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행사 좀 짧게..
-
-
손양원 목사 기념관 개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군수, 국회의원, 시도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과 교계안에서도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참석한 사람들은 기념사업회에서 이날 행사를 잘 준비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옥의 티는 행사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점. 야외행사라는 점을 감안했으면 이날 개관식이 너무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1부 예배, 2부 개관식 3부 오페라 갈라 콘서트만 진행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중간에 명예졸업장 수여식, 기념식수 등이 있었고, 개관식에서도 묵상의 벽 제막식과 커팅식 등이 나눠 참석자들이 지루했다는 지적이다.
다행히 초반 뜨겁던 햇빛도 구름에 가려 졌고, 사이 사이에 특송과 축가가 있어 좋았다는 반응이 우세했다.
-
2015-10-22
-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수록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
-
-
이승만 없었으면 건국이 어려웠고
좌우합작했으면 적화됐을지 몰라
해방 직후 국민의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미국마저도 좌우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사코 반대하고 끝내 단독정부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를 휩쓴 사상은 좌우합작 사상이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 대항해 이기기 위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았다.
그러한 민족대단결주의의 명분은 해방 후 우리 한반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좌파든 우파든 모두가 손잡고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다른 의견을 달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명분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 원래 우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온건하다.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하다. 반면에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단결력이 강하고 투쟁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파가 좌파와 손을 잡으면 우파가 좌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좌우합작의 연합정부를 세웠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같은 동유럽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된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이른바 국공합작을 했다가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같은 좌우합작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그 위험성을 밝히 알고 있는 지도자는 이승만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당시 미국도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주의적인 태도는 단호했다. 이유는 조직력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내외적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악조건과 싸워 종내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하여 UN이 1948년 5월 10일 한국 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그랬으나 가을에 열리는 UN총회에서 승인받는 것이 문제였다. 반대표를 던질 위험성이 있는 나라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가 승인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개인을 상대로 호소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에 승인되었다 이승만, 생각해 볼수록 위대하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2015-10-22
-
-
[내가 만난 교계 인물1]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
-
▲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척박하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330-30번지. 허연 벌판 같은 버스 종점지점 근처에 교회 개척을 시작한 지 35년 만에 대박을 터트린 이름대로 된 명성교회. 교인 재적12만 명, 평균 주일 출석 5~6만명. 새로 건축한 교회 내 한번에 수용 가능한 인구는 1만5천여 명이다. 35년 만에 이런 경이적인 메가 처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팩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김삼환 목사를 단독면담이라 할지, 인터뷰라 할지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상관없는 것은 어째든 단독으로 김 목사를 만나 약 30분가량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이런 만남을 주선 한 분은 김삼환 목사의 측근 인사로 알려진 공병의 목사(포항동해큰교회 담임)다. 만남을 주선한 이유도 따로 있었기 때문이지 우연한 계기는 아니다.
2014년 7월 6일자 공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서울 명성교회 당회실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다음날 일찍 KTX를 타고 갔다. 기차에서 공 목사는 내게 “김 목사를 만나 무슨 얘기를 질문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매우 조심스럽고 부담스런 질문일 것 같아 분위기가 잘못 되면 만나자 말자. 인사만 나누고 일어 설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미리 신문 스크랩 한 장을 복사해 갔다. 당시 복사해 간 신문은 필자가 본지에 쓴 기사였다. 김삼환 목사와 2013년 9월 총회기간인 명성교회 옆에서 아침조찬을 우연히 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교회 바로 옆 교인 집 식당이었는데 그 식당은 그야말로 시골 밥상을 연상케 하는 허술하고 10여명이 앉으면 꽉 찰 수 있는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시골에 흔히 보는 시락국 해장국 밥상에 불과한 시골식당 같았다. 몇몇 해외 선교사들과 함께 조찬에 초대 받은 것이다. 그때 김 목사는 주방에 들어가 시락국을 그릇에 담고 있었고 흔히 먹는 공기밥이 아닌 큰 사발 같은 대접에 푸근히 담은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리고 시락국과 김치 무우 대충 반찬은 그린 필드가 전부였다. 시골 노인과 같은 분이 국을 떠서 손님에게 나눠 주는 풍경을 담아 야사 역사의 현장에 글로 담아 놓았던 글을 스크랩해서 보여 주면 좋아 할 것이라고 상상하여 첫 만났을 때 문제의 글을 자기의 사진과 함께 보여 주었다. “아!ᆞ 정말 글을 잘 썼네요.” 수수하고 서민적인 글을 본 순간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이때를 놓치면 대기자가 아니다. 나의 센스를 동원해 찬스를 포착했다. “김 목사님, 최근 교회 안에 일어난 시무장로 투신 자살사건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김 목사는 그런 말 나올 줄 알았든지 “그래요 처음으로 신 장로님과 이번 사건을 얘기하는 겁니다. 아무 인터넷 언론이나 교계신문도 애기 나눈 적 없어요”라고 전제를 하고 해명입장을 서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문제의 P 장로는 저가 가장 신뢰하는 장로이고 부산에 연고가 있는 경상도 인사로 모든 교회 특별 재정을 모두 맡겨 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 하루 전날에 자살하고 말았으니 도무지 대화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 난 금액은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고 자신이 사업하다가 집이며 부동산 소유도 다 은행에 잡혀 있었다는 것도 사고 난 다음 알았다는 것이며, 모 인터넷 언론사 보도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슨 비자금이 있느니 하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교회시무장로들과 모두 얘기한 후 지출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자면 에티오피아에 병원을 설치하는 비용 등은 교회경상비 예산이 아니고 특별계정 특히 교회 건축하다가 남은 금액일부와 김 목사가 외부에 나가 부흥회 등 강사비로 받은 금액 등을 모아놓은 비용인데 “이 금액도 모두 장로들과 의논해서 지출되는 금액이지 무슨 비자금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장로를 빨리 만났더라면 안 죽을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쉽다고... 그래서 장례를 직접 김 목사가 가서 다 치러주고 사모권사님과 그의 가족들도 불만 없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됐다. 그러면서 “이런 해명은 신 장로님한테 처음 얘기하는 것이다. 허물없는 사이이고 또 우리 교단 장로이니까 얘기 하는 것이다”며 매우 다정다감하게 얘기를 풀어 나갔다.
나는 다 듣고 난 뒤 헤어져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오는데 어떻게 할까? 글을 써야하나? 안 써야하나? 기자 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뉴스초점에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단독인터뷰’(2014년 7월 7일자)를 기사화하고 말았다. 그런데 야단이 났다. 공병의 목사가 전화로 인터넷 기사 내려 달라고 성화였다. 공 목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결국 글은 내렸지만 이미 인쇄된 신문은 나가고 마는 해프닝이 있었다. 나는 이런 비하인드스토리를 쓸라고 한 것이 아니다. 김 목사의 훈훈하고 농촌 서민의 애환을 풍기는 그의 순박한 인간성과 가끔 설교시간에 믿지 않는 전통적인 유교 안동 가문 김 씨 집안의 얘기부터 시골 교회에 있었던 구수한 ‘전설 따라 삼만리 같은 고향 얘기’가 향수같이 묻어나는 그의 설교 메시지는 누구나 농촌 출신인 교인들과 고향 얘기 나누고 엄마 얘기 하는 집안내력을 담아 들을 수 있을 때 좋아하지 않는 교인 누가 있을까? 그래서 그의 설교 스타일은 교인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감동으로 묻어나는 메시지이기에 아마도 가장 쉽게 설교하고 감동받는 서민적인 목회자라는 점, 어려운 용어 쓰지 않고 구수한 고향 얘기들을 담아 얘기하면서 가끔 찬양을 하는 그의 노래 실력은 일품이자 양념 중에도 A급 메시지일 것이다.
(계속)
신이건 장로
-
2015-10-12
-
-
[시내산] 불꽃같은 눈으로
-
-
아 가을이다! 누런 금빛 신비로운 색깔이 산과들을 휘덮고 먹음직스럽게 익어 나오는 오곡백과가 온 땅에 충만하다. 여기저기 넘쳐나는 곡식과 과일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풍요롭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에 엄청난 복을 주셨다.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순종한 우리 조상들의 그 믿음보시고 비록 이방민족이지만 이 땅 가난하고 황무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기름진 땅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신실하고 순결한 믿음으로 죄를 멀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이 싫어하는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중동을 방문한 박 대통령께서 이슬람 신도들의 먹거리인 할랄식품을 우리나라에서 공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별 반응 없이 잘된 것이라고 중동에 식품을 팔면 경제적인 효과가 있을 거라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허나 중동지역에서 근무 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슬람 신도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기독교인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슬람신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결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슬람 종교 재판에 의하여 잔혹하고 무참하게 처형을 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손을 번성시켜 장차 온 세계가 이슬람으로 하나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동에 있을 때 쇼핑 나온 남편의 뒤를 따라 몇 명의 여인들이 다니기에 기이해서 알아본 결과 큰 부인과 작은 부인들이었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들어온 순서 서열을 가려 따라다니며 쇼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인이 자녀를 생산 못하는 시기가 오면 둘째, 셋째 부인을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안 되면 타국에서 맞아 온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도들은 많은 자녀를 낳게 되고 결국 그들이 이슬람교도가 되는 것이다. 할랄식품이 공식적으로 중동지역에 수출하게 되면 이슬람교도들은 이 땅에 자연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식품에 대한 품질을 검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이 예배할 처소 곧 이슬람 사원을 건축하게 해 달라 할 것이고 사원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종교 부지를 사들일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땅은 가장 무서운 적 이단을 맞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우리 기독교는 이슬람을 막아내기 위해 기도로 완전무장하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폭로하여 저들의 계획을 무산시켜야 할 것이다. 왕후 에스더가 유대인 신분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 유대인을 몰살시킬 하만의 계교를 담대하게 말하여 그의 민족을 살려낸 역사가 있다. 우리 조상들의 순결한 믿음과 신앙의 절개로 후손들에게 물려준 이 땅! 황무지가 되기 전에 믿음의 형제들이여 홀연히 일어서자! 조금 더 부하게 되는 것 좋아서 제2중동 붐을 일으키자 하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이슬람을 받아 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세계 최악의 빈곤국가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절망만 가득하다고 평가받던 이 땅을 세계10대에 진입하는 경제 대국으로 만들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오늘도 저 높은 하늘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마음과 행동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
2015-10-07
-
-
[이상규 교수] 장기려 박사는 월담(越壁)을 권했는가?
-
-
두말할 것도 없이 장기려 박사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손봉호 교수 같은 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장기려 박사를 꼽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양자로까지 일컬어지던 양덕호 박사를 비롯하여 이건호 박사, 정태산 박사 강현진 박사 등도 장기려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을 추수하는 문도들이다. 안양샘병원의 박상은 원장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장기려 선생의 정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복음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고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성산생명윤리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필자 역시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을 배우고자 그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이나 부산 부용동의 기독교사회관에서 모였던 ‘부산모임’ 말석에 앉아 말씀을 듣고 배운 바 있다. 후에는 부산 초량의 YMCA 건물에서 모이던 ‘종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휠체어에 앉아계시던 장박사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인물을 존경하고 흠모하다 보면 사실과 다른 전설이 유포되기도 한다. 정도 이상의 경외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되어 왜곡되거나 과장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흔히 나타나는데 중세시대 성인전(聖人傳)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경향의 역사편찬을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라고 말한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칼라일의 의도와 관계없이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 숭배 혹은 절대화를 자극했다. 장기려 박사의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사례를 지적하고자 한다. 장기려 박사의 일화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복음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환자 한사람이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원장 장기려 박사가 “오늘 저녁에 이 담을 넘어 도망가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선의의 월담권면이 처음 언급된 것은 모 출판사가 제작한 장기려 박사에 대한 책에서부터였다. 그 이후 이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재생산 되었다. 그리고 장기려 박사의 주된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 박사의 일이 아니다. 사실은 이러했다. 우측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있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치료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고 재산만 탕진했다. 그러든 중 복음병원으로 와 입원하였고 당시 외과과장 이상기 선생의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가 잘 되어 완치되었으나 퇴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치료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탁한 사정을 안 병실 간호사 김경애씨는 이상기 의사의 조수이자 외과 수련의였던 박영훈 의사에게 말했다. “치료비를 낼 형편은 못되고 밥만 축내고 있으니 차라리 오늘 저녁에 도망가라고 합시다.” 박영훈 의사 생각도 동일했다. 치료비를 받을 형편이 못되니 차라리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합시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박영훈 의사는 환자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면서 “오늘 저녁에 그냥 도망가시오”라고 말했다. 당시는 병원 울타리도 없었고 요즘같은 경비체계도 없었다. 그날 밤은 도망가기 좋은 환경이었다. 인적이 드믄 늦은 시간을 택해 그는 병원을 빠저 나와 당시 거주지였던 경남 산청군 척지리로 돌아갔다. 그가 1934년생인 정명헌이라는 환자였다. 1961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장기려 박사의 일로 각색되어 회자되었고,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난한 환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잃지 않으셨던 장 박사는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분이다.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장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라 하여 장 박사를 더 존경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실(fact)이 어떠한가이다. 팩트를 확인한 이상 그것을 밝혀두는 것이 역사학도의 의무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으로 정의했다. 금년이 장기려 박사 20주기가 된다. 그가 주로 일해 왔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에도 인제대학병원, 부산대학병원 등도 그를 기리고 있고, 그의 이름 석자로 후광을 노리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장기려’에 무심할 수 없을 것이다.
-
2015-10-07
-
-
[시사칼럼] 어느 개혁주의 화가의 일생
-
-
지난 10월 1일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루 전인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을 공동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예트 부세마커(Jet Bussemaker) 문화장관은 현재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이 그림들을 양국 정부가 절반씩 부담해서 1억 6,000만 유로(약 2,120억 원)에 구입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중(公衆)을 위해 미술품을 산다는 사실도 생소하고, 그것도 구매 경쟁에 나섰던 두 나라가 대의(大義)를 위해 국적을 초월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합니다만, 보다 뜻 깊은 의미가 이번 미담(美談)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각기 210×135cm, 210×134cm 크기의 두 작품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부부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이 그려진 1634년은 렘브란트가 정든 고향 레이든(Leiden)을 떠나 암스테르담(Amsterdam)에 정착한 지 4년째면서 그곳에서 만나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사스키아 아위렌부르크(saskia Uylenburg)와 약혼한 지 1년 만에 백년가약을 맺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활도 안정된 렘브란트는 이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33),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1633), 「그리스도의 승천」(1636), 「그리스도의 매장」(1639), 「그리스도의 부활」(1639)-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무렵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레이든 대학에서 가르쳤던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영향으로 예정론을 부정하는 ‘항의파(remonstrant)’가 일어나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습니다. 1618년 도르트레히트(Dortrecht)에서 개혁교회 첫 국제회의가 열렸고, 개혁파들은 아르미니우스 파를 정죄하고 ‘도르트신경(The Canon of Dort)’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1609년부터 종교적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와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부터 1629년까지 대거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화가 렘브란트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1642년, 지금은 렘브란트 불세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야경」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쏟아졌던 혹독한 비판과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이 그를 은둔과 파멸로 내몰았습니다. 1656년 마침내 그는 파산했고, 1668년 9월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 티투스마저 잃은 후, 이듬해인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 운하 끝자락에 위치한 호젠흐라흐트(Rozengracht)라는 마을 작은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할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건강도 남아 있지 않았던 1668년, 렘브란트는 262×206cm의 걸작(傑作)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머리털도 외투도 없이 낡아빠진 옷에 찢어진 신발과 상처투성이의 발바닥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은 차마 얼굴도 보여주지 못한 채 등을 지고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등을 만지며 거의 감긴 눈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노(老) 아버지의 모습이 애틋해 보입니다. 1669년, 렘브란트는 마지막으로 98×79cm의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을 남겼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렘브란트의 하나님』, 안재경, 홍성사, 287에서 인용). 돌아온 탕자처럼, 시므온처럼, 그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긴 지 34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에서 나란히 전시될 솔만스와 코피트의 초상화처럼, 그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천국에서 주를 그리며 서 있겠지요. soli deo gloria!
-
2015-10-07
-
-
[목회자칼럼] 연변기행
-
-
지금 우리에게 중국동북지방은 <연변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번에 다섯 번째로 연변지역을 방문하면서 보다 깊이, 보다 책임감 있게 연변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연변지역을 중심한 중국의 지금 동북지방은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의 출발과 삶의 첫 번째 터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처음 여기서 출발하였다. 고조선의 후예들이 부여, 옥저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져 살다가 고구려가 이들을 통합하면서 나라(국가)다운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남쪽으로는 역시 우리 조상들에 의하여 백제와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그 결과 일컬어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가 열려 아시아동북지역은 우리 한민족에 의하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우면서 세 개의 나라가 700여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다가 AD 660년에 백제가, 668년에 고구려가 <신라>에 의하여 정복되면서 아시아 동북지역의 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게 된 것이다. 우리는 <통일신라>라고 부르고 있지만 고구려가 신라에 의해 정복은 당했으나 실상은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은 신라의 통치권 밖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고구려가 가꾸어 놓았던 저 광활한 송화강, 목단강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던 기름진 땅은 그 때 이후로 우리 한민족의 영역에서 멀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우리 한민족의 영토는 최고조에 달했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안타까운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우리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을 북쪽 국경으로 하는 말 그대로 <한반도 3천리>만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1870년대 말, 함경도 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왕조는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어 조정의 통치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극심한 흉년에다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시달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은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1870년대의 두만강 이북 땅은 청나라의 행정력 또한 제대로 미치지를 않아 거의 방치상태로 버려진 땅이었다. 함경도 지역의 우리 조상들은 고향에서 굶어서 죽느니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변 땅으로 들어가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던 것이다. 드문드문 청나라의 국경 경비대들이 있었으나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청나라 군대의 위협과 천대 멸시를 온 몸으로 감수하면서 방치되고 버려진 그 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토굴과 토담으로 된 움막을 짓고 참으로 비참하기 그지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삶>을 시작하였다. 함께 모여 이웃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면서 황무지를 파헤쳐 씨를 뿌렸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기 저기 자그마한 논밭이 일구어지고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 저 연변 땅은 우리 한반도 남쪽의 기름진 당과 너무나 흡사하게 옥토로 변모 되었다. 나는 이번 방문길에서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맨손으로 피땀 흘려 일구어 가꾸고 넓혀왔던 연변의 논과 밭은 140여년이 지난 지금 아름답고 탐스럽기가 그지없어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다.
-
2015-10-07
-
-
[교회법률상식]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에 대한 소고(2)
-
-
5. 제9장 제4조 4항에 “장로, 집사, 권사 임직”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권사를 임직한단 말인가? 오직 권사는 임시직으로서 취임할 수 있을 뿐이다. 안수하지 않는 직분은 임직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6. 제10장(노회) 제3조(노회 회원의 자격과 권한) 본 항의 내용은 위임목사의 노회와 총회로 만들어 장로회 정치원리에 반하는 독소조항이다. ① 현행 헌법은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70세전 원로목사, 교단 기관목사, 종군목사, 교육목사, 선교사는 모두 정회원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반하여 위원회의 개정안은 위임목사만 정회원으로 하여 총회 총대 피선거권을 위임목사에게만 부여하였다. 따라서 위임목사가 아니면 아무도 총회 총대가 될 수 없게 하여 위임목사의 집단적 독재정치가 되게 하였다. ② 아이러니한 것은 “정년 이전의 원로목사는 결의권, 투표권, 총회 총대권은 있으나 피선거권이 없는 회원이다”라고 했으니 피선거권 없는 원로목사가 어떻게 총회 총대로 피선되어 총대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법리에 맞지 않는 모순이다. ③ “전임목사는 노회 서기까지만 피선거권이 있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된다. ④ “부목사의 회원권은 시무하는 교회의 장로 총대 수를 초과할 수 없고 피선거권이 없다”는 것 역시 법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부목사 10명에 총대장로 4명인 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에 “노회조직은 일정한 지방 안에 목사와 각 당회에서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부목사는 모두 당당한 노회원인데 부목사 10명 중 누가 어떤 방법으로 4명은 회원권이 있게 하고 6명은 박탈한다는 말인가? ⑤ 선교사, 기관목사, 전도목사, 군종목사, 교육목사, 정년 이후의 원로목사, 은퇴목사는 발언권은 있으나 투표권과 피선거권 및 총대권이 없는 회원이다. 이는 민주적 정치(정치 제도 5)인 장로교 정치의 원리와 법리를 망각한 처사이다. ⑥ 노회 상회비를 납부하지 않는 교회의 목사와 총대 장로는 발언권이 있으나 투표권이 없다. 이는 헌법으로서의 품위가 없다. ⑦ 제8조 1항에 “총회 결의로 노회를 분립하게 될 경우, 지교회 공동의회(교인총회) 참석 인원 3분의 2의 이상의 찬성으로 소속 노회를 결정한다”고 한 것은 노회분립의 원칙을 망각한 탁상공론으로서 지역노회를 폐지하겠다함에 다름 아니다. 노회 분립에 어찌 지교회가 소속을 결정한단 말인가?
이상 각항은 위임목사의 집단적 독재정치 제도로서 지교회를 시무하는 전임목사와 부목사의 숫자가 위임목사의 3배 이상이 되는 상황에서 정회원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다. 7. 제12장(총회) 제8조(총회의 직무) 3항에 “총회 현장에서 범죄행위를 하였을 경우 즉결 할 수 있으나, 즉결 처결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총회는 기소위원을 선정하여 총대 목사와 총대 장로의 원심치리회로 고소할 수 있다”고 한 초안은 즉결처단이 무엇인지 기본 상식도 없는 자의 발상이다. (헌법 개정위원들은 총회 현장에서 범죄 한 행위 중에 “즉결 처결할 수 있는 경우”와 “즉결 처결 사건이 아닌 경우”를 구별해 보라!) 즉결처단(권징 제48조)은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행정치리회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이 아니라 권징치리회인 재판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을 재판관이 직접 목격한 범죄 사건에 한하여 기소, 증인, 증거, 심문 등의 재판 절차 없이 목격한 재판관이 재판 석상에서 즉시 판결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회, 노회, 총회와 같은 행정치리회 석상에서 범죄 한 사건은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행정 사무관의 신분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반드시 재판절차에 의하여 재판관 신분으로 처결해야 한다. <결론> 헌법개정위원회가 제시한 헌법 개정안은 한마디로 말해서 뒤죽박죽이다. 단 한 가지만 법리에 맞지 아니 해도 개정안을 그대로 채택할 수는 없는데 이상과 같이 수많은 조항이 모순투성이인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대로 헌법이 개정된다면 이는 결코 장로교 헌법일 수는 없다. 감히 필자는 지난 2015.3.16. 11:00-15:00에 헌법 전문가 초청 간담회 시에 발제자로 초청을 받으면서 간담회를 주관하는 헌법개정위원회 측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제출했던, 헌법 개정초안 정치 편 제1장에서 제23장까지의 전반적인 개정안을 다시 제시하면서 참고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
2015-10-07
-
-
[성경인물탐구] 약한 인간 베드로(3)
-
-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급한 성격과 인간적인 연약성 때문에 실수를 여러 번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무력으로 대항하려 하였고,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의 은혜로 훌륭한 복음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팔려 잡히실 때에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들은 병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스승을 위하여 칼을 뽑는 베드로의 모습은 충성스런 제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주의 뜻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의 베드로의 반응과 일맥 상통합니다. 베드로는 그때에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하였다가 예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과 행위는 예수께 대한 충성과 같이 보였지만, 이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데서 나온 실책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결국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잡히실 것과 그때에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는 차라리 예수와 함께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짐이 헛된 것이었음이 그 날 밤에 증명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가 체포된 상태에서 정죄 받아 형벌을 받게 되면 예수를 좇던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를 시인하지 못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을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깝게 여길 때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을 좇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육신의 생명은 빼앗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이로써 그 동안 장담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의 충성심은 허구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를 부인했을 때 닭이 곧 울었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는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심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 통곡은 회개의 통곡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졌던 자만심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얼마나 약하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베드로에게는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실족하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성도에게 자만심을 불어 넣음으로써 자멸하게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신앙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2015-10-07
-
-
[성공칼럼] 모독하지 않기
-
-
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지위와 권위를 악하게 사용하여 그 본질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나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진리를 알고 있는 지도자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진리를 듣고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말에 감동받아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을 드린다. 그런데 그 지도자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헌금을 사리사욕에 사용하고 온갖 추악한 일을 한 것이 드러났다 하자. 그러면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화가 나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된다면 이 때 그 지도자는 진리를 모독한 것이 되며 진리의 본질인 사랑이나 선을 모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를 성추행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갖고 있다. 학생은 배움을 위해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른다. 이런 자신의 제자에게 성욕을 품고 성추행을 하면 이 아이는 평생 큰 상처를 입어 모멸감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선생님’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것이며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나중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마음에 높은 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선생은 선생님을 모독한 것이다. 거룩하고 선한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직함대로 살지 않으면 그 직함을 모독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교단체나 비영리 단체가 건립될 때 수많은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이 지어지고 운영이 된다. 그 단체를 위해 기부한 사람들은 그 단체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물질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 단체가 악한 일이나 사리사욕을 취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을 내어놓겠는가? 그러므로 그 단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잘 행하라고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가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뜻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의 마음에 ‘내가 기부한 후회 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면 그 단체는 사랑을, 그 분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단체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가장 진실하며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리와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도리어 거짓과 악을 행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은 거짓말을 하고 악을 저질러서 지탄을 받을지언정 하나님을 모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갖고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면서 온갖 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권위를 갖고 있으며 누구나 바리새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목사이면서 목사로서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가? 혹은 내가 부모이면서 부모의 옳은 삶을 살고 있는가? 또는 내가 선생이면서 선생으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본질 즉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
2015-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