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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겨루어 이긴 자 (창세기 32:24~28)
    저는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얄미운 사람이 야곱인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야곱과 제가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잔꾀를 부리고, 남을 속이고, 자기가 고백한 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태생적인 한계가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하는 말씀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인생외톨이로 평생 고독한 싸움을 싸웠던 사람이 야곱이었고, 기질 상으로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망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늘 외롭고, 목이마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야곱이라고 봅니다. 저는 야곱의 기질 중에 가장 독특한 것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님하고 다투고, 태어날 때부터 형님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오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질수 없는 씨름을 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샅바를 잡고 놓지 않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이유가, 오늘 내 삶의 스타일을 보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약하다는 겁니다. 맷집이 없고 끈기가 없고 전투력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울고,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도무지 내공이 없습니다. 사탄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온갖 간교와, 속임수와, 사탕발림으로 덤비는데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무장해제 되어있습니다. 샅바도 잡기 전에 기권하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좋다 나쁘다 하기 전에 갖고 있는 강점이 지기 싫어하는 욕심입니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 있는데 그것을 야곱이 가지고 있고 지기 싫어하는 이것이라고 봅니다. 이걸 갈증과 긍정과 열정이라고 봅니다. 갈증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목마름에 본능적으로 찾아다닙니다. 오늘 성도들이 살아갈 때에 야곱이 가지고 있는 기질,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 기질 이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져주시는 하나님께서 30절에『그러므로 야곱이 그곳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난 뒤에 독대, 직고, 대면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봄눈 녹듯이 녹습니다. 만사가 해결이 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고『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32:31) 해가 돋았다는 사실, 드디어 불안에 쫓기면서 속고 속이는 삶을 살았던 야곱의 인생에 서광이 비춰지고 이제는 인생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흑암의 권세, 어둠은 사라지고 햇살이 떠오를 때 야곱이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데 그의 몸은 절었지만 그의 인생은 방황 없이 똑바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꺾어진 경험, 영적인 씨름을 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맷집이 나오고 내공이 형성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긴 자에게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십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살리고 윈윈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긴 자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셔서 세마포 흰옷을 입히시고 세마포 흰옷 입은 자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장이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기둥같이 쓰임 받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환란은 벗어나고, 사망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새벽 비를 주시고,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하십니다. 할렐루야!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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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성경인물탐구] 애굽의 총리가 요셉(5)
    요셉은 술 관원장의 추천으로 바로 앞에 나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풍년 뒤에 따라올 흉년을 대비함으로써 기근으로부터 애굽과 주변 나라 백성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으므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바로가 하수가에 섰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살진 일곱 소를 먹었습니다. 바로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켰습니다. 바로는 그 꿈의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뭔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꿈의 해석자를 찾고 있을 때 술 맡은 관원 장은 2년 전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 석방과 복직을 예언했던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요셉에 대해 고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 불려 나갔고 바로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해석은 칠 년 동안 큰 풍년이 든 후에 이어서 칠년 동안 큰 흉년이 들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앞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세워 풍년이 들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흉년으로 인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해몽을 들은 바로 왕은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하면서 애굽의 모든 백성을 치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꿈의 해석을 알게 하셨음을 고백하며 요셉을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바로는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가 타는 버금 수레에 태우고 모든 백성으로 절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하던 요셉이 애굽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아비 집에 거할 때에 꿈을 통해 요셉을 높이실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이 오랜 세월을 거쳐 요셉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억울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요셉의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결국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고난의 시간을 통하여 요셉의 인격과 신앙을 연단시키시고 때가 이르자 요셉을 높이 드셔서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은 애굽 백성과 함께 주변 여러 나라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요셉은 복의 근원으로서 주변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나누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의인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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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가정칼럼] 집 문 앞에 있어야 할 쓰레기 통
    퇴계 이황은 부부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부부간에 도리를 지키는 것은 힘들지만 이것이 가정 행복의 근본이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황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음은 물론 학문으로도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평소 이황의 인품을 믿었던 스승이 자신의 딸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딸은 어릴 때 사화를 겪은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이황은 스승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어린아이처럼 철없는 아내의 행동을 감싸 주며 평생 남편의 도리를 다하며 살았다. 평소 부부가 서로 이해하며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황은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제자에게 편지를 써 주며 말했다. “편지를 여기서도 말고 집에 들어가서도 말고, 집에 도착하면 사립문 앞에서 읽게.” 제자는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승의 명이라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스승의 말대로 집 사립문 앞에 도착해서 스승이 써 준 편지를 뜯었다. 그 내용은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립문은 가정과 세상의 경계 지점이네. 가정은 세상의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네. 집 밖에서 있었던 울분과 괴로움은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 앞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가야 하네. 이것이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이네. ……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네.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또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이이므로 늘 손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예를 다하게. 그럼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평생 이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네.” 한 순간의 분노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세계최고의 여자골퍼 캐리 웹이 자신의 어이없는 플레이에 화가 난 나머지 골프채로 모래를 내리쳤다가 2벌 타를 먹고 우승을 놓친 일이 있었다. 결국 1타차로 준우승, 우승 상금까지 놓치고 말았다. 그 흥분의 대가는 무려 5천4백만 원이나 되었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마음을 다스리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 가정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순식간에 가족들을 전염시켜 고통스럽게 만들고야 만다. 집에 들어서기 전에 그 쓰레기통에 사회에서의 절망, 한숨, 욕망을 모두 뱉어 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갈 때 가정은 행복해 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하러 가기 위한 준비는 철저히 하는데 가정의 행복이 시작되는 퇴근 시간을 준비하는 데는 무신경하다. 가족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절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가족에게 불행 바이러스 대신 행복 바이러스를 심으려면 퇴근하여 대문을 열기 전 속세의 모든 걱정과 분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밝고 환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 보면 어떨까?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분이 있었다. 영업부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세일즈맨으로 입사해서 사장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성공의 비밀은 가정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를 하던 전형적인 남편이었지만 어느 순간 가정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고, 그래야 일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한 가지를 지켰는데,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집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어떻습니까?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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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시사칼럼]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다
    어느덧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래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최윤식 박사가 신간을 냈습니다. 2년 전 발표했던 첫 번째 책에 이어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2』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에서 최 박사는 향후 10년이 한국교회의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와 증거를 수반한 실증적 논리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더 무섭습니다. 구체적이면서도 무섭다고 말하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에 근거합니다. “2013년 기준으로 은행들이 교회에 대출 해 준 금액은 총 4조 5천억 원에 달한다. 매년 한국교회가 부담해야 할 이자는 2,250~5,000억 원, 매달 드려지는 헌금 중 187~416억 원이 이자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규모의 이자를 꼬박꼬박 내려면 매주 1,000~2,000원 씩 주일 헌금을 드리는 500~800만 명의 교인들이 필요하다. 원금을 갚으려면 매주 지금보다 2~3배 더 헌금해야 한다. 이는 현 목회자와 장로들이 은퇴한 후에도 교인들은 교회에 남아 20~30년을 계속 헌금해서 갚아야 하는 수치다.” 그에 따르면 2005년 기준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이단을 포함해 870만 명 정도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상적인 헌금과 재정 운영상으로는 이자만 겨우 낼 수 있을 뿐이며, 은행에서 빌린 원금은 거의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입니다. 후발 베이비 붐 세대의 전격적인 은퇴가 시작되는 2028년부터는 상황이 더 악화될 전망입니다. 재정능력이 현격히 줄어드는 이들을 대신해서 밑으로부터 후세대가 치고 올라와야 하는데, 청소년부와 청년부가 위축이 아니라 소멸되기 일보 직전인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몽상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10여 년 후 한국교회가 빈번하게 맞닥뜨리게 될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파산(破産, bankruptcy)’입니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로 따졌을 때 예상되는 이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 박사는 최근 CTS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마지막 골든타임은 앞으로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이며, 앞으로의 2~3년이 미래 방향을 바꾸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시행해야 할 단기적 응급 처방과, 장기적으로 붙들고 가야할 성경적 근본 해법을 모두 알고 성경의 요셉처럼 지혜롭게 적용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한국교회가 미래세대를 살리기 위해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주일학교 교사요 미래세대 사역자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주일학교와 미래학을 섭렵한 그가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내놓는 이 대안은 거의 유일무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교회를 떠나는 청년세대들의 발걸음부터 붙잡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들이야말로 10여 년 뒤의 은퇴자들을 대신해서 교회의 중추를 감당할 잠재적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속도나 숫자가 아니라, 기성세대들이 도무지 그 사태의 본질과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청년들이 교회를 향해 냉담을 넘어서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으며,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청년들을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란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 해법을 가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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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서임중 칼럼]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어렸을 때 둘째 형과 함께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모래밭에 앉아서 집을 짓고 즐기던 생각이 난다. 형은 형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모래집을 지어 가다가 형이 실수하여 내가 잘 지어 놓은 집을 발로 뭉개버렸고 나는 앙앙거리면서 울었었다. 미안해하는 형이 “내가 다시 지어줄게.”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 보지만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나에게 형이 화가 나서 외친 말이 있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 형은 울고 있는 나를 그냥 두고 형이 지은 모래집을 발로 휘휘 뭉개 버리고 먼저 일어서 가 버렸다. 뒤따라가면서 “형아! 내가 잘못했어.”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내 머리를 툭 치면서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씩 웃어 주던 형의 얼굴과 그때 하신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대로 자기 인생의 집을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며 만들어 가던 집이 부서질 때를 경험한다. 이때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연예인 자살사건을 보면서 자괴감에 마음이 닫히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 이후 장례식 장면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 영정 앞에 ‘성도’, ‘집사’ 아무개라는 위패를 볼 수 있다. 자살은 죄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결코 자살로 마감될 수 없다. 소위 죽을 각오로 살려고 마음먹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는 이치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헛된 신앙의 옷을 입고 살았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모리스 프랭크(Morris Frank)는 미국 권투계 유망주였다. 그런 그가 시합에서 눈을 심하게 다쳐서 실명(失明)하게 되었다. 의사 두 명이 모두 그에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했다. 프랭크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랭크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후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맹인들을 위하여 “the seeing eye” (보는 눈)이란 별명을 가진 안내견(案內犬)을 훈련시켜 맹인들의 길잡이 친구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프랭크는 눈을 잃었지만 거기서 자기의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눈을 열어 보다 나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창출한 것이었다.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옛 히브리 격언이 있다. 흙이 부서져서 곡식을 낸다. 곡식이 부서져 빵이 된다. 빵이 부서져 우리 몸의 에너지가 된다. 포도가 부서지고 장미 꽃잎이 부서져서 극상 포도주와 샤넬넘버 5 같은 최고의 향수도 만들어진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려면 충분히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은 날마다 부서지는 생활을 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모진 말을 들으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슬픈 현장의 중앙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살과 뼈를 부서뜨리면서 날마다 부서지는 날들을 사시면서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 주님의 부요함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해방되었고(고후8:9), 주님의 육체가 부서지면서 많은 병든 자들이 건강함을 입었고(벧전2:24), 그의 축복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해방되었고(갈3:13), 그의 생명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막10:45, 갈2:20) 이와 같은 진리를 알게 된 바울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만들어 낸 결과가 모든 이들의 평화와 축복이었다. 부활이 무엇인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무엇인가? 절망에서 희망이다. 부활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부서질 때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부서지면 또 다른 좋은 것을 지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어야 한다. 새로 짓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내 편견과 아집, 교만이 부서지고 모두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연주될 때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이기주의가 부서지고 이타주의가 꽃피워지는 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은퇴 후 요즈음의 나의 삶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하나, 둘씩 부서지고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부서진다고 끝이 아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어김없이 맞게 되는 2015년의 부활절에 어릴 때 형의 말이 새삼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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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성서연구] 안식 후 첫 날(마태복음 28장 1-10절)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엔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고, 나중에는 오백 여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은 이 부활 사건 위에 기초하여 선포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 후 첫날 이루어진 것일까요? 여기엔 귀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말씀된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을 중지하고 쉬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안식 후 첫 날 전해진 것은 그 전 날의 안식이 거짓 안식임을 밝히고,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안식일라 여기던 그 날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우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빌라도 총독 등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었기에, 그저 모든 유대인들이 쉬기 때문에 총독도 업무를 쉬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날 내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도 이 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날 내내 십자가 처형 사건이 몰고 올 후폭풍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고, 또 예수님께서 평소에 예고하신 대로 부활하실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군인들을 무덤에 보내 지키게 했고, 하루 종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참된 안식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에게도 참된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제자들은 사랑하던 선생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메시아로 고백하고 믿었던 분을 배신한 죄책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에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아닌 일반 주민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모두도 안식일이 되었을 때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참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의 집에서는 아이가 아파 고통 받았을 것이고, 어떤 집에서는 가족이 죽었을 것이며, 어떤 집에서는 분노로 가족 간에 갈등을 빚었을 것입니다. 그 날은 이름은 안식일이어서 모든 일을 그치고 쉬고 있었지만, 참된 안식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 안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 온 세상에 진정한 안식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은 사람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거짓된 안식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진정한 안식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안식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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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기에 그는 부활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 - 우리는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할 때에 세가지 면에서 생각한다. 첫째는 불연성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리가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연성이다. 그런 것 같기는 하나 확실하진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필연성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그는 부활하실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첫째 이유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 하셔야 했다. 그는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몇번이고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놓고서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사기한이 되고 말지 않는가. 그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두번째 이유는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그가 사역하실 때에 가장 심각한 논쟁의 초점은 그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던 점이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롬 1:3) 세번째 이유는 그에게 속한 성도의 부활을 성립시키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고전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셨고 그에게 속한 성도들도 따라서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전 15:22~23) 네번째 이유는 진리는 결국에 가서 이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만의 하나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진리가 비진리에게 패한 것이 되고 빛이 어두움에 삼킨 것이 되고 생명이 사망에게 정복당한 것이 되고 말지 않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마침내 이기고 만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다섯번째 이유는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으므로 당연히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했다. (눅 24:25~26)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다. (빌 2:6~10) 그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당연히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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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04-02
  • [사설] 간통죄 폐지에 모텔은 흥왕해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폐지 이후 교계에서는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다. 간통은 여전히 불법이요, 책임이 뒤따른다 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현실로 닥쳤다. 씨는 사업차 서울에서 건축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건축 디자인, 토목 등 관계자들은 지방에서 약 한달간 머물며 일을 해야 했다. A씨는 이들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과거처럼 인근 숙박시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달간 방을 대여해 준다는 곳이 없다. 간통죄 폐지 이후 모텔 등 각종 숙박시설이 그렇게 흥왕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 처럼 한달간 대여하지 않아도, 시간 단위의 손님들이 많기 때문에 숙박업체로서는 장기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폐지 결정 이전, 매매로 나왔던 모텔 건물들이 지금은 종적을 감췄다고 한다. 영업이 어려워 모텔을 처분하려 했으나 간통죄 폐지 이후 장기적인 수익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어깨가 무겁기만 하다. 갈수록 악해져 가는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지켜야 할 교회의 책임이 커, 목회자와 장로 등 지도자들의 어깨는 무거워 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 교회는 성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또 어떤 새로운 문화를 이끌어야 할 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다.
    • 오피니언
    • 사설
    2015-03-19
  • [사설] 고려학원 이사회를 흔들지 말라
    고신 고려학원 법인 이사회는 지난 3월 3일 충남 온양에서 제64-2회 제2차 이사회를 열고, 제64회 총회에서 선출하여 파송한 학교법인 이사회 최한주, 황만선, 옥재부 목사를 선별투표를 실시하여 통과시키고 다만 김형태 목사를 부결시켰다. 학교법인 정관 28조 2항에는 이사회의 이사는 이 정관에 특별한 규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사 정수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이사회의 전문성 재고라는 의지를 보여준 결과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이 결과가 마치 총회에 대한 항명으로 비춰 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명 이전에 근본적으로 이런 결과가 초례된 이유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총회 스스로가 총회규칙에 명시한 이사 전문성 규정을 무시했기 때문에 이 사태가 발생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또 병원장 선임도 이사회가 병원사정을 잘 알고 추천위원을 구성하여 총장의 제청으로 이사회가 결정할 사항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선임하는 것도 과거 관례에 시간이 오래 결려 두 달 이상이 소요되는 바람이 병원행정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어 이번 일도 일찍이 선임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임기가 남아있는 이사들이 병원 사정을 조금이라도 잘 알고 있는 이사들과 새 병원장을 선출하려는 의지를 무시해서도 안된다. 이사회가 고심하여 처리하려는 의지를 외부에서 만들어서는 안된다. 법인도 법인 고유의 정관과 규칙, 시행세칙에 의해 결정하는 문제를 마치 문제가 있는 양 사소한 시비를 걸면 교육부가 또 다시 과거 나쁜 이미지 재연 할 수가 있다. 과거를 교훈삼아야 한다. 그래서 갑(甲)은 을(乙)에게 갑질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총회와 학교법인의 상생은 먼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해하고 신뢰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사설
    2015-03-19
  • [시내산] 안개길
    입춘지나 조용히 핀 설중매기운으로 포근해진 2월 11일 짙은 안개로 인천공항으로 연결된 영종대교에 100여대의 자동차 추돌사고가 방송을 통하여 전하여졌다. 그 사고로 사망과 부상 등, 60여명의 인명피해와 서울로 나오는 도로가 장시간 차단되어 공항왕래에 많은 불편을 유발하였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안개는 하늘 땅 바다의 모든 교통수단에 무서운 적이다. 시력의 좋음과 나쁨에 상관없이 시야를 가려 그 속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소년시절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소먹이 갈 때면 춥기도 하고 무서웠다. 그래도 소목에 걸어놓은 워낭소리가 함께 하기에 강변이나 제방으로 갈 수가 있었고 또래들이 몰려오기도 하여 그런대로 지냈지만 안개비로 촉촉이 젖은 옷으로 인하여 여름철에도 벌벌 떨어야 했다. 안개의 입자는 눈물처럼 젖은 물의 분자로 방울진 작은 물방울들의 군무이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슬픔과 외로움을 안고 있다고 한다. 수년 전 수련회 참가로 설악에서 만난 안개도 그러했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춤추듯 너울거리는 안개의 움직임은 쉽게 볼 수 없는 웅장한 유희요 행렬이었다. 등산로는 불과 1, 2메타 지척만 희미하게 보일뿐 그 잘생긴 바위며 산봉우리며 계곡의 모양도 알 수 없는 암흑이었다. 다만 기마군대의 행진 같은 계곡 물소리만 요란하게 들렸고 입은 옷이 젖었으니 신령한 영물의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 그 위용에 두려움마저 느낀 기억이 있다. 밝음에서 어둠으로 넘어가는 저녁시간도 그러하지만 안개로 인하여 어둠을 맞는 것은 더욱 알 수 없는 슬픔과 고독으로 깊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날같이 짙은 안개는 깊은 상처와 슬픔을 남긴 추돌사건의 원인이다. 안개, 짧은 시간이지만 명상과 추억을 새롭게 하기도 하나 사물의 실체를 은폐하는 장애물이듯 사람의 생활과 소통에도 존재하여 자신의 속내를 젖은 연기처럼 풀어 세상의 진실을 허상이나 거짓으로 덧씌우는 뜻도 있다. 안개는 아름다운 수많은 형상들을 어둠처럼 감추듯, 사람들의 원칙과 규범을 삼키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지대라 생각된다. 또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베일을 쉬워 왜곡하게 유도하여 주변의 이목을 흔들어 놓는 존재의 이름이며, 각종사건과 사고의 진실을 미궁에 빠뜨리는 이상한공학이다. 지난해 4월 발생한 세월호 참사사고도 그러하다. 선박회사의 사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해 시대의 흉악범이라 지목된 그 사람의 행적과 사망원인도 안개 속이다. 그가 나눠준 고급 골프채와 엄청난 로비비용과 그 대상자에 대한 답은 없고 흐지부지 한 것이 결론이었다. 그 결과 그럴듯한 억측과 소문이 난무하게 되었고 안개 속을 걷는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였다. 그날도 총리후보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이전의 청문회 때와 같이 질문과 답변 모두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니 이 일도 안개 속 같다. 청렴을 주장한 사람이 그 정도인가? 그를 안개 속이라 몰아세우는 국회의원들은 밝은 대낮일까? 그런데 일부이지만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 교수, 군, 검, 경, 간부들, 그리고 초중고 유치원 교사까지, 왜 그렇게 안개 속인가? 하나 같이 몰염치한 사건인데 성직자도 예외가 아니다. 정말 현실은 짙은 안개 속 같아 걱정할 수밖에 없다. 어둡고 춥던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날에 고운 꽃들이 피면 벌 나비 몰려와 팔랑팔랑 춤추는 푸른 동산을 건설하겠다고 공약한 분들, 들여다보니 어둠이요, 슬픔이요, 더 짙은 안개 속이다. 꽃씨를 뿌리고 발아 된 새순을 가꾸어 꽃을 피우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세상의 모든 일도 그러한 것인데 씨를 뿌리지 않고도 남이 땀 흘려 가꾼 꽃을 꺾어서 자기가 피운 것이라 내세우다 들통이 나도 사과하지 않는 사람, 고위관직이라면 건강하다 뽐내다가도 군 문제하면 약골이라 우기는 사람, 돈 자랑하다가도 세금이라면 죽는시늉하는 졸부들, 모두가 안개 자욱한 날만큼 사고의 위험이 농후한 것 같다. 자, 이제 자연적인 안개는 조심하고 스스로 꾸민 안개는 걷어버리자. 그리고 환하게 꽃피는 새봄을 맞자.
    • 오피니언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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