩌면 불교신도 중에서도 어떤 이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서울시의 처사이다. 서울시는 봉은사가 강남을 대표하는 전통사찰이고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역명을 ‘봉은사’라고 정했다고 한다. 강남구청은 두차례 설문조사 후 서울시에 ‘봉은사역(코엑스)’, ‘코엑스역(봉은사)’을 추천했지만 서울시는 ‘코엑스’를 괄호안에 넣는 것도 거부하고 ‘봉은사역’이라는 단독명칭으로 확정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이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봉은사 역명을 바꾸지 않으면 범기독교적으로 행정불복종운동을 펼치겠다고 천명했지만 반응이 있겠는가. 지난해 12월 강남구청이 주민센터를 통해 수렴한 주민들의 역명칭 선호도 조사 결과는 ‘코엑스역’이 1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여론도 묵살하고 ‘봉은사역’이라고 확정한 서울시가 기독교가 반대한다고 ‘봉은사역’을 ‘코엑스역’이라고 개정하겠는가. 박원순 서울시장은 알려진대로 불교학생회 출신이고 여러 불교단체의 자문위원이었고 뿐만아니라 여러 모임에서 발전방안을 제시하였고, 여러 불교상을 받았으며 한국 불교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14인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고 봉은사 미래위원장을 맡아 4년간 역임했다. 그러니 어찌 ‘코엑스역’으로 되겠는가. 그러나 단호히 말하거니와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마땅히 ‘코엑스역’으로 개정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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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사설]간통죄 위헌, 오해하지말자
    지난 2월 26일, 우리나라에서 62년간 지속되어 온 법 하나가 폐지되었다. 간통죄이다. 헌법재판소가 간통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거웠다. 이 법에 대한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간통죄를 위헌이라 결정하고 폐지했으나, 법적 혼인관계 내에서 간통은 여전히 불법이다. 형사처벌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손해배상 형태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간통죄 폐지’라는 말에서 시작되는 오해이다.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위헌 결정 이후, 온라인 기사에 여러 댓글이 달렸는데 간통이 허용된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돈만 있으면 바람을 펴도 된다, 또 합법적인 바람이 가능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간통죄 폐지를 두고 가장 우려하던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결정한 이유는 간통예방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 성적 자기 결정권 침해, 세계적 추세라는 것이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이번 결정에 대한 논평을 게재하며, 우려를 표했다. 한국교회언론회는 “소위 ‘간통죄’가 폐지되므로 우리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가 무너져 무분별한 성적 행위에 대한 무책임과 방종이 확산될 것으로 우려한다. 헌재 결정의 문제점은, 사생활 비밀 보호와 성적 자기 결정권 존중은 어디까지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도덕과 윤리의 테두리 안에서와 사회구성원들의 동의 가운데 되어져야 하며, 또한 성적 자기 결정권만 존중될 것이 아니라, 책임도 뒤따라야 하는데, 이를 도외시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간통죄’ 존속은 가정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 법적 책임과 안정 장치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번 결정으로 남편과 아내의 상호 존중과 의무가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하여, 가정파탄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다”고 말했다. 오해하지말자. 지금도 법적으로 간통은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세상 법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십계명 가운데 제7계명이 간음하지 말라이다. 세상이 더 악해져서 간통이 허락된다 하더라도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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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사설]영남신학대학교 분규사태를 주시한다
    60년의 역사를 지닌 영남신학대학교는 통합교단의 신학교로, 일찍이 故 이상근 증경총회장을 비롯한 박위근 목사, 지용수 목사, 손달익 목사 등 역대 총회장을 다수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다. 통합 교단 지도자들을 다수 양성한 학교다. 3년 전 C교수 재임용 건에서 분규의 불씨가 지펴져 출발 되었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역대총장(이종성, 김소영, 진희성, 전용근)이 14인 서명교수들의 집단이기주의로, 이들의 철옹성을 깨지 못하고 거의 식물 총장의 대학으로 머물고 말았던 배후에는 서명파 교수들의 파워에 선동된 학생들의 힘의 행사로 이사회를 압박해 온 것이다. 사실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 대부분이 그렇게 하듯이 실질적인 주인이 제 기능을 소홀히 하는 틈새를 이용하여 교수들이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이사회는 제 기능을 하려하자 저항하는 분규로 이어져 온 것이 오늘의 영남신대의 현실이다. 총회 신학 교육부에서 조사 및 화해조정과 경북노회 화해조정 등 다각도로 수습을 위해 사건을 종결하려는 움직임은 환영하고 하루빨리 수습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지만 총회나 노회는 수습대안은 될 수 있을지언정 법적 이사회가 모든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헛수고로 남는다. 차제에 서명파 교수들이 이사회 앞에 진정 어린 사과를 하고 모든 고소고발을 취하하면 이사회는 선처하는 선에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쪽으로 사건을 매듭지어 나갈 것이 수습을 밟는 단계적 순서이다. 이사장은 이사들의 결의에 따라 가는 형태이지 이사장이 주도한다는 오해는 없길 바란다. 총장을 감금하고 교수 학생들이 학내 분위기를 데모분규로 몰고 가는 이상 학교는 계속 소용돌이로 학교 이미지만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학생들이 줄어든 상황에서 어찌 이렇게 혼란스러운 학교에 입학을 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신학대학교는 본질로 돌아가 서로 화합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용서와 화합으로 하나되어 뭉친다면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남에 두 개(부산장신대, 영신대)의 총회 신학대학이 향후 하나로 합칠 가능성이 농후한 마당에 학교의 정체성을 잘 유지하면서 학교를 회복하길 바란다. 그런 뜻에서 영신대의 마무리가 어떻게 종결되는지 기대하며 주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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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시내산]은혜를 모르면
    전해져 내려오는 전래동화에 은혜를 갚은 까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산길을 가던 선비는 커다란 구렁이가 까치새끼들을 잡아먹으려는 것을 목격하고 구렁이를 화살로 쏘아 죽였다. 그날 날이 어두지자 깊은 산속에서 선비는 길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한 오두막집을 발견해 들어 가보니 아리따운 젊은 규수가 살고 있었다. 선비가 하룻밤 묵을 것을 간청하니 쾌히 승낙했다. 잠을 자던 선비는 온몸이 조여 오는 압박감에 눈을 떠보니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자 구렁이는 낮에 죽은 구렁이의 아내로 절대로 살려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죽기를 각오하는 순간 구렁이가 날이 새기 전 산 아래 아무도 살지 않는 절의 종이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말했다. 선비는 체념하고 눈을 감았을 때 기적같이 땡땡땡 하고 종이 세 번 울렸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선비가 절간 종탑에 가보니 그 종탑아래 까치 한 마리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그마한 까치의 머리로 쇳덩이 종을 들이받아 종을 세 번 울리고는 그만 죽은 것이었다. 그제야 그 까치가 낮에 자기가 살려준 새끼까치들의 어미이며, 은혜를 갚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종을 울려 자신을 살린 것임을 깨닫고 이 어미까치를 양지바른 언덕아래 묻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자주 들으며 자랐다.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깊은 겨울밤 자식들의 해진 양말을 꿰매시는 어머니 팔 밑에 누워 재미있게 들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마치시며 “사람이 살면서 은혜를 모르고 살면 짐승만도 못한 거다. 이 동화속의 까치만도 못한 거야. 너도 이다음에 너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있다면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 베푼 사람에게 빚진 것으로 알고 그 은혜를 꼭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거친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도움을 주신 분들이 나에게 베푼 도움을 다시 받고자 베푼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그저 죄스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 요즘 가슴 깊이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는 한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참 사춘기를 지나 인생의 삶에 대하여 고민하던 때. 배고픔과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갈등하며 어떻게 하면 가난과 싸우며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방황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고향 교회의 담임이셨던 이장섭 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요즘 장 선생의 얼굴을 보니 예전 같지 않아요. 무슨 고민이 있는 거 같아요. 몸이 많이 허약해 진 것 같고 교인들도 걱정하는데 무슨 사정이 있습니까? 나한테 말해 보세요.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라면 해결 해 줄 테니 어서 말해 보세요”.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사정을 털어 놓았고, 이야기를 다 들은 목사님께서 “아 그랬군요. 그 문제라면 내가 장로님들과 의논하여 해결 해 보겠습니다”라고 하셨다. 며칠이 지나 다시 불러 목사님을 찾아가니 장로님들이 교회소속 논농사 일년 수확물중 십일조를 빼고서 몽땅 나에게 주신다는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은 사실에 깜짝 놀랐지만 사실이었다. 어려웠던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를 잘 넘겼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다.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거야 까치만도 못한 거야 하시던 어머니 말씀 귀가에 울려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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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정병갑 교수] 교회 안에 갑질은 없는가?
    지난 해 말, 국내 언론을 뜨겁게 달군 땅콩회항 사건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승무원의 땅콩 서비스를 문제 삼아 승무원에게 폭언, 폭행은 물론 출입문을 닫고 이륙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비행기를 램프로 되돌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으며 당사자는 구속되었고 징역 1년이 선고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땅콩회항 사건의 시작은 가진 자의 갑질이었지만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보면 갑질 이상의 무서운 행위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를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며 진실을 은폐하려 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관에서의 조사 과정에도 압력을 행사하여 국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더구나 유치장 면회실을 독점하여 다른 재소자들이 면회도 못하게 하였으며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갑중의 갑, 슈퍼 갑의 행동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오죽하면 판결을 내린 판사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일” “인간을 노예로 여기지 않았더라 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했을까?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기본적인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 부사장의 경우는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듯이 보인다. 아마도 감옥 안에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교회 안에는 땅콩회항 사건 같은 갑질이 없을까? 기독교TV 회장인 모 장로는 횡령죄로 두 번이나 실형을 선고 받고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갑이고,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전 해군 참모총장 역시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갑질 장로이며, 수년간 제자들을 갑의 위치에서 성추행한 서울대 모 교수 역시 교회 장로이다.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온 자매를 현장에서 성추행 하였을 뿐 아니라 여자 성도들을 수 년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성추행한 목사에게 퇴직금 등으로 13억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당회는 슈퍼 갑이었다. 목회자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힘 있는 장로, 수년 간 설교 표절로 문제가 되자 결국 물러나면서 교회에 2억원의 퇴직금을 요구한 목사, 박사학위 논문이 표절로 결론이 나자 자숙하는 의미에서 6개월간 반성의 기회를 가진 후에 슬그머니 복귀한 어느 대형교회 목사, 1년에 수천만원 어치 옷을 사는 목사! 이들은 갑 중의 갑, 슈퍼갑이 틀림없다. 목사, 장로 등 교회 지도자들의 부부동반 공식 해외 연수(?)에서 포도주, 쓸개 탄 소주, 생선회와 함께 소주를 마셨는데도 교인들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기는 커녕 노회에서 사과 한번으로 덮어버린 지도자들의 행동 역시 교인들을 무시한 갑질이다. 이러한 갑의 눈에 을이 보이겠는가? 좋은 집에 대형 세단을 타고 두둑한 사례비에 등 따시고 배부른 갑, 뇌물과 횡령으로 부유하게 살고 있는 갑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세운 것이지 군림하라고 세운 것이 아니다. 교인들을 섬기고 스스로 낮아져야하며 교회내의 작은 잘못에도 “내 잘못입니다!”를 선언하고 재를 무릅쓰고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사람이 교회지도자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일어나며 이러한 문제는 모두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적권위가 사라진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대하는 행동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미꾸라지 한 두 마리가 방죽 물을 흐린다. 사람들은 흐린 방죽물만 보고 방죽 전체가 탁하다고 평가하며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7~80%는 방죽물을 흐릴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 성도라고 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인 시골교회에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밥그릇을 나르고 봉고차를 운전하는 지도자가 갑질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낮아져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낮은 자세로 헌신하며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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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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