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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합 연금재단 사태, 결국 수급자들만 신용불량자 위기
    예장통합 연금재단 사태의 파장이 커지면서 결국 은퇴 목회자들이 피해를 겪게 됐다. 지난 100회 총회에서 연금재단의 기존 이사 전원을 해임하고 새 이사진을 구성했다. 기금 위탁운영을 결의하는 등 연금재단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해임된 김정서 전 이사장은 연금재단 이사회의 이사 선임 권한은 이사회에 있다면서 총회 결의가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상황이다. 총회연금재단 정상화를 위한 대책위원회는 기자회견에서 전 이사장이 인감 변경 신청과 주거래 은행의 비밀번호를 임의로 바꿔 10월분 연금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연금재단 사무실은 전 이사장 측에서 용역을 동원하면서 신 이사회와 연금 가입자들의 출입을 막고 있어 신 이사회와 재단 직원들은 임시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김정서 전 이사장 측은 사무국장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몰래 빼돌려 전산기능의 마비로 연금지급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신 이사회 책임으로 떠넘겼다. 그러나 김 전 이사장 측은 정족수 미달로 이사회를 열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의 피해는 오롯이 은퇴 목회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상당수 목회자들의 연금이 100만 원 미만으로 알려져, 은퇴 목회자들의 생계가 파탄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다음 달 연금지급도 불투명한 상태다. 은퇴 목회자들의 절규가 허공에 흩어지고 있다. 노후대책으로 수십 년 연금을 불입한 가입자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더이상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예장통합 제100회 총회는 화해 총회다. 공권력 투입이 해결의 실마리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화해를 거부하는 것은 해결이 될 수 없다. 구 이사회는 이제 내려놓아야 할 때다. 신 이사회도 조속히 수습에 들어가 수급자들이 더 이상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은퇴 목회자들을 생계형 신용불량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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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10-22
  • 마찰음이 들리는 부기총 임원 집행부 이래도 되는가?
    부기총(부산기독교총연합회) 실무 임원회 사무총장 박은수 목사가 6월부터 사임서를 제출해 1달여 남은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집행위원장을 사무총장이 해야하는데도 집행할 책임자가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19일 해운대 모처에서 부기총 실무임원진들이 1박 2일간 수련회를 하면서 가장 핵심되는 트리문화축제 집행위원장이 사임한 문제를 놓고 토론하였다. 임원들은 집행에 차질을 오게 할 수 없다며 집중적으로 의논하다가 대표회장이 박은수 사무총장을 만나 해결하도록 했다. 한편 회계인 김점태 장로도 고신 부산노회 부노회장 직책을 맡아 회계직 사임서를 제출했으나 트리축제 회계는 부회계 김경호 장로가 맡아 수고하기로 하고 김점태 장로는 회계직 사임을 일단 반려됐다. 지금 이성구 대표회장 체제 집행부가 사소한 소통과 신뢰의 부족으로 기우뚱하는 마찰음이 들리고 있다. 앞으로 남은 몇가지 사업에 차질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반 임원들의 의견이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 금년 새 집행부 임원회가 출범한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지난 총회에서 목사 상임회장과 장로 상임회장 동수로 뽑아 임시총회에서 인준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목사 상임회장들 세사람은 뽑았으나 차기 상임회장은 누가 되는지는 아직 미지수고 또 그들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한달 후 가장 큰 행사의 하나인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를 집행할 사무총장인 박은수 목사가 대표회장과의 소통부재로 사임을 했다. 사무총장이 할 일을 대표회장이 월권한 문제의 소지를 놓고, 서로 만나 소통하여 대화하면 될 것을 몇개월이 지났는데도 가장 소통이 잘 되어야할 핵심 브레인이 대화단절로 만나지 못해 행사에 차질이 빚어질까 실무진들의 고민이 쌓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회계, 회록서기 등이 줄줄이 사임이나 회의에 불참하는 사태는 부기총 임원진에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이 일련의 책임은 대표회장에게 전가 될 수 있는 사안들이다.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하나의 조직의 공동체를 잘 이끌지 못하는 리더는 유능한 지도자라고 볼 수 없다. 서로 대화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면 될 사소한 문제를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를 단절하여 부기총 기능이 반쪽짜리로 전락해 버린다면 차기 총회나 법인이사회에서 책임론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부기총은 부산교계의 대표기관이다.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은 접어두고 부산교계를 바라보며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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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15-10-22
  • 목사, 장로부터 허리끈 조여야
    한국교회가 침체되고 있다고 한다. 교인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교회 재정도 급감하고 있음을 뜻한다. 교회 재정이 어렵다보니 교계 재정 전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교회의 재정적 여파는 노회, 총회, 각 기관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가을노회를 다니다보니 노회마다 예산안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부서를 통폐합해 예산을 줄이고, 각 부서마다 불필요한 지출을 막자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고신 중부산노회에서는 회의비에 지출되는 비용이 많다는 여론에 안용운 목사(온천교회)가 나서 “여기 참석한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께서 동의하신다면 여비(교통비)를 반으로 줄이자”고 말했다. 교회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들부터 허리끈을 조여야 힘든 위기를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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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10-22
  • 오만의 극치를 이룬 법인감사
    지난 9월 고신교단 총회에서 2표차로 법인감사로 당선된 오병욱 목사가 총회 석상에서 인사말로 “겨우 2표차로 감사로 당선된 오병욱 목사입니다”라고 서두를 꺼내자 총대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 오만의 극치를 보인다며 여기저기에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10월 15일 법인 고려학원 재단이사회에서도 감사 인준 투표에서 5:4로 부결되면서 법인감사를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법인이사회에서 인준을 해야 교육부와 등기부에 등재되고, 활동할 수 있는 현 정관에 의해 법인이사회에서의 부결은 곧 인준 거부로 비춰졌다. 아마도 차일피일 미뤄 내년 총회 전에 재론해서 다시 감사 인준 승인을 한다고 해도 1년은 못하고 반쪽짜리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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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10-22
  • 행사 좀 짧게..
    손양원 목사 기념관 개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군수, 국회의원, 시도의원 등 다양한 사람들과 교계안에서도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참석한 사람들은 기념사업회에서 이날 행사를 잘 준비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옥의 티는 행사시간이 너무 길었다는 점. 야외행사라는 점을 감안했으면 이날 개관식이 너무 길었다는 느낌이었다. 1부 예배, 2부 개관식 3부 오페라 갈라 콘서트만 진행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중간에 명예졸업장 수여식, 기념식수 등이 있었고, 개관식에서도 묵상의 벽 제막식과 커팅식 등이 나눠 참석자들이 지루했다는 지적이다. 다행히 초반 뜨겁던 햇빛도 구름에 가려 졌고, 사이 사이에 특송과 축가가 있어 좋았다는 반응이 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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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야의 소리
    2015-10-2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생각할수록 위대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없었으면 건국이 어려웠고 좌우합작했으면 적화됐을지 몰라 해방 직후 국민의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미국마저도 좌우합작으로 정부를 수립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사코 반대하고 끝내 단독정부 대한민국을 수립하였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를 휩쓴 사상은 좌우합작 사상이었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 대항해 이기기 위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명분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는 진리인 것 같았다. 그러한 민족대단결주의의 명분은 해방 후 우리 한반도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북쪽이든 남쪽이든 좌파든 우파든 모두가 손잡고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다른 의견을 달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의 대명분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었다. 원래 우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온건하다.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하다. 반면에 좌파성향의 사람들은 대체로 단결력이 강하고 투쟁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파가 좌파와 손을 잡으면 우파가 좌파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좌우합작의 연합정부를 세웠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같은 동유럽국가들이 모두 공산화된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이른바 국공합작을 했다가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던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같은 좌우합작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다. 그 위험성을 밝히 알고 있는 지도자는 이승만이 유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하지만 당시 미국도 좌우합작을 받아들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주의적인 태도는 단호했다. 이유는 조직력이 강한 좌파와 손을 잡으면 공산화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국내외적으로 온갖 역경을 딛고 악조건과 싸워 종내 한국문제를 UN으로 가져가게하여 UN이 1948년 5월 10일 한국 사상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1948년 7월 20일 이승만은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가졌다. 그랬으나 가을에 열리는 UN총회에서 승인받는 것이 문제였다. 반대표를 던질 위험성이 있는 나라가 적지 않았다. 이승만은 국가 승인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개인을 상대로 호소했다. 노력이 헛되지 않아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에 승인되었다 이승만, 생각해 볼수록 위대하지 않은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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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5-10-22
  • [내가 만난 교계 인물1]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척박하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 330-30번지. 허연 벌판 같은 버스 종점지점 근처에 교회 개척을 시작한 지 35년 만에 대박을 터트린 이름대로 된 명성교회. 교인 재적12만 명, 평균 주일 출석 5~6만명. 새로 건축한 교회 내 한번에 수용 가능한 인구는 1만5천여 명이다. 35년 만에 이런 경이적인 메가 처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팩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김삼환 목사를 단독면담이라 할지, 인터뷰라 할지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상관없는 것은 어째든 단독으로 김 목사를 만나 약 30분가량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이런 만남을 주선 한 분은 김삼환 목사의 측근 인사로 알려진 공병의 목사(포항동해큰교회 담임)다. 만남을 주선한 이유도 따로 있었기 때문이지 우연한 계기는 아니다. 2014년 7월 6일자 공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서울 명성교회 당회실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다음날 일찍 KTX를 타고 갔다. 기차에서 공 목사는 내게 “김 목사를 만나 무슨 얘기를 질문 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매우 조심스럽고 부담스런 질문일 것 같아 분위기가 잘못 되면 만나자 말자. 인사만 나누고 일어 설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미리 신문 스크랩 한 장을 복사해 갔다. 당시 복사해 간 신문은 필자가 본지에 쓴 기사였다. 김삼환 목사와 2013년 9월 총회기간인 명성교회 옆에서 아침조찬을 우연히 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때 교회 바로 옆 교인 집 식당이었는데 그 식당은 그야말로 시골 밥상을 연상케 하는 허술하고 10여명이 앉으면 꽉 찰 수 있는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시골에 흔히 보는 시락국 해장국 밥상에 불과한 시골식당 같았다. 몇몇 해외 선교사들과 함께 조찬에 초대 받은 것이다. 그때 김 목사는 주방에 들어가 시락국을 그릇에 담고 있었고 흔히 먹는 공기밥이 아닌 큰 사발 같은 대접에 푸근히 담은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리고 시락국과 김치 무우 대충 반찬은 그린 필드가 전부였다. 시골 노인과 같은 분이 국을 떠서 손님에게 나눠 주는 풍경을 담아 야사 역사의 현장에 글로 담아 놓았던 글을 스크랩해서 보여 주면 좋아 할 것이라고 상상하여 첫 만났을 때 문제의 글을 자기의 사진과 함께 보여 주었다. “아!ᆞ 정말 글을 잘 썼네요.” 수수하고 서민적인 글을 본 순간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이때를 놓치면 대기자가 아니다. 나의 센스를 동원해 찬스를 포착했다. “김 목사님, 최근 교회 안에 일어난 시무장로 투신 자살사건 어찌 된 일입니까?”라고 넌지시 물어봤다. 김 목사는 그런 말 나올 줄 알았든지 “그래요 처음으로 신 장로님과 이번 사건을 얘기하는 겁니다. 아무 인터넷 언론이나 교계신문도 애기 나눈 적 없어요”라고 전제를 하고 해명입장을 서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문제의 P 장로는 저가 가장 신뢰하는 장로이고 부산에 연고가 있는 경상도 인사로 모든 교회 특별 재정을 모두 맡겨 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짜 하루 전날에 자살하고 말았으니 도무지 대화할 틈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고 난 금액은 그렇게 큰 금액이 아니고 자신이 사업하다가 집이며 부동산 소유도 다 은행에 잡혀 있었다는 것도 사고 난 다음 알았다는 것이며, 모 인터넷 언론사 보도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무슨 비자금이 있느니 하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교회시무장로들과 모두 얘기한 후 지출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자면 에티오피아에 병원을 설치하는 비용 등은 교회경상비 예산이 아니고 특별계정 특히 교회 건축하다가 남은 금액일부와 김 목사가 외부에 나가 부흥회 등 강사비로 받은 금액 등을 모아놓은 비용인데 “이 금액도 모두 장로들과 의논해서 지출되는 금액이지 무슨 비자금이 어디 있어요?”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장로를 빨리 만났더라면 안 죽을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쉽다고... 그래서 장례를 직접 김 목사가 가서 다 치러주고 사모권사님과 그의 가족들도 불만 없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됐다. 그러면서 “이런 해명은 신 장로님한테 처음 얘기하는 것이다. 허물없는 사이이고 또 우리 교단 장로이니까 얘기 하는 것이다”며 매우 다정다감하게 얘기를 풀어 나갔다. 나는 다 듣고 난 뒤 헤어져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오는데 어떻게 할까? 글을 써야하나? 안 써야하나? 기자 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뉴스초점에 ‘서울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의 단독인터뷰’(2014년 7월 7일자)를 기사화하고 말았다. 그런데 야단이 났다. 공병의 목사가 전화로 인터넷 기사 내려 달라고 성화였다. 공 목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결국 글은 내렸지만 이미 인쇄된 신문은 나가고 마는 해프닝이 있었다. 나는 이런 비하인드스토리를 쓸라고 한 것이 아니다. 김 목사의 훈훈하고 농촌 서민의 애환을 풍기는 그의 순박한 인간성과 가끔 설교시간에 믿지 않는 전통적인 유교 안동 가문 김 씨 집안의 얘기부터 시골 교회에 있었던 구수한 ‘전설 따라 삼만리 같은 고향 얘기’가 향수같이 묻어나는 그의 설교 메시지는 누구나 농촌 출신인 교인들과 고향 얘기 나누고 엄마 얘기 하는 집안내력을 담아 들을 수 있을 때 좋아하지 않는 교인 누가 있을까? 그래서 그의 설교 스타일은 교인들의 가슴에 스며들고 감동으로 묻어나는 메시지이기에 아마도 가장 쉽게 설교하고 감동받는 서민적인 목회자라는 점, 어려운 용어 쓰지 않고 구수한 고향 얘기들을 담아 얘기하면서 가끔 찬양을 하는 그의 노래 실력은 일품이자 양념 중에도 A급 메시지일 것이다. (계속) 신이건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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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12
  • [시내산] 불꽃같은 눈으로
    아 가을이다! 누런 금빛 신비로운 색깔이 산과들을 휘덮고 먹음직스럽게 익어 나오는 오곡백과가 온 땅에 충만하다. 여기저기 넘쳐나는 곡식과 과일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도 풍요롭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이 땅에 엄청난 복을 주셨다. 순수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순종한 우리 조상들의 그 믿음보시고 비록 이방민족이지만 이 땅 가난하고 황무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기름진 땅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더 신실하고 순결한 믿음으로 죄를 멀리하며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분이 싫어하는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중동을 방문한 박 대통령께서 이슬람 신도들의 먹거리인 할랄식품을 우리나라에서 공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별 반응 없이 잘된 것이라고 중동에 식품을 팔면 경제적인 효과가 있을 거라고 반가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허나 중동지역에서 근무 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슬람 신도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기독교인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슬람신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결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슬람 종교 재판에 의하여 잔혹하고 무참하게 처형을 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손을 번성시켜 장차 온 세계가 이슬람으로 하나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다. 중동에 있을 때 쇼핑 나온 남편의 뒤를 따라 몇 명의 여인들이 다니기에 기이해서 알아본 결과 큰 부인과 작은 부인들이었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들어온 순서 서열을 가려 따라다니며 쇼핑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인이 자녀를 생산 못하는 시기가 오면 둘째, 셋째 부인을 맞아들인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안 되면 타국에서 맞아 온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교도들은 많은 자녀를 낳게 되고 결국 그들이 이슬람교도가 되는 것이다. 할랄식품이 공식적으로 중동지역에 수출하게 되면 이슬람교도들은 이 땅에 자연적으로 살게 될 것이다. 식품에 대한 품질을 검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이 예배할 처소 곧 이슬람 사원을 건축하게 해 달라 할 것이고 사원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종교 부지를 사들일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땅은 가장 무서운 적 이단을 맞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런 사태가 오기 전에 우리 기독교는 이슬람을 막아내기 위해 기도로 완전무장하고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폭로하여 저들의 계획을 무산시켜야 할 것이다. 왕후 에스더가 유대인 신분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나아가 유대인을 몰살시킬 하만의 계교를 담대하게 말하여 그의 민족을 살려낸 역사가 있다. 우리 조상들의 순결한 믿음과 신앙의 절개로 후손들에게 물려준 이 땅! 황무지가 되기 전에 믿음의 형제들이여 홀연히 일어서자! 조금 더 부하게 되는 것 좋아서 제2중동 붐을 일으키자 하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이슬람을 받아 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세계 최악의 빈곤국가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절망만 가득하다고 평가받던 이 땅을 세계10대에 진입하는 경제 대국으로 만들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은 오늘도 저 높은 하늘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마음과 행동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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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이상규 교수] 장기려 박사는 월담(越壁)을 권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장기려 박사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손봉호 교수 같은 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장기려 박사를 꼽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양자로까지 일컬어지던 양덕호 박사를 비롯하여 이건호 박사, 정태산 박사 강현진 박사 등도 장기려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을 추수하는 문도들이다. 안양샘병원의 박상은 원장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장기려 선생의 정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복음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고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성산생명윤리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필자 역시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을 배우고자 그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이나 부산 부용동의 기독교사회관에서 모였던 ‘부산모임’ 말석에 앉아 말씀을 듣고 배운 바 있다. 후에는 부산 초량의 YMCA 건물에서 모이던 ‘종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휠체어에 앉아계시던 장박사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인물을 존경하고 흠모하다 보면 사실과 다른 전설이 유포되기도 한다. 정도 이상의 경외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되어 왜곡되거나 과장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흔히 나타나는데 중세시대 성인전(聖人傳)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경향의 역사편찬을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라고 말한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칼라일의 의도와 관계없이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 숭배 혹은 절대화를 자극했다. 장기려 박사의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사례를 지적하고자 한다. 장기려 박사의 일화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복음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환자 한사람이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원장 장기려 박사가 “오늘 저녁에 이 담을 넘어 도망가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선의의 월담권면이 처음 언급된 것은 모 출판사가 제작한 장기려 박사에 대한 책에서부터였다. 그 이후 이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재생산 되었다. 그리고 장기려 박사의 주된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 박사의 일이 아니다. 사실은 이러했다. 우측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있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치료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고 재산만 탕진했다. 그러든 중 복음병원으로 와 입원하였고 당시 외과과장 이상기 선생의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가 잘 되어 완치되었으나 퇴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치료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탁한 사정을 안 병실 간호사 김경애씨는 이상기 의사의 조수이자 외과 수련의였던 박영훈 의사에게 말했다. “치료비를 낼 형편은 못되고 밥만 축내고 있으니 차라리 오늘 저녁에 도망가라고 합시다.” 박영훈 의사 생각도 동일했다. 치료비를 받을 형편이 못되니 차라리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합시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박영훈 의사는 환자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면서 “오늘 저녁에 그냥 도망가시오”라고 말했다. 당시는 병원 울타리도 없었고 요즘같은 경비체계도 없었다. 그날 밤은 도망가기 좋은 환경이었다. 인적이 드믄 늦은 시간을 택해 그는 병원을 빠저 나와 당시 거주지였던 경남 산청군 척지리로 돌아갔다. 그가 1934년생인 정명헌이라는 환자였다. 1961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장기려 박사의 일로 각색되어 회자되었고,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난한 환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잃지 않으셨던 장 박사는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분이다.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장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라 하여 장 박사를 더 존경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실(fact)이 어떠한가이다. 팩트를 확인한 이상 그것을 밝혀두는 것이 역사학도의 의무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으로 정의했다. 금년이 장기려 박사 20주기가 된다. 그가 주로 일해 왔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에도 인제대학병원, 부산대학병원 등도 그를 기리고 있고, 그의 이름 석자로 후광을 노리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장기려’에 무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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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시사칼럼] 어느 개혁주의 화가의 일생
    지난 10월 1일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루 전인 9월 30일 네덜란드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가 그린 초상화 두 점을 공동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네덜란드의 예트 부세마커(Jet Bussemaker) 문화장관은 현재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이 그림들을 양국 정부가 절반씩 부담해서 1억 6,000만 유로(약 2,120억 원)에 구입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네덜란드 국립박물관에서 순회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나서서 공중(公衆)을 위해 미술품을 산다는 사실도 생소하고, 그것도 구매 경쟁에 나섰던 두 나라가 대의(大義)를 위해 국적을 초월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합니다만, 보다 뜻 깊은 의미가 이번 미담(美談)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각기 210×135cm, 210×134cm 크기의 두 작품은 결혼식을 앞둔 예비 부부 마르텐 솔만스(Maerten Soolmans)와 오프옌 코피트(Oopjen Coppit)의 초상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림이 그려진 1634년은 렘브란트가 정든 고향 레이든(Leiden)을 떠나 암스테르담(Amsterdam)에 정착한 지 4년째면서 그곳에서 만나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 사스키아 아위렌부르크(saskia Uylenburg)와 약혼한 지 1년 만에 백년가약을 맺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생활도 안정된 렘브란트는 이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1633),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리스도」(1633), 「그리스도의 승천」(1636), 「그리스도의 매장」(1639), 「그리스도의 부활」(1639)-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렘브란트가 태어날 무렵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레이든 대학에서 가르쳤던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영향으로 예정론을 부정하는 ‘항의파(remonstrant)’가 일어나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습니다. 1618년 도르트레히트(Dortrecht)에서 개혁교회 첫 국제회의가 열렸고, 개혁파들은 아르미니우스 파를 정죄하고 ‘도르트신경(The Canon of Dort)’를 채택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과정에서 1609년부터 종교적 핍박을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해 와 있던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부터 1629년까지 대거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화가 렘브란트는 종교개혁 이후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과 장소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1642년, 지금은 렘브란트 불세출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야경」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쏟아졌던 혹독한 비판과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이 그를 은둔과 파멸로 내몰았습니다. 1656년 마침내 그는 파산했고, 1668년 9월 남아있던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 티투스마저 잃은 후, 이듬해인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 운하 끝자락에 위치한 호젠흐라흐트(Rozengracht)라는 마을 작은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할 때 신앙의 위기가 찾아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재산도 명예도 가족도 건강도 남아 있지 않았던 1668년, 렘브란트는 262×206cm의 걸작(傑作)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머리털도 외투도 없이 낡아빠진 옷에 찢어진 신발과 상처투성이의 발바닥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은 차마 얼굴도 보여주지 못한 채 등을 지고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등을 만지며 거의 감긴 눈으로 측은하게 바라보는 노(老) 아버지의 모습이 애틋해 보입니다. 1669년, 렘브란트는 마지막으로 98×79cm의 「아기 예수를 안은 시므온」을 남겼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렘브란트의 하나님』, 안재경, 홍성사, 287에서 인용). 돌아온 탕자처럼, 시므온처럼, 그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긴 지 345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프랑스에서 네덜란드에서 나란히 전시될 솔만스와 코피트의 초상화처럼, 그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천국에서 주를 그리며 서 있겠지요.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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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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