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18(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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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임중칼럼]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부활 신앙의 삶)
    19세기의 최대의 시인 롱펠로우는 미국의 보든 대학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 후 모교의 근대어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1835년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기 전에 또다시 유럽으로 갔으며 이때 첫 번째 부인을 잃었다. 스위스에서 ‘프랑세즈 애플턴’을 발견하고 그녀를 산문 이야기 <하이페리온>의 여주인공으로 묘사하였다가 그녀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43년 드디어 그녀와 결혼하였지만, 이 두 번째 부인도 61년 불행한 사고로 불타 죽었다. 롱펠로우는 그렇게 인생의 쓰라린 경험자였다. 롱펠로우가 75세가 되어 그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한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두 부인의 사별뿐 아니라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아오신 것으로 아는데,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시들을 쓸 수가 있었습니까." 이에 롱펠로우는 마당에 보이는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사과나무는 몹시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립니다. 옛 가지에서 새 가지가 조금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도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새 생명을 계속 공급받아 인생의 새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롱펠로우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부활의 세계는 지칠 줄 모르는 생명의 세계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 짓’이라 하는 것이다. 오래전 울산에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참으로 귀한 장로님을 만났다. 아직도 그분의 아름다운 신앙과 삶을 잊지 못한다. 그분은 월남전에서 양손을 다 잃은 전상자였다. 전쟁 중에 진지에 포탄이 떨어졌다. 떨어진 포탄을 쓰러 안는 순간 양팔은 날아 가버렸고 배는 터져 창자가 흘러내렸다. 동시에 동료 전우들은 살았다. 누구도 살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을 못 한 상황에 긴급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했다. 그 후 신앙생활을 통하여 그 아픔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장로가 되어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주고 생명을 주는 거룩한 몸짓으로 오늘도 사역하고 계셨다. 함께 식사하면서 장로님의 숟가락과 젓가락 움직임을 보았다. 장로님의 양쪽 의수(義手)는 아주 민첩하게 밥과 반찬을 집어 올려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장로님 의수를 잡고 여쭈어보았다. “어떻게 열 손가락처럼 그렇게 민첩하게 손놀림할 수 있습니까?” 장로님은 빙긋이 웃으시면서 의수를 보여 주셨다. 손가락 역할을 해 주도록 만들어진 의수(義手)는 강한 쇠붙이였지만 장로님은 그 의수로 글도 쓰시고 그림도 그리고 못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하신 담임 목사님은 한마디 거들어 주셨다. “P 장로님은 모든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 비록 장애인이지만 누구보다 밝고 아름다운 삶을 엮으시면서 교회와 사회에서 존경받는 장로님으로 행복하게 살아가시는 그것은 오직 장로님의 중심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충만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오늘의 삶이다. 그것은 진실로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이었다. 사지백체 건강함을 가지고도 늘 불평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정신적 인격적 장애인들이 많은 오늘에 P 장로님의 미소는 목사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다. 비가 많이 쏟아지는 그곳에서는 식물들도 더욱 푸르게 자라난다. 안개가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알맞아 에메랄드의 섬이 된다. 우리 인생에도 고난과 슬픔의 안개가 짙을수록 에메랄드 같은 아름다운 심령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 깊이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제비가 겨울 동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겨울 동안에 꽃나무가 죽어서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먹구름이 소나기를 내리게 하며 사방이 어두워 캄캄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오고,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핀다. 이 땅에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해 잠시 비가 내렸을 뿐이지 태양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다. 나는 뇌신경암 4년차 투병 중이다. 그런데도 1년 52주 한주도 쉼 없이 부흥사경회를 인도한다. 내 삶의 한편에는 아프고 지치고 벅찬 시간도 있지만 그보다는 감사와 평안과 행복한 삶이 현재진행형이다. 그것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부활 신앙이 거룩한 몸짓의 삶을 연주하게 한다.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방문하여 말씀 사역을 하노라면 잠자리가 불편하고 식사가 만만치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운전도 순조롭지 않다. 그러면서 요즈음 내 마음이 흔들리는 일들이 있었다. 사역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작은 교회 목사님의 전화 한 통이 또 나를 다음 마을로 가야 함을 깨닫게 했다. “서목사님, 우리 교회 78세 할머니가 서목사님의 방송 설교를 듣고 저를 찾아와 서임중목사님 설교를 생방송으로 듣고 천국 갔으면 원이 없겠다 하셨습니다.”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눈시울이 젖었다. 고 방지일 목사님이 101세에 포항중앙교회 주일 설교를 마치시고 목양실에서 “하나님, 말씀의 종 서임중목사는 녹슬어 사용하지 못하는 종이 아니라 닳아서 사용할 수 없는 그날까지 귀히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축복 기도를 해 주신 시간을 묵상하면서 오늘도 사역의 걸음을 옮긴다. 그것은 ‘더 좋은 삶을 위한 거룩한 몸짓’이리라. 오늘도 롱펠로우의 ‘인생 찬가’의 한 부분을 읊조리면서 주님의 나귀 되어, 또 다음 마을을 향해 걷는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아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가슴 속에는 심장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나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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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성서연구] 십자가가 복이 되다
    일반인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 중 하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짐을 벗겨 대신 져 주시는 분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68편 19절도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인생의 짊을 대신 져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짐을 주님께 맡기고 살길 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뜻밖에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짐을 지우기도 하십니다. 이 일을 경험한 대표적인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매우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구레네는 오늘날의 북 아프리카 리비아 근처입니다. 당시 구레네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시몬이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순례는 평생 꼭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습니다. 시몬은 오래 준비했을 것입니다. 여행 경비, 하나님께 드릴 예물, 여행에 필요한 물품들, 예루살렘에서 입을 새 옷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던 날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는 새 옷을 입고 예루살렘 거리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가까이 가 보니, 한 죄수가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죄수가 비틀거리자 로마 군병이 시몬을 끌어내어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날벼락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모두가 끔찍하게 생각하는 형틀인데, 그것을 지게 되다니, 그것도 벼르고 별러 온 예루살렘 순례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는 정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십자가에 배인 죄수의 피가 그의 옷에 스며들었습니다. 그 거친 십자가에는 이미 죄수의 피가 배어 있었습니다. 그 죄수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어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 그의 새 옷은 죄수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옷도 버리고, 영혼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충격적인 일이 시몬에게 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죄수가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받은 복은 무엇일까요? 그 날 시몬은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숨결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순간, 예수님의 깊은 눈이 그를 사랑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땀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었다, 그 날 그가 누린 복이었습니다. 또 시몬은 그날 예수님의 보혈에 가장 먼저 닿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씻는 보혈입니다. 그런데 그 보혈이 그의 옷에, 그의 손에, 그의 몸에 닿았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의미를 몰랐겠지만, 후에 십자가 보혈의 사죄의 능력을 알았을 때, 시몬은 평생 그 날의 감격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주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예수님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 13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그의 가정은 로마에서 믿음의 가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는 십자가도 복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고 따르는 십자가도 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질 때는 무겁고 힘들지만, 후에는 복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있습니다. 편하게 믿으려고 합니다. 냉난방이 조금만 불편해도 원망합니다. 주차장이 없다고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주방 봉사자가 사라집니다.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신학생들도 편한 사역지만 찾는다고 합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참된 복이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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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시사칼럼] 부활의 달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4월은 ‘부활의 달’입니다. 1900년부터 2050년까지 부활절이 3월에 있는 경우는 33번인데 나머지는 모두 4월이었습니다(117/150(78%), 2025년까지는 97/125(77.6%)). 그렇다면 이 부활의 달에, 특히 부활절 전후해서 이 땅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도착일 텐데, 부활절 당일인 1885년 4월 5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사흘 전인 4월 2일 부산에 먼저 당도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 개신교 본격적인 선교의 역사는 부활절이 아니라 고난주간에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같은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입니다. 수요일에 전복되어 금요일에 완전히 침몰해서 304명의 희생자를 내었던 이 사고로 그 해 부활절(4월 20일)은 유난히 슬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영원한 부활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1592년 4월에는 부활절을 전후해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4월 13일에는 부산진전투, 그리고 4월 15일에는 동래성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현장에 있던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였는데 붉은 비단 장막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군기를 사용했고 본인 뿐 아니라 다수의 부장과 군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들어와 화승총을 전해주고 포교 활동을 하던 예수회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1593년에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라고 하는 신부가 일본군 진중에 거하며 밤마다 미사를 집전했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사실상 최초의 기독교 전래라니, 얼마나 기이한 역사입니까? 또한 임진왜란 중에 포로로 끌고 간 소년 하나가 일본 땅에서 세례를 받고 예수회의 사제가 되었다는 기록을 찾았습니다. 나가사키의 순교자 기념관에 성자(聖者) 다음의 복자(福者)로 이름이 올라 있는 권 빈첸시오(Vincent Caun)라는 인물인데, 이승훈의 첫 수세(1784년)보다 180년 빠른 1600년대 초에 세례를 받았고 김대건의 사제 임직(1845년)보다 220년 빠른 1625년 옥중에서 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발견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역설적인 부활입니까? 부활의 달에는 굴곡진 역사들이 더 있습니다. 1948년 부활절은 3월 28일이었는데 바로 그 부활주간의 끝자락인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남로당 제주위원회 주도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를 습격하여 시작된 ‘4·3 사태’였습니다. 1948년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고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이념과 관련 없는 무고한 많은 시민들까지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2003년 국가 차원의 진상보고서가 채택되면서 부활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아픈 부활과 슬픈 부활도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십여 년 뒤의 부활절 무렵에는 아픔과 슬픔을 넘어 영광의 부활이 된 일이 발생합니다. 1960년 부활절은 4월 17일이었는데, 이틀 뒤 ‘4·19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위대로 인해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발포되었고 경찰이 발포를 감행하면서 130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혁명은 일종의 부활을 이끌어냈으니,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눌려있던 자유의 부활이었고 제한되어 있었던 민주주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부활의 달인 4월 초입에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를 역사의 서판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작년 ‘12·3 비상계엄’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사태들이 일단락되면서 4월 4일에 사상 두 번째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하는 탄핵 결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데자뷰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분열과 다툼과 미움과 배제가 기승을 부리는 시간들을 보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활의 역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합니다. 돌아오는 부활절을 기점으로 하여 다시 한 번 이 세상에도 혼란을 딛고 모든 사람과 모든 일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역사가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부활의 증인인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악의와 저주의 말들 대신 관용과 격려의 말들이 되살아나도록, 분열과 다툼 대신 화해와 일치의 마음들이 되살아나도록, 의기소침과 퇴행보다는 격려와 상승의 분위기가 되살아나도록, 부활의 믿음과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의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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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다음세대칼럼] 청소년들에게 하나님 나라 대안 이야기를 쓰게 하자
    청소년들에게 폰보다 게임보다 더 즐겁고 좋은 것을 제시하자. 바로 하나님 나라 대안 이야기를 쓰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폰 중독의 이유에 70% 가까이 가장 큰 원인인 불안이 제거될 것이다. 폰도 쾌락도 허무도 통제하고 다스리게 된다. 폰에 중독되고 허무와 게으름과 쾌락에 청소년들이 허우적거린다. 이럴 때 폰보다 쾌락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각자의 삶에 하나님과 함께 써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쓰자. 자연이야기인 자기 본능이나 그냥 떠오르는 자연 해석은 내려두자. 하나님의 나라 관점, 하나님의 시각이라는 두 안경으로 자신의 환경, 불행, 절망, 상처, 은사, 감정, 재능을 의조적으로 재해석하자. 하나님 나라 대안 이야기를 쓰게 하자. 이것은 다른 말로 ‘사명치유’라고 할 수 있다. 분명 청소년에게 주는 진정한 부활의 능력이다. 상담 전문가들은 인생이나 사건은 해석을 잘하면 상처가 90%가 상처가 되지 않는다 한다. 실제 아픔은 10% 정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결국 상처받아서, 가난해서, 사랑받지 못해서 불행한 것이 진짜 원인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재해석을 바르게 하지 않아서이다. 상처받기로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 해 지면(사명이 분명 해 지면) 상처도 사명이 된다. 상처의 참 의미와 가치와 뜻을 하나님 뜻으로 알게 되면 사명이 된다. 상처가 열등감, 수치, 아픔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도리어 사명으로 더 연단이 된다. 그래서, 탁월성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흔적이 된다. 그러니 열심히 사는 것보다 바른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생존경쟁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는 교회에서 조차 그저 열심히 사는 것, 성공(?)에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바른 방향을 놓쳤다. 게으름보다 더 비참한 결과가 되었다. 사명은 직업보다 돈보다 크다. 결국 사명을 못 찾으면 직업도 돈도 목적으로 우상이 되어 노예로 전락해서 불안이 많아진다. 진짜 할 것에 집중하지 못하니 열심히 살고도 전도서처럼 헛되고 헛되게 된다. 지금 청소년들에게도 사명 치유가 바른 자존감을 높인다. 내적 치유의 부족한 부분도 보완된다. 베드로의 갈릴리 바닷가 열등감과 패배감도 예수님과 조반 먹는 동행과 “내 양을 네가 치라.”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회복되었다(요 4:34; 17:4; 빌 2:13). 이 두 가지가 청소년도 우리도 회복되는 부활절이기 기대한다. ○ 성경적인 이야기 상담 8단계 성경 이야기 상담은‘Biblical Narrative Counseling’이다. 앱스턴(DavidEpston), 화이트(MichaelWhite), 우리나라의 오우성 교수(계명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한국성경적상담학회 이사, 한국기독교심리상담학회 슈퍼바이저, 기독상담연구소 소장), 박민수 교수(계명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기독상담연구소에서 부소장)가 정리했다. 성경 이야기 상담의 8단계의 과정이다. ① 문제를 파악한다. ② 청소년의 호소 문제에 맞는 성경 이야기를 선택한다. ③ 선정된 성경 이야기를 서사적(이야기 속 세계, 사건, 등장인물, 배경, 인물들과 나의 동일시)으로 읽는다. ④ 읽으며 끌려 들어가는 부분 찾는다. ⑤ 인력 탐구한 부분에서 새로운 자료를 찾는다. ‘인력’이란 ‘끌리는 힘’을 말한다. 청소년이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특별히 끌리는 부분을 찾자. ⑥ 단편적으로 발견된 조명자료는 강화를 시킨다. 청소년을 몰입하게 하는 그것이 청소년의 삶에서 어떤(What)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내자. 조명자료는 청소년의 삶을 조명하는 자료로서 캄캄한 바다와 등대의 비유로서 설명할 수 있다. 조명자료는 청소년의 과거와 현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청소년의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조명자료를 통하여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자. 조명자료를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메시지를 통해 확대하고 심화시키자. 그래서 청소년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박게 하는 것이 조명자료 강화이다. 조명자료를 점차로 확대하고 심화시켜서 이것이 청소년의 마음과 영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 주자. 말씀을 마음에 심어(implant) 주는 것과 같다. ⑦ 자기 인생에 대해 다시 쓰게 하자. 강화된 조명자료를 가지고, 청소년의 과거-현재-미래를 새롭게 구성하자. 청소년의 삶 전체를 강화된 조명자료를 가지고 새롭게 바라보는 것을 재저작(재진술)이라고 한다. 청소년이 발견한 조명자료와 강화된 조명자료를 가지고 청소년의 삶을 다시 새롭게 써보는 단계이다. 삶의 이야기는 아주 먼 과거와 먼 과거 그리고 가까운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나간다. 삶이 시간적인 선상에 있는 것처럼 청소년의 삶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새롭게 조명하자. 자신의 삶을 새롭게 조망하게 된다. ⑧ 지지적 신앙 소그룹 만들어서 자주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강화를 받고 지지를 받게 하자.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그룹이 가장 좋다. 아니면 임시 동아리 그룹을 만들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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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이야기]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부활의 메시지
    미국에서 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갈 것 같은 유명인 한 명을 꼽는다면 과연 누가 과연 천국에 갔을 것 같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2위는 인도의 수녀 마더 테레사였습니다. 평생을 헌신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마더 테레사가 79%의 지지로 “아마 천국 갔을 거야.” 2위를 했어요. 3위는 마이클 조던입니다. NBA 농구선수죠. 65%가 마이클 조던이 죽으면 천국 갈 거라고 그랬어요. 4위는 영국의 왕세자비였던 다이애나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이분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60%면 굉장히 많이 나온 거예요. 자, 그런데 이 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1등이었어요. 마더 테레사가 79%라면 1위는 몇 퍼센트를 했을까요? 87%가 나왔어요. 누굴까요? 바로 이 87%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딴 사람이야 누구라도 천국 가든 말든 사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천국 가는 걸 확신하고 있어요. 안 믿는 사람이라도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 천국 갈 수 있어! 나 천국 갈 거야! 구원받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거죠. 자,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렇게 구원받을 거라는 나의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는 과연 내가 구원받을 거라고 87% 자신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선하고 그렇게 완전합니까? 겉으로 보기엔 다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게 다 가면이라는 걸 알잖아요. 우리는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착하고, 아무리 친절해도 이것이 내 본심이 아니라는 걸 내가 알아요. 나는 대우 받고 싶고, 높임 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그래서 하루에도 12번씩 나는 천사가 됐다가, 악마가 됐다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잖아요? 우리의 속마음은 온통 돈과 욕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는 실은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나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늘 헷갈리는 거예요. “나 천국 갈 수 있어!”라고 자신하지만, 그러나 내 삶을 돌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삶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과연 천국 간다는 내 자신감에 걸맞게 살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경쟁입니다. 끝없는 경쟁사회에 나 자신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살고 있어요. 어떤 이들은 공부로 “내가 공부 열심히 해야지! 보여줘야지! 1등 해야지!”하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열심히 삽니다. 어떤 이들은 돈으로 “내가 돈 자랑, 내가 명품 끌어 모을 거야! 내가 이런 차타는 사람이야! 내가!” 이러면서 으스대려고 노력하죠. 그런데 경쟁이란 100번을 이겨도 한번 지면 끝나는 거예요. 매번 이길 수는 없는 거예요. 마치 도박 같습니다. 도박은 처음엔 따지만 그렇게 시간이 지나 다 잃어버리고 망하는 거에요. 인생이 그렇다는 거예요. 만일 우리가 패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줄 그 힘은 과연 무엇입니까? 오늘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신 분이 계세요. 바로 그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오늘이에요. 부활절이에요. 그러면 바로 나의 값을 치르기 위해 나의 죄를 치르기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분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구원자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것이 교회의 신앙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세주신데 그분이 무슨 말을 하셨을까요? 두 가지 아주 인상적이고 가장 필요한 두 마디를 하셨습니다. 자,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에요. 다 이루었다. 이게 뭐냐면 너희가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내가 다 치렀다는 거예요. 계산은 끝났다. “이제 너희의 죄는 해결됐고 천국으로 가면 돼!”라고 하는 그 한마디가 “다 이루었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다 이루셨는데, 우리의 죄는 해결됐는데 그래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신경써야 할 일이 많고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많아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제는 더 이상 너희의 죄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아파하지 말고, 버거워하지 말고 이제는 너희가 평강을 누리며 살아!”라고 하는 거예요. 부활절 이전과 이후가 똑같은 가정, 똑같은 학교, 똑같은 친구들인데요 이제는 우리의 삶이 너무 달라요. 부활절 이전까지는 “아이고! 죽으면 어떡하나? 아프면 어떡하나? 문제 생기면 어떡하나?” 이러고 살았는데 부활절 이후로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거예요. 죽으면 어때, 다시 사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까 어떤 일을 해도 기쁨으로 할 수 있고, 감사로 할 수 있고 평강이 넘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부활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값을 다 치르셨어요. 이제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실패는 없습니다. 죽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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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홍목사의 다음세대 이야기
    2025-04-11
  • [교회건축칼럼] 교회건축의 과정과 시행착오극복
    교회건축은 목회자와 성도가 그 추진과정 자체가 축제이어야 한다. 교회건축이 은혜가운데 축제 지향적으로 추진되어 가려면 많은 준비와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준비와 전략은 교회내 의사결정이 일부에 의하거나 주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건축과정에서 결정되어야 할 수많은 내용들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결정해야할 내용들에 대해서 합리적 평가기준이 수반되고 이 기준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가기준의 요소들을 전략적 기준이라 하여 크리테리온(criterion)이라 한다. 이 크리테리온은 교회마다 다 차이가 있으며 교회가 위치한지역마다 다를 것이다. 또 목회자의 목회철학과 비젼, 교회크기, 교회프로그램, 교회형태 등 여려가지 요인에 따라 다양한 요소들이 대응 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요소들을 많이 나열하고 그것이 교회건축 과정에서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판단기준의 준거들로 사용해야 한다. 하나의 결정사항을 여러가지 판단기준 요소들로 평점을 주어 평가하면 의외로 감정적으로 결정했을 뻔한 사항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결정되어져 감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들면 교회부지 매입에 대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때 많은 목회자들이 범하기 쉬운 일중에 하나가 평당 부지 가격이 싼 곳을 서둘러 사는 것 같은 의사결정을 지적할 수 있다. 감정적으로 부지가격이 낮다는 것이 의사결정 크리테리온의 전부가 되어서 이와 다른 여러 크리테리온의 판단기준이 결여되므로 합리적 의사결정이 되지 못하므로 매입 후 발생되는 여러 시행착오 요인(risk factor)에 의해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겪는다. 부지가 싸다는 이면에는 부지에 건축하기위한 수도, 전기, 하수도시설, 가스등과 같은 기간 인프라시설이 없어서 별도의 부대비용이 상승된다든지, 진입도로가 좁아서 건축허가시 일정규모이하 밖에는 건축할 수 없다든지(건축법에는 6M이하의 도로와 접한 부지는 604평 이하로 건축해야함) 형진변경이나 개발행위허가 등의 허가가 수반되거나, 아예 교회허가를 득할 수 없는 부지를 매입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교회건축과정에서 많은 의사결정은 순간적으로 이루어 질것이 아니라 합리적 의사결정 크리테리온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교회 내 이 기구를 두는 것이 건축위원회일 것이다. 건축위원회는 교회건축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이다. 그러나 건축위원회가 명목상 위원회가 되거나 형식적 위원회가 되면 오히려 교회건축과정에서 비생산적여론만을 양산하는 비효율적 기구가 되어 교회건축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합리적인 건축위원회가 되려면 몇 가지 운용에 있어서 개선 방향이 요구된다. 첫째, 위원회의 구성에 있어서 현재의 모습은 교회 내에서 일부장로나 교회건축 관련 종사자와 같은 단순한 형식에 의해 구성되어진다는 점을 개선해야 한다. 왜냐하면 비전문가들로 구성되다보니 교회건축과정에서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없게 되고 감정에 치우칠 수 있게 된다. 개선된 위원회의 구성은 교회 내 전문가를 최대한 참여 시키는 것과 외부 자문위원을 영입해야 한다. 교회건축에서 음향, 설비, 인테리어, 금융행정, 법등은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분야이다. 둘째, 위원회의 활동에 있어서는 기존의 모습은 주일이나 평일 교회 내에서 회의 정도가 전부이다. 건축위원회의 활동은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위원회는 현지답사와 항목별 연구 분석 현장대안 분석 등 현장위주로 활동해야하고 교회 내의 활동은 이것의 보고와 전략회의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건축위원회의 활동구성은 인원수에 의함보다 소위원회 별로 활동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문 분야별로 나누어야 한다. 부지매입위원회(행정 법률전문가 초빙), 교회비젼위원회, 교회설계위원회, 건축시공위원회, 음향.영상.인테리어 위원회, 유지관리위원회 등으로 세분화해서 각 위원회가 각 분야에서 활동해서 종합회의를 통해 결정해 나가야 의사 결정에서 세부적이고 전문 영역화 될 수 있다. 셋째, 정기적인 스케줄 관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위원회는 교회에서 필요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인 모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경우 위원회는 각자가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분석하고 회의에 대비해 나름 데로 활동할 것이다. 위원회는 교회건축과정의 전체일정을 숙지하고 단계별 활동스케줄이 명확히 수립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측된 리스크를 미리 점검할 수 있게 해준다. 건축위원회는 시계를 보는 영역에서 시계를 만다는 영역으로 진화돼야 한다. 교회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또 있다면 건축기간의 수립이 될 것이다. 대부분 교회건축의 기간은 교회의 상징적 일정(교회창립일,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에 맞추어 완공일정을 수립한다. 또는 기간을 대단히 촉박하게 수립하여 많은 요쇼들을 충분히 점검하지 않고 다음공정을 진행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한국의 빨리 빨리 문화는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설계도 1개월 시공도 6개월 등 의미 없는 기간수립은 완공 후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촉박한 설계와 시공은 부실을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건축의 기간은 시간대별로 수립해서는 안 되고 단계별로 수립해야한다. 교회건축의 과정이 몇 개월 내로 맞추는 것에서 1단계는 교회건축의 비젼수립단계, 2단계는 부지매입단계, 3단계는 설계. 시공 4단계는 인프라 점검단계 5단계는 우지관리단계 등 단계별로 수립해야 각 기간에 대한 점검과 확인을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략이 필요한다. 이를 때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시행착오를 줄이는 가장 큰 지혜는 부지매입단계부터 건축사의 조언을 받고 각종 건축법이나 전문영역, 인허가, 기술적사항을 확인 해 나가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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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건축칼럼
    2025-04-11
  • 한교총, 헌법재판소 결정 존중
    한국교회 대표적인 연합단체인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교총은 “정부는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대통령선거를 차질 없이 수행하며, 여당과 야당은 국민적 갈등을 선동하지 말고 국회로 돌아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통해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복원하라”고 정치권에 당부했다. 또 교회에 대해서도 “한국교회 모든 교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롭게 하되, 십자가 복음에 합당하게 말하고 행동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끝으로 한교총은 “곧바로 진행될 대통령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 국민을 두려워하며, 국민을 통합하고 상대를 존중하며,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후보에게 투표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하기 바란다”고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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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CBS 사장 누가 될까?
    CBS(사장 김진오) 차기 사장 선임이 임박했다. CBS 재단이사회(이사장 윤순종 목사)는 이달 22일 신임 사장후보를 선출한다. 현재 CBS 사장 후보는 총 9명이 등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사장직에 도전한 인물들은 전원 CBS 직원 출신이다. 고길화(전 CBS 강원 대표), 김갑수(전 광주CBS 본부장), 김규완(전 부산CBS 본부장), 김재덕(전 CBS 보도국장), 나이영(전 강원영동방송본부장), 박성석(전 충북CBS 본부장), 박종률(전 기획조정실장), 성기명(전 CBS 보도국장), 이완복(전 CBSi 대표) 등이다. CBS 사장 선출은 2단계로 진행된다. 사장추천위원회에서 2-3명의 후보를 선출하고, 이후 재단이사회가 투표를 통해 최총적으로 사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사장추천위원회는 현 이사 4명(육순종 이사장, 정은석, 이정원, 김학중 이사)과 직원2명(직원 투표로 간부직원 1명, 평직원 1명), 외부인사 1명(기독교대한복음교회 윤창섭 총회장) 총 7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장 선출을 하는 CBS 재단이사회는 각 교단의 추천을 받은 19명의 이사와 2명의 감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장추천위원회와 재단 이사회 모두 22일 당일 선출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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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이승만의 반공주의2
    볼셰비키 혁명(1917. 10)으로 소련이 공산화되자 공산주의 사상은 동유럽으로 확산되고 동쪽으로는 몽골까지 확장되었다. 지식인들은 실험되지 않는 허황된 유토피아 사상을 환호했다. 중국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던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공산당과 연계하여 독립자금 지원이라는 사탕발린 독약을 받아먹게 된다. 이동휘와 박진순이 중심이 되어 1918년 5월 31일 창당한 ‘한인사회당’은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중국 공산당은 1921년에, 일본공산당은 1922년에 창당된다), 볼셰비키의 지원을 받아 항일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승만이 쓴 공산주의에 대한 논설은 당시 한인 사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대륙 세력인 중국이나 러시아를 택하지 않고 해양 세력인 미국을 택하여 독립운동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연계(ideological chain)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두 편의 논설을 남겼는데, 「태평양 잡지」 1924년 7월호에 쓴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와 「태평양잡지」 1925년 7월호에 쓴 “공산주의”가 그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변(一邊)으로는 우리 사람들이 이런 새 주의(主義)를 들을 적에 우리의 오늘 경우가 다른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다만 남이 좋아하니 우리도 좋아하자고 덮어 놓고 따라 나가다가 영향을 받을까 염려함이라. 물론 우리 내외지(內外地)에 모든 인도자들이 응당 앞을 보아 지혜롭게 인도할 줄 믿는 바이지만, 그중에 몇 사람이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일시(一時) 풍조에 파동(波動)되면 그 손해가 장차 전체에 미칠까 하는 근심이 없지 아니함이라.” 도처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흥기할 때에 쓴 이글은 “공산주의의 폐해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논증한 세계 최초의 논설”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반공정신은 팽창주의를 지향하던 러시아에 대한 경계라고 하는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따지고 보면 이승만의 반공사상은 그의 정신세계를 관통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의 반(反) 유물론적 이념체계가 자유민주의를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반공사상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계로 인식하게 한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그의 모스코바 방문 이후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33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회의 참석차 유럽을 여행하고, 7월 19일과 20일에는 모스코바를 방문했는데, 이때 공산주의 치하의 국민 생활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또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보면서, 그리고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한국이 공산화될 위험이 있다고 보아 크게 우려하였다. 제2차 대전 이후(1944-45) 소련이 동독을 비롯하여 동유럽의 약소국가들, 곧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폴란드 등을 점령하고 공산주의를 이식하여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1948년 2월에는 마지막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로 공산당 독재국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보다 앞서 1947년 9월에는 국제공산당(Cominform)이 결성되면서 동유럽의 공산화는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들었다. 인접한 중국에서는 1949년 마우쩌둥(毛澤東, 1893-1976)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게 되자 국제정세에 민감했던 이승만은 공산주의 체제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건국투쟁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정략적 고려에서 박헌영(朴憲永, 1900-1956)의 조선공산당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바 있다. 1945년 10월 21일 행한 중앙방송 연설에서, 그리고 11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관념’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공산당에 대한 포용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지만, “절불굴(折不屈)하고 배일항전(排日抗戰)하던 공산당원들,” 혹은 “경제방면으로 근로대중에게 복리를 줄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과는 협조할 용의가 있다”는 식의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사는 정략적인 의도였다. 그는 한번도 공산주의를 용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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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4-11
  • [목회자칼럼] 부활을 이상하게 보는 현대 사상
    작품을 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한 작품을 ‘아름답다’고 할 때, 작품 속에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플라톤의 미의 대이론’입니다. 작품 속에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미의 객관적인 속성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작품 자체에 객관적으로 좋고, 아름답고, 훌륭한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상자는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그러나 철학자 칸트는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상자가 작품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칸트의 이론에서는 작품 자체에 아름다운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에게 아름다운 속성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이 아닌, 보는 감상자 내면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 감정에 따라 작품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작품의 객관적 속성일까요? 관객의 주관적 감정일까요? 절대표현주의는 두 가지 모두를 이야기합니다. 이에 따르면 작품에도 객관적인 속성이 있고, 보는 감상자에게도 주관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여 작품을 ‘아름답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작품, 즉 본문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을 문자 그대로 분석하는 문법적 이해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문을 적은 저자의 상황과 시대, 정신세계 등을 포함한 본문의 맥락과 이면의 뜻, 의미 등을 분석하는 심리·정서적 이해입니다. 문법적 이해는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분석하는 객관적 이해력이고, 심리·정서적 이해는 본문 이면의 의미를 분석하는 주관적 이해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의 바른 이해는 본문을 문법적으로만 이해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저자의 상태와 환경에 따라 심리·정서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문법과 심리·정서 즉, 객관과 주관을 함께 사용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상호 소통하여 이해할 때, 본문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것, 기적을 베푸신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신화인지 구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대의 세계관과 현대 21세기 세계관이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사실이냐 아니냐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문법적 해석을 이해하고 사실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에 대한 문법적 이해와 더불어 부활에 대한 심리·정서적 이해가 함께 상호작용하여, 객관과 주관이 상호작용하여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2025년 4월,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부활의 사건을 어떻게 사실 그대로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어떻게 의미를 이해하고 나 자신의 주관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다음세대에게 복음의 전승, 언약의 전승이 일어날 것입니다.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부활을 사실로만 이해하는 것은 한 단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모른채 의미만 파악하는 것도 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객관적 사실과 함께 그 사실 너머의 의미를 알고,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다음세대에게 전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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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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