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7(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시사칼럼]마가(MAGA)와 굴기(崛起)
    최근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 측이 미국 대통령을 위해 ‘마가’라는 글자를 새긴 모자를 선물했다 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사자가 상당히 좋아했다는 후문이 있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이를 위해 ‘마가복음’을 생각하며 준비했을까요? 아니면 21세기 미국을 이끄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과 ‘구글’과 ‘아마존’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그 ‘마가’를 염두에 두었을까요? 둘 다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마가’란 트럼프 대통령이 줄기차게 주창하는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약자입니다. 이 구호 덕분인지 트럼프는 작년 선거에서 예상과 달리 압승을 거두고 미국의 47대 대통령으로 재집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구체적인 방법론들은 동시에 많은 이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습니다. 미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등을 공공연하게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관세부과, 이민 제한과 추방 정책, 외교 네트워크의 축소와 원조 삭감, 각종 국제기구(세계보건기구, 유네스코,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연이은 탈퇴, 기후변화와 관련된 파리협정 이행거부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세계리더십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CAP). ‘굴기’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대국굴기’의 줄임말이라고 하면 이해가 빠를까요? 2006년 11월 한 달 동안 중국중앙방송의 경제채널(CCTV-2)에서 방영된 역사다큐멘터리의 제목입니다만, 중국의 지배자 시진핑(習近平)이 강조해서 더 유명해진 말이니까요. 시진핑은 2012년 11월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면서 당을, 중앙군사위원회를 접수하면서 군권을, 그리고 국가주석에 오르면서 정부를 장악하여 중국의 일인자로 등극합니다. 이 정도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사례는 모택동과 등소평밖에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진핑은 그들과도 다릅니다. 모택동은 ‘초영간미’(超英赶美) 즉 ‘영국을 넘어서고 미국과 겨루겠다’를, 등소평은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칼을 칼집에 감추고 은인자중한다’를 내세웠지만, 시진핑은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주장하면서 공공연하게 G-1의 자리를 놓고 미국과 패권 다툼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성장률이 꺾이고 실업률이 급증하면서 모든 영역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대미경제전쟁의 여파만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연임제한조항마저 없애면서 영구집권을 획책하며 자체적으로도 비판이 끊이지 않는 일인독재정치에 필연적으로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 두 세력이 지난 십여 년을 싸워왔습니다. 결국 지금 세상은 ‘마가굴기전’을 목격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둑에 ‘아생연후에 살타’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야 남의 돌도 죽일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벌써 중국에서는 군부가 시진핑 세력들을 숙청하고 당에서도 원로파와 태자당이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지요? 트럼프도 그가 시행한 일방적인 조치들에 대한 법원과 행정부의 반발은 물론이요 무엇보다도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보복과 후환이 두려워서 말을 하지 못할 뿐이지 두 강대국의 횡포에 질려갑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 지구촌 시민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재앙과 빈발하는 전쟁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중입니다. 이밖에도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 없이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천부인권과 언론의 자유는 포기하거나 양보불가한 소중한 가치들입니다. 그런데도 살벌한 권력의지를 앞세워서 인권을 탄압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패권 다툼이나 하고 있다면 안팎으로 누군들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한 정치평론가가 최근 굵직한 말 하나를 남겼습니다. 한미정상회담의 성과를 비판하기를 그런 모자나 바치면서 아양을 떨고 다 퍼주기 식으로 굴욕적인 모습 아니냐는 사람들을 향해 날린 ‘그럴 정신이 있으면 차라리 트럼프를 비판하라!’는 일갈입니다. 사실 트럼프의 일방주의는 벌써부터 국제법상의 ‘형평과 선’(ex aequo et bono)이라는 선(線)을 넘었습니다. 시진핑의 대국주의도 말할 나위가 없으니, ‘그럴 정신이 있으면 차라리 시진핑을 비판하라!’도 추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짐 콜린스의 표현을 살짝 빌어 두 분에게 감히 당부한다면, 부디 좋은 나라를 거쳐서 위대한 나라를 꿈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도 좋고 굴기도 좋지만, 부디 그것이 ‘마가주의’나 ‘굴기주의’가 되지 않게끔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당하게 그리고 용기있게 비판해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우리 안에도 ‘마가’나 ‘굴기’가 이념처럼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5-09-05
  • [성서연구]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에스겔 40장 1절은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대개 이런 부분은 주의 깊게 읽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40장 1절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남 왕국 유다를 세 번 침략했습니다. 첫 침략은 주전 605년에 있었는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침략은 주전 597년이었는데, 이때 여호야긴 왕이 폐위되어 포로가 되었고, 에스겔도 그때 끌려갔습니다. 마지막 침략은 주전 587년에 있었는데, 이때 예루살렘을 일 년 사 개월이나 포위한 끝에, 주전 586년에 성을 함락했습니다.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지고 불탔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끌려갔고, 이로써 남 왕국 유다는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 해>란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간 주전 597년부터 스물다섯 해가 지난 때를 말하는 것이므로, 주전 572년을 말합니다. 또 이해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주전 586년부터 열넷째 해이기도 합니다. 그 해에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을 환상 중에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놀랍습니다. 에스겔은 하나의 성읍 형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거기 놋 같이 빛는 사람이 있었는데,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란 건축 현장에서 길이를 잴 때 사용하는 측량 도구입니다. 이는 성읍을 재건하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에스겔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본래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채찍으로 사용하셔서 유다를 때리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를 재건하려는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표적 말씀이 칠십 년 후에 포로에서 귀환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칠십 년은 바벨론의 첫 침략이 있었던 주전 605년부터 계산하여 칠십 년이 차는 해를 말합니다. 포로된 유다 백성은 정확히 칠십 년째가 되던 주전 536년에 바사 왕 고레스의 허락을 받아 스룹바벨 총독의 인솔하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에스겔 40장 1절의 때는 포로가 귀환한 주전 536년보다 36년 전이었습니다. 36년이 더 지나야 포로 귀환이 이루어질 터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에게 성읍이 재건될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아직 예루살렘은 무너진 채로 있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포로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준비하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지만, 일하고 계십니다.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 안에서 답답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억하셨고, 이미 바람을 통해 물이 줄어들게 만들고 계셨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일하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의 상황만 보고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시작하셨습니다. 이미 준비하고 계십니다. 조만간 우리 앞에 당신의 일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앞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 때문에 미리 겁을 먹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답답할 때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한민족의 통일도 준비하시는 줄 믿습니다. 캄캄하지만, 태양이 떠오를 시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5-09-05
  • [서임중칼럼]공정이라는 착각, 교회는 자유로운가?
    함규진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하버드대학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를 읽었다. 이 책에서 센델 교수는 공정하다고 믿는 능력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즉 능력주의에 따라 공정이라는 인간 생활의 가장 규범적인 원칙이 변질되었다는 비판인데, ‘진정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의하여 성공이 결정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공정한 기준이 되어버리는데, 바로 그것이 공정에 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겉보기에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들을 심화시키고 자존감의 위기를 초래한다고 경고한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할 경고로 마음에 담게 된 글이다. 교회 지도자 세미나 강사로 섬길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통감(通鑑)의 리더십>이었다. 각론으로 아모스 5:24의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의 주제를 정리하면서 역사를 거울로 보는 혜안(慧眼)과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안(靈眼), 그리고 작은 자들을 존중하는 심안(心眼)으로 성경적 관점의 공정을 강조했다. 오전 강의를 마무리하고 커피 타임에 공정에 대한 탁상공론이 전개되었다. 둘러앉은 대부분의 목사님 장로님들의 공정에 대한 이해는 단어가 의미하는 규범적 이해를 벗어나 상황적 이해로 귀결되었다. 즉 공정도 힘의 균형 윤리로 적용되는 오늘의 현실을 모두가 아파했다. 사전적 공정(公正)은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였다. 대다수의 국민은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이며 국정운영의 근본 가치였다. 그의 공정은 단순한 평등이 아니라 기회·과정·결과의 균형 있는 정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실제 국정 수행의 과정에서는 그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극명하게 드러났고, 이는 이후 정치적 논쟁에 중심이 되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도 국정 수행 핵심 가치를 ‘공정과 상식’이라 명명했다. 즉 공정은 국정철학의 중심축이었다. 문재인 전 정부가 기회의 공정을 강조했다면 윤석열 전 정부는 과정의 공정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내로남불 청산과 정치적 편향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국정운영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나 결과는 규범적 공정이 아닌 상황적 공정으로 빛을 잃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철학 핵심은 정책과 공정의 연결이다. 지방정부에서부터 ‘기본 시리즈’ 정책을 통해 공정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공정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경쟁”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도 경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와 구조를 바꾸는 것에 방점이 있다. 그 핵심 정책은 ‘불법과 편법이 통하지 않는 사회’이지만 실제는 자신의 재판절차를 중단하게 되는 불법과 편법이 관통하는 상황적 공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fairness)은 일반적으로 규칙의 일관된 적용, 차별 없는 대우, 그리고 합리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면 대부분 정치 지도자들의 국정 수행이나 정치철학에서 공정이 빠지지 않지만, 실제는 공정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자신의 정치 정당성 확보의 수단이 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즉 공정이 권력의 언어로 변질되어 사용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비민주적인 행태를 일삼고, 그러면서 그 행태를 공정이라고 정의하는 상황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절대적 기준이 아닌 상대적이며,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바보가 아닌 우리 국민들은 심히 가슴 아파한다. 공정의 규범적 윤리적 가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행보는 자신들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 자신에게는 공정이지만 상대편에는 불공정이 되는 정치적 프레임으로 둔갑하고 있다. 결국 공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4.19와 5.16과, 5.18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고, 제도적 정비와 시민적 합의를 통해 차근차근 구현되어야 할 오늘의 과제가 된다. 은퇴 후 700여 교회를 방문하면서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교회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목회와 경영은 공정한가?”라는 질문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작금의 정치 현장에서 행해지는 공정의 변질처럼 교회의 지도자들마저도 공정과 정의가 자신들의 현실적 정당성 확보의 수단이 되고 교회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결국 규범적으로 접근되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으로 접근되고 그 과정은 힘의 균형 윤리로 결정되는 것이 무섭다. 불의도 이기면 의가 되고, 정의도 지면 불의가 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은 공정과 상식의 틀에서 갈등하고 방황한다. 소위 능력주의자들은 교회가 부흥된 것이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하면서 과정의 불공정이 있었음에도 공정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엄청난 재력가가 많은 헌금을 한다거나, 사회적 신분이 특출한 사람이 영향력을 끼친다거나 하면 그로 인한 다양한 불공정도 공정으로 얼버무려지고 그런 공정에 대한 착각으로 교회 공동체는 갈등과 방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개혁교회 지도자들 역시 정치 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이 공정을 자신들의 교회 정치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이해관계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마이클 샌델’ 교수가 경고한 것처럼 공정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성경은 “정의와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명령한다. 교회는 인간 사회의 공정 개념을 넘어서, 하나님의 성품인 정의(justice)와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 곧 바실레이아(Kingdom of God)로서의 에클레시아(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5-09-05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몸으로 경험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교육을 꿈꾸며⋯
    <땀을 뻘뻘 흘리고 산을 오른 후 시원한 물 한 잔 벌컥벌컥 마시기, 해가 질 무렵 모래를 밟으며 시원한 바닷가의 공기 느끼기,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다 엄마를 발견한 후 와락 안기기, 보조바퀴를 뗀 후 신나게 두 발 자전거로 달리기>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육아 프로그램들을 보면 두 가지를 느낀다. 하나는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구나!’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는 것은 돈이 전부가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할텐데…’라는 생각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화려하게 세팅된 키즈카페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닷가 모래를 만질 때 느껴지는 오묘한 촉감과 약간의 지저분함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이가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부모가 알아서 제공하면 아이는 무엇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까? 세상은 물질만 있으며 뭐든지 다 이룰 수 있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줄기차게 말하지만, 사실 인간이 인간되는 가장 기본적인, 예를 들어 사랑, 자존감, 배려, 충만과 같은 마음의 자양분들은 물질 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그 다른 요소 중 하나는 대체 불가능한 자신만의 경험이다. 9년 전인 2016년에 1년 동안 제주도에 살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막내가 100일 정도 될 무렵이었다(막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고 외출이 가능한 한 달 후부터 여기저기 함께 다녔다). 그 때 나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기’였다. 내가 본 제주도는 발을 딛는 모든 곳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환상적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또 차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면 저기 오름직한 동산이 반기고 있었다. 절물자연휴양림같은 곳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 매일 다른 매력을 뿜어내기에 언제든 가도 새로웠다. 집 안에서 장난감을 갖고는 한 시간 이상 지속적으로 노는 것을 지겨워하는 아이들이 밖에 풀어 놓으면 한 두시간은 물론이고 한 나절 내도록 놀고 또 노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을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밖에 나갔을 때 마음껏 상상하며 어디든 뛸 수 있는 자연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싸한 자연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고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최적의 교육 장소이다. 최근에 오랜만에 바닷가를 찾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직 해가 떠 있는 것을 보며 “오랜만에 아이들과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자”며 온 가족이 갑자기 바다로 간 것이다. 바닷가에 도착 후 처음에는 그 주변을 산책했다. 새롭게 꾸민 구름다리(?) 같은 것도 건너고, 돌도 몇 개 주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아이들이 모래 위를 걷고 싶다고 해 양말을 벗고 본격적으로 바다 곁에서 맴도는 순간 아이들의 숨은 의도가 드러났다. “엄마, 바닷물에 발만 살짝 담그면 안될까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바닷가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은 그 순간 이미 아이들이 바닷물에서 놀고 있으며 결국 옷이 다 젖을 것을 경험적으로 예상해야 한다. ‘그래, 너희들이 여기까지 왔으면서 어찌 그 말이 나오지 않나 싶었다’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아직 날이 추우니 10분 정도, 발만 담그자”라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받아내고 아이들을 물로 보냈다. “오빠, 진짜 시원하지. 우리 안으로 더 들어가자”부터 시작해 “우리 물이 오면 4명이 동시에 뛰는 거 하자”까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장난치고 웃고 떠들며 달이 저 멀리 보이지 않을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그렇게 놀았다. “엄마, 코로나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오늘처럼 매일 밖에 나가서 놀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들은 한결같이 밖에서 또 놀고 싶다며 다음을 기약한다. 그리고 그 날 아이들의 일기장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또 가고 싶다” “바다가 너무 좋다” 등 기분 좋은 단어들로 가득 차있었다. 큰 돈을 들이지 않아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밖에서 놀기’. 나는 앞으로도 상황이 되는 한 이 교육 방법을 추구하며 몸으로 경험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다.
    • 오피니언
    • 다음세대
    • 좌충우돌 크리스천 자녀 양육기
    2025-08-15
  • 선교활동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사망
    울산의 모 교회 성도 30명이 몽골에서 선교활동 후 돌아오는 과정에서 성도 한명이 비행기에서 심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 사망한 A 성도는 지난 12일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이륙한 몽골항공 여객기에서 침을 흘리며 의식을 잃었다. 당시 항공기를 타고 있던 의사 2명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호전되지 못했고, 결국 비행기 착륙 후 급히 이송된 부산 사상구의 한 병원에서 사망 판정을 받았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조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A성도는 비행기 탑승할 때까지만 해도 신체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해당 교회는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름철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는 교회가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5-08-15
  • 다양한 신천지 문화행사 ‘주의’
    이단 신천지가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청년들을 미혹하고 있다. 최근 JTBC는 보도를 통해 “신천지가 청년 포교를 위해 청년 문화공연, 동아리 박람회, 강연 등 2030 세대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행사를 기획 및 진행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지자체 예산 5천만 원 정도가 투입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행사로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 내용은 하나다. 1부 체험 - 2부 강연 - 3부 상담 - 상담 후 지속적 연락을 통해 청년들을 미혹하고 있다. 특히 상담을 가장해 행사 참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고 관계가 쌓이고 안정되면 신천지라고 밝히는 식의 포교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행사로 위장해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만큼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신천지 문화행사는 전국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상담소(소장 탁지일 교수)도 “서면에서 신천지 위장 문화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 있다면 주의와 경계를 부탁드린다”며 “신천지라는 이름을 숨기고 플리마켓, 심리검사, 만들기 체험, 전시 등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신천지 활동에 조심해 달라”는 당부 문자를 교계에 전하기도 했다.
    • 오피니언
    • 기자수첩
    • 광야의 소리
    2025-08-15
  • [황대우 교수]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
    성경은 결혼한 부부의 관계를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성경본문은 아마도 창세기 2장이나 에베소서 5장이다. 요즘처럼 이혼과 비혼이 비정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이 시대에는 교회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설교를 듣기가 쉽지 않고 에베소서 5장은 가부장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에베소서 외에 부부 관계를 묘사하는 특별한 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7장 3-4절이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부부관계를 이 성경구절에 호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위 본문은 분명 그리스도인 부부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가르침이다. 이 말씀에서 “의무”는 “빚”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무를 다하라”는 명령은 “빚을 갚으라”는 의미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사실상 서로에게 빚진 자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에게 진 빚을 평생 갚으며 살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부부의 채무관계는 둘 중 하나가 죽을 때 끝난다. 과연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어떤 “빚”을 졌다는 것일까? 빚에 해당하는 내용을 4절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몸”이다. 그렇다면 부부가 서로에게 “몸”을 빚졌다는 말인가? 바울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 왜냐하면 부부는 둘이지만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때문이다.(창 2:24)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즉 부부관계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한 몸”을 이루는 관계로 본다. 그것은 부부관계의 “한 몸”을 단순히 정신이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 따르면 성경이 가르치는 부부관계의 “한 몸”이란 정신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만 하나가 아니라, 서로의 육체까지도 하나라는 의미다. 그래서 바울은 아내와 남편이 각자 자기 몸을 결코 자신만의 것인 양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여기서 바울은 확실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권리의 동등성보다는 의무의 동등성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가르치는 부부관계란 결코 권리의 상호성이 아닌, 의무의 상호성을 의미한다. 부부관계에서 서로 자신의 권리를 내세우면 다툼과 불화는 불가피하고 이혼의 위기를 안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의무를 고려하면 일어날 갈등도 다툼도 사라진다. 그래서 바울은 부부관계란 의무의 상호성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강조한다. 부부가 되기 전에는 각자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부부가 되면 둘이 한 몸, 즉 하나의 새로운 공동 인격체로 거듭난다. 따라서 남편의 잘못은 곧 아내의 잘못이고 아내의 실수도 남편의 실수다. 함께 권리를 나누고 의무와 책임 역시 함께 져야 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결코 각기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다. 부부는 한 몸, 즉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따라서 남편이 자신만의 권리를 아내에게 주장한다거나 반대로 아내가 자신만의 남편에게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목숨 걸고 아내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아내 역시 비록 남편이 부족할지라도 얕보거나 무시하지 말고 절대 복종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친 남편과 아내의 관계다. 창세기와 에베소서,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친 부부관계는 어떤 상충도 모순도 없다. 부부는 “한 몸”이라는 사실, 그리고 “한 몸”으로 서로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채무관계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예외적인 극단의 경우 외에는 이혼할 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이혼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부부 사이도 성추행이 성립 가능하다’는 해괴망측한 세상 법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 불가능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인 “결혼한 부부의 성경적 관계”를 영적인 의미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거룩’은 단순히 영적인 것에만 해당하는 요구가 아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육체적인 거룩을 매우 강조하다. 간음하지 말라,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등의 명령을 보라.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5-08-15
  • [교회법특강]요한 아 라스코(1499-1560)와 교회법
    교회법의 역사에서 꼭 다루어야 할 인물이 있다. 폴란드 출생의 종교개혁가 요한 아 라스코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아 라스코는 약 20년 동안 북부 유럽의 제네바로 불린 독일의 엠던과 영국 런던, 프랑크푸르트, 마지막에는 폴란드에서 목사로서 활동했다. 특별히 그가 작성한 교회법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의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 라스코는 1499년 폴란드 귀족 집안에서 출생했다. 대주교인 삼촌의 후원으로 이탈리아 등에서 교육을 받았고 1521년에 신부가 되었다. 그러다가 1524년 스위스 바젤에서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여러 종교개혁가를 만나면서 회심하고,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찾아 고향 폴란드를 떠나게 된다(1538년).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독일 북서 지방의 도시 엠덴에서 첫 사역(1540-1550)을 했다. 둘째 사역(1550-1553)은 영국 런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런던은 유럽 대륙에 일어난 종교박해로 인해 피난민들이 많이 모였다. 영국 국왕이 피난민 교회설립을 허락하고 장소도 제공했다. 바로 이 피난민 교회들(네덜란드어, 불어 등의 교회)의 감독으로 아 라스코가 봉사하게 되었다. 여기서 교회법을 작성하여 시행한다(출판은 1555년). 아 라스코가 작성하여 시행한 교회법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4대 공적 사역인, 설교, 성례 시행, 구제, 권징을 공적으로 신실하게 시행했다. 이를 위해 로마천주교회의 교직제도와 달리 목사와 장로와 집사, 감독 직분을 제시했다. 직분을 교회에 항존(恒存)하는 기능을 따라서 구분하고, 직분자는 고유한 의무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했다. 매달 첫 월요일에 모이는 모든 직분자 모임인 제직회를 신설했다. 둘째, 교인이 직분자 선출과 권징(특히 출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했다. 아 라스코의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 선출에서 교인의 참여가 가장 극대화된 교회였다. 교회 앞에 선출 광고를 하고 직분의 의무와 자격에 대해 설교를 들은 후 교인들은 한 주간 동안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었고, 선출 당일에 치리회가 그 후보 중에서 2배수를 선정하면 교인들이 그들 중에서 직접 선출할 뿐 아니라, 심지어 후보가 아닌 사람도 선출할 수 있었다. 또 어떤 교인을 출교할 시에는 반드시 회중의 동의를 구하도록 했다. 셋째, 정부와 상관없는 장로들의 회인 독자적인 치리회를 도입해서 권징이 나타나도록 했다. 성도의 삶을 살피고 위로와 격려, 권면하는 일을 했다. 권징은 사적으로 공적으로 권면의 절차를 거치게 했고, 출교와 해벌 시 공적 예식문을 사용했다. 이는 교리의 순수성과 성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치리회 회원은 3개월마다 형제로서 서로 권면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다. 또 교회를 시찰하는 활동도 했다. 매주 월요일 목사들의 모임에서 목사 후보생 시험과 특정 주제로 세미나도 가졌다. 이 모임은 나중에 노회로 발전한다. 넷째, 특히 교회의 공적 사역인 말씀을 강조했다. 설교 외에 교리문답을 작성하여 가르칠 뿐 아니라, 특히 매주 하루(화요일 혹은 목요일) 온 교인이 회집하여 소위 ‘예언’이라 불리는 설교 토론을 하였다. 지난주일 설교를 두고 질의와 응답, 토의하는 시간이었다. 이는 교리에서 오해를 바로잡고 극단주의자를 물리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다섯째, 공적 예식을 강조하여 일치와 교육의 효과를 이루었다. 혼인은 주일예배 일부로서 교회를 세우는 중요한 일이었다. 장례는 시신을 교회당으로 옮긴 후 공적 예식을 거행했다. 죽음에 대해 교훈하고 권면했고, 축도와 헌금으로 마쳤다. 환자 심방도 예식문을 사용하여 위로할 뿐 아니라 교훈을 주는 계기로 삼았다. 여섯째, 성경적인 성찬을 시행했다. 당시 무릎 꿇고 받는 성찬에서 식탁으로 나와 둘러앉아서 함께 받는 성찬의 방식으로 개혁했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법특강
    2025-08-15
  • [목회자칼럼]제발 좀 쉬었다 합시다
    생명의 기원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창조론을 믿는다. 믿음의 시작은 창조론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야만 성경의 모든 것이 해석이 된다. 우리가 믿는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따라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솜씨다. 따라서 천지만물과 사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쉬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쉬셨다. 능력이 부족하시거나 피곤하시거나 게을러서 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쉼의 시간이 가장 필요한 인간을 위해 먼저 쉬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루는 반드시 쉬라고 법을 제정하시고 명령하시고 자연의 법칙과 질서까지도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니까 피조물인 사람이 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고, 자연의 질서와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법을 지키고, 명령에 순종하고, 질서를 따를 때 가장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런데 문제는 피조물인 일반 사람들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이토록 아름다운 하나님의 법칙과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두가 다 생사를 걸고 일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좀 편히 살만하면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을 병원비로 다 사용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간절하게 소망하는 것은 제발 죽음의 질병과 마지막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좀 쉬라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모든 곳에 쉼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낮에 일하면 밥에는 잠을 자야 한다. 1시간을 공부하면 10분은 쉬어야 한다. 음악에서의 쉼표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경기하는 선수들에게도 하프타임이 있다. 직장인들에게 정말 소중한 것은 휴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숨을 쉬는 것 즉 호흡하는 것이다. 호흡하지 않으면 죽는다. “숨을 쉰다.”에서 ‘숨’과 ‘쉰다’는 것을 합하여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면 ‘쉼’이다. 다시 말하면 쉬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호흡에도 들숨이 날숨이 있다. 살기 위해 호흡하는 중간 중간에도 쉬는 것이다. 해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려면 호흡을 들이키고 참아야 한다. 여기에서 참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호흡이 필요할 때 물 밖으로 고개를 내 밀고 숨을 쉬는 것이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숨을 쉬는 쉼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다. 따라서 쉬지 않는 것은 탐욕이고 교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쉬어야 한다. 목회자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얼마나 많이 설교를 했을까? 그런데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목회자로서 많은 목회자들을 만나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설교를 하는 목회자 자신은 전혀 쉬지 못하는 경우를 정말 많이 보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역과 스트레스에 지쳐 번 아웃되는 목회자들, 원치 않는 문제들로 인해 목회의 현장을 떠나는 목회자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너무나 일상적인 일들로 말미암아 강제로 목회의 현장에서 하차하는 목회자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사라지는 목회자들을 본다. 간절하게 소망한다.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이끄는 무거운 짐을 제발 좀 내려놓고 살기 위해서 숨을 쉬자. 쉼의 시간을 가지자. 왜 사명 대신에 짐을 지려고 하는가. 짐은 결과지상이요 사명은 과정지향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명의 과정에서 감당하는 받은 달란트 만큼의 최선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5-08-15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6.25 전쟁의 기적: 기적으로 살아남은 대한민국(4)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남한지역의 북한군은 독안의 쥐가 되었다. 퇴각하는 인민군은 오합지졸이 되었고, 이때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손양원 목사도 이때 순교자가 된다. 인민군들은 7월 27일 여수로 들어왔고, 손양원 목사는 9월 13일 수요일 인민군들에게 잡혔다.그날 설교할 설교원고까지 썼으나 그날 설교할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이라는 설교는 선포하지 못한 설교문으로 남아있다. 두 주간 동안 고초를 당하신 그는 9월 28일 여수에서 순천으로 가는 미평의 과수원에서 총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들이 고립되고 보급로가 차단되자 양민을 학살하고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에서의 전면 공격을 통한 총반격에 비해 전투기간을 3분지1로 단축하고, 아군 14만 명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이 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9월 27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것이다. 9월 28일에는 서울 수복을 기념하는 환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5천분의 1의 성공률을 성취한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군 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세기의 도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우연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55년간의 군생활 중에서 6.25동란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다고 술회했다. 여섯째, 흥남 탈출은 기적이었고 기적의 항해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국군과 유엔군은 그해 10월 1일에는 동부에서, 10월 9일에는 서부에서 38선을 넘어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 평양을 함락하고,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11월 21일에는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정리하면, 동해안으로는 청진(淸津)까지, 중부 전선에서는 혜산진(惠山鎭)의 압록강까지 진격하였고, 서부에서는 선천(宣川)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10월 19일 중공군이 개입하여 10월 25일 총공세가 개시되자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함경도 개마고원 부근의 장전호에서 고립된 유엔군은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후퇴한다.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 주민들은 피난을 서둘러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바람찬 흥남부두’에는 짐 보따리와 가족, 어린아이들을 등에 업는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인산인해였다. 이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 흥남철수 작전인데, 이 작전 지휘관이 제10군단장 알먼드(Edward Almond) 소장이었다. 1950년 12월 11-24일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약10만5천 명의 군병력과 피난민 10만 명, 전투장비와 군수물자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작전이었다. 흥남에서 마지막으로 북한 피난민을 싣고 나온 배가 미국 국적의 길이 196m, 폭 20m에 불과한 7천 6백톤급 민간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였습니다. 미군 대령이 이 배의 선장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에게 이 화물선에 태울 수 있는 여유 정원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12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배에 1만4천 명이 탑승했다. 아기와 어린아이가 4천 명이었고 부상자는 17명이었다. 12월 22일 밤 9시 30분부터 승선하기 시작하여 23일 낮 11시 10분에 승선이 완료되어 승선시간이 13시간 40분이었다. 이보다 더한 콩나물시루는 없었을 것이다. 라루 선장은 이 광경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연옥 같았다”라고 썼다. 23일 오후 흥남부두를 출발했는데, 중공군 보병부대가 6km앞까지 진출했을 때였다. 적군이 설치한 4천 개의 기뢰를 피해 영하 20-40도를 넘나드는 혹한과 폭설을 견디며 24일 낮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산에는 이미 피난민의 도시로 변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다시 거제도로 향했다. 기적의 항해였다. 의사도 약도 없었고 음식도 없어 먹지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고 추위에 굶주리고 화장실조차 이용하기 어려웠으나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3일간 800km를 항해하여 거제도 장승포항에 입항했다. 항해 중 다섯 아이가 태어났다. 피난민들이 완전히 하선한 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항해 중 5명 탄생, 사망자 없음. 14,005명 무사히 상륙.”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이 배에는 상당수의 기독교신자들이 탐승했고 교회 단위로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사례가 후일 ‘순장로교회’를 형성한 함경남도 함주 덕천교회 이계실(李桂實, 1889-1971) 목사를 주축으로 5개 처 교회 성도 130여 명이었다. 이들은 거제도에서 같이 생활하던 중 서울에 안착하였고 순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된다. 함흥을 탈출한 이들은 공산주의의 핍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이들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해상탈출은 제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해상탈출이자 지고한 인도주의 정신이 가져온 기적이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5-08-15
비밀번호 :